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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5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기회를 리셋하시는 은혜. 機会をリセットされる恵み。
본문 히브리서 8:1~6
히 8:1 지금 말한 것들의 요점은 이러합니다. 곧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대제사장이 한 분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서 지엄하신 분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2 그는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시는 분입니다. 이 장막은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3 모든 대제사장은 예물과 제사를 드리는 일을 맡게 하려고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제사장도 무엇인가 드릴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4 그런데 그가 땅에 계신다고 하면, 제사장이 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땅에서는 율법을 따라 이미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땅에 있는 성전에서 섬깁니다. 모세가 장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너는 명심하여 내가 산에서 네게 보여준 그 모형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6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그가 더 좋은 약속을 바탕으로 하여 세운 더 좋은 언약의 중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1. 今述べていることの要点は、わたしたちにはこのような大祭司が与えられていて、天におられる大いなる方の玉座の右の座に着き、2. 人間ではなく主がお建てになった聖所また真の幕屋で、仕え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3. すべて大祭司は、供え物といけにえとを献げるために、任命されています。それで、この方も、何か献げる物を持ってお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4. もし、地上におられるのだとすれば、律法に従って供え物を献げる祭司たちが現にいる以上、この方は決して祭司ではありえなかったでしょう。5. この祭司たちは、天にあるものの写しであり影であるものに仕えており、そのことは、モーセが幕屋を建てようとしたときに、お告げを受けたとおりです。神は、「見よ、山で示された型どおりに、すべてのものを作れ」と言われたのです。6. しかし、今、わたしたちの大祭司は、それよりはるかに優れた務めを得ておられます。更にまさった約束に基づいて制定された、更にまさった契約の仲介者になられたからです。
지난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능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불같이 임할 때 모든 문제도 사라지고, 우리를 더럽히는 모든 악한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와 어려움과 두려움, 그리고 불의와 부조리가 나의 영혼과 삶을 공격할 때 가장 먼저 성령의 불이 내리시길 구하고, 성령의 능력이 임하시길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수단들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지지난 주일에 이어서 다시 히브리서 내용으로 함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7장의 내용을 단 한 마디로 정리하면 육신의 제사장이 가진 한계를 초월한 능력의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1절은 그러한 제사장, 즉 하나님께서 친히, 직접 세우신...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제사장이 지금 우리에게 허락되었다고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 영혼의 구원과 인생을 형통케 하는 축복을 위해 열린 길은 단 한 가지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참되고 강력한 능력의 일상을 허락하시고, 충만하게 채워 주심을 믿습니다.
본문의 3-4절을 보시면 이 땅에서 섬기는 제사장의 직무와 역할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는데요. 제물과 예물을 드림으로 속죄의 은혜를 대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사는 육신의 제사장들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삶을 위해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이 땅에서 사람은 할 수 없으며, 또한 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영역에 대한 증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역할에 대한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저런 활동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시도들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보다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다보니 결국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영역까지 자신들의 좌우하려는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을 보시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며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하게 위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탑을 쌓으려 하다가 실패한다는 증언이 있는데요. 이른바 바벨탑 사건이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4)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하고, 보다 멋진 미래를 꿈꾸며 도시와 탑을 세웠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인류는 계속해서 욕심을 채우고, 또 채우려는 욕망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질주를 막고 그들을 겸손한 존재로 관리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창 11:8)
이 피조물의 세상과 인류의 시작, 그리고 영혼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는 성경이 창세기입니다. 타락한 모든 인류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는데, 그 첫 단추로 이스라엘이라는 작고 연약한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것이 창세기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창세기의 마지막은 선민 이스라엘, 즉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정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요.
그 후로 이스라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와 율법을 통해 그 구원의 프로젝트는 임시적으로 명맥을 유지합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더욱 명확하게 구체화됩니다.
더 이상 반복되는 임시적으로 허락한 속죄제사를 지킬 의무가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실제로 원하시는 것은 수많은 제물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관계회복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1)
이사야 선지자 이전에 이미 사무엘이 사울에게 책망하는 글에서 성경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실력이나, 혹은 열심과 열정으로는 아무 것도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포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자부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과 멀어져, 결국 하나님과 끊어지는 가장 빠른 유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헤아려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며,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신감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기 원하시는 것인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순종의 마음을 간구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원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기를 원하시는 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의 마음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무엇을 하든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지를 기도하고, 구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겸손하게 구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것에 더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삶을 리셋하시는 은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때 리셋하고, 다시 시작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잘못된 선택으로 그릇된 방향으로 가게 되었을 때, 오류를 발견한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더라도 잘못된 선택을 돌이키지 않고, 리셋해야 할 경고를 무시한 뒤에 발생한 참사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대형참사들이 그런 사소한 경고를 무시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역사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우리의 삶을 리셋하시는 은혜와 사랑을 매우 적나라하게 나타내 주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4절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는 제사장이 되지 못하셨다는 표현이 있는데요. 이는 엄밀하게 표현하면, 제사장이 되실 필요가 없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축의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삼으신 하늘에 있는 참된 장막을 섬기시는 영원한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로는 설명하기는 것이 어렵고 복잡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을 다시 선물하시기 위해서 영원토록 은혜와 사랑과 기회가 넘쳐 흐르는 마르지 않은 샘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성소와 지성소를 섬기기 위한 제물로 자기 스스로를 바치셨습니다. 그 은혜로 인해 우리는 매일의 일상이라는 새로운 삶을 영생을 사는 기회로 선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게 생각나게 하시고, 발견하게 하신 이 약속과 지식을 여러분도 꼭 기억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이제 매일 새롭게 리셋되고 허락되고 채워지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일으켜 주시기 위해서 매일 부활을 경험하게 하시지요. 잠언은 기록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잠 24:16)
여기서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고백은 일곱 번째 까지만 유효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곱’이라는 완전한 숫자를 비유로 한 것이지요. 우리가 보기엔 완전하게 실패헸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리셋하고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기회를 얻습니까? 의인입니다.
그런데 율법적으로는 의인이 없습니다. 제사장도 스스로 먼저 깨끗하게 하고 난 뒤에 임시방편으로 속죄를 흉내 낼 수 있었지요. 사람의 속죄는 유효기간이 있어서 온전하지 않다고 이미 말씀을 들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은혜의 믿음에 속한 성도(그리스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 주십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바울이 고백하는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의인의 행위를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연결되어 예수님의 의로움이 흘러 들어가 존재의 가치가 바뀐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결된 가지들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저와 여러분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고, 의인의 삶과 행실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매일 허락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매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기회를 채우시고 리셋하여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요. 이 때의 사랑은 감정의 사랑이나 호감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채워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왜 그런 기회를 주시는지 우리는 솔직히 알 수 없습니다. 욕심꾸러기 인간, 타락한 인간은 자기의 쾌락과 이로움과 탐욕을 채워주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의인으로 세우시고, 매일 의인으로 살 기회를 다시 주시고, 혹시 넘어져도 일으켜 세우시는 사랑입니다.
몇 년 전에 로봇다리 수영선수라는 별명을 가진 김세진이라는 청년의 예화가 떠오릅니다. 선천적으로 두 다리와 한 쪽 팔이 없이 태어나 친모로부터 버려진 아기가 있었습니다. 그 아기를 입양하여 키우는 어머니는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 가기 전에 집에서 조금은 잔인한 연습을 시키는데요. 바로 두 다리에 의족을 하고 서 있는 아이를 이불 위로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넘어뜨릴 때마다 서럽게 웁니다. 그리고 잘못했다고 빕니다. 그러나 엄마는 빌지 말라고 하며 다시 엄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어서 일어나.. 네 스스로 일어나… 그렇게 아이는 울면서 겨우 겨우 벽을 잡고, 의자를 잡고, 어떻게든 일어납니다. 그러면 엄마는 다시 그 아이를 이불 위로 넘어뜨립니다. 자칫 이 장면만을 보면 장애아동을 학대하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큐 동영상을 찍고 있는 감독이 엄마에게 인터뷰를 합니다. 왜 그렇게 모질고 험하게 다루는지요. 학대처럼 보인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의 애쓰는 모습을 울면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이가 이제 스스로 학교에 가서 혼자 지낼 일도 많을 텐데, 그 때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혼자서 일어나지 않으면 더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을 합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남의 도움만을 받고 살기를 바라는 것은 진짜 부모가 할 태도가 아니라고 울면서 말 하지요.
그 아이는 후에 의족을 벗고도 물 안에서 자유롭게 수영을 하는 장애인국가대표 수영선수가 되어서 장애인올림픽에 나가 3관왕을 차지하는 감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그의 삶을 통해 단지 메달을 딴 인간승리의 극단적인 예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떤 악조건에서도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신 다시 일어날 기회에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 하면서라도 순종하는 이에게 허락하시는 면류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을 교리적인 지식으로 이해해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지식을 많이 기억한다고 나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거나, 나의 감정이 정돈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내 믿음이 강철같이 강력해지는 것도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와 여러분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스스로를 제물로 드리신 사랑의 진리가 우리에게 임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회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때로 넘어뜨리시는 것 같지만, 실은 다시 일어날 기회에 순종할 능력으로 채우시는 과정임을 믿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물로 드려지셨음을 증언하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유효기간과 한계가 없으신 그 사랑이 지금도 나를 이끌어 가고 계심을 잊지 않고 다시 리셋하실 때 기쁨과 감사로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맡기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좋은 일에 대한 기회도 혹은 달갑지 않은 기회도 우리에게 맡겨 주십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통해 우리는 완벽히 거룩해지는 성화의 단계를 향해 하루에 하루만큼 주님 앞에 삶을 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속죄의 제물로 삼아 영생의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복음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삼아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제 일상에서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가장 좋은 결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형편과 여건이라도 주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믿고 찬양하며, 예수님의 시선을 실감나게 체험하며 주님과 행복하게 동행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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