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06] [연재] 삼류무사-78 첨부파일 :
별리(別離)
이른 아침을 먹고 복룡표국을 찾은 장추삼이 그의 관물대에서 짐이랄것도
없는 간단한 물품들을 뺄 때 까지도 실회조원들은 그가 관두는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며칠전의 일이 괜히 미안했는지 단사민이 삐적삐적 다가와서
신소리를 해도 그냥 어울리지 않는 미소로 응대하고 적당히 시간을
죽이다가 퇴근시간에 맞춰 표국문을 나서는데 갈동이 급히 불렀다.
"장형, 장형!"
' ? '
아마도 실회조 대기전까지 갔다왔으리라. 표국내에선 신법을 전개하지않는
원칙도 무시하고 헐레벌떡 날아온 갈동은 장추삼 앞에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만나지 못했더라면 집까지 갈뻔 했소이다. 어쨌든 다행이오."
"털보당주가 또 무슨 꼬투리라도 잡은거요? 퇴근시간 맞췄는데."
갈동이 집법당 소속이다보니 입싼 철무응이 생각나서 툴툴거리던
장추삼에게 그가 손을 훼훼 저었다.
"아니오, 아니올시다. 당주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엥? 그럼 갈형이 날 왜 찾았소? 갈형에게 빌린돈도 없는데."
"물론 없지요."
웃으며 갈동이 봉투하나를 꺼내 장추삼에게 내밀었다. 표국주 인장이
선명한 복룡표국의 문서 전달용 봉투.
"뭐요, 이거? 나 오늘부로 여기 관두는데... 시킬일 있으면 다른 사람 알
아봐요."
"표국주님께서 장형에게 전하라고 하셨소. 그럼 훗날 좋은 얼굴로 다시 만
나길 바라오. 난 바빠서 이만!"
어거지로 장추삼의 손에 봉투를 쥐어주고 나타날때와 같이 나는듯 갈동이
사라졌다.
"어? 이봐요, 갈형! 갈... 갔네."
바보처럼 오른손을 들고 어정쩡하게 갈동을 부르던 장추삼이 곧 손을 내리
고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몸 성히 돌아오라는 이효의 편지와 꽤 많은 액수
가 적혀있는 전표한장. 다소 큰 돈이기에 돌려주려 했으나 용돈한번 못 줘
본 숙부의 성의라고 생각하도 좋고 유능한 표사를 위한 투자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편지의 덧글을 보고는 고맙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표국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부친의 손에 이끌려온 그날도
이렇게 활기찼었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표국의 문을 열면서 장추삼은 문고리의 차디찬 금속성이 웬지 정겨웠다.
갈동의 말처럼 언젠가 좋은 얼굴로 반대편의 문고리를 잡고 싶었다. 그때는
이렇게 조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게 소리를 질러서
낮잠자고 있던 사람들도 모조리 깨울것이다.
'나 돌아왔소'라고 소리처서.
* * *
친구들에겐 얘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돌아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말
을 하겠는가. 차라리 아무말없이 사라지는게 나을것이다. 처음에야 욕을 하
겠지만 머리가 나쁜 녀석들은 아니니 곧 그를 이해하리라, 왜 떠나야만 했
는지 말이다. 그러나 청빈로를 뒤로하기전에 꼭 가고싶은 곳이 한군데가 있
어서 장추삼의 마지막 퇴근길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이른 시간인지 윤파파의 노상객잔은 한가했다. 두어군데 탁자에서 파전을
안주삼아 박주를 기울이는 장사치들 정도가 전부였기에 장추삼은 그가 가장
선호하는 모퉁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저 왔어요."
장추삼이 인사하자 윤파파가 '근데?' 하는 표정으로 장추삼을 힐끗 보았다.
"전하고 돼지고기좀 주세요. 맛있게요."
"그럼 언제는 맛 없었냐? 이놈 말하는 것 좀 보게!"
"아뇨, 아뇨, 그럴리 없죠. 오늘은 어떤술이 맛있을려나."
재빨리 윤파파의 공세에서 벗어난 장추삼이 죽엽청 한 담자를 담아 자리에
앉았다.
꿀꺽-.
'쓰다!'
그러면서도 노상객잔을 통째로 머리속에 심으려는듯 세세히 주위를 돌아보
았다. 몇년이 흘러도 똑같은 탁자와 의자, 힘 한번 주면 부셔질것만 같은
도마와 조리대, 어울리지 않게 날이 잘 서있는 칼들, 그리고 윤파파...
'파파, 건강하세요. 내가 돌아왔을때에도 또 전을 튀겨줘야해요.'
"어라? 저놈이 또 늙은이에게 눈웃음을 치네. 흉물스럽게 그러고 있지말고
이거나 가져가!"
히죽히죽 웃으며 안주를 받아들고 돌아서는데 무언가 막아섰다.
'키가 크군.'
쓱 비키려는데 그것이 불렀다.
"저기서 마시고 있나?'
'엥?'
이런곳과 너무도 어울리면서도 또한 평생을 이런곳에 발을 딛을것 같지 않
은사내.
"적대협이 웬일이요?"
적괴가 노상객잔을 한번 훑어보고 뺨을 긁었다.
"이렇게 괜찮은 술집이 있었다니... 의외군."
한마디하고 저벅저벅 장추삼이 자리에 앉아서 술을 따라 마셨다.
'어...'
"멍청히 서서 뭐하고 있나, 안주가 식잖아!"
'거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추삼이 맞은편에 앉았지만 적괴는 앞의 존재는 잊은듯
술을 비우고 전을 먹어댔다.
"술이 없군. 이보..."
"그게 아니오. 여기선 직접 퍼다 먹어야하오."
"......"
그렇게 네담자의 술이 비워지고서야 적괴가 말문을 열었다. 그때까지 장추
삼은 반담자의 술도 비우지 못했으니 적괴의 주량은 꽤 세다고 하겠다.
"떠난다고 들었다."
"......"
"아쉽군, 좀더 알고 싶었는데."
다시 한잔을 비우고 적괴가 장추삼을 보았다. 미소라고 짓는것 같기는 한데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냥 기분이 나빠서 인상을 긁는것 같았다.
"모추를 이긴건 자네였겠지?"
"누가 뭐라고 합디까?"
적괴의 인생에서 흥미라는 감정을 불러온 사람은 단 네명뿐이었다. 언제나
마음속으로만 불러보는 이름 하나와 표국주 이효, 지청완, 그리고...
'무슨생각으로 살고있는걸까, 이녀석은?'
안 물어보길 잘했다. 만약 질문을 던졌다면 그때부터 장추삼의 잔이 바빠질
뻔 했으니까.
"자네가 모추에 대해 물은 날 바로 월영전이 붕괴되고 모추의 패배가 장안
의 화제가 되었지. 그런 우연은 없다, 적어도 무림에서는."
특별히 대답할 말도 없고해서 장추삼이 한 담자 더 퍼오려고 자리에서 일어
났을때 적괴가 술담자를 뺏어 들었다. 그는 죽엽청보다 소주를 더 좋아했으
니까.
'그냥 딴거로 퍼오라고 하면 되지. 퉁명스럽기는!'
어느정도 술이 되었는지 적괴의 눈자위가 홍색을 띄었다. 술잔을 비우던 속
도도 눈에 띄게 떨어져서 한잔을 두 세번에 걸쳐 끊어먹기 시작했는데 한잔
한잔을 비우는 모습을 보니 그 역시 술을 무척이나 사랑하는것 같았다.
"지청완 노선배 말인데..."
'나, 참, 또 그 노인네 얘기네.'
장추삼이 있는데로 표정을 구겼지만 아랑곳없다는듯 적괴가 말을 이었다.
"도데체 어떤분인가? 강호 견식이 좁다고는 생각지 않았거늘 그분에
관해서는 도무지 잡히는게 없다."
'당연히 잡히는게 없겠지.'
"나도 모르오. 뭐, 방랑벽이 꽤 있다는거, 입심이 좋다는거, 또 뭐냐..."
"됐다!"
적괴가 말을 잘랐다. 들어봐야 뻔한 소리겠고 자신도 모르는 인물을 강호에
대해 거의 문외한같은 장추삼에게 물은게 잘못이다. 그나마 친해보였는데.
말이 잘린 장추삼이 퉁퉁 부운 얼굴로 자작을 했다.
'뭐야, 묻지나 말든지. 기분나쁘게 사람 말허리는 왜 싹둑 잘라?'
그 모습을 보자니 아주 오래전에 잊고 살았던 것 같은 어떤 감정 하나가 되
살아나는 적괴였다.
'이녀석은 참으로 재미가 있구나. 순수하다고 해야하나 바보같다고 해야하
나.'
"오년전 여자한테 차였다고 들었다."
' ! '
벌떡 고개를 들어 적괴를 보았다. 그야말로 오년전 이었다면 주먹부터 날아
갔겠지만 지금 그가 놀란건 강시의 입에서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가 흘러나
왔다는데 있다.
"기분 나쁘게 들었다면 어쩔도리 없지만 놀리자고 한 말은 아니야. 그때 그
렇게 괴로웠나?"
별걸 다묻네 하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장추삼에게 대답했다.
"당연한거 아니오. 몇년을 사랑했는데..."
이녀석에겐 얘기해도 될것같다. 혼자만이 간직해서 오래전에 재가 되어버린
슬픈 사람의 편린들을... 이녀석은 어쩌면 이해할 지도 모른다.
"잊혀지던가?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어께를 한번 으쓱하고 장추삼이 적괴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강시도 술을
마시면 순간적이나마 인간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가보다.
"세월이 약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되었소. 다시 한번 할려고해도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는데 어쩌겠소. 행복을 빌어야지."
"만약 그여자가 아직은 혼자라면?"
'아직은'이란 말에 강한 힘을 실어서 적괴가 물었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
지 손에 쥐고있는 술잔이 부서질것만 같았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 여기 또하나 있네. 손에 힘이나 푸쇼. 에... 혼자라...
음... 그렇다면 한번쯤 시도해볼만 하겠지. 단!"
장추삼도 '단'이란 글자에 힘을 실었다. 주먹쥔 그의 오른손에서 검지 손가
락이 죽 펴졌다.
"한가지, 자기 자신부터 확실히 선 상태여야 겠지."
어찌보면 지극히 평이한 대답, 그러나 적괴에겐 세상 어떤 미사여구보다 올
곧게 다가와 가슴에 자리잡았다.
"자기 자신부터 확실히 선 상태라..."
몇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이는 그를 보며 다시한번 사람은 한번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장추삼이었다.
[11534] [연재] 삼류무사-79 첨부파일 :
몸 건강하라는, 적괴로는 좀체로 쓰지 않지만 누가 들어도 흔하디 흔한
인사말을 남기고 그가 일어나자 장추삼은 비로소 호젓한 기분이 되었다.
비운 술담자들은 많았으나 그가 머문 시간은 반 시진도 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자리는 많이 비어있었다.
'강시양반, 마음에 두고있는 사람이라도 있는거야? 하긴, 그도 사람이고 총
각이니까 당연한 일이지.'
하며 술 한잔을 따르려는데 그의 앞에 누군가 섰다.
"아, 또 누구... 어, 우형이오?"
우건이 동그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장추삼에게 물
었다.
"그 무섭게 생긴 사람 완전히 간거에요?"
"엥?"
사실 우건이 노상객잔에 온 건 적괴가 자리에 앉고 얼마 안되서다. 장추삼을
찾고는 기쁜 마음에 걸음을 옮기다 무시무시한 인상의 남자와 말없이 술잔
을 기울이는 걸 보고는 찔끔해서 괜히 뚝 떨어져 앉아있다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쪼르르 달려온걸 장추삼이 어찌 알겠는가.
"갔소. 그 사람이 그리도 이상해 보이오?"
어이없어서 장추삼이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
는 듯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모습으로 우건이 대답을 대신했다.
'누구는 액면으로 '분' 소리까지 듣고 누구는 액면 때문에 처음보는 사람도
슬슬 피하니, 내 참!'
장추삼의 시선을 느꼈는지 우건이 어색한 말로 상황의 타개를 꾀했다.
"아하하... 뭐, 그분 대협이 뭐, 꼭 강시같이 보여서가 아니라... 뭐, 아하하...
이런, 안주가 없네!"
벌떡 일어선 그가 안주를 주문하며 윤파파와 이얘기 저얘기를 나누었다. 그
날 이후로 몇번 더 왔으리라.
"떠난다고 들었어요."
머리고기를 내려놓으면서 우건이 물었다.
'약속이라도 했나?'
어째 앉으면서 하는 말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까.
"내가 참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네. 그 얘긴 어디서 들었소?"
"그야 오...!"
장추삼의 의아한 시선이 계속 우건을 쫒았다.
그가 떠난다는건 표국내의 몇몇 빼고는 아는이가 없다. 부담없이 말을 하던
우건이 급하게 입을 봉하고 아까처럼 눈이 똥그레졌다. 본디 커다란 눈
이었는데 똥그레지기까지 하자 더할나위없이 귀여웠으나 장추삼은 내색치
않았다.
"묘하군, 표국 사람들도 잘 모르는 일을 알고 있다니 말이오. 우형이 복룡표국
사람들과 돈독한 관계를 가진건 몰랐는데 말이오."
"그, 그냥 오다가다 들었어요."
씩 웃으며 장추삼이 술한잔을 들이켰다.
"진짜에요!"
아니라고 했다간 맞아죽게 생겼다. 여전히 장난끼어린 눈빛으로 우건을 쓱
처다본 장추삼이 기겁을 했다. 그는 당황에서 분노를 넘어선 얼굴이었다가
아예 울상이 아닌가.
"아니, 이보시..."
또르륵.
끝내 한방울의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나쁜 자식, 꼭 그렇게 사람을 망신줘야 하는거야? 내 딴엔 지가 돌아왔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데.'
"아니, 저기..."
엉덩이를 살짝 떼고 우건에게 손을 뻗치다 '손치워욧!' 하면서 고개를 홱 돌
리는 순간 장추삼은 저도 모르게 장탄식을 토했다.
'도데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광경은 누가 보아도 그의 사과가 당연한 것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으니 진정하시오."
"흥!"
울면서도 특유의 콧방귀는 잊지않는 우건이 얄미웠지만 그 감정은 일단 접
어두는게 좋을것 같았다. 급한 불부터 끄는게 우선이니까.
"자자, 진정하고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사람이 그런걸 가지고 삐지고 그러오."
"삐질말을 했으니까 삐지지!"
'에휴!'
한대 치고 싶었지만 그럴수는 없다! 장추삼은 스스로를 사나이중의 사나이라고
자부하니까.
"안그러겠소, 앞으로 안그럴테니 기분푸시오."
"앞으로 그러지마요!"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니까 이건 아예 가관이다. 내참을 연발하며
장추삼이 겨우 술한잔을 따라주었다.
"남자가, 아니지 사람이 그러면 못써요. 큰 사람이 되려면 남의 작은 실수
따위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갈줄 알아야 한다구요. 알아들었어요?"
'끄응...'
사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곧 우건은 활기를 되찾고는 장추삼의 실회로에 관해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그의 무용담이 나오면 펄쩍펄쩍 뒤며 좋아하기도 했다.
장추삼도 이런 분위기가 싫지는 않아서 그의 물음에 꽤 성실히 대답해 주었고
뢰성인들과 싸움부분에서는 일어서서 폼까지 잡아주었다.
"근데요, 장형."
갑자기 무게를 잡으며 우건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거칠것없이 얘기를 풀
어내는 성격으로 볼때 지금 꺼내려는 얘기가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아까 건너편에 앉아있다가 우연히 들은건데... 아, 절대로 엿들을려고 한것은
아니예요!"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어가며 강조하는 우건을 보며 장추삼이 웃었다.
"뭔 얘긴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알았으니까 그냥 말하시오."
"그... 뭐, 그랬잖소. 그 여자가... 에, 혼자라면... 다시 시도해볼만 하다고
말이오."
"그런데?"
"지금도... 그런거요?"
장추삼의 얼굴을 보기 싫은지 술잔과 열심히 눈싸움을 하는 우건이었는데 술을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유난히 상기된 볼이 귀여웠다.
"지금도 그럴까... 힘든 질문이네."
연거푸 석잔을 들이키고 장추삼이 우건을 보며 싱겁게 웃었다.
"왜, 참한 소저라도 하나 소개시켜 주려고?"
"대답이나 해요."
농지꺼리도 대꾸가 있어야 신명나는 법이다. 맥 빠진 우건의 응대에 힘을잃은
그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일반적으로 봐서..."
"일반적인거 말고 장형을 얘기해봐요. 백번 일반적인거 찾으면 뭐해요?"
그말을 꺼낸이후 처음으로 우건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망울은 너무 커서
모든걸 담을듯 했다. 이 탁자를 담고, 노상객잔을 담은 뒤에 청빈로를 담
고, 남으면 장추삼까지 담을 것 처럼 맑고 영롱하게 빛나는 눈망울이 웬지
낯익어서 은근슬쩍 고개를 돌리며 장추삼이 쓰게 웃었다.
"나같은 사람 뭐하러 관심두고 그러시오, 별볼일도 없는데."
그건 자조였다.
나름대로 진지한 그의 말은 우건에의해 간단히 부정되었다.
"그건 말도 안돼요.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판단하는게 아니라구요. 그딴
소리로 말 돌릴려고 하지 말아요. 정 얘기하기 곤란하면 안해도 되지만..."
"난..."
말을 꺼냈는데 막상 할말이 없다. 흥분해서인지 모르지만 장추삼이 관심 운
운한건 누가 보아도 남자에게 할말은 아니었을텐데 그런건 상관없다는 듯
우건이 말을 잇고 있다. 사실 우건은 꽤나 감정이 고조된 상태였으니까.
"하아, 그래요. 못할말은 아니지. 잊혀지는 사랑이 어디있겠소. 그런게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였을 테니까. 내가 볼때 사랑이란 감정은 지우고
싶다고해서 백지처럼,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얗게 되는건 아닐것이오.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옅어지는 것이겠지."
"얼마나 옅어졌어요? 장형의 사랑은."
어떻게 사랑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까. 우건은 분명 장추삼에게 무리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인간사가 아니겠는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은 우연과 억지가 반 이상을 차지할테
니. 그것이 이성간의 관계라면 수치가 더 올라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성(異性)간의 교류는 감정이 이성(理性)보다 앞서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무슨 말을 듣고싶은건지... 어쨌든 한가지는 말할 수 있소. 과거때문에 미
래를 포기할 정도로 바보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거... 아까도 말했지
않소?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면 해보겠다고 말이오."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난 지금의 감정상태를 묻는거잖아요?"
알고 있다. 하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일까? 먼저 떠난건 그녀
였는데.
'비록 내가 잘못한건 많았지만...'
우건의 눈을보니 물러설 태세는 아니다. 그래, 솔직해질 때가 된거다. 얼마
나 옅어졌냐고? 백지는 아니라고 얘기했었다.
"그냥...하! 그냥... 또 하나의 그림을 그릴 정도는 되는가 보오."
정말 하기 싫은 말을 힘겹게 꺼냈다.
'오랬 동안은 하지않을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하구나.'
씁쓸한 기분으로 우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름대로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술이 없구려."
담자를 들고 일어서는데 또다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와서 장추삼은 고
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사님과 꼬마는 여기 웬일이야? 설마 나때문에 온건 아닐테고...'
"아! 거기 있었어요? 사마대가, 저기 있네요, 저기!"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호들갑을 떠는 단사민이 싫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혼자 있을날이 아닌가보다.
"오! 장형, 한참을 찾았소이다."
언제 들어도 기분좋은 음성으로 사마검군이 다가오다 이내 흠칫했다.
"일행이 계셨구려."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건이 고개를 돌려 사마검군과 단사민을 보았다.
"아! 사마... 아니지. 앉으세요. 장형보러 오신것같은데..."
그러면서도 갈려고는 안하는 폼을 보니 문득 아까 생각이 났다.
'강시였다면 줄행랑을 놓았을걸?'
[11554] [연재] 삼류무사-80 첨부파일 :
싱글거리며 사마검군들에게 자리를 권하는 우건이 왠지 밉지만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게 아닐까. 본능적으로 미추(美醜)에 근거해서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이란게 말이다. 또한 그는...
"술 생각이 나서 이곳을 찾은 건 아닌 것 같고, 날 찾아온거요?"
"사람이 어찌 그렇게 매정할수 있나?"
사마검군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목소리 만큼은 예술이라고 다시 한번
느꼈지만 그냥 미소로 대신했다.
"제가 또 뭘 잘못했다고..."
"잘못했지요. 그래도 근 한달을 같이 지냈는데 그만둔다는 걸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을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말아요? 어..."
종알거리던 단사민이 우건을 보고 깜짝 놀라다.
소시적에 미소년 이라고 수없이 찬사를 들어왔던 그였지만 눈앞의 인물에
비교하자니 우스개도 안되는 얘기다.
이런 아름다움을 사람들은 흔히 '천상의...' 같은 어구로 표현한다고 하던가?
"우와! 이분 형님은 정말 잘생겼네요. 안그래 장형?"
또 액면이다. 뻔히 나이를 알면서도 장형,장형 거리던 놈이 좀 괜찮은 얼굴을
보더니 초면에 바로 형님이라?
'아유, 요 자식을 그냥...'
"아우도 잘생겼는데? 중원의 여인네들 방심은 혼자서 독차지 하겠는걸?"
"하하, 형님을 보니까 여지껏 자부했던 제얼굴이 원숭이보다 좀 나은 수준
이란걸 알겠는데요? 저는 단사민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형님의 함자를 알 수
있을까요?"
"본래 단공자였군. 우형(愚兄)은 우건이라고 해."
연신 표권을 하며 서로에게 금칠을 해대는 둘의 모습이 가소롭기 그지없어서
콧방귀라도 날리고 싶은데 마침 콧구멍이 막혔는지 그 조차도 잘 안된다. 꼴
같지 않아서 무어라 한방 먹여주고는 싶은데...
'놀고있네.'
핏 하며 고개를 모로꼬는 장추삼을 보며 사마검군이 술담자를 들었다.
"사석에서 처음으로 만난는 것 같군. 내 술을 마시지는 못하지만 한 잔
따라 줌세. 받게나."
여전히 우건들은 시시덕 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복숭아 정원이라도
찾으러 일어날 것 같다. 이름은 '미남결의(美男結義)' 쯤으로 걸고 말이다.
"나는 아직 자네를 잘 모르네. 이전에 들어왔던 얘기들과 자네의 모습을
결부시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자네와 깊은 대화 한번 나누어 보지도
못했으니 말일세"
사마검군은 자연스럽게 말을 놨는데 크게 걸리는 것도 없고 해서 장추삼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물론 곁눈질로 우건들의 웃기는 수작을 힐끔거리긴
했지만.
"이번에 실회로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자네가 그렇게 충격을
받았다고는 보기 어렵고,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사실 어이가 없었다. 동네 건달이 뭐 대단한 일을 겪었다고 강호로
나가보겠다는 건지.
말에 늘 진중한 사마검군이기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장추삼이
고담과 단사민의 첫반응을 보았다면 열받아서 십년정도 수명이 줄었을 것이다.
어쨌든 세상경험이 별로 없는 사마검군에게 장추삼이란 존재는 퍽이나
특이했다. 있을땐 몰랐는데 없으면 왠지 허전하고 별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주위에 사람들을 모으고, 지랄맞은 성격 같으면서 다시 돌아보면 꽤 괜찮은
인간인것도 같고.
'하여간 의문투성이야 이친구는!'
"기왕 결심한 일이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겠네. 그리고..."
품을 뒤적이던 사마장군이 작은 비단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장추삼에게 건냈다.
"뭐요, 이게?"
"당소저가 전해주라고 하더군. 그녀는 무언가 바쁜일이 있는 것 같았네."
'바쁜일?'
주머니에서 나온건 곱게 접힌 종이와 실에 매달린 빨간색의 새모양 노리개
였다.
'윽! 당소저는 날 뭘로보고 이런 노리개를...'
-추삼!
동생같아서 이름한번 불러보고 싶었어요. 기분 나쁘지 않지요?
그래요, 뭐든 털어버릴 일이 있으면 확 털어야 해요. 방구석에 처박혀서
머리를 쥐어 짜봐야 헛일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무림을 보겠다고요, 좋지요.
요즘 세상은 칼만들면 무림인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는게 당연한 것처럼
되었지만 아직도 진정한 의(義)와 협(俠)이 있고, 인정이 있고 멋이 있는곳이
무림이랍니다. 이런건 백번 말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직접 보고,
부딛쳐야만 느껴지니까.
세상은 넓어요. 얼마나 넓은지...
나역시도 작은 표국에서 벗어나 옛날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유로운
인생을 즐기고 싶답니다. 비록 못먹고 대충대충 새우잠을 자더라도 내일은
또 다른 무엇이 나를 기다릴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면 그런건 문제도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나갈수가 없어요. 왜냐구요? 여기서 꼭 매듭지어야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 일' 이 생각날때면 고개가 자꾸 처지곤 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곤해요.
'힘내자. 당소소! 이깟걸로 뭘!'
이렇게요.
많이 보고, 접하고, 직접 부딛치세요. 그리고 느껴봐요. 무림이 어떤곳이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이예요. 그 뒤에 고민하는
거예요.
'나에게 있어서 무림은 어떤 의미고 어떤 삶을 걸어야 하는가'
에 대해서 실컷 생각하는 거예요. 술을 마시고 소리도 질러보고 고래고래
노래도 불러봐요. 진정으로 치열하게 번뇌해야만 좋은 결말이 도출되니까요.
결국엔 찾게 될꺼예요. 찾게되면 그때 양양으로 돌아와서 큰소리 한번 질러요.
"당소저, 술한잔 사시오!'
그럼 냉큼가서 밤새도록 술상대를 해줄게요. 밤새도록 얘기를 들어줄게요.
그땐 내옆에 누군가도 같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말이 길었어요. 무엇보다 유의할 것은 몸보중 이예요. 천하를 얻어도 건강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듯이 어떤일이 있더라도 건강을 유의하고 운동을
게을리 하면 안되요. 그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게요.
당소소.
추신, 동봉한 물건은 잠깐 빌려주는거예요. 그러니 잘 사용하고 돌려주여야
해요. 혈봉황(血鳳凰)은 비록 작고 예뻐보이나 당문 역사상 가장 무서운
암기중 하나랍니다. 실의 줄을 가운데 손가락에 감고 던져서 상대를
격상시키는 무기인데 무공이 다소 떨어지는 장공자에게 많은 힘이 될 거예요.
원래 이 물건은 장공자에게 주머니를 건낼 남자에게 주려했는데 목석같은
양반이라서 그런지 어렵네요.
편지를 접으며 뚫어지게 사마장군을 바라보자 그가 의아했다.
"아니, 왜그런가?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가?"
"아니올시다."
'세상에, 중원 최고의 미녀가 이토록 뜨거운 마음을 보내고 있는데 저 양반
말하는 꼴 좀 봐! 뭐 무슨 문제가 있느냐구? 어이구 답답해!'
그 마음을 탄식 한 번과 한 잔 술로 대신했다.
"그럼 우리도 가봐야 겠네. 몸성히 다시보세. 가자 사민아."
"예엣?"
한참을 신나게 주절거리던 단사민이 깜짝놀라 사마검군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지금의 분위기가 - 우건이라는 존재겠지만 -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지금
일어나고 싶은 생각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도 청춘인데 놀고 싶었다.
매일매일 검술수련도 좋고 참선도 좋지만 이런 자리에서 얘기하며 웃는것도
좋다!
"대가. 자, 잠시만 더 있으면 안되겠습니까?"
"그럼 넌 더 이따 들어오너라."
사마검군이 벌떡 일어나자 황급히 뒤따라 일어났지만 단사민 표정엔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더 계시지 않고..."
"아니야. 할말도 다 했고, 전할 물건도 전했으니."
단사민의 내심을 짐작해서 장추삼이 한마디 해주었으나 사마검군은 성큼
걸음을 옮겼다.
얼핏보면 사마검군과 하운은 무척 닮은꼴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도사풍의 인물들은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 었다. 지금의 경우가 아주 좋은
예인데 사마검군은 무척 완고하다. 자기완결형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까?
그에 비해 하운은 무척이나 폭이 넓다. 모든걸 바라보려 하며 어떤것이든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뱉아낸다.
시간나면 고서점으로 놀러오라는 말도 단사민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한 듯
처연한 표정으로 그가 가자 좌석은 둘만이 남아 어색한 상태가 되었다. 조금전
까지도 웃고 떠들던 우건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있었고 뭐라 말을
걸려했던 장추삼도 이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홀로 술을 따라마셨다.
얼마나 흘렀을까?
"가야겠어요. 피곤하네요."
갑자기 우건이 일어섰다. 그의 입가를 보니 무언가 고민하던 것을 이제야
해결했다는 듯, 또는 결정지었다는 듯 자신에 찬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도 갈거요. 여기서 더 먹었다간 집 조차도 찾아가기 어려울 것 같소."
어느정도 취기가 오른 장추삼도 기분좋게 노상객잔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정도면, 이런 술자리를 가졌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갑시다. 기왕 방향도 같은데."
[11590] [연재] 삼류무사-81 첨부파일 :
자다가 억지로 일어난다는 것처럼 짜증스런운 경우는 없다. 아무리 마음 좋
은 군자라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인상이 구겨지는건 어쩔도리가 없고 성격이
좀 안좋은 사람은 쌍소리가 튀어 나오기도 한다. 적당히 들어간 술과 안
돌아가는 머리를 나름대로 굴린탓에 심신이 노곤해질대로 노곤해진 장추삼
이 단잠에 빠져서 기분좋게 음냐거리고 있을때 들린 그 소리는 비록 아름다
웠지만 일단은 싫었다.
(“장형, 장형 ! 잠깐 일어나시오!”)
' 우웅... '
(“ 장형 ! 일어나라니까 !”)
‘웅... 뭐야?’
절대로 눈뜨기 싷어서 어떻게든 개겨보려 돌아눕는데 갑자기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뭐야? 전음이야?’
세상에, 전음으로 잠을 깨우다니... 눈이 번쩍 떠졌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전음으로 잠을 깨우는 사람은 정신이 나갔거나 매우 절박한 사정이 있을 것
이다. 그래도 일어나기는 싫어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데 제차 전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안 일어난다면 평생 그대를 저주 하겠어요. 좋은말 할때
눈뜨는게 좋을걸? 일어나욧!”)
' 아이고, 시끄러워. '
우건의 목소리였다. 무공을 한다는 것 쯤은 짐작을 하고 있었으니 별로 놀
랄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헤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들 다 자는 이시간에
올빼미처럼 사람을 부르느냐 이거다.
‘모르는체 하고 그냥 더 잘까?’
정말이지 파곤했다. 육체적으로 하는 노동보다 정신적인 그것이 주는 피로
도는 느껴본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만큼 부담감을 준다. 이 삼일을 그
렇게 보내니까 사람꼴이 영 말이 아니다. 오늘만큼은 푹 자보려고 했는데.
("진짜 안 일어나네?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흥! 그 이후에 일에 대
해서 전적으로 장형이 책임져야 할꺼에요. 내가 뭐 할일이 없어서 이런 한
밤중에 숨바꼭질 하듯 장형을 부르는줄 알아요? 알고보면 나도 바쁜몸이라
구욧!“)
' 아이... 진짜. '
어기적어기적 일어나서 대충 옷을 입고 밖에 나왔다.
' 어딨는거야? '
(“아휴, 잠꾸러기! 이제야 일어난거에요? 좋아요, 오늘 한번은 넘어가 주
도록 하죠. 하지만 다음번에도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킨다면 , 흥! 가만안둘
꺼에요!”)
' 글쎄, 어딨냐구? '
큰소리도 못내는 것이 부친과 정혜란이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있을 것이다
.
“ 아!... ”
집뒤의 공터에서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곳과 집까지는 어림잡아도 십여장,
전음을 할줄은 모르나 들은 풍월로 얘기하자면 대략 오륙장 거리까지 전음
을 전달하는 수준을 일류로 본다고 했는데....
‘멀리서도 사람을 부르네. ’
과연 공터에는 우건이 서 있었다. 달빛을 마주하고 서있는 모습은 남 ,여
라는 구분을 떠나서 누구나 감탄을 자아내게 할 아름다움으로 초라한
공터를 빛내주었다.
‘ 사람하나 서있는 것 만으로 허름한 공터가 궁궐보다 화려하게 보이는 구
만. ’
칭찬하기는 싫고해서 어색한 헛기침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허험,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슨 볼일이 남아서 날 부른거요? 우형도
꽤나 피곤해 하는 것 같던데. ”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던 우건이 고개를 돌려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 눈망
울의 아름다움이란!
당소소의 아름다움은 농염하면서도 세월의 무게가 실린 기품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건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란 청순하면서도 세상에 있을
것 같지않은 신비감이다.
“장형, 아니 장공자.”
호칭도, 목소리도 변했다. 억지로 내리누르던 목소리를 본래의 음성 그대로
실어보내니 이른아침에 풀잎에 맺혔다가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이슬방울이
따로 없었다.
‘ ! ’
아무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장추삼을 한번보고 다시 하늘가
로 눈을돌린 우건이 탄식을 지었다.
“ 하아, 사실 나는 개인감정 같은건 가져서는 안돼는 몸이었어요. 처음 술
자리에서 말했었잖아요, 해야할 일이 있다고... 오늘 만약 장공자가 모두
잊었노라고 했다면 차라리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지낼수도
있었어요. 자신의 과거를, 그것도 사라이란 추억을 그렇게 간단히
지워버릴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과 앞으로 무얼 얘기하고 무얼
공유하겠어요? ”
여전히 장추삼은 말이 없었다. 완전히 깨지 않아서 약간은 흐리멍텅 하던
눈빛도 제자리를 찾았고 정신도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있었으나 일단은 우건
에게 기회를 주었다.
슥.
우건이 늘 쓰고있던 유생건에 손을 가져갔다.
‘ ! ’
잠시 망설이더니 장추삼을 한번 보고는 눈을 질끈감고 풀 듯이 유생건을 벗
었다.
차르륵.
“ 아... ”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유생건 속에 감춰져 있던 그, 아니 그녀의 삼단같은
머리가 세상밖으로 외출을 하자 본래의 아름다웠던 얼굴과 하나가되어
인세의 그 누구도 감히 구경해 본적없는 미의 극치를 이루어냈다.
여전히 눈을 감고있는 우건에게 꽤나 조심스럽게 장추삼이 말을 했다. 단지
아름다움 때문이라면 이렇게 조심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아름답구려, 여자라는거....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이정도로 아름
다울줄은....”
‘? ’
“알았다구요? ”
꽤나 큰 결심으로 머리를 풀었는데 이자의 반응은!
“언제 알았어요? 언제에욧? ”
‘에구, 그냥 앞에 말만 할걸. ’
방금전 까지만 해도 선녀강림 이었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원녀재림이다.
잡아먹을 듯 장추삼을 노려보던 그녀가 무엇이 그리도 분한지 어깨마져 부
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자리에 폴짝 주저 앉았다.
' 에구... '
졸지에 좋던 분위기는 다 날아가고 공터에 남아있는건 어정쩡한 두 남녀와
황량함이 전부였다.
“ 미안... 하오. 그냥 가만히 있는건데... ”
여전히 묵묵부답, 쪼그려 앉아있는 그대로 반응이 없어서 장추산도 같이 쪼
그려 앉았다.
“ 그냥 알게 된거요. 그러니... 어? ”
'또 우는거야? 하... '
청승맞은 표정은 혼자서다 보이겠다는 듯 울고있는 우건을 보자니 앖는 미
안함까지 저절로 생겨날 판이다. 무언가 꺼림직 하기도 했다. 그것의 정체
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자가 여자를 울리는건 썩 보기 않좋다.
“미안하오, 소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한 건 절대로 아니었소. 본래 나
란놈은 생각나는데로 말을 뱉어내서 종종 오해도 사고 그런다오. 이해해주
시오. ”
그래도 대답이 없다. 어지간히 서운했나보다.
“기분이 많이 상했구려 그럼 이렇게 합시다. ”
그는 우건의 손목을 잡아서 자신의 가슴팍에 대었다.
“내가 얄밉소? 그런 기분이 풀릴때까지 때리시오. 기꺼이 맞아주겠소. ”
우건이 조용히 손목을 빼서 옆의 바위에 장력을 날렸다. 물론 고개는 쳐박
은체로.
피슛.
꽝!
“허걱! ”
아이만한 바위가 그녀의 손짓 한번에 산산조각이 났다. 식은땀이 한방울 흘
려내렸지만 여전히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장추삼이 호기롭게 외쳤다.
“소저의 기분이 풀린다면 이깟 가슴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치시오, 마음
껏쳐요! 후련해질때까지 때려도 좋소이다! ”
“관둬요. 피하는 것 빼면 시체면서. ”
울면서도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우건이 말했다.
' 살았다... 엥? '
이번엔 장추산이 의혹의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승세는 이미 그녀에게 넘어
가 있는 상태라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우건이 말했다.
“다 봤다구요, 당신이 싸우는 모습, 이상한 보법으로 피하기만 하던걸요?
그게뭐야, 박력없게. ”
그녀가 보았다면 모추와의 싸움일 것이다.
“그랬구려. ”
이제 다 울었다는 듯 ' 앞으로 그러지마요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못
헤아려 주면 나중에 고생해요 ' 어쩌구 하며 우건이 일어나자 그도 엉거주
춤 일어났다.
“어때요, 그냥 볼만은 한가요? ”
머리를 뒤로 제치며 그녀가 함초롭게 웃었다. 당연히 볼만했다!
이게 어디 볼만하기만 한가!
“최고요! ”
엄지손가락을 쭈욱 내밀어서 감탄의 표현을 대신했다. 말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그녀의 미에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 당신을 처음봤을때 누구나 한 목소리로 얘기하던 동네건달은 어디에도
없었고 내 눈에는 삶에대해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청년이 앉아 있었어요.
또다시 보았을때는 강한 무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순진함이 좋았고....
마지막은 아까 얘기했지요. ”
그녀가 정추삼을 뜯어 보았다. 속눈썹 개수라도 세어 보겠다는둣.
“저는 아직 당신을 잘 몰라요. 당신도 역시 그러하겠지만... 우리 이렇게
해요”
그녀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요, 이거? ”
“걸어요! ”
애들도 아니고, 어쩌구 하던 장추삼이 우건의 냉엄한 눈길에 재빨리 손가락
을 걸었다.
“약속하세요. 당신이 중원으로 나가서 조금 더 큰 어깨가 되어 돌아오기
로. 제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돌아 오겠다고 말이에요.
그때까지, 그때까지 서로를 더욱더 생각해 보기로. 만약 우리다시
만났을때, 그때도 서로의 마음이 원한다면 우리의 얘기를 시작해봐요.
당신이나 저나 아직은 젊잖아요. ”
' 하! '
이렇게 마음에 드는말이 또 있을까? 그녀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미래를
말하고 있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속에 남자의 성장을 바라고 있다. 또한 그
것은 장추삼이 바라고 있는 스스로의 내일이다.
왈칵 껴안아주고 싶지만 겨우 자제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
“약속하리다. ”
“좋아요. ‘
손을 빼고는 그녀가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허리에 손을 척 얹고는 괜시리
턱을 주욱 뺐는데 딴에는 고고해 보일려고 했는지 모르나 그냥 귀여워 보였
다.
“ 당신은 지금 큰 행운을 잡은거에요.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무
림삼화중 한명이란걸 알아야 해요. ”
‘ ! ’
무림삼화!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명의 여인, 근데 중요한건...
' 난 당소저 외에는 잘모르는데? '
장추삼은 나머지 둘에관해 아는것이 전혀 없다는데 있었다.
수절 당소소야 너무 유명한 얘기고 화산의 가장 아름다운 꽃 이라는 검절
조소령이 그 둘째요, 천산에 있는데 볼수는 없는 꽃이라 하여 비절 이라 불
리는 이름모를 여인이 바로 우건을 일컫는 말이다.
“삼화든 뭐든 중요한게 아니지, 소저는 그런거에 들지않아도 충분히 아름
다우니까. ”
“흥! 그럼말로 여자를 꼬시나 보지요? ”
콧방귀를 날렸지만 싫지만은 않은 얼굴로 우건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무서운 오라버니가 계세요. ”
‘난 더 무서운 사람 많이 겪었네. 북궁 얼음덩이가 얼마나 무서운줄 알아
? ’
“나중에 뵙게되면 조심해야 할꺼요. ”
“알았소. 가슴깊이 새겨두리다. ”
내심이야 ‘제깟것이 ’지만.
그윽한 눈망울로 장추삼을 바라보던 우건이 신형을 둥실 띄웠다.
“이만 갈께요. 몸성히, 제발 몸성히 돌아와줘요. ”
그녀가 사라지자 공터는 삽시간에 을씨년스런 모습이 되었다. 사람 한명이
들고났을 뿐인데...
‘마치 꿈만 같구나! ’
선녀처럼 하늘로 오르던 우건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방금전까지의 일은
무언가 비현실적으로 장추삼에게 다가왔다. 환상의 꽃길을 걸어도 이보다
더 몽환적일까.
‘어쨓든 무언가 시작된 것인가? ’
그것이 사랑인지 인연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오년동안 꽁꽁 봉인해놓은
무언가가 이제 터져 나왔다는것 뿐, 아직 미래를 말하기는 이르다.
‘ 일단은 더 자자...’
뒷머리를 긁으며 장추삼이 집으로 향했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접했기
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전에 좀 자야겠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발걸음 발걸음마다 우건의 영상이 겹쳐졌다.
[11672] [연재] 삼류무사-82 첨부파일 :
첫댓글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무협이면서 무협이 아닌것처럼 매끄럽게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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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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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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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