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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01년 지망생
* 매일신문/ 낙동강/송진환/ 심사위원-이우걸
* 동아일보/ 원촌리 겨울 -이육사 생가에서/ 정경화/ 심사위원-유재영
* 조선일보/ 보길도 시편/ 홍라나/ 심사위원-윤금초
* 농민신문/ 모 과/ 정경화/ 심사위원-이상범, 김남환
* 대한매일/ 눈 녹는 마른 숲에/ 박지현(본명 박옥실)/ 심사위원-윤금초, 박시교
* 부산일보/ 고한리 시편/ 박지현(본명 박옥실)/ 심사위원-최승범, 장순하
* 국제신문/ 구덕포 해조음 2/ 윤정순/ 심사위원-윤금초, 정해송
* 경남신문/ 평사리/ 김종길/ 심사위원-김교한, 이우걸
* 전주일보/ 겨울, 금강하구댐에서/ 김상선/ 심사위원-정순량
[매일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낙동강/송 진 환
말없이 흘러가도
안으로 쌓인 세월의 깊이
응어리 왜 없었겠나만
모래톱에 묻어두고
보아라
가슴 그 안쪽
또다른 강이 되었다
햇살 더 눈부신 날
물빛 곱게 담아내면
굽이 돌아 서럽던
눈물마저 갈앉는다
이런날
강 기슭으로
갈대꽃이 피었다
물소리로 길을 열어
달려온 역사 앞에
미움도 사랑으로
달빛되어 내린다
어디서 풀잎 서걱이는 소리
내일을 여는 몸짓인가
* 심사평/이우걸
-절제와 균형의 긴장미가 생명
필자는 심사를 하기 전에 따뜻한 시심이 보고 싶었다. 정형을 정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피 흘리며 싸우는 언어가 보고 싶었다. 또 적은 언어속에 가득 담긴 생각의 하늘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작품을 일별한 후 이러한 기대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조는 말을 많이 해서 소득을 얻는 장르가 아니다. 음보율을 쉽게 파괴해서 되는 장르가 아니다. 절제와 균형이 빚어내는 긴장의 아름다움이 시조의 생명이기 때 문이다.
박은서씨의 ‘우포늪, 일어서다’와 이숙경씨의 ‘가을저녁’, 송진환씨의 ‘낙동강’, 유인겸씨의 ‘풍장’, 오종열씨의 ‘로데오 거리의 환란’, 박지현씨의 ‘ 봄, 다시 서는 숲’, 박광훈씨의 ‘독도 4’를 먼저 가려서 몇 번이고 정독해보았다. 이숙경씨의 작품에는 군데군데 이미 낡은 유행가조의 언어들이 눈에 거슬렸고 , 유인겸씨는 절제의 미덕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종열씨는 현대문명의 모순을 파헤치는 의욕이 돋보였지만 관념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박광훈씨의 경우 작품 수준이 고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박지현씨는 시상의 전개방식이 지나치게 고루하다고 보았다.
선자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결국 박은서씨와 송진환씨의 것이었다. 박은서씨의 작품은 발랄하고 따스한 감성이 탁월한 이미지에 의해 빛을 발하고 있고, 현실을 꿰뚫는 예리한 직관도 신뢰감이 갔다. 하지만 이미 같은 장르로 등단한 기성문인이라는 점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반해 송진환씨는 해마다 느끼지만 바탕이 튼튼 한 시인이다. ‘낙동강’이 특히 그렇다. 새로운 시도나 신춘문예가 흔히 기대하는 개성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지만 ‘보아라/가슴 그 안쪽/또 다른 강이 되었다’ 등이 보여주는 경륜의 결실을 간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송진환씨의 ‘낙동강’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대성을 빈다.
* 당선소감/송진환
어제 내린 비에 묻어온 바람이 한결 겨울을 느끼게 합니다.
새 천년의 빛나던 시작도 오늘은 한낱 어제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내겐 이 2000년 이 소중한 시간으로 남는가 봅니다.
진정 시조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발표해 보고 싶은 욕망도 있었습니다. 그러 나 우리 문단의 현실이 시와 시조를 별개로 나누고 있어, 시조 작품을 발표할 기 회가 내겐 없었습니다. 그러니 시로 등단한 지가 20년이 넘었지만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좀 억울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런 기회를 얻게 되어 나로선 다행입니다.
시조는 어느 문학 장르보다 언어의 조탁이 뛰어나야 좋은 작품을 일궈낼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조의 형식적 제약 때문에 더욱 그러하겠지요. 바로 그것이 내겐 매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조를 흔히 민족시라 일컫곤해도 시조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져야 그 말의 참뜻이 빛날 것입니다. 이제 나도 그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작품 열심히 쓰겠습니다. 뽑아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약 력
△경북 고령 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현대시학’으로 등단(78년)
△시집 ‘바람의 행방’ ‘잡풀의 노래’
△한국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원촌리 겨울 -이육사 생가에서/정경화
한 시대의 회상처럼 원촌리 겨울이 오면
탱자 숲 언 가시도 기다림에 지쳐 눕고
철 잃은 어린 동박새 귀소(歸巢)하는 빈 하늘.
마른 살 스스로 발라 푸른 재 흩뿌리고
뼈마디 꺾어꺾어 광야에서 보낸 생애,
가두고 물길 돌려도 긋지 않던 그 혼불.
터지고 갈라진 틈에 생명의 풀씨는 자라
바람 시린 능선따라 오색 깃발 세워 놓고
청포도 그리운 날들을 알알이 물고 있다.
정녕 봄이 다시 오지 않아도 좋다.
덜 녹은 잔설 위로 서리 깊게 내려앉아
나목들 초록 깊은 넋, 그 넋으로 또 다시.
* 심사평
<원촌리 겨울>을 뽑고나서/유재영(시조시인·'동학사' 대표)
시조에 있어서 정형의 의미는 우리 문자문화의 정신적 증명이라는 데 있다. 정형의 가치가 바로 시조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시조를 쓰는 데 형식이 표현의 장애로 남지 않기를 희망한다. 아무리 훌륭한 형식이라도 형식의 지배를 받는 것은 문학의 본질과 다르기 때문이다.
올해 응모작 대부분은 이러한 형식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였지만, 아직도 형식을 극복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상도 결코 적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당선작을 놓고 겨뤘던 작품은 정종철씨의 '나도 풍란에게 갔다'였다. 그러나 앞서 말한 형식의 문제에서 많은 논의의 여지를 남겼다.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시적 재능이 결코 당선작에 뒤지지 않았지만 여러 군데가 시조의 형식과 어긋나 있었으며, 정씨의 다른 작품 '저수지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음보의 중요성이 먼저 인식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끝내 떨칠 수 없었다.
그와 달리 당선작인 정경화씨의 '원촌리 겨울'은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서 정형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고, 시적 정취에서도 앞서 있었다. 당선작 '원촌리 겨울'은 시인 이육사의 생가에서 느낀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질곡의 깊이를 시로 형상화하는 데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특히 서정의 흐름이 고르며, 감성의 폭이 넓고 활달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당선자에 대한 신뢰이기도 했다.
그의 다른 작품 '사막의 강'도 기교와 세련미에 있어서 뒤지지 않았으나, 다소 관념으로 흐른 것이 흠이 되었다. 2001년, 우리의 민족문학인 시조의 새아침이 당선자의 기쁨과 함께 밝아오길 기대하며 대성을 바란다
* 당선소감/정경화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 혼자 흔들리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 했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날을 흔들려 왔던가. 흔들리다가 결국 범람해 버릴 때 그 때 나를 지탱해 준 것이 시조였다.
처음엔 그러한 내 감정을 카타르시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고 그 착각에서 하나 둘 벗어나면서부터 시조의 멋과 향기에 어느새 매료당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시조를 창작한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것(見)만으로는 부족하며 인식의 확장(觀)을 획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긍정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힘든 부분이 역사관이었다. 도도한 남강의 흐름 속에서 논개의 혈흔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다부동 격전지에서는 그 날의 총성을 들을 수 있어야 했다. 또한 원촌리에 가면 육사의 가슴을 그대로 내 가슴에 담을 수 있어야 했다. 현장에서의 느낌 뿐만이 아닌 내가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소리와 또한 그 내면의 소리까지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미 공감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색다른 의미로 승화시켜야 할지 막막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물꼬를 틔어주고 길잡이가 되어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바로 민병도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시조 한 편을 완성하려면 얼마나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지를 언제나 몸소 실천해 보여주셨다.
처진 어깨를 달래며 귀가하는 시간이었다. 동아일보로부터의 당선 소식은 입석표 한 장을 겨우 구해 들고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또 다른 이정표로 다가왔다. 그리고 출발 1초 전의 기차를 붙들어두고 호각을 마구 불어댄다. 단숨에 올라타는 내 모습이 보인다. 두렵다. 수많은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마냥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이따금 멈추어 가는 간이역에선 계절을 잊은 마른 들풀들이 나를 위로해 주리라 믿는다.
창밖에 첫눈이 내린다. 내가 잠시라도 사랑했던 사람들 또 잠시라도 미워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저 눈발이 그들의 잠든 머리맡에 하이얀 축복으로 스며들기를 바라며 내 이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큰 용기를 준 동아일보사와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께도 언제나 더 나은 작품으로 보답할 것을 함께 다짐한다.
* 약력/정 경 화
1962년 대구 출생
1983년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일반사회학과 졸업
1997년 시조 동우회 '한결' 동인
1999년 대구시조 공모전 입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보길도 시편/홍라나
처용의 달을 안고 즈믄 바다 찾아간다 깨어진 복사뼈로 곤두박힌 질경이풀만 무너진 언덕 괴면서 피돌기로 잇던 섬.
속살 찢어 일구던 땅 푸른 싹 언제 돋을까 희미해진 눈 비비며 북극성 불러와서 파도는 잠들 수 없는 빈 새벽을 깨웠다.
툭툭 튀는 포말 앞에 짙붉게 타는 동백 수평선 끌어당기면 어둠도 부서지고 먼 하늘 가로질러서 천궁을 퍼올렸다.
보길도 비탈마다 돌아갈 길 열어놓고 조선의 검은 깻돌 자르르 물살에 굴려 서늘한 무명의 아침 씻어 널고 있었다.
* 심사평
탄탄한 서사구조로 긴장감 유지/윤금초
절차탁마 내공이 녹아있는 작품 여러 편을 만나게 되어 즐겁다. 「황야에서」(김규), 「억새」(김수연), 「시립도서관」(이승은), 그리고 「신 동의보감」(최우현), 「알터, 그리고 암각화」(홍라나)는 녹록지 않은 「저력」을 보이고 있다. 당선권 반열에 오른 이들 작품이 지닌 밀도나 그 성취도는 저마다 한 두편씩 보내온 사설시조, 혹은 옴니버스 시조(평시조+사설시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비유로 말하면 평시조는 대중가요의 트로트나 뽕짝조의 가락을, 사설시조·옴니버스 시조는 랩이나 힙합 계통의 가락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지닌 공통적 결함은 사설시조의 필요충분조건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설 및 옴니버스 시조의 요체는 서사구조·풍자정신·갈등구조를 오롯이 담아내는 데 있다. 걸쭉한 입담·웅장한 스케일·복선·판소리의 아니리조·휴지와 종장의 대반전 효과 등 여러 구성 요건을 두루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사설시조는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다.
올해는 사설시조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당선작 「보길도 시편」(평시조)은 긴장을 늦출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공이 부족하거나 연륜이 짧은 신인일수록, 주제의식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거기에 압도당한 나머지 서사구조를 포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십상인데 당선작은 그 함정을 절묘하게 빠져나가는 끈기를 잃지 않고 있다.
시조 특유의 폐활량을 유지한 「보길도 시편」이 커다란 임팩트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 당선소감
넘치지않는 가락으로 새벽별을 빛나게/홍라나
길은 멀리 있었다. 굽이굽이 휘어진 그 길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지치고 허기진 것들, 두 손을 내밀어도 속내 보이지 않지만 버릴 수 없는 노래였다. 조금씩 타 들어가 감감히 사라질지라도 또 다시 가야만 할 길이었다.
물 한방울 찾을 수 없는 사막을 헤매고 있을 때 금호 강가에서 하야로비를 만났다. 철새도 길을 잃어 돌아오지 않는 금호에 하야로비 홀로 풀씨를 물어 기슭에 풀어놓고 있었다. 그날 이후 가위눌린 내 꿈 속에 하야로비 한 마리 둥지를 틀었다.
자글자글 끓어대는 매운 뙤약비늘 아래 목타는 나무들 등이 휘고 실뿌리 타닥타닥 핏발 서던 그 여름, 하야로비는 엉클어진 삶을 건져 강둑에 쌓아두고 있었다. 묵정밭 콩꽃, 깨꽃을 부리로 다 어루만지며…
천리 밖 묻혀있는 깊은 잠을 기슭에 풀어놓는 하야로비처럼 시조의 율과 격을 내 가슴에 심어두고 싶다. 이빠진 모음들 물어 시조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가락으로 새벽별을 피워 올리고 싶다. 아직 가야할 길 멀고 험하지만 부족한 작품에 등불 밝혀 길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께 먼저 머리숙여 감사를 드린다. 시조의 길로 이끌어주신 심재완 선생님, 가르침 주신 이기철, 민병도 선생님, 시안(시안)을 키워주신 문무학 선생님께서도 아울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바로 세워준 문우들과 모자람 투성이인 나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아 준 아이들과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 기쁨을 드린다.
◇약력
-- 1960년 경북 고령 출생
--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대학원 졸업
-- 한우리 독서 문화원장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모 과/정 경 화
어둠을 손질하는 휘인 가지를 내려서서
건넌방 반닫이 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
사초(史草)에 오르지 못한 먼길이나 닦을까 보다.
금이 간 함지박엔 이름 없는 별을 불러
이제 흙이 되어도 하늘을 잃지 않겠네
지그시 눈감고 보면 등잔 밑 환한 말씀.
젖은 살은 풀어 손 내미는 검불에 주고
꿈 비록 문드러져도 향기로운 삶이고자
거문고 목쉰 가락에 귀를 가만 세워보네.
울퉁불퉁 모진 자리 더께 앉은 종두자국이
어쩌면 닦다만 길, 그 길마저 버리라며
잊혀진 유훈(遺訓)의 끝을 등 밝혀 지키고 있네.
*심사평
시조라고 하는 형식미의 장르는 졸속으로 이루어지는 시의 길이 아니다. 시일과 고뇌를 지니고 터득해 가는 그 시대, 시대의 율조(律調)인 것이다.
예심을 거친 10명의 39작품이 본심에 넘어왔는데 문철의 <병상일기>, 손상철의 <막사발>, 윤명진의 <군산항 저물 무렵>, 정경화의 <모과>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군산항 저물 무렵>은 관념어의 나열이 눈에 띄어 신선감이 반감되어 밀렸고, <병상일기>는 어휘를 다루는 힘은 능한 편이었으나 상의 나약성이 흠이 되어 제외되었다.
<막사발>과 <모과>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작이었다. <막사발>은 다름아닌 뒤울안 정안수의 그 물그릇이다. 언어와 시의 골격이 튼튼했다. 그러나 작의(作意)가 너무 드러나 거칠었고 작품이 다소 고르지 못해 당선의 자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모과>는 상(想)의 깊이와 언어구사 능력이 빼어났다. '건넌방 반닫이 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사초(史草)에 오르지 못한 먼길이나 닦을까 보다`와 같이 두드러진 이미지와 작품성이 눈길을 끌었고, 응모작 전편이 고른 기량을 보여 당선작으로 가려졌다. 축하와 함께 정진을 바란다.<이상범 시조시인, 김남환 시조시인>
* 당선소감/정경화
시조는, 늘 조화만으로 장식되어 가던 나의 가슴에 작은 들꽃을 하나 심어주었고 그 들꽃이 향내를 내면서부터 산의 말, 나무의 말에 조금씩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자연의 소리 하나하나에 커다란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이 내가 선택한 언어에 의해서 또 다른 세계로 자리매김되는 경이로움은 그러나, 눈부신 설렘이었다. 지난 가을, 모과나무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울퉁불퉁한 모습이 오히려 아름다운 모과를 보며 우리는 왜 각자의 모습 그대로를 가꾸며 살아가지 않는가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마 시조 공부를 하면서 배운 사랑의 자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오늘의 당선 소식은 뒤늦게 문학의 길로 들어선 나에게 커다란 박수소리이기도 하며 또한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설사 남은 길이 깎아지른 벼랑과 늪보다 깊은 수렁뿐이라 할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시조, 거듭나는 길로 이끌어주신 민병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께도 감사를 드리며 한결 동인, 가족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 <정경화 대구 북구 침산1동>
[대한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눈 녹는 마른 숲에/박지현
서릿발 무너지면
황토빛이 드러난다
ㅎ, ㅎ, ㅎ, 언손 녹이는 바람이 불고 있다
아직은 풀리지 않는
단단한 심줄의 땅.
차고 투명한 강물 속에
엎드린 피라미 떼
지느러미 파닥파닥 물풀 하나 흔들어놓는,
저 겨울 껍질을 깨는
뽀족한 눈 하나 있다.
눈 녹는 마른 숲에
텃새 다시 날아오고
뿌리를 감싼 물이 하늘 높이 차올랐다
아득히 잊었던 얼굴
연초록 물이 든다.
꽁꽁 막힌 길을
송곳으로 뚫는 소리
노랗게 물드는 그 울타리 긴 둘레로
가파른 숨결 고를 때
천지가 다 환하다.
* 심사평/윤금초 박시교
생명 부활의 경이로움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 ‘눈 녹는 마른 숲에
’를 당선작으로 민다.
특별히 과장하거나 필요 이상의 튀는 표현을 보이지 않은 단아함이
높은 점수를 받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당선작보다 더 힘을 들인 듯한 함께 보내 온 작품 ‘겨울 구
상나무’가 뒷받침을 잘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눈 녹는 마른 숲에’를 마지막으로 흔쾌히 가려뽑기까지 심사를 맡
은 두 사람은 두 번의 회합을 가졌고,그때까지 남아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으로는 설규철의 ‘겨울 몽산포’,최영효의 ‘입춘’,김
보영의 ‘겨울비’,그리고 곽홍란의 ‘미완의 강’ 등이었다.
이들 네 편의 작품은 당선작과 견주어 볼 때 모두 나름대로의 아쉬움
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예컨대,내용의 단조로움이 지적된 ‘겨울
몽산포’,종장 처리의 미숙이 결정적인 흠이 된 ‘입춘’,시어의 돌
출과 보법의 불안정을 드러내고 만 ‘겨울비’가 그러했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미완의 강’이었다.
생각을 이끌어가는 저력이나 눈부신 서정의 흐름 등에서는 나무랄 데
가 없었으나 종장 마지막 구 처리에서 보여준 어떻게 보면 아주 작은
결함이 결국 문제점이 되고 말았다.그러나 그 아쉬움은 훗날 더 좋
은 결과를 낳게 되리라 확신한다.
이제 이쯤에서 ‘눈 녹는 마른 숲에’ 따뜻한 생명을 불어넣은 당선
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리라.
당선자와 아쉽게 탈락한 모두의 문운을 빈다.
* 당선소감
시조를 만나면서 내 삶에 허기가 조금씩 가시는 것을 느꼈다.고도로
절제되고 응축된 시어,겉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있
는 언어의 아름다움,그 깊은 맛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늘 내
의식의 한 가운데 나만의 비밀열쇠를 거머쥔 채 남몰래 내 길을 닦고
또 닦아왔다.살아 꿈틀대는 운율에 온통 나를 맡기면서….그래,지금
의 결과를 낳았다.
이젠 꼼짝없이 시조에 갇혀버린 셈이다.생활이 각박해질수록,세상이
더욱 감각적으로 치달아갈수록 삶의 진솔한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진정한 그릇은 시조이리라.국적도 모르는 문화와 그 잔재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요즘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로 뻗어있는 것인지 ….
어려운 길을 함께 걷는 분들께 이제나마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할 일이 많아 늘 허덕이는 나에게 어려운 길을 열어주신 심사
위원들께는 마음으로부터의 고마움을 전해 드린다.
장롱 깊숙히 묻어둔 패물처럼 소녀적 꿈을 남몰래 꺼내보며 이따금
즐거워하시던 친정어머니,고려대 문창과 교수님과 학우들,그리고 내
일처럼 기뻐해 줄 친구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 약력
▲본명 박옥실 ▲1954년 부산 출생 ▲현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중
[부산일보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고한리 시편/박지현
녹슨 레일, 모로 누운 무개차 수레바퀴
이마에 등불 달고
추운 밤 밝히던 그날
잔기침 도진 바람이 억새풀을 베고 있다.
발목 부러진 버팀목 여기저기 나뒹굴고
죽은 사내의 울음이
입구를 막고 섰다
갱도는 와르르 무너질 듯 세월 버티며 서 있 고….
풀풀 풀 탄가루에 눈만 빠끔 열어놓은,
삶은 늘 비탈져서
끓어오르던 가래소리
요란한 기적소리도 막장 깊이 갇혔다.
아직 허파꽈리에 남아도는 돌가루, 화산재
기우뚱 폐광 막사엔
사람 자취 묘연하다
가시뼈 겨울나무만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저 어둔 배경에도 둥지 트는 텃새 두엇
정수리 다 젖도록
알을 까고 새끼 치고…
연초록 예감의 봄을 자꾸 숲에 매달고 있다
* 심사평
폐허속 내일 꿈꾸는 반전 절묘/최승범, 장순하
응모 작품수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작품의 수준은 점차 향상되어 가는 추세가 뚜렷하다.
단순한 정서를 시조의 정형에 맞추어 표현하기만 해도 예선에 들던 시대는 지나갔다.이제는 그런 기초적 요건 위에서 더 깊은 창조 정신,더 높은 표현 능력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그만큼 수준이 높아졌고 따라서 경합이 치열해진 것이다.마지막까지 선자들의 손에 남은 작품은 김병환의 '해빙의 아침',유인검의 '대설보',이가연의 '손에 대한 명상 노트',박지현의 '고한리 시편'이었다.
이들은 다 나름대로 개성과 역량을 보여 주었다.'해빙의 아침'은 남북 화해 시대라는 시사상을 평이하게 읊었고,'대설보'는 연모의 정을 눈(雪)으로 상징화했으며,'손에 대한 명상 노트'는 손을 매체로 한 지적 상념을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형상화한 사설시조로 주목을 끌었다.
그 중에서 박지현의 '고한리 시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다 아는 바와 같이 고한리는 강원도 태백 지방의 탄광촌.이제는 폐허가 된 처참한 상황에서 가혹한 인간 생활의 한 단면을 리얼하게 깔아 놓고 그 속에서 새로운 내일을 도출해 내는 막판 뒤집기의 절묘한 수법을 높이 산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으니 이와 같은 폐광을 제재로 한 시조가 근래 더러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예술가에게는 주제나 기법에서만이 아니라 소재나 제재에서도 항상 신선미를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당선소감 - '우리것 오늘 언어로 풀어낼 터'
나의 하늘은 오래 흐려 있었습니다. 며칠 전 현란한 일몰을 구경하러 서해대교 밑 송악 바닷가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포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저마다의 꿈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지만 그것 또한 내겐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랬습니다. 시조를 쓰다가 막막해지면 나는 늘 바다로 가곤 했습니다.저 억겁의 세월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에 내가 펼쳐 놓을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우리의 것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그러다가 오늘,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습니다.무척 기뻤습니다. 오래 떠나와 있던 부산, 태종대 그 앞바다에도 갈 수 있다니!
늦은 나이에 공부한다는 것이 과연 잘 하는 일인지 자주 내게 반문하곤 했습니다.제가 가야 할 길이 아득해지고 더러 안개처럼 가려져 절망 뿐일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제게 열려진 이 좁은 문은 그냥 얻어진 것은 분명 아닐 터, 이제부터 더욱 노력하는 일만 남았음을 저는 잘 압니다.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해야 할 것이고,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준 가족들과 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학우들,그리고 지도교수님들과 이 작은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 약력
◇54년 부산 출생,방송통신대 중문과 졸업,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당선작
구덕포 해조음 2/윤정순
조준을 풀지 못한 초병의 매운 눈빛
철조망 가시 찔려 익사하는 어둠 뚫고
木船의 늙은 고막이 해조음을 들을 때
구덕포 간이역을 미끄러진 기차는
부풀린 그리움을 갯벌에 하혈하고
겨울비 젖은 철길이 굵은 뼈로 서 있다
뱃머리 만장기에 갈매기 끼룩인다
착한 이웃으로 뱃길도 그려가고
어깨를 다친 바다에 붕대를 감는 일출
서울로 인천으로 훌쩍 떠난 이웃들
갯내음 짙은 향을 곁눈질로 더듬으며
풀어진 마음자락을 서녘 노을에 눕힌다
* 심사평/윤금초.정해송
예심을 거쳐 종심에 오른 작품은 박지현씨의 「어느 선반공의 하루」, 김조수씨의 「미포만의 아침」, 유인검씨의 「소래포구에서」, 윤정순씨의 「구덕포 해조음2」이었다.
심사와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미포만의 아침」과 「구덕포 해조음 2」, 두 편이 남게 되어 경합하였다. 두 작품은 바다를 제재로 하여 문명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현장을 그리고 있다.
김조수씨는 언어를 다듬는 솜씨가 뛰어났으며 이미지의 연결도 자연스럽고 신선하나 시조의 정형률에 충분히 용해시키지 못한 점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시조는 정형시이기 때문에 시조의 가락을 체득하여 그 율감을 잘 살려내어야 한다.
이 말은 형식을 잘 지키면서 리듬을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김조수씨는 이 점에 유념해 주기를 바란다.
당선작 「구덕포 해조음 2」는 시조가 지닌 간결성과 응축성의 강점을 살려 탄력있는 시의 문맥을 이미지로 조형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철조망 가시에 찔려 익사하는 어둠을 뚫고」라든가 「어깨를 다친 바다에 붕대를 감는 일출」의 이미지는 선명하고 참신하다. 그러면서도 문명비판적인 주제의식이 설득력을 획득하고 있다.
이만한 기량이면 현대시조의 지평을 넓혀갈 한 몫을 감당하리라 판단되어 우리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 당선작으로 민다. 더욱 정진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당선을 축하드린다.
* 당선소감
어느 모임에 갔었는데 이런 얘길 들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가곡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조」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음악, 하면 피아노등 서양음악을 가리키고 우리의 국악은 특별히 국악이라고 해야만 통하고 그림에서도 당연히 서양화를 가리키며 동양화 역시 위와 같은 경우이며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시는 자유시를 말하는 것이고 정형시인 시조도 같은 경우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의 상대가 성악가였는데, 외국에 나갈 때는 꼭 국악이나 민요를 한 두가지씩 배워서 나가야만이 외국인과 대화를 나눌 때도 체면유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외국에서도 우리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는 말인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서자취급을 하는 것인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참 옳은 말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우리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구문명의 물결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우리 것을 너무 쉽게 놓아 버린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다.
정형시는 우리민족의 전통 시조로써 한국의 정서를 표현해온 장르이고 노래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의 세계화라는 거대한 틈바구니에서 모방과 창조가 진취적이라면 옛것을 가꾸고 지키는 일은 더욱 값진 것이라 생각한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민족시가인 단가 등을 육성발전시켜 범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현살과 비교할 때 우리의 시조 역시 우리민족의 영원한 노래로서 더욱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번 인연을 계기로 시조문학에 대한 더욱 깊은 애정을 갖고 싶다. 시조 창작에 대한 출판물이나 강좌가 부족한 실정이지만 서울 소재 문화센터의 시조강좌가 통신강좌로 수강이 가능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시조를 함께 공부하는 「글거리」동인들의 열정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 약력
1957년 경남 창녕 출생. 영산고등학교 졸업. 「글거리」 동인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평 사 리 / 김종길
1.
포구의 물이 거슬러 강물을 부풀리면
은어떼 그리움 안고 약속처럼 모여든다.
평사리 너른 들녘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치마폭같은 밭뙈기 뜯어먹고 살았던
서로 몸부비며 피붙이로 살았던
검푸른 노송 두그루 가족사처럼 서 있다.
2.
언 땅에 서릿발 딛고 잠들어 섰구나
자운영 터뜨리던 추억을 간직한채
밟혀야 뿌리 내리는 튼실한 보리가 되어
켜켜로 쌓인 설움 한마디씩 잘라내며
한 눈에 볼수 없었던 청보리의 꿈들이
대지를 끌어 안은채 노을처럼 타오른다.
※평사리: 소설 「토지」의 배경 마을
* 심사평
올해는 응모작품 수에서는 흡족하지 못했으나 수준은 향상되고 있다는 느
낌을 받았다. 전 응모작을 읽고 난 뒤 임정집, 유인겸, 문무열, 김차순, 정
영도, 김종길의 작품을 먼저 가려 다시 읽었다. 작품이 고르고 정형시의 특
성을 잘 살린 시인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몇편만 골라서 의견을 나누기로 했
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김종길의 「평사리」, 정영
도의 「기원」, 김차순의 「소나기」였다.
정영도는 노련해 보인다. 대상을 포착하는 시야가 넓고 시조적 운율도 적
절하게 배려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다만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많
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김차순의 경우 새로움의 입장에서 살핀
다면 가장 두드러지는 시인이다. 그러나 이 시인에게는 정영도 시인과 같
은 정형시에 대한 운용의 노련함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겁없이/ 맨 몸을 드러내고/ 하얗게 쌓여간다」와 같은 참신성 때문
에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영도, 김차순의 단점을 적절히 채워주는
시인으로 김종길을 생각했다. 김종길은 우선 응모한 작품들이 두루 고른 수
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작품의 스케일만큼 적절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
다. 당선작으로 뽑은 「평사리」는 조락한 농촌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가작이다. 「치마폭같은 밭뙈기」, 「밟혀야 뿌리내리는 튼실한 보리」,
「대지를 끌어 안은채 노을처럼 타오른다」등이 보여주는 표현의 묘는 시대
를 터치하는 섬세한 음영과 함께 시적 성취로 아름답게 읽혀진다. 대성을
빈다. 〈심사위원: 시조시인 김교한 이우걸〉
* 당선소감
지난 여름 우체국 청사 뒤편 담벼락밑에 까마종이 한 식구 살다갔다. 벽
과 바닥사이 단단한 시멘트 틈새에 뿌리를 박고 살았다. 봄부터 생겨 나와
그 무덥던 여름을 이겨내고 끝내 가을을 맺었다. 그리고 지금은 긴 겨울 속
으로 침잠하고 있다. 그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검질긴 생명력!
시조는 정형률을 지키면서 그 내용을 담아내고 또 절제하는 가운데 언어
를 자유롭게 숨쉬게 하는 것이라고 배워 왔다. 나는 그것이 좋다. 언어들
의 숲을 헤치고 헤쳐서 마침내 단뿌리를 찾아내는.....
출근길에 겨울비가 내린다. 새 천년의 첫해를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 소식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눈보다도 비를 더 좋아한다. 골고
루 내리기 때문이다. 휴대전화가 울리기 전 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고 있다
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일상에 단단히 길들여진 탓이다. 반가운 전화
였다. 전파를 타고 가서 덥석 손이라도 잡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나 혼자
세상 한가운데 발가벗겨져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 두렵고 조심이 된
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
욱 정진하라는 뜻으로 새기고 여름날 까마종이의 생명력처럼 검질긴 시조
를 쓰도록 노력하겠다. 어줍은 흉내를 내기보다는 우리들 삶의 진솔한 모습
들을 우리 가락에 맞게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시조를 쓰고 싶다.
감사할 사람들이 많다. 특히 칠순을 바라보고 계시는 부모님께 조금이라
도 기쁨이 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고마운 아내에게 진달래꽃 한 짐 지다
가 바칩니다.
* 약력
▲1958년 창녕 출생
▲경남대학교 법학과 졸업
▲의령정곡우체국장
[전주일보 신춘문예 시조당선작]
겨울, 금강 하구둑에서/김상선
산발한 바람앞에 흩어지는 눈발, 눈발
온기 잃은 밤바다에 등불처럼 내려앉아
진혼곡 넘치는 바다 넋을 놓고 울음 운다.
제 그리움 못이겨 신열이 돋는 바다
수평선에 닫고 싶은 늙은집의 발목까지
파도를 데리고 와서 적시고도 싶었다.
모눈종이 劃이 지는 바다의 깊은 상처
딱지처럼 붙어있는 폐선의 꿈 하나가
당골네 끓는 神氣運 시나위로 달래는 밤.
분분한 字母들은 눈발보다 더 맵차다
별 하나 저 갯벌에 힘겹게 내렸어도
우듬지 겨울냉기로 쓸고가는 천형의 땅.
* 심사평
현대시조를 일으켜 세운 가람의 고장 전북에서 처음으로 신춘문예 공모에 시조가 신설되어 감개무량하다.
시조의 생명은 형식 즉 정형성이다. 기교적인 언어구사로 그럴싸하게 겉포장한 작품보다는 투박하지만 진솔한 맛이나는 작품에 눈길이 멎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16명의 작품중에서 참신한 주제, 창의성, 그리고 시조의 멋과 맛을 살렸는지 등을 살펴 우선 5편을 가려냈다. 전준의 '창밖으로 보는 겨울풍경5', 이순자의 '사념에 물든 거리', 김조수의 '도장공의 하루' 김수경의 '은가락지', 김상선의 '겨울,금강하구둑에서'.
특별히 김수경의 '은가락지'는 한국적 정서가 물씬 배어나는 돋보인 작품이었다. 한편 형상화가 쉽지않은 주제를 깔끔하게 풀어낸 시적 호흡과 긴장감, 시상을 표출하는 언어의 조탁 능력으로 미루어 앞으로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검증되었다고 보아 김상선의 '겨울,금강하구둑에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조시인 정순량(전주 우석대 교수).
* 당선 소감
너무 빨리 터뜨린 샴페인이었다. 이제 막 습작에 솔솔 재미를 붙여 희미한 길 한 가닥 찾아 조심스럽게 내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당선 소식에 실감이 나지않고 또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엄습해 온다. 모든 것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성큼한 샴페인을 겁도 없이 받아 마셔버린 지금, 이 賞이 내게 있어 毒이 될지 藥이 될련지 마냥 두렵기만 하다.
습작기 1년 반, 나는 늦게 배운 도둑이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나는 새벽까지 돌아 다니는 도둑처럼 부지런히 썼고, 방황도 참 많이 했다. 그러나 시조를 쓴다는 것은 늘 즐거움 그 자체였고 내 생활의 싱싱한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습작을 해야 비로소 바로 설 수 있는 길 하나를 얻는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더 바램이 있다면 우리 시조의 고유한 가락 속에 세상의 喜怒哀樂을 정직하게 그 길속에 담아 내고 싶다.
이 자리에 있도록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인터넷 <시조박물관>운영진과 습작품을 독자 코너에 올릴 때마다 날카로운 비평과 희망을 주었던 금바다의 스승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늘 내 편의 독자가 되어 용기를 북돋아 준 아내와 아들, 딸에게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아울러 培英의 식구들과도-
오늘의 결과에 자만하지 않고 늘 초심자의 자세로서 미력하나마 자랑스러운 우리 고유의 시조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을 다짐해 본다. 모든 것이 부족한 졸작을 선뜻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님과 이 자리를 마련해 준 전주일보사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