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정돈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자신도 모르고 있던 습관이나 행동양식을 깨닫게 됩니다.
그 중에는 트라우마에 의해서 형성된 투사적 또는 자기 방어적인 행동양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착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인 행동을 통해서 반복되는 일종의 퇴행성 자기방기 또는 자기위축같은 것입니다
양말을 빨래통에 넣어야함을 알고 있지만 벗어 던지는 행동과도 같이 자기통제가 안되거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작은 신호에도 위축되어 자기가 하려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등이 있는데 파괴된 의식의 흐름에서 어느 것이 어디를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는 전문가의 오랜 분석이 아니면 찾기 힘듭니다.
그런데 꾸준히 정리정돈을 하다보면 반복되는 행동속에서 스스로를 관찰하여 일정의 패턴을 찾아내는 안목을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습관이나 행동양식을 파악하는 안목또한 차츰 생깁니다.
수십년간 다모으기를 해오신 어머니의 물건과 제 물건을 합체하여 한살림을 꾸며가면서 이제야 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며 그 치유가 참으로 힘든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성경말씀과의 대화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는 감사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대화를 위해서는 우선 상대를 모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리를 만들어야 하고요.
그래서 성경말씀을 통한 치유적 정리정돈의 제일 첫번째로 할 일은 빈 공간을 만들어 (아주 작은 서랍 하나일지라도) 성경말씀의 주인공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리정돈과 함께 꾸준히 성경말씀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내가 나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내가 남을 위해 하는 것이 남을 위한 것일뿐 아니라 그를 위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대화가 진행됩니다.
전문가와 정기적으로 만나서 대화하는 것처럼 즉각적인 만족은 없어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신걸 알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다림에 주저함이 없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위한 죽음이 우리 주변에 이렇게 많다는 것은 어쩌면 이제 죽음자체가 저주가 아니고 축복의 단계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르침이 일상화되어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착에는 죽음밖에 그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파괴된 것은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 조각들을 부둥켜 안고 있노라면 결국 그것을 무기삼아 주위를 파괴하는 상처의 화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위뿐만이 아니라 자기자신까지도 파괴하게 되면 그 아픔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방관자가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리와의 댸화를 통해서 그리고 그 대화를 넘어서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생명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시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지요.
반드시 이루시는 그 분의 일을 돕는 방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리정돈을 하는 것입니다. 때론 혼자서, 때론 둘이서, 때론 여럿이서...
덧붙여 끝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선을 포기하지 않고 하고 잘 할 수 있다면 고착의 올무는 반드시 벗겨질 것입니다.
영원의 시간이 필요할만큼 그것이 우리에게 쉬운 일이 아닐지라도 말이지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찌니라 (로마서 6장 11절)
이는 내게 사는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립보서 1장 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