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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안마을 여름 이야기
오늘은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울력하는 날이다.
엊저녁부터 이장의 '에, 안내 말씀 드립니다......'가 몇 번 이어지고 저녁 해거름에 모여 앉은 동네 분들이 내일 아침 가지고 올 연장과 정리해야 할 곳 등을 이야기한다.
'슬기아빠는 전기 톱을 가져오고 낫 한 자루씩하고 제초기도 가져옵시다. 두 분은 자작 교 쪽에서 넘어오시고 한쪽은 재실 쪽, 위 솔안 분들은 그쪽에서 넘어오세요'
이 동네는 해마다 말복가까이 되면 길 양 옆에 풀이 무성해지고 손이 가지 않는 쪽에는 풀이 숲을 이룰 정도로 무성하여 마을 울력을 하고 말복 놀이도 한다.
작년에는 남자어른들이 풀 깎기를 하는 동안 여자 노인 분들이 군부대 담을 따라서 머우 대도 심고 꽃도 심고 하여 솔 안 마을 들어오는 입구가 환하게 밝아졌고, 농촌 체험을 하는 학생들이나 마을을 찾는 사람들에게 따가라고 권하며 요리방법까지 알려주시기도 했다.
어느새 부지런한 이장님의 풀 깎는 소리가 근처에서 들린다.
재실 쪽에서도 위 솔 안 쪽에서도 풀 깎는 제초기 소리가 들리는걸 보니 .동네 남자분들은 거의 나왔나 보다. 몇 분이 급한 일로 참가 못한다고 양해를 구했으나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울력 때는 길가에 풀도 깎지만 손이 부족한 집의 풀 깎기도 도와 준다.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한 가장들이 있는 두 집의 밭 가장자리, 집 둘레에 풀도 베고 담장 곁에 무성한 풀들도 뽑는다.
'잠시 안내 말씀 드립니다. 오늘 풀 깎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일 끝내고 천수씨 댁 앞뜰에 막걸리가 준비되어 있으니 모두 나오셔서 간식을 드시기 바랍니다.'
너른 마당에서 뒤풀이 막걸리와 두부, 삶은 계란에 수박까지 푸짐하다. 이 때는 안식구들도 모여 일손을 거든다. 울력에 참가하지 못한 안 노인네들이 부침개며 감자를 쪄오시어 더욱 푸짐해졌다.
아직도 자작고개에서 오지 않던 남편 일행들이 저쪽에서 올라온다. 이런 일을 해보지 않던, 낼, 모레 70인 노인네가 땀으로 옷을 흠뻑 적신 채로 올라오니 안되기도 하지만 모두 활짝 웃으며 막걸리 잔을 나누는 것을 보면 '참 정이 많은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울력을 끝낸 남자분들은 몇 분이 위 솔 안으로 고기잡이를 간단다.
옛날에는 동구라고 이름 불렸을 법한 고개마루의 성남씨 집 옆 내리막길로 내려가면서 위 쪽이 위 솔안. 아래쪽이 아래 솔안 마을이다.
위 솔안에는 몇 가구가 살지 않지만 동네 주민들이 먹는 물의 수원지가 그곳에 있고 골짜기를 내려오는
물이 풍부해서 천연의 경치 좋은 곳이다. 더 위로 올라가면 민가가 없고 군인들이 훈련을 받는 장소가 있다.
주로 포도농사를 많이 하는 위 솔안은 일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제법 남자어른의 가슴께나 물이 찬다는 웅덩이와 작은 폭포 등으로 별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경치 좋은 곳 중에 하나다.
지금은 장성한 청년들이 '옛날에 더울 때는 도시락 싸가지고 솔 안 마을에 가서 하루 종일 목욕하다 왔어요' 할 정도로 예전에는 수량이 풍부했는데, 비가 많이 온 요즘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자랑할만한 수량은 아니다.
솔 안 마을의 여름은 너른 논에 백조가 비상을 하면서 시작된다.
흥건한 무논에서 밤새 목이 터져라 울던 개구리 맹꽁이 소리가 잦아들고 어느새 모가 푸른 물결을 이룰 때면 여지없이 백로들이 십여 마리씩 날아들어 근처 나뭇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가 푸른 물결 사이를 헤집는다.
'백로가 뭘 먹으려고 이곳에 몰리나요?' 그들이 비상할 때 푸른 숲, 푸른 하늘과 흰색의 조화가 그림같이 예뻐서 난 은근히 백로의 출현이 반갑지만 농사를 짓는 이들에겐 별로 반가울 것이 없단다. 그들이 주로 찾는 먹이는 부화된 올챙이들이란다. 개구리, 맹꽁이들의 먹이가 해충 등 벌레이기 때문에 그들이 있어야 논에 살충제를 많이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천연기념물인 백로도 귀하고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는 ‘개구리’도 귀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산색이 짙어지고 햇볕이 뜨겁게 마을을 달굴 때면 장마가 시작된다. 솔 안 마을에 내리는 비 소리는 드럼 치는 소리가 난다. 넓게 펼쳐진 포도밭 위를 씌운 비닐 막들이 비를 맞으며 내는 소리다.
이곳은 '포도 향이 흐르는 마을'이란 칭호답게 '운악산 비가림 포도'로 유명한 포도의 고장이다. 논농사나 밭농사보다 포도농사가 많아 산중턱에서부터 하얀 비닐을 씌운 포도밭들이 널리 퍼져있다. 비가림이란 명칭은 포도나무 위에 비닐을 씌워 산성비를 가려주기 때문이다. 포도 밭 옆을 지나다 보면 야생화들을 썩혀 거름을 주는 분, 한약재를 구해다가 밭에 거름으로 주는 이웃들을 보며 정성과 사랑으로 포도를 재배하기에 이 고장 포도가 그렇게 유명하구나 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집에서 저녁밥을 드시고 집으로 가시는 연주 할머니가 구름에 가려 별도 달도 보이지 않으면 '하늘에 때가 끼었다'라고 하시며 '내일 비가 오겠어' 라고 일기예보를 하신다. 조 팝 꽃이 하얗게 피면 ‘ 콩 심을 때가 되었네’ 하시더니 찔레꽃 향기가 코끝을 간지를 때면 ‘모 낼 때가 되었다’고 하는 이분들의 말씀에서 아름다운 풍습을 배우고 잊혀져 가는 조상들의 지혜를 배운다.
여명의 아침, 앞산 푸른 숲에 넓은 허리띠를 두른 듯 안개가 덮이고 솔솔 골안개가 피어 오르면 멀리서부터 '쏴 아' 하고 내리면서 두드려 대는 드럼소리.
온 마을 그득히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동네에서 몇 분이 부침개를 하신다.
밭에 나가 호박과 감자. 부추며 야생 들깨 잎, 매운 고추 등을 넣어 너른 바가지 한 통을 반죽한다.
“치—익’ 하고 기름냄새를 풍기며 부쳐지는 부침개 소리가 비 소리를 닮았다 해서 비 오는 날에는 부침개가 먹고 싶다는 동네 사람들. 부침개 냄새에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막걸리 잔을 비우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비 오는 날이 공치는 날이라는 말이 여기서도 통하는 이야기다.
솔 안 마을 여름의 아침은, 봄에 여기저기 목이 터져라 울어대던 뻐꾸기 소리 대신에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햇볕이 뜨겁게 내려 쬐는 한낮의 매미소리는 왠지 목마른 소리가 나지만 올해같이 비가 많은 날에 우는
매미소리는 풀이 죽고 애절하게 들린다. 아마도 비가 많이 내려 듣는 사람에게 애처롭게 들리기 때문이리라.
올해는 장마가 지난 후에도 또 비가 내렸다.
곳곳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가 연방 보도되고. 어려운 살림에 물에 쓸려간 집을 보며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들도 보인다. 인명피해도 많았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다.
가평에서도 조종 천에 물이 넘치고 많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밤새 비가 내리면 개울 건너 이장 댁이 걱정이다.
작년에도 그 댁으로 건너가는 개울에 다리로 묻은 토관이 떠내려가 한동안 다리가 있는 먼 길로 둘러서
다니던 모습을 보았기에 더 걱정스럽다. 비가 조금 주춤할 때 그 집으로 들어가는 논길을 지나 개울가로
가보았다. 영락없이 그 다리는 떠내려 가고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용달차를 몰고 이장님은 마을을 돌며 손 볼 곳을 살핀다.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로 시작하는 이장의 마이크 소리가 들린다.
새로 마을회관을 짓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비가 너무 와서 공사를 계속 못하지만
마이크 설치를 서둘러서 시험 방송을 하는 중이란다.
'이번 폭우로 가로등에 불이 많이 나갔는데, 집 앞 가로등이 켜지지 않는 집은
이장 집으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날 저녁으로 몇 개 들어오지 않던 가로등은 모두 불을 밝혔다.
해를 언제 보았나 할 정도로 두 달 넘게 비가 내린다.
인간이 만든 재앙이라고 하는 기후변화. 우리나라도 이제 아열대로 변하고 있단다.
'정말 비님이 너무 오신다' 자연에 대한 신앙이 많은 우리 민족답게 '비님'으로 표현하시는 마을 어르신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뜻에 어긋나는 짓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저지르고 있는가? 결국 우리대가 아니더라도 우리 자손들에게 가게 될 피해를 너무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드럼을 두드리듯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던 폭우는 결국 모든 농산물을 다 망가뜨려 놓았다.
우리 집에 튼실하게 열매 맺던 오가피 열매도 다 녹아 떨어졌고, 오이나 호박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몇 그루의 과실나무... 봄에 야심 차게 열매를 맺는 가지마다 봉지를 씌워주고 튼실하게
열매 맺기를 기다렸지만 허허롭게 매달린 봉지를 만져보면 잡히는 게 없다.
그뿐이랴. 감자도 고구마도 조림용으로 밖에 쓸 수 없게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옆집의 '마' 농사도 줄기가 죽어간다. 토마토, 가지 등도 조그맣게 열매를 맺다가 썩어 버린다.
'고추가 이렇게 망가져서 어떻게 해요?'
태양초 고추를 잘 말려서 용돈벌이를 하는 이웃 할머니께 걱정스럽게 말을 건넨다.
'뭐 잘 될 때도 있고, 이렇게 안될 때도 있지요' 태연히 웃어주시는 이웃 어른.
'어차피 고추 농사는 틀렸으니까 고춧잎이랑 성한 고추 따다 먹어요'
나는 이분에게서 삶의 철학을 배운다. 푸념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을 사랑하고 사시는 분들.
비록 당장 용돈이 떨어지면 자식들한테 아쉬운 소리 하게 되는 것이 걱정이시지만
내 것이 잘 못 되는 것보다 아들네 포도농사가 잘 안 되는 것을 가슴 아파 하시는 분.
'어쩌겠어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걸. 내년에는 잘 되겠지요'
이분들에게 어찌 구구이 인간이 만든 자연재해를 설명할 수 있으랴.
그냥 평생을 하늘만 바라보며 사시는 이 분들에게 재해의 보답이 조금이라도 적게 내리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 새벽 부옇게 앞산이 안개로 덮여 있다. 또 비가 오려나? 근심 반으로 산책길을 나서는데 어느새
그 어른이 밭에 나와서 허리를 굽히고 일을 하고 계신다.
'일찍부터 뭘 하세요?'
'김장 배추 심으려고 풀 뽑고 밭 갈았어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며 함빡 미소 짓는 어른.
'이왕에 다른 농사는 다 틀렸어도, 김장 배추하고 파나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집과 가까운 텃밭이라 얼른 시원한 물 한 대접 떠다 드린다.
하늘을 본다. 뿌옇게 덮여있던 안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동쪽 나무 사이로 벌건 빛이 돈다.
오랜만에 활짝 웃는 태양을 보게 될 것 같다.
힘이 없이 들리던 매미소리도 우렁차고 마을 안이 갑자기 수런수런 바빠지는 것 같다.
그 해 봄 4월
흐린 날씨였다.
늘 들리던 소리가 오늘은 구름속에 감추어진 듯 조용하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 창밖을 내다보던 친구가 아무말도 못하고 손가락질을 한다.창문으로 보이는 학교 앞길을 서울 의대생들이 하얀 가운을 입고 마치 상여행렬처럼 침묵으로 거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뒤를 이어 검은 교복의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어나갔다. 그 뒤에는 덕성여고 학생들이 이어졌고, 잠시후 매일 동생학교라고 칭하며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던 휘문고등학교 학생들이 '나와라, 나와라'를 외치며 거리로 밀려나가고 있었다.
그날은 4월 19일.
우리 학교 교문은 철통같이 잠겨 있고, 무섭기로 소문난 검은곰 선생님이 보초병처럼 문앞에 긴 몽둥이를 들고 서있다. 그 앞에는 몇몇의 고등학교 언니들이 울며 서 있다. 볼이 벌겋다.
잠시 우왕좌왕하시던 선생님들이 수업에 들어오셨고, 선생님들의 호령에 못이겨 모두 제자리에 앉았으나 눈동자들은 모두 창가로 향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따쿵따쿵' 하늘아래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총소리다'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처럼 소리가 터진다.
교탁앞에 계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우리는 일제히 일어섰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마치 덮여있는 장막안에서 내는 소리같은...
짙게 깔린 구름밑에서 반향으로 되돌아 오는 소리... 경무대 쪽에서 나는 총소리였다.
선생님들이 황급히 교실밖을 나가신다. 조용히 앉아있으라는 엄포를 뒤로 남기고-
겁에 질린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친구, 호기심에 밖을 내다보며 소리 지르는 친구, 그때였다 한때의 고등학교 언니들이 교문을 향해 달려나갔고, 철통같이 지키던 검은 곰 선생님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뛰어드는 언니들을 잡는다. '이놈들아, 나가면 죽어-'
1960년 4월 중학교에 입학한지 두달이 되어가던 때였다.
우리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너무도 시끄럽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수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안국동 사거리에 자리잡은 우리학교 길건너에는 종로 경찰서가 있었고, 인사동 쪽으로 내려가면 야당인 '민주당사'가 있었다.
매일 학교에 등교하면서 듣는 소리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부정선거 다시하자'라는 구호를 민주당사에서 외치기 시작하면 '갈아본들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등의 구호로 종로 경찰서에서 맞받아친다. 각종 구호와 노래소리로 선생님의 수업소리는 도대체 들리지도 않았다.
입학하고 얼마 안되어 3.15일 선거가 있었고,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타도하는 민주당의 성토가 날로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연일 데모하는 학생들의 소식이 들려오고 곳곳에 경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불안해 보였고 거리도 어수선했다.
'데모하는 학생들이 몽둥이에 맞아 많이 다쳤대' '부산에서 누군가 죽었대'
점점 민심은 흉흉해졌고, 학생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은 때 고려대학생들이 집단으로 거리로 나섰고, 대학생들이 모두 일어났다. 라는 소리가 들리고 죽고 다치고 했다는 소식들은 신문보다 입소문을 통해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해 나는 안국동에 있는 풍문여중 1학년에 입학을 했다. 입학한지 얼마 되지않는 시기라 하얀 카라에 풀을 먹여 빳빳이 세운 새교복이 입고싶어 공일에도 학교에 가고 싶었고, 친구네 집에 갈때도 교복을 입고 주위를 살피며 다닐때였다. 학교는 당시 경무대와 가까운 거리였고, 그지역은 유달리 학교가 많이 밀집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로경찰서와 민주당사와 가까이 있었던 사거리의 우리학교는 고스란히 그 소음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4월 19일
하늘도 알아주는 듯 검은 구름에 덮여있었고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또 큰 비가 올것 같은 수런수런한 분위기였다. 학교에서는 경무대 쪽에서 총소리가 나자 교사들의 긴급회의가 열렸고 결국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귀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담임선생님은 절대로 다른 곳으로 가지말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누누이 당부하셨다.
당분간 학교에 나오지 말고 라디오를 통해서 알릴테니 잘 들으라는 말씀이었다.
낙원동에서 살고 있던 나는 이웃의 친구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민주당사 쪽의 한불럭 전에 파출소가 있었다. 이미 파출소는 폐허가 되어있었다.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깨어지고 그곳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그 아래쪽 파출소를 향해 달려갔다. 연방 트럭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트럭을 보면서 눈을 가리고 말았다.
트럭에 올라탄 대학생. 민간인들... 그리고 머리를 박박 깎은 고등학생하나를 차에 태우며 곤봉으로 머리를 쳐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친구와 나는 무서움에 질려서 엉엉 울며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정치대학' 교정을 지날 때였다. 학교안에 수많은 대학생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머리띠를 하고 뭔가 악을 쓰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철철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뭔가 옆으로 발갛게 단 동그란 물체가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후에 나는 그것이 총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몸서리를 치곤 한다.
바로 정문을 막아선 경찰 기동대와 대학생들의 육탄전이 벌어져 학생들은 머리와 이마에 피를 흘렸고, 구호를 외치며 밖으로 나가려는 학생들과 경찰들과의 혈전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후
그 날 고려대학생들이 트럭을 타고 돌며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를 외치며 시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거리 청소를 하고 부서진 곳을 고치고 바로 세우며 4.19 학생들이 일으킨 민주화운동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어갔다.
낙원동 한복판에 살고 있는 탓에 파고다 공원에 세웠던
수많은 거리의 부량아들이 세도가의 집들을 쳐들어가 집을 부수고 가구와 기물들을 부수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당시 귀한 텔레비젼등을 쌓아놓고 불지르는 모습도 보았다.
정치깡패라 했던
6.25를 겪고
중동의 오래된 1인체제의 독재자들이 연일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어 피를 부르고 세계를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지만 이미 우리가 40여년 전에 일으킨 민주화 운동은 전세계로 퍼지며 또 다른 암흑의 세계로 퍼져갈 것이다.
민주주의도 자유도 좀더 성숙된 자세로 맞이하고 좀더 인간적인 법과 도덕적인 질서가 요구되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의 사고와 의식은 어디까지 왔을까?
모든 살아 숨쉬는 생물체에게 '나보다는 너를 생각하는' 그래서 이루어지는 유토피아 왕국을 건설하는 진정한 봄은 언제나 올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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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_해_봄_4월.doc 솔안마을_여름_이야기(완성본).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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