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복사지와 천재 최치원
경주 숭복사지는 외동읍 말방리 마을 안길 깊숙한 곳에 위치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마을 이름처럼 말방리는 신라시대 ‘방’ 중에서 마지막부분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에도 도읍지로부터 끝자락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도 경주시의 남단에 위치해 울산과 경계를 두고 있는 지역인 셈이다.
안내 없이는 찾아가기 어려울 정도여서 글로 설명하기는 더욱 난해하다.
신라시대 왕경지역에 대해 삼국유사에 1천360방 또는 360방으로 기록된 부분이 혼재해 신라시대 경주의 도시규모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겨레문화유산연구원 신창수 원장은 방으로 불렸던 구역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60m 크기로 추산되며, 당시 도심에 360방이 있었다고 해석한다.
1방에 15인 기준으로 약 17만명의 인구가 살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신라시대 서라벌에 17만 가구 100만명의 인구가 살았을 것이라는 해석보다 17만명이 살았을 것이라는 학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신 원장은 주장한다.
어찌됐든 지금 경주 외동의 말방리 숭복사지는 신라시대 궁성으로부터는 제법 떨어져 있어 외곽지에 형성됐던 마을로 추정된다.
경주시가지에서 승용차로 천천히 찾는다면 거의 한 시간은 소요되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숭복사터에 들어서면 그 어떤 폐사지에서 경험한 것보다 훨씬 크게 황량함이나 허무를 느끼게 된다.
넓은 절터 가운데 고목이 된 감나무가 우뚝 서 있고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집이 덩그렇게 얹혀있다.
낮은 두 기의 탑은 당당한 삼층석탑 본래의 모습은 흔적도 없다.
동탑은 2층 몸돌이 없어졌고, 서탑은 2층과 3층 몸돌과 3층 지붕돌이 없어져 키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은 모습이어서 황량하기 짝이 없다.
숭복사지는 신라시대 천재 최치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으로 유명한 대숭복사비명이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신라시대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말방리라는 마을이름과 모양새만 절터였다는 것과 탑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숭복사지, 최치원의 향기가 짙게 묻어나는 역사기행을 시작한다.
❚숭복사지 삼층석탑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마을 안길 끝자락에 위치한 숭복사지는 흩어진 석재와 훼손된 쌍탑이 서 있는 가운데 감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고 까치집이 덩그러니 있어 더욱 황량하게 보인다.<br>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마을 안길 끝자락에 위치한 숭복사지는 흩어진 석재와 훼손된 쌍탑이 서 있는 가운데 감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고 까치집이 덩그러니 있어 더욱 황량하게 보인다.
숭복사 터는 경주 외동읍 말방리 산23-1번지 마을 안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 토함산 끝자락에 앉아 있다.
삼국유사에는 곡사(鵠寺)로 기록되어 있는 사찰로 신라 헌강왕때 크게 중창해 숭복사(崇福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최치원의 ‘사산비명’에 숭복사비의 비문이 포함돼 자세한 조성 배경이 알려졌다.
3단 석축으로 쌓은 석축 위에 법당과 탑이 동서 쌍탑으로 배치됐다.
탑은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 석탑으로 조성된 통일신라시대 양식이다.
기단의 몸돌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특히 위층 기단에는 기둥조각 사이로 면마다 팔부중신, 불법의 수호신을 조각했다.
탑의 몸돌에도 조각을 했는데 1층 몸돌 네면에 모두 문 모양의 조각을 했다.
지붕돌 밑면은 4단의 받침으로 조성됐다.
두 탑의 지붕돌 모서리 부분에 풍탁을 달았던 구멍이 4개씩 뚫려 있어 일반 석탑의 2개에 비해 이채로운 모습이다.
두 탑이 모두 심하게 훼손되고 일부 석재가 사라지고 없어 복원했지만 탑의 모습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동탑은 기단의 일부가 훼손되었고 2층 몸돌과 지붕돌의 장식이 없어졌다.
서탑은 기단 일부가 훼손된 데 이어 2층과 3층 몸돌이 몽땅 없어졌다.
3층 지붕돌도 통째 없어져 2층 나지막한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지금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지만 보는 이들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천년만에 복원한 사산비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숭복사지 쌍귀부. 머리모양이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br> 남아 있는 귀부의 머리가 온전한 것으로는 유일하다.<br> 쌍귀부는 경주 남산 창림사지와 무장사지에 이어 세 곳이 전부다.<br>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숭복사지 쌍귀부. 머리모양이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남아 있는 귀부의 머리가 온전한 것으로는 유일하다.
쌍귀부는 경주 남산 창림사지와 무장사지에 이어 세 곳이 전부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숭복사는 신라 원성왕 때에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참여한 가운데 건립됐다고 전한다.
785년에서 798년 사이에 창건된 것이다.
원성왕릉 뒤편에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원성왕의 명복을 축원했던 사찰로 분석되고 있다.
숭복사에 남아 있는 숭복사비문은 왕명으로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다음해에 지었다고 전한다.
비문은 886년에 지어진 것이니 숭복사비는 숭복사가 건립되고도 한참 후에 세워진 것으로 판명된다.
아비가 지은 절에 아들이 쓴 비문의 비석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의 하나로 유명한 ‘대숭복사비’는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돼 귀부와 비석조각 몇 개만 남아 있다.
귀부는 용의 머리모양을 한 쌍귀부 형태로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 입구에 전시되고 있다.
쌍귀부 비석받침은 신라시대 9세기초에 나타났다가 9세기말에 사라진 형식이다.
쌍귀부는 경주 무장사지와 경주 남산의 창림사지와 숭복사지, 포항 법광사지에 남아있을 뿐이다.
머리 부분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숭복사지의 귀부가 유일하다.
특히 거북의 머리모양이 용의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비석조각은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나누어 보관되고 있다.
‘초월산대숭복사비명’으로 전해지고 있는 사산비명의 하나인 숭복사비문은 신라말과 고려초 불교와 역사, 문화, 정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숭복사지에 복원된 숭복사비는 2014년 2월,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비문을 교감하고 행렬을 맞춰 새로 조성하고,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의 글자를 모방해 새겨 높이 3.81m 크기로 만들어 세웠다.
귀부는 경주박물관의 귀부 모습을 본 떠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최치원 초상화.
❚중국에서도 이름 날린 최치원
12세에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6년만에 급제한 천재 최치원. 지금 경주는 최치원 인문학을 소재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br>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최치원 초상화.
12세에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6년만에 급제한 천재 최치원. 지금 경주는 최치원 인문학을 소재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최치원은 본관이 경주로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으로 불린 신라사람이다.
신라 47대 헌안왕 때인 857년에 태어났다.
12세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만인 18세에 예부시랑이 주관한 빈공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의 아버지가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아들이 아니다”라며 공부에 집중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단다.
최치원은 과거에 합격하고 중국 낙양에서 유랑하면서 시 창작에 몰두해 금체시 5수 1권과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등을 남겼다.
876년 당나라 선주 표수현위의 벼슬에 올랐다.
이때 글들을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5권이 있다.
이어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었다가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제도행영병마도통의 벼슬로 ‘토황소격문’을 지어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게 됐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1만여수에 이르는 글을 지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최치원은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간 당나라에 머물면서 유명한 당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됐다.
‘당서’ 예문지에 최치원의 저서명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최치원이 29세에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로 임명했다.
최치원은 ‘대숭복사비문’ 등의 명문을 남기는 한편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해 국왕에게 진헌했다.
그러나 당시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정국이 어지러운 시대로 최치원이 그의 지혜를 나라일에 접목시킬 수가 없었던 형편이었다는 것이 사가들의 안타까운 탄식이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세력이 몰락하고 호족세력이 득세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 사찰을 지키다가 해인사 경내의 공양탑 기문에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 “당토에서 벌어진 병(兵), 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해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렴 흐트러져 있었다”고 적었다.
최치원은 귀국 후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려 했지만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을 희망해 지방의 관리로 전전했다.
890년 대산군 지금의 전라도 태인과 천령군 지금의 경남 함양, 부성군 지금의 충남 서산 등지의 태수를 역임했다.
그는 894년 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정치적인 개혁안은 귀족들의 견제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최치원은 40여세의 장년에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괴리를 고민하다 결국 은퇴하고 경주 남산과 강주 지금 경북 의성의 빙산,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창원의 별서, 동래의 해운대 등을 유람하며 많은 글을 남겼다.
만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있지만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기록은 없다.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의하면 908년 효공왕 12년까지 생존했던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산수를 방랑하다 죽었을 것이라는 말과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대적인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 등으로 자살했을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최치원은 해인사 화엄종장인 희랑에게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 까지 남아 있어 희랑을 통해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는 역사가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유학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와 노장사상, 풍수지리설까지 복합해 학문을 폭넓게 익혔던 천재학자로 전한다.
최치원의 저술로는 시문집 ‘계원필경’ 20권과 ‘금체시’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1권, ‘중산복궤집’ 5권, ‘사륙집’ 1권과 문집 30권 등이 있다.
불교에 관련된 저술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석이정전’, ‘석순응전’, ‘사산비명’ 등이 있다.
그의 글씨도 유명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첫댓글 중국에서도 최치원
신라에서도 최치원
고려에서도 최치원
오늘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최치원
유명하다 최치원
닮고 싶다 최치원.......................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