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신을 향한 믿음’을 선물했다.
내 낡 은 책 이
이 끈
믿 음 의 세 계
신기한 마음에 덥석 책장을 넘겼다. 드득, 잘 붙어 있던 종이 끝 부분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왔다. 어쩌나. 슬그머니 손을 떼고는 책장을 원래대
로 덮었다. 책이 참 오래됐다면서 말끝을 흐리는데, 이제 오십 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작고 낡은 책이 무엇이길래.
“고등학교 1학년 때였죠. 한 예쁜 여학생한테 만나자고 쪽지를 보냈더니,
그 어머니가 연락을 하셨어요. 나가 뵀더니 자기 딸이 외모와 달리 초등
학교 육 학년이니까 나중에 사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저한테
이 책을 쥐여 주셨어요. 바로 성경책입니다.”
속 차리라는 뜻 아니겠느냐며 멋쩍은 듯 재미난 듯 웃어버리는 김성곤
의원. 손때를 타고 시간을 타고 제목마저 사라질 만큼 낡아 버린 이 책
이, 인생의 첫 전환점이 될지 그때는 몰랐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곁에 두
기만 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었을 때, 책은 ‘신을 향한 믿음’을 선물했다.
“엉겁결에 받아든 책이 종교에 눈뜨게 해준 겁니다. 그러면서 여러 종교
를 공부했고, 지금의 신앙을 갖게 된 거고요. 오십 년 동안 지니고 있을
만한 충분한 이유죠!”
열일곱 살 가슴 두근거리던 소년에게 건네진 책은 경전(經典)에 대한 갈
증도 함께 주었다. 18년을 정치인으로 사는 동안 일에 치우고 시간에 쫓
겨도 경전만은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나보낼 수 없었다. 선
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답을 준 이가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하는데요. 그 행복이 무엇인지 가장 깊게
답해주는 게 종교이고, 그 답이 경전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원불교 교
전(敎典)에서, 다른 이들은 성경이나 불경 등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가는
거죠. 그래서 저세상에 가져갈 책을 선택하라면 전 원불교 교전을 가져
가고 싶어요.”
김성곤 의원은 종교를 믿지 않아도 모든 경전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 속에 녹아있는 철학이 마음을 다스리고 주어진 삶에 어떻게
만족할지 알려줄 것이라고 했다. 믿음도 없이 경전을 어찌 읽나 고개를
가로젓다가, 죽음 이후까지 지니고 싶다는 말에 찌릿 마음이 울렸다. 돈
을 많이 벌고 싶다는, 내 집을 갖고 싶다는, 남들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
고 싶다는 도저히 풀길 없는 문제의 답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열일곱 살
가슴 두근거리던 소년에게
건네진 책은
경전(經典)에 대한 갈증도
함께 주었다.
소 년 의
마 음 을 훔 친
그 이 야 기
저게 무얼까 흘깃거리기를 여러 번 하고서야 책꽂이가 지닌 비밀을 깨
달았다. 김성곤 의원의 책꽂이는 십진분류법에 따라 철학으로 종교로
역사로 흐트러짐 없이 정리돼 있었다. 도서관 같은 그 책꽂이 앞에 서기
만 해도 주인의 독서 취향이 훤히 보였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황석영 작가의
초기 작품을 즐겨 읽기는 했는데, 그것도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소설이
라 마음이 갔던 거고요. 제 눈은 세계의 지리나 문화, 역사에 늘 머물렀
어요. 그래서 김찬삼의 『세계 일주』는 학창시절 제 최고의 책이었죠. 우
리나라 최초의 세계여행가가 들려주던 각국의 자연과 문화, 인간사 앞
에 10권이라는 분량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국외여행이 무엇인지도 생소하던 시절, 지구 서른두 바퀴의 거리를 여
행했던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그가 쓴 여행기는 수많은 청소년을 잠 못
들게 했고, 꿈꾸게 했다. 오지 여행가 한비야도, 세계적인 산악인 박영
석도 그들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리도 또 한 명, 소년 김성곤이 역사
학도의 길을 선택하는 계기 중 하나가 돼주었다.
“그렇다고 매일 철학이니 역사니 그런 쪽만 파고든 건 아니에요. 어렸
을 때는 아버지가 엄하신 데도 동네 만화방이 제 아지트였거든요. 당시
제 마음속에는 제비호를 타고 다니며 악당을 무찌르던 라이파이가 뜨
겁게 살고 있었죠.”
정의의 용사 라이파이, 전설로 남은 우리나라 첫 SF 만화영웅이여! ‘ㄹ’
이 새겨진 두건을 쓰고 태권도로 악당을 무찌르던 김산호 작가의 라이
파이는, 어린 김성곤에게 보자기를 두르고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정의
를 외치게 했었다.
마 력 의 책 을
혼 자 아 닌
그 들 과 함 께
역사학도에서 종교학 교수가 되는 길을 걸었던 김성곤 의원에게, 역사
와 종교는 식지 않는 화두이자 탐구대상이다. 역사 공부에 몰두해 있던
시절, 문득 역사를 관통하는 법칙과 순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답을 찾던 그에게 운명처럼 두 권의 책이 다가왔다. 함석헌 선
생의 『뜻으로 보는 한국사』와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였다. 그에
게 전자는 종교적 관점에서 보는 역사를, 후자는 역사의 관점에서 보는
종교에 대해 들려주었다.
“두 책이 쏟아내는 역사와 종교의 깊고도 복잡한 관계에 함몰됐다고 할
까요. 한없이 빠져드는 마음을 주체 못 했고, 그래서 종교학을 가르치
게 된 건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역사와 종교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
의 존재죠. 근래 가장 재밌게 읽은 책도 법륜스님과 오연호 기자가 쓴
『새로운 100년, 가슴 뛰게 하는 통일 이야기』인데요. 좌우의 갈등과 통
일에 대한 갈등을 어떻게 통합해서 통일의 힘으로 삼아야 하는지 흥
미롭게 풀었더군요. 특히 ‘손잡을 시점에 와 있다’는 글귀가 내내 마음
을 울렸습니다.”
김성곤 의원은 이렇게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누군가에게 선물하
길 즐긴다. 이미 법륜 스님의 책과 원불교 교전 수십 권이 누군가의 품
에 안겼다. 결혼하는 이들에게는 『스님의 주례사』를 선물하는 것으로 축
하와 조언을 대신하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책 속에 모두
담겨있어서다. 그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써보는 건 어떤지 물었더
니 손사래가 단호했다.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쓴 책은 책꽂이에 꽂힐 자격이 없으니까요.
꽂힌다 해도 오래가진 못하죠. 지금은 쓸 때가 아니라 깨달아야 할 때에
요. 저는 독서란 자기 수양을 통한 진리탐구라고 생각하거든요. 아직 진
리를 깨닫지 못했으니 제 독서가 부족한 겁니다. 언젠가 진리를 깨달아
서 쓸 수 있는 자격이 생기면, 그때 제가 쓴 책을 꼭 읽어봐 주세요.”
그를 움직인
책 한 권
고난의 역사에서
배움을 얻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항일과 반독재에 앞장섰던 함석헌 선생의
저서. 한국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정의하면
서, 좌절하거나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극복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발간 초기의 책
은 한국역사를 성서적 입장에서 풀어냈지
만, 해방 이후 종교적 견해에 묻히지 않겠다
며 내용과 제목을 수정하고, 한국전쟁 이후
의 역사를 더해 재발간했다.
함석헌
한길사
Interview Box
지난 11월 새정치민주연합 전국대의원대
회준비위원회(이하 전준위)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내년에 치를 전당대회 틀 잡기
가 상당 부분 진행 중인데, 이번 전준위
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중용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지나치지도 모
자라지도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는 중용
의 정신을, 전준위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동안 당 내부에서 친노니 비노니 온건이
니 강경이니 하는 많은 대립이 있었다. 그
러나 이제는 한쪽이 가지지 못한 걸 다른
쪽이 채워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선
과 악 같은 극단적인 관계가 아니라 동전
의 앞면과 뒷면처럼 보완적인 관계로의 변
화가 필요하다. 당의 내일과 안녕을 위해
서는 친노든 강경이든 모두가 필요한 축이
기 때문에, 서로 인정하고 협조하면서 가
는 게 답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병진(竝進)의 부재로 아
파하고 있다. 그 아픔을 만져주려면 먼저
함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지 않
겠나. 화합하는 전당대회, 공정한 전당대회
그래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전당대회를
만들겠다. 그것이 차후 총선의 결과를 가름
하는 기틀이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