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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7월 11일
[박왕자씨 피격 사망 사건]으로 인하여 아직도 금강산 관광은 중단 상태이다.
사진 오른쪽 해변이 피격 사건의 현장으로 철책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러나 파도가 잠잠한 새벽 시간에는 들어가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나도록 완벽하게 철망이 차단하지를 못한다.
우리 일행은 이 호텔에서 숙박을 하였다. -
금강산 여행기
- '금강산 여행'도 해외 여행일까?
국내 여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통하여 해외 여행시 필요한 출입국 심사가 진행되므로 해외 여행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금강산 여행]이 중단되기 5개월전 2007학년도 경주 동천초등학교 4학년 해단 기념 여행이다.
교감으로 승진발령이 나기 직전에 교사 시절에 마지막으로 실시한 직원 여행 -
☞ 2008년 2월 18(월) ~ 20(수) 2박 3일
◆ 동학년 9명중 부친 수술관계로 불참한 이선생님을 제외하고 8명이 참여하다.
겨울 방학 직전 ‘한국해양소년단 경북연맹’ 사무국장을 맡고 계신 전 선배님께서 '금강산 여행안'을 발의하자 동학년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여 드디어 대단원의 막이 오르다.
◆ 7월 11일에 금강산에서는 우리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 사망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중단된 금강산 관광은 아직도 재개가 되지 않고 있다.
중단이 되기 불과 5개월전에 우리들은 금강산을 다녀왔다.
참으로 운이 좋은 경우이다.
이를 계기로
'여행은 할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해야한다.
한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찾아오기가 어렵다!'
는 사실을 직시했으면 좋겠다.
위의 사진 오른쪽 해변이 피격 사건의 현장이다.
사진을 확대해 보면 해안에 철책선이 보인다.
철책과 바닷물 사이에는 파도가 칠때는 사람이 들어가기가 어렵지만 잔잔한 새벽시간이나 바람이 불지 않을때 그 사이에는 제법 넓은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은 산책을 즐긴다.
우리 일행도 물론 새벽 산책을 즐겼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선부터는 접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산책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깊숙하게 들어가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곳에 '박왕자'씨가 들어갔다.
우리 상식으로는 그럴 경우 초병들이 들어오지 말라고 경계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북측 초병들은 일정한 선을 넘었으므로 곧바로 조준사격을 하였다.
경직된 체제의 북한!
그로인한 희생자가 '박왕자'씨다.
사과를 요구했지만 끝내 거부를 하는 바람에 금강산 관광은 아직도 중단되어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 18일 새벽 경주에 거주하는 선생님들은 랜트를 한 12인승 스타렉스 승합차에 새벽 6시경에 모두 승차하였다.
포항 팀은 ‘부산낚시백화점’에서 내가 승차하고 양학육교밑에서 장선배와 전선배가 승차하여 북으로 북으로 달리다.
날씨는 쾌청하다.
집결지로 가는 도중에 바다가 보이는 아주 경치가 좋은 휴게소에서 조식을 하였다.
[화진포 현대아산 휴게소]에 집결하여 금강산 관광에 필요한 여권과 관광증을 수령하다.
우리가 타고 간 차는 집결지에 세워두고 점심을 해결하였다.
이제부터의 이동은 편도 1,500원을 받고 운행하는 현지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버스를 타고 [남측출입국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입국수속후에 국군이 근무하는 남측 초소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였다.
군사분계선에는 거대한 구조물이 세워진 것일 거라는 상상과는 다르게 별도의 구조물이 없이 회색페인트로 칠해진 시멘트 말뚝이 경계였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우리 쪽은 가로등 전구가 좀 높은 곳에 1개, 낮은 곳에 1개해서 2개가 설치되어 양방향으로 비추고 있었다.
반면에 북측은 1개의 전등만 설치되어 심각한 전력난을 실감케하였다.
우리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면, 잘 받아주는 우리 측 군인들과는 달리 북한군들은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정말 무표정 그 자체였다.
마네킹을 보는 느낌이다.
북측 땅에 들어서자 말자 우리 일행을 응시하며 부동자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근무 중인 북측경비병들을 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붉은 깃발이 들려있었다.
그 깃발의 용도를 조장(가이드라는 말이 외래어여서 북측에서 사용이 곤란하므로 이곳에서는 조장이라고 부름)이 설명하였다.
이곳에서는 군사적인 이유로 사진촬영을 하지 못하게 한다.
만약에 이를 어기고 촬영을 하는 관광객이 보이면 발견즉시 깃발을 위로 힘차게 올려서 보고를 한다.
그와 동시에 탑승 차량을 정지시킨 후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벌금이나 구류 등)를 취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직원 중 한 명이 공교롭게도 붉은 깃발에 의한 조치를 받아 아찔한 순간을 보낸 경험이 있었다.
공포심이 느껴지는 으스스한 체제의 흔적을 아직도 발견할 수가 있는 모습이었다.(상세한 내용은 글 후반기에...)
긴장을 하면서 ‘영랑호’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북측출입국사무소] 통과를 하였다.
TV에서 자주 보는 둥근 형태의 북한군 모자를 쓴 여군이 사진과 얼굴을 철저하게 대조한 후에 우리들은 북으로 들어갔다.
이동중 버스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우리 측 해안에는 북한에서 침투하는 간첩을 잡기위하여 해안선마다 철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측에 들어가니 해안선에 철책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우리 측에서 북측으로 보내는 간첩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북측에서 우리 측으로 보내는 간첩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철책을 설치하는데 필요한 자금이 북의 경제력에 비해서 과도하게 소요되기 때문이다.
해안선에 철책을 설치하는 대신에 북측 도로변에는 초강력 고압선이 설치되어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이는 북측주민들이나 군인들이 남에서 올라온 관광객들의 통로에 함부로 접근을 하지 못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담배를 피우던 일행 중 한명이 정해진 곳에서 담뱃재를 떨지 않고 이동을 하면서 담뱃재를 털었다.
그것을 본 북한초병이 험하게 제지를 하는 모습은 경직된 그들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았다.
다행이 별다른 충돌 없이 우리 일행들은 [금강산 관광 특별구역]으로 이동을 하였다.
이동 중 자세히 살펴보니 도로 양쪽에 철망으로 외부와 구분을 해 두었다.
우리 일행들이 탑승한 차량과 사람들은 모두가 정해진 구역 철망 안에서만 이동이 가능하였다.
금강산 특별구역에는 원래부터 살고 있던 주민들이 있었다.
이곳에 특별구역을 새로 만들면서 남측관광객들의 눈에 쉽게 관찰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집들은 도로변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뒤쪽으로 새롭게 지어서 이동을 시켰다.
그런데 새로 만든 집들을 보니 하나같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같이 똑같은 규격의 작은 집들이다.
관광객이 이동하는 도로 너머로는 아직도 포장이 안된 도로가 보인다.
이곳에서 자동차는 거의 볼 수가 없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전거로 이동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북측에서는 자전거에도 자동차 처럼 번호판을 붙여 다닌다고 한다.
그러나 2박3일을 머무는 동안 자전거는 수없이 많이 봤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번호판 확인은 하지 못하다.
잠시 후 남측 태창메리야스와 합작으로 설립한 [금강산 생수]공장과 새롭게 리모델링을 하는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건물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금강산 관광특별구역이란다.
장전항 부근에 위치한 [금강 패밀리 비치 호텔]에 여장을 푼(2인 1실) 우리들은 [온정각]으로 이동하였다.
모든 이동은 현대아산측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로 하였다.
운전기사들은 대부분이 연변조선족이다.
기사월급이 우리 돈 40만 원 정도이고 근무기간은 2년 정도라고 한다.
관광특구에는 판매점이나 요식업계에서 근무하는 아가씨들이 많다.
북측에서 직접 운영하는 음식점에는 북한아가씨들이 근무한다.
그러나 연변족들도 많이 근무하는바 그들도 2년의 근무기간에 보수는 월30만 원 정도라고 한다.
가이드는 현대아산 소속으로 남측사람들이고 정식 현대직원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관광특구 내 시설물의 대충 위치를 익힌 후에 [외금강 호텔]내에 위치한 북한음식점에서 코스로 된 중국음식을 시켜 먹다.
- 외금강 호텔 -
상냥한 북측접대원이 안내하는 대로 북측에서 가장 유명한 들쭉술 30% 720ml를 20$(약 2만원)에 시음하니 그 맛이 과연 일품이다.
40%로 하자는 남자들의 의견에 여성들이 너무 독하다며 30%로 하자기에…….
[들쭉술]은 백두산에서만 자생하는 야생 열매로 담근 술이라고 한다.
들쭉술의 기분을 살리려고 우리들은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장전항에 위치한 숙소로 이동하였다.
저녁시간인데도 철망 바깥쪽 북한주민들이 사는 집에서는 전깃불이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서 촛불이나 등잔불을 켜는지 밖에서는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심각한 북측의 전력난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숙소 바로 앞에 위치한 ‘봉사소’에서 2차를 하다.
북측에서는 우리들이 포장마차라 부르는 곳을 '봉사소'로, 화장실을 '위생실'로, 주유소를 '연유공급소'로 부르고 있었다.
여선생님들이 '닭발'을 먹자하여 시켰더니 아뿔싸, 남측과는 완전히 다른 요리방법이다.
우리와는 달리 뼈를 전혀 분리하지 않고 오리지널 그대로 고춧가루 양념을 넣어 푹 삶아내었다.
징그럽다고 아무도 먹지를 못해서 술꾼들만 안주삼이 겨우 몇 개를 처분하다.
참고로 북한 소주는 아직도 25도로 우리 보다는 독한 소주이다.
3차는 숙소에 들어와 냉장고에 들어있는 들쭉술을 각방에 것을 모두 수합하여 4병을 다 비우고 내일을 위하여 취침을 하다.
◆ 19일(2일차) : 숙소 부속건물인 [풍악]이라는 한식집에서 뷔페식으로 조식을 하였다.
7시 40분에 셔틀버스를 타고 [온정각]으로 내려오다.
아침에 본 울타리 바깥 북한 풍경은 어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8시가 채 못 된 시간인데도 마을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학생들 모두가 출근과 등교를 하는 모습으로 분주하였다.
특이한 것은 옷차림이 우리나라 60 - 70년대와 비슷하였다.
아가씨들까지 추위를 막기 위해 얼굴부분을 감싼 방한도구는 허름한 목도리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이 시간에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등교시킨 후에 느긋하게 TV드라마 보고나서 설거지를 하는 전업주부들이 많다.
하지만 이곳은 모든 여자들이 예외없이 남자들과 똑같이 아침 일찍 생활전선으로 나가는 풍경이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직장생활 하는 것이 우리는 선택이지만, 북에서는 평등사회이므로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북으로 같이 들어온 관광버스 17대 476명의 관광객(성수기 최고 때는 4천여 명이 입국함)들은 각자의 차량에 탑승하였다.
현대아산측의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이동 신고를 하고 [구룡연코스] 주차장으로 이동을 하다.
온정리 - 외금강호텔앞 - 신계사앞 - 목란각주차창 - 금강문 - 흔들다리 - 옥류담 - 비봉폭포 - 구룡폭포 - 상팔담 코스를 왕복 4시간에 돌아오는 코스이다.
이곳에는 일전에 많은 눈이 내렸는데 아직도 녹지않고 쌓여 있는 관계로 등산로만 겨우 확보가 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북측 작업인부들이 삽으로 눈길을 확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철망너머 길에서 마주친 북한 주민들은 우리 측에서 손을 흔들어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이곳에서 만난 작업 인부들 중에서는
“수고 하십니다.”하고 인사를 건네니
“예, 반갑습네다.”
하고 반갑게 인사를 받아준다.
특별한 구역인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이 사람들은 차림은 허술해도 아마도 북측에서는 특별한 신분을 지닌 사람들일 것이다.
[비봉폭포]앞에서는 우리네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즉석사진사’를 볼 수 있었다.
등산로 곳곳에 인삼차를 비롯한 과자류등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음료수와 군것질거리를 팔고 있는 김일성 뺏지를 착용한 북한아가씨들도 볼 수가 있었다.
이들은 현대아산측과는 관계없이 순수하게 북측에서 운영하여 수입도 그들이 가져간다.
개인이 하는 장사는 아닌 것 같고 당이나 국가기관에서 수입을 챙기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
[구룡폭포]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해양소년단을 인솔하여 금강산을 자주 찾는 전선생님은 자주 와본 곳이라며 이곳에서 [목란각]으로 하산을 하였다.
남은 우리 직원 7명은 철계단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난코스인 [상팔담]을 오르다.
상팔담은 마치 영암 월출산을 오르는 계단을 연상시키는 난코스였다.
[목란각주차장]에 위치한 위생실(우리네 화장실)까지는 무료 이용이었다.
이곳에서부터 상류 쪽에 위치한 위생실은 소변은 1$, 대변은 2$의 유료이다.
이곳은 자동차길이 없으므로 처리가 어려워서 자연분해를 한 후 인부들이 지게로 지고 운반을 해야 한다.
그 처리비용이라고 한다.
[목란각]에서 평양냉면으로 중식을 하였다.
이 건물의 특징은 건축 당시에 자라고 있었던 소나무를 살리려고 나무를 그 자리에 두고 시멘트 포장을 하였다.
소나무는 살렸지만 한 치의 공간도 없이 시멘트포장을 하는 바람에 소나무는 무척 고역이겠다.
- 한치의 공간도 없이 시멘트 포장을 하는
바람에 엄청 고생을 하는 소나무 -
실내에는 커다란 바위를 없애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려서 인테리어를 하였다.
특이한 북한의 풍물을 담자는 나의 요구로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북측 접대원이 우리 일행들과 같이 촬영되었다.
다른 곳에서 이를 본 접대원이 황급히 달려와서 사진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삭제를 하였다.
북측의 경직된 또 다른 모습이었다.
중식 후에는 10$ 유료코스인 [삼일포] 관광을 하였다.
금강산 관광을 하면서 느낀 점은 자연보호는 멋지게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망이 좋은 바위는 한 곳도 빠짐없이 김일성과 김정숙 그리고 김정일을 찬양하는 문구를 음각으로 깊이 새기고 붉은 페인트로 칠을 해 놓아 참으로 자연훼손이 심각하였다.
이 곳 삼일포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만난 북측 남자접대원중 한명이 우리 팀에서 가장 젊은 백선생님에게 접근하였다.
여러 가지 얘기를 진지하게 묻고 하였다.
나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관심을 갖고 뒤에 따라가면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았다.
'전교조'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하였다.
백선생님은 '전교조'회원이다.
대화중에 전교조는 자기들 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미리 하산하여 목란각에서 기다리던 전선생님 얘기
"노무현 정부가 곧 이명박 정부로 바뀌게 되는바 정권이 바뀌면 북측에 대한 지원이 어떻게 되는지 북측안내원들은 그 점을 대단히 궁금하게 여기고 있다."
라고 한다.
전선생님은 '해양소년단'을 인솔하여 금강산을 자주 찾는 입장이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아마 남측 관광객에게서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인 것 같았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들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평양모란봉교예단]의 종합교예공연을 30$의 관람료로 관람을 하였다.
정말로 명성에 걸맞게 멎진 공연을 보여주었다.
공연료가 아깝지 않는 수준높은 공연이었다.
공연 후에는 온정각 서관에 위치한 식당에서 10$(당일 환율은 950원 정도임)짜리 뷔페식으로 석식을 하였다.
그리고는 입욕료가 12$인 [금강산온천장]으로 향하다.
이곳은 노천탕이 잘 되어 있었다.
뜨거운 물이 쉴 새 없이 솟구쳐 올라 견디기가 어려웠지만 머리위로 불어오는 바깥 찬바람이 열을 식혀주므로 견딜 만 하였다.
내일은 [만물상코스]를 올라야하므로 내일을 위하여 오늘저녁에는 별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각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20일(3일차) : 2박 3일 금강산 관광의 마지막 일정이다.
어제와 같은 곳 ‘풍악’에서 아침을 먹고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온정리로 이동하다.
[만물상주차장]까지 버스로 이동 중에 살펴보니 이른 아침시간인데도 금강산국립공원안에 고사목을 베어내는 공사현장이 보였다.
남자와 젊은 아가씨를 비롯한 여자들도 구분 없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평등을 외치는 공산주의 국가이므로 이렇게 험한 작업에도 이들은 남녀평등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도로 양옆에는 [춘양목]이 정말 탐이 나게 자란 모습으로 무진장으로 있었다.
북측에서는 이 소나무를 잘 생겼다고 '미인송', 관으로 사용한다고 '금관송', 금강산에서 자란다고 '금강송'으로 부른다고 한다.
일전에 불타버린 국보 1호인 [숭례문] 복원공사에 쓰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겠지?
이 코스는 어제 등정한 ‘구룡연코스’보다 거리는 짧았지만(왕복 2시간 소요) 가파른 철계단으로 이루어진 난코스다.
일전에 내린 눈이 다져져서 빙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서는 오르지 못할 아찔한 코스였다.
교직의 특성상 아이들이 방학을 하는 방학중에 일정을 잡다가 보니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단풍이 일품인 가을철에 꼭 한번 찾고 싶은 곳이다.
우리 직원 8명중 3명은 가이드가 위험한 코스라고 설명하는 말을 듣고는 이 코스를 포기하였다.
그들은 어제 돌아본 삼일포와 해금강을 셔틀버스로 돌아보는 코스를 택하고 나머지 5명만 참여하였다.
이름에 걸맞게 온갖 형상의 바위들이 보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을 보인다고 해서 [만물상]이라고 한다.
과연 사실이었다.
3명의 신선과 장기의 전설이 어린 ‘삼선암’, 귀신의 얼굴모습을 닮은 ‘귀면암’, 맑은 날에는 동해가 바라보이는 ‘망양대’를 비롯하여 만물상의 중앙에 위치한 해발 936m인 ‘천선대’에서 바라본 눈 덮인 만물상코스는 정말 장관이었다.
전망하는 곳이 좁은 탓에 뒤를 이어 오르는 다른 사람에게 장소를 양보해야 하므로 아쉬움을 남긴 체 하산을 하다.
중식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불가하다는 그 유명한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먹다.
이곳은 평양옥류관의 축소판으로 모든 재료와 주방장이나 종업원이 평양옥류관과 똑같다고 한다.
어제 우리 가이드가,
“만물상코스는 너무 힘이 드니 웬만하면 아예 포기를 해라!”
는 투로 안내를 하였다.
아침에도,
“만물상 코스는 너무 힘이 들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도저히 출국시간을 맞추기가 힘이 드니 옥류관에서 평양냉면 예약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라고 하는 통에 우리 팀은 만물상 코스를 3명이나 포기를 했다.
'평양옥류관 냉면' 예약도 하지 않았다.
가이드가 이렇게 유도를 한 것은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산행중 낙오자 처리에 관한 걱정에서 였다는 판단이다.
우리 직원들은 8명중 여자들이 4명이나 되니 가이드는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려오는 셔틀버스에서 만난 다른 조의 가이드는
“예약을 하지 않아도 옥류관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면 예비용으로 준비한 몇 명분의 여유가 있을 테니 그 것을 이용하면 그 유명한 평양옥류관 냉면을 맛볼 수 있다.”
고 알려준다.
고마운 그 가이드 덕분에 우리들은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과연 명성대로 그 냉면은 대한민국에서 내가 이제까지 맛본 어떤 냉면과도 확연하게 맛에서 차이가 났다.
역시 냉면은 '평양옥류관 냉면'이다.
덕분에 남자들은 사리를 곱빼기로 시켜서 먹다.
중식 후에는 쇼핑시간을 가졌다.
대부분의 구입품은 유명한 북한 술인 [들쭉술]이다.
전시된 상품의 질이 우리 것보다는 못하거나 남한에서 가져다 파는 면세품이 대부분이었다.
입국 때와는 역으로 출입절차를 밟아서 나오다.
'북측 출입국사무소'에서는 말로만 듣던 관광객 억류상황이 발생할 뻔 했는바 그것도 우리 팀에서 발생했다.
이번 여행에서 사진촬영을 책임진 사람은 과학부장 백선생님이다.
출국절차를 무사히 통과하고 차에 올라서 다른 차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진 담당인 백선생은 무의식적으로 이제까지 촬영한 사진을 살펴보았다.
그때 우리가 탑승한 차량 건너편 철길위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우리들이 사진촬영을 하나 감시하는 경비병에게 발각이 되었다.
즉시 차량으로 달려온 북측 경비병에 의해서 백선생님은 북측출입국사무소로 압송되어 갔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에 우리들은 어쩔 도리가 없이 그냥 차안에서 대기하고 가이드가 내려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별의 별 생각을 다하고 있었다.
다행히 얼마 후에 무사히 귀환을 하였다.
짙은 썬그라스를 착용한 북측관리장교앞에서
“이 곳에서 사진 촬영을 한 것이 아니고, 그동안 촬영한 사진이 잘 되었는지 점검하는 중이었다.”
라고 해명을 하였다.
그 장교는 사실확인차 몇 장면을 검토해보고 별다른 이상이 없자 보내주었다.
그렇치만 만약에 그들이 트집을 잡아서 벌금이나 구류를 살게 하면 우리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객 북측에 억류]라고 대문짝 만한 뉴스로 장식할 아찔한 순간을 경험한 백선생왈
"아이고 말도 마이소 식겁했심다!"
돈은 돈대로 들고서도 이런 저자세로 언제까지 금강산 관광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의미 있는 여행 끝에 포항에 도착하여 이동에 위치한 ‘포항해물탕’에서 저녁을 먹다.
이번 여행에 동참을 못한 이선생님과 5학년에 조선생님까지 경주에서 올라와서 동참을 하다.
저녁겸 간단한 반성회를 하고 2007학년도 동학년인 4학년 해단모임에 마침표를 찍었다.
- 금강산에서 절경인 곳은 예외없이 음각으로 깊이 판 후에 붉은 색 페인트로 선전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중에 원상 복구를 하려고 해도 너무 깊이 파여진 글자의 흔적을 지우기가... -
첫댓글 참으로 상세히 조목조목 잘 적으셨네요.
저는 갔다와도 언제갔는지 가물거리고 다만 11월초에 좀늦은편이라 겨울옷 준비해간것 하나도 못입고(그해따라 많이더워서~)
단체로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회(민주평통)에서 갔으니 모든게 첫번째로
라서 편하고 좋았으며, 희얀하게도 목욕은 노천 온천인데 남탕,여탕이 하루하루 바뀌여서, 어제는 여탕이 저쪽이였는데~~
했더니 사람들 별로 모르는 눈치 였답니다.
북한산 더덕이 좋은줄알고 선물 하려고 사왔다가 넘넘 맛없어 버렸고, 고사리는 안사왔는데 괜찮더라는 얘길 들었답니다.
그곳에선 좋은곳마다 사진을 찍어 찿을사람 찿아가라 했는데
좀크게 뽑아 장단 만원 입디다.
300자초가
젊을때는 활동도 많이하여 인맥도 좋았고, 좋은 혜택 받고 외국도 다녀 왔는데 이제는 건강부터 따라주지 않으니~~
금강산 갈때만 해도 펄펄 날아 다니며, 맨 먼져 가서 사진 찍어주고 또 뒤에서 먼저 올라가 항상 선두 주자 였는데~~
세월의 무상함이 절실한 요즘 입니다.
송이골님
잊고산 세월 기억나게해서 고맙습니다.
어딘가에 그때 사진이 잠자고 있늘텐데 찿으면 날자가 나올것도 같구요.
자주 보지는 못해도 여건이 허락할 땐 그 시절 사진을 보며 추억에 젖어봅니다.
글은'산행일기'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오래전 부터 훗날을 위하여 기록을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저는 금강산구경 못했는데
아쉽네요🎵
곧 좋은 결정이 내려 지겠지요.
한번쯤은 가볼만한 곳입니다.
다만 내가 낸 돈만큼 당당하게 대접을 받는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금강산 여행기 재밋게 잘읽었습니다.저도 금강산이 다시 개방되면 여행갈려고 손꼽아 기다리는데 잘되어 가는듯 하다가 미사일을 쏘아대니 점점 멀어지는것 같아 아쉽네요? 우리 사는동안 다시 개방되면 송이골님 인솔하에 하모애 회원님들 단체관광 한번 갑시다.
부회장님!
좋은 아이디어네요.
교직의 특성상 방학 기간을 이용해야 하므로 지난번엔 겨울여행이 되었는데, 저도 가을여행을 꼭 다시 한번 하고 싶네요...
글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저는 재직 중에 도교육청 주관 행사로 겨울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옛날의 추억을 다시 한번 새길 수 있네요. 감사합니다.
옛추억을 살리는데 도움이 되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