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솔로이스트>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진행되는 실화 영화다. 작품은 유명한 저널리스트 스티브 로페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정신분열증을 겪고있는 길거리 악사 나다니엘 안소니 아이어스(제이미 폭스)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나다니엘을 만날 즈음 스티브의 삶은 거의 밑바닥 상태. 이혼과 교통사고 등으로 인해 그의 심신은 지칠대로 지쳐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한 줄기 구원의 빛같은 음악소리를 듣게되는 스티브. 단 두 줄의 현만 달려있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다니엘의 이력은 스티브에게 특종 칼럼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고, 그는 나다니엘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만일 이 영화가 전형적인 장르 영화의 구조로 진행된다면, 당연히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나다니엘이 멋지게 음악가로 환생하는 장면으로 엔딩할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관객들의 기대를 보기좋게 배반한다.
나다니엘의 천부적인 음악 실력과 열정에 감화된 스티브는 그가 다시 음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지만,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연민과 도움의 손길이 아닌 진정한 우정과 소통의 방식이라는 점을 서서히 깨닫는다. 그리고 황폐한 삶을 살고있던 스티브 자신이 오히려 나다니엘과 소통하며 변해간다. 도움의 손길을 주려던 이가 도리어 도움을 받게되는 아이러니.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아니라,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한 ‘소통’과 ‘화해’라는 두 단어를 정의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주로 사용되는 음악은 베토벤의 작품들이다. 나다니엘의 삶을 유일하게 지탱시켜주는 음악이 바로 베토벤. 귀가 멀어 세상의 소리와 단절된 채 살았던 베토벤의 삶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나다니엘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 교향곡 3번의 멜로디들은 바이올린 및 첼로 독주, 스캣송 등의 형태로 변주되고, 편곡되어 영화의 전편에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어진다.
영화음악가 다리오 마리아넬리는 영웅 교향곡의 주제 선율을 잘게 쪼갠 다음, 이 멜로디들에 베토벤의 다른 작품 선율을 덧붙여 감각적인 사운드트랙을 만들었다. 연주는 젊은 거장 에사 페카 살로넨과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맡았다.(영화의 말미에서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직접 출연한다.) 이 훌륭한 오리지널 스코어 덕분에 영화를 본 후 전곡을 들으면 베토벤 영웅 교향곡의 구조와 멜로디 라인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녹음수도 수백 종에 이른다. 과거에는 대편성으로 장엄하게 연주된 해석들이 득세하다가 근래에는 편성을 줄이고 원전악기를 동반한 녹음들이 유행했다. 곡의 유명세만큼 연주는 많지만, 이렇다 할 새로운 음반이 없었던 것이 현실. 하지만 근래에 베토벤 교향곡의 연주사에 한 획을 그은 녹음이 등장했다.
바로 데이빗 진만과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베렌라이터 판본 연주다. 지금까지 통용되어온 악보가 아닌, 베토벤의 의도와 가장 가깝다고 평가되는 새로운 악보에 의한 연주. “영웅”이라는 두 글자에 강박관념처럼 갖혀있던 이 교향곡은 진만의 손에 의해 아주 자유롭고 경쾌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넘실대는 리듬과 유려한 선율, 18세기 춤곡을 연상시키는 상쾌하고 간결한 해석은 이후 베토벤 연주사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진만의 연주는 악보와의 새로운 ‘소통’을 통해 만들어진 ‘진짜 새로운’ 베토벤이다.
<독립영화감독/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