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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일치를 위한 신학적 방향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분열된 장로교회를 일치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더구나 전도나 사회봉사를 위해 연합하는 것이 아닌, 신학적 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 이 생각은 상당 부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신학적 일치를 위해 한 걸음이라도 걸어야 한다. 이 첫걸음을 위해 우선 한국의 장로교회를 신학적으로 분열시킨 신학적 오해를 먼저 밝히고, 개혁신학의 흐름을 설명하면서 바람직한 방향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회를 신학적으로 분열시킨 신학적 오해는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에 그 뿌리가 있기 때문에 먼저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 과정을 밝히면서 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1.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 원인으로서의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1951년의 장로교 고신 측의 분열과 1953년의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장로교 기장 측의 분열, 그리고 1959년의 장로교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이 가장 대표적인 분열이다. 이 세 가지 대표적인 분열 가운데 일제 때의 신사참배 문제로 야기된 고신 측의 분열을 제외한 1953년의 기장 측의 분열과 1959년의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은 신학 외적인 문제도 간과할 수 없지만 신학적인 문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으로 알려진 신(新)신학에 대한 논쟁이 1953년의 기장 측의 분열과 1959년의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신신학으로 말미암은 신학적 논쟁과 그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한국 장로교회를 양육한 모체의 기능을 한 미국 장로교회 안에 있었고, 바로 이 미국 장로교회 안에 있었던 신학적 논쟁과 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이 한국 장로교회에 그대로 파급되어 마침내 한국 장로교회가 크게 분열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 장로교회는 이 신학적 논쟁과 교회의 분열로 인한 손실은 대단히 미미했던 것에 반해 한국 장로교회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분열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한 상처와 갈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심각하다는 데 한국 장로교회의 비극이 존재하고 있다.
미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의 분열은 그레샴 메이첸(G. Machen)이라는 인물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메이첸은 1929년 미국 뉴저지주의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를 떠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를 세우고, 1936년에 미국 장로교회에서 분열된 새로운 교단인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를 세운 장본인이다. 메이첸이 세운 이 교단은 후일에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개명되었다. 메이첸이 미국 장로교회를 떠난 원인은 신학적으로는 그가 주장했던 근본주의 신학이 1920년대 중반부터 미국 장로교회 내에서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했기 때문이고, 개인적으로는 그의 독선과 분파성 때문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변증학 정교수로의 인준이 미국 장로교회 총회에서 계속 보류된 것과, 1936년의 미국 장로교회 총회가 분파주의적 행동을 했던 메이첸이 주도한 독립선교부에 소속된 성직자들을 메이첸과 더불어 목사직을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1934년 미국 장로교회 총회는 로버트 스피어(R. Speer)의 주도 아래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던 해외 선교부를 신학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1933년 독자적으로 독립 선교부를 만들고 메이첸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한 독립 선교부가 헌법에 위배 된다고 선언했다. 이 총회의 결정에 근거해서 1935년 3월 29일 특별위원회를 열고 메이첸에 대해 유죄 선고를 내리고 정직을 선포하였다. 이에 메이첸은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 새 교단을 만든 기쁨으로 총회 개막 예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6년 6월 11일 목요일에 여러 해 동안의 희망이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참된 장로교단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참된 기독교적인 교제의 축복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순간인가! 투쟁의 오랜 기간들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쁨과 비교될 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가라앉아 버리지 않는가! … 그 생생한 희망과 함께 우리는 지금 미래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참된 복음주의가 타협적인 연합들의 족쇄가 없이 진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이첸이 선언했던 기쁨은 사라져 가는 힘없는 비명에 지나지 않았다. 브래들리 롱필드(Bradley J. Longfield)는 메이첸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이 기쁨은 오랫동안 그의 것이 되지 못했다. 6개월 안에 메이첸은 해외 독립선교부의 의장직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어린 교단은 전 천년설과 알콜 음료 사용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다시 갈라졌다. 그러한 싸움에 지친 채로 그는 1936년 12월 소규모의 그의 추종자들을 격려할 목적으로 노스다코다로 여행하였다. 거기서 그는 폐렴에 걸렸으며 1937년 1월 1일 비스마크(Bismarck)에서 죽었다.” 메이첸이 만든 정통장로교회 역시 빈사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지극히 교세가 미미한 군소 교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65년 정통장로교회는 교세가 12,867명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장로교회가 1910년대까지는 근본주의 5대 신학 강령을 준수하는 구파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 교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장로교회는 유니온(Union) 신학교에서 당시 최고의 성경학자로서의 명성을 갖고 있던 찰스 아우구스투스 브릭스(Charles Augustus Briggs)를 성경의 고등비평학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1891년 총회에서 브릭스의 교수직에 대한 지명을 거부했고, 1910년과 1916년 총회에서 근본주의 5대 신학 강령을 계속적으로 채택했다.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는 브릭스 사건을 계기로 미국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국 장로교회의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1921년 구파 칼빈주의 신학의 거장이자 미국 장로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신학의 지도자인 워필드(B. B. Warfield)가 세상을 떠났고, 이어서 “근본주의는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로 유명한 파스딕(Harry Fosdick) 목사의 재판이 벌어지면서 미국 장로교회의 분위기는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재판에서 파스딕을 고소한 근본주의자 맥카트니(Clarence E. Macatney)가 총회에서 승리했으나 파스딕이 속한 뉴욕노회는 총회의 결정에 불복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뉴욕노회가 근본주의를 거부하고 파스딕 목사 편을 든 것은 뉴욕이 미국 전체에서 유럽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하고 정신적으로 선진적인 특징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파스딕은 뉴욕제일장로교회의 목사직을 1925년 사임했으나 뉴욕노회는 파스딕을 치리하지 않고 사면했다.
1925년 미국 장로교회 총회는 미국 장로교회의 방향을 바꾸는 분수령이었다. 미국 장로교회 총회는 프린스턴 신학교 내에서 메이첸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실천신학 교수인 찰스 어드만(Charles R. Erdmann)을 총회장으로 당선시키면서 총회의 신학적 방향을 배타적인 근본주의에서 신학적 관용과 통합의 방향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총회가 이와 같이 신학적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은 근본주의로는 더 이상 변화하는 시대의 정신을 지도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근본주의의 축자영감설적인 성경관은 성경 속의 수많은 불일치의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답을 제공해 주지 못했고 과학과 성경 사이의 갈등에 대해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기의 재판으로 알려진 스콥스(Scopes) 재판에서 근본주의의 대표자인 브라이언(Bryan)은 스콥스 진영의 변호사 클라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고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브라이언은 요나의 큰 물고기 사건과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를 창조했다는 성경의 설명들을 문자적으로 믿는다고 주장했지만, 가인이 그의 아내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 같은 단순한 질문에도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이 유명한 진화론에 관한 재판은 근본주의자들이 얼마나 무식하며 과학적이지 못하고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반동적인 정신이라는 것을 너무도 명백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진화론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미국 장로교회 내의 상당수 교육받은 지도자들은 이 시기에 이미 유신론적 진화론과 무신론적 진화론을 구별했고 무신론적 진화론은 반대했지만,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파악될 수 있는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스콥스 재판 5일 후에 이 재판의 실질적인 패배자(법적으로는 스콥스가 100달러의 벌금형을 받음)인 근본주의자 브라이언이 갑자기 죽었고,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근본주의 운동은 교육받고 도시적인 문화의 전진과 더불어 사라질 농촌적인 현상이자 사회적 후진 지역의 정신이라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1926년의 미국 장로교회의 총회 때부터 미국 장로교회는 압도적으로 근본주의 정신과 결별을 고하기 시작했다. 미국 장로교회는 진리의 핵이 일치하는 곳에서의 견해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관점을 채택했고 이러한 관점에 기초한 총회 보고서에 대해 총회는 일어서서 3분간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와 더불어 1926년 총회는 메이첸을 프린스턴 신학교의 변증학과 기독교윤리 교수로 임명하자는 동의안을 무기 연기시켰다.
1925년 이후부터 프린스턴 신학교도 총회의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근본주의 신학과 구파 칼빈주의 신학을 옹호하던 신학교에서 학문적인 관용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복음적인 신학교의 모습으로 변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흐름은 1930년대로 이어지면서 신정통주의 신학적인 특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신학교가 되었고 1937년에는 존 맥케이(John A. Mackey)가 학장에 취임했고, 오토 파이퍼(Otto Piper)와 엘머 홈링하우젠(Elmer G. Homrighausen)과 같은 신정통주의 교수진의 면모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미국 장로교회는 1925년 이후부터 1967년의 신정통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앙고백서를 채택할 때까지 대체적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의 영향이 강했고, 신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학문성과 복음적인 특성으로 시대적 요구와 교회적 요구를 비교적 잘 충족시키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1925년을 분수령으로 미국 장로교회가 근본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것은 변화하는 시대를 바르게 지도하기 위한 바른 신학적 결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사회와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신학 정신이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근본주의는 점차 약화되었고 낡은 옛 정신을 반영하는 신학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근본주의를 고집하고 싶었던 신학자 메이첸은 자신의 교수직 임명이 계속 거부당하자 마침내 1929년 프린스턴을 떠나 그해 9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고 프린스턴 신학교를 신신학에 굴복한 신학교로 매도하면서 복음주의적이고 정통주의적인 신학교를 만든다고 천명했다. 이때 프린스턴을 떠난 교수들은 메이첸 외에 오스왈드 알리스, 로버트 윌슨, 코르넬리우스 밴틸 등 3명의 교수가 더 있다. 이들 가운데 메이첸과 맨틸(C. van Til)은 프린스턴 신학교가 신정통주의로 기우는 것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했고, 칼 바르트(K. Barth)의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통주의를 위장한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하면서 신정통주의 역시 현대주의에 굴복한 신신학으로 규정했다. 바로 이와 같은 메이첸과 밴틸에 의한 신학적 매도로 말미암아 유럽에서 가장 복음적이며 정통적인 신학으로 교회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신정통주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신학의 신학적 적인 자유주의 신학과 동일한 것으로 매도되는 어처구니없는 신학적 혼란이 야기되게 되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메이첸에 의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정통장로교회의 설립은 한국 장로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어쩌면 이 분열이 한국 장로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한국 장로교회의 가장 정통적인 신학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박형룡이 이 시기에 프린스턴에 유학하고 있었고 나아가 그는 메이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형룡은 메이첸의 신학에 심취해 있었고, 또한 그는 메이첸의 근본주의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놓은 한국의 메이첸이었다. 바로 이 박형룡의 영향으로 근본주의 신학은 한국의 장로교회 안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또한 박형룡은 메이첸이 일반적으로 새로운 신학 사조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신학 사조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부정적이었다. 박형룡은 메이첸과 밴틸이 신정통주의에 대해 내용상 자유주의를 의미하는 신신학으로 규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칼 바르트를 일종의 자유주의 신학자로 매도했고, 신정통주의적 사상을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와 같은 박형룡의 비판이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로 나타난 첫 번째 사건은 1953년의 기장의 분열이었다. 기장의 신학적 아버지 김재준은 성경의 고등비평학을 인정했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으로 그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신정통주의적 특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김재준의 신학은 프린스턴 신학교와 미국 장로교회 관점에서 볼 때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은 그의 근본주의 신학으로 김재준을 탄핵했고, 그 결과 기장의 분열로 나타나게 되었다.
박형룡과 관련된 한국 장로교회의 두 번째 분열은 통 합측과 합동 측의 분열이다.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은 삼천 만환 사건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이견이 그 중심에 있지만, 근본주의 신학을 고수하고자 하는 박형룡 측과 세계 교회와 신학의 흐름에 개방적이고 보다 폭넓은 신학을 원하는 사람들과의 갈등 역시 그 중심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분열은 1920년대 미국 장로교회가 신학적 넓이와 관용을 원했던 사람들과 옛 칼빈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을 고수하고자 했던 메이첸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자들과의 갈등과 상당부분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의 비극은 이 갈등으로 말미암아 전국의 장로교회가 완전히 양분되었다는 점에 있다. 미국의 장로교회는 메이첸을 치리했고 이에 불복한 메이첸이 새 교단을 만들었지만, 그를 따른 사람은 미국 장로교회의 1%도 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미국 장로교회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하나의 일과성 사건에 불과했지만, 한국 장로교회는 서울의 큰 교회에서부터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평신도까지 멱살을 잡고 신신학 운운하면서 싸우는 비극으로 발전한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당시의 한국교회가 신학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한국의 장로교회가 박형룡 한 사람에게 너무나 신학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이첸이 미국 장로교회를 떠났다고 해서 한국의 장로교회가 분열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이제 한국의 장로교회는 과거 미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한 위치에서 바른 신학적 판단을 해야 한다.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가 분열했다고 해서 남산에 있던 장로회 신학교가 분열하는 한심한 작태는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메이첸의 근본주의 운동은 명백히 실패했다. 그렇다고 신정통주의 신학이 절대적인 신학은 결코 아니다. 한국의 장로교회가 신학적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의 잘못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근본주의 신학이나 성경 무오설이 아니면 같이 일할 수 없고 교단 분열도 불사하겠다는 메이첸 식의 편협한 분파주의적 정신은 교회의 일치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된다.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것은 1895년 미국 나이아가라 휴양지에서 결성된 한시적인 시대적 제약을 받는 신학에 불과한 것으로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성경 무오설 역시 17C 옛 정통주의 시대의 정신으로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된 것인데, 이것 역시 절대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 됨과 절대적인 권위는 17C의 옛 정통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과 다른 관점에서 언급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세계 교회의 일반적인 이해는 오히려 후자와 더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2. 성서 무오설과 성경의 권위
한국의 장로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신학적 이유의 중심에는 성경관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이 성경관의 차이의 중심에는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학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고 아울러 성경 무오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놓여 있다.
성경의 절대 무오설을 뒷받침해주는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은 17C 칼빈주의 정통주의에 의해 형성된 사상으로 19C 말엽부터 20C에는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런데 이 옛 정통주의가 강조했던 성경의 축자영감설은 18C의 계몽주의의 시대와 19C의 개신교 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유럽에서는 성경 비평학의 도전을 받으면서 붕괴되어버린 옛 시대의 신학 정신에 불과하다. 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이 붕괴된 원인은 성경의 과학이 고대인의 과학과 고대인의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나게 된 것과(예. 지구는 평평한데 기둥이 이 지구를 받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하늘에는 궁창이라는 투명한 막이 있고 이 막 위에 물이 존재하는데 이 궁창의 문을 열면 비가 온다고 믿는 것 등.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었다는 창세기 1장 7절의 말씀은 이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 성경 내에 존재하는 불일치 및 착오들이(예. 창1:1~2:3은 나무, 동물, 새 등을 만들고 난 후에 인간을 창조하는데, 창2:4 이하는 아담을 창조했을 때 아직 땅에는 안개만 있었고 나무와 동물, 새 등이 창조되지 않았다. 노아 홍수 때 방주에 들어간 생물의 수효에 대한 창세기 6장 마지막 부분의 보도와 창세기 7장 첫머리의 보도의 불일치, 누가복음 23:39~43에서는 십자가에서 한 강도는 예수를 비난했지만 우편 강도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반해 마가복음 15:32에 의하면 두 강도 모두가 예수를 욕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 12:3에는 한 여인이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마가복음 14:3에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성경 내의 모순, 착오, 불일치, 오류들이 밝혀지면서 17C의 옛 정통주의 신학의 지주였던 성경의 축자영감설은 붕괴되었고, 유럽에서는 성경을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산물로 보는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이 19C부터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의 발전과 더불어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학이(미국에서는 고등비평학이라고 많이 언급함) 성경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인 도구로 신학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증진시킨 것은 틀림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인간의 종교적 체험, 곧 인간의 종교적인 말로 전락함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 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바로 이 위기가 심화되고 있을 때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정통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 됨을 회복시키게 되었다. 칼 바르트를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자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C 초엽의 유럽의 신학적 풍토에서 학문적 신학을 공부한 사람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었는데, 느닷없이 한 사람이 나타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칼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다가 그의 스승이자 당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의 거장 하르낙(A. Harnark)으로부터 “학문적 신학을 조소하는 자”라는 질책성 공개서한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우고자 하는 바르트의 노력은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빗발치는 공격과 경멸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성공하게 되어서 성경의 권위에 입각한 교회의 신앙을 구출했고, 자유주의 공격에 의한 신앙의 와해를 막았다. 신정통주의 신학을 정통주의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17C의 옛 정통주의 신앙을 20C에 다시 회복했다는 의미에서 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정통주의 신학을 신신학 곧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학의 미래를 위해서도 지극히 해롭다. 이와 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잘못된 매도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메이첸에 의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분열과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설립 과정에서 메이첸 진영에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밴틸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비난하는 많은 책을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비난은 세계 신학계에서 정당한 비판으로 거의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 칼 바르트는 어떻게 성경의 권위와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 됨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성경의 권위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주장한 점에 있어서 옛 정통주의자들과 바르트는 일치하지만, 그것을 주장하기 위한 신학적 방법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옛 정통주의자들은 소위 기계적 영감설의 관점에서 성경의 무오와 권위를 강조했다. 즉 성경은 성령이 불러주는 대로 기계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옛 정통주의자들의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방법은 성경 비평학의 발전과 더불어 답변이 불가능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옛 정통주의의 성경관은 붕괴되게 되었다. 즉 성령이 불러주는 대로 기계적으로 적은 성경 속에 모순, 불일치, 착오, 오류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곤경을 헤쳐 나오기 위해 옛 프린스턴 신학교의 구학파 신학을 대변하는 근본주의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는 “성경 원전의 무오”라는 희한한 주장을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하려고 애썼다. 이 성경 원전의 무오라는 주장은 현재 성경의 사본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본 상에 나오는 오류를 근거로 성경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워필드의 충실한 계승자인 메이첸은 설득할 수 있었지만, 학문성이 있고 건전한 사고를 하는 다수의 신학자와 신학도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한 원본을 여러 명이 사본했다고 했을 때 사본한 여러 명의 사본 속에 똑같은 오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원본의 오류로 보아야지 원본은 오류가 없는데 사본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사본 과정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칼 바르트는 이 곤경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바르트는 이 곤경을 극복하기 위해 잘못된 옛 정통주의의 기계적 영감론을 버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을 20세기적 언어로 재구축해서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 됨을 강조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성경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말이 아니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이점에 있어서 옛 정통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정당했다고 바르트는 보았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인간적인 도구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었다. 즉,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이 말씀에 대한 인간적 증언이다. 예컨대 역사적 예수의 말씀은 절대적인 무오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증인들(마태, 마가, 요한, 바울 등)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인간적인 증언의 과정 속에서 인간적인 약점이 개입된다. 기억의 불충분성이나 당시의 세계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나, 이와 같은 인간적인 과정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그런데 바로 이 인간적인 증언의 과정 속에 소위 성경의 오류의 문제가 존재한다고 바르트는 보았다. 그러나 이 인간적인 증언의 약점들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말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 안에 인간적인 약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의 이와 같은 성경관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가 가졌던 성경관과 같은 맥락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성경은 아기 예수가 누워 있는 구유와 같다. 즉 성경의 본질은 하나님이신 예수인데, 그 속에는 지푸라기 같은 인간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자유주의 신학의 성경관의 근본적인 오류는 성경 속의 인간적 약점에 기인한 일부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성경의 본질을 뒤엎은 데 있다. 즉 오류가 있으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말로 본 것이 근본적인 잘못이라는 것이다. 반면, 17C 옛 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본질은 정확히 이해했지만, 성경이 기록된 과정을 잘못 이해해서 주장해서는 안 될 기계적 영감론을 주장했고 그 결과 자유주의 성경 비평학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과 옛 정통주의 신학의 성경관 중에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단연코 옛 정통주의 신학의 성경 영감설을 따르겠다고 그의 유명한 책 『로마서 강해』에서 밝혔다. 왜냐하면 옛 정통주의 신학의 성경 영감설이 자유주의 신학에 비해 성경의 본질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바르트의 성경관을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계열의 신학자들이 했던 것과 같이 개혁교회 신학의 정통에서 벗어난 현대주의에 굴복한 자유주의적 성경관으로 이해하면 결코 안 된다. 오히려 바르트의 성경관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의 20세기적 부활이다. 바르트의 성경관은 17C 옛 정통주의자들의 축자영감설과는 차이가 있지만,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과는 매우 유사하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령이 불러주시는 대로 기계적으로 성경을 기록했기 때문에 성경에는 절대 오류가 없다는 식의 17C 옛 정통주의식의 성경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의 루터의 성경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루터에게는 오히려 성경에 대한 비판적 특징이 존재하고 있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① 모세가 모세오경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다.
② 열왕기서는 민수기에 비해 엄청나게 좋다.
③ 요한복음과 바울서신 특히 로마서와 베드로의 편지들은 모든 책들 가운데 알맹이요 골수이다.
④ 사도 바울의 편지들과 사도 베드로의 편지들은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보다 훨씬 위에 있다.
⑤ 히브리서는 세례받은 다음에 죄인의 회개를 부정하고 금하기 때문에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편지에 반대된다.
⑥ 야고보서는 복음서와 바울의 편지에 비하면 지푸라기 서신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본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⑦ 요한계시록은 사도의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알려주지도 않는다.
이상의 루터의 생각들을 기초로 해서 판단할 때 루터는 17C의 정통주의 성경관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 성경관을 갖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은 상이하고 다양한 층을 가지고 있는 문서였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의 본질은 그리스도였고 복음이었다. 그리고 성경이 바로 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관은 바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의 성경관과 매우 흡사하다. 루터가 이와 같은 성경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루터교회가 바르트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칼빈의 성경관은 어떠한가? 칼빈의 성경관 역시 17C의 옛 정통주의나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의 성경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성경관을 갖고 있었다. 칼빈 역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쳤지만, 17C적인 성경의 문자적 절대 무오 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칼빈은 성경의 저자인 사도들에 있어서도 조금씩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① 사도행전 7:16에서 누가는 창세기 23:8에 비추어서 명백한 실수를 했다. 이 부분은 수정되어야 한다.
② 에베소서 4:8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바울이 시편 68:18을 언급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 본래의 의미로부터 적 지 않게 벗어났다. 심지어 “선물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니”라는 시편의 구절을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
③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말이라고 인지할 수 없다.
④ 사도행전 4:6에서 누가는 안나스를 대제사장이라고 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는 요세푸스의 글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것은 문자적 정확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성경이 갖고 있는 내적인 권위에 있었다. 즉, 성경이 비록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문체로 쓰여졌다 해도 성경 속에는 인간이 도저히 상상해 내지 못할 사상으로 채워져 있고 성경 자체가 엄청난 권위와 설득력으로 인간을 감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문자 하나하나에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문자의 강요자 내지는 말 한마디에 덫을 놓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천한 문체의 옷을 입고 인간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 속에 최고의 신비가 있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 더듬거리는 인간의 말을 통해 전달된다고 가르친 바르트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한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은 17C적인 축자영감설에 있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영적인 권위와 축을 교황에게서 성경으로 옮기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즉, 교황의 절대 권위를 성경의 절대 권위로 옮기려고 했던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이었다. 교황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께 참으로 복종하는 것은 성경에 복종하는 것임을 가르치려고 했던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쳤고, 성경의 절대 권위와 무오성을 가르쳤다. 바로 이런 성경의 절대 권위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 17C에 이르러 더욱 첨예화되면서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과 기계적 영감설로 발전되었는데, 바로 이 발전은 결국 잘못된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이 잘못된 발전으로 말미암아 옛 정통주의 성경관은 성경의 역사비평학의 날카로운 공격을 방어할 수 없었고, 성경 내의 많은 인간적인 약점들이 드러나면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20C의 신정통주의를 대표하는 칼 바르트의 성경관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의 20세기적 부활이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은 18C와 19C를 거치면서 그 소리가 약화 되었고, 20C에 들어서면서 거의 듣기 힘들게 되었는데, 바르트가 다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렁차게 선포한 것이다. 21C를 살아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세계 교회의 신학에 가장 큰 위험과 도전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계속 선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성경의 권위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신학적 체계는 옛 정통주의의 성경관에 있지 않다. 오늘의 세계의 신학은 결코 성경 비평학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성경 비평학의 도전을 근본적으로 백안시하는 근본주의적 축자영감설은 멀지 않은 장래에 더욱 설득력을 잃고 도태될 것이다. 개혁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성경의 절대 권위 위에서 태동하고 발전한 교회이다. 개혁교회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에 복종하는 교회이다. 21C의 개혁교회의 생명과 발전을 위해서 자유주의를 극복했던 바르트의 성경관은 대단히 의미가 있고 유익한 것이다. 오늘의 세계의 복음적인 다수의 신학자들은 바르트의 성경관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면서 자유주의와 상대주의의 공격을 차단하면서 훌륭하게 복음적인 신학을 건설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장로교회는 축자영감설을 믿느냐 안 믿느냐로 싸웠던 지난날의 소아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됨을 21C에도 선포하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그 신학적 흐름이 근본주의적이든 신정통주의적이든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복음적인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이제 이 복음적인 전통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의 장로교회는 세계 신학의 변천과 흐름을 직시하면서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 됨을 입증하기 위해 보다 차원 높은 신학을 전개해야 한다. 이 차원 높은 신학의 전개를 위해 바르트의 신학은 결코 해롭지 않다는 점을 근본주의적 경향의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3. 에큐메니칼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
한국 장로교회의 양대 산맥인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말미암아 분열되었다. 1956년에 있었던 제41차 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당시에 WCC가 세계 단일교회로 만들려고 한다는 WCC에 대해 잘못 선전되고 있었던 것에 기인한 오해였던 WCC의 단일교회 운동에는 반대하지만, 친교와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에는 참가한다는 결의를 했다. 즉, 한국의 장로교회는 1950년대 중반까지 WCC 운동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1958년 제43차 총회 때부터 WCC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박형룡, 김의환 목사 등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sm) 측 지도자들에 의해 가해졌다. 이때 이들의 공격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WCC 신학은 자유주의 혹은 혼합주의 신학이다.
둘째, WCC는 세계 단일교회를 목표로 한다.
셋째, WCC는 공산주의를 용인하는 용공주의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세 번째 것은 ICCC의 맥킨타이어(McIntyre)가 WCC에 반대하기 위해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나라에서 상투적으로 사용했던 방법인데, 한국의 장로교회도 이 영향을 받아서 용공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한국의 장로교회는 이 WCC에 관한 갈등과 논쟁을 해결하지 못한 채 1959년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분열되었고, 통합 측은 WCC에 반감을 갖고 있는 합동 측과의 일치를 위해 한동안 WCC와 관계를 끊었다가 1970년대부터 다시 가입했고, 합동 측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WCC를 반대하는 입장을 줄기차게 지속해 오고 있다.
그러면 위의 세 가지 반대 이유는 오늘에도 타당한가? 위의 세 가지 가운데 두 번째 것은 그 오해가 이미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것 역시 그 오해가 이미 해소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합동 측을 비롯한 한국의 WCC에 반대하는 장로교회 교단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공산권에 대해 선교하는 것과 공산권의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환영에 비추어 볼 때 사실상 더 이상의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위의 세 가지 가운데 오늘날에도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은 첫 번째 것인데, 이 첫 번째의 문제는 1968년의 WCC 웁살라대회와 1973년 방콕대회를 거치면서 그 신학적 갈등은 더욱 구체화되고 첨예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WCC는 1968년 웁살라대회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을 천명했고, 1973년의 방콕대회에서는 사회 구원 개념을 본격화시켰다. 바로 이 WCC 웁살라대회와 방콕대회에 저항해서 생겨난 신학운동이 복음주의 신학운동이다. 복음주의 신학운동은 1947년 미국의 풀러(Fuller) 신학교를 개교하면서 초대 학장인 오켕가(Ockenga) 박사가 이 학교의 신학 방향을 복음주의(당시에는 신복음주의라고 칭함)라고 했다. 이 운동이 세계적인 신학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68년 웁살라대회의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크게 분노한 독일의 바이어하우스(P. Bayerhaus)가 일군의 신학자들과 함께 발표한 1970년의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성명과 빌리 그레함(Billy Graham)을 비롯한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1973년의 방콕대회에 저항해서 선언한 1974년의 로잔(Lausanne)언약을 통해 구체화 되었다. 그런데 이 복음주의 운동에는 WCC를 반대하는 장로교회의 다수의 신학자들이 가담되어 있고 오늘에 있어서는 한국의 장로교회의 신학적 흐름도 에큐메니칼 신학에 협력하는 흐름과 이에 반대하는 복음주의적 신학 흐름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러면 에큐메니칼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은 정말로 양분되어 갈등과 분열을 반복해야 할 상극의 신학인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의 한국교회 내에서는 에큐메니칼 신학운동에 참여하고 복음주의 신학운동에도 참여하면서 개인적으로 양심에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는 신학자들이 의외로 대단히 많다. 오늘의 한국의 신학자들은 에큐메니칼 신학이 교회의 사회적 역사적 책임에 큰 공헌을 했음을 인식하고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신학이 지향하고 있는 정의, 평화, 창조의 보존(JPIC)의 문제는 상당수의 복음주의자들도 많은 부분 긍정하고 있는 교회의 사회적, 역사적 책임의 상징적인 개념이다. 한때 독재 정권하에서 독재 정권의 여론과 사상의 조종 때문에 양극화되었던 한국의 교회는 민주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자신의 극단적인 사고를 수정하면서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에큐메니칼 신학은 복음주의 신학보다 분명히 사회적, 역사적 책임에는 앞서고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은 에큐메니칼 신학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역사적 책임성을 배워서 자신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반면, 복음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선교와 교회 성장에는 큰 장점이 있는 신학이다. 에큐메니칼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살펴볼 때, 이 과제에 상당히 등한시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종로 5가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상징화되는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체여야 하고, 이 과제를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의 에큐메니칼 신학은 복음주의적 특징을 크게 보충해야 한다.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장로교 통합 측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면서 복음 선교에 관한 정신을 KNCC 장정에 명문화시킨 것은 그간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하는 것인 동시에 복음주의적 교단과의 일치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활동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에큐메니칼 신학은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감당하면서도 복음주의적 특징을 강하게 펴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이때 에큐메니칼 신학은 모든 교회를 포함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이 지향하는 문자 그대로의 에큐메니칼 신학이 될 것이다. 또한 복음주의 신학 역시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향해 신학 정신을 확대시켜야 한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죄의 용서만으로 축약될 수 있는 복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 속에 나타나는 구원이자 복음이었고,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사회적, 역사적 개념을 포괄하는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이 진정으로 복음주의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사적 책임을 포용하는 신학으로 발전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의 교회 일치와 장로교회의 일치는 에큐메니칼 신학이 진정으로 에큐메니칼 신학이 되고 복음주의 신학이 진정으로 복음주의 신학이 될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4. 폭넓은 개혁신학에 기초한 한국 장로교회의 일치
세계적으로 살펴볼 때 20C 이후의 개혁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근본주의 성향의 개혁신학이 개혁신학의 중심에 위치한 정통이 아니고 20C 전반부에는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E. Brunner), 니이버(Niebuhr) 형제들(라인홀드와 리차드) 그리고 오늘에 있어서는 독일의 몰트만이나 스위스의 피셔(L. Vischer)와 로호만(L. M. Lochman), 스코틀랜드의 토란스(T. F. Torrance), 네덜란드의 베르크호프(H. Berkhof)와 베르까우어(G. C. Berkouwer), 미국의 밀리오리(D. L. Migliore)나 거스리(G. C. Guthrie) 등에 의해 가르쳐지고 계승되고 있는 신학 속에 개혁신학의 중심 전통이 존재하고 있다. 개혁신학은 이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성경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권위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및 개혁신학의 중요한 정신인 세상과 역사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한 역사에 대한 참여와 개혁이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오늘날 세계의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들로 개혁교회를 빛나게 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신학적인 자유주의 전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복음에 대한 명확한 신학적 인식이 강하고 동시에 역사에 대한 책임성에 있어서도 다른 신학적 흐름에 앞서는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분열은 이 개혁신학의 중심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신학자들을 비난하면서 19C의 옛 프린스턴 신학과 근본주의 성향의 개혁신학에 집착하고자 하는 잘못된 신학적 집착에 기인하고 있다. 19C의 옛 프린스턴 신학이나 20C의 근본주의 성향의 개혁주의 신학도 분명한 개혁신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혁신학의 지류에 존재하고 있었던 신학이고, 사회적으로 설득력을 크게 갖지 못했던 신학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바른 개혁신학의 신학적 전통의 중심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빨리 깨닫고 개혁신학의 전통을 바로잡아야 한다. 바르트의 신학이나 몰트만의 신학 속에 있는 부분적인 신학적 오류들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이런 신학적인 오류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성경에서 벗어난 신학자’라는 식의 신학적 오도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바르트와 몰트만에게 신학적 오류가 있으면 워필드와 메이첸에겐 그에 못지않은 심각한 오류가 있을 것이다. 개혁신학이란 어떤 한 사람의 신학을 절대화하는 그런 신학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칼빈의 신학도 절대화될 수 없다. 개혁신학이란 시대와 역사의 변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신학을 개혁하는 신학(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21C의 역사 속에 살아남아 발전하는 개혁신학의 형성을 위해 한국의 장로교회는 20C 개혁신학 형성의 주역이었던 바르트와 브룬너, 몰트만 등의 신학정신의 훌륭한 점들을 잘 연구하고 계승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신학의 중심이 바르트와 브룬너, 몰트만 등에 의해 계승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근본주의적 성향의 개혁신학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개혁신학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성과 성경에 대한 수준 높은 학문적 주석에 부분적으로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를 사수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 기초한 복음적인 신학을 전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장로교회의 신학적 일치를 위한 방향은 우선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를 일소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결코 현대주의에 굴복한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대주의를 극복한 20C적인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부활이었다. 반면에 근본주의 성향의 개혁신학은 20C의 현대주의에 바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상당 부분 실패한 개혁신학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장로교회는 20C의 개혁신학의 성공과 실패를 잘 이해해서 바르트를 비롯한 신정통주의 계열의 신학자와 신학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 훌륭한 정신들을 잘 흡수해서 21C의 개혁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신학과 관련된 편견을 청소하고, 갈라진 교파 상호 간의 신학적 교류와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에큐메니칼 신학의 사회, 역사적 책임성과 복음주의 신학의 복음에 대한 강조를 적절히 잘 조화하여 21C를 밝히는 참다운 복음적이면서 사회, 역사적 책임을 훌륭히 감당하는 개혁신학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