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백영화
17년.
건이 나이보다 1년 많은 시간,
내가 살아온 삶의 절반이 안 되는 시간,
남궁원의 삶 이 조금 안 되는 시간.
결혼기념일 때면 ‘벌써’라는 수식어가 붙었었던 시간들이 이제는 멈췄어.
건이랑 잠깐 우리 연애했던 이야기를 나눴어.
아빠랑은 주로 돼지껍데기에 소주 먹으러 다녔다니 건이가 깔깔 웃더라.
처음 남궁원을 만났을 때 생각이 난다.
그때가 아마 민정련 깨지고 새 조직 만들자고 모일 때였지?
낡은 잠바에 면도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던 남궁원은 참 지치고 피곤해 보였어.
같이 상근하며 꼼꼼하고 철저한 남궁원은 내게 진정한 프로 운동가로 느껴졌는데…
종로3가 사민청 사무실 근처에 있던 비좁은 칼국수 집 기억나?
같이 상근하던 형이랑 우리 셋이 칼국수 먹으러 간 날, 다른 형은 다 먹고 담배 피려 나가고, 남궁원은 제일 먼저 먹고서도 뜨거운 거 못 먹는 내게 어깨를 토닥여 주며 천천히 먹으라고 했잖아.
비좁은 곳에서 큰사람 남궁원은 다리 꼬고 앉아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끝까지 내가 다 먹기를 기다려 줬는데…
그때 알았어. 울 남편 참 다정한 사람이라는 거.
일 끝나고 먹던 돼지껍데기에 소주, 점심시간에 먹던 칼국수…
남편이랑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연애하면서 그럴싸한 곳에 갔던 건 두 번 정도였던 거 같아.
한 번은 큰아가씨 결혼식 즈음, 명동 가서 구두사고 남은 돈으로 패밀리 레스토랑 비슷한 곳에 갔었지.
그때 신나게 웃던 남궁원 얼굴 생각난다.
두 번째는 내 생일날 피자집.
그날 자기가 내게 반지를 끼워 줬는데…
자기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크기로 골라온 반지가 내 손가락에 꼭 맞는 것을 보며 활짝 웃던 남궁원.
오늘 다시 그 반지를 껴보니 내 손가락 마디가 굵어져 꽉 끼네.
같이 도서관 다닐 때도 생각난다.
대학원 가겠다고 사회과학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남편 따라 같이 공부하던 시절.
아침에 만나 공부하고, 같이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며 수다 떨던 그때가 그립네.
결혼하고 나선 울 남편 참 바빴어.
갖가지 투쟁에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남편 덕에 많이 외로웠지.
그것도 모자라 1년 2개월을 떨어져 지내야 했으니...,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변했어.
마트 가면 내 등 뒤에서 지루하게 쳐다만 보던 남편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하더니 나보다 더 쇼핑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이더라.
뭘 고르나 보면
항상 자기는 필기도구, 사무용품, 자동차용품 앞에 있었어.
큰사람이 작은 필기도구를 이것저것 써보며 고민하는 모습이 참 귀여웠는데...,
제사, 명절 때면 같이 청소하고 제사용품 사러 다니며
나보다 더 스트레스 쌓여 했지.
올해 아버님 기일 기억나?
관양동 시장에서 장 다 보고 출출해서 홍두깨 칼국수 먹었던 거.
싸고 양도 많고 맛도 있어 남편이 흡족해했잖아.
추석에는 건이도 데리고 와서 우리 세 식구같이 먹자고 했는데...,
옷장 정리하다 남편이 사줬던 옷들 보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어.
수입이 생기면 아웃도어 쇼핑몰을 한참 검색하던 남편이
나를 부르곤 했지.
“이거 어떠냐? 당신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렇게 남편이 내게 선물해준 신발, 옷들…
친구들이 활동비라도 보내주는 날이면 그동안 보고 싶었던 책들 사느라 바쁘던 남편이, 언제부턴가 수입이 생기면 내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했는데…
집 안 구석구석 남편과의 추억이 없는 것이 없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다 남편이 보여.
뭔가를 하다가도 문득 들어오는 자기와의 추억들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가네.
며칠 전엔 수업 끝나고 집에 가려다 말고
강의실에 주저앉아 버렸어.
집에 갈 때쯤이면 오던 문자.
‘담배 사와, 마을버스 타면 문자해.’
문자도 없고, 마중 나올 남편도 없다는 현실이
바윗덩어리가 되어 나를 짓눌렀어.
밤이면 마중 나온 남편 팔짱 끼고 수다 떨며 걷던
그 길, 그 시간,
과거가 되어 버렸네.
다시 못 올 그 시간이 아파 한참을 눈물 흘리며 여기저기 서성거렸어.
오늘은 집에 와 보니 물이 담긴 밥그릇에 밥풀 묻은 주걱이 놓여 있네.
나도 모르게 울컥했어.
저녁에 집에 와보면 볼 수 있었던,
깨끗이 설거지 되어 있는 싱크대 한쪽, 밥솥 옆에 놓여 있던 물 담긴 밥그릇과 주걱.
그리고 남편의 잔소리.
“지저분하게 주걱, 밥솥 위에 놓지 마.”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건이가 그러네.
남편의 모습을 건이가 보여주는 매 순간 나는 아파서 눈물이 나.
자기를 보내면서 자기와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신기하게도 얼굴은 몰라도 이름을 들으면 다 알겠더라.
그분들이 얘기하는 남궁원과의 추억도 거의 다 아는 얘기였어.
남편과 맥주 한잔 하며 들었던 이야기, 술 한 잔하고 들어 온 날 들려주던 이야기들...,
남편은 모든 것을 나와 함께 했구나.
남궁원은 나한테 그런 남편이었네.
가정적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 남편 남궁원…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남편,
밥 먹고 커피 한잔 마시며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뒤로 넘겨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던 남편,
이제 내 가슴속에만 있네.
남편이 잡아주던 따스한 손, 그 사랑으로 홀로 오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는 어떤 아주머니처럼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던 남편.
병상에 누워 온 힘을 다해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그 따스한 손,
그 사랑 간직하며 살아갈게.
고마워.
자기를 그리워하며 기억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남겨줘서.
미안해.
자기 맘 몰라주고 힘들게 해서.
사랑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준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