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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8장1~13절
제목: 사천 명을 먹이시다
어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칠 때에 “에바다”라 했습니다.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귀가 열리고 말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늘 본문 8장으 작은 이방지역에 하나님의 복음이 활짝 열리는 표적이 시작합니다.
6장의 표적과 다른 곳에서 다른 청중을 대상으로 표적을 행하십니다.
막6장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 나라 잔치라면,
막8장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 나라 잔치입니다.
그리고 막6장의 오병이어 표적 사건은 제자들이 먼저 무리들의 배곱품을 알려 시작 되었지만, 막8장의 칠병이어의 표적은 예수님이 먼저 직접 먹을 것이 없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살핌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같은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배푼 사건이지만 내용에 들어가서 보면 그 만큼 예수님은 청중들의 상태를 감아하여 일 하시는 분임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동편 데가볼리 지역에서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십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다시 바리새인들과 대면하여 논쟁하십니다.
1. 사천 명을 먹이심(1~10절)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1절)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그 무렵에. - 문자적으로 ‘그 날들 동안’ 으로서, 본 사건을 앞의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치유한 사건(7:31-37)과 연결 시킨 것이라 봅니다.
마가는 지금의 장소에 관해 침묵하고 있으나, 대개 이곳이 갈릴리 호수 동편에 위치한 데가볼리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2)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2절)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른 이유와 본 이적의 근본 동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을 불쌍히 생각하여 그 대책을 마련코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버리기 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입니다.
3) 군중들을 향한 예수님의 애정 어린 마음입니다(3절)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여기서 군중들을 향한 예수님의 애정과 책임 의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마치 자상한 어머니처럼 군중들의 굶주림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기며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4절)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 예수님의 제안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무기력했으며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5,000명 급식 기적 때의 금전 문제와는 달리 장소 문제 였습니다. 즉 집회 장소가 ‘이 광야’ 곧 내륙 한 가운데로서 인가와 마을로 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외진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4) 너희에게 떡 몇 개난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5절)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일곱이로소이다. - 제자들의 불가능한 대답을 듣고 예수님은 희망적인 암시를 갖고 남아있는 음식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6:38주석 참조).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군중들이 오랫동안 굶주렸다면 음식이 남아있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7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수, 완전한 숫자로 보아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충만한 축복을 상징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5)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6절)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예수님은 6:41에서와 같은 형식으로 급식 기적을 행합니다.
그러나 6:39,40과 많은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6:39에서는 무리들을 푸른 잔디위에 앉도록 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냥 땅에 앉게 했다고만 합니다.
이는 분명 장소적 차이뿐 아니라 시간적 차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라 봅니다.
6)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어 이에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게 하십니다(7절).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작은 생선 두어 마리.- 여기서는 6:41과 달리 물고기 숫자가 불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는데 ‘생선 두어마리’는 헬라어 ‘잌뒤디아 올리가’ 를 번역한 것으로서 ‘생선 몇 마리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공동번역).
7)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8절)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 - 이처럼 주님께서는 필요한 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눅6:38).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로서(대상29:11),
*대상29:11,12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12]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지극히 충만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요1:16),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성도의 필요를 먼저 아시기 때문입니다(마6:32).
*마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환난과 궁핍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의뢰하여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좌절하는 등 매우 근시안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8)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9절)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6:44에서는 남자가 오천 명이었다고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구분이 없고 사람이 4,000명 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십니다.
9) 배를 타시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십니다(10절)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6:45에서는 벳세다로 갔다고 언급하지만, 여기서는 ‘물통’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달마누다’지방으로 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막6장의 청중들인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선조때부터 신앙유산을 이어 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무리들의 배곱품을 알았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오래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았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지 못하고 장로들의 유전인 전통에서만 반응하는 종교인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직언입니다.
여기 유대인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방인에 비해서 많은 표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고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에서 그렇게 자주 예고했던 진정한 왕이 오셨고,
실제 눈앞에서 주님의 능력을 보았지만 여전히 예수님 곁에서 당장 먹을 것을 구하는 제자들이나 규정만을 따지고자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깊이 신뢰하지 못한 상태를 여실히 들어 낸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고서도 광풍을 만나니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부스레기 떡이라도 붙잡으려 했던 스로보니인 여인 앞에서 한 없이 브끄러워지게 됩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 칠병이어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수혜지가 이방인 청중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십니다.
8: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먼 지역에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꼼꼼히 보살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새로운 표적을 구하자 단호히 거절합니다.
2. 표적을 구하는 세대(11~13절)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1)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11절)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여기에서 표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기적이나 능력을 행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서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그러한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표적이라는 말은 우리말로“증거”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가 확연히 드러나서 자신들을 확신시킬 수 있는 다른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증거를 요구하는 그들의 의도는 순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계속 예수님을 강하게 비난했던 사람들이었으며,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도 예수님에게서 꼬투리를 잡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리들 앞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증거를 요가한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역을 통해 보여 주셨던 증거들을 거부하고,
그것들을 마귀의 힘을 입어 행한 것으로 판단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기적을 보여 주더라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2) 표적을 거부하시는 예수님(12절)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들들 “이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리새인 들만이 예수님께 대적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지도자들인 사도개인과 친 로마 세력인 헤롯당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 전체를 보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아무 표적(증거)도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다고 해서 아무 때나 무의미하게 기적을 행하시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 놀라운 역사를 보여 주시는 것이지 결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값싼 능력을 행하시지는 않습니다.
마16:4절에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표적은 단지 십자가와 부활뿐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눈과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 속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되심을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것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또 다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들
오늘날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를 보여 주어야만 믿겠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증거를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자연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 나타난 증거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인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신체 구조만 보더라도 얼마나 오묘하고 신묘막측하게 창조되었는지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솔직하고 객관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우리 인간이 진화된 생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번 게놈 연구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 진 이야기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세계의 역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사실을 기준으로 기둰전과 기원후로 구분됩니다.
또한 2000년 전에 120명의 신도로 시작되었던 기독교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사회에 끼친 영향과 업적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께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기적적인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예수님으로 인해 불치의 병에서 치유되거나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았던 문제들이 해결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증거합니다.
이처럼 오늘날가지도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과 역사의 과정, 그리고 기적적인 일들을 통해서 살아 계시는 증거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며 대적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과 영적인 마음이 열리지 않은 채 당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역사 외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4) 최고의 표적 - 십자가와 부활
오늘 본문과 병행구인 마태복음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어떠한 다른 표적보다도 중요한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구약에서 계속 예언 했던 대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보다 더 큰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예수님의 부활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한 기적이나 표적에 의존하는 신앙이라면 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는 신앙만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의 먹을 것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구름 속에 막연하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든 예수님은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우리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경험함으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여러 증거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증거가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눈과 마음이 열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 당시의 사람들과 같이 영적으로 무감가하고 강팍하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연과 역사,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언제나 이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1~3절).
예수님을 따른 큰 무리는 대부분 가난한 갈릴리 사람들과 주변의 가난한 이방인들이기에 사흘 동안 머물면서 충분히 먹을 만한 양식을 갖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시던 때와 달리 가까운 마을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먹지 못한 채 먼 길을 돌아갈 무리를 보시고 뿔쌍히 여기십니다.
“목자 없은 양”같고, 돌봐줄 부모가 없는 “고아”같은 무리를 인해 마음 깊이 애통해하십니다.
우리 마음과 손길이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향하도록 기도합시다.
2) 제자들이 가진 작은 것으로 큰 무리를 먹이십니다(5~9절).
제자들이 내어놓은 떡 일곱 덩이돠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적은 음식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위해 내어준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이 엘리야뿐 아니라 모든 가족을 살린 것처럼(왕상17:8~16절), 예수님도 우리가 가진 작은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살리는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3) 표적을 구하는 세대를 향해 깊이 한탄하시고 표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11~13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다른 특별한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깊이 탄식하십니다.
문제는 더 큰 표적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완고한 그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합니다(1,4절)
불과 얼마 전에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주님의 마을을 공감하지 못하고, 그분의 능력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은 지금 가진 적은 음식과 광야라는 현실에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눈을 돌려 그들과 함께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처럼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주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걱정만 하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