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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생명을 받는 자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천국)은 같은 것인가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부분 신도들은 말하기를『마태가 복음서를 쓸 때, 그 대상을 유대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불경스럽게 여기므로 하늘 나라라고 했다는 설이다』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는 표현방법일 뿐 같은 의미라고 말들도 한다. 그들의 소견대로 말을 하지만, 헬라어성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말을 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3장 2절에서『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톤 우라논이 하늘에 해당된다. 그런데, 『톤 우라논(τὸν οὐρανόν 하늘)』이 마태복음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도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24장 50-53절『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톤 우라논 τὸν οὐρανόν)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마가복음 16장 19절에서『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톤 우라논 τὸν οὐρανόν)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이야기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려지셨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마태복음에만 사용되었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는 단순히 같은 의미다 라고 말을 한다면, 왜 혼란스럽게 용어를 통일하여 사용하지 않고, 이 말을 사용했다가 저 말을 사용했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 성경에서, 하늘(톤 우라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에풀라니오스는 하늘 또는 하늘의 처소로 번역된다.
에베소서 2장 5-6절『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풀라니오이스 ἐπουρανίοις)』성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히셨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15장 48절에서『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풀라니오이스 ἐπουρανίοις)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톤 우라논과 에풀라니오이스(ἐπουρανίοις:하늘의 처소들)는 관사가 있는 복수 형태로 되어있으므로, 성도들의 심령 안에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성부 하나님 나라를 표현할 때는 “테스 바실레이아 투 데우”(τῆς βασιλείας τοῦ θεοῦ: 하나님 왕국)로 표현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나라에 승천했다는 말이다. 하나님 왕국과 하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론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삼위일체 이론은 『성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의한 성도』로 인식되어야 한다. 삼위일체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도구임을 잘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 왕국과 하늘나라(천국) 역시 사람이 이해될 수 있는 수준에서 성경은 말을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 왕국이나 하늘나라(천국)는 하나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성경은 설명한다.
첫째하늘은 보좌에 계신 성부의 하나님 왕국을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아무도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둘째 하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영의 몸을 입고 임재하시는 아들의 나라이다. 골로새서 1장 12-13절에서『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고 말을 한다. 둘째 하늘을 하나님 왕국의 우편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셋째하늘은 성도에게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셋째하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성도가 현재적으로 부활을 믿게되면,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는데, 이 새성전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재림하여 들어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부어주신다. 에베소서 2장 6절에서『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말을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셋째 하늘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셋이다.
첫째하늘과 둘째하늘과 셋째하늘은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세가지의 형태로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 에수안』이라는 말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이 말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되는 것이다. 역시 로마서 6장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새 피조물, 새생명은 부활생명이다. 사람은 영적 존재인데, 영이 흙에 갇혀 있는 것이다. 육체가 죽으면, 흙으로 가지만, 영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만 한다. 전도서 12장 7절에서『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영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전도서 3장 21절에서『인생들의 혼(프뉴마)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프뉴마)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프뉴마는 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귀절을 보고 동물도 영이 있구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늘로 올라가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의미하고, 땅으로 내려가는 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를 의미한다. 땅은 스올(음부)라는 말이다. 둘째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와 함께 죽고,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라고 말씀을 한다. 부활이라는 말에 대해서, 육신의 입장에서 보면, 육이 부활한다고 믿게 되지만, 영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하늘의 생명인데, 흙에 잠시 갇혀 있다가 다시 하늘의 생명이 부활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이므로, 육이 죽고, 하늘의 생명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런데도, 육이 부활했다고 주장한다면, 육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부활생명)에 대해서 구약시대에서 부터 계속 사람들의 문을 두드려 왔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구약성경에서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육신의 몸으로 아브라함에게도 나타나시고, 다양하게 임재하신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천하만민 중에 이스라엘을 모델로 택하시고, 언약을 통하여 하늘 생명을 주시겠다고 사람들의 심령을 두드렸지만, 깨닫고 문을 여는 자는 믿음의 선진 외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와서 다시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위 문을 두드리셨다. 천국(하늘 나라:부활생명)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장 48-50절『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 7장 7-8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요한계시록에서도 3장 20절에서도『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이유는 마음 밭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좋은 밭이 되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게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육의 마음인지, 영을 향하는 마음인지 계속 상고해 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사람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사건이 있었다. 간음한 여인의 사건이었는데, 돌을 들고 치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땅에 쓴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예수님은 하늘의 생명(부활생명)에 대해서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예수님 자신이 부활생명이라고 밝히셨다.
예수님은 떡 세덩이 비유를 하셨다. 누가복음 11장 5-9절『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벗(친구)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떡 세덩이는 부활생명을 상징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활생명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비록 침실에 누워 있을지라도 빌려준다는 것이다. 빌려주는 의미는 다시 갚아라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갚는 일은 부활생명을 받은 자가 다른 이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미련한 다섯처녀는 기름이 부족하여 혼인잔치 문을 들어갈 수 없었다. 기름은 바로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성령(기름)세례를 통해서 부활생명이 들어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름이 있었지만, 기름이 다 소모된 것이다. 이는 부활을 믿지만, 육체가 죽어서 부활된다는 믿음이다.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을 생각하는 자는 기름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두드리셨다. 베드로전서 3장 18-19절에서『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옥은 육체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의 영은 육체라는 흙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그러나 음성을 듣지 못하면, 노아의 홍수때 회개하지 않은 자와 같다는 말씀이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서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하늘 생명을 받아드리는 자는 극히 적은 숫자임을 보여주신다. 출애굽 당시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명이었다. 물론 19세 이하의 어린아이와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도 들어갔지만, 애굽으로 나온 성인 중 두명만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다 죽었다. 현재적 부활생명을 찾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승천 후에도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가서 성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심령을 두드리고 있다. 현재적 부활생명을 받아드려라는 것이다. 회개하면 받을 수 있다. 회개가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구약시대, 죄인은 율법에 따라 죄를 지으면, 희생양을 가지고 성소뜰에 들어서는데, 죄인이 동물의 머리에 손을 대고 죄를 전가시키고, 그 양을 죽여 피를 담아 제사장에게 건넨다. 제사장은 제단에 피를 뿌리고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은 희생양이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바로 그 죄인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죽은 시체, 불에 태워지고(불세례), 피(물세례)뿌림을 당한 양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어있는 시체는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지 못하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마음 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죽으라는 것이다. 그 죄가 바로 하나님 처럼 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고 말을 했다. 오늘도 하나님은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현재적으로 십자가에서 죽고 현재적으로 부활생명을 받으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