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지하철역의 백수광부 > 미니픽션- 유경숙/소설가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따는 것은 시간 죽이기 세월이었다. 중세 암흑기로 돌아가 어둠을 갉아먹는 것과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상범의 지도교수는 수시로 압박을 가했다, 발품을 팔아 석관 속에 든 미라(mirra)를 찾아내 부활시키라고…. 그래서 그는 수년 동안 독일의 서남부에 있는 전통 깊은 수도원들을 찾아다녔다. 라인강 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오래된 수도원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문헌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상범은 어디든 달려갔다. 봉쇄수녀원이든 대학도서관이든 샅샅이 훑고 다녔다. 에크하르트가 속해 있던 도미니코수도회는 주로 도심에서 학문과 설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탁발수도회였기에 자료가 많은 편이었으나 유독 그의 영성에 관한 자료만 사라졌다. 그가 종교재판에 끌려 다니다 병을 얻어 객사한 후 이단으로 단죄되어 강의 자료가 몰수돼 불태워졌기 때문이리라. 일찍이 그이는 생명의 근원과 우주의 원력에 눈을 떴고 동방의 노장철학에도 깊이 영향을 받았던 신비주의수도승이었다. 철통같은 유일신의 중심시대에 초월이며 내재이고 내재이며 초월인 범재신론(Panentheism)을 들고 나와 ‘부정의 길’을 예고한 죄 몫으로 재판에 끌려 다녔다.
상범이, 한번은 골짝 깊은 숲 속의 수도원을 찾아갔다가 늙은 수사에게 붙들려 단단히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봉쇄수도원을 혼자 지키고 있던 원장수사는 수도원 문을 이대로 닫을 순 없다며 막무가내로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늙은 원장은 가끔씩 혼잣말처럼 슬쩍슬쩍 말을 흘리기도 했다, “라틴어와 헬라어로 씐 금서들이 지하 궤짝에 잠자고 있는데.”라며. 아직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중세 신비주의 교서들이 들어있는 석관이 따로 있다며 은근슬쩍 미끼를 던져보기도 했다. 그는 밤마다 열쇠꾸러미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달랑거리며 상범의 애간장을 태웠다. 봉쇄수도원으로 전해져온 탓에 장상(長上)에게만 비밀리에 열쇠가 전수되는 전통이 살아있다고 했다. 수도자로 정식 입문을 하면 지하 서고의 열쇠를 넘겨줄 수도 있다고…. 곰팡이와 먼지로 켜켜이 덮인 희귀본 고서들의 봉인(封印)을 함께 푸는 작업을 시작하자며 꼬드겼다. 당신 살아있을 때 고어(古語)번역을 마쳐야 한다며, 때론 절실한 눈빛을 보이기도 했다.
상범은 아침저녁으로 원장수사를 따라 성무일도를 바치며 수련기 아닌 수련기를 보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구운 감자 몇 알과 염소젖 한잔으로 저녁식사를 때우고 나면 밤은 너무나 길었다. 한겨울 불기운도 없는 침실에서 양말을 깁고 있는 원장 모습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유령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 트라피스트 수도승이 튀어나와 노동을 재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몇 켤레의 양말을 끼어 신고 잠자리에 드는 노인은 발냄새가 지독했다. 유목민의 장화 속처럼 고린내가 진동했다. 돋보기를 끼지 않고도 바늘귀를 꿰었고 구멍 난 양말을 섬세하게 기워냈다. 구십이 넘은 나이에도 장작을 패고 손빨래를 하며 청빈한 생활을 이어갔다. 상범은 낙엽 지는 십일월에 입성하여 혹독한 겨울을 수련기로 보내고 이듬해 삼월 수도원을 나왔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알아보는 이가 드물 정도였다. 봄이 되면서 새벽 성무일도를 바치다 몇 번 쓰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원장은 끝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상범이 중세철학에 갇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나오니 세상은 몇 세기를 뛰어 넘은 듯 문명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도서관에 갇혀있던 지식과 수도원 서고에서 잠자고 있던 문자들이 실시간 광속을 타고 국경 없이 날아다녔다. 그의 수많은 노트와 복사자료는 한낱 불태워질 종이쪽지에 불과했다. 칠백년 동안 잠들어 있던 에크하르트의 영성을 깨워 한권의 책으로 부활시켜놓고 보니 그의 머리카락은 이미 허옇게 서리가 내려 백수광부가 되었다.
갑오년(甲午年) 겨울,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날리며 베를린지하철역을 찾아드는 상범의 배낭 안에는 허름한 침낭 하나가 들어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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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불태워질 종이쪽지에' 그의 책을 찾아 평생을 헤맬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엔가 살아있어 그 책이 빛을 보는 날을 위하여 건배를 하고 싶습니다. 머물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