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2집(효자도 권5,6,7,8)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제7권 주해
>효자도 제7권
>광남감왜(光男感倭)
光男感倭
禹光男安陰縣人 年十歲嫡母病劇嘗糞十二歲父爲倭賊所執號泣請釋賊感而從之 今上朝㫌門
Ⓒ 필자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우광남은 안음현 사이라 나히 열 설에 뎍뫼 병이 극거 을 맛보고 열두 설에 아비 예게 잡혀 브지져 울고 노홈을 청니 도적이 감화야 조니라 금샹됴애 졍문시니라
Ⓒ 필자 | 이성 / 1617년(광해군 9)
광남감왜 - 우광남이 왜적을 감동시키다
우광남은 안음현 사람이다. 나이 열 살에 큰 어미 병이 위독하거늘 똥을 맛보고, 열두 살에 아비가 왜적에게 잡혀가매 부르짖어 울면서 놓아줌을 청하니, 왜적이 감동을 하여 그 말을 좇았다. 금상 때 정문을 내렸다.
Ⓒ 역자 | 정호완 / 2015년 5월 15일
뎍뫼 병이 극거 : 큰어미가 병이 위독하거늘. 큰어미라 함은 서자가 정실의 부인을 일컫는 이름이다. 단모음화와 구개음화를 거치면서 ‘뎍모〉젹모〉적모’가 된다. 구개음화란 구개음이 아닌 것이 이 모음의 영향을 받아 조음점이 소리가 나기 쉬운 조음 자리로 변함으로써 발음을 쉽게 내려는 발음 용이화의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아직도 북녘에서는 구개음화가 되지 않은 소리로 표준으로 삼고 있다.
安義邑誌 / 李朝
鄭惟明 見人物
:: 0232 ::
禹光男 年九歲嫡母鄭氏有疾嘗糞祝天十一歲與父遇賊賊欲害其父哀號擗踊賊感而兩釋之命旌
柳橿 丁酉之變入黃石城城陷先負母出城後入賊中負父將出賊欲害其父以身翼蔽俱不得免命旌
鄭大有鄭大益 丁酉之變以淸野任隨邑候郭䞭入黃石城城陷使奴吾佐美負母兄弟擁衛出城至長水寺洞口伏於岩間賊先遇其母欲害之兄弟翼蔽吾佐美亦蔽幷死一刃其母得 全命旌
朴銀浩 私奴與其父入黃石城陷失父入賊中負父膝行竝死賊刃命旌
劉有道 義士名蓋孫十三歲遭父喪不離几筵不食菜果奉母竭誠母沒泣血三年命旌復戶
鄭岐憲 文簡公蘊孫丁父母憂泣血啜粥六年繼母喪亦如之乃至目不視物以繡衣啓除參奉號盲逸贈佐郞
禹錫一 見人物
愼守沈 樂水權五世孫早丁父憂啜粥三年奉母家雖貧乏不絶甘旨有水魚山獐之感以道啓贈童蒙敎官號逸齋
愼守彝 見人物
:: 0233 ::
全宅仁 持平虞錫子年十六父沒哀毁踰制母病禱天嘗糞斫脂及沒泣血柴毁命旌復戶號最藥齋
崔聖文 身本跋躄而父病積年極力調護祭天祝壽父病漸復聖文喜欲蹈舞兩脚自伸命復戶
林翰臣 瞻慕堂芸九世孫村人失火延及其家母未及出而火焰四塞翰臣在外冒焰直入傍人挽止不得竟死火中其妻朴氏隨跟亦死贈敎官命旌
禹師欽 其父年將八十以風疾恒在病席不能坐臥侍養藥餌未嘗委於子侄竭誠以供甘旨父沒廬墓命旌復戶
禹錫一 縣監汝楙子 早遊桐溪鄭蘊門學透性理行備孝友母疾嘗糞血脂母病得甦父喪廬墓啜粥事聞命旌號蘭谷
『난곡유고』
우석일(禹錫一)[1612~1666]의 자는 자행(子行), 호는 난곡(蘭谷),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눌계(訥溪) 우형(禹悙)에게 가학을 전수받고, 17세에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에게 배웠다. 어머니의 병에 무명지(無名指)를 잘라 소생하게 한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여무
『속천선생문집』
우여무(禹汝楙)[1591~1657]는 자는 대백(大伯)이고, 호는 속천(涑川)으로, 본관은 단양이다. 증조 할아버지는 우치회(禹治淮)이고, 할아버지는 우순보(禹舜輔)이다. 아버지는 정묘호란 때 기의했던 눌계(訥溪) 우형(禹悙)이며, 어머니는 화순최씨 최응회(崔應會)의 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여무(禹汝楙)[1591~1657]의 자는 대백(大伯), 호는 속천(涑川)이다.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아버지는 우형(禹悙)[1567~1652], 어머니는 화순최씨(和順崔氏) 최응회(崔應會)의 딸이다.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당시 이전(泥田)]에서 태어났다.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에게 수학하였다. 1634년 과거에 급제한 뒤 병조 정랑, 사헌부 지평, 하동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로 『속천집』 외에 20편의 『홍범우익(洪範羽翼)』, 8권의 『홍범연의(洪範衍義)』 등이 있다.
『눌계유고』
[저자] 우형(禹悙)[1567~1652]의 자는 군면(君勉), 호는 눌계(訥溪)·눌계재(訥溪齋)이다.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추증된 우순보(禹舜輔)이다. 어머니는 팔계정씨(八溪鄭氏)로, 정원보(鄭元俌)의 딸이다.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화림 출신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 등과 교유하였다. 1606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 때 화림의 의병장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형(禹悙)[1567~1652]의 자는 군면(君勉),
난곡(蘭谷) 우석일(禹錫一)[1612~1666]은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문인이며, 학문뿐만 아니라 효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우석일의 아들
우광남 역시 모친이 병이 들자 극진히 간호하였으며 부친인 우석일이 도적을 만나 해를 당하려고 할 때 눈물로써 도적을 감동시켜 부친의 목숨을 구하는 등 효자로서 행적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정려가 내려지게 되었다.
1650년(효종 1)에 조정의 명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이후 1678년(숙종 4년) 3월 정려비 2기를 세웠고 1999년 비각의 중수 및 주변 정비사업을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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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일·우광남 정려
禹錫一禹光男旌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밤숲가는길 22[당본리 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석환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우석일·우광남의 효자 정려.
[변천]
난곡(蘭谷) 우석일(禹錫一)[1612~1666]은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문인이며, 학문뿐만 아니라 효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우석일의 아들 우광남 역시 모친이 병이 들자 극진히 간호하였으며 부친인 우석일이 도적을 만나 해를 당하려고 할 때 눈물로써 도적을 감동시켜 부친의 목숨을 구하는 등 효자로서 행적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정려가 내려지게 되었다. 1650년(효종 1)에 조정의 명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이후 1678년(숙종 4년) 3월 정려비 2기를 세웠고 1999년 비각의 중수 및 주변 정비사업을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정려각은 정면 2칸에 측면 1칸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정표의 목적이 충효를 칭송하고 널리 알리는 데 있으므로 정려각의 윗부분과 기둥에는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단청 장식을 하였으며, 정려각의 내부에는 부자의 정려비 2기가 세워져 있다. 정려각은 기와를 얹은 토석혼축 형태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담장의 출입문은 창살 구조의 하늘색 낮은 여닫이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현황]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의 주택지 내 도로변에 있다. 인접한 곳에는 단층 규모의 민가들이 있으며, 그 뒤편으로 공동주택들이 있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 함양군(함양군·경남대학교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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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文集年譜 / [附錄] / 文簡公桐溪先生年譜
二十八年庚子。先生三十二歲 入京。見梧里李相國元翼。先以書爲贄。有之江左見月川。之江右見寒岡。獨於洛。未見先生之語。相國特敬重之。許以知己。旣還鄕。又上書。有曰。爲相之道。不徒淸苦簡默之爲貴。必明以卞邪惡。斷以行威刑。使爲善者勸。爲惡者懼。然後庶乎無負相業。敢以此爲知遇之報云。初丁酉之亂。相國體察南方。使安陰縣監郭䞭。修黃石山城。爲保障計。及賊動。以郭公爲守城將。金海府使白士霖爲出戰將。賊至城下。士霖率家屬宵遁。城遂陷。郭公及咸陽郡守趙宗道死之。一城士民屠殺甚多。至是。鄕人
悙等見李五峯好閔求改。李曰。辭懇義正。一字加減不得。 書郭義士傳後。備載黃石顚末。暴著士霖罪狀。 錄亂後孝烈事。丁酉之亂。縣人孝烈死者。以一鄕議。聞于官。轉達旌閭。 八月。作葛川先生旌門重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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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이(愼守彝) 1688년(숙종 14)~1768년(영조 44)
황고(黃臯) 신수이(愼守彝)1688년(숙종 14)~1768년(영조 44) 군서(君敍) 취한당(就閒堂) 거창(居昌)
黃臯集卷之五 / 跋 / 題蘭谷禹公 錫一 行狀後
*우석일(禹錫一,1612~1666)
吾鄕素稱鄒魯之邦。而鴻儒碩士。相繼輩出於弘治嘉靖之間。蔚爲後學之矜式焉。至於萬曆天啓之中。蘭谷禹公。有忠孝之行文學之名。而不佞晩出。恨未及親承熏炙。得詳其儀範矣。去年夏。蘭谷之孫
洪漸甫持其所輯家狀與
邑侯趙公榮袥所撰行狀一帙。並
蘭谷詩文若干集。使其子
師欽來余而請次焉。不佞喜得其詳。敬奉而披玩。則果可謂因其書而得其心矣。其學問之深淺。造詣之閫奧。固非末學之所可窺闖。而其敬奉雙親。就養無方之誠。其嘗糞血指歠粥居廬等節。實是至孝之出天者。而至如仁孝兩朝。各盡方喪之忠。尤是古今之罕見。則亦見其彜倫之篤於素性者然也。古人所謂求忠臣必於孝門者。果不信歟。其詩文簡奧。皆是性情之發。而其己亥禮辨。則卓乎非當時嶺以南七十州俗士之所能幾及。則亦非其所學之正。識見之明者。能如是乎。噫聖賢所貴者。莫過於忠孝。而文章乃其餘事耳。聲聞于朝。雖有㫌褒之異。而天不假年。不得展布。只爲窮巷之一士。惜哉。百載之下。欽仰景歎者。曷有其已。而禹氏之於弊家。世誼且隆。安可以不文敢辭其贊揚。而顧以自公歧嶷之時。至於易簀之事蹟。家牒之斑斑所載者。已詳於
趙侯之文而盡矣。雖竭剡藤族楚穎。更無以容贅者。故謹叙其梗槩。以跋其狀後焉。
<蘭谷遺稿> 제3권 書行狀後
狀後焉辛酉十月日居昌愼守彛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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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남(閔在南) 1802년(순조 2)~1873년(고종 10)
晦亭集卷之九 / 墓表 / 宣敎郞引儀禹公墓表
禹氏貫丹陽而居安陰。世有聞人。或以孝行㫌閭。或以文學薦剡。豈無所自而然乎。其先有諱治淮字曰平叟。官宣敎郞引儀。高麗侍中仲大後也。考諱圭通仕郞。祖諱繼根司果。曾祖諱決直長。高祖諱恪生員。公之遺文旣燬。身後又無知德者叙述。世遠今不可詳。謹按其家傳曰公幼性至孝。慕曾閔之行。文章典雅。服程朱之訓。安分竆約。乃其志業也。同時有若葛川林先生爲道義交。每稱許曰禹氏顔子。此一言可想公之爲人。而其他可略之也。配昌寧曺氏秀建女。有男舜輔贈戶曹參判。其遠孫墉方。謀墓道之刻。問叙於余。余嘉其誠而泚筆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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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 정조 18년 갑인 > 7월 16일 > 최종정보
정조 18년 갑인(1794) 7월 16일(신축)
18-07-16[09] 예조가 서울과 지방의 효자와 열녀의 실제 행적에 대해 회계(回啓)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의 효자와 열녀로서 경술년(1790, 정조14)부터 계축년(1793)까지 보고된 것이 모두 170명입니다. 정식에 따라 전 예조 판서 민종현이 참판, 참의와 함께 모여 상의하여 등급을 나누어서 의정부에 보고하였습니다. 서경(署經)의 예와 같이 각각 별단으로 기록해 두었는데 입계(入啓)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써서 들입니다.”
하였다.
○ 효자 가운데 식물(食物)을 지급해야 할 대상에 대한 별단은 다음과 같다.
안의(安義)의 유학 우사흠(禹師欽)은 어버이를 받들 때에 그 뜻을 봉양하는 것을 법도로 삼았다. 부모상을 당해서 예제(禮制) 이상으로 슬퍼하여 몸이 상해 거의 죽을 뻔하였고, 묘소 곁에 여막을 치고 시묘를 살며 상을 마쳤으며, 아침저녁으로 호곡하였다. 그의 두 아들 우정전(禹精傳)과 우익전(禹益傳)도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여, 어미가 병이 들어 임종을 맞이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한 달을 더 살게 하였다. 어미가 죽자 묘소 옆에 여막을 치고 시묘를 살며 상을 마쳤는데, 승중손(承重孫)인 우징락(禹徵洛)이 아비를 따라 묘소 곁에서 거하기를 또한 그 아비처럼 하였으니 자손들이 집안에서 덕의(德義)에 대해 제대로 배웠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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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金升二首 <蘭谷遺稿> 제1권
一蠹先生爲縣時
金升古器有誰知
卽今遺澤民無及
惆悵歸來憶杜詩
金升金斗用當時
遺澤一朝民不知
借問何人偏棄擲
想來舊樣賦新詩
4년신미 공이십세
알요수신선생 公奉庭命 往拜之 先生喜形于色 諄諄眷眷 欲其成就之者 深且至矣
제2권 부록 왕고난곡부군가장
初娶장연변씨상절지녀 생이자일녀 왈윤미급성인이몰 왈도 녀적이서규
재취진양강씨희역지녀 생일자일녀
왈공
녀적정중화 濤無嗣이불초홍점위자 공생오자사녀 왈홍제 왈홍점 왈홍성 왈홍평 욀홍익
女長適변종후 차적전윤대 차적유언일 차적최수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