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국진체 싹틔운 한국서예의 본고장
남화의 본고장으로 불리는 광주․전남지역은 동국진체(東國眞體)가 발아하고 개화․결실한 곳이란 점에서 한국 서예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국진체란 중국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우리의 정서에 맞게 개발된 한국적 서체로 300여 년 전 이 지방에서 이 같은 노력이 있었다는 것은 광주․전남의 예술적 역량을 다시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지금도 서울․경기지역과 경상도에서는 중국의 서법이 크게 중시되고 있는 반면 이 고장에서는 동국진체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있다.
동국진체는 옥동(玉洞) 이서 (李緖․1662〜1723)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동국문헌 필원편 서화징).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형인 이서는 벼슬이 찰방에 그쳤으나 서예에 있어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으며 우리나라 서예사에 필결(筆訣)이라는 이론 및 비평서를 남긴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서의 서맥은 해남출신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로 이어져 이 지방에 본격적인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공재는 이서를 만나 자연스럽게 동국진체를 전수받게 된다. 이는 이서의 행장에 공재와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등이 모두 그의 여체(餘體)라고 기록돼 있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공재 윤두서의 행장에는 이서와 만나 서법을 논했다는 대목이 있는데다 나이 차이도 6세에 불과는 점에서 제자리라기보다는 함께 동국진체를 논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여하튼 공재로 이어진 동국진체는 크게 두 개의 줄기를 형성해 이 지방에 뿌리를 내린다. 그 하나는 아들인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1685-1766)와 외증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방산(舫山) 윤정기(舫山 尹廷琦․1810-1879), 춘계(春溪) 윤홍혁(尹洪赫)등 집안으로 이어졌고 또 하나는 백하 윤순〜원교 이광사로 이어져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잘 알려진 대로 공재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으로 한국 최초로 서양화의 음영법을 도입한 화가이자 낙서 윤덕희〜청고(靑皐) 윤용(尹榕․1708〜1740)으로 이어지는 3대 화맥의 창시자이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의 대학자로 서화에 남다른 기량을 보여 그의 매화도와 서예작품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또 전각에도 뛰어나 이 지역 전각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동국진체의 서체를 대중화시킨 사람은 원교 이광사다. 한 때 완도 신지도에 유배되기도 했던 그는 이곳에서 이명의(李明義)와 김광선(金光善)을 기른 것을 비론하여 해남 대흥사의 즉원(卽園․1738-1794), 혜장으로 알려진 아암(兒菴․1772-1799)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등 크게 4대 계보를 형성해 본격적인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원교 이광사 대중화 기틀 마련
원교 이광사는 전주 출신으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백부의 진유사건에 연루되어 부령과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을 정도로 서예에 진력, 훗날 서예의 중흥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마당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땅에 글씨를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당․송․위․진과는 전혀 다른 서체로 일가를 이뤘다. 특히 그는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는데 연암 박지원은 그의 글씨를 평가하는 글에서 독특한 개성미의 작품이라고 쓰고 있다. 저서로 ‘동국악부’ ‘원교집선’ ‘원교서결’등의 저술을 통해 서예중흥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송하 조윤형으로 이어졌던 원교의 서맥은 죽석(竹石) 서영보(徐榮輔․1759-1816)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搢․1772-1840)과 직암(直庵) 윤사국(尹師國․1728-1809)으로 이어졌으나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전설적인 서예가 창암 이삼만으로 이어졌던 서맥이 오늘날 호남서맥의 원류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전주 출신인 창암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을 돌보지 않고 서예에 몰두해 가정이 퇴락했을 정도였다. 처음에넌 세상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지 않았으나 우연히 부산 상인의 장부에 기록한 것이 명필로 알려져 이름을 날렸다. 특히 그는 행초에 능했고 기운생동의 필법으로 유명하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부른다. 하동 칠불암의 편액을 비롯 전주 제남정액 등 많은 편액을 남겼다.
그는 또 수많은 제자를 길러 호남서단이 한국서단의 중심으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성리학의 태두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과 의재(毅齋) 허백력(許百鍊․1891-1977) 설주(雪舟) 송원회(宋運會․1874-1965) 근원(槿園) 구철우(具哲祐․1904-1989) 석전(石田) 황욱(黃旭․1898-1993)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1903-1981) 등이 모두 그의 서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창암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기른 제자는 호산(湖山) 서홍순(徐弘淳․1798-철종대) 함평출신 기초(箕樵) 모수명(牟受明․?-?) 해사(海士) 김성근(金成根) 노사 기정진 등이다. 모수명은 만년에 호남지방을 돌아다니며 서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3개월간 배워도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수업료 200냥을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서체는 성씨에 따라 모체(牟體)라 한다.
노사 기정진은 서예가로서보다 성리학의 대가로 이름이 높다. 송대(宋代)의 철학자 주돈이 장재(張載) 정이 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해 대성하였다. 그는 퇴계, 율곡 이후 3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이기론 논쟁의 매듭을 지었으며 성리학의 중신을 이(理)로 파악함으로써 유리학자(唯理學者)로 평가받는다.
그는 재야의 진보적인 사대부로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타락상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삼정문란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병인양요 때는 이른바 위정척사운동의 기치를 울리기도 했다. 기정진의 문인들은 영호남에 걸쳐 600여명에 이르는데 이들이 위정척사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한말 의병대열에 앞장서기도 했다.
노사 기정진은 본래 순창사람이었으나 기준(寄遵)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기준의 형 기진(寄進)과 기원(寄遠)이 화를 피하여 장성으로 이거함으로써 장성사람이 되었다. 고봉 기대승은 기진의 아들이며 기정진은 기원의 후손이다. 기정진의 학문은 당시 학자들 사이에 인정을 받았었고 ‘장안의 만 개의 눈이 장성의 한 개 눈보다 못하다’는 유행어를 낳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심오한 학문 뿐 아니라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오늘날 군더더기를 털어버린 강직한 서예술의 근간을 전수하기도 했다.
모수명 서맥이 전남, 북으로 갈라져
익산출신의 서홍순은 전주의 아삼만, 남원의 강남호와 더불어 조선후기 3대명필로 불리며 전주 풍남문의 편액 호남제일성을 썼다. 이 가운데 무스명의 서맥이 전남과 전북으로 나뉘어 전북에서는 석전 황욱과 손자인 황방연(黃邦衍)으로, 전남에서는 설주 송운회를 통해 또 하나의 서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참고로 전북 강암 송성용은 김창돈으로부터 해사 김성근의 서맥을 익혀 집안 조카인 송하영(宋河瑛․1937-1990)아들 송하경(宋河景)으로 전수했다.
모수명의 서맥 가운데서 설주 성운회〜송곡(宋谷) 안규동(安昑․1907-1987)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에서 가장 많은 서예인들을 배출했다.
보성출신인 송설주와 송곡은 행초에 특히 능했는데 오늘날 이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는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용곡(龍谷) 조기동(曺基銅)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 송파(松坡) 이규형(李圭珩) 금초(金草) 정광주(鄭侊柱) 등이 모두 그의 제자다.
설주 송운회는 조부 후만공에게 한학과 서예를 배우다 18세 되던 해 보성에 유배되어온 영재 이건창 선생을 만나 한학과 경서를 배웠다. 또한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우군(王右軍)을 비롯하여 구양순 안진경 유석암 등 중국 서가의 전적을 두루 답습하였다. 또한 조선조의 명가인 원교와 기초, 추사체에도 심취하였는데 특히 동기창에 자신의 필법을 구사하여 설추체를 완성하였다. 따라서 설주의 글씨는 ‘동기창+설주’‘원교+설주’‘유석암+설주’
‘추사+설주’의 네게 행서를 완성하였고 초서는 초성 손과정체를 진일보시켜 독자적인 경지를 일궜다는 평이다.
송곡 안규동은 동국진체의 확실한 서맥을 이어받은 서예가로서 스스로 조형구조의 원리를 터득하여 이른바‘송곡체’‘천마산인체’라는 독창적인 세계를 창안하였다. 전․예․해․행․초 등 서예오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서예오체천자문’‘한글서예교본’‘서예의 역사’등을 집필했을 정도로 이론과 실기를 겸한 서예가였다.
송곡은 한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한문을 공부했는데 19세때 설주 송운회와 효봉(曉峰) 허소(許炤․1882-1942)를 만나 본격적인 서예의 길로 접어든다. 따라서 송곡의 서맥은 위로 거슬러 올라 설주 숭운회-기초 모수명-창암 이삼만-원교 이광사-공재 윤두서에 뿌리를 대고 있다.
한편. 노사 기정진으로 이어진 창암의 서맥은 허재 허백련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1843-1911) 등을 거쳤다. 의재의 서맥은 근원 구철우를 통해 지헌(志軒) 오명렬(吳明烈) 우현(又玄) 장은정(張恩楨) 현계(泫桂) 김정희(金正喜) 무전(茂田) 곽영주(郭英珠) 담헌(湛軒) 전명옥(全明玉) 공전(空田) 손호근(孫昊近)으로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매천 황현은 그가 서예가로서의 삶보다 우구지사이자 학자로의 삶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의 서맥을 직접 이어받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노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안진경(顔眞卿)의 쌍학명(雙鶴銘)과 동기창(董其昌)의 삼사소(三思疏)를 익히고 조맹부와 왕희지까지 두루 섭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비정신이 옹골차게 베어있는 해서와 굳건한 기상과 담대한 포회(抱懷)가 엿보이는 행서는 그가 호남의 중심서맥을 잇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근원 구철우의 서맥은 의재 허백련-노사 기정진-창암 이삼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왕희지와 조맹부, 동기창체에서 필의(筆意)를 익혀 ‘근원체’란 독특한 필법을 완성하였다. 평소 ‘정(正)이 익혀진 후에라야 파격이 나올 수 있다’며 기본을 강조했으나 ‘획만 좋으면 결구를 무너뜨려도 좋다’고 서예술의 자유로움을 강조했다. 때문에 그 자신도 만년에 들어 추사의 ‘판전’처럼 조금의 기교마저 모두 무너뜨린 자유로운 필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서예가이면서도 사군자에 능해 국전에서 연4회 특선을 차지했으며 ‘묵매’는 문인화에 최고봉으로까지 불려진다.
또한 노사 기정진-노백헌 정재규의 서맥은 율계(栗溪) 정기(鄭琦·1879-1948)를 거쳐 효당(曉堂) 김문옥(金文鈺·1901-1960)과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1902-1965)으로 이어졌다. 김문옥의 서맥은 순천 출신의 벽강(碧岡) 김호(金灝)를 거쳐 목인(木人) 전종주(全種柱)로, 김규태의 서맥은 아들 창석(菖石) 김창동(金昌東)이 이어받았다.
고당 김규태의 작품은 그야말로 문기(文氣) 넘치는 선비의 글씨다. 시문과 유학에 능한 선비가 높은 학문을 가슴에 품고 여기(餘技)로 썼던 글씨이기에 시문이 녹아 있고 유학의 정신까지 응축되어있다. 엄격한 율격과 조사의 정약(精約)이 탁월하여 심오하고 강유한 미적 정서를 느끼게 한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효당 김문옥과 함께 율계의 문하로 좌(左) 고당, 우(右)으로 불렸는데 고당은 문(文)에 더 밝아, 문에는 효당이요, 시부(詩賦)와 서예는 고당이른 유행어가 있었을 정도라고 알려진다.
추사 이래의 대가 소전 손재형
한국 서예사에서 ‘추사 이래의 대가’로 불리는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1903-1981)의 서맥은 멀리 원교 이광사에 뿌리를 대고 있다. 이는 그의 두 스승인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5)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6)가 원교를 답습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정과 성당의 서체 속에는 왕희지가 왕헌지를 근간으로 미불과 회소를 가미했던 원교의 냄새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서예’를 예술로 자리매김시킨 주인공이자 소전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확립한 한국현대서예의 거목이다. 또 서예가이자 교육자로서, 문화행정가이자 정치가로서의 폭넓은 삶을 통해 한국 서예사의 곳곳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서법과 서도(書道)로 혼용되던 것을 서예로 자리매김시킨 것과 한글과 한자 서예의 접목, 특히 문기 넘치는 서체의 개발 등은 한국서단에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신화’로 회자 되고 있다.
소전 서예술의 특징은 완벽한 미적 조형성과 필흥(筆興)을 느끼게 하는 리듬감에 있다. 자형에 다양한 조형미가 있으면서도 결코 문자의 원칙을 어그러뜨리지 않음으로써 유려 전아한 품격을 이룩했다는데 소전의 뛰어남이 있다고 하겠다.
특히 그의 서예술 가운데 한글의 전예체화는 한글서예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혼용비로 유명한 ‘충무공 벽파진 진첩비’ (진도) ‘해군사관학교 훙혼탑’(진주) ‘사육신 비문’(서울) 등은 점과 선, 횡획과 종획 등의 변화무쌍한 조화와 리듬이 금세기의 역작으로 불린다. 또 그는 한문서예 뿐 아니라 한글, 포도나 연, 괴석 등을 그린 문인화와 산수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역을 넘나들었다.
어린시절 조부로부터 한학과 서예의 기본을 익힌 그는 진도에 유배되어온 무정 정만조를 사사하다 양정의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서예의 길로 들어선다. 석정(石汀) 안종원(安種元)의 소개로 서당 김돈희 ‘상서회’에 들어가 22세때 제 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의 영예를 안았고 8회까지 연 6회 입선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 28세 때는 예서로 첫 특선을 차지한 뒤 10회 때는 초서 ‘12곡병’으로, 그리고 선전에 이어 신설된 조선서도전에서도 특선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2회 조선서도전 때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심사위원을 지냈다.
소전은 30세 때 중국 금석학의 대가 나진옥(羅振玉) 선생을 만난 뒤 4년 동안 중국을 왕래하면서 갑골학을 깊이 공부했다. 이때의 갑골문자와 금석학에 대한 연구가 소전 체를 확립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소전의 서예가서의 활동은 해방과 함께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해방 1년 전인 44년 2차 대전이 위험 속에서 일본에 건너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를 찾아오기도 했으며 광복과 함께 조선 서화연구회를 결성해 초대회장을 맡았다. 또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창설에 깊이 관여해 1회 때부터 심사위원을 맡는 등 국전운영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오랫동안 국전에 관여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게 되는데 한국서단의 지도자 가운데 그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의 문하에서 공부해 국전 초대작가에 오른 사람이 12명이나 되고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까지를 포함하면 20여명에 이른다. 광주·전남 출신 제자로는 경암 김상필(1941-1995), 평보 서희환(1932-1995), 장전 하남호, 금봉 박행보, 원당 김제운 등 이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그의 제자로 한국서단에 크게 이름을 남긴 사람은 원곡 김기승, 학남 정환섭, 해청 손경식, 무여 신경희, 여산 권갑석, 강암 송성룡, 남정 최정균, 우정 양진니, 동강 조수호, 청남 오제봉과 고 동정 박세림(1925-1975), 유당 정현복(1909-1973) 등이다.
이 가운데 경암 김상필은 초서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평보는 옛날 평민들이 즐겨 쓰던 반체를 발전시켜 ‘평보체’를 창안하기에 이른다. 장전 하남호는 스승의 전예를 탐닉해 경지를 일궜으며 금봉 박행보도 의재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소전으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익혔다.
한편, 추사체의 서맥은 이 지방에서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과 소치 허유를 거쳐 미산 허형, 호석 임삼현, 옥전 임양재 등으로, 미수 허목(許穆 · 1595-1682)으로 이어진 서맥은 보성 출신의 효봉(曉峰) 허소(許炤)를 거쳐 월산(月山) 정영철(鄭永哲)로 이어진다.
미수 허목은 나주출신으로 우의정을 지냈는데 유학자로서 서예에도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작품은 훗날 같은 양천 허씨 집안의 서예가 효봉 허소가 탐닉하여 효봉체를 남기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효봉 허소는 시서화에 심취하였을 뿐 아니라 신학문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 20대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학문을 읽혔다. 그는 앞서 서술한 사와 같이 양천 허씨 조상인 미수 허목의 서체를 탐닉하였을 뿐 특별한 서사관계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서화전에 2회 특선했고 전서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그의 글씨는 새의 발자국 같은 기이한 서체로 백수문이 유명하다. 당대의 명필가이자 이조판서를 지낸 석촌 윤용구는 “압록강 동쪽에 가히 겨룰 사람이 없다”고 극찬했다 한다. 효봉의 서맥을 따진다면 추사 김정희〜미수 허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경지에 오른 서예가도 많아
이밖에도 광주 · 전남지역은 의향이자 예향답게 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했다. 확연히 그 서맥을 따질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서예를 익혀 이른바 일가를 이룬 경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목정(牧丁) 최한영(崔漢泳 · 1902-1988)이다. 그는 3·1운동 당시 광주거사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사람으로 사업가이자 서예가였다. 연진회의 창립회원이었다는 점에서 의재 허백련의 서맥 전수자라고도 말 할 수 있으나 장기간 사사한 것은 아닌 것은 아니다. 목정은 주로 한자 서예로 일관, 노필에 이르며 단아한 선비의 맛을 느끼게 한다는 평을 받았다.
또 한사람이 일곡(逸谷) 고정흠(高廷欽 · 1903-1985)이다. 그는 구례출신으로 교단에 있으면서 서예와 문학을 병행했는데 소전 손재형과 의재 허백련을 짧게나마 사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자신도 전남도전 특선 등을 하기도 했고 ‘삼락회’라는 서예모임을 창립해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남용(南龍) 김용구(金容九 · 1902-1982)는 일본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온 건축가이자 서예가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관심이 컸던 남용은 의재 허백련의 영향으로 예술에 심취해 일가를 이뤘으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많은 제자를 기르며 서예발전에 헌신했다. 그는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세 차례 국전에 입선하였으며 1963년부터는 광주에 남용서도원을 개원해 후진양성에 전력했다. 이 시기의 제자들로 오암 이행숙, 청남 강형채, 월송 정일순, 춘당 김용운, 남처 전진현, 송남 양정태, 효전 조정숙(전각), 신암 박용주 등이 있다. 남용은 무등산 춘설헌(광주시 지방문화재 5호)을 설계자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