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하늘길,‘당번고도(唐蕃古道)’(1)
‘당번고도’란 아직은 다소 생소한 용어는 당나라의 도읍지였던 장안성(長安城), 즉 현재의 시안[西安]으로부터 티베트의 옛 이름인 투뵈(吐蕃)왕국의 수도였던 라싸(拉薩)까지의 3천리의 옛길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당번고도’는 641년 당 태종(唐太宗)의 딸인 문성(文成)공주와 금성(金城)공주가 토번왕국으로 시집간 이후 개통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당과 투뵈가 흥성하던 7세기서부터 9세기까지 2백년간 온갖 행렬이 줄을 이었던 중요한 루트였다. 그 동안 공식적인 사신들이 142차례나 왕래하였을 정도로 중요한 교역로로써 군사, 문화, 종교, 무역 등 다방면의 역할을 한 또 다른‘실크로드’의 하나였다. 또한 이 길은 라싸에서 머물지 않고 나아가 대설산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번니고도(蕃尼古道)’로 이어져 인도 그리고 서역으로까지 이어지는 국제적인 루트였다.
또한 이길에는‘번니고도’의 주인공인 네팔의 부리쿠티공주의 한이 서려 있는 길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구법승 혜초(慧超,704~780?)보다 약 한 세기 전에 티베트를 거처 바로 중천국 인도를 들락거렸던 혜륜(慧輪)․ 혜업(慧業)․ 현각(玄恪)․ 현태(玄太) 등 4명의 구법승들의 체취가 서려있는 곳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필자는 이 루트를 ‘당번고도’와 구별하여 편의상 ‘번니고도’또는‘왕현책 루트’라고 부르겠지만, 오늘의 주제와는 구별하여 후일 따로 논의하기로 하고 가던 길을 재촉하기로 한다.
필자는 2006년 10월 ‘KBS 역사기행’의 <2부작 당번고도를 가다>란 프로의 자문역과 리포터를 겸해 이 루트를 혼자 답사하고 나서 본 촬영팀과 함께 옛 장안에서부터 라싸에 이르는 길을 짚차 2대로 나누어 주파하였다. 우리는 문성공주의 행적을 좇는 것 이외에도 당번고도 상의 옛 전쟁터를 찾는 일에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는데, 주로 그곳은 청해초원에 몰려있었다. 대개 옛 전쟁터에서는 묘한 허무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중 석보성과 승풍령 그리고 대비천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전자는 수십만의 군사들이 피를 흘려가며 공방전을 벌렸던 치열함으로, 후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함으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곳이었다.
특히 그곳들은 앞 장에서 이야기한바 같이, 요즘 국내 3개 방송사가 경쟁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고구려관련 연속극에 자주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이 주역으로 등장하기에 더욱 이채로웠다. 예를 들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설인귀(薛仁貴)가 투뵈에 대패해 포로가 되었고 그 외에도 백제 멸망의 주역인 소정방(蘇定方) 역시 패하였다. 다만 흑치상지(黑齒常之)나 고선지(高仙芝) 같은 유민장수들이 그런대로 투뵈를 상대로 큰 공을 세웠다는 식의 역사의 후일담 등을 곱씹어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이는 한 때 이렇게 당나라를 위협했던 대제국이었던 투뵈제국이 현대에 이르러 중국에 합병되어 있는 현 상황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게 만든다.
문성공주의 발자국을 따라 장안 성을 떠나 머나먼 길에 오르기 전에 먼저, 당시 국제 정세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시집간 배경에는 당시 두 나라의 명분과 실리를 챙기기 위한 정략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른바 화친혼(和親婚)이다. `정관(貞觀)의 치(治)’란 업적으로 당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은 당 태종 이세민은 당시 수나라 때부터의 숙원과제인 동쪽의 고구려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전략적 이유로 후방인 투뵈와 서역제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그 길목의 요충지인 청해호반의 토욕혼이란 유목국가와 손을 잡고 있었다.
문성공주는 당 태종의 공주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녀는 진짜 공주가 아니고 설안(雪雁)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 태종의 4촌 동생인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의 딸이었다. 당 태종은 친딸이 무려 21명이나 되었지만, 태종은 사촌조카 설안소저를 양녀로 삼아 이역만리로 보낸 것이다. 이도종이란 인물은 우리에게도 낯선 이름이 아니다. 바로 고구려전투에 참전하여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그 유명한 안시성 전투에서 토성작전을 지휘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당 정관 15년(641년) 당시 17살이었던 설안소저는 문성공주로 변신하여 장안성을 출발한다. 당시 이도종은 오늘날의 문공부 장관격인 예부상서(禮部尙書)라는 직책에 있었는데, 당 태종은 문성공주를 라싸까지 보낼 호위책으로 친부를 지명하여 많은 혼수품과 함께 25명의 시녀와 악사, 기술자들 그리고 불상까지 함께 보냈다. 비록 친딸은 아니지만 모양새는 국혼인 셈이었다.
발길을 재촉한 문성공주는 당시 당과 설역의 경계선이었던 일월산(日月山,3,520m)에 올라 장안 쪽을 바라보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일월산 근처에는 문성공주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원래 산이 붉은 색을 띤다고 하여 적령(赤嶺)이라고 불렸지만, 공주가 고향과 부모를 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거울(日月寶鏡)을 고개에다 던져 깨버렸다는 일화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바로 현재도 통용되고 있는‘니마다와라[日月峙]’의 유래이다. 또한 일월산을 떠나 서쪽으로 가다보면 한 냇물을 만날 수 있는데, 바로 그 이름이 도창하(倒淌河)이다. 냇물이 공주가 하도 섧게 울었기에 냇물이 거꾸로 흘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하니 나그네로 하여금 처연함을 느끼게 만든다.
당번고도 상의 두 번째 화친혼의 피해자는 금성(金城)공주였다. 문성공주보다 70년 뒤인, 710년에는 14살의 금성공주가 7살짜리 37대 토번 왕 티데쥭쩬에게 출가하는 혼사가 이어졌다. 금성공주는 종친 옹왕(雍王) 이수례(李守禮)의 여식으로 문성공주의 관례처럼, 중종(中宗)이 양녀로 삼아 공주로 만들어 이역만리로 시집을 보냈다.
이때 좌효위대장(左驍衛大將) 양거(楊秬)가 금성공주를 배행해 오자 온 나라가 공주를 반겼다. 이에 쏭첸과 티송 그리고 금성의 덕을 기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복은 수미산처럼 높고 성자의 자비는 바다같이 너르네.
송쩬 임금의 승하는 붉은 해가 서산에 진 것과 같지만
다행이 티송 임금이 출현하니 둥근 달이 동산에 오르는 것과 같네.
이로써 정법이 만개하니 뭇 중생들이 환희에 젖는구나.
금성공주는 굳이 고통을 격지 않아도 되는 신분이련만
길에서 당한 어려움은 이루 헤아리기 어렵네.
이는 스스로 세상에 정법을 구현하려 함이니
모두 천생에 지은 지혜의 거울을 비추는 것과 같다네.
그리고 이어 등극한 당 현종(玄宗)은 황하 발원지인 하서구곡(河西九曲) 일대를 금성공주의 지참금으로 토번에 하사하였다. 이에 평화의 정착을 위해 사신 왕래가 몇 차레 있은 다음, 드디어 734년에는 양국의 경계를 정하고 적령(赤嶺)에 맹세를 의미하는 해와 달을 새겨 넣은 <적령비>를 세웠다. 그 비석은 비록 만신창이 상태이지만, 현재도 일월정에 남아 있어서 후인들로 하여금 역사라는 시간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첫댓글 사진이 안 붙네요. 요 며칠 상태가 좋더니 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