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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29 : 이재석(李再石, 男, 1916年 12月20日生 경기도 의왕시 삼동) | |
*최초증언일: 1995. 10. 17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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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무사히 넘기면 부산에도 무사히 갈 수 있을텐데 4∼5일 걸려 한국인 약 13,000명을 오미나토항 밖에 정박해 있는 우키시마호에 도선渡船으로 옮겨 태워 - |
나는 1938년 3월에 경상남도 밀양군 삼랑진읍 우곡리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도비시마조에 고용되어 야마나시현山梨縣 수력발전소 건설공사장에서 굴착과 발파작업에 1년여 동안 종사했습니다. 그 뒤 동경 부근 오카다마천 도로공사(동경도청 직영공사)장에서도 1년여 간 발파작업을 할 때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에 있는 가마이시광산 아카다이조에서 발파기술자로 인정받아 억지로 끌려가 4년 넘게 발파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다시 1945년 3월쯤에는 일본해군 직영의 오미나토비행장 지하방공호 공사장으로 강제징용 당했습니다. 그 곳의 부대명과 회사명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굴속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으나 아마도 오미나토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징용당하여 해방될 때까지 8년이 넘게 발파기술자로 일했습니다.
1945년 8월15일 종전. 해방된 이틀 뒤부터 해군 군인들이 귀국시켜 준다고 말하며 4∼5일 걸려 한국인 약 13,000명을 오미나토항 밖에 정박해 있는 우키시마호에 도선渡船으로 옮겨 태워 8월22일 밤에 출항하여 다음 날 폭파 침몰 당하였습니다.
나는 일본 체류 8년5개월 동안 청춘을 다 보내며 정력을 쏟아 모은 돈이 대형 가방으로 두개였는데 우키시마호 침몰과 함께 마이즈루만 바닷물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마이즈루만에서 우키시마호가 폭발하며 침몰할 당시 나는 2층 선실에 있다가 소지품과 손가방을 모두 버린 채 선장실쪽으로 뛰어 올라가 구조되었습니다. 침몰 당시의 상황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지경이었습니다.
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항을 떠나 항해할 때 승무원이었던 군인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주며 “오늘을 무사히 넘기면 부산에도 무사히 갈 수 있을텐데.......,”하며 지껄이고 다니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고 이상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간 지나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에 들어서자 폭음과 함께 두 동강으로 갈라지며 침몰하였습니다. 해군들의 행동을 생각해 볼 때 모든 일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판명케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뒤 바다에 떠 있는 사람들이 배에 달려 있는 로프를 잡고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해군들은 그들을 구조하기는커녕 로프를 칼로 잘라버려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했습니다. 모든 일은 의도적으로 자행된 것이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조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철도편으로 시모노세키, 하카다 또는 나가사키를 통하여 귀국선을 타고 귀국했으나 저를 포함한 일부 병환자들은 군대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병원선으로 부산까지 송환되어 음력 8월14일 집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23살부터 31살까지 젊은 청춘에 돈을 벌어서 금의환향코자 굳은 각오로 작업장을 옮겨 다닐 때마다 지하에서 위험한 발파작업을 했고 위험수당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8년여 동안 언제나 지하 공사장에서 일했지 밖에 나가 보지도 못했고 화약을 취급하는 작업이라서 언제나 긴장해야 했기에 쓸데없이 돈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월급을 받아 저축했습니다. 현금이 당시 일본 화폐로 약 3만엔이었습니다. 돈과 의복들을 넣은 대형가방 두개가 우키시마호와 함께 마이즈루만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당시의 폭파침몰 사건이 일본군부의 계획적인 만행이었다는 것으로 판명된 이상 그에 대한 피해배상 청구는 당연한 것으로 당시의 화폐가치원금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한 금액을 배상받고자 하는 심정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배가 파산될 때 죽은 우리 동포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일겝니다.◼
생존자 이재석씨가 일본 교토지방법윈에 제출한 변론조서.<자료 제공: 이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