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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진경
<제1장>
①:001 옥황상제님(玉皇上帝)께서 도력(道曆) 기원전 14년,1895년 12월 4일 양력 이듬해 1월 19일 미시(未時)에 경상도 칠원현 서면 회문리(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에 강세(降世)하시니 성(姓)은 조(趙), 본관은 함안(咸安), 휘(諱)는 철제(哲濟), 자(字)는 정보(定普), 호는 정산(鼎山)이시니라.
①:002 상제님의 신격위(神格位)는 태극주 옥황상제(太極主 玉皇上帝)시며 인격위(人格位)는 무극신(无極神) 대도덕(大道德) 봉천명(奉天命) 봉신교(奉神敎) 태극도주(太極道主) 조성정산상제(趙聖鼎山上帝)시니 삼계(三界) 최고위이신 태극도주(太極道主) 옥황조성상제(玉皇趙聖上帝)로서 구천상제님과 이도일체(以道)이시니라.
①1:003 회문리는 동방의 신령스러운 백두, 금강, 지리산의 연맥(連脈)이 다시 태백산의 남단 부산을 향하여 동쪽으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다가 여항,광려, 무학의 산무리을 이루고 그 연맥인 자고산의 주봉이 동쪽으로 힘차게 뻗은 구릉 끝에 봉소형(鳳巢形)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니라.
그 주위를 천주, 작대, 무릉, 안국, 대곤산의 명산이 둥글게 에워싸고 인근에 천계, 안기, 신산, 무릉, 구성,유원 등의 마을이 있느니라.
①:004 상제님께서 현화인신(現化人身)하신 부친의 휘는 용모(鏞模), 자는 순필 (舜弼), 도호(道號)는 복우도장(復宇道丈)이시니 도기전 32년
정축생(1877년 )이시며 품성이 너그럽고 인자하시고 문장이 뛰어나시니라.
선조로부터 전승한 가풍에 따라 충렬의 정신이 투철하시더니 1905년에 부친 취당공(聚堂公)께서 순국하신 후에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더욱 열렬하셨으며 국운이 좋지 않아서 국내에서의 구국활동이 불가능 하므로 동생 용의(鏞懿), 용서(鏞瑞)와 함께 만주로 가족을 이끌고 망명하셔서 김혁, 이석대 등과 구국운동을 전개하시다가 옥고까지 치르시고 만년에 귀국하셔서 상제님의 창도 사업(創道事業)을 도우시니라.
①:005 모친께서는 밀양군 하남면 파서리의 명문 여흥(驪興) 민씨(閔氏) 중호(仲鎬)의 따님으로서 도기전 17년에 복우도장과 결혼하시니 휘는 영명(泳明), 도호(道號)는 숭덕부인(崇德夫人)이시니라.
천성이 활달하시고 지혜가 뛰어나시며 체격이 건장하셔서 장부의 기상이시니라.
①:006 상제님의 조부의 휘는 영규(瑩奎), 자는 태견(泰見), 호는 취당(聚堂)이 시니 성격이 순정하시고 재주가 출중하셔서 문장과 서예로 명성을 떨치시니라 .
문과에 급제하셔서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지춘추관(知春秋館), 기사관(記事官),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 등 관직에 계시며 민영환,이상설, 이동녕 등과 친분을 가지시더니 을사보호조약의 체결 단계에 그 부당성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자 심화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오신 후 피를 토하시며 돌아가시니라.
조모는 의성(義城) 김씨(金氏)로서 승정원(承政院) 정자(正字) 구락(龜洛)의 따님이시니라.
①:007 상제님 인신 선조의 연원(淵源)은 중국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라 하며 28대조 휘(諱) 정(鼎), 시(諡) 충장(忠壯)은 고려 개국 벽상공신(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 원윤(元尹)이시며 27대조 휘 열(悅)은 고려말의 공조전서(工曹典書)로 고려가 망하매 함안으로 낙향하여 조선왕조의 부름에 불응하시니 이후 후손이 함안에서 살게되니라.
17대조 휘 여(旅), 호 어계(漁溪), 시(諡) 정절(貞節)은 단종때 생육신의 한 분이시며 13대조 휘 방(방), 호 두암(斗巖)은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기여한 공로로 돌아가신 뒤 호조참판으로 벼슬을 높여 받으시니라.
11대조 휘 함익(咸益), 호 임계(林溪)는 문장과 덕망이 높으셨으며 고조부 휘화식(華植) 호 죽헌(竹軒)은 효행으로 조정에서 내린 정려(旌閭,나라에서 충신,효자,열녀를 왕의 명에 의해 그 고향에 정문을 세워 기리는 일)의 명을 받으시니라.
증조부 휘 성의(性義), 호 벽봉(碧峯)은 도학(道學)과 신망으로 고향마을의 사표(師表,세상 사람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가 되셨으며 증조모(曾祖母)는 진양(晉陽) 강씨(姜氏)시니 상제님 인신의 세계(世系)는 11대조 임계공(林溪公)의 종손이시니라.
①:008 복우도장께서 숭덕부인과 결혼 3년후 처가에 머무르시던 1895년 1월3일 밤 꿈에 천지가 별안간 밝아지며 천상옥경(天上玉京)에서 오색 구름을 탄한 선관(仙官)이 좌우에 시종을 거느리고 유유히 내려와서 두 분께 경배하며 아뢰기를『저는 천제님의 명에 따라 진멸지경(殄滅之境)의 삼계(三界)를 광구(匡救)하기 위하여 이 동토에 인간의 몸으로 강세(降世)하고자 하오니 어여삐 받아 주옵소서.』하며 부인의 품에 안기니라.
부인께서 일어나 옆의 부군을 깨우셔서 꿈 이야기를 말씀하시니 도장께서도『나도 이제 그와같은 꿈을 꾸었으니 이는 필시 태몽이며 천기에 속한 큰 꿈이라.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함이 옳으리다.』하시니라.
이때 방안에는 향기가 가득하고 밖에는 서광이 충천하니라.
①:009 이무렵 취당공은 한양에 계시며 숭덕부인의 태기소식을 고대하시던차 이날 같은 시각에 꿈을 꾸시니 뇌성벽력과 함께 천지가 진동하고 불이 이글거리는 철기둥이 사방을 휩쓰는데 바닷물이 넘쳐 흘러 불을 뒤덮어 끄고 암흑천지를 이루더니 이윽고 하늘이 갈라지며 찬란히 솟아난 태양이 숭덕부인의 품에 안기니라.
이는 대인(大人)을 얻을 가문의 길몽이라 생각하시고 도장내외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시기를『우리 가문에 천명에 따른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리니 성(誠)과 경(敬)을 다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 준비를 하라.』하시니라.
①:010 그 후 12달만의 출산에 즈음하여 숭덕부인께서 난산으로 산통이 극심하셔서 3일간이나 신음 하시더니 전 가족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기가 쇠핍(衰乏)하여 정신을 가누지 못함에 이르시니라.
이때 비몽사몽간에 갑작이 산실히 밝아지며 옥피리 소리와 함께 천상에서 손에 약탕기(藥湯器)를 든 한 선녀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서 부인께 경배하며 말하기를『소녀는 천존상제(天尊上帝)님의 명을 받들었사온 바 지금 탄생하시는 옥동자께서는 천제님의 명에 따라 삼계를 광구하실 진주(眞主)이심을 전하옵고 조산하고자 시름을 놓으시고 이 약을 드시옵소서.』하며 약탕기를 기울여 입에 드리우니라.
부인께서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에 받아마시니 곧 정신이 맑아지고 산통이 진정되며 드디어 옥동자를 낳으시니라.
선녀는 하직인사를 올린 다음 천상으로 올라가고 산실에는 향기와 서광이 가득하니라.
①:011 이날 회문리 일대에 3일간 계속되던 눈이 그치고 짙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더니 강세하신 미시(오후 1시30분에서 3시30분사이)에 날씨가 맑으니라. 한 편 산실지붕으로부터 무지개가 충천하여 7일간이나 걷히지 않았으며 다 른 곳에는 눈이 쌓였으나 오직 그 지붕에는 한 점의 눈도 없으니라.
①:012 상제님께서는 강세 초부터 기골이 장건하시고 기상이 준수하시더니 차츰 자라시매 온몸에서 후광을 발하시고 천중천정(天中天庭,이마)이 넓고 크시며 일월각(日月角,이마 양편의 솟은 곳)이 풍륭(豊隆)하시고 눈에 안광(眼光)이 빛나시니라.
등에는 7성문(星文) 오른쪽 다리에 3적자(赤子,세개의 붉은 점), 왼쪽 다리에 72적자, 양족장(兩足掌)에 각각 3적자가 완연하시고 우뢰소리와 같은 음성을 지니시니라.
①:013 강세 후에 밤마다 너무 우시는데 그 울음이 아기 음성같지 않게 크시며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듯 하시니라.
대부인께서 달래셔도 그치지 않으시므로 왕대부인과 고모 등이 밤을 새워 보살피시더니 21일이 지나서야 울음을 멈추시니라.
①:014 강세 6개월에 걸음과 말을 익히시고 첫 돌에 이미 총명 영특하셔서 보고 듣는 일을 잊지 않으실뿐 아니라 사리를 캐 물으시므로 어른들은 그 응답에 노심하니라.
또 한 가지를 배우시면 많은 일을 깨달으시니 주위에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인출현(神人出現)이라고 찬탄이 자자 하니라.
①:015 3,4세의 어리실 때부터 한 번 옳다고 생각하신 일이나 하고자 하신 일은 반드시 실행에 옮기시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끝내시며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서 곤충 한 마리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상처를 냄이 없으시니라.
①:016 5,6세에 벌써 대인의 풍도(風度)로 심성이 활달 명석하시며 어떤 일에 도 침착 세밀하시니라.
가축을 좋아하셔서 어른들이 그 사육에 등한히 하면 일일이 참견하시니라.
①:017 7세되시던 1901년 봄에 한문서당에 입학하시니 뛰어나신 재질로 하루에 몇줄을 배우시나 수십장을 배우셔도 다음 날 강의에 막힘이 없으시니라.
①:018 이해 가을 어느날에는 홀로 육갑(六甲)과 월력(月曆)의 구성법을 고안하시고 스스로 그 신이함을 기뻐하시며 이를 훈장에게 말씀하시니 훈장은 이것이 비록 세상에서 이미 사용되는 역서(曆書)와 같으나 7세 소년으로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창안하심에 경탄하니라.
불과 몇년에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섭렵하시고 홀로 궁리진성(窮理盡性,이치를 궁구하고 성품을 다함)에 몰두하실 뿐 훈장과는 대응하지 않으시므로 도장께서 다른 서당으로 전학시키거나 다른 훈장으로 바꾸셔도 별다른 효과가 없으시니라.
①:019 숭덕부인께서는 성격이 준엄하실 뿐더러 엄격한 집안의 규율에 따라 상봉하솔(上奉下率)에 빈틈이 없으신 중에도 상제님께는 비범하신 재덕(才德)의 탁마(琢磨)를 위하여 엄격히 가르치시되 상제님의 효성 또한 지극하셔서 모자간에는 항상 화애가 넘치시니라.
①:020 도장댁은 대대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숭상하는 유가(儒家)의 가풍으로서 삼사대가 단란한 대가족이니라.
상제님께서는 종손이시며 독자이신 귀공자로서 총애를 받으셨으나 평소에 말씀하시기를『안빈낙도는 처신의 의방(義方)이요, 검소존절(儉素존節)은 접물(接物)의 요결(要訣)이며 호의호식은 몸을 망치는 천습(賤習)이요 이기해인(利己害人)은 오명(汚名)의 만행(蠻行)이라.
군자는 오직 의방과 요결을 취함이니라.』하시며 솔선궁행(率先躬行) 행하시니라.
①:021 서당에서는 비범하신 언행으로 훈장의 칭송을 받으시고 출중하신 총명으로 동료 학생들의 선망을 얻으셨으나 자랑하지 않으시고 항상 겸양하시니라.
추운 겨울에 걸어서 서당에 다니시지만 동상에 걸리셔도 인내하시고 말씀하지 않으시므로 아무도 모르되 오직 대부인만 아시고 몰래 치료하여 주시니라.
①:022 1903년 12월 어느날 서당에서 독서 중 책상에 의지하여 잠시 잠이 드셨는데 비몽사몽간에 선풍도골의 한 선비가 나타나서 공손한 태도로 상제님께 4배를 올리므로『선비는 누구시뇨.』하시니『저는 천제님의 명으로 진인(眞人)을 알현함이옵나이다.』하니라.
이후에도 심신이 미령(靡寧)하실 때면 이 선비가 나타나 보좌하니라.
①:023 1905년 가을에 취당공께서는 일본의 강압으로 인한 한일보호조약이 부당성을 알리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체결됨에 이르자 그 동안 동지들과 도모하시던 구국운동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회책(挽回策)마저 없으므로 그 원통함으로 인한 심화병(心火病)의 증세가 더욱 악화되시니라.
이에 관직을 사퇴하시고 활동하시던 개성에서 자진(自盡)하려 하셨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못하시고 와병하시던 중 백골이라도 고향에 묻히고자 돌아오시다가 선죽교를 지나실 때에는 피를 토하시기까지 하시니라.
고향에 돌아오셔서 본댁에도 들르지 않으시고 대곤산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정신을 잃으셨다가 일어나 통곡 후에 다시 자결하려 하셨으나 시종들의 만류로 이루지 못하시니라.
①:024 상제님께서 이 소식에 접하시고 가족들과 함께 그 곳으로 달려가시다가 증왕대부인께서『아들의 죽음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죽으리라.』하시며 벗너머 절벽쪽으로 향함을 보시고 급히 쫒아가셔서 만류하신 후 함께 집으로 돌아오시니라.
증왕대부인은 취당공이 20세 때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사시면서 어린 자식을 길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키셨으므로 가문의 영화를 기대하셨더니 이와 같은 비보에 접하여 엄준하신 성품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진하려 하심이니라.
①1:025 본댁으로 돌아오신 취당공의 병환은 이름난 의원들의 극진한 치료와 가족들의 정성에도 보람없이 더욱 위독하시니라.
이해 10월 1일 사시(오전 9시시30분 11시30분사이)에 가족들에게 유언하시기를『내 나이 사십유오(四十有五)에 이제까지 한 가지 일도 성취함이 없이 나라를 위한 일조차 실패하므로써 나라를 잃게 되고 또한 노모께 앞서 가는 불효가 되도다.
나 죽은 후에 라도 너희들은 부디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우국애민(憂國愛民)에 힘써 나의 나라 잃은 한을 풀어주기 바라노라.』 하시니라.
이어서 상제님께는 따로 부탁하시기를『내 너의 재질이 영명하므로 너로 인한 노후의 영화를 보려 하였더니 실로 한이로다.
부디 학문과 도덕을 닦아 선조 정절공과 같이 위국충절(爲國忠節)로 가문을 빛내도록 하라.
또 남 모르는 공부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로써 세상 사람의 스승이 되라.』하시고 다시 가족들에게 부탁하시기를『이 아이는 일찍 태몽을 얻은 바와 같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라.
후일 도덕(道德)으로 널리 사람을 구하며 가문을 일으켜 대성하리니 부디 공부를 잘 시키라.』하시고 운명하시니라.
①:026 상제님께서는 할아버지의 상에 임하셔서 11세의 소년답지 않게 너무애 통하시고 또한 증왕대부인께서 다시 자진하지 않으실까 염려하셔서 항상 그 곁을 떠나지 않으시며『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 오직 하늘이 하시는 법도이오니 할머님은 너무 상심 마옵소서.』 하고 위안하시니라.
밤에도 치마끈을 손목에 감고 주무시므로 증왕대부인께서도 비통한 표정과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시고 도리어 위안하시니라.
①:027 이때 상제님께서는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삭망제절(朔望諸節) 등에 빠짐 없이 참석하셔서 가족들을 감동하게 하시더니 12월 21일에 거행된 장례시에도 법도에 맞게 하시므로 장지까지 수십리에 이은 조객들이 상제님의 비범하신 범절을 칭송하니라.
①:028 1906년 가을 어느날 상제님께서 집앞 감나무의 홍시를 따시려고 꼭대기까지 오르셨다가 밟으신 가지가 부러져서 감나무 아래 칼돌이 날카롭게 솟은 곳에 떨어지셨으나 아무 상처가 없으시니라.
①:029 이해 10월에 상제님께서 신산공의 안내로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소재 1 8대조 휘 안(安)의 산소에 참배하시니라.
이 산소는 정절공의 친산(親山)으로서 정절공께서 묘역주위를 돌로 쌓아 봉쇄하시고 후손의 묘역 내 참배를 금하시더니 그 후에 과연 역내에서 참배한 후손이 급사하는 일이 몇번이나 일어나니라.
이날 상제님께서는 신산공의 만류를 듣지 않으시고 묘역내에서 참배하셔도 아무 탈이 없으시니라.
이 소식을 들은 친척 용우가 반신반의하면서 근 40년이 지난 1944년 추석에 안심하고 참배하였더니 급병이 나서 위독하니라.
상제님께서 문병하시고『내가 풀어 드리리다.』하시니 곧 쾌유하니라.
①:030 상제님께서는 취당공께서 당부하신 위국충성과 남 모르는 공부를 항상 염원하시더니 13세되시던 1907년부터는 그런 생각으로 학문에 소홀하시니라.
도장께서 학문에 전념할 것을 엄히 가르치시니 말씀드리시기를『소자 감히 아버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오나 소자의 생각으로는 학문은 도시 문자 공부에 불과하온바 문자는 지난 시대의 성현군자나 문장재사들의 생각에 불과하오니 이로써 어찌 할아버님의 유명이신 구국제민(救國濟民)의 큰 뜻을 이루오리까.
공부는 남 모르는 공부라야 한다 하심을 소자 깨닫지 못하옵다가 이제는 확연한 심증을 얻었사옵기에 앞으로는 남모르는 공부에 전념하려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하시니라.
도장께서는 겨우 13세의 소년이 너무 뜻 밖의 말을 하므로 놀라움과 함께 판단이 쉽지 않아 여부를 말씀하지 못하시니라.
①:031 이때 부터 상제님께서는 대청 건넛방에 경서(經書)와 제가서(諸家書)를 비치하신 다음 방문을 잠그신 채 바깥 출입을 않으시고 식사도 방에서 하시니라.
도장께서 걱정하셔서 누누이 물으셔도『전일 말씀드린대로 남 모르는 공부를 하는 중이오니 걱정하지 마옵소서.』하시는 말씀이 너무 진지하고 근엄하시므로 다시 캐묻지 않으시니라.
①:032 도장께서는 4남매 중 맏이시고 그 큰 아우의 휘(諱)는 용의(鏞懿), 자는 은필(殷弼), 호는 서산(曙山)이시며 중방(中房)어른으로 호칭하고 작은 아우의 휘는 용서(鏞瑞), 자는 윤필(允弼), 호는 신산(晨山)이신데 양동(陽洞)어른으로 호칭하며 여동생은 창녕(昌寧) 성태호(成泰浩)에게 출가하시니라.
도장의 천성은 선비의 풍도이셨으나 두 아우는 성정이 강하고 담대하셔서 무사의 기질이시니라.
①:033 삼형제분은 선대부터 몸에 배인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 일본이라면 무조건 혐오하시더니 이때 마산에서 산본(山本)이란 왜인이 금광업과 고리대금업으로 한인재산을 착취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그를 도산시켜 그 자금으로 화약을 제조하여 구국운동에 사용할 계책을 세우시니라.
1907년 가을에 서산공께서 먼저 그에게 접근하여 신용을 얻으신 다음 이듬해에는 춘궁기(春窮期)에 돈을 빌려 추수 후에 배로 돌려주는 소위 농사장려금을 얻기로 하시니라.
처음에는 사양하는 듯 하시다가 드디어 삼형제분의 가산 전부를 담보로하여 칠서,칠북,칠원의 일대 주민이 넉넉히 쓸만한 정도의 거금으로 제의하여 그의 재산보다 더 많은 5천원을 빌리시니 이는 가장 좋은 논 수십만평에 상당하는 거금이니라.
①:034 삼형제분은 이 거금으로써 당초의 계획에 따라 장차 거사시에 사용 할화승총의 구입을 탐색하시는 한편 칠원 도덕곡 깊은 곳에 공장을 차려 화약을 제조하시다가 일본 헌병에 밀고되어 중단하시고 은신하며 다른 방도를 모색하시니라.
①:035 이때 상제님께서 은신처로 찾아가 진언하시기를『저도 이제는 머지않아 호패를 찰 연령이옵고 세상 물정도 다소나마 짐작하므로 어른들의 대사도모에 감히 말씀드릴 수 있사옵니다.
저의 요량으로는 이번에 거금을 얻으심은 실로 하늘의 감응이오며, 조상의 보살핌이옵니다.
그러나 이대로 구국운동을 추진하심에는 때가 늦사옵고 국외에서가 아니면 불가능할 듯 하오며 지금 만주의 간도 지방에는 우국지사(憂國志士)가 많이 망명 중 이오니 활동의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이 기회에 아버님께서는 둘째 아버님과 함께 간도로 가셔서 근거지를 정하시고 이어 전 가족도 그곳으로 가서 대사도모에 보좌하도록 하심이 좋은 계책이겠나이다.』하시니라.
도장께서는 상제님의 사리에 타당하고 시기에 적합한 생각을 들으시고 감동하셔서 즉석에서 결정하시고 우선 도장,서산 두 분이 다음날 간도로 가시니라.
①:036 두 분께서는 만주에 도착 후 서간도 요령성 유하현의 수둔구를 정착지로 택하시고 전답 약간과 개간할만한 황무지 십여만평을 매수하여 이를 인근의 가난한 동포들에게 분할 대여하여 개간 경작하게 하시니라.
또 전 가족이 거주할 집을 건조한 다음 도장께서 가족을 데려오기 위하여 다음해 3월에 고향에 돌아오시니라.
①:037 도장, 서산 두 분께서 거금을 가지고 만주로 망명하신 소문을 들은 일본인 산본은 회문리에 와서 남은 가족에게 행패하며 추수 후에는 담보로 잡았던 전 가산을 강제압류하고 일본헌병의 도움을 받아 더욱 횡포하므로 가족들은 근 일년간 혹심한 고초를 겪으시던 중 때마침 돌아오신 도장을 따라 만주로 떠나게 되시니라.
①:038 도기 원년 1909년 4월 28일, 새벽에 전 가족이 도장의 인솔하에 헌병의 감시를 피하여 창원역에서 기차로 망명길에 오르시니 일행은 십여명이며 간단한 옷과 식기 등을 가지고 신의주로 가셔서 압록강을 배편으로 건너 마차로 수둔구에 무사히 도착하시니라.
①:039 상제님께서는 창원역을 출발하신 후 처음에는 망명준비의 과로로 피곤하셨으나 미시(오후1시30분 3시30분사이)경 대전부근에 임하셔서는 정신이 맑아지 시고 기운이 충천하신 중에 마음공부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시니라.
이때 갑자기 일광 같은 모습에 황금색 용포의 신인(神人) 한 분이 나타나셔서 우뢰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내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노라. 그대는 삼계의 진주니 이는 막중한 천기라.
그대가 나의 도통을 이어 치천하도수(治天下度數)로 무극대운(无極大運)의 대공사를 성취하되 내 명교(命敎)를 받들어 태극(太極)의 진법(眞法)을 용(用)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광구삼계(匡救三界)하리라.
그대의 호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니라.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상제(天尊上帝)로라.』하시니라.
상제님께서는 이 말씀에 정신이 더욱 환해지셔서 이 신인이 바로 진리의 당체이신 구천상제님이심을 깨닫는 동시 봉천명(奉天命)의 기쁨속에 몸소 태극진주(太極眞主)임을 대오(大悟) 자각(自覺)하시고 삼계를 광구하실 각오를 마음속에 굳게 다지시니라.
①:040 가족들은 이역 만주에서 망명생활의 고난 속에서도 구국의 집념으로 고국에 있는 동포들의 망명길을 돕기도 하고 만주 각처에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심에 일체의 비용을 전담할 뿐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는 동포들에게 집과 식량을 나누어 주어 정착시키시니 불과 수년에 수둔구는 한인집단촌으로 변하니라.
①:041 상제님께서 망명생활 중 낮에는 가족들과 함께 농사에 임하시고 밤에는 공부에 정성을 다하여 힘쓰시다가 이해 추수 후에는 도장께 말씀드리시기를 『이는 천기이므로 아버님께만 은밀히 말씀드리옵는바 저는 지난 4월 28일 망명길에서 15(十五)에 도강이서(渡江而西)하여 정진주(定眞主)의 도수와 치천하(治天下)의 도수로 광구삼계하라시는 천명과 신교(神敎)를 받들어 모셨나이다.
주경야독의 공부만으로는 유부족이오므로 이제부터 상제님의 천명을 받들어 노고산에 들어가 진법도수공부(眞法度數工夫)에만 전념하려 하오니 준비하여 주시옵소서.』하시니 도장께서 쾌히 승낙하시고 노고산의 조용한 곳에 공부처를 마련하여 주시니라.
①:042 상제님께서 즉일로 입산하셔서 남 모르는 공부는 홀로 하여야 하므로 시종도 물리시고 손수 취사와 난방 등 잡무를 하시면서 근 이년간을 두문불출하시며 불철주야 공부에 정진하시니라.
①:043 1910년에 들어 일본의 침략이 극도에 달하여 드디어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되므로써 한국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화되니라.
이러한 망국의 한을 풀길이 없으니 도장가족들은 3일간을 통곡하며 항일투쟁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짐하시니라.
도장께서는 한인들이 각출한 성금을 군관 김혁, 이석대 등을 통하여 독립군에게 전달하셨으며 서산공은 몇차례에 걸쳐 만주사람으로 변장하고 만주 각지의 동지와 연락을 취하시며 일본군의 실정을 염탐하여 독립군에 제보하시니라.
①:044 수둔구에서는 황무지를 2년동안 정성으로 개간,경작한 결과 풍작을 이루니 과거의 땅주인인 만주인들은 자기들의 땅을 속임 당하였다고 원래에 판 가격으로 도로 사기를 요구하며 쟁의를 일으켜 수십명씩 작당행패를 하니라.
이에 한인촌에서는 도장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격퇴시키니 만주인들은 도리어 한인들이 먼저 폭동을 일으켰다고 관서에 제소하였으나 한인들은 단결하여 슬기롭게 이에 대항 승소하니라.
이 사건으로 도장께서는 한인들의 추앙과 만인들의 신망이 높아지셔서 촌장으로 추대되시고 그때 잠시 부친을 뵈려고 하산하셨다가 사건에 공로가 크신 상제님을 당총각(堂總角)으로 추앙하니라.
이로부터 한인촌의 단결은 더욱 굳어지고 명성이 전파되어 만주인들의 횡포는 근절되고 서간도 일대의 망명지사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어 그 연락처가 되니라.
①:045 1911년 4월에 도장께서는 과거 취당공과 함께 구국운동에 활약하던 이동녕 등이 북간도 용정에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 중이라는 소식을 들으시고 서산공을 보내셨더니 자금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하므로 수차 자금을 마련하여 도와주시니라.
한 번은 중도 여관에서 일본헌병의 습격을 당하셨으나 목침으로 일당을 격퇴하시고 자금을 무사히 전달하시니라.
①:046 상제님께서 이해 9월에 2년간의 공부를 마치시고 하산하시니 도장께서 여러 중매처 가운데 청도 출신으로 만주 동풍현에 망명 거주하시는 지사 의흥(義興) 예씨(芮氏) 한기(漢基)의 장녀를 간택하셔서 10월 15일에 혼인을 시키시니라.
신부는 선비 가문에서 성장한 규수로서 후덕한 성정에 용모와 재예가 출중하시니 휘는 종린(鍾麟), 도호는 숭도부인(崇道夫人)이시니라.
①:047 상제님께서 부친의 명에 따라 혼인하시고 다시 노고산 공부처로 임하셔서 시종도 없이 홀로 공부하시다가 다음해 3월에 하산하시니라.
①:048 1912년 봄에 도장께서는 아우들과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운동에 골몰하시더니 중국의 집권자 원세개(袁世凱)의 관헌에 의하여 청조의 복구를 도모하는 보황당(保皇黨)과 같은 무리라는 혐의로 끌려 가시어 요령성도 심양에서 극형을 선고받게 되시니라.
상제님께서는 심양까지 도장을 모시고 가셔서 그곳 관헌에 교섭하셨으나 해결되지 않으므로 도장의 명의로『우리는 한국인으로서 항일운동의 일념뿐이니 어느 겨를에 다른 나라의 일에 간여하리요.』 하는 요지의 진정서를 북경의 원세개에게 직접 전하셨더니 원이 받아보고 그 문장과 충정에 감탄하며 급히 심양에 명령하여 도장을 무죄방면하고 사과하며 본댁까지 호송하여드리니라.
①:049 상제님께서 보황당 사건으로 심양에 당도하셨다가 그 지명이 근년에 봉 천(奉天)으로 개칭된 사실을 비로소 확인하셨으며 또 북경에서는 중국대륙의 웅대한 산천과 화려한 문물을 돌아보시고 이곳이 바로 평소에 바라시던 공부 처임을 감지하시고 이곳에서 대중화도수(大中華度數)를 공부하기로 결심하시니라.
집으로 돌아오셔서 부친을 뵌 즉시 허락을 받으시고 공부차 행장을 수습하여 다시 홀로 중국본토로 떠나시니라.
①:050 이때 밀양서 망명 중이던 외숙 민영하는 상제님께서 정진하시는 공부가 신이(神異)하고 비상하심을 알므로 자기도 중국본토 공부에 함께 할 수 있으면 일체의 비용을 부담하기로 은밀히 부탁하니『제가 하는 일은 남이 알거나 간섭하여도 아니되고 스스로 하는 공부며 이는 어느 한 사람을 위한 공부가 아닌 사해창생(四海蒼生)을 위하는 삼계의 공부이므로 외숙의 사사로운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나이다.』하시니라.
①:051 이해 5월에 상제님께서 중국에 임하셔서 북경 일대의 산천과 문물을 두루 살펴보시고 산동지방을 다니시며 태산(泰山)의 공자묘(孔子廟)를 비롯한 명산대천(明山大川)에서 공부하시고 도수를 보시니라.
다시 화남의 남경, 상해를 거쳐 서방의 성도 장안으로 순행하시며 공부하시는 동안 하남 고현(苦縣)의 노자묘(老子廟),등봉의 소림사(少林寺), 산서 운성의 관왕묘(關王廟) 등 유명한 산천의 사당과 절을 돌아보시고 6개월만에 돌아오셔서 노고산에서 공부를 속행하시니라.
①:052 1911년에서 1913년까지 3년간 간도 일대에는 가뭄이 심하여 농사가 크게 흉했으나 다행히 수둔구만은 풍작이 되어 도장댁의 생계에는 지장이 없으니라.
그동안 상제님께서는 명산대천의 치성 수도와 도수공부에 집중하시고 도장형제분은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분망무가(奔忙無暇,몹시 바빠서 겨를이 없음)하시니라.
①:053 서산공은 1913년 10월에 상처하고 다음해 11월에 귀향하여 재혼한 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전념하시니라.
1915년 2월에는 오랫만에 댁에서 지내시더니 새벽에 급습한 헌병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1911년에 용정서 목침으로 헌병을 격퇴한 사실까지 탄로되어 결국은 3년징역을 선고받아 안동형무소에서 복역하시고 1916년 3월에 감형으로 출옥하시니라.
①:054 서산공이 구속되시자 상제님께서는 도장과 함께 당국에 교섭하셔서 극형을 면하게 하시고 복역 중에는 자주 형무소에 임하셔서 옥고를 위로하시니라.
그 후 서산공의 출옥 귀가시에는 통자강의 빙판을 건너시다가 얼음에 빠지심을 상제님께서 발견하시고 행인을 불러 맞구멍을 뚫으셔서 구출하시니라.
①:055 도장께서는 구국운동의 동지 이동녕, 이시영 등이 간도지방의 흉년과 일본헌병의 횡포로 활동이 여의치 못하므로 1913년에 상해로 이주하여 동지들과 함께 활동 중이나 자금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전갈을 받으시고 1916년 8월에 자금을 마련하여 상해로 떠나시니라.
이때 상제님께서도 수행하셔서 자금을 전달하신 후 도장께서는 귀가하셨으나 홀로 남으셔서 1912년에 마치지 못하신 대중화도수공부(大中華度數工夫)를 속행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