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연꽃
김형사님, 아니 죄송합니다. 조형사님이라고 하셨죠.
조형사님! 가시연꽃이라고 들어보셨지요?
가시연은 그 잎이 연못의 수면에 펼쳐져있습니다. 개구리가 가끔 그 연잎 위에 올라가죠. 개구리는 연잎위에 올라가는 날이 제삿날입니다. 연잎 위에는 가시가 솟아있습니다. 개구리가 얇은 뱃가죽이 가시에 찔렸다는 통증을 느끼고 내려오려고 폴짝거리면서 뛰면 뱃가죽에 더 많은 구멍이 생겨 결국은 죽게 마련이지요. 제가 지금 가시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의 기분입니다. 술을 먹었냐구요? 예! 술 냄새가 많이 납니까? 소주 세 병을 나발 불고 조형사님께 전화를 드리고 바로 온 겁니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합니다.
진술을 하기 전에 얘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하! 고맙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정상을 참작하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선처를 바라서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남의 자동차에 불을 질러 몽땅 태워놓고 조서를 다 꾸며야하는 놈에게 정상참작이나 선처라는 것은 물론 말도 되지 않겠지만요. 이왕 일은 이렇게 벌어진 거고 제 하소연을 좀 들어달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저도 이 잘난 시대의 피해자입니다. 솔직히 제 가슴에 지퍼가 달렸다면 쫙 열어서 이 답답한 심정을 보여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그럽니다. 다른 데 가서 이런 소리를 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가 십상이죠.
한번은 그러고 싶었어요. 모텔로 들어가는 차량에 불 지르는 거 말입니다. 저는 에이스 모텔이 들어선 오봉저수지 밑에 가끔 가는 편입니다. 그 바로 뒤에 저희 선산이 있거든요. 어떤 미친 자식이 그런 농지에 러브호텔 허가를 내주었는지 모르지만 갈 적마다 모텔에 들어가는 차를 보게 되지요. 그 작자들은 불륜의 불길로 들어가고 내 눈에는 다른 성질의 불길이 솟죠.
불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구요? 뻔하지 않습니까? 제 마누라 태우고 어느 미친 자식이 멀건 대낮에 러브호텔을 찾겠어요. 그런 놈이 있다면 그 자식은 나보다 더 미친놈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어제는 에이스 모텔 뒤에 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산소에 벌초를 했습니다. 벌초를 하면서도 사실 울화통이 치밀었습니다. 남의 집 벌초할 적에 보면 꼭 소풍 온 듯이 온가족이나 집안사람끼리 먹을 것을 잔뜩 싸가지고 와서 벌초를 하면서 놀다 가는 분위기인데, 사실 그 자리에 묻힌 조상들도 후손들이 그렇게 벌초를 하는 걸 본다면 흐뭇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혼자서 벌초를 했습니다. 힘이 안 나게 마련이죠. 하지만 저는 정성들여 꼼꼼하게 벌초를 했습니다. 벌초를 마치고 나니 예초기에 쓰던 휘발유가 페트병으로 한 병 조금 못 미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저는 벌초를 마치고 제 일 톤짜리 봉고차를 세워 놓은 곳으로 내려오던 길이었어요. 물론 산소아래 밭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늘상 산소 아래까지 경운기와 봉고차가 들어가던 길이었는데 그 전날 농로에 시멘트 포장을 하고 길을 각목으로 막아놓았더라구요. 그래서 어제는 차를 여관 뒤편 과수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세워두고 과수원 옆으로 난 좁은 도랑을 따라서 한참을 걸어 올라갔지요. 올라갈 적에도 모텔로 들어가는 차를 한 대 보았습니다. 그 때 이미 나와는 팔자가 다른 자식의 차에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요.
어떤 놈은 예초기를 메고 혼자서 벌초를 하러 가는데 색다른 팔자를 지닌 놈은 남의 계집을 끼고 고급 승용차를 끌고 와서 러브호텔 방으로 들어가는 꼴을 보았으니 대가리가 하늘 쪽으로 달린 작자라면 비관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그림이다, 하고 흘려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저는 그런 작자들로 인하여 심적으로 상처를 받은 놈입니다.
불을 지르고 나니 속이 편하고 보상받은 기분이 들더냐구요? 그래요. 속이 후련합디다. 예초기를 봉고차 적재함에 싣고 남은 휘발유를 운전석에 싣기에는 제가 담배를 좀 많이 피우니 위험한 것 같고 또 버리자니 아깝고 적재함에 싣자니 굴러다닐 거 같고, 남은 휘발유 처리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바로 과수원 건너 모텔 뒷마당으로 검정색 승용차가 한 대 들어오더라구요. 어떻게 보면 순전히 충동적이었죠.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었어요. 나는 휘발유가 든 페트병을 쥐고 사과밭을 가로 질러 모텔 쪽으로 갔지요. 그리고는 뒷마당에 선 승용차에 휘발유를 앞 보닛부터 트렁크 보닛까지 한 줄로 줄줄 뿌리고 라이트를 켜서 불을 붙였지요. 불길이 확 치솟는 걸 보고 사과밭으로 냅다 튀었지요. 그랜즈였는지 에쿠스였는지는 정확히 볼 겨를이 없었지만 검정색 차였던 건 확실합니다. 사과밭 중간쯤에 쪼그려 앉아 숨을 헐떡이며 보니 차는 온전히 불길 속에 갇히더라구요. 그래도 사람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요. 무인일실주차, 뭐 그런 시스템이니 차를 감시할 사람이 있을 수가 없었죠.
야! 불이 춤춘다. 불놀이야. 어쩌고 하는 노래가 있지요. 언젠가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한 노래지요. 옥슨80인가하는 가수들이 불렀던 노래 말입니다. 어제 나는 화염에 쌓인 불꽃을 보면서 그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결코 에이스 모텔의 수요자 내지는 이용객이 되지 못하는 놈이 멀찍이 떨어져 화염을 토해내며 타고 있는 승용차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시원해지더라구요. 정말 속 시원하게 잘 탑디다. 휘발유 일 리터짜리 한 병의 힘이 그렇게 센 줄을 몰랐어요. 삽시간에 차량 이 불길에 휩싸이더라구요. 물론 차 주인은 제 차가 불길에 휩싸여 타고 있는 줄 모르고 남의 여자와 모텔 방에서 또 다른 불놀이를 질펀하게 벌이고 있었겠지요. 그 작자가 일을 마치고 모텔방을 나와서 제가 타고 온 차가 그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겠죠. 아니, 일을 치르다가 중단 되었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더 고소하죠. 소방서나 경찰서 조사를 받고 누구와 그곳에 무슨 일로 갔으며 그 시간대가 몇 시였다고 진술하자면 죽을 맛이겠죠. 체면은 제쳐두고 제 마누라나 상대의 남편에게 들통이 나서 간통이다 뭐다 시비 거리가 생길 꼴을 생각하며 불길을 보니 이 시대에 당한 피해를 보상이라도 받는 기분이 들더라구요.
전소되는 거 까지는 보질 않았죠. 한 십 분쯤 불길을 감상하다가 봉고차를 끌고서 사과밭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서 내려왔습니다. 여관 앞으로 통하지 않고 길이 있느냐구요? 예, 있습니다. 사과밭 뒤쪽으로 농로를 따라 내려오면 말바우로 통하는 길이 있지요. 저는 그길로 유유히 빠져 나왔지요. 솔직히 오늘 제가 자수를 하지 않았다면 완전범죄가 되었을 겁니다. 아무 증거가 없잖아요. 제가 진술한 거 외에는 물증이라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느닷없이 찾아와서 내가 불을 질렀다. 내가 먹고 살기 힘들어서, 아니면 감옥에 가고 싶어서 거짓 자수를 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나오면 어쩌겠어요.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넣든가, 아니면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려고 노력들 하시겠죠? 알리바이도 성립됩니다. 차에 불을 지르고 채 십오 분이 되지 않아서 그 아랫동네에 외딴집이 있죠, 그 집에 주윤태라는 친구가 살고 있어요. 그 친구 말바우에서 알부자입니다. 축산업이라고 할 거까지는 없지만 한우를 팔십여 마리 먹이면서 농기계다 갖추어 놓고 논농사만 백 마지기이상 지을 걸요. 하여튼, 그 친구에게 예초기를 반납했거든요. 그 예초기는 주윤태에게 빌린 겁니다. 주윤태가 그 시간대를 정확히 기억하겠어요? 겨우 십 분 아니면 십오 분 차이인데.
이 시대에 무슨 피해를 당했냐구요? 누구든 그렇죠. 자기가 잘못 되면 시대 탓으로 돌리는 거 아닙니까? 남들 잘 나가는데 저 혼자 쪼그랑 망태기가 되어 있으면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을 느끼고 그 이유를 시대 탓이라고 빙자하는 거 아닙니까? 저 올해 서른여덟입니다. 노모와 단둘이 살고 있죠. 결혼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맛이 살짝 갔죠. 공황장애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갑자기 불안한 증세, 꼭 심장이 멎을 거 같이 불안감이 엄습하는데 일종의 홧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그 증세를 처음 느낀 건 삼년 전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당장 심장이 멋을 것 같은 불안감, 그때는 그게 무슨 병인지 몰랐어요. 그 때 치또찐을 보내고 나서였지요. 치또찐이 누구냐구요? 제가 결혼해서 일 년 반을 같이 산 베트남 여자입니다. 벌써 오 년이 되었군요. 제 나이 서른셋에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 베트남으로 건너갔지요.
가진 것이라곤 불알 두 쪽과 도시의 변두리가 되어버린 시골집 한 채, 그리고 노모를 모시고 살아야하는 서른세 살짜리, 배운 것이라곤 15톤 덤프트럭 운전밖에 없는 촌놈에게 시집 올 조선 처녀가 없더라는 얘깁니다. 막말로 중매쟁이 년들이 붙질 않더라구요. 서른셋이 되도록 한 번도 선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안달이 났죠.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남의 집 논밭으로 다니며 품팔이해서 홀몸으로 저 하나 키웠는데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가고 있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조형사님! 형사님은 형제들이 많습니까? 삼남일녀라구요? 그 정도면 딱 좋지요. 형제만한 보험이 있습니까?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고 명절에 모여서 우애롭게 음식을 만들어 먹고,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우며 지나간 이야기,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며 명절을 보내고 또 돌아갈 적에는 음식과 시골에서 지은 농작물을 좀 싣고 시골에 남은 부모님 용돈 좀 드리고 ‘가는 길에 조심 하거래이’ ‘어무이 건강하시고 편찮으시면 재깍 연락하이소’ 뭐 그런 인사들을 하면서 헤어지는 걸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죠. 부러운 정도가 아니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죠.
제가 일곱 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제가 명절이나 제삿날에는 제주노릇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독자였기에 사촌마저도 없습니다. 당숙이나 육촌들이 있다지만 몇 명인지 모르죠. 종조부가 해방 전부터 개성에 살았다니까요. 어릴 적부터 나는 명절에 모이는 이웃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해서 나는 장가를 가면 아이들을 한 다스는 낳을 거다, 뭐 이런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뜻대로 풀립니까. 아니죠.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가고 있으니 나도 나겠지만 어머니 마음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저 최종학력이 면소재지에 하나 밖에 없는 고등학교 이학년 중퇴입니다. 어머니야 몸뚱이를 팔아서라도 나하나 공부시킨다고 했지만 집안에 기둥이 없는 어머니로서는 고등학교 시키는 것마저 힘에 겨웠습니다. 물론 나도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구요. 사실 공부에 흥미도 취미도 없었고 고등학교 졸업해서 뭐하나 하는 회의가 들더라구요. 그때 생각에 저는 하룻밤을 자고나면 열 살정도 더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뭐 그런 공상을 했죠. 그만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얘깁니다. 어른이 되어 빨리 돈을 벌어야 했으며 아이들을 한 다스쯤 낳아야했으니까요.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어머니 나이도 있고, 먹고사는 일이 절실했어요. 이학년에 중퇴하고 취직을 했지요. 회사랄 것도 없어요. 직원이라곤 사장 혼자 일하는 곳이었으니까요. 가내공업으로 하는 정밀부품을 깎는 곳인데 그곳에 시다라고 하나요? 조수로 들어갔습니다. 그 정밀기술을 배우면 전망이 있겠다 싶어서 겨우 밥술이나 얻어먹으면서 기술을 배우겠다고 했지요. 그곳 주인아저씨, 아니 사장이 그러더군요. 일찍 맘을 잘 먹었다고, 까짓 고등학교 졸업해서 뭐하냐? 기술이 최고라고 했어요. 저도 그 말에 공감했구요. 그때 무거운 철판을 들어주고 가공된 부품들을 일일이 손으로 야스리로, 참 야스리가 뭔지 아십니까? 줄 말입니다. 사포로 문지르고 줄로 다듬고 했지요. 두어 달 밥술을 얻어먹고 나니까 내가 요구하지 않았지만 월급을 주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때 돈으로 칠 만원인가 팔 만원을 받았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수입이 짭짤했던 모양입디다. 저는 그 돈을 십 원도 쓰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계를 모으는데 꼬박꼬박 냈지요. 근데 그게 우리가 타 먹기 전에 산통이 난 겁니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어머니는 그 말을 두고두고 하셨어요.
육 개월쯤 지나니까 사장이 작은 프레스기를 들여넣더라구요. 일이 한결 수월해졌지요. 그때까지 산소 용접기로 자르던 철판을 프레스 절단기로 자르고 또 얇은 철판은 휠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때 저는 정밀기 중에서 선반은 만지지도 못하고 프레스를 배웠지요.
여기 제 손을 좀 보세요. 이 손가락 두 마디 그 때 프레스기에 날아갔습니다. 제가 그 정밀가공소에 일한 것은 겨우 일 년이 좀 넘었지요. 고등학교 중퇴하고 일 년만에 손가락 두 마디 날아가고 빈털터리가 되었지요. 계가 산통 나고, 손가락 두 마디 날아간 것은 이틀사이였어요. 재수 옴 붙었는지 엎어지자 코도 깨지고 뒤통수도 박살이 난 꼴이죠. 어머니 낙심이야 어찌 말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 사장이 병원비와 손가락 날린 값으로 얼마를 주더라구요. 저는 그 돈으로 운전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때 만 십팔 세가 되었거든요. 일종보통 면허부터 땄습니다. 한 동네 용태 형이라고 있었지요. 저보다 세 살이 많습니다. 그 형은 중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요. 동병상련이라고 하나요? 그 형이 저를 거두어 주더라구요. 용태 형이 하는 화물차 조수로 따라 다녔습니다. 이 손가락 두 마디 잘린 덕분에 군에 면제받고 주욱 화물차 조수에서 운전수로 일하며 대형면허를 땄지요. 다른 놈들 대학에 다닐 적에 저는 대형트럭에 화물을 싣고 전국을 누비고 있었지요. 언젠가는 차주가 되고 화물알선소를 차리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지요.
제가 끌고 다니는 차의 속력만큼이나 세월도 빨리 흐릅디다. 영업용 화물차를 육 년이나 했어요. 지금은 고속도로가 잘 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영업용 대형화물은 거의 국도를 이용했지요. 날밤을 새우는 건 보통이었어요. 화물알선소에서 짐을 기다리는 동안 차 안에서 토끼잠을 자고 먹는 거 또한 제시간에 찾아 먹는 다는 건 언감생심이죠. 근데 장거리 야간운전이 힘에 겨워질 때 15톤 덤프트럭이 인기가 있더라구요. 저는 말을 갈아탔죠. 15톤 덤프트럭은 외지로 장거리를 나가지 않고 지역 현장에서 일을 하며 또 주간에만 뛰며 집에서 다닐 수가 있지요.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몸이 고된 걸로 따지자면 반이 되질 않는 거죠. 서른이 넘자 어머니 성화에 이길 수가 없었죠. 평생을 워낙 단촐하게 살아왔던 어머니라 가족이 늘어나는 게 몹시도 부러웠던 모양입디다. 동네에서 누가 약혼만 해도 어머니는 나를 덜덜 볶아댔죠. 서른이 넘으니까 어머니는 더 심해졌어요. 저도 결혼이 절실했구요. 어머니가 서른둘에 저를 낳았으니까, 환갑이 넘은 어머니에게 조석을 얻어먹는다는 것도 체면이 안서는 일이고 무슨 방법을 강구하던 간에 여자를 하나 데려와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를 않더라구요. 처녀가 없었어요. 아, 물론 처녀야 길에 나가면 지천으로 늘려있지요. 하지만 정작 나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여자가 없더라는 말입니다. 지나가는 여자를 보쌈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부나 이혼한 여자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온전한 총각인데,
아, 아닙니다. 온전한 총각이라는 표현이 잘못되었군요. 물론 술집이나 다방 여자와 같이 잔 경험은 있겠지요. 아따, 조형사님도 질기게 물고 늘어지시는군요. 서른이 넘도록 그런 경험이 없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이 났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사실 중간에 어머니 몰래 만났던 여자가 있었어요. 결정적인 흠은 그 여자에게 남편이 있다는 거죠. 그 남편은 목수였는데 현장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치고 하반신 마비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채로 삼 년째 산재병원에 누워 있다는 사실과 그 남편이 없더라도 딸린 아이가 두 명이나 있는데 뭔 일이 되겠어요. 서른두 살 때였어요. 일 년 정도 만나 불장난을 했습니다. 참 착한 여자였어요. 마음 씀씀이도 고왔고 인물도 그 정도면 괜찮았습니다. 저보다는 두 살이 많았죠.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건 기정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착한 여자에게 왜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고 욕구에 대한 갈증을 풀려고 만났던 거 같습니다. 좋은 말로 미화시켜 서로가 상부상조라고 생각하고 만났던 거지만 지나간 일 더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저 서른셋에 베트남으로 건너갔습니다. 주위에서 그러더라구요. 물론 어머니도 그런 뜻을 여러 번 비추었구요. 어머니는 워낙에 현실을 재바르게 직시하는 분이니까, 당신 아들이 못났으니 한국에서는 며느리 구하기가 힘들겠다는 걸 먼저 간파하셨지만 당신 아들에게만은 차마, 그 말을 못 꺼냈는지도 모릅니다.
필리핀이나 중국여자들보다 부지런한 베트남 여자가 낫다. 큰마음 먹고 가서 하나 사와라. 친구들도 그런 뜻을 비추었고 동료기사들도 여러 번 종용했어요. 조형사님! 결혼하셨죠? 한국에서 결혼하려면 혼수비용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국제결혼 그거 솔직히 여자를 사오는 거 아닙니다. 한국 여자와 하는 결혼비용의 절반만 들어도 가능합니다. 그동안 어머니가 관리했지만 제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서 제법 있었구요. 저는 그 돈으로 덤프트럭을 사려고 했어요. 저는 솔직히 국제결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실패확률이 높고 또 거추장스럽다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뭐 그런 선례들이 많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한 중국이나 필리핀 여자들과 결혼해서 제대로 사는 사람들이 없더라구요
헌데, 어떻게 낌새를 챘는지 국제결혼 정보회사, 이름에 걸맞게 정보하나는 쥑이게 빠르더라구요. 베트남 처녀들의 사진들을 가지고 와서 보며주며 따라다니는데 정말 귀찮을 정도였어요. 데려와서 교육시키고 살림을 잘 할 때까지 애프터서비스까지 책임을 진다고 하더라구요. 중국여자는 피하라. 그 구호 같은 말이 그 때 한창 떠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중국여자들은 시집 와서 한국어를 익히고 국적을 취득하면 어떤 이유를 달아서 이혼하거나 도망을 간다는 말들이 있고 필리핀 여자들은 외모에 너무 표시가 나서 베트남 여자를 택한 겁니다. 그리고 저희 외삼촌이 월남 참전 용사인데 베트남 꽁까이들이 예쁘고 또 부모를 모시고 살아서 무엇보다 부지런하다는 말에 베트남 쪽으로 호감을 갖게 되었죠. 결혼회사에서 여권 만들어주고 비자 내고 스케줄을 잡아 굴비처럼 엮여서 가이드가 아닌 국제 중매쟁이를 따라 갔지요. 제가 갈 적에 농촌총각들을 어떻게 모았는지 그 회사에서 아홉 명이 호치민으로 갔어요. 같이 간 일행 중에서 그래도 제가 나이로 치면 적은 축에 들더라구요. 호치민에 가니까 벌써 여자들이 대기를 하고 있더러구요.
조형사님! 왜 제 얘기가 따분합니까? 바로 조서를 구밀까요? 아니, 조형사님 표정이 탐탁찮아하는 거 같아서 그럽니다.
그 결혼회사 지점이 호치민에 있더라구요.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그 결혼회사로 갔는데 한 스무 명도 넘는 여자를 보여주더라구요. 우리는 통역을 세워놓고 완전히 시험 면접관처럼 앉아서 선을 보았지요. 선을 보았다기보다는 면접을 봤다는 말이 맞을 거 같습니다. 열여덟 살짜리부터 스물셋까지 면접을 보는데 같이 간 작자 중에서 서른여덟 살짜리, 전북 고창인가 어디에서 온 총각, 총각이 아니라 중늙은이라고 해야겠지요. 그 씹탱이는 제 나이는 생각도 않고 열여덟 살짜리를 고르더라구요.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아, 죄송합니다. 제가 욕을 했군요. 이거 완전히 욕이 노가다 입에서 베어가지구,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스물세 살짜리 치또찐을 찍었어요. 저랑 나이차이도 가장 적고 또 한 눈에 저 여자다 싶더라구요. 한국인과 가장 외모가 비슷했어요. 같이 간 아홉 명 중에서 여섯 명이 그곳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으로 데려왔지요. 호치민에 열하루를 머물다가 왔는데 정말 꿈같은 나날이었어요. 나는 직업을 속였죠. 15톤 트럭의 기사가 아니라 차주라고,
직업을 속였지만 자신만만했습니다. 들어가서 15톤 덤프를 사면 될 거 아니냐? 어차피 모자라는 돈은 캐피탈 두었다가 어디에 쓰냐. 뭐 그런 생각을 하니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때만해도 건설경기도 괜찮았고 덤프트럭 십년 정도 했으니 어떤 현장을 쑤셔도 놀지 않고 일을 할 수가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치또찐의 고향은 호치민에서 남쪽으로 200km 더 내려가서 메콩강 하류의 작은 도시 깐터라고 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처녀였어요. 치또찐이 나보다 열 살 적고 내가 장인이 되는 치또찐 아버지 보다 열 살이 적었습니다. 치또진 아래로 동생들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나는 장인에게 결혼지참금으로 칠백만원을 주었습니다. 그곳 물정으로 따지면 큰 돈이죠.
치또찐을 데리고 들어와서 한국에서 다시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치또진을 지도진이라고 한국이름으로 개명해서 혼인신고도 하구요. 그리고 15톤 덤프트럭을 사고 차주가 되었지요. 캐피탈에 근저당 설정을 하고 차를 샀지만 차주는 분명히 저였습니다. 갖출 것 다 갖추고 사람 사는 것처럼 집안을 만들었습니다. 촌집이지만 내부수리를 해서 치또찐이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만들었구요. 또 무엇보다 그때는 일거리도 많았습니다. 기사생활을 하다가 내차를 샀으니 일을 해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 죽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쯤 아이 한 둘 낳고 오순도순 잘 살고 있겠지요.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아, 고맙습니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게 하는 관공서는 어디에도 없는데 경찰서라 좀 다르군요.
결혼은 했지만 결혼의 목적이 달랐습니다. 문화의 차이가 아니었어요. 엄격히 따지면 목적의 차이였습니다. 치또찐은 결혼을 위해서 한국으로 온 게 아니었어요. 단지 돈을 벌 요량으로 결혼을 한 겁니다. 결혼하고 한 달이 겨우 넘었는데 돈을 벌로 나가겠다는 겁니다. 돈은 내가 벌어서 베트남 처가로 매달 얼마라도 보내주겠다고 달래며 집안에서 살림을 배우라고 했지요. 하지만 막무가내였어요. 어머니 눈에 그런 애가 고와보였겠습니까? 그때부터 고부갈등이 시작된 겁니다. 그렇게 깡마른 애가 어디에서 그런 고집이 나오는지 막무가내였어요. 주는 밥도 안 먹고 드러누워 시위를 하는데 어머니가 두 손을 들었지요. 할 수 없이 면소재지에 있는 농공단지 의자 공장에 취직을 시켰습니다. 월급 받으면 돈은 제 통장으로 모으고 그 공장에 딱 넉 달을 다니더군요. 그동안 한국말은 많이 늘었지요. 그 다음부턴 수당을 많이 준다며 야간근무를 한다며 오후에 집을 나가서 새벽 두세 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처음에는 눈치를 긁지 못했습니다. 그게 의자 공장으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바에서 서빙을 하고 있더라구요. 한 보름쯤 후에 알아낸 거죠. 내가 찾아가 보았지요. 물론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했구요. 그다지 퇴폐적이지 않으니까 그냥 두었어요. 근데 이 물건이 가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있더라구요. 뭔가 이상하다 다그쳐도 말을 않고 그냥 피곤해서 바에서 잤다고 하더라구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조형사님도 이미 눈치를 채셨지요. 나중에 미행해서 알아보니 노래방 도우미를 뛰고 있더라구요. 제동을 걸기에는 이미 늦었지요. 즐기면서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을 찾아낸 겁니다. 어쨌거나 아이를 하나 낳으면 발목을 잡겠다 싶었는데 아이가 들어서질 않는 것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철저히 피임을 하고 있더라구요. 집의 장롱 밑에서 발견한 피임약을 보고는 눈알이 튀어나오더라고요. 나는 치또진을 데려오고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근데 피임약을 발견한 날 잔뜩 벼르고 있는데 그날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저는 다음날 일을 나가지 않고 기다렸죠.
어디서 뒤집어 잤는지 열한 시가 넘어서야 택시를 타고 들어오더군요. 생각하니 송아지는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만두지 않았어요. 문을 걸어 잠그고 완전히 작살을 냈죠. 이게 그걸 빌미로 나가더니 보름이 넘도록 집에 들어오질 않더라구요.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일을 접고 그년을 찾아다녔어요. 보름 만에 찾아냈는데 시내에 원룸을 얻어놓고 있더라구요.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미동도 않더라구요. 얼레고 달래고 빌고, 이혼 하고 불법체류자로 고발해서 베트남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도 하고, 참 쪽 팔리는 일이지만 별 짓을 다 했어요. 안되더라구요. 죽이지도 못하겠고 참 환장을 하겠더라구요. 뒈지도록 주워 패고 이 여자는 내가 데려갈 여자가 아니다. 마음을 비우자. 다짐하고 원룸을 나왔죠.
저야 마음을 비우면 그만인데 어머니가 문제죠. 그 많은 뭉칫돈을 들여 사 온 년인데 쉽게 포기가 되겠어요. 어머니가 난리가 났어요. 어머니가 설득해보겠다고 치또찐이 있는 곳을 한번만 데려다 달라고 나에게 애원을 하더라구요. 어머니는 단지 나에게 맞은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잠시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잘 타일러서 데려오겠다는 눈치였어요. 나는 완강히 반대를 했죠. 이미 끝난 거다. 호적 정리하고 베트남으로 보내든 불법체류자가 되어 남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우겼죠. 하지만 어머니는 집요했어요. 사흘을 내리 조르더라구요. 어머니가 하도 애원하기에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치또진의 원룸을 찾아갔지요. 그곳을 찾아가면서 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죠. 제가 아까 가시연꽃에 대해 얘기를 했죠. 어머니를 모시고 그 곳을 찾는 게 가시연 위에 개구리가 올라앉는 일이라는 걸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 날 저도 마찬가지지만 어머니도 가시연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꼴이 되고 말았어요.
그 년이 어쨌는 줄 아세요? 글쎄, 멀건 대낮에 그 원룸에서 어디에서 끌어들인 잡놈인지 모르지만 웬 놈과 벌거벗고 뒹굴고 있더라구요. 나는 어머니 눈을 가려야 했는데 실패했어요. 그 눈이 찔릴 광경을 어머니는 온전히 목격했어요. 가시연 위에서 폴짝 거리다가 뱃가죽이 아니라 눈알이 찔리는 어머니라는 개구리를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원룸 현관에서 뒤통수를 맞은 듯 비틀거리는 어머니를 부축해서 바로 집으로 왔습니다. 모든 게 끝나는 순간이었죠.
조형사님 상상이 됩니까?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바로 자리에 드러눕더라구요. 실로 대단한 충격이었죠. 사흘간 일어나시질 못하더라고요. 저도 일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농약이라도 마시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어머니를 간호했죠. 사흘간 누웠다가 일어난 어머니가 저에게 한마디를 했죠. 호적 정리해라! 딱 그 한마디를 뱉어놓고 다시 눕더라구요. 그리곤 바깥출입을 자제하셨어요. 나도 어머니를 지키면서 술을 사다가 내 방에서 마셨어요. 세상은 참 재미있는 거다. 이런 질곡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술기운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술이 깨면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술을 찾게 되죠.
베트남을 가면서 꾸었던 보랏빛 꿈이 백일몽으로 끝난, 도막난 인생이 되어버렸죠. 동네 어귀에는 캐피탈로 구입한 15톤 덤프트럭이 할부가 두 달이 밀리도록 녹이 슬고 서 있었습니다. 이젠 내리막을 타고 엎어져야하는데 저는 그 상황에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는 낙법을 익혀두지 못했습니다. 일이 하기 싫어졌고 또 일거리가 줄었습니다. 한 몇 달을 놀았으니 거래처가 끊기는 거야 당연하죠. 일을 할려면 일거리가 없고 일거리 없다는 걸 빙자해서 술을 마시고 있으면 일거리가 들어오는데 술에 쩔어 있으니 일을 나갈 수가 없고 악순환의 연속이었죠. 한 달에 일을 잘하면 사나흘, 할부는 계속 밀리고 저는 폐인처럼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치또찐이 보따리 하나를 들고 집으로 기어들어왔어요.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이게 몸 팔고 뭐 팔아서 조금 모은 돈을 어느 놈팽이에게 홀랑 사기를 당한 건지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서 들어왔더라구요. 세상 참 재미있지요. 우리 집을 제 친정인양 착각하고 있었어요. 그 때 나는 작은 방에서 낮술에 잔뜩 취해 있었지요. 마당에 서 있는 치또찐을 보고 술기운에 헛것을 본 게 아닐까 눈을 의심했습니다. 호적 정리되었으니 좋은 말로 할 적에 나가라고 했습니다. 집구석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년이 여기에 왜 왔냐고, 여기가 네 친정으로 알고 있냐고, 당장 사라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소리를 질렀지요. 그년이 마당 가운데 굻어 앉더라구요. 잘못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싹싹 비는 년을 내가 나가서 발로 좀 밟았지요. 내 참, 비는 꼴을 보니 한국말은 유창하더라구요. 내가 그년을 걷어차자 어머니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뜯어 말리고는 그년을 어머니 방으로 부축해 들어가더라구요. 어머니가 불쌍하고 철없다는 생각으로 거두어주었지요. 마치 친 딸처럼 돌보아 주었지요.
하지만 걸레는 빨아도 걸레입니다. 나는 그 년을 석 달 정도 더 데리고 살았습니다. 집을 나가기 전과는 좀 달라졌더라구요. 제 손으로 밥도 하고 세탁기도 돌리고 집안 정소를 하는 것이 이젠 사람이 되려나했죠. 저도 술을 끊고 일을 나가고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려나 했는데 그것도 불발이었어요. 석 달이 지나자 슬슬 본색이 드러나더라구요. 베트남의 제 친정에 먹고 살길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구요. 그 정도야 저도 알고 있던 터였고 데려올 적에 각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린 할부를 내려고 모으던 돈 중에서 얼마를 떼어서 베트남으로 보냈습니다. 헌데 바로 며칠 후 내가 수금을 해서 갖고 온 돈을 갖고 튀었어요. 15톤 덤프란 택시처럼 매일 돈이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한 달치 일한 것을 수금해서 왔는데 그 다음날 이년이 그 뭉칫돈에 손을 댄 것이지요. 밀린 기름 값과 할부금을 낼 돈이었는데........ 돈을 갖고 튀어라, 이런 영화 제목있지요? 생각하면 하도 어이가 없어서 껄껄 웃음이 다 나옵디다. 가시연잎 위에서 한번 살아보겠다고 폴짝거린 어머니라는 개구리의 뱃가죽에 구멍이 숭숭 났겠지요. 어머니는 바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지요. 저는 치또찐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늘을 원망하고 제 운명을 저주했습니다. 치또찐을 찾기는커녕 내 눈에 걸리지 않기를 빌었지요. 내 눈에 뜨이면 살인사건이 날 터이니까요.
할부금 고지서와 독촉장이 날아드는데 참 환장하겠더라구요. 일을 안 하고는 배길 수가 없었죠. 그리고 생각하면 속이 쓰린 제 신세를 술로 달래지 않을 수가 없는 실정이었죠. 일을 마치면 술을 먹었습니다. 거의 매일이었죠. 취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으니까요. 할부금도 할부금이지만 거래하던 주유소에서는 밀린 기름 대금을 갚지 않으면 기름을 못 대주겠다고 난리를 치는 마당이었어요. 이럴 때 설상가상이란 말을 쓰지요. 일거리가 자꾸 줄어드는 겁니다. 기름 값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르고요.
작년이었습니다. 그날은 일이 안 잡혔어요. 오전부터 술을 먹고 있는데 일거리가 들어오더라구요. 그래서 망설이다가 운행을 나갔죠. 술은 취할 정도로 먹은 게 아니니까요. 골재장에서 모래를 한 차 실어다 부리고 아파트 현장에서 나오는데 어떤 미친 여편네가 차를 끌고 골목에서 나오다가 내 차 뒷바퀴에 추돌하는 겁니다. 저는 백미러를 보고 거의 멈춰선 상태였습니다. 여자는 초보였어요. 제 년이 잘못했고 차가 많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앞 범퍼 살짝 긁힌 걸 가지고 경찰에 신고를 하더라구요. 사고 시에 음주측정은 피할 수가 없죠. 혈중알콜농도 0.12, 면허취소에 벌금 이백 만원! 핸들을 잡아서 먹고 사는 놈에게 그건 죽음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저는 할 수없이 운전기사를 채용했죠. 이 년만 어떻게 버티고 면허를 다시 따야한다. 뭐 이런 계산으로 기사를 들여서 일을 했는데 아무리 일을 해도 기사 월급과 치솟는 기름 값, 할부금이 안되더라구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 때 덤프트럭을 중고로 날려야하는 게 좋았을 터인데 어느 날 집달관이 찾아와 차에 딱지를 붙이더라구요. 캐피탈에서 경매처분 신청을 넣은 거죠. 두 번 유찰되고 세 번째 경매에서 날아갔는데 똥값이 되어버린 겁니다. 낙찰대금으로 밀린 할부와 남은 할부에 모자라는 금액으로 날아갔습니다. 그 다음에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살고 있는 집에 압류가 들어오더라구요. 내리막에 가속도가 붙으니 제동이 안되더라구요. 저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파트 현장에 막노동을 했습니다. 집이라도 살려야 했으니까요. 막노동을 해서 캐피탈에 갚겠다고 사정을 하고 집에 대한 경매를 좀 유예시켜 달라고 사정을 했지요. 하지만 금전 앞에서는 비정한 집단, 캐피탈에서 그런 사정을 들어줄 리가 만무지요. 허무했습니다. 나름대로 살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허무주의자의 비애를 느끼며 비참한 말로를 상상했지요. 지금까지 집이 두 번 유찰 되었습니다. 그 촌집마저 날아가면 우리 모자가 당장 거처할 곳도 없습니다. 공사판에 막일을 하여 어디 원룸이나 들어가야겠지만 막일마저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면허시험에 응시하려면 아직 일 년이나 남았습니다.
이제 제가 감옥에 들어가 버리면 어머니는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어 극빈자 임대아파트로 가게 되겠지요. 제가 있어서 어머니가 생활보호대상자에서 제외되는 것이거든요. 아까 술을 먹다가 떠오른 아이디어였습니다.
어제 차량에 불을 지른 것은 제가 감옥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충동적으로 질렀는데 오늘 술을 먹다가 생각해보니 차라리 방화범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어머니는 영구임대아파트로 들어가는 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발로 찾아왔죠. 이 라이트가 물증입니다.
불을 지른 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느냐구요? 그 때가 그러니까 벌초를 마치고 내려와서 날이 어둑해지기 전이었으니까, 다섯 시 반쯤 되었을 겁니다. 불을 지르고 불구경을 하다가 과수원을 빠져나와 말바우로 넘어서 집에 도착한 시간이 여섯 시가 좀 넘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차 차주한테 조금은 미안하네요. 제가 차를 배상할 능력은 없고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으니 그 차에 자차보험을 가입했다면 모를까. 차 한 대 고스란히 날아가겠지요. 또 그 차 차주가 불륜으로 에이스 모텔을 찾은 게 아니라 약혼녀나 연인관계일 수도 있잖아요. 다음에 그 차 자주에 대해서 조서를 꾸밀 적에 미안하다고 좀 전해주십시오.
그런데 조형사님! 차량 방화범으로 들어가면 얼마정도 살지요? 저는 딱 일 년 정도면 좋겠는데. 어머니 몸이 좋지 않아요. 일 년 정도 살다가 나와서 면허를 다시 내고 어머니 봉양을 해야 하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너무 불쌍합니다. 제가 또 이렇게 들어가면 어머니는 정말이지 쓰러질지도 몰라요. 말은 안하고 계시지만 남편 복이 없으니 자식 복도 없다고 한탄하고 계시는 눈치였어요.
어머니는 그래도 훌륭합니다. 제가 듣는 앞에서 집안이 이 꼴이 되어도 치또찐에 대해서는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더라구요. 모든 것이 당신 팔자에 정해진 대로 간다고 생각하는 분이십니다. 저희 어머니가 불쌍하지 않습니까?
술이 좀 깨냐구요? 예 이렇게 하소연을 하고 나니까 술이 좀 깨긴 합니다만 조서 꾸미는데 지장이 없이 진술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이지 저는 그 에이스 모텔을 지으면서부터 그 공사현장이 눈에 가시처럼 박히더라구요. 그런 비생산적인 건물이 하필이면 아버지 산소 밑에 들어서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했지요. 농지에 그런 건물을 지으면 주위에 민원이 많았을 터인데 그 민원을 어떻게 수습했는지 모르겠네요. 물론 돈으로 구워삶았을 터이지요.
지금 무면허 인데 일 톤 봉고차를 어떻게 운전하고 다니냐구요? 아, 예. 그 차는 제 친구가 근 십년을 타고 폐차 시키려는 것을 제가 사정해서 얻었지요. 그 친구도 제가 무면허라는 것을 압니다. 무면허로 사고라도 나면 책임이 고스란히 차주 앞으로 전가되잖아요. 그래서 제 앞으로 이전을 하고 타고 다니는데 술을 먹거나 밤에는 타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일에 한번 씩 쓰는 정도지요. 무면허로 걸리면 또 면허시험 볼 수 있는 기간이 연장되는데 제가 그걸 모르고 쓸데없이 끌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무면허로 운전하지 말고 일어서 가라구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가라는 거죠? 뭐라구요? 제가 했던 말은 모두가 헛소리라구요? 그 차는 손님차가 아니라 그 모텔의 주인인 사장차라는 말이죠? 검정색 차가 아니라 흰색 차구요? 범인은 벌써 어제 잡혔다는 말이죠? 감시카메라에 나 같은 인물은 찍히지도 않았다는 말이죠? 아니, 뭐가 이래요. 그럼 여태까지 뭐 때문에 횡설수설하는 제 말을 듣고 있었습니까? 모텔을 지어준 공사업자가 공사비를 덜 받은 게 있어서 여관주인과 싸우다가 따라와서 불을 질렀다는 말입니까? 모텔에서는 하자보수를 해주어야 공사비를 준다고 하고 공사업자는 공사비를 받아야 하자보수를 완전히 해준다고 서로 싸우다가 홧김에 그랬다는 말이죠? 그럼 나는 뭡니까? 이제 공무집행 방해죄로 들어가는 겁니까?
용의점은 찾을 수가 없고 불에 타서 뼈대만 남은 차와 제 가슴에 치또진으로 인해 불에 탄 흔적만이 일치할 뿐이다? 경찰서에 찾아와서 거짓 진술한 것에 대해 공무집행방해죄로 들어갈 수는 없나요? 저는 지금 낯 선 시간 속으로 약진이나 돌진하고픈 심정입니다. 수가 틀리면 밖에 나가서 한 놈을 뒤지도록 패고 다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맞지나 말라구요? 아, 생각났습니다. 밖에 나가서 괜한 시비 붙어서 이빨 서너 개 부러져서 그 합의금으로 캐피탈에서 빌린 채무를 정리하고 경매를 취하시키면 되겠군요. 그렇게 하든 말든 바쁘니까 빨리 나가라구요? 아, 알겠습니다.
가시연잎인 줄 알고 올라앉았는데 매끈한 연잎이었군요. 죄송합니다. 근데 속은 후련합니다. 우리가 방화사건 거짓진술로 불꽃놀이를 한 것이 되어버렸네요. 조형사님 인내심 참 대단하군요. 이렇게 하소연을 하고 나니 제가 그 차에 불을 지른 것보다 더 속이 후련하군요. 언제 짬이 되면 누가 사든지 소주 한 잔 합시다. 저 그만 가겠습니다. 바쁜 시간 빼앗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