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목적] 회헌(晦軒) 임대동(林大仝)[1432~1503]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하여 1966년에 창건되었다. [변천] 1966년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에 조선 초기 학자 임대동을 추모하기 위해 화산사(華山祠)를 창건하였다. 1988년에는 화산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99년에 회암(會岩) 임종인(林宗仁)[1478~1535]과 남계(灆溪) 임희무(林希茂)[1527~1578]를 추가하여 배향하였다. 상향축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1978]이 지었다. 축문 내용은 학취봉원(學取逢原), 기병개석(幾炳介石), 고풍원운(高風遠韻), 영세무역(永世無射)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매년 음력 2월과 8월 두 차례 임대동, 임종인, 임희무 3인을 추모하기 위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2016년에는 전통 계승과 교육 기관으로 변모하기 위하여 경상남도 함양군이 10억여 원을 지원하여 보수와 주변 정비 등 복원공사를 실시하였다. 2016년 3월 13일 준공식을 가졌으며, 3월 27일 화산서원 복원 후 첫 제향을 지냈다. 경상남도 함양군 관내에 소재한 남계서원, 송호서원, 정산서원, 청계서원과 같이 유림들이 참석한 가운데 춘계 제향 행사가 열렸다. 2022년 7월 9일묘정비를 건립하였다.
[현황] 화산서원은 심원문(尋源門), 상현사(尙賢祠), 경회당(景晦堂), 모의재(慕義齋), 탁청헌(濯淸軒)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원문은 입구, 정면 3칸의 상현사는 사당, 경회당은 강당, 모의재는 재사(齋舍)[유생들이 기숙사로 쓰는 건물], 탁청헌은 헌함(軒檻)[건넌방이나 누각 등의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나 방]이다. 『경남교원지』 (경상남도향교재단, 2011) 『함양군사』 (함양군사편찬위원회, 2012)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디지털함양문화대전
1860년 유림들이 발론으로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강서사를 건축할려고 발의 하였으나 고종때 서원 훼철령이 있어서 건축하지 못하고, 1966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회헌 임대동을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에 화산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988년에 다시 화산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9년 봄에 회암 임종인과 남계 임희무의 위패를 모셨다.
1) 임대동(林大仝 1432~1503) 조선중기의 문신 자(字)는 정숙(貞叔)이요, 호(號)는 회헌(晦軒)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어려서 효성스러웠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 해오자 그의 문하생이 되어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 조위. 표연말, 유호인, 권수헌, 이재사, 박졸재, 강백진, 임희재등과 교유하게 되었다.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가 1474년(성종5년 42세) 갑오식년(甲午式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관직으로는 성균관 생원, 용성교수, 임실현감, 통훈대부을 지냈다. 임실 현감시 임실의 향학이 폐지된지 오래되어 개인적으로 비용을 부담하여 향학을 일으키고 12명의 인재를 선발하여 가르치니 여러곳의 많은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배우며 말하기를 어진군수요 선생님이라 하였다 그는 또한 재주 있는 젊은 문사들을 모아 회곡정사(유림면 유평리) 강학소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젊어 학문에 힘써고 벗을 두어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고 늙어 젊고 유능한 후학을 키우는 일이 선비의 제일의 삶이다."라고 한 것처럼 깨끗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1권의문집이 있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화산서원(華山書院)에 봉안하고 있다.
2) 임종인(林宗仁)(1478 - 1535(68세))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미원(美源), 자후(子厚)이요, 호 회암(會岩)이며 본관(本貫)은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임욱(林郁)이다 회헌 임대동에게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문장이 뛰어났다.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 유학하여 배웠으며 정여창 남효온, 김일손, 조위 정신당 제현들과 교류하였다. 1486년(연산군(燕山君) 4년 병오)에 소과 학정에 합격하고, 1498년 무오(성종19) 식년시 을과 7등으로 급제하여 한림원에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외직으로 현감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행실이 반듯하고 지식이 풍부하여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다.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산청군 모고리로 낙향하였다. 선생의 “시”중에 “귀전원시운(歸田園詩韻)”을 많은 후학들이 차운하였다. 1988년에 자손들이 집 동편에 정자을 짓고 몽호정(시(詩)중에 몽입감호설월선(夢入鑑湖雪月船) 중에 발취)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서계서원 유회가 발의하여 추모하는 계를 만들고 봄,가을로 강학하였으며 매년봄에 석채례를 봉행하고 있다. 1999년 봄 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서원에 봉안하였다.
3) 임희무(林希茂) (1527. 8.21 ~ 1678. 9. 3(51세) 조선중기의 문신. 자 언실(彦實) 호 남계(濫溪)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참봉 임각(林珏) 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 시민(時敏)의 딸이다 1527년 함양군 동쪽 서평촌(黍坪村·현재 수동면 원평리 서평)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특하여 부친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드시 우리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였다, 당곡 정희보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9년 명종4년8월초순 23세때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의 경계를 이룬 산 감악산(해발 951m)포연대(거창군 신원면 구사리)로 놀러 온 남명 조식을 만나게 된다. 이때 조식과 임희무, 박승원이 함께 찾아가 산수를 완상하고 포연에서 함께 목욕을 하면서 놀았다, 이곳에서 남명은 욕천<浴川:'냇가에 목욕하고서'>이라는 시를 남겼다. 1552년(명종 7년) 박승임, 노진, 정복현, 임희무와 강익은 문헌공 정여창의 서원을 창립하기로 논의하고 군수 서아경(徐雅敬) 등의 조력으로 공사를 추진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했다. 1558년(명종 13년 무오) 세자책봉별시 병과4에 합격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예(禮)를 다하여 부친상을 마치고 이어 벼슬길에 올랐는데, 홍문관 정언, 성균관 학론, 사헌부 지평, 장령 사만원 정언, 삼사관, 좌승지 우승지에 올랐고, 외직으로는 순창, 금산, 밀양, 울산부사와 능주목사의 오읍수재(五邑守宰)를 역임하였다. 능주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내려와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남명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노진, 이후백, 강익, 오건등과 학문을 연마하였던 것이다. 낙향 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서평에 오두막집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지도 하였다, 이곳을 다시 후손들이 재건립하여 “연산정사(蓮山精舍)”이라 하였다.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이 되면 두 동생(택민, 일민)을 데리고 마을 뒷산에 올라 대궐을 바라보면서 해가 지면 내려오곤 하였다, 후손들이 그곳을 망북대라하여 표석을 세우고 그앞에 정자를 지어 망북정이라 명하였다. 선생의 문집은 한 권의 문집 남계실기(시20여수, 행장 1마리)가 있는데 여러 친한 벗들의 문집에 남아있는 기록들이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서원에 봉안하고 있다.
대문인 심원문(尋源門), 강당인 경회당(景晦堂)(정면2칸(방.대청), 측면1칸(방), 재사(齋舍)인 모의재(慕義齋), 헌함(軒檻)인 탁청헌(濯淸軒), 정면 3칸 규모의 사우인 상현사, 신문에는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어며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주임씨 명시선집 (유명 하신분)
임광호추천 0조회 9822.01.11 18:08
임대동(林大仝, 1432~1503) 호: 회헌(晦軒). 경남 함양 출생(14세).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 용성 교수(敎授), 임실현감(任實縣監), 통훈대부(通訓大夫). 어려서 효성스러웠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어 홀로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42세에 사마시(司馬試) 합격. 임실현감을 지내며 선정을 베푸신 뒤에 번잡하고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조종에 나가기보다는 학문으로써 도를 알고 그것을 따르려는 철학가이셨다. 유림면 화촌리에 회곡정사(晦谷精舍)를 지어 후학들을 강학(講學)하고 동료들과 유회(儒會)하셨다. 『회헌실기(晦軒實記)』 1권 있으며 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화산서원(華山書院) 상현사(尙賢祀)에 배향되셨다.
임종인(林宗仁, 1468~1535) 호: 회암(會巖). 경남 산청 출생(15세). 성종 17년(1486)에 병오식년(丙午式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진사(進士)가 되셨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식년시(戊午式年試) 문과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으로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심에 의표(儀表)가 밝고 논의(論意)가 높고 바름으로 어려서 사람이 경중(敬重)함을 받으셨다.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산청군 모고리로 낙향. ‘귀전원시’, ‘자경시’ 등이 있다. 후손들이 몽호정(夢湖亭)을 지어 숭배하였고 『회암실기(會巖實記)』 1권 등이 있다. 경남 함양 화산서원(華山書院) 상현사(尙賢祀)에 배향되셨다.
임희무(林希茂, 1527~1578) 호: 남계(灆溪). 경남 함양 출생(17세). 명종 13년(1558) 세자책봉 무오별시(戊午別試) 병과(丙科)에 제4위로 급제(及第). 내직(內職)으로 승정원(承政院), 성균관(成均館),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좌ㆍ우승지(左⸳右承旨) 외직(外職)으로 횡성현감(橫城縣監), 금산(錦山), 순창(淳昌), 울산(蔚山), 능주(綾州) 목사(牧使) 등 오읍(五邑) 수령(守令) 등을 역임하셨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인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서평마을로 이거하여 오두막집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가르치셨다. 이곳에 후손들이 재건립하여 연산정사(蓮山精舍)라 하였고, 『남계집(灆溪集)』, 『하제귀시음(下第歸時吟)』, 『석문유회(石門有懷)』, 『화개도중(花開途中)』 등이 있다. 경남 함양 화산서원(華山書院) 상현사(尙賢祀)에 배향되셨다.
임 서(林㥠, 1570~1624) 호: 석촌(石村). 전남 나주 출생(17세). 1590년에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에 기증효(奇曾孝)와 같이 의곡(義穀) 수백 석을 수집하고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군산포에서 의주에 피난한 왕에게 보내면서 서해신(西海神)에 제사를 지내셨다. 1599년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 주서(注書)가 된 뒤 봉상사직장(奉常寺直長), 공조좌랑(工曹佐郎), 전라도안핵어사(全羅道按覈御史), 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 그 후 봉산군수(鳳山郡守), 함양군수(咸陽郡守) 등을 역임하셨으나 대북의 전횡을 피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1623년 정유년 병화로 소실된 영모정(永慕亭)을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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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군 화산서원 숙원사업 '묘정비' 건립
양대규
승인 2022.07.11 09:58
7월9일 경남 함양군 수동면에서 제막식 개최 1966년 임씨 회헌공 문중서 ‘화산사’ 창건 함양군에 기부채납, '지방문화유산'으로 일반에 개방
제막식 환영사에서 임채중 화산서원 원장은 “서원의 숙원 사업인 묘정비가 건립되어 기쁘다. 건립비 마련에 협조해 주신 함양군 당국과 나주임씨 종원들 그리고 지역 주민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진병영 함양군수는 “우리 고장에 화산서원이 있다는 것은 우리 함양의 자랑이자 영광이다. 늦었지만 묘정비 제막식을 군민의 이름으로 축하한다. 앞으로 더 관심을 갖고 지방 문화산으로 가꾸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임춘식 나주임씨 중앙화수회장은 “우리나라에는 총 333개 성씨가 있는데, 그중 나주임씨가 33위 그리고 경향 각지에 23만여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특히 전남 나주가 본거지인데도 경상도 일원에 약 5만여명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건립된 화산서원 묘정비 모습(촬영 임점택)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교육 기관이다. 학문과 덕행이 훌륭한 분을 사후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성현들을 모범으로 삼아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과 교화의 기능을 하던 곳이다. 여기 화산서원은 회헌(晦軒) 임대동(林大仝) 선생을 봉안하고 매년 춘추 중정일(中丁日)에 향례(享禮)를 모시는 곳인데, 후에 회암 임종인(林宗仁)과 남계 임희무(林希茂) 선생을 봉안 한 곳이다.
임대동(1432~1503)은 1474년 갑오식년(甲午式年)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용성 교수, 임실 현감을 역임하고 유림면 그믐골에 회곡정사 강학소를 짓고 후학을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했으며, 임종인(1468~1535)은 1486년 병오식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 1498년 무오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성균관 학정으로서 한림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임희무(1527~1578)는 1558년 무오별시에 급제, 승정원 주서, 홍문관 정언, 성균관 학유, 사헌부 지평과 장령, 사간원 정언, 좌·우승지, 외직으로 순창, 밀양, 금산, 울산 부사, 능주 목사 등 오읍수령(五邑守令)을 역임했다.
화산서원 설립 경위는 1966년에 유림의 반론으로 임씨(林氏)의 회헌공 문중에서 자금을 마련하여 ‘화산사(華山祠)’를 창건했으며 1988년에 '화산서원'으로 이름했으며 2014년에는 경상남도의 보조금으로 개보수했고, 나주임씨 문중에서는 화산서원을 함양군에 기부채납해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어 일반인들을 위해 개방했으나 서원에는 묘정비가 없어 문중의 임원들과 유림이 논의해 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