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孟寶 1531 1593 晉州 大哉 愚溪
院長 河孟寶 字大哉晋陽人 宣祖壬午任 宣祖癸巳遞 咸陽愚洞
典穀有司 朴泓 字景涵 宣祖壬午任 宣祖癸未遞
有司 禹致績 字仲平丹陽人 宣祖乙酉任 宣祖己丑遞 咸陽山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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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5집(열녀도 권5,6,7,8)
>동국신속삼강행실 열녀도 제8권 주해
>열녀도 제8권
>박씨사적(朴氏死賊)
朴氏死賊
䖏女朴氏 咸陽郡人 士人朴泓之女 丁酉倭亂其父戒之曰 不幸遇賊不可污辱未 幾爲賊所執 大呼罵賊而死 今上朝㫌門
Ⓒ 필자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쳐녀 박시 함양군 사이니 션 박홍의 이라 뎡유왜란의 그 아비 경계야 닐오 블여 도적을 만나도 더러이디 몯 거시라 더니 이윽고 도적의 잡피인 배 되여 크게 브지져 도적을 짓고 주그니라 금샹됴의 졍문시니라
Ⓒ 필자 | 이성 / 1617년(광해군 9)
박씨사적 - 박씨가 적에게 죽다
처녀 박씨는 함양군 사람이니, 선비 박홍(朴泓)의 딸이다. 정유왜란에 그 아버지가 경계하여 이르되, 불행하여 도적을 만나도 더럽히지 못할 것이라 하더니, 이윽고 도적에게 잡힌 바가 되어, 크게 부르짖어 도적을 꾸짖고 죽었다. 지금의 조정에서 정문을 세웠다.
Ⓒ 역자 | 이상규 / 2015년 10월 9일
브지져 : 부르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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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길(禹熙吉) [진사] 광해(光海) 4년(1612)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18위(23/100)
[부(父)] 성명 : 우치적(禹致績)
『임자증생원진사방(壬子增生員進士榜)』(『조선시대 생진시방목(朝鮮時代生進試榜目)』 5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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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灘先生文集 松灘集卷之一 詩七言
輓禹惠甫
同庚同業又同鄕執袂磨肩七十强意外風波雖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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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胸中情分兩難忘猿腸頻斷何能久鷄夢無端遽 爾亡却羨決疣歸汗漫百年南面樂無央
鄭弘緖 1571 1648 河東 克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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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적(禹致績)
[무과] 선조(宣祖) 16년(1583) 계미(癸未)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14위(40/101)
자(字) 여가(汝嘉)
생년 경신(庚申) 1560년 (명종 15)
합격연령 24세
본인본관 단양(丹陽)
거주지 한성([京])
선발인원 101명 [甲1‧乙25‧丙75]
전력 솔정(率丁)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부(父)]
성명 : 우필성(禹弼成)
품계 : 승훈랑(承訓郞)
관직 : 행중림도찰방(行重林道察訪)
[안항(鴈行)]
형(兄) : 우치근(禹致勤)
형(兄) : 우치검(禹致儉)
[출전]『만력11년계미4월초4일문[무]과방목(萬曆十一年癸未四月初四日文[武]科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TK 2291.7 1746(1549)])
우치적(禹致績) 1560년(명종 15)~1628년(인조 6)
본관은 단양(丹陽). 경력 삼도수군통제사, 경성부사, 평안도병마절도사
아버지는 이천부사 우필성(禹弼成)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무관직을 거쳐 1592년(선조 25)에 경상우수영 소속인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가 되었다.
그 해 4월에 왜선이 경상도해안의 각 수군진포(水軍鎭浦)를 급습하자, 수사인 원균(元均)의 지휘하에 적선 10여 척을 쳐부수는 데 공을 세웠다. 5월 초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함대를 이끌고 합동작전을 하자, 옥포만호 이운룡(李雲龍)과 함께 선봉에서 연합함대를 인도하였다.
옥포·적진포·합포 해전 때에는, 맨 먼저 왜장이 탄 적선에 뛰어올라가 적을 죽이고 그 배를 빼앗았다. 그 뒤 많은 해전에서 원균의 돌격전법의 선봉장으로서 언제나 적선에 올라 많은 적을 죽이고, 적에게 잡혀 있던 우리 백성들을 구해내었다. 1596년에 순천부사가 되었으며, 1598년에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데 매우 공이 컸다.
이 때 적장 한명이 큰 활을 휘어잡고 누선(樓船) 위에 높이 앉아서 독전하는 것을 보고 쏘아죽였다. 1601년 충청수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간원(諫院)으로부터 불의를 많이 행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05년 북도우후(北道虞候)에 이어 경흥부사·회령부사 등을 거쳤다. 1611년(광해군 3)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1613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면서 함경·강원도의 순변사(巡邊使)가 되었다.
그 뒤 경성부사를 거쳐 1619년 평안도병마절도사, 1625년(인조 3)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28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그곳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오산집(五山集)
집필자 집필 (1997년)이재범
1 우중평(禹仲平) 본관은 단양(丹陽). 우치적(禹致績)의 자(字). 고대일록(孤臺日錄)
2 우치적(禹致績) ?~?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산청(山淸)에 살았다. 오건의 생질(甥姪)이다. 덕계집(德溪集)
3 우치적(禹致績) ?~162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단양(丹陽). 고대일록(孤臺日錄)
고대일록 제1권 / 계사(癸巳, 1593) / 윤11월
○ 윤11월〔閏十一月〕1일 신사(辛巳)
○ 윤11월 2일 임오(壬午)
우혜보(禹惠甫)가 나를 찾아왔다. 그를 통해 명나라 병사(兵士)인 왕계영(王繼榮)이 사람들의 관상을 잘 본다는 것을 들었다. [왕계영은 참군(參軍)이다.]
고대일록 제4권 / 병오(丙午, 1606) / 가을 9월
○ 9월 6일 임신(壬申)
향현사(鄕賢祠) 원장(院長)을 처음에는 임제민(林濟民)으로 충임(充任)하였다가, 뒤에 다시 하제(河悌)로 선출했다. 그런데 우전탕(禹傳湯)의 아들을 뽑아서 부역을 면하게 하려고 양현사를 맡겼다고 한다. ○ 또 우도(右道)의 여러 읍에 통문을 보내고, 내암(來庵)ㆍ한강(寒岡) 두 선생께 글을 올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 16일에 한 고을 사람이 모두 향교에 모여, 합천(陜川)으로 통문을 보냈다는 소문을 들었다. 비록 일의 전체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필시 괴험(恠險)한 설을 지나치게 만들어 능멸하고 업신여긴 죄를 교묘하게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인(少人)의 마음 씀이 귀신과 물여우〔鬼蜮〕보다 더 심하니, 한탄할 만하다. 하황(河愰)이 앞장서서 떠들고,
이유(李維)ㆍ
정옥(鄭沃)ㆍ
우희길(禹熙吉)
이 뒤따라서 일을 성사시켰다. 다만 서남(西南)에 사는 20여 명이 모였다.
秋九月
丁卯朔姜克修來訪聞許多說話林克新亦來
五日辛未趙守一來訪○六日壬申
鄕賢祠院長初以林濟民充任後以 河悌出焉而欲捧禹傳湯之子免役搆祠云云○又聞通文于右道列邑呈書于來庵寒岡兩先生云云○聞十六日一鄕人齊會于校中 通文于陜川云云雖未詳顚末必極恠險之說而欲巧避凌侮之罪少人之情狀甚於鬼蜮可歎
河愰爲首唱李維鄭沃禹熙吉從而成之只會 西南居二十餘人矣
○ 9월 22일 무자(戊子)
우혜보(禹惠甫)
의 편지에 답하였다. 편지 내용의 몇 마디 말에서 마침내 저 사람의 분노를 찾을 수 있었다. ○ 선생께서 18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에 몸소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퍼할 만하다.
二日戊子答禹惠甫書書中多小說適足以逢彼之怒也
○ 9월 29일 을미(乙未)
이유(李維)ㆍ정옥(鄭沃)이 논박을 받아 교체되었다. 이유의 노망(老妄)은 필시 광질(狂疾)이 발작한 것이니, 가소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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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司幼學禹致績 仲平
乙酉(1585,선조18)三月初十日代盧受任己丑(1589,선조22)丁外喪遆
院貮忠義衛趙安性
己丑(1589,선조22)八月二十日代禹受任峕新差鄕任未出而僉議謂院有司不可人人而授之遂稟于金城主潤國竟得蒙許九月初一日始行任癸巳(1593,선조26)二月 日病終于家
고대일록 제1권 / 계사(癸巳, 1593) / 봄 2월
○ 2월 25일 경술(庚戌)
조사초(趙士初)가 죽었다는 것을 들었다. 슬픈 일이다.
오건(吳健) 1521년(중종 16)~1574년(선조 7)
德溪先生文集卷之七 / 外集 / 行錄
禹氏姊。盡收家中器用財賄移其家。祭奠之需。或至匱乏。而無毫髮幾微見於辭色。益篤友愛。終始無虧。官饋公俸。必以均分。每時節日。親進酒饌。怡愉和樂。不忍暫離。姊亦感悔。及先生之沒。哀痛幾絶。
德溪先生文集 德溪先生年譜卷之一
四十四年乙丑 先生四十五歲
正月。除學錄管中學。
八月。贈都著作詩。
承拜南冥先生書。吳俊俔倬禹致績奉書來。以疾不赴期爲謝。 南冥先生來臨。與都著作,鄭梅村。陪留數日。
명종 20 1565 을축 嘉靖 44 45 1월, 學錄이 되다. ○ 鄭琢이 내방하다. ○ 4월, 花潭 徐敬德의 舊居를 방문하다. ○ 9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환향하다. ○ 換鵝亭을 유람하다. ○ 南冥先生과 智谷寺에서 만나다. ○ 11월, 玉溪 盧禛과 藍溪書院에서 만나 강학하다.
養性軒先生實記 都希齡 (1539~1566) 子壽(자수) 養性軒(양성헌) 星山(성산)
養性軒先生實記 卷之二○附錄 摭遺
德溪吳先生日記
甲子十月日與都正字希齡約爲洛行二十 一日宿羅村養性軒二十二日與子壽偕行
十一月余與子壽將還 鄕張奉事以吉鄭博士琢持酒肴來餞田克 禮李景顔安克誠卞希謙希淳柳思正李天 瑞李潑李浩來餞子壽出能字詠絶句諸君 子各酬唱余又用前韻勉示諸君子 詩皆在原集 十二日子壽先詣承政院呈辭余與從弟俔 姪禹致績發南行歷見柳學諭希霖饋酒敍 別行至漢江鄭博士琢大張酒肴繫船以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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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宋上舍嶪追圭檣頭列坐各行酒鄭子精
居昌郡誌 / 宦蹟
李魯 癸巳來是時賊鋒彌滿朝命不至觀察使以假守差遣故也 禹致績 癸巳(1593,선조26)來甲午去 朴廷琬 甲午來乙未去
禹致績 15?? 1628 丹陽
禹致績 15?? 1628 督府忠義傳 傳 成海應 硏經齋全集
1 우중평(禹仲平) 본관은 단양(丹陽). 우치적(禹致績)의 자(字). 고대일록(孤臺日錄)
고대일록 제2권 / 갑오(甲午, 1594) / 여름 4월
○ 4월 2일 경술(庚戌)
길에서 우중평(禹仲平)ㆍ노경승(盧景承)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2 우치적(禹致績) ?~?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산청(山淸)에 살았다. 오건의 생질(甥姪)이다. 덕계집(德溪集)
덕계집 연보 제1권 / 44년(1565) 을축 선생 45세
○ 도 저작ㆍ정매촌(鄭梅村)과 함께 지곡사(智谷寺)에서 남명 선생을 기다렸다. - 남명 선생이 이날 약속을 했으나 도착하지 않자 주무숙(周茂叔)의 ‘정(亭)’ 자 운을 써서 우러러 기다리는 뜻을 담아 “한 해가 저물 적에 훌륭한 분 기다리나니, 찬비가 선생님의 옷을 적실까 도리어 걱정되네. 구름 깊은 돌길에 이끼가 미끄러워 늦으실까, 그래도 도천(桃川)을 향해 사립문에 기대섰네.”라고 읊었다. 남명 선생의 서신을 받았다. 오준(吳俊)ㆍ오현(吳俔)ㆍ오탁(吳倬)ㆍ우치적(禹致績)이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병환으로 약속에 맞춰 오지 못했다고 사과하셨다. - 남명 선생이 오셨다. 도 저작ㆍ정매촌과 함께 선생을 모시고 며칠을 지냈다.
3 우치적(禹致績) ?~162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단양(丹陽). 고대일록(孤臺日錄)
고대일록 제1권 / 계사(癸巳, 1593) / 겨울 10월
○ 10월 7일 정해(丁亥)
거창 군수(居昌郡守) 우치적(禹致績)이 부임했다. ○ 윤여술(尹汝述)과 반나절 동안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孤臺日錄 孤臺公日記卷之一 萬曆壬辰 冬十月
七日丁亥居昌倅禹致績到任○尹汝述相話半日
1552~1913년 부보록(裒寶錄)
統制使禹致績 白米五石
광해군일기[중초본] 15권, 광해 3년1611 6월 3일 辛未 1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
유색(柳穡)을 사간으로, 심광세(沈光世)를 정언으로, 신경락(申景洛)을 장령으로, 우치적(禹治績)을 통제사로 삼았다.
○辛亥六月初三日辛未有政。 以柳穡爲司諫, 沈光世爲正言, 申景洛爲掌令, 禹致績爲統制使。
광해군일기[중초본] 75권, 광해 6년1614 2월 18일 경자 3번째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비변사가 아뢰기를,
"감·병·수사(監兵水使)는 각각 정해진 임기가 있어서 임기가 끝난 뒤에는 비록 그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호령을 시행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교대하는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반드시 업무가 적체되니 진실로 작은 우려가 아닙니다. 공홍 감사(公洪監司) 이정신(李廷臣)과 통제사(統制使) 우치적(禹致績), 경상우 병사(慶尙右兵使) 윤선정(尹先正)과 좌수사(左水使) 이염(李琰), 경기 수사 유지신(柳止信)은 모두 임기가 지났습니다. 교대자를 천거한 단자가 들어가게 되면 체직될 사람은 단지 스스로 행장을 꾸려 교대할 신관이 오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뿐입니다....더구나 통제사는 삼도(三道)를 겸하여 관리하므로 그 임무가 더욱 중합니다. 그런데 재임한 후로 또 일년이 지났습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적당한 사람을 차출하도록 하라."
하였다.
○備邊司啓曰: "監兵水使各有箇滿之規, 箇滿之後, 則身雖在任, 號令不行。 交代期待之際, 必致機務積滯, 誠非細慮。 公洪監司李廷臣、統制使禹致績、慶尙右兵使尹先正、左水使李琰、京畿水使柳止信, 俱經箇滿。 其交代薦望已入, 則應遞之人, 只自治行, 坐待交代新官而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