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유기-==조낙언 임신년(1872년, 고종 9년) 음력 8월 나는 두류산 유람길에 올랐다. 처중(處重) 김한영(金翰永) 군, 원실(元實) 송기필(宋基弼) 군과 더불어 20일에 산천재(山天齋) 에 모여 함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16일에 출발하였다. 황규석(黃珪錫) 군이 함께 했다. 행장을 가볍게 하고 길에 올라 말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였다. 가을날의 기운이 맑고 들판은 널찍하니 내 마음이 어느덧 이미 반야봉(般若峰)이나 천왕봉(天王峰) 위에 있는 듯하였다. 채미정에서 점심을 먹었고 어스름이 내릴 즈음에 동산점(東山店)에 투숙하였다. 17일에,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진주읍에 닿아서 여관에서 잤다. 18일에, 아침을 먹은 후 출발하여 소남(邵南) 조응원(趙應元) 씨를 방문하였으나, 응원 씨는 출타하여 집에 없었다. 그 동생 아무개가 굳이 붙잡으므로 도리상 거기서 자고 다음날 아침을 먹은 후 출발했다. 사월(沙月)에 들러 영공(令公) 하겸락(河兼洛)을 방문하여 점심을 먹은 후 덕문(德門)에 도착해서 들어갈 때에는 장차 날이 저물려 하고 있었다. 산천재에 들어가니 처중 군과 원실 군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마침내 서로 더불어 네 성현의 유상(遺像)에 배알하니, 이것은 조식 선생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조씨 두 사람이 와서 만났다. 21일에, 출발하여 덕천원에 이르러서 세심정(洗心亭)에 올랐다. 잠시 동안 머물렀다가 인하여 대포(大浦)를 향하여 가다가 형칠(衡七) 조원순(曺垣淳)을 방문하여 머물러 잤다. 22일에, 형칠의 집에 말을 부탁하여 짧은 지팡이를 쥐고 형칠을 따라 면상촌에 들렀다. 옛날 오덕계가 남명 선생을 가서 배알하니, 돌아갈 때에 선생께서 20리 밖까지 나와 전별연을 해 주시므로 오덕계가 취하여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말에서 떨어져 그 얼굴을 상하였으므로 뒷날 사람들이 이 마을의 이름을 ‘면상리’라고 하였다. 돌아보며 배회하다 보니 당시의 풍취(風趣)를 상상할 만하다. 형칠과 이별하고 앞으로 나아가 평촌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는 장차 대원암(大源庵)을 향하여 가는데 좌우에 울창한 숲, 커다란 대나무, 위태로운 바위, 커다란 돌이 있었다. 한 줄기 푸른 시냇물이 돌 사이에서 흘러나오는데, 혹 느리게 혹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혹 모이기도 혹 여울을 이루기도 하면서 거센 소리를 내기도 옥 같은 소리를 내기도 시원한 소리를 내기도 하는 소리가 귀에 그치지 않았다. 다섯 사람이 혹 앞서기도 혹 뒤서기도 하며 가다가 앉을 만한 곳을 만나면 문득 앉기도 하면서 절에 도착하니 이미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당(堂)에 올라 나란히 앉으니 절의 승려가 와서 예를 올리고 저녁 식사를 공양하였다. 식사 후에는 몹시 피곤했기 때문에 잠자리에 들었다. 23일에, 일찍 일어나 사찰의 예불장소나 누대를 돌아보았는데 자못 정교하였다. 불교는 자비를 주로 삼는다는데 이 같은 사치 비용을 아끼지 않아서 사람의 힘을 번거롭게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밥을 먹은 후에 인하여 산에 오르려 하니 어떤 한 늙은 승려가 맞아하여 말하기를, “아래 세상은 매우 더운 때이지만 산 위에는 눈이 내리는 날씨와 비슷하니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도구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김군이 말하기를, “내가 갖추었소. 다만 길을 안내할 승려 하나를 얻으면 족하오.” 라고 하였다. 마침내 행장을 꾸려 출발하였다. 정희라는 이름의 승려가 앞에서 인도하여 10여 리를 가니 ‘유두류(游頭流)’라는 마을이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마을의 이름이 우연이 아니니, 이 산을 유람하는 자라면 이 마을을 유람한다는 뜻에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마을을 지나니 나무가 울창했고 너럭바위의 기세가 험하였다. 다섯 사람이 서로 밀고 서로 잡아당겨주면서 나아가는 때에 아침 안개가 비로소 그치니 햇빛이 더욱 선명하여 온 골짜기의 단풍이 마치 미끈한 기름이나 아름다운 노을과 같았다. 그늘 속에서 돌아보면 마치 비단 장막에 있는 것 같았다. 고개 하나를 넘으니 바위가 우뚝 솟은 것이 수십 길은 될 듯 하였으며 아래는 조금 평평하고 넓어 수백 명을 수용할 만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곳은 해가 부딪힌 옛 터입니다. 상고시대 홍수가 날 때에 여기에서 서로 바뀌었답니다.” 라고 하였으나 그 말이 허탄해서 기록할 수 없다. 돌비탈 길을 따라 칡덩굴을 잡고서 10여 리를 가서야 비로소 산봉우리에 도달했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니 사방에 끝이 없어 마치 높은 듯도 하고 낮은 듯도 하며 큰 것도 같고 작은 것도 같고 먼 것도 가까운 것도 같았다. 울창한 산림이 가득한 것이 모두 내 눈 아래에 있었다. 이때에 내가 탄식하기를, “우리들이 산에 오른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던가? 산은 험하고도 높은데 우리의 가슴은 옛날과 똑같이 아랫 사람을 욕보이는구나. 산은 아득히 심원한데 우리의 지혜는 전과 같이 이렇게 얕구나. 산은 높고도 큰데 우리의 규모는 옛날과 똑같이 이렇게 협소하구나. 여기에 오른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라고 하니 제군들이 서로 보며 탄식하기를 한참 동안이나 하였다. 승려가 종 둘을 데리고 봉우리 아래 움푹한 곳으로 나아가 천막을 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 밤은 날씨가 맑고 달도 밝았으며, 산의 모양은 맑고 엄숙하여 속됨을 끊은 듯 하였다. 추위만이 차가워 마치 스스로 지탱하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제군들이 함께 이야기도 하고 눕기도 하였으나 누운 이불에 따뜻한 기운이 없었다. 조금 지난 후에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는 중에, 사방에 점점 붉은 기운이 도는 것이 마치 반지 같더니 조금 후에 한 줄기 붉은 기운이 동쪽으로부터 허공에 떠올라 하늘에 걸쳐있었다. 한참 후에 또 한 줄기 검은 빛이 붉은 기운 속에서부터 뭉치더니 또 한참 후에 한 줄기 붉은 빛이 검은 기운 가운데로부터 솟아 나왔다. 언뜻 길게 또 언뜻 둥글게 되더니 잠깐 사이에 만물이 변하였다. 조금 후에는 갑자기 아래에서 위로 떠받들듯 한 물건이 나오는데 마치 금쟁반인 듯 하고 또 덮개 같기도 했다. 조금 후에 하나의 둥글고도 붉은 해가 빛나며 빛을 퍼뜨리는데 마치 구르는 구슬인 듯 조금도 멈춤이 없었다. 한참 후에 다시 안정된 빛이 눈에 비취니 똑바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산 아래는 아직도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 변화하는 모양이 매우 기이하여 형용할 수가 없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마침내 어제 온 길을 따라 돌아와서 대원(大源)에 이르렀다. 다리가 덧나 갈 수 없으므로 인하여 그곳에서 잤다. 25일에야 산을 나서서 다시 산천재에서 잤다. 26일에 김 군, 송 군 두 벗과 이별하고 황 군하고 같이 돌아왔다. ++++++++++++++++++++++++++++++++++++++++++++++++++++++++++++++++++++++++++++++++++++++++++++++++ 방장유록===이동항 나는 일찍이 삼동(三洞)을 두루 다니면서 그 곳 산수(山水)에 머물러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즐긴 일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 되어 옛 자취가 묘연하니, 마치 은하에서 뱃놀이를 한 듯 가물가물하여 다시 다녀보고 싶었었다. 게다가 평생에 바라던 방장산(方丈山)임에랴! 경술년(1790년, 정조 15년) 3월 28일에 경안(景顔) 이헌우(李憲愚)와 사원(士源) 박성수(朴聖洙), 사정(士貞) 조택규(趙宅奎)와 삼종제 동연(東淵) 성거(聖居), 그 아우 진여(進汝) 동급(東汲)과 함께 출발하였다. 유촌(柳村)에 이르렀더니, 광원(光遠) 정동박(鄭東璞)이 늙고 병들어서 함께 할 수 없음을 자못 아쉽다 하였다. 29일. 또한 왕지촌(往枝村)에 사는 친구 자능(子能) 노계심(盧啓心)이 왔고, 오후에는 김치강(金致康)이 피리 부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강대(岡臺)에 올랐다. 피리소리가 청아해서 숲속을 뚫고 골짜기 전체에 파문이 일듯이 울려 퍼졌다. 이날 밤에는 모고재(慕古齋)에서 잤다. 30일. 회연(檜淵) 에 내려가서 옥설헌(玉雪軒)에서 잤다. 4월 1일. 능중(能仲) 최극(崔<山/克>)이 소를 타고 와서 점필재(佔畢齋) 선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주었다. 초2일. 화숙(華叔) 장동윤(張東潤)이 옥산(玉山)에서부터 뒤쫓아 오다가 바로 실항(失項)으로 향해 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사직(士直) 윤억(尹檍)에게 길 약속을 하여, 함양(咸陽)의 회능(晦能) 노장룡(盧章龍)과 단계(丹溪)의 태보(泰甫) 권필충(權必忠)에게 편지를 써서 사직에게 전해 주도록 하였다. 그것은 회능이 때마침 방장산의 주인 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 태보는 일찍이 방장산 여행을 함께 가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초3일. 유휘(幼輝) 정동담(鄭東<王/詹>) 씨와 능약(能若)이 흡사 약속이나 한 듯이 뒤따라 왔다. 홍류동(紅流洞)에 이르러 돌 위에 죽 늘어 앉아 있는데, 정숙(貞叔) 정열(鄭烈)이 풍성한 찬(饌)을 두 합이나 준비해 보내서 먹었다. 그리고 난 뒤에 천천히 골짜기 입구로 올라갔는데 나무숲 그늘에 길이 좁았다. 철쭉이 온 산을 곱게 수놓고 있었다. 물소리와 새소리들이 귀에 가득하였다. 한가로이 즐겁게 광풍뢰(光風瀨)와 음풍뢰(吟風瀨), 취적봉(吹笛峯), 자필암(泚筆巖), 회선암(會仙巖)을 구경하면서 돌에다 시를 지어 새기기도 하였다. 낙화담(落花潭)과 첩석대(疊石臺)는 특히 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명경당(明鏡堂)에서 잤다. 초4일. 학사대(學士臺)에 올라가 제법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이윽고 고운 선생의 영당(影堂)과 염불암(念佛庵), 희랑대(希朗臺), 지족암(知足庵), 백련암(白蓮庵), 국일암(國一庵)을 차례로 구경하였다. 나이 40여세로 지긋해 보이는 어떤 한 여자가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잘 추었다. 달성부(達城府)의 관기(官妓)였다가 나이가 많아 그만둔 여자라 하는데, 경안(景顔)과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춤이 끝난 뒤에 옛이야기 꽃을 피웠다. 갑자기 백낙천(白樂天)이 심양강(尋陽江)에서 비파행(琵琶行)을 지었다는 구강부(九江賦)를 듣는 듯 했다. 일찍이 염불암(念佛庵)의 문설주 위에 중국 명나라 사람 이종성(李宗誠)이 선장로(善長老)에게 준 시판(詩板)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시커멓게 그을리고 종이가 일어나고 너덜너덜해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거의 읽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백련암의 승려 종장로(宗長老)라는 이는 글도 잘 짓고, 재주와 덕이 뛰어났으며, 옛일들에 관하여서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시판을 손질하여 옛것을 보존해 둘 것을 말했다. 초5일. 잠시 비가 내리다가 곧 날씨가 맑아졌다. 홍하문(紅霞門)을 나와 술파는 집에 이르니, 화숙(華叔) 장동윤(張東潤)의 친척인 승려가 길바닥에서나마 음식대접을 하겠다고 해서 술과 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마셨다. 그 뒤에 다시 걸어서 마정(馬頂)으로 내려가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능중(能仲)과 헤어졌다. 능중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여 회연(檜淵)에서부터 산속으로 같이 들어왔다가 중로에 서로 헤어져 작별하게 된 것이다. 내가 시를 지어, 立馬紅霞南北路(입마홍하남북로) 홍하에 말을 세우니 길은 남북으로 나있고 武陵橋外獨歸人(무릉교외독귀인) 무릉교 밖에 홀로 돌아가는 외로운 사람이로다. 라고 했는데 이는 곧 석별의 아쉬움을 나타낸 것이다. 드디어 마령(馬嶺)을 넘어 어떨 때에는 걷기도 하고, 또 어떨 때에는 말을 타기도 하고, 또 나무숲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물가에서 앉아 놀기도 하느라 오래 지체하였다. 갈 길은 아득히 먼데 해는 이미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함께 떠난 사람들은 실항(失項)으로 갈 것을 재촉하였으나, 나는 사원(士源) 박성수(朴聖洙)와 함께 낙모대(落帽臺)의 옛 터 위로 올라가서 동계(桐溪)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지극한 마음을 다 하였다. 급히 기동(基洞)으로 내려와서 장중(章仲) 정광현(鄭光顯)을 찾아갔는데, 장중은 정 동계의 후손이었다. 같이 학동(鶴洞)으로 들어갔더니, 그 선대 어른들의 옛 유품들을 꺼내 보여 주었다. 초6일. 살피현(薩皮峴)을 넘어 석간정(石澗亭)에 이르렀다. 햇살이 뜨거워 땀이 나서 옷이 젖고, 정신과 기운이 노곤하여졌다. 사원(士源)과 함께 나무 그늘에서 잠시 잠을 잔 뒤에 실항의 사직(士直) 윤억(尹檍)의 집으로 들어갔다. 오후에 심소정(心蘇亭)으로 가니, 정자는 영계(瀯溪)의 북쪽 언덕의 비탈진 낭떠러지 위에 있었다.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널찍한 큰 들판이 있었고, 부성(府城)의 많은 마을들과 흐릿한 안개 속 나무숲, 수많은 먼 푸르스름한 산봉우리들이 각각 기묘한 경치를 뽐내고 있었다. 초7일. 성교(聖郊) 윤동야(尹東野)가 율시(律詩)와 절구(絶句)와 서문(序文), 기문(記文)과 잡문(雜文) 수십 편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다. 글의 내용과 형식이 격이 있고, 단아하며 고문(古文)의 체재를 갖추어 읽을 만하였다. 아침을 먹고 나니, 장중 정광현이 왔다. 오후에 다시 심소정에 올라가서 술을 마시고 자리가 끝난 뒤에 길을 출발하였다. 거창현의 좁다란 시내를 끼고 서쪽으로 가다가 꼬부라져서 산문으로 들어갈 때,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있었다. 푸른 산 빛은 허공에 가득하면서 시원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덕유산 전체와 금원산(金猿山)의 모습이 갑자기 확 터지듯 시야에 들어왔다. 신혼(神魂)이 십리 긴 길을 바람에 날리게 하듯이 나도 모르게 어느 사이엔가 영승촌(迎勝村) 앞에 닿아 있었다. 사락정(四樂亭)에 올랐는데, 주인 전건중(全建仲)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우리 형제와 경안(景顔)은 그 집에서 자고, 다른 일행은 전부 상사 강지(强之) 윤면흠(尹勉欽)의 집에 들어가 잤다. 초8일. 비가 왔다. 강지의 집에 모여 있는데, 한낮이 되자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 진동암(鎭洞巖)으로 갔다. 내가 옛날에 놀러 왔을 때에 주인이었던 신명열(愼命說)의 아들인 가묵(可默)과 가목(可穆)이 다정하게 맞이했는데 아주 친절하였다. 이들은 학문이 넓고, 행실이 돈독하여 삼동(三洞)의 인사들이 모두 받들면서 여러 면으로 따르는데, 동구 밖까지 나와 맞이해 주고 바위 위에 자리를 깔고 술대접을 해주어서 두어배 돌려 마셨다. 장중(章仲)은 일행을 데리고 서말촌(西末村)의 정광석(鄭光碩)의 집으로 올라갔다. 나와 유휘(幼輝) 씨는 신명열의 집으로 가서 미수옹(眉叟翁)의 옛 거문고를 구경하였다. 이 거문고는 처음에는 월성(月城) 사람이 가지고 있던 것인데, 거의 부엌 아궁이에 땔감으로 쓸 뻔한 것을 거지가 훔쳐다가 산골짜기에 버려두었다. 그런데 또 근래에 어떤 무식한 승려가 이를 거의 부수었었는데, 주인이 그 거문고가 아까워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아교풀로 붙여서 이제는 거의 본 모습을 찾은 것이었다. 초9일. 거차촌(居次村)을 지나서 척수대(滌愁臺)에서 일행이 서로 만났는데, 이곳은 수승대(搜勝臺)에서 단지 한 물굽이만큼 떨어졌을 뿐이다. 흰 돌과 맑은 여울이 소나무 숲 사이로 어른거리는데, 일행에게 길을 재촉하여 황산촌(黃山村)의 관수루(觀水樓)를 지나 수승대에 올랐다. 여러 해 전에 본 대(臺)와 비교해 보니, 대(臺)는 훨씬 높아졌고, 물은 보다 깊어졌으며, 돌들도 한층 더 희어지고, 소나무도 더욱 늙어진 것 같았다. 지경도 한층 그윽하여져서 그 경치가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 같았다. 전생에 인연이 있었다면 나무꾼의 도끼자루처럼 썩혀 보고 싶었다. 역천원(嶧川院)에서 술과 안주를 내어 왔는데, 정광석(鄭光碩) 형제가 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한 숨 잔 뒤에 길을 떠났는데 갈천(葛川) 농막(農幕)을 지나 물을 끼고 가다가 강선대(降仙臺)에 올라 쉬었다. 강선대 앞의 냇물과 돌들이 기묘하고 장관이었다. 길을 변경하여 모리(某里)로 올라갔다. 이곳은 동계(桐溪) 선생이 사시던 곳이었다. 이 고장 선비들이 매년 봄과 가을로 선생이 지으신, ‘오직 꽃과 낙엽을 보는 것으로 시절이 바뀜을 안다.〔只看花葉驗移時〕’라는 싯구를 써서 재실 벽에 붙여 놓고 제사를 모시는데 봄에는 고사리 나물로, 가을에는 국화주로 모셨다. 유허비(遺墟碑)에 정성스럽게 절을 올린 뒤에 절간으로 들어가서 한 권의 책자에 일행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기록하여 ‘심재록(尋齋錄)’을 만들었다. 해질녘에 산에서 내려와 갔던 길을 되짚어 지암탄(支巖灘)을 거쳐 갈천에 다다랐다. 이곳은 즉 갈천(葛川)선생과 첨모당(瞻慕堂)선생 두 분이 사시던 곳이었다. 사모하고 존경하는 뜻을 시를 지어 표현하였다. 이날 권 태보와 윤 강지가 쫒아 왔다. 초10일. 고연(鼓淵)으로 가려고 길을 떠났다. 지나는 길에 상주(喪主)인 임지목(林之穆)을 문상하였다. 그는 첨모당(瞻慕堂)의 후손으로 나와는 오래 전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지암(支巖) 아래 여울을 건너서 남쪽으로 가다가 자그마한 고개를 넘어 상천촌(上川村)을 지나서 조담(槽潭)에 이르렀다. 돌들의 빛깔이 눈부시도록 희고 깨끗하였다. 물살이 급히 빠르게 흘렀는데 골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기묘하였다. 한 굽이를 돌아 1리를 올라가니, 멀리 흰 구름이 골짜기에 자욱하게 퍼져 있는 것이 나무숲 사이로 보이다가 안보이곤 하였다. 이곳이 바로 고연(鼓淵)이었다. 1천 장(丈)이나 될 만한 흰 돌은 양쪽 언덕으로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그 위에서 마치 용이 누워 있는 듯 물이 꾸불꾸불하게 흘러 내렸다. 약간 올라 30보를 가니, 석담(石潭)이 있었다. 이 못 위에는 10여장쯤 되는 폭포가 거꾸로 걸려 있었다. 이 폭포 위에는 흰 돌이 2, 3백보에 걸쳐 있는데, 물이 흐르는 주위는 깊게 파여 각각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위로 바위를 따라 올라가니, 바위 형세가 몹시 가파른데다가 반들반들하여 넘어지기 쉬워 보였다. 이에 바짝 바위에 붙어 기어서 올라가 가장 높은 꼭대기까지 도달했다. 최정상에 이르니 비로소 평평해지는데, 앞으로 걸어서 나가 보니 폭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또 그 폭포를 따라서 물길대로 올라갔더니, 물길이 꼬부라져서 거의 1리쯤을 가다가 돌아서 와룡석(臥龍石)으로 내려 왔다. 우리는 와룡석에서 제법 오래 앉아 쉬다가 다시 폭포가 흐르는 위쪽으로 올라갔다가는 다시 내려오고, 내려 왔다가는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해가 뉘엿해져서야 마을에서 2, 3리쯤 벗어나 장군 바위〔將軍巖〕와 천석문(穿石門)을 지나 가섭암(迦葉庵)에 이르렀는데, 이 산에서 제일 높은 곳이었다. 투구모양으로 둥글게 생긴 바위가 높이 솟아서 앞뒤로 마주 보고 있는데, 그 사이에 암자가 있었다. 동쪽으로 10여보를 가니, 다다미 돌 같은 펑퍼짐한 바위가 지붕처럼 속이 비게 얹혀 있는데, 돌이 넙적하여 흡사 큰 지붕처마 같았다. 때마침 소나기가 심하게 쏟아내려 30여 명이 비를 피하러 모두 들어갔는데도 오히려 땅이 남을 지경이었다. 산을 내려와서 상천(上川)과 고현(古縣)과 수승대를 지나 어두워서야 갈천(葛川)에 이르렀다. 주인이 와서 노고를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고연(鼓淵)은 깊은 산속에 수풀로 가려져 있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노형이 일전에 와서 놀고 간 뒤로는 그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후 구경꾼들이 지팡이를 끌고서라도 와서 감상하고는 보기 드문 경치라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름난 구경거리로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게 된 것은 노형의 공이 컸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부끄러워하며 예를 차렸으나 감히 당해 내지 못하였다. 밤에는 서당(書堂)에서 잤다. 11일. 송대(松臺)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주인 임지목(林之穆)이 자기 아우 상계(尙桂)에게 유휘(幼輝) 씨와 성거(聖居)와 진여(進汝)와 함께 나의 길을 안내하도록 시켰다. 아침은 임지목의 집에서 먹었다. 바쁘게 10리를 올라가니 외순암(外筍巖)과 내순암(內筍巖)이 있었다. 밝고 맑으며 기묘하면서 시원한 것이 갈수록 경치가 더욱 좋았다. 나는 사정(士貞) 趙宅奎)과 임상계(林尙桂)와 함께 앞에서 말을 바쁘게 몰아 내순암에 이르렀는데, 외순암과 거의 비슷하였다. 못 위에 앉아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한참을 기다리다 처음에 왔을 때처럼 외순암을 빙빙 돌면서 구경하고 있으려니 이윽고 뒷사람들이 도착했다. 술을 두어 순배씩 마셨다. 시내를 끼고 위로 올라가서 월성촌(月城村)을 지나 송대에 도착하였다. 물과 돌들이 맑고 상쾌하며, 골짜기 안이 깊어서 다시 보아도 옛날에 보았던 경치와 거의 같았다. 처음에는 서쪽으로 가서 남령(藍嶺)을 넘어 극락암(極樂庵)에 올라갔다가 용유담(龍遊潭으로 내려온 뒤 군자정(君子亭)과 차일암(遮日巖)과 월연암(月淵巖)을 지나서 길을 바꿔 심진동(尋眞洞)으로 들어갈 계획이었었다. 그러나 일행의 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반대하여 결국 대다수 사람들을 따라 마을을 나왔다. 학동(鶴洞)으로 돌아가는 사원(士源) 박성수와 장중(章仲) 정광현과 임상계를 떠나보냈다. 월성촌을 지나 남쪽으로 달리는 수망령(水望嶺)으로 꼬불꼬불 10리를 돌아서 정상에 올랐다. 이곳은 금원산(金猿山) 뒷줄기로 심진동(尋眞洞)의 북쪽 가장자리였다. 용추암(龍湫庵)에 이르러 나무그늘에 앉아 허공중에 걸려 있는 폭포를 아래로 굽어보니, 1백 묘는 됨직한 큰 못이 검고 어둡게 보이는데, 천둥이 치며 비바람이 쏟아져 내리듯 흔들리며 요동쳤다. 옛날에 신령스런 용이 이 못 속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곳 암자에 사는 승려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어느 날이 되면 내가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면 아무 것도 남는 물건이 없게 될 것이니, 그대는 그곳에서 불상을 옮기고 티끌도 남겨 놓지 말라.” 라고 하였다. 승려는 그 말대로 멀리 피해 가 있었다. 그날이 이르자, 구름을 타고 번개가 온 골짜기를 모두 무너뜨리고 부숴버렸다. 드디어 날이 밝아 나가 보았더니, 돌 위에, ‘이목(李牧)’ 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3백년이 되어도 검은 획이 확연하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라고 할 만하였다. 장수사(長水寺)로 내려와서 묵었다. 12일. 봉황문(鳳凰門)을 걸어 나와 시내를 끼고 아래로 내려가니, 굽이굽이마다 물과 돌이 비단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 끊임이 없었다. 아담하면서도 곱게 단장하여 그윽한 곳에 서 있는 심유암(尋幽巖), 송정(松亭), 채호암(菜虎巖), 풍류암(風流巖)을 오르기도 하고 경치에 따라 앉아 쉬기도 하였다. 지팡이로 물장난을 치기도 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기도 하다가, 흥이 다하면 일어나서 길을 가고, 길을 가다가는 다시 앉아서 놀았다. 해가 한낮이 되어서야 마을 입구에 이르러 광풍루(光風樓)에 앉았는데, 이 다락은 일두(一蠹) 선생이 지은 것이다. 선생이 이 고을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셨을 때에 녹봉을 덜어서 지으신 것인데 풍치가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났다. 나는 회능(晦能) 노장룡(盧章龍)을 회연 서원에서 처음 만났었는데, 편지를 보내어 누상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20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니 우정이 각별하였다. 성북(城北)에 사는 두 사람이 일행을 초청하였는데, 이들은 곧 작고한 참판 박명부(朴明榑, 1571년 ~?) 씨의 후손이며, 나와 유회(幼輝) 씨와는 여러 대에 걸쳐 집안 간에 교제가 있었다. 드디어 급히 성북으로 가서 침선대(枕仙臺)로 나가 반석 위에 앉아 있다가 밤이 되어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13일. 다함께 월연(月淵)으로 올라갔는데, 화림동의 넓은 시내 양편 언덕에 큰 바위가 가로질러 놓여 있는 것이 마치 2, 3천 명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 놓은 것 같았다. 물이 돌 위를 흐르다가 세 갈래로 나뉘어 흐르는데 모두 모이는 곳에 이르러 1백 묘 쯤 되는 큰 못을 이루었다. 못 밖에는 둥근 지붕모양의 큰 바위가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신선하면서도 아름다웠는데 마치 선계에 들어온 듯하였다. 성북(城北)으로 내려와서 주인과 작별하고, 강지 윤면흠의 초청을 받아 향교에 이르렀다. 재천루(在川樓)에 올랐더니 사마소(司馬所) 에서 술과 안주를 내오고 점심까지 준비하였다.단구(丹丘)에 사는 종숙(從叔)과 사직(士直), 평중(平仲) 윤동후(尹東垕)가 같이 왔는데 이들은 모두 방장산(方丈山) 놀이를 약속해 놓은 중이었다. 능약(能若)과 작별하고 길을 떠났다. 현읍을 지나는데 회능 노장룡이 새벽부터 다시 와서 길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백석촌(白石村)의 정씨(鄭氏) 성을 가진 유생 2, 3명이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나와 맞이해 주었다. 그 마음이 좋고도 정겨워서 먹고 마신 뒤에야 길을 재촉해서 개평(介坪)에 이르게 되었다. 14일. 회능이 괴로울 정도로 만류하므로 일행이 모두 머무르게 되었다. 또한 정생(鄭生) 덕곡(德谷)과 여종(汝宗) 강용찬(姜龍燦)이 같이 와서 함께 방장산에 들어가기를 약조하였다. 이극(而克) 노석태(盧錫泰)는 회능의 종질로 나와는 평소에 뜻과 행실과 학식이 맞아 잘 어울리는 친구였다. 선비와 벗들이 그를 추앙하여 존중하는데, 그가 우리들을 맞이하여 주선하는 것이 예의에 맞게 공경하는 뜻이 있어 참으로 존경할 만하였다. 이날의 손님들은 20여 명이나 되었다. 15일. 새벽녘이 되자 비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하여 해가 질 때쯤에야 잠깐 멎었다. 주인의 초청으로 마을 뒤의 경도재(景道齋)로 갔다. 지세가 대단히 상쾌하고 산과 냇물이 빙 둘러 싸 있는 것이 경치가 뛰어났다. 이 마을에서는 개국 초부터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때까지 도학(道學)의 종사(宗師)로 사당에 모셔진 분들과 이름난 재상들과 효자들과 우애가 돈독한 사람들과 문장이 뛰어난 분들과 절의를 지킨 선비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많이 배출되었다. 옥계(玉溪) 노 선생(盧先生)의 묘소가 이 재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가서 공손히 참배하였다. 묘소 왼편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이 월사(李月沙) 가 짓고, 신 동양(申東陽) 이 글씨를 쓰고, 김 선원(金仙源)이 전자(篆字)로 제액(題額)하였다. 위에는 신고당(信古堂)의 묘소가 있는데, 역시 신도비가 세워져 있었다. 노 소재(盧蘇齋)가 비문을 짓고, 송 이암(宋頤庵) 이 글씨를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전자로 제액하였다. 16일. 두류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회능이 그의 종질 이극(而克) 노석태(盧錫泰)와 재종질 석점(錫漸) 이준(而峻)과 종제 선국(宣國)과 흠국(欽國) 형제를 거느리고 와서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식후에 태보(泰甫)를 단계(丹溪)로 돌려보내고 길을 떠나려 하니, 마을의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모두 나와서 시내를 따라 걸었는데, 주인과 객이 합쳐 70여 명이나 되었다. 옛날에 최 수우(崔守愚) 선생이 두류산 여행을 할 때에 함께 간 사람들의 수가 1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우복(愚伏) 선생은 그것을 대단히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하셨다. 일행을 돌아보면서 마침 이러한 경계의 말씀을 어긴 것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스스로 두려워 조심하였다. 10리를 가서 뇌계(雷溪)를 건너고 엄천창(嚴川倉)을 지나 작은 고개를 넘어 최씨네 함허정(涵虛亭) 옛 터에 올랐다가 엄천사(嚴川寺)에 들어가서 묵었다. 엄천사는 원래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부서져 볼품없었다. 17일. 소매 속에서 능중(能仲)이 주었던 점필재가 지은 〈유두류록〉을 꺼내보았다. 점필재가 지나갔던 산과 암자와 마을과 못과 산봉우리들의 이름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산 아래에 살고 있는 한생(韓生)에게 물어 보았더니, 한생이 하나하나 상세하게 대답하여 주었다. 점필재가 오른 길은 대개 이 엄천사에서부터 앞산의 화림사(花林寺)로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다. 지금의 백무로(白毋路)는 동서로 멀리 나누어져 있는데, 그때의 길은 지금은 없어지고, 이른바 지장암(地藏庵)과 선열암(先涅庵)과 신열(新涅), 고열(古涅) 등 여러 암자들이 있었던 옛 터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밥을 먹은 뒤 길을 떠나서 한 굽이를 돌아가니, 어떤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그 앞에 이르자 냇가의 너른바위 위에 잠시 앉아 쉬기를 청하기에 제법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몸집과 옷차림이 건장하고도 준수하였으며, 도량이 호탕하고 말씨도 시원시원하면서도 힘찬 것이 참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법희암(法喜庵)의 승려 도원(道原)인데, 설파(雪坡) 의 의발(衣鉢)을 전하여 받았다. 사대부들과 심성이기(心性理氣)에 관한 이야기를 잘 변설하였다. 스스로 우리들에게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기를 청하여 산중에서 우리를 주도하였다. 때문에 도원과 함께 법희암과 문수암(文殊庵)을 지나 산으로 들어가는데, 산으로 들어갈수록 수풀이 더욱 무성하였다. 한 10리쯤 가니 용유담(龍遊潭)에 이르렀다. 위가 투구와 같이 둥글게 생긴 큰 돌들이 한 가닥 시내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이 마치 지붕마루 같은 것과 평평한 돗자리 같은 것과 둥근 북 같은 것과 큰 항아리 같은 것과 큰 가마솥 같은 것과 성난 호랑이와 같은 것과 급히 달리는 용과 같은 것과 서있는 것과 엎드려 있는 것과 기대어 있는 것과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 그득하게 꽉 차 있는데, 천만 가지로 기괴하여 그 모양을 무엇이라 표현하여 이름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 가운데에 한 갈래의 길을 열듯이 큰 돌구유가 있는데 만천(萬川)의 급히 흐르는 물줄기가 요란스레 부딪쳐 천둥치듯 움직이며 흘러 내려 만 경(頃)의 못물이 2, 3리에 곧게 걸쳐져 있었다. 양편의 산골짜기에는 묶어세운 듯한 소나무 1만 그루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서 어두컴컴하였다. 못가를 따라 올라가니, 정신과 기운이 음산한 것이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못의 서쪽 언덕에는 오래된 사당이 있는데, 무당들이 신룡(神龍)에게 기도드리는 곳이었다. 나무를 엮어서 다리를 놓아 오가게 하였다. 여울물에 바람이 일어 현기증이 나서 지나는 사람들이 물에 떨어져서 죽는 일도 가끔 있다고 하였다. 5리를 가니, 송정(松亭)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려 잠시 앉아 바람을 시원하게 쐬고, 곧바로 길을 떠나 금대암(金臺庵)과 벽송암(碧松庵) 두 암자와 당평촌(堂坪村)을 지나 곧 군자사로 들어갔다. 이 군자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왕비의 원당(願堂)이었다. 왕비가 이 절에 거둥하였을 때에 태자를 낳았기 때문에 절 이름을 ‘군자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들으니 이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벌꿀을 길러 꿀을 따서 갖가지 공출과 구실을 부담하는데, 2, 30년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하여 오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서 반수가 넘는다고 하였다. 아! 엄천(嚴川)과 마천(馬川)이야말로 예로부터 낙토(樂土)라고 말해져 왔다. 60리나 되는 큰 골짜기의 논둑과 보리밭 언덕에 한 덩이의 흙도 그냥 놓아둔 곳이 없었다. 뽕나무와 삼과 닥나무와 옻나무, 대나무화살, 목기, 감나무, 밤나무 등의 수확이 온 도내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어 마을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살고 있고, 그들의 직업도 편안한데, 불법으로 재물을 모으려는 관리들이 쳐들어 와서 안심하고 살 수가 없게 되었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다. 만세루(萬世樓)에 앉아서 남쪽으로 천왕봉(天王峯)을 바라보니, 가깝기가 만세루의 처마를 짓누르는 듯하였다. 한생이 역시 손가락으로 가리켜가며 산에 오르는 길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오후에 도원의 초청을 받아 명적암(明寂庵)으로 올라가서 머물러 잘 생각으로 조용히 횡루(橫樓)에 앉아 있었다. 도원이 다락에 불자(拂子)를 세워 놓고 정중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말하기를, “기질(氣質)에 관한 이야기는 공자가 ‘인성은 사람마다 서로 비슷하나, 습관은 나라마다 서로 다르다’고 가르치신 데서부터 발단되기 시작하였는데, 맹자는 인성을 논하면서 기질에 관하여는 말하지 않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기질로서의 인성은 천성(天性)의 밖에 갖추어진 다른 하나의 인성이니 이것은 이(理)에 빠져 있는 기질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그러므로 이(理)의 한 쪽만을 가리켜 말한다면, 천명(天命)으로서의 성(性)이 되며, 이와 기를 섞어서 말한다면, 기질의 성이 되는 것이오. 기(氣)에는 맑음과 흐림〔淸濁〕이 있고, 질(質)에는 순수함과 얼룩짐이 있소. 사람의 성품이 지극히 맑거나 순수하다는 것은 기질이 방정한 것이니, 천리(天理)가 이루어진 것이오. 사람의 성품이 흐리거나 얼룩져 있다는 것은 기질이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는 것이니, 이(理)에 따라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것이오. 그러나 그 치우쳐진 곳에는 항상 스스로 사람들이 높아지려는 욕심을 일으켜 왔소. 그러므로 맹자는 성(性)을 말씀하면서 그 본을 극진히 하셨으니, 그 말씀의 요점은 욕심이 있는 이치를 막으려 하신 것이오. 이것이 곧 기질을 변화시키는 방법인 것이오. 《맹자(孟子)》7편〔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공손축장구(公孫丑章句), 등문공장구(藤文公章句), 이루장구(離婁章句), 만장장구(萬章章句), 고자장구(告子章句), 진심장구(盡心章句)〕의 속에 비록 기질이라는 두 글자가 없더라도 기질의 뜻조차 없지는 않소이다. 뒤에 나타난 장재(張載), 정이(程頤) 두 선생님들이 깨달아서 그 뜻을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지어내어 학자들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었으니, 사실 맹자께서 정통(正統)을 물려받게 된 것은 그들의 공이 크다오.” 라고 하였다. 도원이 이발단론(理發端論)과 이기 체용(理氣體用)의 나뉨과 음양이 고요하게 느껴짐의 오묘함과 하늘과 사람이 한 가지 이치인 기미로 인하여 낙건(洛建) 의 여러 학설과 경전(經傳)의 뜻풀이를 근거로 인용하면서 불교의 《화엄경(華嚴經)》, 《반야도서(般若都書)》, 《능엄절요(楞嚴節要)》, 《염송(拈頌)》 등의 책을 참고하면서 그 같고 다름과 나뉨과 합침을 변별하는데, 고거(考據)가 매우 넓고, 분석이 명쾌하였다. 유학자들의 논리는 더 없이 크며, 근본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불교의 이론에 관하여는 마음속으로 늘 한 단계 아래로 생각하여 왔었다. 나는 말하기를, “일찍이 《선가귀감(禪家龜鑑)》을 보았더니, 거기에 이르기를, ‘여기 어떤 물건이 있으니, 대단히 밝고도 신령스러우며,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데, 그 모양을 무어라 이름지어 표현할 수가 없으며, 3교의 성으로서도 이 글귀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였소. 여기서 대단히 밝고도 신령스럽다고 한 것으로 기를 인정한다면, 이가 될 것이오. 또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이르기를, ‘옛날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세상이 엉겨서 된 한 개의 둥근 모양을 한 상태였다.’고 하였는데, 석가가 아직 가섭(迦葉)을 만나기도 전에 어떻게 전할 수가 있었겠소? 여기서의 엉겨서 된 한 개의 둥근 모양이 기(氣)를 가리킨 것인가? 이(理)를 말한 것인가?” 하였다. 이에 도원이 말하기를, “아니지요. 다만 이것은 갖가지가 헤아릴 수 없이 높고, 더할 수 없이 깊은 이론이므로, 큰 근본의 입구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이미 펼 곳을 논의하니, 선비들은 큰 근본의 핵심에 든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또 묻기를, “불교를 공부하는 데에는 돈(頓), 점(漸) 의 두 가지 종파가 있는데, 그 뜻이 어떻게 다른가?” 하니, 도원이 답하기를, “돈오한 뒤에 점수하는 것은 유가에서 밝은 덕〔明德〕을 밝혀 참됨〔誠〕으로 실천하는 것과 같고, 점수한 뒤에 돈오하는 것은 유가에서 성(誠)을 하여 명덕을 밝힘과 같으니, 결국 사람이 죽어버리면 마른 나무가 죽어서 재가 되는 것처럼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윤리와 천하를 다스리는 길과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저와 같이 고생스러운 사람은 속세를 떠나 구름처럼 평탄하지 못한 험한 곳에 둥지를 틀고 외로이 선하게 살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불교에는 선교 두 길이 있는데, 둘 다 석가에서 나왔으나, 교종의 길은 아난(阿難)으로 전하여졌고, 선종의 길은 가섭(迦葉)으로 전하여져서 나란히 서서 높고 낮음이 없어야 하건만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선(禪)하는 이를 상승(上乘)이라 하고, 교(敎)하는 이를 하승(下乘)이라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라고 하였더니, 도원이 말하기를, “교종 사람들은 앞으로 선하는 사람이 될 것이니 이른바 점수하는 사람들이고, 선종 사람들은 이미 깨달아서 이른바 돈오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종과 선종은 깨달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높고 낮음의 등급이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불서(佛書)들이 중국의 구마라습(鳩摩羅什)과 도징(圖澄) 등이 위(魏), 진(晉), 제(齊), 양(梁)의 문사들과 같이 번역하여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뜻들이 많이 섞여서 서역(西域) 불교의 본래 뜻을 잃은 것이 많아졌지요. 그러나 중국의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오직 강설(講說)만 힘쓰고, 본원(本原)을 궁구하지 않았는데, 뒤에 달마(達摩)가 서쪽에서 와서 글자로 기록하지 않고 불교의 근본을 마음으로 바로 가르쳐서 소림사(少林寺)의 문하에 선법(禪法)을 전하여 주어서 그 도가 각각 문호를 세워 마침내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曺洞宗), 운문종(雲門宗), 위앙종(潙仰宗), 법안종(法眼宗)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지요. 고려시대 보조(普照) 는 《절요서(節要書)》를 지어서 선교(禪敎)를 합하여 같이 하여 마침내 한 가지가 되게 하였지요. 동그라미 모양으로 쓸모없는 학문에 헛된 정력을 허비할 뿐이니, 어찌 세도(世道)의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도원이 또 꿇어앉았다가 몸을 똑바로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율곡 선생의 사칠(四七) 은 모두 기(氣)에서 나온다는 주장을 고금 경전(經傳)과 염(濂) , 낙(洛) , 관(關), 민(閩) 학파들의 글에서 구하셨다고 하는데, 아직 제가 읽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학식있는 선비님들께 조심스레 물어 보면 모두들 말하기를, ‘발하기 전〔發前〕은 사람이 마음을 아직 펴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평소에 주자(朱子)는 사단(四端) 은 이(理)에서 나오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종사(宗師)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이처럼 독단적인 견해를 주장하면, 고명한 학자라도 도리어 하나의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에 기신론(起信論)을 자세히 읽어 보니 표현〔立言〕은 비록 다르지만, 그 속뜻〔旨義〕은 같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산에 들어왔을 때에 우연히 이 책을 읽고서 마음속으로 진실로 기뻤던 것이 평생을 두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운운하였다. 그의 식견이 명석하고도 꿰뚫어 보는 듯하여 우리 같은 식견이 많고 명망이 있는 선비도 아주 멀리〔三舍〕에 물러나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18일. 나는 감기를 앓아 밤새도록 고생하였지만, 산에 올라가기 위해 억지로 일어나서 머리 손질을 하고 밥을 먹었다. 그리고 군자사로 내려가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양식과 소금과 장류, 술항아리와 솥과 동이와 의복과 이불과 깔개자리와 점심 밥그릇들을 짊어지게 하니, 모두 12인이었다. 이 물건들은 모두 노선국(盧宣國) 형제가 마련한 것이었다. 종과 말들은 절에 머물러 남아 있게 하고, 남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15리를 달려가 백무당(白毋堂)에 이르렀다. 당은 나무판으로 만들어서 그 안에 돌부인〔石婦人〕을 모셔 놓았으며, 8, 9호의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이 산이 전국에 명성이 있는 것은 신령스런 응보가 있기 때문이다. 삼남(三南)의 남녀 무당들이 봄과 가을이면 반드시 산에 들어와서 먼저 용담(龍潭)의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다음에는 백무당에서 빌고, 또 제석당(帝釋堂)에서 기도하였다. 때문에 상당(上堂) 까지 올라와 정성을 다하여 신령스런 소원을 비는데 바리바리 실고 온 물화들이 많아서 마치 시장 바닥처럼 북적대었다. 당주(堂主)는 그 쌀과 돈과 포백(布帛)들을 거두어서 관부(官府)에 항상 바쳐 왔으므로 늘 씀씀이가 여유 있어서 궁벽한 깊은 산골에 살면서도 이곳 사람들의 삶은 군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는 남녀 무당들이 이 산에 오는 것이 전과 같지 않아졌다. 관부에서 거두는 것과 스스로 써야 할 것에다, 또한 산사(山査, 아가위), 오미자(五味子), 백자(栢子, 잣), 표(瓢, 바가지), 용(茸, 버섯) 같은 것들까지도 전에 없는 공출(貢出)을 매년 독촉하여 거두는 것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당주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어 달아나버리니 당집마저 낡고 부서져 버린 데다 좁고 더러워지게 되었다. 당집에서 동쪽으로 가서 비로소 산에 오르게 되는데, 숨을 몰아시며 조금씩 앞으로 나가 화동암(花童巖)에 이르니, 산세가 마치 벽을 허공에 매달아 놓은 듯하였다. 멋대로 자란 나무들은 하늘을 가려서 햇빛조차 새어 들지 못하는데 한 낱 실 같은 가는 길에 돌부리가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온갖 힘을 다 썼는데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 같았다. 앞에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 이미 나무 끝에 있고, 뒤에 오는 사람을 돌아다보면 내 발밑에 그 머리 정수리가 있었다. 한천(寒泉)을 지나서 15리를 가니 산꼭대기에 오르게 되었다. 천왕봉을 빙 둘러 보니 아직도 허공중에 있는 것 같았다. 일행 모두가 웃옷을 풀어 헤치고 서늘한 바람을 쐬다 곤하여 풀밭에 누웠다. 배도 고프고 병도 또 났는데 마침내 점심 그릇들을 풀어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한잠씩 자고 나서 산등성이를 따라 가다가 길을 바꿔 남쪽으로 해서 걸어 내려갔다. 지세가 점점 평탄해져서 편하게 걸어가긴 했는데 종종 길이 끊어지듯 매우 위태롭기도 하였다. 10리를 가니 제석당이었다. 이 당도 역시 나무판으로 지었는데 얼굴에 흰 칠을 바르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힌 돌부인을 모셔 놓았다. 산 높이 절반은 이미 지나 온 듯한데 지형이 서북을 향하여 얼굴이 열려 호남과 호북의 땅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확 트여 있었다. 제석당 옆에 차가운 샘물이 돌 사이로 흘러내리는데, 물의 성질이 너무 세서 배앓이를 쉽게 하므로 솥을 걸고 물을 끓여서 각각 마른 목을 축였다. 백무당에서 처음 출발할 때에 다리 힘이 좋아서 씩씩하게 걸을 수 있던 사람들은 먼저 떠나서 멀리 가버렸는데, 성거(聖居), 진여(進汝), 사정(士貞) 같은 사람들은 역시 거기에 끼여 있었다. 일행들이 제석당 앞에 앉아서 쉬는데, 한층 배고프고 아픔이 심하였다. 점심밥을 담은 그릇을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가지고 올라오려니까 높이 오를수록 숨이 차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오로지 이극(而克)만이 늙은이들과 나란히 걸으면서 변함없이 따라왔는데, 매양 쉬는 곳마다 약간의 사변(事變)과 성현(聖賢)들의 언행과 격언 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이론까지도 지극하게 자세히 되풀이하여 가르쳐 주어 들었다. 제석당에서 왼편으로 곧장 남으로 달려 2, 3개의 화살거리만큼 내려오니, 진주의 중산(中山) 마을을 굽어 볼 수 있었다. 덕천(德川)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과 벽취령(碧鷲嶺)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모두 여기서 만났다. 벗 입중(立中) 조시우(趙時愚)를 불러서 진양(晉陽)의 지형을 물어 보았더니,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가르쳐주는데, 오대사(五臺寺), 흑방사(黑房寺), 삼장사(三藏寺), 대원사(大院寺) 등이 모두 그 주름진 옷자락 속에 감춰진 듯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동쪽으로 꺾어서 산등성이를 따라가는데, 길은 역시 평평하여 걷기가 좋았다. 그러나 일행들이 다들 지쳐서 다리 힘이 없었기 때문에 걸음을 조금씩 옮겨놓아도 백무당 뒷 고개보다는 걷기가 더욱 어려웠다. 오로지 꼭대기로 가는 길이 그리 험하지 않다는 것만을 기대하고 앞에 있는 봉우리를 기어 올라갔는데, 고개를 들어 동쪽으로 바라보니 만 길이나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힌 기둥처럼 허공중에 꽂혀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간담이 서늘해진 듯,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마침내 기어서 산등성이를 내려와 3, 4개의 기이한 바위를 지나 좌우를 굽어보니, 바위 벼랑으로 된 골짜기에 구멍이 뚫려서 만들어진 천석문(穿石門)이 있었다. 구름사다리를 붙들고 바위 모서리에 붙어서 걸어가노라니, 해질녘이 되어서야 일월대(日月臺)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른바 천왕 제일봉이었다. 이 산은 덕유산에서부터 서쪽으로 2, 3백 리를 달려서 함양의 천령(天嶺)이 되고, 천령에서부터 운봉(雲峯) 땅으로 팔량령(八良嶺)이 되고, 팔량령에서부터 우뚝하게 솟아서 남원의 반야봉(般若峯)이 되고, 반야봉에서부터는 하동 땅의 벽취령(碧鷲嶺)이 되고, 벽취령에서는 동쪽으로 가면 수많은 재들이 자리잡고 있으나, 남쪽으로 가면 5백리 밖까지 통하도록 푸르른 빛과 연기며 안개도 없었다. 산의 형세가 준엄하고 시내가 흐르는 골짜기들이 서려 있는 것은 가야산(伽倻山)이나 팔공산(八公山)의 그것들과 흡사한데 산허리를 지나지 아니하여 낮은 산봉들과 구렁들이 버티고 있으면서 백무당 뒷기슭인 화림봉(花林峯) 정상과 높이를 다투고 있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다가 개인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음산한 기운이 걷히면서 온 세상이 발아래에 있는 듯하였다. 허공의 기운과 경치가 푸르면서도 넓고 멀어 아득하기만 하였다. 남쪽으로는 산과 바다가 겹겹으로 겹쳐진 곳에 흡사 일진의 오래 된 구름떼들이 큰 들판을 가로질러 걸쳐 있어 넓고 아득함이 끝이 없는 듯하였다. 서쪽은 하나의 깊은 바닷물이 저녁놀을 맞이하여 만 경(頃)에 일렁이어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아름답게 떠서 움직이고 있었다. 동쪽은 모든 고개들이 하나의 재처럼 같은 모양이었다. 대지와 산천이 아주 작은 개미집 같은 언덕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 같았다. 아득하기 그지없는 구름과 연기가 자욱한 속에 한 개 주먹만한 크기로 활처럼 솟아나 있는 것이 가야산과 팔공산이었다. 북쪽의 계룡산(鷄龍山)과 대둔산(大屯山) 너머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생각하면 이것이 호남 전체였다. 때마침 저녁이 되어 석양이 비추는 노을이 아득한 것이 길을 잃고 헤맬 만큼 망망하여 전체의 면모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물건을 쪼개기라도 할 것처럼 긴 휘파람을 불며 아래를 굽어보기도 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기도 하고 사방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동지들에게 말하였다. “동쪽은 신라의 옛 땅이고, 서쪽은 백제의 옛터이다. 수많은 전쟁과 병란이 천년 동안 패자(覇者)의 업(業)이었지만, 이제는 쓸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다 사라져서 흡사 넓은 하늘에 구름이 지나간 듯하다. 당시의 영웅호걸이며 현자나 어리석은 사람, 귀하고 천한 것들도 모두 죽어서 푸른 산의 썩은 흙이 되었으니, 우리들이 한 동이의 향기로운 술을 마시고 한 바탕 맑은 바람을 쐬며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는가? 또 산들 사이로 빽빽하게 들어 찬 것들도 모두 개미집처럼 올망졸망 무리를 지어 모여 사는 것들일 뿐이다. 희노애락이나, 근심과 탄식, 아름다움과 예쁨이 모두 단지 욕심이라는 글자가 시킨 것일 뿐이니, 이로움도 명예로움도 없이 헛되이 늙다가 허무하게 죽는 것이 하루살이가 나왔다가 없어지는 것이나 눈에놀이라는 작은 곤충이 났다가 없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직 이름이 우주처럼 높고 빛남이 책 속에 기록되어 오랜 세월을 두고 존경받아야 할 것 마땅할 것이다. 이 산봉우리에 견줄만큼 빼어난 사람들로는 이 산의 남쪽에서는 남명(南冥) 이요, 이 산의 북쪽에서는 일두(一蠹) 와 동계 같은 분들뿐이다. 이분들은 어떤 도를 지키셨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일어나서 드디어 대(臺)를 내려와서 제석당으로 들어가니, 역시 널판으로 지은 집에 돌부인을 모셔 놓았다. 옛날부터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고 일러왔다. 원래 제석당은 일월대(日月臺) 위에 있었던 것인데, 언제 일월대 아래로 옮겨 세웠는지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애초에는 이 당집에서 밤을 지낼 생각이었으나, 얼었던 땅이 녹기 시작하여 축축해서 잘 수가 없었다. 당집 아래 남쪽을 향하여 벽을 등진 곳에 자리를 펴고 자리를 정하여 앉았다. 따라온 사람들에게 차가운 밤을 보내기 위한 땔감을 모아오게 하고 노생(盧生) 형제에게는 제석당에서 밥을 지어 오게 하였다. 예로부터 산 정상에서 밤을 보내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갑자기 부는 돌개바람과 짙은 안개를 걱정하였었다. 이날 밤은 바람기도 한 점 없고, 별빛과 달빛이 나무숲을 비쳐 주어 하늘과 땅과 사방을 둘러보니 온 산골짜기의 삼라만상이 흐릿한 것이 마치 태초에 천지가 처음 나누어지기도 전의 기운처럼 아련하였다. 우리 자신들의 몸을 돌이켜보매 우리들은 이미 하늘나라로 가는 길의 바로 앞에 가까이 와 있는 듯하였다. 피리 부는 사람에게 보허사(步虛詞) 한 가락을 불어 보도록 하였다. 맑은 소리가 간드러지게 울려 퍼져서 맑은 하늘 위로 흩어져 올라갔다. 이문(羡門) 과 안기(安期)가 학의 등을 타고, 난새가 조각된 생황을 불고 구름위의 하늘에서 옥피리를 불었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피리 부는 것이 끝나니, 동쪽이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차가운 기운이 마치 살을 에이듯 한 것이 음력 10월의 날씨와 흡사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무릎들을 조이고 어깨를 가지런히 하여 서로를 끌어 앉았는데, 때마침 우리보다 먼저 산에 올라온 호남사람 4, 5인이 있어서 그들과 같이 즐겼다. 19일. 동쪽 바다에 해가 올라오면서 붉은 노을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려 하는데 미운 구름이 가려버렸다. 일월대(日月臺) 위에 서서 둘레를 돌면서 사방을 살펴보니, 맑은 아침 기운이 대지위에 가득 깔려 있었다. 안개와 구름이 걷히자 그 속에 함께 갇혀 있던 가깝고 먼 많은 산봉우리들이 겹겹으로 뾰족하게 드러나는 것이, 마치 푸른 바다의 조수머리에 여러 개의 점처럼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 같아 보였다. 마침내 정신을 퍼뜩 차리고 조용히 산을 내려와 제석당으로 돌아와서는 호남의 여러 사람들과 이별하였다. 밥을 지어 먹은 뒤에 백무당 마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잠시 잠을 자고 났는데, 사람과 말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실택촌(實宅村)에 도착하니, 양(粱)씨네 3, 4호가 사는데 술과 안주와 점심밥까지 정성 들여 준비해 놓고 맞이해 주었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기도 하던 차에 일행들은 시냇가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잠깐 사이에 배불리 먹고는, 오후 3시경쯤 군자사로 내려왔다. 절 앞 시냇가의 너른바위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피리 부는 사람에게 피리를 불게 하며 즐기다가 날이 어둑해진 뒤에야 절로 들어가서 잤다. 20일. 산 위에서의 날을 다 보내고 나니, 도원이 문밖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벽송암(碧松庵)은 산중에서도 이름난 곳입니다. 산을 내려가신 뒤에라도 지나는 길에 이 암자를 찾아 주신다면, 소승이 기필코 먼저 기다렸다가 데려가 모시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 모두가 그러겠다고 하였다. 노인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산을 오르는 것보다도 더 피곤하고 다리가 아프다고 하였다. 산에 오를 형편이 되지 못해 곧바로 마을 어귀로 내려왔는데,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을 모두 보지 못하고 빠트린 것이 마음에 크게 남아 아쉬웠다. 그러나 그것은 도원과 같은 승려를 만나 그의 기이한 이야기와 해박한 이론을 더 듣지 못하는 아쉬움에 비한다면 견딜 만한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용유담(龍遊潭)에 도착했는데, 좁은 산골짜기에 구름이 가려 덮으면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 컴컴해졌다. 말을 바삐 채찍질하여 엄천사(嚴川寺)에 이르렀는데, 옷이 다 젖어서 척척했다. 이 때문에 엄천사에서 묵었다. 21일. ‘천왕동유록(天王同遊錄)’을 매만지고 나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나서 함허정(涵虛亭) 뒷 고개에 올라 강여종(姜汝宗)과 이극 노석태, 이준(而峻) 노석참(盧錫漸), 평중(平仲) 윤동후(尹東垕)과 작별하였다. 엄강(嚴江)을 따라 내려와 산청현에 이르렀다. 산청은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아 하찮은 산골 고을이 아니었다. 환아정(喚鵝亭)에 올라 잠시 앉아 쉬고는 객점(客店)에 이르러서는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단성현(丹城縣)을 지나 소남촌(召南村)에 어두어져서야 도착했다. 주인 문연(文然) 조휘진(趙輝晉)이 우리를 맞이하여 후하게 대접해 주어 동산재(東山齋)에서 잤다. 22일. 문연이 고집스럽게 만류하는 바람에 머무르게 되었다. 남사(南沙)와 입석(立石)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찾아 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덕산(德山)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차례로 찾아 볼 것을 약조하였다. 경요(景堯) 이훈광(李勛光)이 와서 인사를 나누고 같이 잤다. 23일. 덕산(德山)으로 들어갔다. 문연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도구대(陶丘臺)에 이르렀는데, 선배 도구공(陶丘公) 이 놀이를 즐겼던 곳이었다. 우리 고향 벗인 경도(耕道) 송일도(宋日度)가 남사(南沙)로부터 왔는데, 최겸오(崔兼五)도 함께 왔다.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구대를 내려왔다. 시내를 끼고 가다가 팔덕문(八德門)에 이르렀는데, 덕산에 사는 정생(鄭生) 형제와 서울의 벗 이생(李生)이 술과 안주를 마련해 가지고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서 3, 4순배씩 술잔을 돌려 마시고 산문을 들어갔다. 골 안이 넓게 트여서 주위 1백 리에 촌락들이 별 떨기처럼 흩어져 있었다. 대나무 숲이 어두침침할 정도로 무성하게 들어차 있고, 밭과 들판은 편평하게 널찍하였다. 그 한 복판으로 큰 시내가 흐르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두류산 남쪽 마을로 낙토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고개를 들어 우러러 바라보면 천왕봉이 누워 있는 듯하고, 아래로 내려다보면 흰 구름이 감싸 안아 희미하게 봉우리 끄트머리만 들어나 보이는데, 이것들은 바로 며칠 전에 우리가 올라가서 직접 밟아 보았던 곳이었다. 그 당시에 이 마을들을 굽어보았을 때에는 아주 아득하게 여겨져서 마치 구천(九泉)의 땅 밑에 있는 듯 여겼었는데, 이제 고개를 들어 천왕봉을 쳐다보니 마치 하늘 위에 있는 은궐(銀闕)처럼 여겨졌다. 이제서야 우리들이 하룻밤 동안이나마 진짜 신선이 되었던 것임을 알았다. 큰 시내 두 군데를 건너 원문(院門) 밖에 이르렀다. 세심정(洗心亭)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인화(人和) 최진섭(崔震燮), 최창효(崔昌孝)를 비롯하여 그 외 10여 인이 다 나와서 맞이해 주었다. 진양(晉陽)에 사는 여러 벗들이 우리들이 산에 오른다는 소문을 듣고, 서원에 와서 기다린 지가 벌써 5, 6일이나 지났다고 하였다. 신실하고 은근함이 여전히 옛날 그대로였다. 최창효는 수우(守愚) 의 후손으로, 선왕(先王, 영조) 무진년(1748년)에 나의 할아버지께서 이 서원의 원수(院首) 일을 맡아 보고 계실 적에 임금께서 내리신 돈유문(敦論文)을 받들고 왔던 분이다. 40년 만에 다시 뵙게 되니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큰절을 올렸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서 받들어 예를 올린 뒤에 묘우를 나와 경의당(敬義堂)에 앉아서 쉬었다. 남명의 후손 30여 인이 와서 인사를 나누고 술과 안주를 마련해 왔다. 서원에서는 점심을 대접해 주었다. 오후에 선생의 신도비 앞에 이르렀는데, 미수(眉叟) 가 글을 짓고, 전액(篆額)까지 하였으며, 감사 오시대(吳始大) 가 글씨를 썼다. 종손이 가묘(家廟)에 모셔 두었던 검 세 자루를 받쳐 들고 왔는데, 그 칼자루에는 각각 ‘속으로 밝게 투명한 것은 존경받음이요, 겉으로 자르는 것은 의를 지킴이다.〔內明者敬外斷者義〕’라는 8자가 새겨져 있으니, 심법(心法)이 여기에 있었다. 마을을 나와 인화, 겸오와 작별했는데 그들은 머물렀다가 다음날 촉석루(矗石樓)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경안(景顔)과 회능은 인화가 잡아끄는 바람에 그들과 같이 갔다. 급히 걸어서 입석촌(立石村)에 이르니, 주인이 이미 시내 위에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고 나니 해는 벌써 져서 어두워졌다. 이에 횃불로 앞길을 인도하게 하여 남사촌(南沙村)에 도착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다함께 모여 있었다. 24일. 이른 아침에 쌍백정(雙白亭)에 다다랐다. 약중(若仲) 이지흥(李之興)이 안계(安溪)로부터 새벽에 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약중은 화음(華陰)공의 후손인데, 정언을 지낸 이만응(李萬應)의 가까운 일가로 진양에 유배되어 살게 된 사람이다. 밥을 먹은 뒤에 촉석루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조문연, 경요(景堯) 이훈광(李勛光), 계린(季鱗) 이응룡(李應龍)이 앞에서 인도하였고, 성민(聖民) 이규수(李奎壽)와 경도(耕道) 송일도(宋日度))가 모두 그 뒤를 따랐다. 소남촌에서부터 내려와서 신안강(新安江)을 건너 하나의 작은 고개를 넘어 용산점(龍山店)에 이르러 말에 먹이를 먹였다. 자진(子眞) 강택준(姜宅儁)은 설곡(雪谷) 사람이었다. 소탈하면서도 고아하고 시를 잘 지었다. 또 세상사를 벗어나 산수를 즐기며 놀기를 좋아하였다. 우리들이 덕산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는 문연, 인화와 같이 덕산에 들어와 10일간이나 머물러 기다리고 있다가 소남에서 우리를 만났다. 그의 사위집에서 한 병의 술과 한 합의 떡과 과일을 가져다가 길바닥에서 우리를 청하여 함께 먹었다. 같이 촉석루에 올랐는데, 그의 풍치와 성격이 자연 속된 사람이 아님을 알 만하였다. 오후에 진양 성 밖에 최 인화, 이 경안, 노 회능, 최 겸오가 왔고, 자정(子精) 김광련(金光鍊)도 역시 우리의 소식을 듣고 왔다. 서문을 지나 들어가서 촉석루로 올라갔다. 강과 산이 깨끗하고 넓은데, 누각이 크고 아름답기가 낙동강 동쪽에서는 확실히 제일이었다. 또 누액(樓額)은 웅대하면서도 날아갈 듯 생동감이 있었다. 강산과 누각이 서로 낫고 못함을 다투면서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듯 참으로 기이한 글씨였다. 붉게 단청이 된 난간을 배회하면서 멀리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니, 삼장사(三壯士) 가 술잔을 들고 부른 비가(悲歌)와 김 창의(金倡義) 가 왜놈의 칼을 맞아 웃고 이야기하던 유풍(遺風)이 천년이 되도록 감격스러움을 느끼게 하였다. 강위에 있는 의기암(義妓巖)은 오랜 세월을 두고 그 꽃다운 이름이 삼장사와 함께 길이 전하여질 것이다. 촉석루 서문을 나와 강물을 거슬러 5리를 가니, 지연(芝淵)에 다다랐다. 주인 박지서(朴旨瑞)와 박지홍(朴旨鴻)이 모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지연은 작고한 상사(上舍) 박태무(朴泰茂) 댁의 별장이었다. 박태무는 남 몰래 덕을 쌓기도 하며 고고한 행실로 진양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었다. 그는 서계정(西溪亭)에서 한가히 살며 선비로서 검소히 살다가 돌아갔다. 밤에는 연정(蓮亭)에서 잤다. 25일. 주인 박수현(朴受絢)의 궤연(几筵) 에 조문하였다. 연정의 오른쪽을 에워싸고 있는 산을 따라 올라가 별장 전체의 경치를 두루 둘러보고 집 뒤 동산을 따라 내려왔다. 주인 종형제들과 강상에서 작별을 하였다. 박지서는 훌륭한 선비였다. 견식이 있고, 문예에도 능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를 응시하였다가 끝내 합격하지 못하였다. 박지홍은 문연의 누님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단정하고 수려하며 고아하고 결백하였다. 각기 슬픈 얼굴빛을 띠고 있었다. 성 서쪽이 이르러 성거 이동연과, 사직 윤억을 떠나보내고, 승산(勝山) 강 자진(姜子眞)에게로 갔더니, 설곡(雪谷)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모두 2일 후에 단계(丹溪)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바로 단계로 가는 길을 취하여 북쪽으로 갔다. 문연 조휘진, 인화 최진섭, 계린 이응룡, 성민(聖民) 이규수(李奎壽), 경도 송일도, 최겸오, 회능 노장룡, 경요 이훈광이 모두 같이 갔다. 도천점(道川店)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마천(馬川) 위에서 진여 이동급과 사정 조택규는 곧바로 단계로 올라갔다. 나머지 일행들은 여기저기를 거쳐 한양촌(漢陽村)으로 들어가 물가 신정(新亭)에 앉아서 쉬다가 어두워서야 비로소 급히 떠나서 단계에 도착하였다. 멀리서 피리소리가 청량하게 바람을 타고 숲속으로 가볍게 흩어지는 것을 들었다. 곧장 동보(同甫) 권필언(權必彦)의 집으로 들어갔더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심보(心甫) 권필린(權必亮)의 집에서 현부(顯夫) 권정구(權正九)와 원부(元夫) 권정삼(權正三)과 함께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며 잤다. 26일. 만취당(晩翠堂) 온수(溫粹) 권경중(權敬仲)을 찾아가 만났다. 그는 소탈하면서도 고아하고, 문장에 능하면서 학문도 넓어서 모든 벗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이였다. 조카딸을 찾아 만나보고, 정우(正遇) 권언양(權彦陽)을 조문하였다. 태삼(泰三) 유상경(柳象經)의 집에 이르렀더니, 자진(子眞) 강택준(姜宅儁)과 조입중(趙立中) 등 한양(漢陽)의 여러 노인들이 약속을 실천하였다. 오후가 되어서야 완계서원(浣溪書院)에 가서 공손히 예를 올렸다. 서원의 사당 뜰에 있는 작은 들마루에 앉아서 쉬다가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에 단계로 돌아와서 심보 권필량의 집에서 잤다. 현부 권정구와 원부 권정삼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7일. 유휘(幼輝)가 이른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났다. 산수 유람길 따라온 이후 근 한 달이 되어 중간에 헤어지는 것이 몹시 한탄스러웠다. 밥을 먹은 뒤에 여옥(汝玉) 허작(許碏)의 집에 갔다. 그의 집에서 미수옹께서 지으신 ‘동해비송(東海碑頌)’을 손수 전자(篆字)로 쓴 것을 탁본한 허공(許公)의 필첩(筆帖)과 문징명(文徵明)이 그린 ‘적벽야유도(赤壁夜遊圖)’를 구경하였다. 문징명은 중국의 학사인데, 귀신같은 그림솜씨와 글씨솜씨로 중국에서도 이름 높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그림이 우리나라에 전하여 왔으니, 참으로 기이한 보배였다. 여옥 허작은 여러 대에 걸쳐 보관하여 왔지만, 어떤 사람의 작품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내가 그림이 그려진 비단 명주바닥의 거무칙칙한 가운데를 잠시 들여다보았더니, 두개의 작은 도장이 찍혀 있는데, 하나는 ‘형산(衡山)’이라는 두 글자였고, 하나는 ‘문징명인(文徵明印)’이라는 네 글자였다. 여옥도 비로소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것을 알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림의 머리 부분에도 팔분체로 ‘적벽야유도’라는 다섯 글자가 쓰여 있는데, ‘왕록(王祿)’이라는 도장이 뚜렷하고, 그 끝에 ‘적벽부일통(赤壁賦一通)’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역시 문징명의 글씨였다. 오후에는 회능 노장룡이 송별하고, 개평(介平)으로 돌아가 성거 이동연과 사직 윤억이 같이 갔다가 해가 저물 무렵에 비로소 왔다. 밤에는 심보 권필량의 집에서 자는데, 현부 권정구와 원부 권정삼이 또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8일. 삼가(三嘉)의 황계폭포(黃溪瀑布)을 향하여 가려고 하였다. 황계폭포 옆에는 고암사(古巖祠)가 있으니, 이 고장의 어진 분들인 노 입재(盧立齋), 이 노파(李盧坡), 임 석림(林石林) 을 같이 모신 곳이다. 단구에 사시는 종숙(從叔)께서 수임(首任)을 맡으셔서 폭포도 구경할 겸 부임하러 가시는 길에 같이 갈 것을 약속하였었다. 식후에 출발하니, 조 문연, 조 입중, 이 성민, 송 경도, 이 경요, 이 린, 최 인화, 최 겸오 등은 서쪽으로 돌아가고, 우리 일행 20여 인은 동쪽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모두들 슬퍼하며 멍하니 서서 멀리 가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먼지를 바라보았다. 삽촌(翣村) 여곡(餘谷)에 이르니, 김생(金生)이 요로(要路)에서 술을 권하였다. 구평(丘坪)의 윤흡(尹潝) 집에 이르니, 대낮에 비가 심하게 내리는데 해가 지도록 장마비처럼 쏟아졌다. 이 때문에 여기서 묵었다. 29일. 시냇물이 불어 넘쳐서 오후에 간신히 시내를 건너 겨우 언덕에 닿았다. 자진 강택준의 말이 넘어져 물에 빠져서 온몸이 흠뻑 젖었다. 여러 사람들이 구정(丘坪)으로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자진 강택준이 우리 형제들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들이 만약 나에게 시나 글을 지어 주기만 한다면, 내 비록 옷이 흠뻑 젖었어도 그대들을 따라가겠소.” 라고 하였다. 그의 소탈한 취미가 이와 같았다. 매산(梅山)을 끼고 북으로 올라가면서 두 곳의 재를 넘어 장단촌(長湍村)을 지나 고암사(古巖寺)에 이르렀다. 절은 북쪽으로는 견고한 성을 등지고, 서쪽으로는 금성산(錦城山)이 우뚝하게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허굴산(虛窟山)을 마주 하고 있었다. 기암괴석들이 앞뒤로 둘러싸고 있어서 역시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근처에 살고 있는 선비와 벗들이 모두 와서 만났는데, 그 절반은 석림 임진부의 후손이었다. 석림과 우리 낙촌(洛村) 선조와는 매우 친하게 지내서 대대로 대단히 가까운 사이로 지내 왔다. 허준(許<石/駿>)이라는 사람은 미수의 방손이었다. 그도 또한 와서 만났는데, 전주(篆籒)를 잘 써서 가학(家學)을 이을 만하였다. 30일. 일찍 황계(黃溪)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주인과 객을 합쳐 모두 40여 명이 남쪽으로 2, 3리를 가다가 산등성이를 따라 여러 굽이를 내려오다가 한 굽이를 도니, 갑자기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둘러싸 조그만 골짜기를 이루었다. 이것이 허굴산(虛窟山) 남동(南洞)이었다. 큰 시내가 급히 달려서 거꾸로 매달려 10장이나 되는 비룡폭포를 이루었다. 마침 큰 비가 내려서 물이 불었다. 거세게 넘쳐흘러 산을 향해 치켜 쳐드는 듯하기도 하고, 석벽을 뒤흔들기라도 하는 듯하였다. 우레 치듯 하는 빗줄기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흐릿한데, 가끔 바람이 불어 닥치면 어떤 경우에는 흩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모두 합쳐져서 기이하게 변하는 것이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 폭포 밑에는 큰 못이 있는데, 못 위로 돌아가며 깔려져 있는 반석에는 물이 돌 틈으로 굽이치기도 하고, 꺾어지기도 하며 흘러내려서 또 10장이 넘는 와폭(臥瀑)이 되었다. 그 아래에 또 큰 못을 이루었는데, 오른쪽 석벽 밑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서 비류를 위로 쳐다 볼 수 있기도 하고, 아래로 와폭의 이마를 굽어 볼 수도 있게 하여 우리는 내외의 장관을 거의 모두 볼 수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대상(臺上)에 늘어앉아서 ‘동유록(同遊錄)’을 정리하여 각각 한 축씩 나누어 가졌다. 임씨(林氏)들 여러 집에서 술과 안주들을 준비하여 내고, 서원(書院)에서도 또 점심밥을 준비하여 왔다. 반석 위에 앉아서 나누어 먹으니 취하기도 하고 배도 불러 돌아갈 일을 잊고 있다가 해가 이미 기울어 버렸다. 드디어 동문(洞門)을 나와 단구의 종숙과 강 자진, 윤흡, 윤 사직, 이 천약(李天若), 허 여옥, 임씨(林氏) 노소인들과 허준을 이별하였다.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다가 남정(南亭)의 큰 내를 건너 합천군을 지나 여벌점(汝伐店)에 들어가 잤다. 5월 초1일. 일찍 길을 떠났다. 지령(支嶺)을 넘어 화숙(華叔) 장동윤(張東潤)은 가곡(佳谷)으로 들어가고, 남은 일행들은 모두 곧바로 귀원(貴院)으로 가서 곽세한(郭世翰)의 궤연(几筵)에 조문을 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길을 재촉하여 안림(安林)의 주점에 다다라서 사정 조택규와 성거 이동연을 떠나보냈다. 경안 이헌우, 진여 이동급, 김치강(金致康)과 더불어 대교점(大橋店)에 이르러 말에게 먹이를 주려 하였더니, 화숙 장동윤이 가곡에서 이미 먼저와 있었다. 말을 타고 작천(作川)으로 들어가니, 자진 강택준과 문연 조휘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능중(能仲)이 와서 만났다. 초2일. 그대로 머물렀다. 초3일. 오담(鰲潭)으로 갔다. 저녁에는 법산(法山)으로 올라가 재실에서 잤다. 여러 벗들이 모두 와서 모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4일. 지나는 길에 작천에 들어갔다가 칠령(七嶺)을 넘어 하산(霞山) 강상(江上)에서 말먹이를 먹였다. 여기서 경안 이헌우와 화숙 장동윤과 작별하여 헤어졌다. 이번 유람 기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1개월하고도 며칠이 더 되었다. ++++++++++++++++++++++++++++++++++++++++++++++++++++++++++++++++++++++++++++++++++++++++++++++++++++++ 순두류록--곽태종 이 해 3월에 내가 외롭게 지팡이와 나막신 행장(行裝)을 차려 두류산(頭流山) 으로 들어가 한 면의 소략한 구경을 하였다. 예전에 산을 논하는 사람들이 방장산(方丈山) 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않다는 말이 참으로 그 비평을 잘했다고 하겠다. 높이 솟아 하늘에 닿아 호남과 영남의 사이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남국(南國)의 진산(鎭山)이 되고 둘레에 싸고 있는 것은 이름난 도시와 웅장한 고을이며, 작은 마을과 큰 동네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역과 이름난 산과 넓은 시내가 전쟁을 하는 보루인 듯 근심스러운 마당을 볼 수 있다. 이름난 집안의 여러 촌락마다 꽃이 핀 크고 작은 집들과 절들, 기름진 들판의 두터운 땅에서는 벼와 조, 기장 등의 곡물이 난다. 인물도 훌륭하고 특출한 선비가 많아 세상의 줄기와 기둥이 되어 나라에 이름을 날린다. 그러니 참으로 우리 백성들이 낙토(樂土)를 얻어서 사는 것이라 하겠다. 곧 가까운 것부터 말하면, 울창하게 늘어선 것이 박달나무나 회나무, 푸른 등나무가 천수(天壽)를 누리며 늙어가는 것임을 알겠고, 우뚝하게 구름 밖에 솟은 것은 여러 봉우리와 겹겹이 가파른 산이 기이한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임을 알겠다. 우뚝 솟아오른 바위와 깎아지른 벼랑, 우묵한 구렁과 깊숙한 웅덩이가 있으며, 달리는 길짐승으로는 곰과 호랑이, 이리와 노루, 원숭이 따위이고, 나르는 날짐승으로는 자고새와 매, 새매와 백로(伯勞, 때까치)가 울어대니 이 기이하고 괴상한 것이 많다. 신령한 약초로는 지초와 궁궁이, 산삼(山蔘)과 창출(蒼朮), 사향(麝香)과 황정(黃精) 등 신령한 잡초들이 많으니, 곧 이는 서생(徐生)이 진시황(秦始皇)을 속이고 함부로 왔다가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는 음양(陰陽)이 있고 땅에는 화이(華夷)가 있어서 구역이 구분되어 벌써 하늘이 처음 열릴 때부터 화(華)는 중토(中土)에서 거처하고, 이(夷)에 사는 사람은 변두리 물가에 살며, 길짐승은 험한 곳에 기대어 굴을 파고 살아가니, 이는 각기 그 편한 곳을 얻어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내가 두류산을 따라 유람한 뒤로 두루 보고 다 터득했으니, 대개 천왕봉이 멀지 않거니와, 사람이 많이 살긴해도 매우 성글어 세 집의 큰 마을이나 열 사내 조차 만나기 어려웠다. 좁은 집에서 풀 [연초(煙草)]과 나무 [이것을 잘라 그릇을 만든다.]로 생업(生業)을 삼고 피나무와 도토리, 개암 따위를 먹으며 칠포〔葛布〕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산귀(山鬼)를 동반자로 삼고 사슴을 벗으로 삼아 온갖 고생을 하는데, 쑥대같은 머리에 얼굴에는 때가 끼어 눈과 코도 트이지 못하니, 모습이 사람 같지가 않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이 하늘로부터 오성(五性)을 성품으로 부여받았으니 또한 실로 우리 선대 성왕(聖王)의 교육을 받은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깊은 인자함과 두터운 혜택이 사람에게 깊이 파고 들어간 것이 거의 성품을 받은 처음부터 배태(胚胎)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가난함이 이와 같이 곤란하고 먹는 것이 이와 같이 나쁘며 입는 옷이 이와 같이 남루하고 고생이 이와 같이 심한데도 오히려 인의(仁義)를 좋아하고 명분(名分)을 지켜야 함을 알아 스승을 맞이하여 자식을 가르치되 자제(子弟)에게 효제(孝悌)로 훈도(訓導)한다. 이로써 사람의 성품이 선(善)함을 징험(徵驗)할 수 있으니, 우리 선왕(先王)이 교육한 남은 은택이 깊지 않다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 내력을 물으면 동서(東西) 간에, 혹은 의관을 갖춘 후예로서 세상을 피하려 하는 것이다. 아, 세상을 피하는 것이 사람을 피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사람을 피하는 것이 자신을 수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어찌 자신을 수양하고 자산을 보존하여, 우리 낙토를 사양하고 친척과 붕우의 많은 좋은 것과 허다한 즐거움을 버리고 높이 깊은 산으로 들어가 이처럼 온갖 고생스러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인가? 또 인물이 나는 것이 각기 거처가 있어서 서로 침범하지 않으니 초목(草木)이나 조수(鳥獸), 산림(山林)이 이런 경우이고, 교룡(蛟龍)이나 어별(魚鼈), 천택(川澤)이 이런 경우이다. 오직 사람은 평평한 땅이 그가 사는 곳이니 나에게 살 땅을 잃고 살아라고 하는 것은 누가 그렇게 하겠으며, 누가 권장하겠는가? 지금 불행하게도 그 살 곳을 얻지 못하고, 그 낙토에 사는 것을 잃으며, 벼나 조를 먹는 것을 버린다면 사방을 떠도는 나머지 새나 짐승들이 거처할 곳을 빼앗아 사는 것이다. 아, 저 초목이나 조수도 천지의 조화(造化) 가운데 살아가는 만물이 아닌가? 그러니 사람이면 어느 누가 낙토에서 살고 진귀한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능히 이렇게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믿으며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 지금 사람들이 어찌 떠나지 않고 지친(至親)을 도리어 월(越)나라 사람만 같지 않게 여기고, 이웃 마을을 소원(疏遠)한 것이 더 나은 것만 같이 여기지 않으니, 몇 이랑의 농사를 지어서는 한 해를 살아갈 자본이 넉넉하지 않고, 백 냥의 엽전도 빌리기 어렵다. 시인(詩人)이 이른 바, ‘2월에 새로 뽑은 명주를 팔아 5월에 새 쌀을 사들이네. 〔二月賣新絲 五月糴新穀〕“라는 것이니,이것도 오히려 하지 못하는데 지금 이처럼 마지못할 일을 한다. 그러나 밑천으로 삼을 것은 다만 두 주먹뿐이다. 바위굴을 집으로 삼고 구릉 골짜기를 밭으로 삼아 참마를 심어 벼로 대신하고, 나물을 캐어 고기로 삼으며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머리를 감으며, 장차 한 해를 마치도록 부지런히 일하며 잠시도 쉬지 못하니, 비록 천신 만고(千辛萬苦)하더라도 어찌 전날 좋아하던 것과 즐기던 바보다 낫겠는가? 오늘의 천신 만고는 바로 나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만 그 마음만은 진실로 달갑게 여기며 즐거워하니, 전날의 이른 바 백 가지 좋아함과 열 가지 즐거움은 내가 실로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의 심두(心頭)의 고기를 깎아낸 것이다. 지금의 입장에서 예전을 돌아보면 오늘 어려운 바는 어떠하며, 전날 즐거움은 어떠한가? 나의 밭을 내가 갈고 나의 술을 내가 마시며, 나의 책을 내가 읽는다. 새들이 지저귀는 것을 즐기고 사람이 타는 관현악을 좋아하며, 밝은 달 아래 호탕하게 노래 부르는 것이 이웃 벗이 칼을 품은 것 보다 낫다. 그리하여 제목을 수식하고 몸에 문채를 내는 풍속의 변화를 받지 않고 누웠다 일어나 출입하며 마음껏 즐기니 저 발도 편안히 하지 못하는 자들에 비하면 어떠한가? 산중에 즐거움이 참으로 아득하도다. 드디어 노래하기를, 山重重兮雲深(산중중혜운심) 산은 겹겹인데 구름이 깊고 澗潔潔兮樹陰(간결결혜수음) 시냇물 깨끗하니 나무 그늘지네. 念虎號兮晝沈(념호호혜주침) 호랑이가 부르짖다 낮에 잠잠함을 생각하니 甘此山兮曾尋(감차산혜증심) 이 산을 일찍 찾은 것이 다행일세. 採藭歸兮窮霒(채궁귀혜궁음) 궁궁이 캐어 돌아오니 구름이 흐릿한데 放雞犢兮陽林(방계독혜양림) 닭과 송아지 양지 숲에 풀어놓네. 以人間之可好(이인간지가호) 사람을 좋아할 만 하다지만 誰背知我說此心(수배지아설차심) 어느 누가 내 마음 말하는 것을 알아주랴. 라고 하였다. 돌아가 이를 기술하여 적었으니, 때는 곧 임술년(1922) 모춘(暮春, 음력 3월)이었다. +++++++++++++++++++++++++++++++++++++++++++++++++++++++++++++++++++++++++++++++++++++++++++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 상쌍계신흥기행록==양경우 무오년(1618년, 광해군 10년) 늦봄(윤4월)의 초순에 나는 오산(鼇山) [장성(長城)의 별칭] 현에 있었다. 조현주(趙玄州) 공이 토포사(討捕使)로 영남과 호남의 여러 도를 안렴하다가 우리 고을에 이르렀다. 이윽고 읍내에 들어가 벗인 김 상사(金上舍)의 급계정(伋溪亭)에 들어갔다. 꽃을 감상하고 시를 지으며 서로 남쪽 지방의 산수의 승경지에 대하여 토론 하였다. 현주가, “용성(龍城)은 내가 실제로 반평생을 살면서 왕래하던 곳이며, 그대에게는 같은 지방이다. 쌍계(雙溪), 청학(靑鶴) 등은 용성과의 거리가 겨우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하였는데 늙어가니 아마도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탄식할 것일진져. 지금 내가 마침 일을 받들어 남쪽으로 가는데, 집안 형 정절공(正節公) 휴(携)의 집이 지금 성촌(省村) [남원 서면(西面)의 마을 이름]에 있으며, 그대의 아들 발(發)은 집에 있으면서 특별한 일이 없다. 그대가 비록 공부에 바쁘지만 어찌 한 번 기회가 없겠는가? 혹 산의 꽃이 지지 않았으면 함께 아름다운 지역에 대하여 토론하며 함께 시를 지어 화답하여 아름다운 곳을 유람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기회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거스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드디어 날짜를 잡고 이별하였다. 그 뒤에 방백(方伯)에게 휴가를 빌었는데,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참으로 실망이 컸다. 얼마 안 되어 조 정랑(趙正郞)과 소옹(素翁) 등이 산중의 수창시 한 편을 보내왔다. 펼쳐보니 내가 벼슬에 연연하여 시간을 내서 유람을 좇아오지 못한 것을 기롱하는 시였다. 나는 더욱 절로 즐겁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방백이 연해(沿海) 군현의 속안(續案)의 임무로 나에게 부탁을 하였다. 그 중 광양(光陽)은 실지로 지리산의 안부(案部) 에 있으니, 내가 마음속으로 광양으로부터 산에 들어가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이 편리함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인하여 편지를 소옹에게 보내, “내가 또한 이곳으로부터 갈 것이니 그대에게 이르지 못한 것이 겨우 한 달 정도이다. 산중의 경치는 그대로 옛날과 같다. 나는 곧 여러 공의 시운을 가지고 길을 따라가면서 화답시를 지을 것이다. 좇아 고을에 들어가면 동시에 유상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라고 하였다. 드디어 행장을 정돈하고 길을 나섰으니, 곧 윤사월 15일 계유일이다. 저녁에 남평현(南平縣)에 도달하여 유숙하였다. ○ 16일 갑술 맑음. 현에는 예부터 알던 몇 사람이 있다. 남계(南溪)에서 배를 띄우고 나에게 놀자고 하였다. 시내의 서쪽에는 푸른 절벽과 솟은 봉우리가 있다. 행인이 그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니, 바로 능성(綾城)으로 가는 길이다. 시내의 동쪽에 어촌 5, 6 가구가 있고 하얀 등성마루가 숲 머리에 드러나니 자못 맑고 시원한 운치가 있다. 강의 가운데서 오르락내리락하다 저물녘에 흥이 다하여 돌아왔다. ○ 17일 을해 맑음. 마침 조금 아파서 머물러 잤다. ○ 18일 병자 맑음. 일찍 출발하여 영암군(靈岩郡)에서 투숙하였다. ○ 19일 정축 맑음. 내가 장차 월출산(月出山)을 찾아가려 하니 고을 수령이 또한 나와 함께 도갑사(道甲寺)에 가고자 하였다. 말에 안장을 올리고 출발하려 할 때 관에 일이 있어서 그는 그만두었다. 나는 작은 아이 두 명을 대동하였는데, 나이가 15, 6세 정도 되었다. 한 동자는 피리를 불고 한 동자는 비파를 탔다. 모두 노비이다. 드디어 명하여 나를 따라오라 하였는데, 그들을 대동하여 나의 구경을 더 호화롭게 하기 위해서다. 함께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니 절문까지는 7, 8리가 남았다. 맑은 시내와 푸른 골짜기가 좌우에 비추니 이에 두 아이를 시켜 즉시 음을 골라 연주하고 노래하게 하였다. 천천하게 걸어가니 절문에 도달하기 몇 백 보 앞에 두 기둥의 붉은 문이 나무 꼭대기 위로 솟아 있다. 앞에 다가가서 보니 판액에 내원당(內願堂)이란 세 글자가 있다. 고을의 학정에 승려들이 견디지 못하고 이에 세력에 의탁하는 행동을 하여 절문에 이런 루를 끼친 것이 심하다. 마침내 선당(禪堂)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 20일 무인 맑음. 다리에 종기가 생겨 산을 오르지 못하였다. 쓸쓸하게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늙은 승려가 나를 찾아와, “절 뒤에 맑은 여울과 무성한 숲이 있어 더위를 식힐 만합니다.” 라고 하고 앞에서 인도하여 북쪽 담장을 나와 나를 작은 대(臺)의 위에 앉혔다. 녹음은 자리에 가득하고 한 줄기 흐르는 샘은 콸콸 소리를 내면서 대를 따라 아래로 달려 내려간다. 단애(斷崖)를 만나 폭포를 이루며 하얗게 물방울을 튀기며 내려가는 것이 이층을 이룬다. 그 높이를 통틀어 계산해보니 4, 5길 정도 된다. 그 아래는 물이 고여 깊은 연못을 이룬다. 연못은 두 개의 이름이 있는데, 폭포연(瀑布淵)이라고도 하고 북지당(北池塘)이라고도 한다. 곁에 있던 종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곳의 승려들은 물장난을 잘하는데 볼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늙은 승려에게 명하여 해보라고 하였다. 이에 젊은 중 7, 8명이 발가벗고 연못 위에 서서 두 손으로 음낭을 가리고 다리를 모아 우뚝 섰다. 연못 가운데로 뛰어들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자는 잘하는 축인데, 뛰어드는 처음에는 그가 간 곳을 모르다가 한참 지난 뒤에 머리를 솟구쳐서 밖으로 나온다. 이윽고 나왔다가 다시 그렇게 하여 앞에 하는 자와 뒤에 하는 자가 서로 쉬지 않고 한다. 그 가운데 한 중이 물속에서 나왔다숨었다 하는 것이 매우 빨랐다. 바야흐로 연못 위에 서 있는데 큰 벌이 숲에서 나와 그 이마를 쏘니 승려가 땅에 넘어져 울부짖었다. 잠깐 사이에 눈과 눈썹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즐겁지 않은 상태에서 파하였다. ○ 21일 기묘 맑음. 다리의 종기가 붉게 솟아 매우 아팠다. 이에 절에 머물렀다. ○ 22일 경진 맑음. 다리의 종기가 조금 진정되자 이에 칡뿌리와 죽순을 취하여 둥글게 묶어 작은 수레를 말에 묶어 타고 길을 나섰다.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자 두 종이 말 앞에서 인사를 올리고 떠나갔다. 저녁에 진사 백선명(白善鳴)의 집을 방문하여 유숙하였다. ○ 22일 신사 맑음. 선명이 나를 이끌고 그 선군의 옥봉(玉峰)의 옛 별장에 갔다. 서로 계곡을 샅샅이 구경하다가 돌을 쓸고 앉았다. 이야기가 두 집안의 선대의 우호와 시와 술의 즐거움에까지 이르자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선명이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선군이 어객전(御客殿) 참봉으로 완산(完山)에 있을 때 그대의 아버지께서 장차 낙하(洛下)로 향하려고 하였는데 찾아와 방문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별을 하였다. 이에 각각 시 한 수를 지었으니 모두 유고 안에 있다. 우리들이 오늘 저녁에 만나는 것은 또한 우연이 아니니 어찌 그 운을 따라 시를 짓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드디어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하여 잠시 뒤에 시를 지었다. 선명은 또한 그 선군의 절구 두 수를 외웠는데 함께 그 운을 차하여 시를 지었다. 각각 한 두루마리에 써서 나눴다. 선명은 초서를 잘 썼는데 은구(銀鉤)와 옥색(玉索) 이 감상할 만하였다. 곧바로 계곡의 밑을 따라 등나무 넝쿨을 잡고 몇 층의 절벽을 올랐다. 절벽 위에는 정사(精舍)가 있는데, 선명이 새로 지은 것이다. 작은 계집종을 시켜 불을 때서 요기를 하였다. 밥을 먹은 뒤 묵묵히 작별을 하였다. 곧바로 당악(棠岳) [해남의 다른 이름]으로 향하였다. 동성(東城)의 바깥에 있는 진사 윤 희백(尹熙伯) [이름은 적(績)으로 나의 내종형제] 의 집에 이르러 이모를 배알하고 유숙하였다. ○ 24일 임오 맑음. 정랑(正郞) 윤 귤옥(尹橘屋) [이름은 광계(光啓), 희백과 같은 마을에 산다.] 공이 아침 댓바람에 찾아왔다. 인사를 나누자 곧 소매에서 사고(私稿)를 꺼내면서, “내가 약관의 나이 때부터 문장을 배우고 한묵(翰墨)을 전공하여 지금 나이가 60을 넘었다. 엊그제 시험삼아 상자 가운데서 난고(亂稿)를 찾아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버리고 시와 문장 약간 편을 얻어 분류하여 세 권을 만들었다. 안목이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그대가 왔으니 하늘이 도운 것이다. 원컨대 그대는 나를 위하여 숨김이 없이 품평해달라.” 고 하였다. 내가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이에 책을 펼쳐 읽었다.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귤옥은 집으로 돌아갔다. ○ 25일 계미 맑음. 새벽에 일어나 귤옥의 사고를 읽었다. 조금 늦으막히 세 권의 시문을 다 읽었다. 대개 문학은 한 퇴지를 본받았고 시는 두보를 본받았다. 나의 소견으로는 문장이 시보다 나은 것 같다. 지금 세상에 구하면 대개 얻기 힘든 수준의 작품이다. 이 몇마디 말로 대면하였다. 이날 술과 안주를 조금 마련하여 이모에게 술을 올리고 밤늦게 파하였다. ○ 26일 갑신 맑음. 길을 나서 진도군(珍島郡)으로 향하였다. 나루머리에 도달하니 이른바 벽파정(碧波亭)이 물을 건너 아득하게 보인다. 눈을 크게 뜨니 바라볼 수 있다. 기후는 맑아 바람이 없어 배를 타고 빠르게 건너갔다. 정자에 올라 파도를 바라보니 수면이 평평하게 널리 퍼져있다. 사방은 마치 거울과 같다. 두 개의 작은 섬이 물결의 중앙에 솟아 있는데 아름다운 경치가 비할 것이 없다. 다만 태평한 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전각이 병난에 타버렸는데, 난리 뒤에 새로 지었다. 그러나 집의 형태가 비좁고 남루한데 청소하는 사람도 없어 새똥이 마루에 가득하다. 다시 말을 재촉하여 10여 리를 가서 진도군에 도달하였다. 고을은 숲과 갈대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매우 쓸쓸하다. ○ 27일 을유 맑음. 고을 수령이 나에게 말하기를, “고을의 뒤에 망덕봉(望德峰)으로 불리는 산이 있는데, 매우 높습니다. 올라가면 남해를 굽어볼 수 있습니다. 어찌 가서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나와 고을 수령이 북과 피리를 대동하고 올랐다. 서남쪽의 거대한 바다가 모두 자리 아래에 보인다. 고래 같은 파도는 아득하게 넓어 하늘에 잇닿아 끝이 없으니, 아 장엄하구나. 곁에는 늙은 아전이 바닷가 섬의 이름을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알려 주고 있다. 이에 한라산을 가리키니 하늘 끝에서 보일락말락한다. 아득한 저 끝에 있는데 그 크기가 마치 모소(母梳)와 같다. 고개를 돌리니 낙조가 점점 서쪽 바다에 가까워지고 있다. 붉은 파도와 채색의 구름이 만 리 밖에서 보인다. 잠시 뒤에 거센 바람이 갑자기 일어 바다가 일렁이고 어두운 기운이 불어나 모든 산이 움직이려 하며 파도가 일제히 소리를 내니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드디어 파하고 돌아왔다. ○ 28일 병술 맑음. 내가 돌아오는 길에 벽파정의 야경을 감상하고 싶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말을 달려 홀로 정자의 위에 올랐다. 이경(二更)정도 되어 낚시를 마치고 돌아왔다. 새는 날지 않고 많은 별들은 물에 비추는데, 위아래가 찬란하다. 조용하게 홀로 앉아 있으니 맑은 가슴 속의 생각을 짚어낼 만하다. 조용한 가운데 문득 파도 치는 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 오랜 시간을 그치지 않는데, 고래나 붕새가 장난하는 것인가 의심이 든다. 밤이 어두워 비록 분명히 파악할 수 없지만 깃과 갈기가 거꾸로 드리운 형상을 본 것 같다. 벽 위에는 한유천(韓柳川), 유서경(柳西坰) 등 여러 어른들의 십운 배율시가 있다. 관청의 하인으로 하여금 불을 밝혀 베끼게 하고 그 운을 따서 시를 지었다. 짓기를 마치니 동쪽이 환해 온다. ○ 29일 정해 맑음. 새벽을 타고 배를 불러 바다를 건넜다. 바다에서 배를 타면서 일렁이는 파도를 보니 신선세계와 세속이 현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서글프게 한다. 다시 당악으로 돌아와 저녁에 희백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 5월 1일 무자 맑음. 강진현에서 유숙하였다. ○ 2일 기축 맑음. 길을 나서 장흥부로 향하였다. 6, 7리 정도를 가니 장흥에 살고 있는 이의신(李懿信)이 길옆 정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서로 회포를 풀고 시간을 보내면서 갈 것을 잊었다. 윤희백이 당으로부터 나와 함께 왔는데, 이곳에서 작별을 하고 돌아갔다. 저녁에 장흥부에서 유숙하였다. ○ 3일 경인 맑음. 보성군에서 유숙하였다. ○ 4일 신묘 맑음.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다. 고을 수령인 정홍량(鄭弘亮) 군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해창(海倉)에까지 왔다.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여기서 흥양(興陽)까지는 육로로 거의 70리가 됩니다. 만약 배를 타고 바닷길을 택한다면 수로로는 겨우 40리 정도입니다. 돌아가는 것과 빠른 것이 매우 차이가 나는데 다만 바닷길은 위험하니 육로를 택하십시오. 공이 두 길 중에 취하십시오.” 라 하니, 내가, “바닷길의 장엄한 여행길은 내가 원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세 척의 배에 돛을 올렸다. 두 척의 배에는 짐과 말 등을 싣고 한 척의 배에는 나와 따라오는 자 5, 6명과 뱃사공 한 사람이 탔다. 떠나려고 할 때 정군이 나에게 경계하여, “풍파가 쉽게 일어나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면서 작별을 하였다. 수십 리를 가니 돛이 순풍을 받아 매우 빠르게 나아갔다. 문득 뱃사공이 배 뒤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고하여, “거센 바람이 오고 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이에 일어나 바라보니 동남쪽의 바다의 파도가 마치 설산(雪山)처럼 서 있는데, 그 형세가 이미 가까웠다. 내가 뱃사공에게 묻기를, “이와 같으면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하자, 뱃사공이, “앞으로 갈 길은 멀어 아직 20리가 남았으니 이번 여행은 진실로 힘들겠습니다. 그러나 돛 아래의 자리에 가셔서 배에 탄 사람에게 명하여 각각 노를 가지고 힘써 젓는다면 비록 위험한 것을 면할 수는 없으나 별 탈은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배 안에 마침 술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한 사발씩 나눠주어 놀램을 진정시키고 노를 부지런히 저으라고 명하였다. 이윽고 바람과 파도가 이르니 높은 물결이 솟아 올랐다. 고단한 배는 힘이 약하여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기를 몇 번을 반복하는데,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고 굽어 천 길의 바다를 쳐다보면서 배 안의 사람들에게서는 살아남는다는 희망이 없었다. 내가 이때에 현주(玄州)가 압록협(鴨綠峽)에서 지은 율시 한 수의 운자를 사용하여 억지로 시를 지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못 마음으로 안정을 취한다고 여겼는데, 뱃사공이 자주 고하여,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라고 한다. 문득 나의 안색이 평상시와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니 부끄럽다. 강기슭에 배를 대니 해는 겨우 정오 무렵이었다. 저녁에 흥양현에서 유숙하였다. ○ 5일 임진 맑음. 이부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장차 길을 나서려고 하였다. 고을 수령인 박유귀(朴惟僮) 군이 비록 무관이나 자못 문자를 알아 나와 오래전부터 친하였는데 나와서 만류하면서, “오늘은 오월 오일로 명절인데, 저희 고을이 비록 맛있는 음식은 없으나 어찌 공에게 하루 음식 대접하는 것을 근심할 정도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이에 걸음을 멈추었다. 문밖에 여러 사람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를 지르니, 태수가 문을 열라고 지시한다. 고을의 백성 백여 명이 뜰 아래에 들어오니 태수가, “이 고을은 삼가는 것이 많아 단양절에는 각저희(角觗戲)를 합니다.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요컨대 손님에게 웃음을 제공하고자 하여 불러들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말이 마치기 전에 각저희를 하여 승부를 다투어 차례로 나아가는데, 가운데 키가 크고 흑색인 사람이 서 있다. 다리는 서 있는 기둥과 같은데 연이어 7, 8명을 물리치니 희장(戱場)이 드디어 비었다. 계단 아래에 얻드려, “놀이가 다 끝났습니다.” 라고 하니, 태수가 명하여 부일목(浮一木)로 된 사발을 상으로 주었다. 마르고 키가 작으며 얼굴이 유생처럼 하얀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있었는데, 앞에 나와 청하기를, “원컨대 저 사람과 겨루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수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손짓하여 물리치려고 하였는데 무리들이 힘껏 청하였다. 이윽고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바라보니 마치 왕개미가 나무를 흔드는 것 같다. 뜰에 있는 백여 명이 서로 마주보고 웃는데, 작은 사람이 갑자기 기합을 지르자 큰 사람이 이에 대응한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서로 돌다가 두 사람이 함께 넘어졌다. 모래와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데 자세히 보니 작은 사람이 위에 있다. 내가 태수와 함께 소리를 지르고 크게 웃으면서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나이를 물어보니 큰 자보다 나이가 한 살 적다고 한다. 태수가, “이 사람은 서울 저자의 소년으로 장사하면서 이 고을에 왕래합니다. 내가 또한 일찍이 그가 이처럼 힘이 센 줄은 몰랐습니다.” 라고 하였다. 곧 쌀과 베를 상으로 주니, 놀이가 마쳤다. 관기인 몽접(夢蝶)이란 이가 들어와 인사를 드리는데, 이 기생은 젊었을 때 노래를 잘 불렀다. 난리를 만나 떠돌아 다니다가 용성에 이르러 내가 거처하는 촌사(村舍)에 3년 동안 붙어 살았는데, 그 이후로 20년 간을 어디에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문득 만나니 또한 세상사는 사람의 우연한 일이다. 서로 옛날 이야기를 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아직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한들한들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른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니 밤 늦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하였다. ○ 6일 계사 맑음. 재촉하여 식사를 하고 일찍 길을 나섰다. 낙안군(樂安郡)에 도달하니 이경(二更)이 되었다. ○ 7일 갑오 맑음. 아침 늦게 출발하여 순천부에 도달하였다. 부사인 지봉(芝峰) 공이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객관으로 나와 나를 맞이하였다. 일러 말하기를, “오랫동안 오진 고을에 있으니 늘그막에 즐겁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어찌 외딴 곳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는 기쁨에 그치겠는가?” 라고 하였다. 인하여 더불어 시와 문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것저것 차근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촛불을 켤 때 쯤해서 파하였다. ○ 8일 을미 맑음. 내가 일찍 관아에 가서 부사에게 인사를 올렸다. 때가 4월이라 모든 석류나무가 바야흐로 꽃을 만개하여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으니 마치 몸이 비단 장막 안에 있는 것 같다. 지봉이 돌아보고 가리키면서, “내가 서울에 있을 때 혹 사람을 방문하면 이 꽃이 화분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는 꽃의 아름다움이 쓸쓸하다고 여겼었다. 그러므로 지금 꽃이 이처럼 무성한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에 함께 동성(東城) 밖으로 나가 환선정(喚仙亭) 위에 앉았다. 맑은 시내 한 줄기가 난간 밖으로 비껴 흘러가고 넓은 들이 산까지 뻗어 있다. 시야가 멀리까지 트이니 ‘작은 강가 남쪽의 시원한 경치’라고 이를 만하다. 부사가 나에게 요구하여 몇일을 더 묵었다. 벽 위의 여러 시에 두루 화운을 하였다. 내가,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초목이 무성하니, 두류산의 여행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이만 떠나겠습니다. 돌아올 때 다시 들러 며칠 즐기는 것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사가 허락하자 이에 출발하였다. 저녁이 되기 전에 광양현에 당도하였다. 바닷가는 척박하여 사람 사는 자취가 드물었다. 작은 성은 국자와 비슷한데 성가퀴는 반이 무너졌다. 성문의 밖에 오직 늙은 홰나무가 우뚝 서서 줄을 이루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객관의 밖에 이르러서야 한 늙은 아전이 문에서 맞이하여, 고을 수령이 다른 벼슬자리를 받아 멀리 떠났다고 고한다. 이른바 동상방(東上房)이란 것은 다만 두 칸의 작은 방이다. 옷과 띠를 풀지 않고 베개에 누워서 밤을 보냈다. ○ 9일 병신 맑음. 날이 밝자 두치(頭峙)로 향하였다. 깊은 산에 첩첩의 고개에 구불구불 한 줄기 길이 나 있어 행로가 매우 어렵다. 오시에 강을 건너 악양(岳陽)을 지났다. 화개(花開)의 골짜기에 도달하기 7, 8리 전에 길 옆의 민가에서 유숙하였다. 이 지역은 경치가 아름다워 호남과 영남에서 으뜸간다. 큰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는데, 파도가 양 협곡을 때린다. 강의 양 물가는 매우 넓어 겨우 소와 말을 분별하는데, 아득한 첩첩의 봉우리가 강을 끼고 마주보고 있다. 동쪽은 지리산이며 서쪽은 백운산(白雲山)이다. 고기잡는 민가는 백사장가에 촌락을 이루고 있다. 띠풀과 가시나무로 엮은 울타리와 지붕이 대나무 사이로 보일랄말락한다. 이른바 ‘악양의 민가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 이것을 가리킨다. ○ 10일 정유 맑음. 일찍 길을 나서 쌍계(雙溪)로 향하였다. 강을 따라 북쪽으로 갔는데, 경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림과 같다. 화개의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골짜기 문은 서쪽을 향하여 있다. 골짜기는 매우 크고 깊어 큰 시내가 산중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돌을 때리며 우레 소리를 내면서 큰 강으로 흘러 들어가니 바로 화개의 하류이다. 이곳으로부터 강을 따라가는 길을 버리고 시내와 나란히 10여 리를 가서 쌍계의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였다. 물 한 줄기가 석문으로부터 나오며 다른 한 줄기는 신흥(神興) 쪽에서 나온다. 합하여 거세게 흘러가니 바로 화개의 상류에 있는 무릉계(武陵溪)이다. 시내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 수백 보를 가니 두 바위가 길 양 옆에 마치 문처럼 마주보고 서 있다. 쌍계사를 출입하는 사람은 이것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 높이가 모두 5, 6길은 되는데 ‘쌍계석문(雙溪石門)’이란 커다란 네 글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 하나에 각각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필획이 바르고 엄하여 칼과 창이 나란히 마주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고운(孤雲)의 글씨이다. 정신이 감동을 받아 말에서 내려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대개 당나라 조정의 여러 명의 명필이 있는데, 모두 저 태부(楮太傅), 안 태사(安太師)를 칭하지만 최 학사(崔學士)를 칭하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아마도 외국 사람이라 그랬던 것인가? 저공은 논하지 말고, 일찍이 안공의 마애비(磨崖碑)의 나무에 새긴 것을 보니 결코 이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작은 고개를 넘으니 쌍계사가 나왔다. 거처하는 승려가 나와서 맞이한다. 이끌어 학사대(學士臺)에 이르니 승려가 말하기를, ‘옛날에 대 위에는 보물스런 건물이 있었는데 신라 시대에 창건한 것입니다. 난리를 겪어 폐해져 중건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옛날의 비가 우뚝 홀로 남아 있으니 실제로 진감태사(眞鑑太師)의 비명(碑銘)으로 고운이 짓고 쓴 것입니다. 문자의 전형이 이따금 옛것을 모방하였는데 한 글자 반 글자가 떨어져 거의 읽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한다. 선당에 들어가 잤다. ○ 11일 무술 아침엔 맑고 저녁엔 흐림. 느즈막히 일어나 정돈한 다음에 늙은 승려 8, 9명과 함께 절 뒤의 험준한 절벽을 개미처럼 부여잡고 올랐다. 여러 승려들이 견여를 가지고 뒤따랐다. 내가, “나는 젊어서부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튼튼한 몸을 갖추지 않은 적이 없다. 지금 비록 늙었느나 어찌 너희들에게 수고를 끼치겠는가? 그것을 두고 와라.” 라고 하였다. 몇 리를 가니 자못 힘이 들어 젊은이로 하여금 등뒤에서 밀게 하였다. 오래지나 더욱 힘이 들자 돌에 걸터 앉아 잠시 쉬었다. 그 이름은 잊어버린 한 늙은 승려가 있었는데, 자못 문자를 알아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만하였다. 그가 뒤에 있었는데 내가 불러 오게하여, “심하구나 내가 많이 늙었구나. 사람으로 하여금 밀게 하여야 갈 수 있으니 이것은 비록 가마는 면하였으나 오히려 기대는 바가 있으니 어찌 이렇게 하면서 튼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고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이곳부터 여러 승려들이 나를 가마에 태워 올라갔다. 점점 멀리가자 길은 더욱 험난해지고 승려들은 더욱 힘들어 하였다. 굽어보니 가마를 맨 승려들이 마치 소처럼 헐떡거리며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늙은 승려가 뒤에 따르면서 피곤한 이들은 재촉하면서, “앞길이 멀지 않았다. 게으르지 마라, 게으르지 마라. 전년에 하동 군수가 산처럼 뚱뚱했어도 너희들이 능히 감당하였는데 이번 행차에 어찌 수고스럽다고 하느냐?” 라고 하자, 가마를 맨 자가 답하여, “하필이면 하동군수를 이야기하십니까? 근래에 토포 영감은 복이 다하였을 것입니다.” 라 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막고 조용히 웃었다. 잠시 뒤에 승려들이 길이 끊어졌다고 고하여 나로 하여금 가마에서 내려 걷게 하였다. 걸어가다가 잔교를 만났다. 이른바 잔교라는 것이 세 가닥 긴 나무를 엮어 암벽의 틈에 나무의 양 끝을 얽어 매어 허공에 걸터 매었는데 흔들흔들 거린다. 사람이 건너면 삐걱 소리를 내는데, 아래를 임하니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세 번을 건너니 대략 수십 걸음을 지나게 되었다. 만약 백혼무인(伯昏無人) 같은 신왕(神王)이 아니면 모두 엎드려 기어서 건너니 낯빛이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잔교가 다하니 불일암(佛日庵)이 보였다. 아득하여 마치 구름 끝에 매달린 풍경 같다. 암자 앞 십여 보 거리에 석대(石臺)가 있는데 2, 30명은 앉을 수 있다. 그 높이는 몇 천 길〔仞〕인지 알 수가 없다. 향로봉(香爐峰)이 왼쪽에 있고 청학봉(靑鶴峰)이 오른쪽에 있는데, 모두 우뚝 솟아 위로 하늘에 닿아 있어 웅대함이 비교할 것이 없다. 그 아래는 어두컴컴한데 구름과 나무가 서로 섞여 있는 것은 청학동이다. 승려가, ‘옛날에 한쌍의 푸른 학이 푸른 절벽 사이에 둥지를 틀어 봄과 여름에 새끼를 기르기 위해 돌아오곤 하였다. 이것이 골짜기가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후로 천백 년 동안 왕래를 그치지 않았는데 걸음을 끊고 그림자가 보이지가 않은 지가 지금 10여년이 된다.’고 하였다. 나와 늙은 승려는 오랫동안 탄식을 하였다. 폭포가 향로봉의 오른쪽 중턱에서 쏟아져 내려 대의 아래에 이르러 웅덩이를 이룬다. 커다란 무지개가 길게 늘어져 물을 마시고 비단 띠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폭포는 벼랑에 쏟아져 골짜기를 돌아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우레와 전쟁터의 돌격하는 소리 같으니, 참으로 절경이다. 대로부터 조금 왼쪽으로 5, 6보를 가니 또 대가 있다. 대의 위에는 완폭대(玩瀑臺)라고 쓰여져 있는 돌이 있다. 거처하는 승려가 이것과 석문의 큰 글씨가 모두 최치원 공이 쓴 것인 것을 말하여 주었다. 신선과 범인의 필획이 대단히 차이가 나 같지 않으니 세상에 눈 한 쪽을 갖춘 사람이면 그 진위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애석하도다. 배회하는 사이에 어두운 구름이 다리 아래에서 일어나 가는 비를 뿌린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옷을 적시니 마침내 불일암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천봉 만학(千峰萬壑)의 괴이한 나무와 기이한 바위가 구름과 노을이 일어나고 걷히는 사이에 혹은 숨고 혹은 드러나니 정신과 뼈가 서늘해지고 조심스러워지는데 마치 신옹(神翁)과 우객(羽客)을 만난 것 같으니 참으로 신선 세계이다. 다만 암자는 거처하는 승려가 없으며 향불 또한 끊어졌다. 집은 오래되어 비가 세고 붉은 벽은 검고 어두워져 있다. 산중의 제일 사찰로 하여금 거의 무너지게 되었는데 손을 써서 중창하는 자가 없으니 선가의 각박함을 또한 알 수가 있다. 잠시 뒤에 비가 그치니 나는 듯 산을 내려왔다. 해거름에 쌍꼐사로 돌아와 유숙하였다. ○ 13일 기해 흐렸다가 갬. 일찍 출발하여 장차 신흥동으로 길을 떠나려고 하니 늙은 승려가 따라와서 석문에 이르러 이별을 고하였다. 이윽고 석문을 나와 무릉계로 돌아와 건너 신흥동에 들어갔다. 골짜기는 넓은데, 흰돌이 이리저리 널려 있다. 맑은 여울이 쏟아져 내리고기이한 봉우리와 푸른 절벽이 우뚝서서 둘러 싸고 있다. 칼날이 허공을 덮고 있고 옥순(玉筍) 같은 봉우리가 그 끝을 내보여 안계(眼界)는 밝고 정신은 맑아 흥이 일어나 미칠 것 같다. 시내의 북쪽에는 활 모양의 숲이 솟아 있는데, 그 나무는 대부분 소나무, 단풍나무, 종가시나무, 상수리나무 등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 이름을 알지 못하겠다. 번성한 가지와 오래된 넝쿨이 층층의 절벽과 바위에 섞여서 꽉쩔어 얽어 있는데 길이 그 사이로 나 있으니, 우러러 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해가 바야흐로 정오에 있는데 땅에서는 조금도 보이지 않으니 이 또한 장관이다. 10여 리를 가서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니 돌이 서 있다. 삼신동(三神洞)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시승(詩僧) 각성(覺性)이 나와서 나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다. 검은 두건과 도납(稻衲)을 입고 바야흐로 물가에 서 있는데 내가 오는 것을 보고 합장을 하며 한 번 웃는다. 친구처럼 길에서의 노고를 위로한다. 골짜기의 물은 삼신동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신흥의 물과 합해진다. 시내 위에 외나무 다리가 있는데, 가리키면서 홍류교(紅流橋)라고 하였다. 내가 각성 대사에서 물어, “내가 홍류교를 들은 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다리가 없는데 다리라고 하니 왜 그런가?” 라고 하자 각성대사가 크게 자랑하여, ‘옛날에 시내 위에 5칸의 떠 있는 누각을 지었는데 금색과 푸른색이 서로 빛나며 좌우의 난간이 파도의 중앙에 그림자를 비추니 유람하는 사람과 승려들이 서로 왕래하던 곳으로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지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쟁이 나서 타 버린 뒤로 아직까지도 중건하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지금의 이른바 홍류교란 것은 철로보(鐵鑪步)와 비슷한 경우로 그 이름을 무릅쓴 것인구나?” 라고 하였다. 이에 한 번 웃고 다시 서로 손을 잡고 1리 정도를 가서 절에 도착하였다. 절은 또한 난리 뒤에 새로 창건하였는데 승려가, “동량(棟樑)을 새로 올린 규모는 전에 비하여 더욱 화려하지만 다만 능파당(凌波堂)은 아직 짓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금사 도량(金沙道場)은 아름다워 영롱하게 빛을 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발을 들어 머뭇거리게 하여 감히 방자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절 앞에는 누각이 있는데, 대사와 함께 올랐다. 산중의 백 갈래의 시내가 합하여 한 줄기 물이 되어 누대 아래에 이르러 연못을 이룬다. 깊은 곳은 검은 색을 띠고 얕은 곳은 맑다. 물 건너 있는 봉우리들이 모두 이 누대를 향하여 공손히 읍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날은 새벽에 비가 잠깐 오다가 저물녘에 개었는데 바야흐로 내가 홍류교에 도달할 때는 가는 비가 또 내렸다. 누대에 올랐을 때는 반은 흐리고 반은 맑아 구름과 노을의 농담이 만가지로 변하였다. 문득 큰 물고기가 물을 차고 뛰어 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멀어서 그 이름을 분별할 수 없다. 그 길이는 한 자 정도 된다. 산의 나무에는 진귀한 새 여러 종류가 울고 있고 바로 아래에는 헤엄치는 물고기 또한 뛰어오른다. 물은 비록 정(情)이 없으나 능히 나를 위하여 앞뒤에서 맞아주는 것 같다. 젊은 승려들은 옥같고 얼음 같은 용모를 지녀 눈썹과 눈이 그린 것 같은데, 각성 대사를 에워싼 자들이 수십명이다. 그 나머지 처마 아래 뜰과 섬돌에 있는 자는 수십 수백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다. 모두 그의 문도이다. 서로 밀치고 다퉈 내가 앉은 앞으로 나와 각각 경전을 들고 제목을 써 줄 것을 청한다. 내가 다 쓸 수 없다고 사양하고 다만 몇 권에만 써서 주었다. 각성대사가, “빈도는 오래전에 그대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지금 만났으니 원컨대 시 한 수를 지어주십시오. 다른날 만나는 자료로 삼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인하여 소옹(素翁)과 여러 공들이 지어 준 시를 꺼내어 나에게 화운을 청하였다. 내가 사양할 수가 없어서 붓가는 대로 글을 지어 주었다. 내가 각성대사와 함께 하루 밤을 동숙하면서 법과 도를 논하고 묻고 싶었는데, 관직을 떠난 지가 오래되고 맡은 일이 지체되었으며 겸하여 나를 따른 자들의 식량이 바닥이 보여 점심을 먹은 뒤에 절문을 나왔다. 이른바 세 걸음에 고개를 돌리고 다섯 걸음에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옛사람이 먼저 나의 마음을 알았구나. 홍류교에 이르러 대사와 이별하고 하(□원문결락) 촌사에서 유숙하였다. ○ 13일 경자 맑음. 아침에 느즈막히 강을 건너 강진에 있는 두치로 돌아왔다. 오산(鰲山)의 관인이 그 고을의 급한 보고〔馳狀〕을 가지고 말 앞에서 바쳤다. 받아서 보니 늙은 도적이 요양(遼陽)을 침범하여 삼진보(三鎭堡)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중국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병사를 일으켜 토벌하는데, 우리 조정에서도 중국의 명령을 받들어 군현에서 병사를 거둬들여 장차 전쟁의 기일에 도달하려고 한다는 것으로, 총병의 전령이 매일 이르니 아전들이 줄줄이 와서 급함을 보고한다. 저녁에 광양현에서 잤다. ○ 14일 신축 맑음. 일찍 일어나 편지를 써서 지봉 공에게 보냈다. 군무를 자세히 보고하여 감히 사유를 돌리거나 생략하지 않았다. 인하여 환선정의 판상 운을 사용하여 율시 두 수를 지어 인사를 올렸다. 지름길로 승평부(昇平府) 북촌(北村)의 부유(富有) 를 따라 산과 골짜기를 거쳐 수없이 길을 돌아 날이 어두워질 때에 비로소 골짜기의 조금 평평한 곳에 도착하였으니 바로 동복현(同福縣)이다. 현에는 협선루(挾仙樓)가 있는데 황폐한 숲 저 너머로 보일락말락 한다. 채찍을 가하여 현에 도착하여 누대에 올라 자세히 감상하였다. 동우(棟宇)는 정미하다. 화평할 때 지었는데 난리를 겪었는데도 완전하다. 아래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푸른 연이 대단히 많아 반듯하게 솟아 있다. 큰 대나무가 상당히 많은데 남쪽 담장 아래에서 자라고 있다. 상서로운 돌의 한 면으로 된 봉우리는 모두 안석에서 바라볼 수 있으니, 깊은 산 가운데 이처럼 아름다운 경치가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정자(正字) 벼슬의 동생은 몇 년 전에 이 누대를 보았는데, 돌아와서 나에게 매우 자랑을 하며, “절대 가인이 빈 골짜기에 있는 것과 서로 같다.” 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좋은 비유이다. ○ 15일 임인 흐림. 길을 떠나 화순현으로 향하였다. 중도에 소나기를 만나 일행이 모두 젖었다. ○ 16일 계묘 흐림. 비가 밤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관아로 돌아오는 것이 급하여 도롱이를 쓰고 길을 나섰다. 능양현(綾陽縣)의 앞에 이르러 지름길로 연주정(聯珠亭)에 갔다. 올라가 근방의 경치를 바라보니, 때에 시내가 불어 바야흐로 높아 모래톱이 모두 잠겼다.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 강위의 열 두 봉우리가 소라껍질처럼 반은 보이지 않는다.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어둠을 타고 현에 들어가니 고을 수령은 벼슬이 갈려서 가고 새로 임명을 받은 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객관은 매우 고요한데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관기 몇 사람이 찾아와 인사를 드린다. 술을 몇 순배하고 파하였다. ○ 17일 갑진 맑음. 남평현에서 잤다. ○ 18일 을사 맑음. 해양(海陽)의 서촌(西村)의 길을 따라 횃불을 들고 현에 들어갔다. 다음날 출발할 때 노비의 주머니에 담긴 시편을 점검해보니 5언, 7언 율시가 모두 21수이며 절구는 5수, 배율은 1수로 모두 27수이다. 백선명의 집에서 지은 절구와 환선정의 배율 및 윤희백에게 준 율시, 벽파정의 배율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소옹과 여러 공들이 입산 때 지은 운에 차운한 시이다. 대개 이것은 내가 전날 말한 것을 실천한 것이다. 옥소암의 단율(短律) 세 수는 내가 불일암으로부터 비를 맞고 쌍계로 돌아와 과감히 가서 탐승하지 못하였기에 빼 놓았다. 신묘년(151년, 선조 24년)에 내 나이가 아직 젊었을 때 어른을 모시고 두류의 북쪽 부분을 유람하였는데 백장사(百丈寺)에서 잤다. 금대암(金臺庵)에 들어가고 용유담(龍遊潭)을 구경하였으며 군자사(君子寺)를 따라 천왕봉에 올랐다. 이윽고 새로로 실상사(實相寺)의 폐해진 터를 지나 은거한 변산(邊山) 사람을 방문하였다. [산 사람으로 이름은 사정(士貞)이다. 산중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참봉에 임명하였는데, 나오지 않았다. 또 부르니 이에 나왔으나 몇 달이 되지 않아 버리고 산으로 돌아갔다. 나이 70에 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10일 동안 마음대로 구경을 하였다. 그 다음해에 장차 남쪽 방면을 유람하려고 하였는데 난리가 일어나 가지 못하였다. 중년에 보잘 것 없는 관직으로 연명을 하여 일이 바뻐 한가로운 시간이 없었다. 백수의 나이에 비로소 숙원을 풀어 아름다운 산에 자취를 남기니 또한 운수가 있는 것인가? 아쉬운 것은, 바야흐로 내가 두치를 넘어 악양과 화개를 지나 쌍계에 들어갈 때 협중의 백성이 이따금 산록을 가리키며 옛날에 아무 아무개 사람이 살던 곳이라고 고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아쉬운 탄식이 일어나게 하는데, 그 바위 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던 당시에 이 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처음과 끝을 고찰해보면 마음의 자취가 같지 않으니 금년에는 산림에서 살다가 내년에는 성시에 살지 않은 자가 드문 것이다. 세상에 나가고 머무는 것과 드러내고 감추는 것이 비록 한 시절에 헤아려 볼 일이지만 모두 숲과 계곡에 부끄러움을 끼친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들은 공무의 여가에 산의 지름길에 걸음을 빌려 산에 들고 산을 나는 것이 삼일을 넘지 못하는 자들은 또한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돌아가면 마땅히 벼슬을 버리고 일에서 물러나 늙은 시절을 흰 구름이 이는 곳에서 보내면서 종려나무 신과 대나무 지팡이로 이 산의 봉우리와 골짜기를 두루 찾아다니면서 나의 뜻을 마칠 것이다. 이윽고 이 말로써 소옹과 여러 공에게 말하고 인하여 붓을 들어 기록한다. 모년 모월 모일 제호주인은 쓴다. +++++++++++++++++++++++++++++++++++++++++++++++++++++++++++++++++++++++++++++++++++++++++++++++++ 유두류록====김영조 두류산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수백 리로 일곱 고을의 경계를 감싸고 있으니, 동방에서 일컫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위인(偉人)과 석유(碩儒) 대부분이 올라 유람했다. 정묘년(1867) 병오일에 내가 아우 김영우(金永祐), 족제(族弟) 김영문(金永汶)과 함께 숙부와 권농은(權聾隱) 어른을 모시고, 용당(龍堂)에서 단란하게 모여 진경(眞境) 찾는 계획을 세우고, 비로소 출발했다. 점심 때 생림(生林)에 이르러 권정첨(權正瞻)과 함께했다. 고읍(古邑)에 이르러 하루 묵고, 다음날 엄천(嚴川)을 건너 엄천사 절터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연화동(蓮花洞)에 이르러 고개를 넘으니, 오래된 마을에 정자가 있는데, 그 고을 이름을 문헌(文獻)이라고 하니, 바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쉬었던 곳이다. 마침 예전에 알던 유주응(柳周應)을 만나 매우 기뻐서 잠시 머물러 이야기했다. 강을 따라 세동(細洞)에 이르니, 감나무가 무더기로 서 있고, 닥나무와 뽕나무가 양쪽으로 둘러 있었다. 문수사(文殊寺)를 향하니, 장소가 매우 깊숙하고 치우쳐 있었다.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다음 날 박덕원을 시켜 점심을 싸게 하고, 상봉(上峰)으로 향했다. 마을 뒤로 고개를 따라 몇 리를 곧장 올라가서, 작은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골짜기로 들어가니, 수목의 그늘에 가려 해가 보이지 않았다. 좁은 길을 찾아 이십 리를 가서 봉우리 아래 이르니, 산막(山幕)이 있었다. 산막 오른쪽에 있는 돌 틈의 샘물이 매우 맑고 시원하여 모두 손으로 떠서 마시고 바위 위에서 쉬었다. 그러다 일어나 이리저리 오가며 동남쪽을 바라보니, 익숙한 산천이 희미한 가운데 거의 다 드러났다. 풀을 밟고 나무를 더위잡고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사방을 돌아보니, 좌우에 기이한 꽃과 풀들이 있는데 모두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십리를 가서 중봉(中峰)에 이르러, 각자 한 덩이의 밥을 먹고, 샘물을 마셨다. 산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니, 상봉이 서쪽과 남쪽 사이에 있는데, 하늘에 꽂힐 듯 솟아 나온 것이 마치 빨아 당기려는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봉우리 아래 이르러, 작은 길을 따라 숲속으로 머리를 숙이고 거의 오 리쯤 가니 불모지가 있었는데, 바로 상봉이다. 비로소 허리를 펴고 사방을 바라보니, 마치 백척간두(百尺竿頭)라 발 디딜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멀리 바라보니, 조선 팔도가 모두 한 눈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시력이 가물가물하여 끝까지 볼 수 없는 것이다. 남쪽으로 바다에 섬이 점점이 있는 것이 마치 바둑돌을 둔 것 같고, 만경창파는 마치 푸른 쪽 같으며, 와룡산(臥龍山), 백운산(白雲山), 도굴산(崛山), 황매산(黃梅山) 등은 마치 평지 같았다. 위에 일월대(日月臺)가 있는데, 오십여 인이 앉을 만하였고, 돌이 자리처럼 펼쳐져 있으며, 작은 돌이 둘러서 담을 치고 있었다. 아래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돌부처가 있었다. 대부분 방백(方伯), 어사〔繡衣〕, 수령들이 이름을 썼으니, 서상윤(徐相潤), 송훈재(宋勳載), 조연명(趙然明), 조철림(趙徹林)만 대략 기록하고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돌아가야 할 기약이 매우 촉박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보지 못했다. ++++++++++++++++++++++++++++++++++++++++++++++++++++++++++++++++++++++++++++++++++++++++++++++++++ 유두류록-=배찬 나는 일찍이 산수를 좋아하는 벽(癖)이 있어서 우리나라의 기이한 절경에 나의 종적을 두루 남기려고 하였다. 우리 집이 방장산(方丈山) 아래에 있었는데 아직 산 정상에 올라보지 못했다. ※이후 원문의 ‘因校事入見吾侯’ 앞뒤에, ‘日月臺乎’ 앞에 결락(缺落)이 있어서 번역이 안 됨. 다만 전후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저자인 배찬이 고을 수령을 알현하였는데, 수령이 천왕봉 일월대(日月臺)에 한 번 가보자고 제안하는 내용임. 내가 대답하기를, “가볼 뜻은 있었지만 아직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수령이 말하기를,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한지 5년이 되었는데 공무에 골몰하다 보니 또한 명산의 뛰어난 경관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서리와 눈으로 산에 오르지 못할까 걱정되니 바라건대 빨리 산행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마침내 9월 초4일에 산행을 시작하였고, 그날 저녁에 화림암(花林菴)에 이르렀다. 고을의 연로한 유생(儒生) 네다섯 분이 또한 와서 함께 하였다. [권응낙(權應洛), 민백곡(閔百谷), 민치순(閔致淳), 강지정(姜指鼎)이다.] 골짜기가 깊고 서리가 늦어져서 산열매는 먹을 만하고 단풍은 그래도 볼만 하였다. 각자 화림동의 ‘임(林)’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편씩을 지었다. 수령이 말하기를, “하룻밤의 음식 제공은 암자의 승려들에게 부탁하지 말고 각자 자비를 내서 하도록 합시다.” 라고 하니, 승려들이 또한 은혜에 감사하며 그 덕을 칭송하였다. 초5일에 일찍 출발하여 오봉촌(五峯村) 뒤를 지나 6, 7리를 가니 마을 사람들이 바위에다가 탁자 하나를 놓고 산과일과 술 한 병을 차려놓았는데, 이야말로 산중의 별미로 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하였다. 각자가 오봉의 ‘봉(峯)’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 읊었다. 마침내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계곡이 매우 좁고 산세가 급하고 험하니, 모두 의대(衣帶)를 벗고 혹은 죽장을 들고 짚신을 신고서 앞에서 영차하면 뒤에서 응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나무를 베며 길을 열었고 수령을 부축하여 견여(肩輿)에 태웠다. 비현(扉峴)을 넘으며 굽어보니 두류암(頭流庵), 벽송암(碧松庵)인데 이는 함양(咸陽)의 경계이다.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天女堂)의 평전(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전(田)’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다시 나무를 부여잡으며 벼랑을 따라 10여 리를 가서 마암(馬巖)의 산막(山幕)에 이르렀다. 산막은 매사냥꾼이나 목기(木器)를 만드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것인데 때마침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길을 안내하는 자가 급히 보고하기를, “소낙비가 심하게 올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봉(中峰)의 산막까지는 다시 10여 리를 더 가야하니, 이른바 진퇴유곡(進退維谷)하기보다는 여기서 하룻밤 묵는 것이 낫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산막에 자리를 펴고 앞에 불을 피워 곧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이윽고 숲에 비가 걷히자 눈앞이 시원스럽게 탁 트였다. 산막은 바위 사이에 있어서 서북쪽은 보이지 않고 다만 동남쪽이 보였는데 진주(晋州)의 경계였다. 저녁식사 후에 각자 바위 아래를 산보하였는데, 갑자기 무지개빛이 산 아래에 빙 둘러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운 데는 하얀 유리 같고 먼데는 분홍 비단 같았는데, 서로들 보며 기뻐했지만 그런 풍경이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는 아마도 바다에 달빛이 비추어서 붉은 달무리가 가까이에서 먼 곳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만 리가 곧 섬돌 앞처럼 되어 붉은 빛과 하얀 빛이 서로 투영된 것이 아니겠는가? 각각 마암의 ‘암(巖)’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초6일 새벽에 밥을 지어먹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중봉의 산막에서 잠시 쉬었다가 곧장 일월대(日月臺)에 이르렀다. 위아래로 둘러보니 여러 산들이 곳곳에서 박혀 있는데, 영호남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 모두 한 주먹에 불과했다. 바다가 주위를 둘렀으며 종종 산이 바둑돌처럼 나와 있는 것은 모두 바다에 있는 큰 섬이었다. 두류산을 유람한 사람이 함께 와서 손으로 일일이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이에 각자 술 한 잔씩 마시고 또 점심밥을 먹었다. 날씨가 매우 더워서 모두들 옷을 풀어헤치고 앉았는데, 이처럼 더운 것은 아마도 하늘 바로 아래여서 해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시종들이 모두 하룻밤 자고 가기를 원해서 마침내 일월대 아래에 장막을 설치하고 바위 구멍에 고인 물을 길어 밤을 보낼 계책으로 삼았다. 앉아 있는 곳이 너무 높아서 구름, 안개, 노을도 이르지 못할 곳이고, 사슴, 호랑이, 범도 오르지 못할 정도였다. 또한 해마다 서리와 눈이 일찍 내려서 초목은 무성하게 자라지 못했다. 사방에 누런 향부자가 널러 있고 간간이 꽃나무가 있는데 줄기가 부풀어 올라 더부룩하게 나와 있었다. 비록 수백 년이나 오래된 풀명자 나무이지만 길이는 고작해야 한 자도 되지 않았다. 그 아래로 석벽(石壁)이 뾰족하게 있는데 한 줄기로 구불구불 이어져서 인적이 닿지 못할 곳이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돌이 많은 평전〔細磧平田〕이 있고 또 그 아래에는 쌍계(雙溪) 칠불사(七佛寺)가 있으니 이른바 청학동(靑鶴洞)이었다. 하동(河洞)의 섬진강은 마치 한 필의 비단처럼 휘돌아 흐르고 광양(光陽) 백운산(白雲山)은 마치 소 한 마리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나머지 산과 강은 평소 알지 못하던 것이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었으며, 또한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먹구름이 있는 곳은 그 아래에 폭우가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구름이 없는 곳은 그 아래에 날씨가 청명함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천지가 채색되자 급히 일월대에 올랐다. 멀리 바라보니 흰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 모든 산들이 같은 빛깔이었다. 처음에는 마치 만 리나 펼쳐진 평탄한 모래사장에 모래 언덕이 높고 낮게 있는 듯하더니, 마침내는 만 리나 뻗은 울창한 숲에 흰 눈이 한 덩어리를 이루니, 푸른 구의산(九疑山)은 진(秦) 땅에 있는가, 초(楚) 땅에 있는가?ㄹ 어찌 이리도 흰 눈이 많단 말인가? 햇빛이 바다로 들어가자 바다는 한 빛깔인데, 커다란 붉은 고리에 붉은 햇무리가 사방을 두르고 있어서 하늘과 바다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동쪽을 바라보니 붉은 구름 속에 흡사 숲의 나무 같은 것은 부상(扶桑) 이 아닌가? 서쪽을 바라보니 붉은 노을 속에 뚜렷이 나뭇가지 같이 생긴 것은 약목(若木) 이 아닌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은 이 세상의 끝인데, 동서로 천하의 크기가 불과 이와 같단 말인가?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땅을 안고 있으며 땅은 물 위에 떠있다.” 라고 하였으니 천지가 물을 가득 채운 하나의 대야란 말인가? 만약 지금 본 사해(四海)가 우리나라의 사해라고 한다면 이 바다 밖에 또 다른 사해가 있단 말인가? 만약 지금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천하의 해와 달로 생각한다면 천하의 온 나라는 이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단 말인가?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생각하신 데에는 참으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초7일에 여명(黎明)에 다시 일월대에 올라 일출을 보는데, 구름과 안개가 잠시 일어나 비록 해가 처음 떠오르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동방이 마치 적성(赤城) 과 같고 바다 빛깔은 마치 연지 (臙脂)같아 보였다. 순식간에 붉은 햇무리가 사해에 펼쳐지니 마치 어제저녁 해가 질 때의 광경과 같았다. 내려다보니 산 아래의 여러 고을은 모두 칠흑처럼 매우 어두워 여전히 깊은 잠에서 깨지 못했다. 각자 일월대의 ‘대(臺)’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조금 있으니 사방 산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해풍이 매우 차가워서 떨려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암의 산막으로 돌아왔다. 시종이 먼저 도착해서 조반을 이미 지어놓았다. 밥을 먹은 후에 마침내 바로 두류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오봉촌 뒤의 산촌에 이르렀는데, 마을 사람이 밥과 음료수를 지고 와서 일행은 모두 이로 인해 갈증과 배고픔을 면하였다. 수령이 값을 쳐주어 사례하게 하였다. 저물녘 화림암에 도착하였다. 편안하게 누워서 다녀온 길을 생각해보니 마치 꿈에 균천(勻天)에 올라서 광악(廣樂)을 듣고 돌아 온 듯하였다. 이달 초8일에 수령에게 절하며 전송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오니 오고간 날짜가 닷새였다. ++++++++++++++++++++++++++++++++++++++++++++++++++++++++++++++++++++++++++++++++++++++++++++++++ 유두류록==하익범 사농 주인(士農主人) 은 유람 다니기를 좋아하는 성품이다. 갑인년(1794년, 정조 18년)에 북쪽으로 서울에 놀러가 나라의 문물을 보고 남한산성에 올라 인왕산(仁王山)과 삼각산(三角山)의 웅장한 자태를 바라보았다. 병진년(1796년, 정조 20년) 가을에 황계 폭포(黃溪瀑布)를 지나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홍류(紅流) 계곡을 거슬러 운선(雲仙) 의 유적을 찾았다. 정사년(1797년, 정조 21년) 가을 7월 16일에 통제사 윤척장(尹戚丈)과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한산도에 모여 사냥을 하고 미륵산에 올라 일본 대마도를 바라보고 산을 내려오며 종려수를 완상하였고, 이 해 겨울에는 큰 눈이 내리는 속에 회계산(會稽山) 환아정(換鵝亭)에 올랐다. 기미년(1799년, 정조 23년) 여름에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 경호(鏡湖) 문장(文丈)을 배알하고 고개를 넘고 호수를 거슬러 심제(心齋) 대야(大爺)를 참배하였다. 경신년(1800년, 정조 24년) 늦봄에 또 서울에 유람 가서 임금이 거둥할 때 통행을 금지하는 모습을 보았고 청천산(靑川山)에 들어가 응봉(鷹峯)에 올라 우재(尤齋) 선생 의 묘소를 배알하고 화양 계곡을 둘러보고 비로소 아직 명나라에 대한 의리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보았고 속리산(俗離山) 수정봉(水晶峯)에 올라 안팎의 여러 산들을 보았다. 계해년(1803년, 순조 3년) 봄에 다시 가야산에 상상봉(上上峯)에 오르고 사포정(沙浦亭)에서 경치를 구경하였다. 이 해 늦가을에 사수(泗水)를 따라 삼천진(三千津)에서 배를 타고 육십 리를 가서 비로소 봉래산의 꼭대기에 오르니 사방에 비단을 친 것 같았으며 동남쪽으로 오초(吳楚)와 통한다고 했다. 배와 노, 생황을 갖추어 섬진강에서 노닐었다. 병인년(1806년, 순조 6년) 가을 9월 9일에 방어산(防禦山)에 올라 조어계(趙漁溪)의 시냇물을 떠 마시고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이렇게 산과 물과 사람에 대해 보통 사람이 평생을 봐도 못 볼 것들을 두루 보았다고 할 만하니, 또한 어찌 한갖 궁벽하고 숨겨진 곳만을 찾아다니며 평범하게 명승(名勝)에만 집착하는 자들과 비교하겠는가? 일찍이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니 지리산이 백두산에 근본하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봉우리들과 계곡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대방군(帶方郡) 에 이르러 수천 리에 걸쳐 서려 있으니 백두산의 맥이 여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래서 산 이름을 두류(頭流)라고도 말한다. 또한 방장(方丈)이라고도 하는데 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삼한 밖에 있네.〔方丈三韓外〕”라는 구절의 주와, 《통감집람》에 모두“방장산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웅장하여 천하에 비교될 만한 것이 없으니 세속에서는 예로부터 태을(太乙)이 정상에서 살았고 뭇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요, 용과 코끼리가 서식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늘진 벼랑의 얼음과 눈이 여름에도 녹지 않고 유월에 서리가 내리고 칠월에 눈이 내리며, 산 아래에서 혹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려도 산 정상은 맑은 것은 산이 높아 기후가 평지와 매우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맛있고 특이한 나물과 영험한 약재와 좋은 재목들이 다른 산보다 풍성해서 지리산에 가까운 수십 고을이 모두 이익을 누리는데, 이 산이 매우 깊고 으슥하며 그 길이 험하므로 산수를 지독하게 좋아해서 깊고 먼 곳까지 사냥 다니는 사람이 아니면 그 자취를 남길 수가 없다. 김 탁영(金濯纓) 이나 조 남명(曺南冥) 같은 여러 선생들도 일찍이 이곳을 유람하셨는데 나는 이 산자락에서 자라 푸르게 우뚝 서 있는 이 산을 곧바로 볼 수 있었지만 나이 사십이 다 되도록 아직도 꼭대기에 오르는 즐거움을 느껴보지 못했다. 정묘년(1807년, 순조 7년) 봄에 정국채(鄭國采) 가 이 산을 유람하자고 편지를 보냈는데, 오래전부터 해온 약속이었다. 형님을 모시고 가기로 계획을 결정하니 3월 25일이었다. 마을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한계(寒溪, 정국채)에게 갔다. 그 다음날 두양곡(斗陽谷)에 사는 정사강(鄭士剛)의 집에 모이니 허표(許杓) 와 정국채와 정계채(鄭繼采) , 조복(趙濮) 과 조호(趙浩) , 친척 하치범(河致範)과 하이원(河而遠) 및 우리 형제 몇 명이었다.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사자령을 넘어 두류산을 바라보니 푸른 병풍이 펼쳐져 구름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내려가자 곧 입덕문이 나왔는데 첫 번째 굽이였다. 산수가 화려하고 사람이 많은 것이 또한 산속의 큰 도회지 같았다. 동쪽의 산세가 구불구불 뻗어 내렸는데 그 기슭에 남명 선생의 묘가 있다고 한다. 저녁에 덕천서원(德川書院)에서 묵었고 다음날 아침 사당에서 배례(拜禮) 할 때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의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정명원(鄭明遠) 어른의 은거지를 방문하여 세심정(洗心亭)에 둘러 앉아서 한 순배 술을 돌리고 바로 떠나 저녁에 동당촌에 닿으니 이경직(李敬直) 과 선달(先達) 홍치귀(洪致龜)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밤이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새벽녘이 되어서야 조금 누그러졌다. 주인이 말하기를, “여기서 상봉까지는 사십 리지만 길이 아주 험합니다. 열 아름되는 거목들이 사방에서 길을 막고 혹은 낙엽들이 골짜기를 메워 사람이 빠지면 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산의 정령과 나쁜 기운, 비바람과 천둥번개 등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라고 하자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해져 쉽게 갈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모두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이번 유람을 수십 년 동안 기다려왔는데 오늘이야말로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결심하지 않으면 평생토록 쌓인 세속의 찌든 때를 끝내 씻어낼 수 없을 것이니 더 말하지 말고 올라가자고 말했다. 일행 가운데 노인과 젊은이들은 돌아서 대원(大源)으로 갔고 나와 함께 한 사람은 내능(乃能) 정계채(鄭繼采)와 사흥(士興) 조복(趙濮)뿐이었다. 두터운 털옷과 깔개와 침구류를 갖추어 선달 홍치귀가 벼슬살이했던 관청의 노비 점선(占善)과 선달의 노비 계득(桂得)에게 짐을 맡기고 길잡이로 삼은 것은 앞으로 지나갈 험한 곳들을 자세히 알고 있어서였다. 마침내 산에 올라 십여 리를 가서 중산촌에 닿았고 오 리쯤 더 가서 천왕봉을 바라보니 운무가 산중턱에서 상상봉까지 두르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눈이 날리고 바람이 너무 강해 석산에 있는 움막에서 쉬었는데 수십 명을 수용할 만 했다. 추위로 몸이 오그라들어 따뜻한 술을 몇 차례 돌렸는데도 견딜 수가 없어서 주위의 등걸을 태워 몸을 훈훈하게 하고나니 그제서야 산천과 골짜기의 경치가 훌륭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날 방백(方伯) 윤광안(尹光顔)이 산을 오르는데 올려다보니 깃발들이 여기저기 휘날리고 노랫가락이 은은하게 들려왔는데 또한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날이 저물 무렵에 비가 그치자 중산촌으로 돌아 내려가 김치백(金致伯)의 집에서 묵었다. 3월 30일 임신일 그믐날, 맑다. 흰 쌀과 붉은 술을 가지고 장비들을 묶고서 산으로 향했다. 가사마(袈裟麻) 밭을 지나 마전(馬轉) 절벽을 넘어가며 연달아서 한 줄로 나란히 가는데 돌다리와 나무사다리가 만 길 낭떠러지 위에 있어 두려운 마음을 진정 시킬 수가 없었다. 돌을 때리며 흘러 내려가는 계곡물 소리가 들리고 그 사이에 거센 폭포가 공중에서 곧장 떨어지고 나무숲이 하늘을 덮을 정도로 울창했다. 이곳의 초목과 짐승들은 또한 《시경》,《본초(本草)》에 나오지 않는 처음 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십 리쯤 가니 일행들 모두 배가 고파 술을 데워 마시고 밥을 먹었다. 고개 들어 상봉을 바라보니 곧은 실타래가 아래로 드리운 듯하였다. 나는 사흥(士興) 조복(趙濮)과 옷을 걷어 올리고 깔개를 싸고 있었는데 내능(乃能) 정계채(鄭繼采)는 줄곧 가죽신 한 개를 신고 있었다. 내가 위험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자네는 옛날의 밀랍신도 들어보지 못했는가? 왜 이렇게 스스로 고생스럽게 하는 것인가?” 라고 하니 내능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쓰는 것은 내 체력을 시험해보려고 해서이네. 또 발걸음이 나는 듯이 가벼우니 자네가 걱정할 것 없네.” 라고 하였다. 마침내 곧장 나무를 부여잡고 절벽에 붙어 올라가는데 새나 다닐만한 좁은 길이 위태롭게 나 있어 《봉선의기》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신바닥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밟는다.” 라는 형국이었다. 향적사 옛 터에 이르러 조금 쉬며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여섯 명의 남녀가 돌 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뭐하는 것이냐고 묻자 복을 구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능선을 따라 호구당(虎口堂) 역참에 이르는 길은 순탄한 길이었다. 고개에 올라 오 리쯤 가니 석문과 승운(昇雲) 사다리가 있었다. 벽을 기어올라 또 오 리를 가니 바로 천왕봉이었다. 이 때 해가 지려하고 운무와 산기운이 가득차서 뿌연 김이 서린 듯 하였고 바람이 또 서북쪽에서 매섭게 불어와 결국 털옷을 입고 담요를 두르고 정상에 앉으니 이른바 일월대(日月臺)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황홀하여 이 몸이 어느 세상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추위가 심해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서둘러 순찰사가 묵었던 곳으로 내려오니 함양 아전 임기혁(林蓍焃)과 임상언(林相彦) 그리고 석수(石手) 세 사람이 순찰사와 함양군수 남주헌(南周獻), 산청군수 정유순(鄭有淳), 진주군수 이낙수(李洛秀) 등 사또들의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 또 숙소를 살펴보니 온돌방, 관리소, 수리실, 부엌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임 아전이 말하기를, “상봉은 함양군 소속입니다. 그래서 작년 가을에 감영에서 명령을 내려 숙사는 공사가 이미 끝났는데 가을에 너무 추워서 나머지 공사는 중단했었습니다. 그러다 올봄에 다시 명령을 내려 3월초에 공사를 하는데 저희들이 산 속에 있는 마을에 비용을 대도록 해서 적어도 5, 60금씩 냈으며 길 닦는 데는 저희 고을과 진주, 하동 세 고을의 군졸들이 만 명이나 차출되어 상봉에서 칠불암까지 90리 길의 좌우에 빽빽한 나무들을 잘라내어 큰길처럼 넓고 평탄하게 하였으니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런 공사를 시행한 것은 실속은 없고 형식적인 것이니 어찌 백성을 다스리는 자의 일이라 하겠는가? 온돌방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앉으니 계득이 밥을 지어 올렸는데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몸은 신선이 사는 곳에 왔을망정 밥은 끊을 수가 없으니 한탄스럽구나.” 라고 하였다. 밤이 되니 날씨가 저녁때보다 더욱 나빠져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벗들과 운(韻)을 골라 시를 지어 주거니 받거니 했다. 새벽에 일출을 보려고 일월대에 오르니 4월 초1일, 길일(吉日)이었다. 사방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니 온통 자욱해서 아직 맑은 날씨가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구름과 세찬 바람이 계속 그치지 않았다. 나는 성모사(聖母祠)에서 입으로 기도하기를, “제가 이 산을 경모해 온 것이 오래되었는데 올해 늦봄에야 험한 산길을 헤치고 정상에 올라 일출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성이 지극하지 않아서인지 구름이 장난을 칩니다. 비록 공자께서 태산에 오르셨던 것을 사모하지만 한 문공(韓文公) 이 형산의 구름을 개이게 했던 수단이 없는 것이 부끄러워 당황스럽고 답답해서 좋은 때를 놓칠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성모께서 신령함으로 산과 바다가 저절로 드러나게 하시고 만 리까지 환하게 하셔서 제가 장관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기도를 끝내고 일월대에 다들 함께 앉아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마치 큰 바다 가운데에서 작은 나룻배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파도에 빠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휘익 휘파람을 불고 들뜬 마음으로 웃으며 여러 벗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늘의 유람이 어찌 즐겁지 않은가? 구름 뗏목을 타고 태초의 원기를 거느리고서 혼돈의 가운데에서 떠다니니 어찌 감히 선배들의 유람에 비하겠는가마는 우리들 역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고 다음날을 기약하였다. (4월 2일) 다음날 햇빛이 비로소 찬란히 빛나자 가깝고 먼 곳의 봉우리들과 바다 가운데의 여러 섬들이 차례대로 드러났다. 그 모습이 황홀하여 묘사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평생에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의 산천과 고을의 이름들은 이미 김 탁영(金濯纓)선생의 유산기에 다 기록되어 있으니 내가 무엇을 더 서술하겠는가? 술자리를 끝내고 석문을 따라 빠르게 정상을 내려오니 소나무와 노송 그리고 철쭉이 모두 꼿꼿이 굽어있는데 바람을 버티느라 왼쪽으로 쏠렸고 키는 겨우 한 자쯤 될 듯했다. 산등성이를 따라 사자항(獅子項)까지 20리 길에 명아주가 많이 있었는데 지팡이 삼을 만한 것을 고르자 조금 있으니 한 묶음이나 되었다. 진달래는 막 꽃을 피우고 나뭇잎들도 나기 시작했으며 소나무 그루터기와 노송, 잣나무들이 바람과 서리에 시달려 뼈만 남은 채 서리처럼 희뿌연 빛을 띤 것, 반쯤 마르고 반쯤 살아 있는 것, 서 있는 것, 누워 있는 것, 잎이 다 떨어진 것, 썩은 것 등등 이루 다 형용하기 어려웠으니 참으로 그림 속의 경치였다. 세석(細石) 평원에 이르렀다. 이곳은 비록 산등성이에 있지만 그 흙은 검고 언덕을 이룰 정도로 많았고 그 나무들은 소나무와 노송뿐이었지만 매우 넓고 평탄해서 자랄 만했다. 40리를 가서 영신대(靈神臺)에 이르니 하동군과의 접경이고 순찰사가 점심을 드셨던 곳이다. 관사와 부엌은 상봉과 비교하면 3분의 1정도 되었다. 기이한 봉우리와 특이한 암석들이 그림처럼 둘러 쳐져 있고 두류산의 여러 명승지가 발 아래 모여 있었다. 망암(望巖)을 따라 벽소령(碧宵嶺) 냉천(冷泉) 역참까지 70리였는데 여기서부터 비로소 길이 아래로 꺾였다. 남동쪽으로 칠불(七佛), 신응(神凝), 의신(義神), 쌍계(雙谿)의 여러 골짜기와 서북쪽의 벽송(碧松), 군재(君才), 가은(加隱), 실상(實相), 엄천(嚴川), 법회(法晦), 문수(文殊), 화림(花林)의 여러 이름 있는 사찰들이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기이한 꽃과 나무, 괴이한 짐승, 상서로운 새가 여기저기 완연한 것이 신선세계와 멀지 않은 듯했다. 몸을 돌려 천왕봉을 바라보니 조금 떨어져 있는 듯 했지만 걸어서 꼬박 하루 걸리는 거리였다. 드디어 고개를 내려오며 주자의 ‘비하축융봉(飛下祝融峰)’이라는 시를 읊조렸다. 삼기점(三岐店)에 이르니 두어 집이 깎아지른 벼랑에 있었다. 오랜만에 민가를 보았기에 술과 안주, 채소 등을 샀다. 당치(堂峙)를 넘어서 칠불암에 닿았다. 이 날은 90리를 걸었기에 기운이 없고 다리에 힘이 빠져 방사(坊舍)에 푹 쓰러져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도 듣지 못했다. (4월 3일) 여정 이틀째. 늦게 일어나 ‘아(亞)’자형 아궁이를 보고 있노라니 방주인 보대(寶臺) 노승이 말하기를, “신라 금부대왕(金夫大王)에게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이 왕위를 이어받자 나머지 일곱 아들이 이곳에 와서 불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들이 찾아 와서 불자들 보기를 청하기를‘직접 보면 속세의 인연을 벗기 어려울 테니 문밖에 연못을 파서 일곱 불자가 문 앞에 서 있으면 그림자가 못에 비출 것이니 한 번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여 절 이름이 칠불(七佛)이 된 것은 이 때문이지요.” 라고 하였다. 드디어 고을 아래로 10여 리를 가니 주점이 있었다. 갑자기 계곡물 소리와 숲 사이로 한 바탕의 가야금 소리가 들려오니 바로 하동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행렬이었다. 마침 또 어부가 물고기를 가지고 도착했다. 술과 횟감을 사고 가야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흥이 다하자 자리를 접었다. 천천히 숲 속 길을 걸어가는데 길 왼쪽에 삼신동(三神洞)이라는 세 글자를 새긴 돌이 서 있었다. 바로 최 고운(崔孤雲) 의 필체라고 한다. 다리를 지나 신응사에 들어가니 조사(祖師)가 문밖에서 맞이하는데 자못 고승의 풍모가 있었다. 이름은 석인(釋印)이요, 호는 화담(花潭)으로 시를 잘 짓는다고 했다. 차를 다 마시자 석인이 앞장서서 제승문(諸勝門) 밖 큰 시냇물에 있는 반석에서 항아리모양의 구멍이 난 것 세 개를 찾았는데 이른바 돌항아리〔石甕〕라는 것이었다. 지팡이로 구멍의 깊이를 재보니 셋 다 한 길 남짓이었다. 겨울이 되면 김장을 담아놓은데 맛이 제일이라고 한다. 절벽 위에는 정명암(鄭明庵)이 반석에 이름을 짓고 ‘세이암(洗耳巖)’이라는 세 글자를 새긴 것이 있는데 또한 고운의 필체였다. 물은 물고기들을 헤아릴 정도로 매우 맑았다. 두류산의 크고 작은 절들 중에서 신응사 계곡의 수석이 가장 좋다고 말해지는 것은 남명 선생이 이미 품평하신 바이다. 나는 여러 벗들과 운(韻)을 띄워 가며 흥취를 풀었다. (4월 4일) 여정 사흘째. 일찍 출발해서 국사암(國師庵)을 지나 불일암(佛日庵)을 향해 갈 적에 열 걸음에 아홉 번을 쉬면서 천천히 올라가고 있노라니 길가에 환학암(喚鶴巖)이라고 새긴 바위가 보였다. 암자 뒤편에 이르러 돌아 내려가서 문으로 들어서니 노승이 주는 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이 암자는 만 길 낭떠러지 위에 있고 문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는데 높이가 각각 천 길이고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형세였다. 동쪽 봉우리를 향로(香爐)라고 하고 서쪽 봉우리를 비로(毗盧)라고 한다. 또 동쪽을 청학(靑鶴), 서쪽을 백학(白鶴)이라고도 하니 이것은 아마도 세속에서 청학동이라고 일컫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좌우의 암석들이 우뚝 솟아 허공에 매달려 굽어볼 수 없었고 동쪽에는 백여 자나 되는 폭포가 곧장 쏟아져 내려 학연(鶴淵)과 용추(龍湫)가 되는데 수심이 매우 깊었고 밤낮으로 칠흑같이 어두워 하늘과 땅이 숨겨 놓고 큰 정령과 교룡들이 지켜서 사람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내능과 사흥이 나무를 붙들고 내려다보기에 나도 뒤따라 아래를 보니 아찔하고 소름이 끼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바위 한쪽에 조명사(趙明師,조복(趙濮))가 이름을 지어 새겼다. 빠르게 잔도(棧道)를 따라 내려가서 쌍계로 향할 때에 길이 매우 가파랐는데 처음 오를 적에는 한 걸음 떼어 놓는 것조차 어렵더니 내리막길에 이르러서는 다만 발을 움직이기만 하면 몸이 저절로 따라 내려가서 순식간에 쌍계에 닿았다. 나는 여러 벗들에게 말하기를, “선과 악을 따르는 비유가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경계할 만하지 않은가?” 라고 했다. 정문에 들어가 최 고운의 영정을 보고 진감 국사(眞鑑國師)의 비문을 읽으니 또한 고운이 직접 지은 글이었다. 정 신채(鄭愼采) 가 약속대로 와서 우리 형님의 서찰과 그의 맏형의 편지를 전했다. 처음에는 동행했는데 중간에 나뉘어져서 상봉에 가지 못했으니 금악(金嶽)의 명승을 못 보는 것이 매우 아쉬웠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여정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만했다. (4월 5일) 여정 나흘째. 절 문을 나서니 좌우에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雙谿石門)’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는데 필획의 크기가 사슴 정강이만 했으며 역시 고운의 필체였다. 눈을 돌려 청학봉을 바라보니 마치 하늘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 쌍계교를 건너 10리를 가서 화개동에 이르니 고깃배와 장삿배의 북적거림이 호남과 영남의 도회지와 한가지였다. 육칠 일 동안 산길을 다니다가 비로소 평평한 호수와 넓은 들판을 보니 마음이 갑자기 상쾌해졌다. 천천히 걸으며 악양(岳陽)의 장에 가서 주머니를 털어 술 한 단지와 농어회를 사서 반나절 동안 먹고 마시며 놀았다. 술이 오르자 내능에게 농담하기를, “자네는 무쇠로 만든 사람일세. 수백 리 길을 지나왔는데 험한 것은 또 어떠했는가? 그런데 끝내 한 번도 그 가죽신을 벗지 않았으니 이것은 단지 다리의 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네의 인내력이 또한 대단하기 때문일세.” 라고 하니 내능은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이 서로를 존귀하게 대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니 자네는 나의 포숙아가 될 만하네.” 라고 했다. 나는 대답하기를, “그렇다네. 어찌 다만 산에 있어서만 이렇겠는가?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점점 나아지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대가 힘을 쓴다면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이네.” 라고 하였다. 내능과 화익(華益) 이경직(李敬直)과 홍치귀는 일이 있어 지름길로 돌아갔다. 사준이 배 한 척을 포구에 대기시켜 놓았다. 드디어 돛을 올리고 곧장 내려가니 수면은 맑고 잔잔했으며 주위의 여러 산들은 옥처럼 서 있었다. 술이 한 차례 돌 때 세 곡의 노래가 끝나자 정일두(鄭一蠹)선생의 “외로운 배 또 물결 따라 내려가네.〔孤舟又下大江流〕”라는 시의 운자를 따라 시를 지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해서 나동(螺洞)의 서생(徐生) 집에서 묵었다. (4월 6일) 여정 닷새째. 횡포(橫浦)를 지나 전대(田垈)에 들어가 벗 정미회(鄭美會)를 방문하니 큰형님과 사관이 이미 와 있었다. 사관이 대원(大源)이라는 제목의 절구 한 수를 보여주었는데 은근히 자부하는 뜻이 있었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런 데에 군자의 다툼이 있네. 자네는 물의 큰 근원을 보았고 나는 산의 정상을 보았으니 비록 함께 어진 자와 지혜로운 자가 좋아하는 즐거움을 한꺼번에 누리지는 못했지만 각각 한 가지씩을 얻었으니 우리 분수에는 또한 다행일세. 어찌 대소(大小)와 고하(高下)를 말하겠는가? 동(動)과 정(靜)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높은 것과 큰 것은 서로를 의지하니 또한 어찌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데로 돌아감이 없겠는가?” 라고 하고 서로 손을 부여잡고 그만두었다. 주인이 매우 정성스런 술상을 준비하였는데, 나물과 쌀밥이 입에 맞아서 맛있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어찌 두보(杜甫)가 왕의(王倚)의 초대를 받아 간 자리의 훌륭함만 못하겠는가? 사관이 말하기를, “ 녹사(錄事)가 살았던 옛터가 여기서 멀지 않으니 가보지 않겠는가?” 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녹사의 깨끗한 절행을 앙모해 온 지 오래였고 이번 유람에 이미 산수를 실컷 즐겼는데 또 현자가 살던 곳에서 남겨진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참으로 남명 선생이 이른바‘열 겹의 봉우리에 옥 하나 걸리니 천 이랑의 수면에 달 하나 생기네.’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4월 7일) 여정 엿새째. 본 고을의 원생(院生) 김성창(金聖昌)을 시켜서 길잡이를 삼아 마치(馬峙)를 넘고 평촌(坪村) 고을에 들어가니 계곡이 꽤 넓었다. 마을 노인 몇 명이 우리 일행을 맞아들여 한 특이한 바위에 앉았다. 바위는 절벽 아래, 맑은 못 위에 있어 수십 명이 앉을 만 했고 그 아래 못물은 물고기가 보일만큼 매우 맑고 투명했다. 강생(姜生)은 평촌의 교장(敎長)으로 바위 아래에서 그물로 잡은 은빛 물고기 서너 마리를 얻어 모임에 와서 술을 따르고 생선회를 점심거리로 제공했다. 이곳은 아직도 예전의 순박하고 도타운 풍속을 간직하고 있었다. 강생이 말하기를, “이 바위는 깊숙한 곳에 있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지금 선생께서 좋은 이름을 주시면 이 바위의 행운이 아닐까 합니다.” 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알았네. 관어(觀魚)라고 이름 지으면 괜찮겠는가?” 라고 말하고 운(韻)을 골라 각자 시를 지었다. 이항(梨項)에서 나와 답곡(沓谷)을 지나 가례암(家禮巖) 촌에 이르렀는데 녹사가 이 바위에서 가례를 읽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한다. 멀리 산 중턱을 바라보니 북쪽에 예닐곱 사람이 천천히 오고 있었는데 월횡(月橫) 종장(宗丈) 석(錫)과 자회(子會) 정사순(鄭士順),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술과 물고기를 들고서 오랫동안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관(士觀) 정국채(鄭國采)가 미리 모이도록 약속을 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세(金榮世)의 집에서 묵었다. (4월 8일) 여정 이레째. 가례암에 오르니 바위 위에 강가 정자의 옛 터가 있는데 바위는 오래되고 정자는 터만 남아 쓸쓸하게 천 년의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30리를 채 못 가서 흰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가 온통 하얗고 미끌미끌해서 글자 연습하기 좋았다. 30리를 더 가니 5, 60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석실이 있어서 이름을 지었다. 토항(土項) 촌에서 점심을 먹고 오대사(五臺寺)로 올라갔다. 열 아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살구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오래된 줄기는 하얗고 새로 난 가지들이 녹음을 드리우고 있었다. 세속에서는 이것들을 천 년 묵은 살구나무라고 했다. 노치(蘆峙)에 사는 친척 하석흥(河錫興)의 묘를 찾은 뒤 사관(士觀) 정국채(鄭國采)의 망추재(望楸齋)에 이르니 산뜻하여 내 마음에 들었다. 서가에 책들이 가득하고 온 벽면에는 잠명(箴銘) 이 가득 있었다. 사관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내며 학문에 힘쓰고 행실을 돈독하게 해서 포옹(圃翁)에게 부끄럽지 않은 손자가 되고 선생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았는데 다만 부모를 잃은 아픔이 늙어가며 더욱 깊어져 시랑과 호랑이가 사는 굴이나 고라니와 사슴이 사는 곳을 피하지 않고 선산 가까이에 초가집을 짓고서 아침저녁으로 성묘하고 출입할 때마다 배알해서 평생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다. 아! 지금 사람들 중에 누가 부모가 없겠으며 누가 자식 된 자 아니겠는가마는 보통 사람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사관이 해내니 지극한 효자라고 할 만하다. 자식과 조카 몇 명과 학동들 대 여섯 명의 일상 예절을 보니 사관의 제자들임을 알겠다. (4월 9일) 여정 여드레째. 내능을 방문했다. (4월 10일) 여정 아흐레째. 집에 도착했다. 아! 높고도 웅장한 명승을 간직한 방장산이 궁벽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천자가 봉선하는 산에 끼지 못하고 한갓 진시황과 한 무제가 옷을 걷고 탄식만 할 뿐이었으니 한스러운 듯하다. 하지만 최 문창(崔文昌) 같이 도를 닦은 사람이나 한유한 같이 고결한 사람이나 김종직이나 김일손 같이 박식하고 단아한 사람이나 정여창이나 조식 같이 도학을 밝힌 사람들이 발걸음을 이어 명승을 찾아 이 산 가운데서 노닐며 머물어 이름이 만고에 길이 남았으니, 또한 어찌 이 산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이번 산행은 비록 평생의 숙원을 이룬 것이지만 단지 기이한 경치만을 감상만 하고 동정(動靜)의 이치를 터득해서 나의 어짊과 지혜의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면, 어찌 매우 부끄럽고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관동 지방의 금강산과 관북 지방의 백두산과 호남 지방의 영주산과 또한 이들 사이에 가깝고 먼 여러 산들을 유람할 수 있는 기회를 하늘이 나에게 허락하실지 모르겠다. 두류록을 짓고 정묘년(1807년, 순조 7년) 모월 모일 사농헌(士農軒)에서 진산 후인(晉山後人) 하익범이 쓴다. +++++++++++++++++++++++++++++++++++++++++++++++++++++++++++++++++++++++++++++++++++++++++++++++++++ 유두류록==조 식 가정(嘉靖) 무오년(1558년, 명종 13년) 초여름. 나는 진주목사 홍지(泓之) 김홍(金泓)과 수재(秀才) 인숙(寅叔) 이공량(李公亮) 과 고령현감을 지낸 우옹(愚翁) 이희안(李希顔)과 청주 목사를 지낸 강이(剛而) 이정(李楨) 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산 속에서는 나이를 귀하게 여기고 벼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술잔을 돌리거나 자리에 앉을 때에도 나이순으로 하였지만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 10일. 우옹이 초계(草溪)에서 와서 뇌룡사(雷龍舍)에서 묵었다. ○ 11일. 계부당(鷄伏堂)에서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났는데, 집의 아우인 조환(曺桓)이 따라나섰고 유생인 원우석(元右釋)은 승려가 되었다 속세로 돌아온 사람으로 깨달음이 있고 노래를 잘 하여서 불러 함께 떠나게 되었다. 문을 나서서 겨우 수십보 쯤 걸었을때, 어린아이가 앞을 가로막으면서 말하기를, “도망친 종을 좇아왔습니다. 종이 이 길 아래에 있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우옹이 갑자기 구사(丘史) 네댓 사람을 지휘하여 좌우로 포위하게 하였는데, 조금 지나서 과연 남녀 8명을 포박하여 말 앞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말을 달려 길을 떠나면서 함께 탄식하기를, “우연히 손을 쓰게 되었는데, 원망하기도 하고 덕이 있다고도 하니 조물주가 무엇을 부려서 인가.” 라고 하였다. 내가 가만히 탄식하기를, “우옹이 오십년 동안 소매 속에 손을 넣고 쓰지 않아 주먹이 메주와 같이진 줄 알았더니 황하와 황수 유역 천만 리의 땅을 수복할 수는 없더라도, 오히려 잠깐의 사이에 방법과 계략을 지휘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좋은 수완이라고 이를만 하구나.” 라고 하면서 서로 웃으면서 출발하였다. 저녁이 되어서 진주에 이르렀다. 홍지와 사천에서 배를 타고서 섬진강을 거슬로 올라 쌍계에 들어가기로 약속했었는데 마현(馬峴)에서 갑자기 종사관(從事官) 이준민(李俊民)을 만나게 되었다. 호남에서 그의 어버이를 뵈러 오는 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인숙 이공량이었다. 다시 홍지가 체차되었음을 듣고 둘러서 인숙의 집에 투숙하였는데 인숙은 바로 나의 매부이다. ○ 12일. 큰비가 내렸다. 홍지가 서찰과 음식을 보내와 더 머물렀다. ○ 13일. 홍지가 와서 소를 잡고 풍악을 베풀어 우옹과 홍지와 이준민이 함께 다투듯 술을 마신 뒤 그쳤다. ○ 14일. 인숙과 함께 강이의 집에 가서 숙박하였는데, 강이가 우리를 위해 전도면(剪刀糆), 예락재(醴酪齋), 물고기 회와 흰고 노란 경단, 푸르고 붉은 절편을 만들었다. ○ 15일. 또 강이와 함께 모두 장암(場巖)으로 향했는데, 강이의 서제인 이백(李栢)도 따라나섰다. 먼저 옛 장군이었던 이순(李珣)의 쾌재정(快哉亭)에 먼저 올랐는데, 조금 뒤에 홍지의 중씨(仲氏)인 김경(金涇)과 홍지의 아들 김사성(金思誠)이 이어 이르렀고, 홍지는 가장 늦게 도착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사천의 군수 노극수(魯克粹)가 고을의 주인 자격으로 와서 만나보고 조촐한 술자리를 열었다. 모두 큰 배에 오르니 사천 군수 노극수는 술과 안주를 실어주고 배에서 내려 돌아갔고 충순위(忠順衛) 정당(鄭澢)이 물품들을 감독하였다. 열 명의 기생이 피리, 생황, 북, 나발을 모두 벌여놓았으나, 이 날은 회간국비(懷簡國妃) 한씨(韓氏) 의 기일이어서 풍악을 연주하지 않고 채소를 먹었다. 그때 유생인 백유량(白惟良)이 배 위로 나아가 인사하고 동행하게 되었다. 이날 밤 밝은 달이 한낮같고 은빛 물결은 잘 연마한 거울 같아서 천근(天根)과 옥초(沃焦)가 모두 자리에 함께 있는 듯하였다. 사공들이 번갈아 노래를 부르니 교룡(蛟龍)이 사는 굴까지 메아리가 퍼지는 듯하였다. 삼태성(三台星)이 어느새 하늘 가운데에 이르고, 동풍이 희미하게 일어났다. 서둘러 돛을 펴고 노를 걷어 바람을 타고 강을 올라가니 사공이 조금 뒤에 하동을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자리를 베게삼아 뒤엉켜 잠들었는데 세로로 눕기도 하고 가로로 눕기도 하였는데, 홍지가 펴놓은 담요와 겹이불은 폭이 매우 넓어서 나는 애초에 그의 이불 한쪽에 끼어 잠을 청했다. 점점 밀치고 들어가서는 홍지를 자리 밖으로 밀어냈으니 이 어찌 꿈속에 빠져 혼미하여 자기의 물건이 남의 소유가 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 16일.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지자 섬진(蟾津)에 이르러 사람들을 깨우는 사이에 곤양(昆陽) 땅을 지나버렸다고 하였다. 빛나는 해가 처음 떠오를때 만경이 붉게 물들고, 양쪽 언덕의 푸른산이 출렁이는 물결 속에 거꾸로 비쳤다.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다시 연주하니 노랫소리와 나발소리가 번갈아 일어나고 아득히 구름 속에 솟아 나온 산이 서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이었는데 이곳이 두류산의 외면이었다. 서로들 기뻐하고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방장산이 삼한에 있다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구나.” 라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고, 강가에 삽암(鍤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징초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하룻 저녁에 달아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아! 국가가 망하려 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착한 사람을 선양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섭자고(葉子高)가 용을 좋아한 것 만도 못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가는 형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을 위해 길게 탄식하였다. 정오가 될 무렵 도탄에 배를 정박하니 어수룩한 늙은 아전들이 소골다(蘇骨多) 를 쓰고 와서 절을 하였는데, 바로 악양현과 화개현의 아전들이었고, 단령(團領)을 입은 몇 명의 아전들이 찾아와서 절을 하였는데, 바로 김홍지가 다스리는 진주 관내에서 규찰과 권농 등을 맡은 관리였다. 강가에는 산촌이 위아래로 연이어 있고, 어지럽게 생긴 밭이랑이 지금은 열에 하나 정도만 남아 있지만, 옛날에 임금의 덕화가 미쳐 백성과 물산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도탄에서 1리쯤 떨어져 정여창(鄭汝昌)선생이 거처하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선생은 바로 천령의 유종(儒宗)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에 실마리를 열어준 분으로 처자식을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가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喬桐主)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인의 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홍지와 강이가 먼저 석문에 도착하니, 이곳이 쌍계사(雙磎寺) 동문이다. 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서서 한 길 남짓 정도 열려 있는데, 학사 최치원이 네 글자를 직접 새겨 놓았는데, 오른쪽에는 ‘쌍계’, 왼쪽에는 ‘석문’이었다. 돌에 깊게 새겨진 글자의 획이 큰 것은 사슴의 정강이와 같았다. 천년(千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남아 있었는데, 이후에 몇 천 년이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서쪽 가로 한 시내가 벼랑을 가르고 돌을 굴리며 백 리 밖에서 흘러오고 있었는데, 바로 신응사(神凝寺)가 있는 의신동(擬神洞)의 물길이고, 동쪽 가로 한 시내가 구름 속에서 새어나와 산을 가르고 아득히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고 있었는데, 바로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靑鶴洞)의 물줄기이다. 절은 두 시내의 사이에 있는데‘쌍계’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높이가 10자 정도되는 비석이 귀부 위에 우뚝 서 있는데, 절문 밖 수십 걸음 지점에 있었다. 최치원의 글과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앞에는 높은 누각이 있었는데 팔영루(八詠樓)라고 편액이 되어 있었다. 뒤의 비전(碑殿)은 중수하는 중이어서 기와가 아직 덮여 있지 않았다. 이 절의 승려 혜통(慧通), 신욱(愼旭)이 다과를 내오고, 산나물을 곁들여서 빈주의 예로 우리를 대접하였다. 이날 초저녁에 갑자기 구토와 설사가 나서 음식을 먹지않고 누워 있었다. 우옹이 나를 간호하며 서쪽 행랑에서 잤다. ○ 17일. 이른 아침에 홍지가 와서 문병하였다. 갑자기 전라도 어란달도(魚瀾㺚島)에 왜구(倭寇)의 배가 와서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바로 유람 계획을 취소하고 아침밥을 서둘러 먹고서 돌아가려 하였다. 몇 잔 술을 돌렸다. 이에 앞서 호남 유생 김득리(金得李), 허계(許繼), 조수기(趙壽期), 최연(崔硏) 등이 먼저 이 절에 와 있어서 이들을 모두 법당으로 맞이하여 한 차례 술을 돌리고 풍악을 울렸다. 갑자기 작별하게 되자 서로의 행색이 매우 급하여 ‘북산이문(北山移文)’에 관한 일은 토론해 볼 겨를도 없었다. 어제 배 안에서 잠시 홍지가 허리에 자주색 띠를 매고 있어서 내가 “이는 토끼나 원숭이를 묶는 물건인데, 도리어 토끼나 원숭이에게 묶여 갈까 두렵습니다.”라고 농담을 하고 박수를 치며 한바탕 웃었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그러하였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우리들이 수행에 힘쓰지 않아 한 늙은 벗을 보호해 함께 지기석(支機石) 위에 앉아 창자에 가득한 티끌을 토해내고 금화산(金華山)의 무한한 정기를 호흡하여 늘그막의 절반 양식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생 봉월(鳳月), 옹대(甕臺), 강아지(江娥之), 귀천(貴千)과 피리 부는 천수(千守)를 남겨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냈다. 큰 비가 내려 종일토록 그치지 않고 음산한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여 이 바깥 인간 세상과는 몇 겹의 구름과 물이 중첩하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오에 이르러 호남의 역리가 종사관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연대(烟臺)의 보고에 따르면 어란달도에 나타났다고 하는 왜선은 바로 몇 척의 우리 조운선이라는 것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홍지의 골상이 연분이 없어서 도끼 자루 하나 동안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홍지는 셀 수 없이 중생을 제도하는 계율을 닦았는지,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연이어 가져오고 기별과 서찰이 계속 이어져 이르렀다. 육갑(六甲) 과 취사 도구의 준비를 모두 강국년(姜國年)이 맡고 있어서 우리들은 모두 계옥의 누가 됨을 알지 못하였다. 강국년은 진주의 아전이다. 이날 강이의 집안 사람 이응형(李應亨)이 와서 절문에 이르렀다. 저녁에 인숙이 설사를 하고 신음을 하였다. 저물녁에 강이가 갑자기 가슴과 배의 통증을 호소하더니, 토한 것이 두어말이나 되었다. 창자가 뒤틀리고 위가 뒤집히는 듯한 기세로 매우 괴로워하더니 설사가 점점 급해졌다. 소합원(蘇合元) 으로도 효험이 없었고, 다시 청향유(淸香油) 를 투약했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가 예부터 친압했던 강아지가 그의 머리맡에서 간호했는데, 새벽녘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막연히 고개를 들고 말하기를, “지난 밤 가슴이 하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내 죽더라도 여러분들이 곁에 있는데, 어찌 부인의 손에 죽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제군들이 그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그대도 겁쟁이구려. 오래 살려는 생각을 항상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잠시 대단치 않은 병에 걸렸는데도 죽을 것을 안타까워한 것이네. 죽고 사는 것이 큰일이지만, 어찌 이처럼 하찮은 병으로 잘못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 18일. 산길이 젖어 미끄러워 불일암에 올라가지 못하고, 시냇물이 불어나 신응사로 들어가지 못하여 쌍계사에 그대로 있었다. 호남 순변사(湖南巡邊使) 남치근(南致勤)이 이인숙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왔는데, 종사관의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진사 하종악(河宗岳)의 종 청룡(靑龍)과 사인(舍人) 계회(季晦) 정황(丁璜)의 종이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와서 인사를 했다. 신응사 지임인 윤의(允誼)가 와서 인사를 했다. 내 동생이 타던 말이 병이 나서 접천(蝶川) 밖에 사는 진(塵)이라는 사람에게 맡겨서 돌보도록 부탁하였다. 저녁에 우옹과 함께 뒤채 서쪽에 있는 방장(方丈)의 방에서 함께 잤다. ○ 19일. 재촉하여 아침을 먹고는 청학동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인숙과 강이는 병이 들었다고하고 머물렀다. 진실로 속세와 끊어진 세계는 인연이 없으면 신명이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겠다. 인숙과 강이가 예전에 한 번 들어왔었던 것은 바로 꿈속에서였지, 실제로 왔던 것은 아닐 것이다. 홍지와 견주어보면 차이가 있지만, 이들도 일을 정리하는 인연이 없는 듯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세 번이나 이곳에 들어왔었지만 속세의 인연을 아직 다 버리지 못했다. 팔십 된 노인이 벼슬도 없이 세 번씩이나 봉황지(鳳凰池)에 들어갔던 것과는 오히려 내가 양보하고 싶지 않지만, 세 차례나 악양에 들어갔으나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과 비교해보면 그렇지 않았다. 이날 아침 김경이 병 때문에 함께 가는 것을 사양하고 기생 귀천(貴千)을 데리고 급하게 떠났다. 김군은 이때 나이가 일흔 일곱이었지만 나는 듯하여 처음에는 천왕봉까지 오르려 하였으니 사람됨이 마치 이원(利園)에서 노닐다 온 사람처럼 대범했다.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유량, 이씨 두 유생이 동행하였다. 북쪽으로 오암을 오르는데, 나무를 잡고 잔도를 오르면서 나아가는데 원우석은 허리에 찬 북을 치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따르면서 선두를 이루었다. 제군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듯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강국년과 음식을 맡은 사람과 음식을 운반하는 종 등 수십 인이 후미 대열을 이루었다. 승려 신욱이 길일 인도하며 나아갔다. 사이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이언경’, ‘홍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암도 ‘시은 형제’라는 글자를 새겼으니,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구차하게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 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구한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후세 사람들이 날아간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두예(杜預)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 속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업적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그제서야 불일암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청학동이다. 암자는 허공에 떠있는 듯하여 아래로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동쪽으로 높고 가파르게 솟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香爐峯)이고, 서쪽으로 푸른 벼랑을 깎아내어 만 길 절벽으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毘盧峯)으로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여 살면서 때때로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아래에는 학연(鶴淵)이 있는데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였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이 빙 둘러 있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쏟아져 내리다가 합쳐지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수초가 우거지고 초목이 무성하여 물고기나 새도 왕래할 수 없었으며,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할 수 없는 약수도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 소리가 서로 얽혀, 천지가 개벽하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안에 신선,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살면서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잘라 다리를 만들어, 겨우 그 초입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낀 돌에는 ‘삼선동’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옹과 내 동생 및 원생 등 몇 사람이 나무를 부여잡고 내려가 배회하며 이리저리 둘러보고서 올라왔다. 나이가 어리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은 모두 향로봉에 올랐다. 돌아와 불일암에 모여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절문 밖에 있는 소나무 아래로 나와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음껏 술을 마시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암자 주위에 울려 퍼지고 산봉우리에도 가득하였다. 동쪽으로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 길 낭떠러지로 쏟아져 학담(鶴潭)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우옹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물이란 만 길의 골짜기를 만나면 아래로만 곧장 내려가려고 하여, 다시는 의심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려가니, 이곳이 바로 그곳이네.” 라고 하였더니, 우옹이 말하기를, “그렇네.” 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였지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뒤쪽 능선으로 올라가 두루 지장암(地藏菴)을 탐방하니 모란이 활짝 피어있었다. 한 송이가 한 말 정도가 되는 붉은 꽃이었다. 이곳에서 곧바로 내려가 한 번에 몇리를 가서야 겨우 한 차례 쉴 수 있을 정도로 가파랐다. 양의 어깻죽지를 삶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쌍계사로 돌아왔다. 처음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더니, 아래쪽으로 내려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내려갔다. 그러니 어찌 선(善)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惡)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쉽지 않겠는가. 인숙과 강이가 팔영루(八詠樓)에 올라 우리를 맞이하였다. 저녁에 인숙, 우옹과 함께 다시 절 뒤채의 동쪽 방장의 방에서 잤다. ○ 20일. 신응사로 들어갔다. 절은 쌍계사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사이에 허름한 주막 몇 집이 있었다. 절 문 앞 백 걸음쯤 되는 곳 칠불계곡 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줄지어 앉았다. 시냇물이 험하고 좁아 안장을 풀고 말등에 올라 냇물을 건넜다. 주지 옥륜(玉崙)과 지임 윤의가 나와서 우리 일행을 맞이하였다. 절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로 절 앞의 시냇가 바위로 가서 그 위에 벌여 앉았다. 인숙과 강이만을 바위의 가장 높은 곳에 앉히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비록 위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자리를 잃어서는 안되네. 만일 그대들이 시냇물에 빠진다면 올라올 수 없을 것이네.” 라고 말하니, 그들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자리를 뺏지않기를 바라네.” 라고 하였다. 최근 내린 비에 불어난 시냇물이 돌에 부딪혀 솟구쳤다가 부서지니 만 섬 구슬을 다투어 내뿜는 듯하기도 하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는 듯하기도 하며, 희뿌연 은하수에 별들이 쏟아지는 듯하기도 하였다. 또한 손님을 맞아 잔치를 벌인 요지에 비단 방석이 널려 있는 듯하기도 하였다. 용과 뱀이 비늘을 숨긴 듯한 것은 깊어서 헤아릴 수 가 없었고, 소와 말 같은 형상을 한 우뚝한 돌들이 셀 수 없이 널려 있었다. 구당협(瞿塘峽)의 입구 정도라야 변화하여 출몰하는 것을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화공의 노련한 솜씨를 숨김없이 마음껏 드러낸 곳이었다. 서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넋을 잃고서 바라보면서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모두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했으나 기껏해야 큰 항아리 안에서 나나니벌이 우는 정도여서, 제대로 소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단지 시내의 귀신의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이 절의 승려가 소반에 술과 과일을 차려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우리도 가지고 온 술과 과일을 내어 몇 잔씩 나누어 마시고 바위 위에서 춤을 추며 실컷 즐기다가 파하였다. 내가 고심 끝에 절구 한 수를 읊었다. 水吐伊祈璧(수토이기벽) 물은 이기의 구슬을 토해내고, 山濃靑帝顏(산농청제안) 산은 청제의 얼굴보다 푸르구나. 謙誇無已甚(겸과무이심) 겸손도 과시함도 너무 심하지 않으니, 聊與對君看(요여대군간) 여러 벗들과 함께 마주하여 대하네. 저녁에 서쪽 승려의 방에서 묵었다. 밤에 누워서 묵묵히 글을 외웠다. 그리고 일행에게 경각시키기를, “명산에 들어온 자로 그 누가 마음을 씻지 않겠으며, 누가 자신을 소인이라 하는 것을 기꺼워하겠는가? 마침내 군자는 군자가 되고 소인은 소인이 되고 마니, 한 번 햇빛을 쬐는 정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네.” 라고 하였다. ○ 21일. 큰비가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김사성이 갑자기 하직하고 비를 무릅쓰고서 굳이 떠났다. 백유량도 함께 떠났다. 기생 셋과 악공도 그들과 함께 떠나도록 하였다. 호남에서 온 제군들과 날이 저물도록 사문루(沙門樓)에 앉아서 불어난 시냇물을 구경하였다. ○ 22일. 아침에 비가 내리더니, 저물녁에 개었다. 불어난 시냇물에 돌다리가 잠겨서 절 의 내외가 통하지 않으니, 마치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되었던 상황과 같았다. 사람이 무려 40여 명이나 되니, 양식이 모자랄까 걱정이 되어 남은 양식을 헤아리고 평소에 먹던 양의 절반으로 줄였다. 술은 넉넉하여 아직도 수십 병이나 남아 있었다. 제군들이 모두 술 마시기를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남 선비 기대승(奇大升) 일행 11명도 비에 길이 막혀 상봉에 올랐다가 여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 절은 모두 두류산의 깊숙한 곳에 있어, 푸른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흰 구름이 산 문턱에 걸려 있다. 그래서 인가가 드물 듯 하지만 오히려 이곳까지 관청의 부역이 미쳐, 식량을 싸들고 부역하러 오가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주민들이 부역에 시달리다보니 모두 흩어져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절의 승려가 나에게 고을 목사에게 편지를 써주기를 청하였는데, 부역을 조금 줄여달라는 내용이었다. 고할 곳 없는 사정을 가엾게 여겨 헝겊에 편지를 써서 주었다. 산에 사는 승려의 형편도 이러하니 산골 백성들의 사정을 알 수 있겠다. 정사는 번거롭고 부역은 과중하니 백성들이 끝내는 유망하여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고 있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이를 염려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들의 등 뒤에서 나 몰라라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이 어찌 진정한 즐거움이겠는가? 인숙이 벼루를 쌌던 보자기에 시 한 수를 써달라고 부탁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써주었다. 高泿雷霆鬪(고은뇌정투) 높은 풍랑은 우레와 벼락이 다투는 듯하고 神峰日月磨(신봉일월마) 신령스런 봉우리 해와 달이 연마한 듯 高談與神宇(고담여신우) 신응사에서 함께 한 고담준론에서 所得果如何(소득과여하)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강이가 이어 다음과 같이 썼다. 溪湧千層雲(계용천층운) 시내엔 천 층 구름과 같은 물기운이 솟구치고, 林開萬丈靑(임개만장청) 숲에는 만 길 푸른 숲이 우거졌네. 汪洋神用活(왕양신용활) 넘실대는 시내에 정신이 활기를 찾고, 卓立儼儀刑(탁립엄의형) 우뚝 선 봉우리에 몸가짐이 반듯해지네. ○ 23일. 아침에 산을 떠나려고 하자, 절의 주지 옥륜이 아침을 대접하고 우리를 전송하였다. 두류산에 크고 작은 가람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그중에서도 신응사의 수석이 가장 최고였다. 옛날 성 중려(成仲慮)와 함께 상봉에서부터 이 절을 찾은 것이 거의 30년이 되었고, 후에 하 중려(河仲礪)와 함께 이 절에서 여름 내내 머문 것도 20년이나 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저세상으로 가고 지금엔 나만 홀로 왔으니, 은하수 가에 이르러 언제 올지도 모르는 뗏목을 망연히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법궁의 불탑에는 용과 뱀이 꿈틀거리는 듯한 모란꽃이 꽂혀 있고, 사이사이에 기이한 꽃들이 섞여 있었다. 외면의 모든 창가에도 복사꽃, 국화, 모란꽃이 꽂혀 있었는데, 오색이 뒤섞인 찬란한 빛이 사람의 눈을 현혹시켰다. 이 모든 것은 아직 우리나라 절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신응사는 구례현 나루터와는 20리, 쌍계사와는 10리, 사혜암과는 10리, 칠불암과는 10리의 거리에 있으며, 상봉까지는 하룻길이다. 절을 떠나 칠불암 시냇가에 이르니, 주지 옥륜과 지임 윤의가 나무를 시내에 가로질러 다리를 만들어서 모두 편안히 건널 수 있었다. 시내 양쪽에 횡으로 다리를 내어 모두 조금씩 걸음을 옮겨 천천히 건넜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 쌍계사 건너편에 닿았다. 혜통과 신욱이 시내를 건너와서 우리를 전송하였고, 건장한 승려 몇 명이 함께 와서 냇물 건너는 것을 도와주었다. 또 6, 7리 내려가 말에서 내려 시내를 건너려 하는데, 전날 말을 돌봐준 사람과 마을 사람 몇 명이 닭을 삶고 소주를 가지고 와서 우리를 대접하였다. 악양현의 아전들이 대나무를 엮어 들것을 만들어서 우리 모두를 어깨에 메고 시내를 건넜다. 시냇물이 험하고 급하게 흘러 바위에 흰 물결이 부서지고 있었지만 우리 일행을 건네주던 노복이 한 명도 넘어지지 않았으니, 수월하게 건넜다고 하겠다. 누군들 수월하게 건너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오히려 때에 따라 수월하기도 하고 불리하기도 하니, 이도 운명이 아니겠는가? 시내를 건너 10리도 못가서, 하종악의 종 청룡과 그의 사위가 술을 가지고 와서 소반에 물고기와 고기를 차려놓았는데, 모두가 도회지에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 같았다. 청룡의 아내 수금(水金)이 옛날 서울에 살적에 둘을 혼인시켜준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인숙과 강이에게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 모두 두 사람을 희롱하였다. 배를 타고 가면서 점심을 먹었다. 악양현 앞까지 내려가서 배를 정박하고, 현창에 들어가 잤다. 강이는 악양현의 동쪽 몇 리쯤에 살고 있는 족숙모를 뵈러 갔다. ○ 24일. 새벽에 흰죽을 먹고 동쪽 고개를 올랐다. 이 고개는 ‘삼가식현(三呵息峴)’이라 부르는데, 고개가 높이 솟아 하늘에 가로놓여 있어서, 올라가는 사람이 몇 걸음 가서 세 번이나 숨을 내쉰다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두류산의 원기가 여기까지 백 리나 왔지만, 오히려 높이 솟아 있어 작아지거나 낮아지려 하지 않는다. 우옹은 강이의 말을 타고 채찍질하여 혼자 먼저 올라갔다. 제1봉의 고갯마루에 올라 말을 세우고 말에서 내려 바위에 걸터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말과 사람이 비오듯 땀을 흘리며 조금씩 올라가, 한참이 지나서야 이르렀다. 내가 느닷없이 우옹에게 면박하기를, “그대는 말 탄 기세에 의지하여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을 모르는구려. 만약 훗날 의를 좇게 되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앞장설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라고 하니, 우옹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꾸짖을 줄 알고 있었소. 내가 내 죄를 알겠소.” 라고 하였다. 강이가 두리번거리며 두류산을 찾았으나 짙은 구름이 가리고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산 중에서 두류산보다 큰 산은 없고, 한눈 안에 두류산이 가까이 있건만, 여러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두류산보다 크게 어질지도 못하고, 눈앞에 접할 듯 가깝지도 않으며, 여러 사람의 눈에 환히 드러날 정도로 밝지도 않은 사람은 어떠하겠소?” 라고 하였다. 우리는 사방을 두루 훑어보고, 동남쪽으로 푸르스름하게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것은 남해의 끝에 있는 산이고, 정동쪽에 파도가 연이어 물결치는 듯한 것은 하동과 곤양의 산들이며, 동쪽에 먹구름처럼 아득히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것은 사천의 와룡산(臥龍山)이었다. 그 사이에 마치 혈맥이 엉켜 있는 듯한 것은 강과 포구가 서로 연이어진 것이었다. 우리나라 산과 강의 견고함은 위나라가 보배로 여길 뿐만 아니라, 넓은 바다에 접해 있고 1백 치의 성에 근거해 있지만 백성들은 보잘것없는 섬나라 오랑캐에게 곤란을 당하고 있으니, 어찌 그 옛날 길쌈하던 근심을 하지 않겠는가? 늦게 횡포역(橫浦驛)에 이르렀다. 배가 몹시 고파서 인숙의 가방에서 과일과 말린 꿩고기를 꺼내 먹고 추로주(秋露酒) 한 잔을 마셨다. 정오에 두리현(頭理峴)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갈증이 심하여 차가운 샘물을 몇 바가지씩 마셨다. 그때 짚신을 신고 직령을 입은 사람이 말에서 내려 재빨리 지나가다가 강이를 보고 앉았다. 그가 가는 곳을 물으니, 바로 광양의 교관이었다. 그때 장끼 한 마리가 끼룩끼룩 울어 이백이 활을 잡고 화살을 시위에 얹어 살금살금 다가가자, 꿩이 갑자기 날아가 버리니, 우리 모두는 그 광경을 보고 웃었다. 우리가 구름 속이나 계곡에 있을 때 구름이나 계곡 물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가 인간 세계에 내려오니 보이는 것이 다른 것이 없고, 지나가는 광양의 교관이나 날아가는 산꿩 정도가 보였다. 그러니 어찌 안목을 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녁에 정수역(㫌樹驛)에 이르렀다. 역관 앞에는 정씨의 정문이 세워져 있었다. 정씨는 승선(承宣) 조지서(趙之瑞) 의 아내이며,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현손녀이고 승선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거센 바람이 부딪히는 곳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춥고 떨린다. 그는 연산군이 자신이 지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을 알고 10여 년을 물러나 살았지만, 화를 면할 수 없었다. 부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성을 쌓는 죄수가 되어, 젖먹이 두 아이를 끌어안고 살면서도 등에 신주(神主)를 지고 다니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를 지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니 절개와 의리를 둘 다 이룬 것이 지금에도 이 정문에 남아 있다. 높은 산 큰 내를 보고 오면서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견준다면, 십 층의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것이다. 바다와 산을 3백 리 길이나 유람하였지만, 오늘 하루 사이에 세 군자의 자취를 다 보았다. 물만 보고 산만 보다가 사람을 보고 그 세상을 보니, 산 속에서 10일 동안 품었던 좋은 생각들이 하루 사이에 좋지 않은 생각으로 바뀌었다. 후에 정권을 잡는 사람이 이 길을 와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런지 모르겠다. 또한 산 속에서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세 군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반드시 만고에 전해질 것이니, 어떻게 바위에 이름을 새겨 만고에 전하려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 홍지가 또 사람을 시켜 이 역관으로 음식을 보낸 지 벌써 4, 5일이나 되었다. 생원 이을지(李乙枝)와 수재 조원우(曺元佑)가 찾아왔다. 저녁에 이을지의 아버지가 술을 가져왔고 조광후(趙光珝)도 왔다. 밤이 되어 우점(郵店)으로 갔는데 겨우 말(斗)만한 크기의 방 하나뿐이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방에 들어갔지만 다리를 펼 수 없었고, 벽은 바람도 막아내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답답함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으나, 잠시 후에는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베고서 단잠이 들어 밤을 보냈다. 여기에서 사람의 습관이란 잠깐 사이에도 낮은 데로 달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도 한 사람이고 뒤에도 같은 사람인데, 전날 청학동에 들어가서는 마치 낭풍산(閬風山)에 올라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었고, 신응동에 들어가서는 요지에 올라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은하수에 걸터앉아 하늘로 들어가거나 학을 부여잡고 공중으로 솟구치려고만 하였고, 다시는 세상으로 내려오려고 하지 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몸을 굽혀 좁은 방에서 자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분수로 감내하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평소의 처지에 만족한다 하더라도, 수양하는 것이 높지 않으면 안 되고 거처하는 곳이 작고 초라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선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고, 악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인한 것을 알 수 있고 위로 향하는 것도 이 사람이 하는 것이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같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 한번 발을 들여 놓는 사이에 달려 있을 뿐이다. ○ 25일. 역관에서 아침밥을 먹고 각자 흩어져 떠나려 하니, 서운한 마음이 들어 잠시나마 더 머물기로 하였다. 인숙은 한성에 살고 있고, 강이는 사천으로 돌아가야 하며, 우옹은 초계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가수(嘉樹)에 거쳐하며, 김홍지는 삼산(三山)에 살고 있다. 모두들 나이가 오십 내지 육십, 칠십에 가깝고, 각자 수백리 내지 오백리, 근 천리나 떨어져 있어 다른 날 함께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려울 듯하니, 어찌 헤어짐이 슬프지 않겠는가? 강이가 술잔에 가득 술을 붓고 말하기를, “이 순간의 이별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쳐다보기만 하고 할 말을 잊는다더니, 과연 이와 같구려.” 라고 하였다. 우리 모두 할 말을 잊고 말을 타고 떠났다. 칠송정(七松亭)에 도착하여 상고대(上高臺)에 올랐다. 배를 타고 다회탄(多會灘)을 건너 인숙은 강을 따라 내려갔고, 강이는 1리를 더 가서 작별하였다. 나는 우옹과 함께 쓸쓸히 돌아왔는데, 망연히 넋을 잃은 듯 하였다. 저녁에 뇌룡사에서 자고, 우옹과도 작별하였다.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처럼 막 헤어지고 난 뒤 별이 드문드문 떠 있는 새벽에 이렇듯 감회에 젖어 있으니, 마치 춘정에 겨워하는 봄처녀 같았다. 제군들이 내가 두류산을 자주 다녀 산간의 일을 알 것이라 하여 나에게 이번 유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 산을 왕래한 적이 있었다.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청학동, 신흥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용유동(龍遊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다. 이러하니 어찌 산수만을 탐하여 왕래한 것이라면 번거로운 산행을 꺼리지 않았겠는가? 평생 동안의 계획인, 화산(華山)의 반을 빌어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으로 했던 것일 뿐이었다. 일이 마음과 어긋나 그 속에 살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면서 돌아보고 눈물 흘리며 나온 것이 열 번이었다. 지금은 시골집에 매달려 있는 박처럼 걸어다니는 하나의 송장이 되어버렸으니 이번 유람도 재차 가기 어려운 걸음이 되었으니, 어찌 울적하지 않겠는가? 이런 심정을 읊은 시를 지었었다. 頭流十破黃牛脇(두류십파황우협) 누렁 소의 갈비같은 두류산을 열 번이나 유람했고, 嘉樹三巢寒鵲居(가수삼소한작거) 차가운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또 다른 시는 다음과 같다. 全身百計都爲謬(전신백계도위류) 몸을 보전하는 백 가지 계책이 모두 틀어졌으니 方丈於今已背盟(방장어금이배맹) 이젠 방장산과의 맹세조차 등지었구나 제군들이 모두 길 잃은 사람들이니, 어찌 나만 허둥지둥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 다만 술 취한 사람처럼 길 모르는 사람을 위해 먼저 인도하여 부봉(副封)하는 것일 뿐이다. 남명 조식 건중이 쓴다. +++++++++++++++++++++++++++++++++++++++++++++++++++++++++++++++++++++++++++++++++++++++++++++++++ 유두류록==이 수안 정사년(丁巳年 ; 1917) 8월 2일 부헌자(桴軒子) 는 안장을 놓아두고 지팡이를 짚고서 문을 나서서 길을 떠났다. 사람들이 묻기를, “어디 가세요?”라고 하였으므로, 나는 “두류산에 들어가 천왕을 뵈려고 하네.”라고 대답하였다. 집안 사람으로는 오직 동생 이수항(李壽恒)만이 따라오는 것을 면했다. 사월(沙月)에 이르니 아덕(兒德)이 운곡(雲谷)에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 3일에 국경(國卿) 강윤극(姜允克)이 와서 만났다. ○ 4일에 천우(川愚) 유치경(柳致絅)이 왔다. 이날 구름이 자욱하고 비가 내렸다. ○ 5일 맑음. 사촌(沙村) 박찬여(朴瓚汝)가 고시(古詩) 한 편을 써서 보내 주었다. 박찬여의 문중 손자인 박경우(朴景愚)도 함께 백운동(白雲洞)에 이르렀는데, 박경우는 뒤에 남아서 김장중(金莊仲)과 김이회(金而晦) 일행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오후에 팔덕문(八德門)에 도착하였고 산천재(山天齋), 세심정(洗心亭)을 지나 밤에 국동(菊洞)의 정성호(鄭性浩) 군의 집에서 묵었다. ○ 6일 일가 조카뻘되는 이방숙(李方叔)의 동당우(東塘寓)에서 잤다. ○ 7일 이방숙과 함께 종추 폭포(鍾湫瀑布)를 보고서 중산리(中山里)에 도착하여 용연 폭포(龍淵瀑布)를 보았는데, 폭포는 길이가 10여 척이었다. 그 위에는 반타석(盤陀石)이 있었고 옆에는 단지처럼 생긴 세 개의 구멍이 있었는데 큰 바위 아래까지 모두 통한다. 전설에 용이 이 구멍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비탈길을 부여잡고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니 위는 신선적(神僊磧)이라 하는데, 크고 작은 수많은 돌이 쌓여서 누대를 이루고 있었다. 아래는 벌집 같은 굴이 있었다. ○ 8일 비가 내림. 점심으로 죽실면(竹實麵) 을 먹었는데 또한 별미였다. 올해는 산에서 생산된 죽실이 수만 섬에 이른다고 하였다. ○ 9일 맑음. 정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출발하여 문창대(文昌臺) 아래에 이르렀고, 산허리를 따라서 가는데, 만 길의 절벽에 목석(木石)으로 잔도(棧道)를 이루고 있어서 두려워할 만하였다. 한 고개에 오르니 곧 옛날의 벽계암(碧溪菴) 아래 순두촌(淳頭村)의 유상협(流上峽)이었다. 여기에는 산막이 있었다. 박영우와 김장중, 김윤원(金允遠), 이자상(李子上)이 왔는데, 대개 삼장(三壯)의 대포(大浦)에서 내원(內源)의 고탑(孤塔)으로 들어와 고개를 넘어 순두촌에 이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특별한 곳에서 서로 만나니 놀라움과 기쁨을 알만하였다. 그러나 김이회와 그의 형 김이경(金而敬), 이상실(李相實), 이창실(李昌實) 형제, 김직재(金直哉), 허내경(許乃卿), 정경직(鄭敬直) 등 여러 사람들은 순두촌에 비가 개이지 않아 중도에 오는 것을 멈췄다고 하였다. 이 얘기를 들으니 쓸쓸하였다. 박경우가 말하기를, “해가 이미 짧아졌으니 이 산막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산을 올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비가 비로소 개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빨리 점심을 해 먹고 정상에 오릅시다.”라고 하였다. 이에 일제히 여장을 꾸려 힘을 내어 온갖 험한 길로 나아가는데, 힘들고 피곤한 생각을 잊었다. 중대(中臺)에 이르러 잠시 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하늘과의 거리가 지척임을 알았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곧바로 상봉(上峰)에 도달하니, 해가 또한 석양을 물들이고 있었다. 물을 찾아보니 표목(標木)에 ‘상봉급수소(上峰汲水所)’라고 쓰여 있었다. 한 편에서는 솥을 걸고 한 편에서는 땔나무를 주웠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달빛이 그다지 어둡지 않았으나 이미 한기에 떠는 자가 있었다. 현덕(鉉德)과 박경우는 힘을 내어 나는듯이 등반하였다. 잠시 후에 현덕이 짐꾼에게 솥을 매고 오라고 하여 각자 집기류를 잡고 나를 부축하며 벼랑을 오르니, 위에는 과연 절벽 아래로 수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곳이 있었다. 마른 거적을 펴고 요를 깔아두고 나무를 쌓아 바람을 막고 앞에 불을 지피니 솜옷과 갖옷을 입고 평안하게 방에 앉아 있는 듯했다. 이에 둘러앉아서 밥을 먹었다. [그 옆에는 또한 샘이 있었는데 가뭄이 들어서 말랐다고 한다.]혹자는 취하고 혹자는 자며 혹자는 노래 부르고 혹자는 춤추며 각자 그 흥취를 다하였다. 한 밤중이 되니 별과 달이 밝게 빛났다. 잠시 후에 동쪽 하늘이 밝아오려 하는데 하늘가에서 갑자기 구름이 먹물을 뿌린 듯 생겨나서, 도무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없게되었으니, 매우 안타까웠다. 오직 한 줄기 붉은 고리가 사방을 빈틈없이 하늘 밖에서 비추고 있는 것만이 보일 뿐이니, 이로써 이 산이 매우 높다는 것을 실제로 알 수 있었다. 북쪽의 구름과 안개가 아래의 허공에 있었는데 정오가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넓게 퍼져 일렁이고 있었다. 안음(安陰) , 거창(居昌), 산음(山陰) , 함양(咸陽) 등 여러 군의 경계가 모두 흰 바다의 물결 중에 잠겼는데 그 외의 여러 산들은 여전히 푸르렀다. 동쪽, 서쪽, 남쪽은 탁 트였다고 할 수 있었으며, 골짜기 아래에 남아 있던 남기(嵐氣)는 또한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천만 가지 상으로 변화하니 멀고 가까운 여러 산봉우리와 협곡이 구분되지 않고 혼연히 평평한 뭍이 되었다. 그 사이에 흰 비단 수 줄기가 종횡으로 마치 허리띠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는 곧 여러 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계룡산(鷄龍山) 이남 충청도와 전라도 경계에서 동래(東萊), 울산(蔚山), 영덕(盈德), 평해(平海)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바다였으나, 드넓은 바다 밖에는 하늘과 바다가 구별되지 않았다. 남해(南海), 금산(錦山)이 가장 가까이 눈 앞에 있었고 그 외에 여러 작은 섬들은 마치 배 같기도 하고 누대 같기도 하며 제기를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 상앗대 끝은 주먹이나 구슬 같았으니 이를 이루다 기록할 수는 없었다. 황매도(黃梅闍)는 용이 누워있는 듯했고 그 나머지 멀고 가까운 이른바 명산과 거대한 골짜기는 곧 모두 구릉처럼 보일뿐이었다. 그러나 오직 거창의 가야산(伽倻山)과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만이 조금 산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이외에는 더욱 시력이 미칠 수가 없었다. 또한 소상하게 가리키며 알려주는 자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날 오후에 돌아오려고 길을 나섰는데 벽계암(碧溪菴)으로 내려와 순두촌의 남쪽 협곡을 거쳤다. 남쪽 협곡 안에는 상선적(上僊磧)이 있었는데, 하적(下磧)과 비슷했으나 깨끗하고 희어 조금 빼어났다. 산허리에 있는 길을 따라 오등(五嶝)을 넘어서 조개(朝開)의 우측 산기슭을 좇아 내려왔다. 전두동(田頭洞) 입구를 빠져 나와 달이 떠오른 때에 대원사(大源寺)에 들어갔다. 절은 장당산(長塘山) 동쪽 두 산이 서로 인접한 가운데에 있었다. 밝은 시내와 흰 돌이 특히 매우 아름다웠다. 왕년에 여기에서 《어류(語類)》 를 간행하던 때를 돌이켜 보았다. 나는 돌아가신 형과 함께 곽징(郭徵) 군을 좇아서 열흘 정도 머물면서 병을 다스리다가 야음을 타고 돌아왔었다. 이제 와서 눈에 남겨진 큰기러기 발자국 생각이 간절하니,이로 인해 남몰래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 ○ 11일 아침을 일찍 먹고 골짜기를 나왔다. 김장중을 비롯한 한 무리는 횡계(橫溪)를 통해 율령(栗嶺)을 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남쪽으로 내려갔다. 정오에 대포 앞의 객점에서 요기를 하고 백운동 동구에 이르러, 유치경은 구산(鳩山)으로 향했고 현덕과 강윤극 등은 사월로 향했다. 나는 길에서 한자명(韓子明)을 만나 도구상탄(陶丘上灘)을 건너 한자명의 처소에서 잤다. ○ 12일 운곡에 이르렀다. ○ 13일에 옥산(玉山)에 올라가서 천왕봉 앞쪽을 바라보며 전날의 남겨져 계속된 뜻을 이었다. ○ 14일에 사월로 돌아와서 사촌 박찬여의 증시에 화운하였다. ++++++++++++++++++++++++++++++++++++++++++++++++++++++++++++++++++++++++++++++++++++++++++++++++++++++ 유두류록==변 사정 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타고난 자질이 어리석으며 성품이 거칠고 배움이 보잘것없어 세상에서 믿음을 받지 못해 그저 농사짓고 독서하는 것을 나의 일로 삼았다. 가정(嘉靖)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 봄에 두류산 도탄(桃灘)에 초가집을 짓고 아침엔 집을 나서 구름 낀 높은 곳에 있는 밭을 갈고,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피곤하여 할 일이 없는 날이면 사슴과 더불어 사립문을 닫아걸고 한가하게 초가에서 누워 쉬었다. 이웃에 사는 노인이 때때로 채소와 술을 가지고 나의 초가에 와서 대접해 주었다. 생활이 적막하여 홀로 즐기며 돌아갈 줄 몰랐으니 학업은 더 서툴러져서 진척되기를 바랄 것도 없었다. 이처럼 이곳에서 홀로 즐기며 생활한 지가 수십 년은 되었다. 때는 만력(萬曆) 8년 음력 4월 초3일 군회(君晦) 정염(丁焰) , 사중(士重) 김천일(金千鎰) , 계평(季平) 양사형(楊士衡) , 대재(大哉) 하맹보(河孟寶)등 여러 친구들이 백장사(白丈寺)에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기쁘게 그들을 맞이하여 접대하였고 옛 정을 모두 풀었으며, 친구들은 이틀을 머물러 잤다. 군회 정염이 말하기를, “두류산은 곧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이다. 뛰어난 선배들의 유람이 이미 시문이나 유기(遊記)에 모두 드러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이 만약 한 번 가서 경관을 감상한다면 한(韓), 정(鄭)의 유산록(遊山錄) 을 실제로 징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유산록을 보는 것보다는 몸소 실제 경관을 찾아가는 것이 나으니, 이제 그대들과 뜻을 같이하여 두류산을 맘껏 노닐어서 묵은 빚을 갚아 보도록 하세나.” 라고 하였다. 이에 각자 대나무 지팡이 들고 짚신을 신고는 마침내 길을 나서 산을 내려가 논도랑이나 밭두둑을 따라 고불고불한 길을 가서 황계 폭포(黃溪瀑布)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었다. 지금껏 쭉 이어진 길이 20리인데, 모두 푸른 솔과 초록빛 넝쿨이었다. 밝은 바람이 옷깃 속으로 들어오고 정룡암(頂龍庵)에 도착하니 바위 사이로 이름 모를 꽃들이 피었다 떨어지고 골짜기엔 이름 모를 새가 오고갔다. 눈으로 경관을 바라보고 귀로 숲의 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이곳은 신선이 사는 세계였다. 서로를 돌아보며 담소를 나누는데 날이 장차 저물려고 하였다. 여러 친구들과 함께 이 암자의 북당(北堂)에서 잤다. 초6일에 아침밥을 급히 먹고 큰 내를 건너서 6, 7리를 가니 물이 콸콸 흐르고 산은 우뚝 솟아 있었다.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나 작은 시내를 건너서 가는데 고기잡이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였다. 살펴보니 일찍이 안면이 있는 자였다. 열 마리나 되는 물고기로 우리를 대접하겠다며 말하기를, “이 물고기는 산중의 진귀한 물건이 될 수 있으니, 이것을 여러 어른들께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길을 안내하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군회 정염이 말하기를, “다만 물고기를 대접한데서가 아니라 그의 말이 참으로 가상하다.” 라고 하였다. 곧 그를 따라 몇 리를 가니 계곡 안에 인가가 두세 집 있었다. 닭이 울고 개가 짖으며 푸른 나무 사이로 흰 구름이 나오니 또한 절경이었다. 오후엔 옥련동(玉蓮洞)에 올라 영원암(靈源庵)에 이르렀다. 산이 깊어 세속과는 단절되었는데, 푸른 회나무와 초록빛 단풍이 비단 날개를 펼친 듯 사람을 가로질러 있었다.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날이 저물어 장정동(長亭洞) 김씨가 우거하는 집에서 투숙하였다. 초7일에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초8일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자진동(紫眞洞)을 지나 바위를 잡고 지팡이를 날리며 천왕봉(天王峯) 에 올랐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하여 시계가 막힘이 없었고 정신이 씻은 듯 상쾌하였다. 여러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들의 지금 유람은 참으로 장대하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여러 산들과 수많은 골짜기가 발아래로 펼쳐져 있고, 거대한 신령과 장대한 교룡(蛟龍) 이 자기의 집에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머뭇머뭇하며 내려와 해진 산장에서 잤다. 초9일에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의신사(義神寺)에 도착해서 한 번 쉬었는데 겨우 양의 어깨뼈를 삶을 정도로 잠깐이었다. 곧 성사동(聖獅洞)을 지나 신흥사(神興寺)에 도착하니, 승려 몇 명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나는 후전(後殿)의 동쪽 방에서 밤새도록 승려와 얘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봉우리와 어떤 계곡이 매우 빼어난 곳이라 언급하니,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나았다. 초10일에 아침을 늦게 먹고 승려와 함께 골짜기 입구까지 나오니 기이한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만했다. 그 옆에 큰 글씨로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푸른 이끼가 덮어서 자획이 분명하지는 않았다. 승려에게 묻기를, “저것은 누구의 글씨인가?”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소승은 사실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부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승려는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는 절로 돌아갔다. 이어서 칠불암(七佛庵)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쌍계사(雙溪寺)에 도착했다. 종 한명이 서쪽에서 와서 편지 한 통을 올리는데, 곧 군회 정염의 고향 집에서 보낸 급보였다. 11일에 여러 친구들과의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도탄 거사(桃灘居士) 변사정(邊士貞) 이 기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