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溪漫錄 權應仁撰
송계만록 하(松溪漫錄 下)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이, 정을 통하였던 경주(慶州) 기생이 임신한 지 두어 달만에 선생이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그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윤손(曺潤孫)이 그 기생을 차지하였다. 기생이 해산하자 조윤손이 자기 아들인 줄 알고 몹시 사랑하고 이름을 옥강(玉剛)이라 하였으나, 일문(一門)에서는 모두 그가 이씨의 아들인 줄 알았다. 조공이 죽은 뒤, 배 다른 형제들이 배척하여 여막(盧幕)에 거처하면서도 그 방을 따로 정해 주었다. 임금의 소명을 받았던 남명(南溟) 조 징군(曺徵君이름은 조식(曺植))은 조씨 문중의 어른이었다. 신주(神主)를 쓰면서 옥강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조 징군의 명령이었다. 옥강이 울며 그 이유를 자기 어머니에게 물으니, 그 어머니가 사실대로 알려주었다.
당시 회재 선생은 강계(江界)에 귀양가 있었는데, 옥강이 적소에 달려가니 선생이 허락하고, 이름을 전인(全仁)이라 고쳤다. 그는 조공(曺公)을 위하여 심상(心喪) 3년을 하였다. 그 사실이 대개 이와 같으니, 어야족(魚也足)은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마는, 나는 조 징군의 가까운 친척에게 들었다.
○ 어관포(魚灌圃) 선생은 수수께끼를 잘하였는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그후 사문 표빈(表贇)이 넉넉히 그 경지에 들어갔다. 재상 송겸(宋㻩)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 표빈이 울산 원으로 있었다. 감사가 원에게 활쏘기를 시키면서 수수께끼로,
“서생의 과녁은 멀리 세우면 맞지 않는다.”
하였다. ‘멀리 선다[遠立]’는 것은 머리가 센다는 말이다. 표빈이 대답하기를,
“저는 백발 백중(百發百中)입니다.”
하였다. 백발(百發)이란 바로 백발(白髮)을 말하는 것이다. 관포(灌圃)는 어득강(魚得江)이다.
晦齋先生所眄慶州妓。懷孕數月。先生抵京城。妓爲曹兵使潤孫所占。及其解脫。曺以爲己子甚愛之。命名曰玉剛。而一門皆知其爲李氏子也。曺公沒後。異母之出者相與擯斥。居一廬而異其房。南溟曹徵君。曹門之長也。當書神主也。不書剛名者。徵君之命也。剛泣問厥由於其母。其母以實告之。時先生謫于江界。自奔謫所。先生許之。改名曰全仁。爲曹公心喪三年。其大槪如此。魚也足聞於何人。僕則聞之於曹徵君强近之親者也。
魚灌圃先生善作謎語。無出其右。厥後表斯文贇。優入其室。宋相
甫爲慶尙監司。表守蔚山。監司屬守射帿。仍以謎語戱之曰。書生之帿。遠立則不中。遠立猶言頭白也。表答曰生百發百中。百發猶言白髮也。灌圃乃斯文魚得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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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先生集卷之二 / [雜著] / 解關西問答
全仁云者。乃故貳相李彦迪之妓産也。其名曰玉剛者也。彦迪初出身。爲慶州訓導。畜其母爲房直。故判書曺胤孫。時爲慶尙道水使。曾眄此妓。因彦迪上京。潛挑而去彦迪。已有娠。胤孫取去七箇月乃生。名之以玉剛。以奉其祀。正類秦政,楚幽之於呂不韋,黃歇。植之婦翁有孽妹。乃胤孫妾子義山之妻也。門戶相連。嘗知其巓末。曺門皆知七月所生。國人皆笑潤孫之惑。及胤孫之歿。曺家子壻。皆不許傍題奉祀於神主。玉剛尙貪胤孫奉祀所傳。不肯歸其父。時復古竄在關西。無他子弟。孑孑孤寓。植聞而愍之。委通信人於玉剛曰。汝母非不說汝以所生之父。汝非不知。今則判書已歿。復焉有所忌。而不就貳相乎。朝議喧騰已久。今欲嚴鞠爾母。汝旣負爾父。又欲殺爾母乎。玉剛猶顧戀不去。及曺家黜去而後。往慶州。猶服養父衰絰入京。玉剛年近四十。尙不知有父。復古爲他日孤魂。有子而爲勢家所奪。方玉剛之及門也。復古尙不能嚴父子義。以詰其無父之罪。遽忻然愛悅。若未嘗有釁之父子。嘗嘆復古遠謫。無緣相對一拍手也。
其曰全仁者。必僦復古而改其名也。常詆玉剛爲無父奸人。玉剛亦㗸。復古不知此意。故問來時見我乎。玉剛萬無見我之情也。復古嘗薦我以遺逸。吾亦嘗意與復古無一夕雅。實不知我半面。亦何所知我善惡乎。不知善惡。而徒聞人言。遽以上聞。以人言而稱我。則必以人言而誚我。嘗嘆天淵異路。亦無緣携手一破顔也。復古爲本道監司來也。頻有書求見。植辭以寧有呈身擧子乎。獨念古人歷仕四朝。僅四十六日。吾知相公解歸田里之日不久。當角巾相尋於安康里第。尙未晩也云。復古亦嘗與人語曰。曺植譏我。尙不退休。慚負云云。嘗恨復古學聖賢之道。而致知之見不明。當時大小尹之禍。朝夕必發。國勢抗揑。愚婦所知。猶不早退於官卑之日。以至於負重而不可解。流死異域。恐虧於明哲之見也。又嘗恨復古嘗陳十條封事。中廟大加稱賞。特陞嘉善。獻策而受賞。乃古人所羞。何不辭以人臣進言。乃其職分。人主爵命。亦代天工。臣進言而受賞。君受言而後賞。君臣皆如所中者然。他時爵之祿之。皆稱其臣之材量大小。何不可。而必於臣之陳疏之日乎云。則稍可以勵廉恥格君心之一段矣。全仁生長武家。焉有習聞之事乎。始僦復古。而方知向學。其見其得固淺。冊中所記多誤。亦非復古所說者然。其曰張儀者。非也。乃張乖崖忠定公詠之事也。王文正家人。始和以埃墨。後投以小塊。其曰墨染者。亦誤也。文正落帶。先人亦有議焉。身爲首相。爲百僚瞻仰。脫帶於闕庭駿奔之地。已自失儀。曷若俯而忽着。不愼其衣帶於趨朝之始。恐慢於居常之敬也。大學不言存養。此必全仁之誤記。大學明明德止至善。乃開卷第一存養地也。初學之士。亦當理會。况復古乎。雍姬之論。亦恐未盡也。其夫與其君謀於野。欲殺其父。是可乞而求已耶。當告其父。又當告其夫。待二人各相爲處而後自決。似可。士族女再嫁之論。亦非復古之言也。古人云。夫雖入門而斃。猶不當許身他人。况旣嫁之後乎。擧天下責之以死忠。臨時效節者無幾。先許以不忠乎。况天下之人。豈盡孀婦而責天下之烈婦乎。孀婦之論。程先生已有定論。後人固不當發其私意也。其曰耳目口鼻之欲是私欲者。亦非也。耳目口鼻之發。雖聖人亦同。同一天理也。流於不善而後。方可謂之欲也。但有人心道心之別者。有形氣義理之間已。故不曰人欲。曰人心。冬有雷鳴之說。恐未詳悉。陽宜在地中。而陰實陽虛。陽在外不得入。皆失其健順之和。不得猶爲陰所制。終不得爲陰所蓄。有時發動。趙大憲孝直先生之事。以吾所聞。則必不如是。先生姿貌如玉。人無賢愚。見必慕悅。少時出征。夕投店舍梳髮。有一艾亦自京來者。稍近侵眤。流注不去。先生恐夜來投寢。遽徹其席。向昏移寓他家云。或云。使之梳頭。情若難制而移寓。此則恐非實傳。先生。乃當今人也。人言不一如此。人言擧不必信也。其曰。登第誤身。終身悔恨者。正非復古之意也。科第豈是不好事而誤身乎。終身悔恨。則何至於崇品而不晦退耶。此亦全仁之誤聞也。其受雉魚者。必在銓長之日也。銓門如布。無非苞苴事也。固當一初謝去。若在無權之地。朋友有寄髓滫。寧可不受耶。若一切郤之。則毋亦隘挾而非人情乎。植之用蜃灰。初非辭石而取蜃。適母在金海而捐席。海蛤最便燔取。因載大轝之船。初聞油不過九斗。同腹八人。皆合取九斗。及其搗用。不止此數。常以僭分。爲終身之恨。更啓他人爭效之意。若云詭異。則非近情之說也。索隱行怪。方是爲詭。喪用蜃。何詭之有乎。今之近海之人。例用蛤灰。爲取其易辦於窮家也。且高山頂有螺蚌殼。此是前天地混沌時殼也。其曰消盡者。非也。獨見華元葬其君。蜃灰石槨。三年而葬。君子譏之。海傍蜃灰如沙土。不日燔成。與古不同。但以用油爲未安已。其與兵使同舟者。復古恐聞之誤也。胡越有時同舟。監兵使同舟。有何一寸所失耶。當時植在山海亭。黃江橫帶。前面忽見大小艦十餘艘。張樂鼓吹。舟尾相接。而知兵使迎新監司之行於江上云。植只曰。復古位望非微。方正殿最於金海。兵水使從前處恭聚府。鞠躬就拜而去。方是道主之體。而不虧紀律之事也。前日未有是事。今始生例也云云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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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菴集卷之十四 / 雜著 / 自警說
曺南溟曰。全仁云者。乃故貳相李彦廸之妓産也。其名曰玉剛者也。彦廸初出身。爲慶州訓噵。畜其母爲房直。故判書曺潤孫時爲慶尙水使。曾眄此妓。因彦廸上京。潛挑而去。彦廸已有娠。潤孫取去七箇月。乃生。名之曰玉剛。
栗谷先生論晦齋曰。居家。不能遠不正之色。
沙溪問於栗谷曰。畜色。晦退均有其過。而先生獨咎晦齋。何也。栗谷良久。答曰。凡觀人之道。當分成德後與未成德前。退溪之失。在於年少時。晦齋旣老而有此失。所以不能無別也。
按。酒席一眄。猶是一時之失。若其家畜則爲害理。至於道學君子。其律身尤與他人自別。而晦退兩賢。俱不能免于此。况後學哉。可畏可畏。然栗谷所論成德前後之說。可謂得當。而此亦論人則然。而自省則不如是矣。今以未成德之前爲可恕。則學者於中年以前。雖不戒色而縱慾自恣。亦可乎。决知其不然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