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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올인하라
2012년 5월 9일 / 사무엘상 28:3-8
9년 전 한국의 모 방송국에서 ‘올인’이라는 드라마를 방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굉장히 인기가 있어서 시청률이 무려 40%나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 드라마는 노승일 씨가 쓴 <올인>이라는 소설을 각색한 작품인데,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두 주인공이 각기 다른 파란만장한 삶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삶의 전부를 걸고 최후의 승부를 벌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의 제목인 ‘올인’이라는 말이 시중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올인(All in)’이라는 말은 도박할 때에 사용되는 용어로서, ‘모든 것을 다 건다’는 의미입니다. 드라마가 도박판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약간의 말들이 있었지만, 정치권에서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 올인 한다’는 말을 만들어내고, 스포츠 경기에서는 ‘월드컵 축구 본선에 올인 한다’는 말을 만들어내는 등 이 단어는 사회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도박판에서 나온 용어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올인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귀에는 아무 들리는 것 없어도, 손에는 아무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올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고, 여러 가지 직분을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올인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시간에 아무리 ‘주님을 의지합니다’라고 하며 찬양한다 할지라도,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세상을 의지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올인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올인했습니까? 세상에 올인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세상의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저는 세상의 방법을 추구했던 사람과 하나님께 올인 했던 사람,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세상의 방법을 추구했던 사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의 인생에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사울 왕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고, 그 동안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영적지도자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장 껄끄러운 나라인 블레셋 군대가 몰려와 수넴에 진을 쳤습니다. 이에 사울 왕은 이스라엘 군대를 동원하여 블레셋 군대가 머무르고 있는 수넴에서 약 6Km 떨어진 길보아에 진을 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두려워했습니다. 얼마나 그가 두려워했는지 사무엘상 28장 5절에는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릴 만큼 그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6Km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완전히 중무장을 한 블레셋군대를 보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때 사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삼상 28:8 / 사울이 즉각 다른 옷으로 변장하여 남들이 알아볼 수 없게 꾸민 다음 신하 둘을 데리고 진영을 나섰다. 그들은 이미 점령된 지역의 북쪽에 위치한 엔돌에 이르기 위하여 깜깜한 밤에 산속을 걸었다. 사울은 그 밤에 엔돌의 무녀를 만나 이렇게 간청하였다. “그대는 죽은 사람의 망령을 불러올릴 수 있으니, 부디 내 앞날을 점쳐 주시오! 그대가 누구를 불러 올려야 할지는 내가 곧 알려 주겠소.”
사울은 백성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변장을 하고 밤중에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체면 때문입니다. 사울은 체면 때문에 변장을 하고 대낮인 아닌 컴컴한 밤중에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왕으로서 무당을 찾는 행동이 부끄러운 행동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도 자신의 체면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 몇 년 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적이 있는 한 책이 있습니다. 바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이 책은 유교문화의 폐해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서 예로부터 체면이라는 문화 속에 깊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안 해도 될 일을 해야 하고, 체면 때문에 형편이 안 되고, 할 능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인의 의식 구조라는 책을 쓴 이규태씨는 ‘체면이란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얼굴을, 다른 말로 말하면 체면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표현 중에 <얼굴>에 대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야, 너 때문에 내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뵐 낯이 없습니다. 이 녀석아! 제발 좀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라. 그 사람 얼굴 한번 넓다. 선생님, 제 얼굴을 봐서라도 잘 부탁합니다.” 다 이러한 표현이 체면문화로부터 출발한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체면문화 때문에 한국 사람들처럼 손해 많이 보는 민족이 없다고 합니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애들아! 이 문제 다 이해하니?”라고 물으면 학생들은 일제히 “네”라고 합니다. 몰라도 체면 때문에 어지간하면 모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됩니까? 모르는 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과 함께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할 때, 어떤 음식을 주문합니까? 연세 드신 분이 주문하는 음식을 똑같이 주문합니다. 요즘에야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함께 식당에 간 아저씨가 곰탕을 시키면, 자기는 곰탕 먹기 싫으면서도 곰탕을 시킵니다. 커피숍에 가서 몸에 좋다고 하는 쌍화탕을 마시고 싶어도, 함께 동행한 연세 드신 분이 커피를 시키면 마시기 싫은 커피 시켜놓고 마시지도 않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체면 때문에 어떻게 비싼 것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마시지 못하고 그냥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알량한 체면이 우리를 손해 보게 만들었습니다.
▶ 우리 주위에 보면 알량한 체면 때문에 영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급장을 떼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깊이 잠길 수가 있는데, 체면을 앞세워서 사회의 계급장을 떼지 못하고 은혜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아람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려 고치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지만, 엘리사는 나타나지도 않은 채 사환을 보내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이스라엘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대국인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 찾아왔으면 얼른 마중 나와야 하는데, 마중은커녕, 사환을 통해 더러운 요단강에 몸을 담그라고? 그것도 한번이 아닌 무려 일곱 번씩이나 요단강에 몸을 담그라고? 나아만은 자기 몸의 문둥병을 고치는 일보다 알량한 체면 때문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는 종들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하 5:13-14 / 나아만의 부하들이 다가서며 말하였다. “만일 저 예언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요구하였더라도 장군님은 틀림없이 그대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그대로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14) 그래서 돈 많고 권세 높은 나아만은 마음을 바꾸어 겸손히 요단강으로 내려가 엘리사가 명령한 대로 그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가 완전히 치료되어 그의 피부가 소년의 살결처럼 깨끗해졌다.
요단강 물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신분을 상징하는 당당한 마차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계급장을 떼었습니다. 자존심의 계급장을 떼어 버렸습니다. 그의 신분을 의미하는 군복도 벗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부는 변하지 않고 여전히 문둥병 그대로였습니다. 그럼에도 나아만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또 다시 요단 강물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여전히 변화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7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다가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문둥병에 걸린 그가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하게 치료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알량한 체면을 다 던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아만이 자신의 체면을 내세우고 요단강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의 문둥병은 고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체면을 던져 버렸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를 만나셨습니다. 그 여자는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강청했습니다.
마 15:23 /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자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성가시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가나안 여자를 본척만척하였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이 여자가 소리 지르며 강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고 하시며 인종 차별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도와 달라고 계속해서 강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가나안 여자를 개 취급 하시며 그녀의 자존심과 체면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완전히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 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며 예수님께 애원을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 15:28 / 그때 예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체면만을 내세우다가 은혜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깊이 잠길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계급장을 떼지 못한 채 알량한 체면을 내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아람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처럼 세상의 모든 계급장을 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깊이 잠기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체면을 다 던져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 왕은 백성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변장을 하고 밤중에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도 자신의 체면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올인 하지 않고 무당에 올인 했습니다. 물론 과거에 그가 하나님께 올인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삼상 28:3 / … 공교롭게도 당시에는 사울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무당을 죽여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보면 사울은 나름대로 하나님께 올인 하려고 약간의 노력을 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겠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마음으로 무당을 쫓아낸 것은 잘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무서운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자 그의 마음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평안할 때는 무당을 쫓아내고 하나님께 올인 했지만, 어려움이 닥치자 하나님을 멀리하고 무당에게 올인한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기
그는 양다리 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환한 대낮에는 무당을 쫓아내었지만, 밤에는 자신이 쫓아낸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낮과 밤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올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올인한 것처럼 보였을 뿐, 진정으로 그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올인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무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핵심에 올인 하면 우리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까?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인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잘 풀릴 때나 잘 풀리지 않을 때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형통할 때나 고난당할 때나, 변함없이 항상 하나님께 올인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은 하나님께 올인하지 못하고 세상의 방법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무당의 인도를 받으려했던 사울은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상황이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사무엘상 31장을 보면 처참하게 무너지는 사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삼상 31:6 / 이리하여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경호원과 부하들이 모두 한날에 죽고 말았다.
한 가문이 망했습니다. 하루에 아버지와 아들 셋이 다 죽었습니다. 사울의 시체는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목이 잘려진 후, 벧산이라고 불리는 성벽에 높이 매달리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2. 하나님께 올인 했던 사람
늘 사울 왕과 대조가 되는 다윗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사무엘상 30장을 보면 다윗의 인생에 말할 수 없는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이 처한 상황은 영적인 리더였던 사무엘 선지자가 죽고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어려움을 겼었던 사울의 위기보다 더 큰 위기였습니다.
큰 위기 속에서 /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 어디에서도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서 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600명을 데리고 블레셋 나라로 넘어가 가드 지역의 아기스 왕에게 붙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블레셋 나라와 자기의 조국인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윗은 가드왕 아기스의 편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잘못하면 동족끼리 전쟁하게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이 다윗이 자기들과 함께 전쟁에 나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과거에 다윗이 블레셋 장수인 골리앗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방백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도중에 다윗이 배반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기 조국으로부터 쫓기던 다윗은 피난살이하는 블레셋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따르던 6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삼일 만에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시글락에 돌아와 보니 기가 막힌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군대가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시글락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집들은 전부 불타 버렸고, 부인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전부 잡혀갔습니다. 소도 양도 다 끌고 갔으며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출전했다가 돌아온 다윗의 부하들은 처참한 상황을 보고 절망하였습니다.
삼상 30:3-6 /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돌아와서 그런 광경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 지르며 울었는데, 지쳐서 기진맥진할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5) 다윗의 두 아내, 곧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미망인 아비가일도 포로로 잡혀갔다. 6)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미묘하게도 다윗에게 아주 불리하게 발전되었다. 왜냐하면 처자식을 잃고 흥분한 군중들이 다윗을 돌로 쳐죽이자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삼상 30:6 / …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다윗은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를 더욱 의지하였다.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여기 ‘군급(窘急)하였다’라는 말은 ‘답답하다, 곤란하다’란 의미입니다.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게 되는 답답한 감정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윗은 군급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울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8장 15절을 보면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사울이나 다윗이나 비슷하게 군급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사울처럼 밤중에 무당을 찾아갔습니까?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위기를 맞은 사울은 세상적인 방법을 추구했습니다. 밤중에 변장을 하고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바라기 신앙 / 다윗은 해바라기가 항상 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당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주바라기였습니다.
삼상 30:7-10 / 하나님께로부터 백 배 용기를 얻은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에봇을 가져오도록 명령하였다. 아비아달이 제비가 든 에봇을 가져오자 8)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었다. “제가 앞서 떠난 저 약탈자들을 추격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그들을 쫓아가면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이런 응답을 받았다. “네가 그들을 쫓으면 틀림없이 따라잡을 수 있거니와 잡혀간 사람들도 구할 수 있다.” 9-10) 다윗은 즉시 부하 600명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 군대가 브솔 시내쯤에 이르렀을 때 그중 200명은 이미 지쳐서 더 이상 험악한 브솔 골짜기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200명은 그곳에 남아 있고, 400명만이 다윗을 따라 그 시내를 건너 계속 추격하였다.
8절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제가 아말렉 군대를 좇아가면 따라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그들을 추격하여 너희들이 빼앗긴 것들을 도로 찾을 것이다.” 다윗은 사흘 동안 전쟁터에 나갔다 오느라 피곤한 상태에 있는 200명은 남아 있게 하고 나머지 400명을 이끌고 아말렉을 추격했습니다. 새벽부터 그 다음날 저녁때까지 쉬지 않고 아멜렉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니까 꼬박 이틀 동안 적들을 추격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삼상 30:18-20 / 다윗은 이렇게 아말렉 족속에게 약탈당하였던 물건과 짐승과 사람을 모두 되찾았고, 그의 두 아내도 되찾았다. 19) 다윗의 부하들도 잃어버린 것 하나 없이 모두 되찾았다.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모두 건강하게 되돌아오고, 약탈당하였던 물건도 모두 되찾았다. 20) 다윗의 부하들은 아말렉 군대의 양 떼와 소 떼까지도 빼앗아 몰고 오면서 “이것이 다윗의 전리품이다.”하고 외쳤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올인한 다윗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사울과 달리,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빼앗겼던 것들을 다시 찾아왔을 뿐 아니라, 아멜렉 군대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와서 그 전리품을 선물로 나눠주었습니다. 다윗은 승리했을 뿐 아니라, 그 승리를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올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극한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다윗처럼 하나님께 올인 한다면 마침내 회복과 넘치는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멕시코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자기 나라는 못사는데 반해, 이웃하고 있는 미국이 잘 살게 된 이유를 기자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God을 찾아왔고 자기들은 Gold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God에 ‘l’라는 스펠링 하나 더 있는 것이 바로 Gold입니다. Gold를 찾았던 멕시코는 Gold도 놓치고 God도 놓친 반면, God을 찾았던 미국은 God도 찾고 Gold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God에 올인 하면 God도 놓치지 않으면서 Gold을 얻을 수 있지만, Gold에 올인 하면 Gold도 얻지 못하고 God도 놓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억하십시오. Gold에 올인 하면 실패합니다. 사울처럼 세상에 올인 하면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올인 하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도박판에서는 올인 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 승부수를 던져 올인 하는 사람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처럼 세상의 방법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께 올인 하십시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올인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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