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일을 갓 시작했을 때 내겐 작은 포부가 하나 있었다. 많은 관객이 야외에서 감상하는 오픈시네마 섹션에 단순히 재미있는 영화가 아닌,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영화를 프로그래밍하겠다,는 것이었다. 동료 프로그래머들의 만류와 우려, 때로는 부드러운 압력에도 불구하고 2019년에는 라주 리의 <레 미제라블>과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마틴 에덴>을, 2020년에는 프랑소와 오종의 <썸머 85>와 베니스영화제 개막작인 다니엘레 루체티의 <끈>을 오픈시네마로 선정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부산국제영화제 관객분들은 이 작품들을 아낌없이 지지해 주셨다. 올해도 같은 기준으로 선정한 유럽 영화 두 편을 여러분께 자신 있게 추천해 드린다.
<멈출 수 없는>, 유럽판 <하녀>
<멈출 수 없는>은 프랑스와 벨기에가 공동 제작한 불어판 악녀전이다. ‘멈출 수 없는’이라는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마르셀과 출판사 사장 잔느 부부의 집에 글로리아라는 소녀가 가사도우미로 고용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밀도 있게 다룬다. 박찬욱, 봉준호, 김기영 감독 등 한국 감독들의 열혈 팬으로도 유명한 파브리스 뒤 벨즈 감독은 본인의 영화를 "살과 욕망, 모호함과 긴장으로 가득한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다리오 아리젠토 풍의 화려한 영상, 악녀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여주인공의 소름 끼치는 연기, 클로드 샤브롤의 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 탄탄한 구성과 시나리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한 편의 매혹적인 스릴러를 완성한다. 특히 부부의 딸인 루시가 본인의 생일파티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몇 달이 지나도록 잊을 수 없는 ‘올해의 시퀀스’ 중 하나다. <멈출 수 없는>은 영화제 폐막 하루 전인 10월 14일, 야외상영장에서 저녁 8시에 상영된다.
<베네데타>, 과연 폴 버호벤
<원초적 본능>(1992), <쇼걸>(1995), <스타쉽 트루퍼스>(1997), <블랙 북>(2006), <엘르>(2016)…이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연출한 거장, 폴 버호벤의 신작이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17세기에 실존했던 수녀 베네데타 카를리니를 바탕으로 쓴 주디스 브라운의 논픽션 「수녀원 스캔들 – 이탈리아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1987)을 폴 버호벤이 각색했다. 시사 직후 ‘걸작(Chef-d'œuvre)’이라는 표현을 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베네데타>에 대한 한 줄 평이다. ‘당신이 보기 전에 무얼 상상하건 그보다 사악한 장면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과연 폴 버호벤이다.’ <베네데타>는 10월 9일 토요일 야외상영장에서 저녁 8시에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