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북녘 교회의 그때 그 모습
- 황해도 재령 본당 유치원 야학개설 문맹 퇴치에 앞장-
평화신문 Home > 사회 사목 > 일반기사…. 발행 〔594호]
20세기 초 황해도는 유독 개신교 세력이 강했던 지역. 그 속에서도 황해도 재령 본당(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문창리)의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 사제, 신자들은 황해도 지역에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청계 본당 공소였던 재령 본당은 1899년 프랑스 선교사 르각 신부가의 부임과 동시 에 본당으로 승격됐다. 설립 초기에는 흉년이 들어 신자들이 외지로 집단 이주하고 성당과 사제관이 두세 차례 습격을 당하는 등 어려움도 많았다.
1920년에 들어 처음으로 한국인 사제 신성우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은 새롭게 활 기를 띠어갔다. 신 신부는 본당 사정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유치원인‘동명 학원'을 개원해 교육과 전교 활동에 힘썼고, 이후 야학을 개설해 문맹 퇴치 교육사업도 펼쳤다. 신 신부는 또 성당 마당에 갖가지 과일나무를 심는 등 과수원을 가꿨다. 윤낙연 (80·요셉·서울 세종로 본당) 씨는 " 당시 신 신부님이 일본에서 벚나무를 처음으로 황해도에 들여와서 황해도에서는 굉장히 유명했다"라고 옛 기억을 되살렸다.
또 1923년 재령 본당은 프랑스에서 특별히 종을 사 종탑과 종을 설치했다.
그 종소리가 매우 청아하고 훌륭해 나중에는 재령 읍의 명물로 꼽혔을 정도였다. 재령 본당 종은 일제 말기 헌납이란 핑계로 교회의 모든 종이 수거될 때에도 신부와 신 자들의 노력으로 철거되지 않았다.
30년대 들어서면서 방 유룡 신부가 부임했고 이때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의 해묵은 폐습이었던 남녀 석을 가르는 칸막이가 성당에서 사라졌다. 방 신부는 또 처음으로 오르간을 사 설치하고 청년 성가대를 결성하는 등 가톨릭 청년활동을 활성화했다. 당시 외할머니 집에 있으면서 복사로 활동했던 최일철(은퇴) 신부는 " 복사한 지 1년이 지난 뒤 방 신부님이 제일 열심히 복사 활동을 했다고 ' 조선어 성가 책을 상으로 주셨다"라며 인자했던 방 신부에 대해 회상했다.
이후 박정렬 신부 재임 시에는 의료사업에 매진해 천주교인이 경영하던 삼성 의원을 인수, 1940년 “성심 의원”을 개원했다. 성심 의원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의료기관이라 하여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었고, 나중에는 무료 진료소로 바뀌어 6· 25 전쟁 발발 전까지 운영되었다. 【조은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