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쇠
정 동 식
요즘 우리 집은 냉전 중이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싸늘한 공기가 방구석구석마다 깔려 있어 숨이 콱콱 막힌다.
비교적 평온하던 집에 둘째아들이 작은추석부터 2주 정도 휴가를 오면서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원자력발전소 관련 일을 하고 있어 울진, 영광 등 발전소가 있는 지방으로 출장을 많이 다니곤 한다.
장모님이 우리집에 오신지도 1년이 넘어 우리 식구들은 둘째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추석이 지나고 며칠 되지 않았을 무렵 화장실을 청소하던 아내가 거실에서 신문을 보는 나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비누를 썼으면 비누곽 속에 든 물을 좀 빼든 지 하지, 비누가 퉁퉁 불어 터지게...’
그냥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평소의 불만이 쌓이고 쌓인 듯 보였다.
그래서 나는 살짝 방어벽을 쳤다. “어제, 오늘 중에 비누를 쓴 적이 없습니다.....”라고.
아내는 조금 더 몰아붙였다. “저번에도 당신이 샤워하고 나서 들어가 보니 비누가 저 꼴을 하고 있더라.”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톤도 덩달아 높아졌다. 막내아들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직감하고 이렇게 말했다.
“왜 당신은 나라고 생각하지? 나는 아니라니까!”
차마 아들이 그랬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에게 책임을 덮어 씌우는 건 아버지로서
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아내가 빨리 눈치를 채고 이 상황을 조용히 정리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드디어 아내의 국문(?)이 시작되었다.
큰 녀석에게 물으니. “저는 비누를 안 써요. 저는 아니에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장모님께서는 따로 안방 화장실을 사용하니 이번 일에 관련이 없다는 것은 당연지사!
마지막 한 사람! 그때까지 이 분위기를 모르는 작은아들 방으로 그녀가 들어갔다.
대단한 공부를 하고 있을 줄 알았던 아들은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신속히 두드리며 오락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엄마의 추궁에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태연히 “제가 방금 비누 사용했어요. 왜요?”했다. 아들이 순순히 자백을 하는 바람에
사태는 싱겁게 봉합되었다.
평소 객지 생활을 많이 하는 작은아들의 휴가를 감안하여 아내가 정상참작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미운털이 박힌 내가 범인이었으면 좋았을 테고 내친김에 화풀이를 좀 했어야 속이 뻥 뚫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아내와 나는 어머니(알츠하이머 치매)에 이은 장모님(혈관성 치매) 케어에 많이 지쳐 있었다. 거기다가 간병과 관련한 친정가족들에 대한 서운함도 없지 않았고, 특히 아내는 시댁 7남매의 장남 역할을 매끄럽게 하지 못한다는 불신마저 나에게
가지고 있었다. ‘물이 퉁퉁 불은 비누 사건’은 이런저런 일들이 겹친 상황에서 발생했고, 결국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어 이후 아내와 나는 사사건건 의견 충돌이 많아졌다.
일전에 ‘행복한 부부는 어떻게 소통할까?라는 박인옥 강사님의 유튜브를 시청한 바가 있다.
노후의 부부생활을 슬기롭게 하는 방법 중에 남편이 아내를 즐겁게 해 줄 것은 500가지가 넘는데, 아내는 남편에게 딱 한 가지면 된다고 한다. 그것은 ‘남편에게 잔소리하지 않고 그냥 내 버려두기’이다.
놀랍고 신기하지 않은가? 나는 이 말에 정말 공감한다. 조금 속에 차지 않더라도 그냥 두면 별일 없이 지나갈 것을 괜히 건드려서 부부싸움을 자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칭찬과 인정’까지 할 수 있는 아량과 능력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부부간의 긴장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배우자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 책임전가, 원망 등이 생기면,
잠도 잘 오지 않고 정신적•육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나쁜 기류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기 때문이다.
40년을 함께하면서 우리의 경우도 늘 내가 먼저 말을 걸고 반성문도 쓰고 용서도 빌었다.
이번에도 가급적 갈등을 빠르게 풀기 위해 노심초사 묘안(여행, 선물, 여행, 백허그, 설거지 등등)을 찾던 중이었다.
3주 차 수필강좌가 있던 날!
즐거운 강의를 듣고 월배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2주 차 글제(가을바람)에서 언급한 선풍기 청소를 한번 해볼까? 어렵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가볍고 소소한 집안일이 아내의
마음을 열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바로 인근에 있는 다이소로 향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구입한 물건은 다름 아닌 세이프 그립 다목적 장갑 한 켤레!
집에 도착하여 십자드라이버 2개, 일자 드라이버 1개, 그리고 펜치에게 동원령을 내리고 선풍기 5대도 즉시 불러 모았다.
오래된 것부터 신형 순으로 줄을 세웠다. 거실용 하늘색 키다리 선풍기에게 먼저 다가가 자신 있게 일자 드라이버를 들었다.
날개 앞에 달린 안전망을 강제로 벗겨 보려고 했는데 드라이버가 밀리면서 잘 벗겨지지 않아 큰아들을 불렀다.
얘도 나와 같은 문과 출신이라 기대는 안 했는데 선풍기 아래쪽에 있는 안전망 연결 볼트를 풀면 된다고 했다. 나보다 낫다.
작년에 어머니를 도와주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키다리 선풍기는 사용하다가 지난 8월에 높낮이 조절 버튼이 망가져 올여름만 사용하고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분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망과 날개를 물티슈로 닦고 약식으로 마무리했다.
두 번째 손님은 거실에 있던 H회사의 하얀 선풍기였는데 앞 망과 뒷말을 조이고 있는 볼트를 풀어 망을 벗겼다.
프로펠러는 축에 걸려 있는 플라스틱 큰 나사를 돌려야 하는데 왼쪽으로 돌리니 헐렁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죄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아닌가 싶어 다시 아들에게 질문하여 오른쪽으로 돌려야 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열림, 닫힘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긴 한데 거의 지워져서 못 본 것이다.
아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성공했다. 분해된 날개는 물휴지로 닦았는데 씻는 것이 더 낫다는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욕실에서 샤워기로 헹구고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3번째 고객은 큰아들 방의 선풍기였다.
키가 작은 꼬맹이였는데 아들에 의하면 처음부터 중고제품을 구입했고, 날개도 분해하기 힘든 일체형이라고 귀띔해 주어
먼지만 털어내고 마무리했다.
4번째 작업은 작은아들 방에 있던 까만 선풍기였는데 회사가 달라서인지 망을 분해하는 구조가 달랐다. 아래쪽에 있는 나사를 풀고 플라스틱 클립을 살짝 비트니 망이 분해되었다.
날개 분해는 다른 회사 제품과 같아서 수월하게 끝내고 샤워기로 씻고 기름진 부분은 칫솔에 비누거품을 내어 닦고 말렸다.
드디어 5번째 마지막 선풍기! 올해 장모님을 위해 구입한 국내 중소기업의 DU-PLEX 서큘레이터 형 선풍기였다.
우리 집에서 가장 고급형이어서 혹시 실수할까 봐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분해를 했다. 오래 사용한 선풍기가 아니라 손을 댈까 말까 하다가 아래쪽에 나사가 있길래 같은 방법으로 나사를 풀었는데 망이 분리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선풍기를 돌려 보던 중 또르르 하면서 뭔가가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방금 푼 볼트에서 빠진 너트가 확실한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안에서 떨어진 너트를 새로 끼울 수 없었다. 아마 너트를 조여 놓고 접착제로 마감작업을 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분해하다가는 고장을 낼 것 같아 결국 약식으로 먼지를 털고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사실 여기까지만 하고 청소를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으로 선풍기 청소(분해조립)를 검색해 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자료가 많아서 일단 놀랐다. K 방송 뉴스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간편한 청소법도 있고, 유튜버들이 올린 동영상은 물론 회사 홈페이지 ‘자주 하는 질문코너’에는 신제품 조립방법도 소개되어 있었다.
나에게 선풍기 청소라 함은 분해, 조립이 어려운 일이지, 망과 날개의 먼지를 닦아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1차 청소에서 미흡한 부분이 너무 많아 2차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시 선풍기를 집합시켰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 중 가장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모타 청소부터 해보자!
지금까지 나에게 모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여성분이 올린 글을 보고 2차 청소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부분에 먼지가 쌓이면 모타의 온도가 10도 정도 올라가서 화재의 위험성이 있으니 먼지를 잘 제거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분해는 DU-PLEX 선풍기 제조회사 홈페이지에 있는 조립 동영상을 참고했다.
선풍기의 뒤통수를 자세히 보니 작은 홈에 볼트가 있고, 이것을 풀고 나서 모타의 덮개를 뒤로 당기니 쉽게 벗겨졌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이 어렵지 방법을 알고 나면 쉽다.
물티슈로 닦아내고 깊숙한 부분은 칫솔에 물티슈를 감아서 먼지를 훔쳐냈다.
5대 선풍기의 모타 청소는 이렇게 모두 완료했다.
듀플렉스 선풍기의 망도 처음엔 분해하지 못했는데 망 연결 부분 위쪽의 자물쇠 그림을 비로소 이해하고, 우측으로 살짝 비트니 열렸다.
날개를 분해할 때 다른 선풍기에는 없던 TIGHTEN-LOOSEN이라는 영문글씨가 작업을 잠깐 주춤하게 만들었을 뿐, 듀플렉스 선풍기의 날개도 다른 선풍기와 같은 방법으로 비교적 쉽게 처리했다.
1차 시도에서 끼울 수 없었던 너트도 볼트 끝에 살짝만 걸친 상태에서, 두 개의 망을 포개고 볼트를 죄니 요행히(?) 해결되었다.
청소를 끝낸 선풍기는 모두 재활용 봉투에 넣었다. 각각의 선풍기 커버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세월이 지나면서 여행을 떠났 는 지 어디에 숨었는지 베란다 창고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차 시도에서는 비록 완성도가 낮았지만 2차 시도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대부분 해결하여 2022년 선풍기 청소 대장정은 99% 성공으로 끝났다. 7,8,9월 석 달간 고된 날갯짓을 하면서 가족의 땀을 식혀 주었던 우리 집 선풍기 5대!
이제 고결한 몸이 되었으니 가을•겨울 맘껏 즐기고, 행여 봄이 일찍 와서 유혹하더라도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내년 여름에
반가운 얼굴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부엌일을 하던 아내가 시장에 다녀오겠다면서 캐리어를 끌고 나갔다.
잠시 후 꽃게 한 상자를 사 들고 온 아내는 온 식구에게 푸짐한 꽃게찜 잔치를 베풀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덕대게를 좋아하지만 나는 꽃게를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꽃게는 1년에 두 번의 제철(암꽃게는 4~6월, 수꽃 게는 9~10월)이 있고, 동네 전통시장에서도 쉽게 구입이 가능하며 가격도 대게에 비해 싸기 때문이다.
모타까지 청소했다고 아내에게 자랑을 하니 “아이고 우리 신랑(아들 장가를 못 보내 영감은 아님) 이제 기술자 다 됐네!” 하며 웃는다. 서투르지만 진정성 있는 나의 조그만 노력이 열쇠가 되어 굳게 닫혔던 아내의 마음을 열었다.
DU-PLEX는 ‘두 배의, 이중의’를 뜻하는 형용사라고 한다.
아내와 나도 향후 인생 여정을 보내면서 두 배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를 고대한다.
2022.10.07
첫댓글 Seven Jeong 님의 노력이 좋은 열쇠가 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더욱 멋진 수필들 기대합니다.
물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의 열쇠로 만들어 풀수있다는 생각에 깊은 공감을 가진 글 잘 읽었읍니다
공감하는 일상적인 일이 문학작품으로 탄생했네요. 소설처럼 상세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선풍기에 도사가 되셨군요. 아주 잘 했습니다. 가족 간에 화목도 하시고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글을 조금 줄여보세요.
네~지도교수님
다음 글 올릴 때는 줄여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