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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 성당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4 . (041)533-8181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 · 서산 ·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 문의 · 옥천 · 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이다. 1897년 그자리에 공세리 본당 구(舊)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부터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드비즈 신부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 감독하면서 지은 1922년도의 성당이다.
길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순교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안내자처럼 길게 뻗어 있다.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으로 순교한 32위를 모신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순교자들의 잠자리를 말없이 지켜보는 성모상이 건립되어 있다.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은 원래 1867년 정묘년에 순교한 박의서 사바스, 박원서 마르코, 세례명이 알려지지 않은 박익서 3형제가 나란히 잠든 묘소가 있던 곳이었다.
“병인치명사적” 제11권에 보면 “병인풍파를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가 말하되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 하며 즐거워 … ‘동생 들어 보소. 우리 3형제 올라가 위주 치명하자’ 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3형제 수원으로 올라가니 …”라고 이들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공세리 성당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7월 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성당과 옛 사제관의 원형 복원공사와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사업 등을 시작해 2년 뒤인 2002년 10월 13일 축복식을 가졌다. 2007년 8월에는 박씨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하였다. 그 후 추가로 발굴된 4위 순교자의 유해 또한 이곳에 모셨다. 2008년 9월 6일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내포지방 교회사를 중심으로 특화한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1월 30일)]
공세리 성당 순교자
박씨 3형제의 순교
박의서(사바스)
- 치명일기 수원조 387번
후덕한 인품과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 없이 깨끗하게 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다. 박의서 3형제가 수원 걸매리에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에서 살고 있는 밀양 박씨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박상래, 박성팔, 박노헌, 박중신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박원서(마르코)
-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정리 중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제3부]에 의하면 그는 본디 태중 교우로되 마음이 우람하기로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하고, 서털구털 지내므로 그 형님이 항상 걱정하며 살다가 병인년에 3형제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갈 때 말하기를, “내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고 즐거워하며, 장차(將差)더러 “나를 이번에 올려 가거든 갑작스럽게 하지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모께로 가서 살겠다.“하며, 오히려 그 형님과 아우를 권면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였다.
박익서(세례명 미상)
- 박상래 신부의 증조부
(비문) 천성이 곱고 순결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삼형제와 이 마리아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년 3월 8일 순교하였다. 시체는 그 당질 웅진씨 바오로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년 9월 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밀양 박씨 집안의 순교자들(7명)
- 이 마리아(박원서의 부인)
- 박인서(박의서의 사촌동생)
- 박제환 기천 베드로
- 박홍갑(박의서의 아들)
- 조 모니카(박덕여의 부인)
- 박화진 알렉산데르(박덕여의 아들)
- 이씨부인(박의서의 종제수)
박씨 외의 걸매리 지방 순교자들
- 김중백
- 김지득
- 이학습
- 김장복(박덕여의 생질)
- 김씨(김장복의 아내)
- 오인악
- 장원심과 그의 아들 장팔보
- 김흥서 토마 : 지금의 수원교구 남양성당에 성지화
- 김 필립보(비리버)와 그의 아내 박 마리아 : 남양에서 순교
- 최사도 요한 [출처 : 공세리 성당 홈페이지]
공세리 6.25순교자 믿음
"목자가 양을 두고 피난 갈 수 없지요"
- 1801년 신유박해부터 6ㆍ25전쟁까지 32위 순교자를 배출한 공세리 성당은 충청도 첫 성당으로 한국관광공사로부터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된 바 있다.
1890년 산골 교우촌에 설립된 간양골 본당으로 출발한 공세리 본당은 서양 선교사가 수단을 입고 활동한 충청도 첫 지역이며, 충청도에서 감실이 처음 설치된 곳이다. 교구장 방침에 따라 간양골에서 공세리로 옮긴 에밀 드비즈 신부는 공주ㆍ부여ㆍ천안을 관할하는 새로운 교우촌을 형성, 1922년 10월 8일 현재 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공세리성당 터는 조선 시대 충청도 서남부 지역 39개 마을에서 거둔 세곡을 저장 보관하던 공세창 자리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공세리라 불렀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3도 해운판관비'와 '공세곶 터' 성벽이 남아 있다.
공세리성당은 3만 3000㎡(1만 평) 대지 위에 세워진 우리나라 9번째 성당이자 충청도 최초 성당이다.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한 이 성당은 삼랑식 라틴십자가 모양으로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이 어울려 수령 600년이 넘는 주변 고목과 빼어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6ㆍ25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북한 인민군은 경기도 평택까지 진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세리본당 김사천 회장과 몇몇 신자들이 뷜토 신부에게 "피난 가셔야죠" 하자 그는 "네 가야죠. 하지만 신자들이 안 가면 저도 못 가요. 목자가 양을 두고 갈 수 없지요"라며 성당을 떠나지 않았다.
1950년 7월 8일 아침 8시 30분께 인민군이 공세리 인근 달보기 도로 옆 과수원에 곡사포를 설치하고 공포탄을 쏜 후 공세리성당으로 난입했다. 그들은 뷜토 신부를 체포해 사제관 식당에 감금하고, 사제관은 정치보위부 사무실로, 성당은 기마부대 본부로 징발했다.
그즈음 공세리 부근에 미 공군기가 추락, 조종사 2명이 체포됐다. 뷜토 신부는 동료 선교사가 사제관에 두고 간 짐에서 라디오가 나오자 간첩으로 오인돼 7월 20일 미군 포로와 함께 서울로 압송됐다. 뷜토 신부의 서울 수감생활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50년 8월 1~7일 사이에 제작된 북한 공산당 선전 영화에 베레모를 쓰고 수단을 입은 채 한국 수녀들과 함께 미군의 폭격에 반대하는 시위에 강제 동원된 장면이 등장한다.
이후 뷜토 신부는 다른 성직ㆍ수도자와 함께 개성으로 압송된 후 수감됐다. 감옥에서 소지품 검사를 할 때 모든 물품을 내놓으라고 명령했으나 뷜토 신부는 자신의 성무일도서를 빼앗기지 않으려 움켜쥐었다. 간수의 무수한 발길질에도 그는 끝까지 빼앗기지 않았다. 그의 성무일도서는 감옥에 남은 유일한 기도서로 포로 기간 내내 모든 성직자가 돌아가며 사용했다.
뷜토 신부와 동료 성직자ㆍ수도자들은 평양을 거쳐 압록강변 만포, 중강진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다. 뷜토 신부는 하나둘씩 죽어가는 동료들을 돌보다 1951년 1월 6일 순교했다. 그와 함께했던 동료들은 얼어붙은 땅을 팔 수가 없어 뷜토 신부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한 채 눈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공세리성당은 성체조배실, 십자가의 길, 성당, 성모상, 드비즈 광장, 박물관, 순례길, 순교자 묘지, 성가정상, 예수성심상, 피정의 집 등으로 단장돼 있다.
[평화신문, 2013년 11월 10일, 리길재 기자]
공세리 이명래
아픈 곳을 마음으로 헤아린 사람 이명래 요한
“종기에는 이명래 고약”이 깃발 날리던 시절이 있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부스럼이나 종기가 몸의 일부인양 붙어 다니며 괴롭혀도 의원 치료를 받는다는 일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에 신통력을 발휘하던 이명래 고약, 그것은 값싸기까지 하여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 주던 너무도 고마운 것이었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서민 가정의 상비 약품이었다. 그 처방제의 주인공 이명래, 그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890년, 그는 9남매 중 장남으로 서울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척왜양이의 바람과 천주교 박해의 바람이 불자 그의 가정은 충남 아산으로 이주를 한다. 그곳 공세리본당엔 파리 외방 전교회의 드비즈 성 신부가 있었다.
소년 이명래, 그는 성 신부에게서 약 제조법과 치료법 등을 배우며 자란다. 그는 남보다 특출난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기억력에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고야 마는 외곬수의 집념이 이명래 고약이라는, 한의학에도 없는 치료제를 고안해 내게 한 것이다.
성 신부와의 만남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헐벗고 굶주린, 일제의 수탈 속에서 핍박받고 있는 이 나라 백성을 위하여 그들의 병든 육신에 기쁜 소식을 전해 주게 한 것이다. 이명래는 성 신부에게서 물려받은 한방 의서를 원전으로 하여 그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는 거지들을 모아 밥을 먹여 주고 재워 주며 그들을 치료해 준다. 요즈음에도 장애자 재활원 같은 곳이 마을에 들어서면 주민들의 반대가 대단한데, 하물며 종기니 부스럼이니를 몸에 달고 다니는 불결한 부랑자 거지들을 모아 치료를 하자니 마을 주민들의 원성이 오죽하였을까마는 그의 연구욕은 줄어들지 않고 치료에도 효과를 본다. 그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그를 찾는 환자들이 늘어 간다.
1920년 그는 아산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와 환자들을 보기 시작한다. 그의 비방 고약은 환자들의 상처를 씻은 듯이 치료해 준다. 그의 집에는 환자들이 몰려와 많은 날은 하루에 300~400명까지도 보았다 하니 그의 명성이 어떠하였던지는 가히 짐작이 되는 일이다. 그 환자들이 뿜어내는 냄새가 얼마나 역겹고 불결하였을까. 이런 일화가 있다. 사사키라는 육군 대좌(대령)가 목덜미에 커다랗게 발지가 나 그를 찾아왔다. 당시 일인들은 발지가 난다면 관부터 짜둘 정도로 죽음과 직결되는 병이었다. 그가 이명래에게 와서 치료를 받고는 깨끗이 나은 것이었다. 사사키의 감격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거였다. 그가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다 기고한 글 내용이 아주 재미 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아주 놀랬다. 첫째 아주 불결한데 놀랐고, 둘째 값이 아주 싼데 놀랐고, 셋째 빨리 낫는다는 데 놀랐다.”
무슨 병이든지 병을 다스리는 데는 도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병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곁에 있던 사람이 “저렇게 해서 될까.”는 의문을 가지나 그의 치료는 반드시 병을 고치곤 하였다. 그러나 다른 이가 똑같은 방법으로 처치하면 사고가 따랐으니 그에겐 그가 늘 기도하는 이상의 도우심이 있었다. 그의 기도는 늘 똑같았다. “나의 이 환자를 잘 낫게 해주십시오.”
이런 일화가 있다. 다리를 절단해야만 하는 환자가 그를 찾아왔다. 요새 말로는 골수골막염. 그의 곁에 있던 둘째 사위 이광진 씨가 잘라 내기를 권하였다. 그의 말은 단호했다. “그 다리 잘라내면 다시 생기냐? 이 사람 다리 없으면 무얼로 일해 먹고 사냐?” 그는 그들의 아픈 곳을 마음으로 헤아렸다. 그리고 치료에도 성공하였다. 고약을 부치고 약을 먹기를 며칠, 환자의 다리에서 부골이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는 항상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시골 사람들 참 불쌍하지. 일본 놈 밑에서 소작하고 굶는 걸 밥 먹듯 하고.” 그의 이런 애긍심이 환자의 상처를 볼 때 먼저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무척 다혈질이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경우에 어긋나는 것을 보면 참지를 못하고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것이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만큼 그는 또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기운이 장사인 그가 아산에 살 때의 일화이다. 그가 모를 심으면 어찌나 빠른지 손길따라 움직이는 모가 보이지를 않을 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남보다 두 배는 빨리 모를 내었을 것이다.
그는 술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행동은 조금도 흐트러지지를 않았다. 그를 곁에서 모셨던 이광진 씨의 말에 따르면 그의 생활은 곧 교회 생활이었다. 환자를 보는 일과 성사 생활을 빼면 그는 다른 곳엔 관심도 없었다. 5시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4시 30분에 일어난 그는 미사에서 돌아오면 바로 환자를 본다. 그리고 9시쯤 되어 “한 모금 주시오.” 하며 안방으로 잠깐 들어온다. 그러면 밥 대신에 5홉들이 양재기에 정종을 찰랑찰랑 부어 달걀 두 알과 마시고는 다시 환자를 보러 간다.
그리고 한시나 두 시쯤 되어 방에 들어와 똑같이 마시고는 다시 환자를 본다. 네 시쯤 되어 약속해 놓은 환자를 보기 위해 방문을 간다. 그러면 그곳에서 개다리 소반에 정성껏 마련한 술을 사양 않고 마시는데, 진찰하는 곳이 여러 군데 되면 그 양도 많았다. 그러나 걸음걸이도 옷고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돌아오는데 이미 밤 열두시가 넘어 있다. 그제서야 한술 밥을 뜨는 것이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 한 시가 넘는다. 그리고는 새벽 미사 시간에 맞춰 일어나니 그의 일평생 새벽미사를 거른 적이 없었다.
그의 신앙심이 얼마나 확고하였는지를 알려 주는 일화가 있다. 불행히도 그는 6 · 25 때 그의 둘째딸과 2남 2녀의 손주들을 잃었다. 사위의 낙담은 하느님을 부정하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그는 늘 그것이 염려되어 그에게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마귀가 꼬신다. 마귀의 꾀에 넘어가지 말아라. 신부님 찾아가서 준주성범을 빌려다 읽어라. 분다와 네 아이들은 지금 잠을 자고 있다. 때가 되면 일어나느니라? 자식을 잃은 어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그러나 그는 의연해야 했다. 혹여 하느님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사위에 대한 염려 또한 매우 큰 것이었다.
1952년, 평택 서정리로 피난 갔던 그는 거기서 한 삶을 마친다. 나이 63세. 절정에 이른 삶의 최후였다. 의술이 인술이 아니고 기술이 되어가는 요즈음의 세태 속에서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렸던 그의 의료 행위가 그리워진다. 비록 이론의 축적은 없었다지만,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느님께 청할 줄 알던 신앙인이었다. 그의 그러한 기도에 하느님께선 늘 응답하셨다.
[경향잡지, 1990년 10월호]
박상경 오틸리아(본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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