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오두막의 철조비로자나불 사진
신라말~고려초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강원도 산골 오두막집의 철불 사진
법정 스님의 열반을 연일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와 특집에서는 줄곧 스님의
강원도 산골 오두막집을 비춰 주곤 하였다. 화전민 집을 고쳐 지은 이 작은 집의 방 안에는
모서리에 놓여 있는 달항아리와 벽 위에 걸려 있는 불두(佛頭) 사진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역시 스님다운 담박한 실내 표정이었다.
이 사진에 나오는 불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나말여초 시대
철조비로자나불좌상(높이 112cm)의 얼굴이다. 하필이면 이 불상 사진을 고르셨을까.
이 불상은 그리 유명하지 않다. 본래 나말여초는 철불의 시대여서
숱한 명작들이 이미 국보,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형적으로 본다면 서산 보원사터 철불이 뛰어나고,
규모로 치면 경기도 광주 춘궁리에서 출토된 것이 훨씬 장대하며,
절대 연대를 말해주는 것으로는 장흥 보림사와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이 있다.
그래서 어느 도록에서도 이 철불은비중 있게 실려 있지 않고 나 또한
특별히 눈여겨보아 오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찍었는지 이 불상의 모습은 내가 평소 알고 있던 인상과 사뭇 달라 보였다.
아래쪽에서 비스듬히 올려다본 시각으로 포착한 이 불두는 부처라기보다
현세적 이미지가 강한 가운데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어 아주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눈가의 주름을 표현한 터치가 강한 질감으로 나타난 대단히 조형적인 불상이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철불, 과연 법정 스님이 좋아할 불상이다.
박물관에 문의해 보니 지금 3층 불상실에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가봐야겠다.
이 철불을 보면 법정 스님 생전의 모습이 떠오를 것만 같다.
-유홍준 명지대교수 * 미술사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3층에는 '아시아관' 및 '미술관 II'가 있습니다.
그 중 301호 '불교조각' 전시실에 정좌해 있는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나 보십시요.
이 불상은 그다지 유명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한 문화재로 지정된 철불은 아닙니다.
법정 스님이 머물던 두 곳, 불일암과 오두막집 벽에 걸린 사진의
바로 그 모델입니다.
같은 대상을 놓고 카메라의 앵글과 위치선택의 차이로
법정 스님이 함께한 '철조비로자나불의 미소'와
조금씩 달라 보이지요?
강원도 평창의 오두막집 '水流山房'
1992년, 강원도 산골 화전민 집을 고쳐 지은 오두막집 '水流山房'!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 작은 집에는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강원 평창군 오대산 자락의 일명 쯔데기골 산골 거처(居處).
법정 스님의 유지에 따라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을 가져 오려 했지만,
수일 동안 내린 폭설로 인해 산방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급하게 다른 대나무 평상을 마련해 마지막 가시는 길에 사용했다고 한다.
'기도하라'는 푯말이 걸린 해우소
뒤로는 산이, 바로 앞에는 작은 계곡에서 들리는 물소리와 나무 사이를 가르는 바람 소리,
처마 밑의 풍경과 산새의 울음소리만 정적을 깨는 산골 오두막은 난초가 새겨진 나무 현판과
스님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기를 원했던 대나무 평상,
지팡이 2개, 작은 의자 등이 지키고 있다.
거처와 약간 떨어져 있는 흙으로 만든 해우소의 벽에는 '기도하라'는 작은 푯말이 걸려 있고
일자형으로 된 오두막은 서재 겸 침실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큰 방 한 개와
옆으로 3∼4개의 방이 붙어 있는 형태다.
문살 사이로 서재로 보이는 방안에는 스님이 쓰던 그대로인 듯한 책상과 그 위에 촛대,
볼펜과 유리 주전자, 휴지, 스탠드와 침대, 의자, 벽에는 대형 벽시계와
철조비로자나불 액자가 소박한 모습으로 걸려 있을 뿐이다.
법정스님은 '오두막 편지'에서 "내 소망은 단순(單純)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平凡)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自然)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代身)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라고 썼다.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
법정스님의 육신은 떠났지만 우리가 그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그는 우리 곁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가 짓고 머물렀던 암자인 ‘붇다의 햇빛’[佛日]과
법명인 ‘불법의 정상’[法頂]처럼 그는 이 땅의 불교를 정상으로 끌어올려
더욱더 빛나게 하였다.
길 안내말뚝
불일암을 뜻하는 'ㅂ'과 화살표가 정겹다
더없이 소박한 출입문
목욕할 때 사용하던 움막
불일암 전경
법정 스님이 머물던 곳 중 대표적인 장소가 1975년부터 1992년까지 머물었던
송광사 불일암이다. 스님은 강원도 평창 모처로 옮기기 전까지
'무소유(1976)'등 많은 저서를 이곳에서 집필했다.
법정 스님이 손수 만든 검박한 의자.
신으시던 흰 고무신과 '입선 중'이라는 나무 팻말이
디딤목 위에 나란히 놓여 있다
불일암의 거실(중앙) 좌측은 다실이고(보이지 않음) 우측은 서재이다.
불일암 거실 벽에도 철불 사진이 걸려있다
법정 스님의 서재. 대부분 사회과학 분야 서적들이다.
다실 밖에는 청산별곡 중 일부가 각인된 현판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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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유골은 제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7개 함에 나뉘어 보관되었다.
유골함 2개는 송광사 불일암에, 나머지 5개는 서울 길상사에 모져졌다.
유골은 49재를 마칠 때까지 함에 보관돼 있다가 스님이 기거했던
강원도 산골 토굴과 송광사 불일암 인근에 뿌려질 예정이다.
법정의 ‘삶을 담은 말’ ‘몸을 실은 글’
불일 법정(佛日 法頂, 1932~2010) 대종사가 입적하였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나며 우리로 하여금
‘무소유 정신’을 소유하게 하였다. 그의 생평은 ‘치열한 수행’과 ‘방대한 독서’로 일관하였다.
55년간의 수행과 독서를 통해 법정은 “가까운 친지에게 편지를 쓰듯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쉬운 단어를 골라가면서 (살아있는 법문을) 풀어나갔다.” 그는 16권의 산문집, 2권의 법문집,
1권의 기행문, 1권의 전기번역서, 4권의 경전번역서를 남겼다. 이것은 법정이 우리에게 주고 간
‘말씀의 사리’였다. 동시에 지혜의 사리를 담은 ‘자비의 사리’였다.
법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들고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산과 숲 속에 살면서 체험한 이야기를
삶의 형식인 에세이로 풀어내었다. 첫 수상집인 『영혼의 모음』(1973)부터 법문집인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2009)까지 그의 글은 남달랐다. 법정의 글에는 그의 온몸에서
우러나온 삶의 언어들이 담겨 있다. 이것이 바로 베스트셀러 작가들과 다른 ‘법정의 힘’이었다. 그
것은 곧 ‘글과 삶의 일치’ 내지 ‘앎과 삶의 일치’였다. 법정의 ‘삶을 담은 말’과 ‘몸을 실은 글’은
일찍이 붇다 이래 그 누구에서도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려고 했던 그의 실천행은 그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법정은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사물에 대한 따뜻함을 겸비했던 수행자였다.
“어제보다 하루를 더 단순하게 살고자 했던 구도자”였다. 법정은 불교수행자이면서도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종교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상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짓고 17년 동안 머물렀던 불일암을 떠났다. 1992년 초 강원도 산골로 떠나 오두막집인
일월암(진부)에 머물렀다. 다시 1997년부터는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폐가를 개조한 수류산방(평창)에
살았다. 그의 삶을 존경했던 김영한 부인이 기증한 요정 대원각을 길상사로 개창하면서
‘가난하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절’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곳에 그는 성모마리아의 얼굴을 가진
관음보살상을 모시면서 종교 간의 대화를 몸소 실천했다.
길상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칠십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수류산방에서 주어진 여건을 받아들이며 간소하게 살았다. 그는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홀로 살았고
‘자신의 리듬’을 느끼며 살고자 했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무소유의 삶이었다.
그 살림살이는 ‘온삶을 담은 말’(법문집)과 ‘온몸을 실은 글’(산문집)로 살아나 인구에 회자되며
수백만 권이 판매되었다. 수십 억 원의 인세는 모두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소리 없이 기부했다.
하지만 폐암으로 입원했던 그에게는 병원비조차 없었다.
떠날 때는 관도 없었고 장례식도 없었다. 입적 순간 입었던 옷 그대로였고 가사 한 장 덮은 채
다비장에 올랐다. 법정은 마지막까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 결과 일부 출판사들은 절판을 선언했고 『무소유』 등은 품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에 대한 소유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 열기는 법정이 강조했던
무소유의 정신을 소유하고픈 독자들의 강력한 열망의 표현일 것이다.
우리가 법정의 삶을 통해서 배우고 추구해야 할 것은 그가 남긴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라’는 그의 가르침은 이 도저한 자본주의 시대에 강력한 죽비소리로
다가오고 있다. 법정스님의 육신은 떠났지만 우리가 그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그는 우리 곁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가 짓고 머물렀던 암자인 ‘붇다의 햇빛’[佛日]과 법명인 ‘불법의 정상’[法頂]처럼
그는 이 땅의 불교를 정상으로 끌어올려 더욱더 빛나게 하였다.
진리는 평범하다. 그리고 단순하다. 문제는 얼마나 진리대로 사느냐에 달려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가 높게 끌어올린 ‘무소유를 소유’하기 위해 나누고 또 나눠야 할 때이다.
그것이 곧 진리를 실천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고영섭 (시인,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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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민혜 샘, 언제 불일암에 한번 가봐야 겠습니다. 자료 고맙습니다.
여혜당 선생님, 그동안 좋은 자료 많이 올려주셔서 늘 감사했는데 위의 자료는 정말 귀하고 좋습니다.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민혜선생님 덕분에 우둔한 머리를 깨우쳐 봅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이민혜 샘, 고맙습니다. 다행이도 우리 집에 법정스님의 무소유 초판본!(1976)이 있네요.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이민혜선생님 고맙습니다.
전문가의 설명이 곁들여 그 비로나지불의 미소가 더욱 신비롭습니다. 사진과 글 음악까지 감상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퍼 갑니다. 아, 스크랩이 안되네요.
귀한 사진들을 보며 다시 법정스님을 그리워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