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비닝
휴 비닝(Hugh Binning; 1627년 - 1653년 )은 스코틀랜드의 아이어셔의 달브낸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1646년에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650년에 목회안수를 받아, 고반에서 목회자로 섬겼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고기를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ii.17. --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지니, 이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 창세기 i.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라."
인간이 처음에 창조된 상태는 지극히 좋았고, 모든 것이 지극히 좋았으며, 무엇보다도 인간은 하나님의 솜씨 중에서 가장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부분이며, 가장 탁월한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비록 한때 행복했던 것이 이중의 불행일지라도, 우리의 비참함을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행복에 이르게 된 것이라면, 인간이 한때 어떤 존재였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이는 우리가 그가 지금 어떤 존재인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대는 이 형상과 모양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영혼의 이해와 의지와 애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빛에 대한 감미로운 순응이 있었다 -- 아담이 신성하고 자연적인 것들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그 샘 빛에서 파생된 마음 속의 아름다운 빛이었다. 학식 있는 사람과 무식하고 무례한 사람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나타나는가? 하나는 다른 하나에 비해 짐승과 같다. 오, 아담의 지식과 가장 학식 있는 자의 지식 사이에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이 있었던가! 이생에서 예술과 산업의 가장 높은 진보는 하나님의 작품 속에 있는 신비에 대한 학식 있는 무지 이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마음에 놀라운 만족이 있다. 그러나 아담이 얼마나 달콤한 안일함을 가졌던가, 그의 마음은 더 높은 것과 더 낮은 것, 그들의 본성, 속성, 그리고 미덕, 그리고 몇 가지 작용들을 알 만큼 확장되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를 괴롭힐 수 없고, 어떤 어려움도 그를 괴롭힐 수 없으며, 어떤 논쟁이나 의문도 그를 당황하게 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 존재를 주시고, 그러한 영을 그에게 주입해 주신 그 영광스럽고 영원한 존재에 대한 지식, 그분 안에 있는 지혜와 선하심과 능력의 무한한 보물을 보는 것은 얼마나 상냥하고 상쾌한 광경이 될 것인가? 죄와 무지의 구름이 없었을 때, 창조되지 않은 빛의 충만한 즐거움을 방해하고 가려버릴 수 없었습니다! 태양의 모습이 달을 그토록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 때, 하나님의 얼굴에서 즉시 빛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담의 영혼에 대해 너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죄의 어두운 구름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그 영혼이 얼마나 아름답고 아름다울 것인가! 그런 다음 얼마나 아름다운 올바름과 올바름이 될 것인지, 이 빛 위에 얼마나 아름다운 질서와 복종이 뒤따를 것인지, 그리고 그의 의지와 애정을 놀랍도록 선하게 만들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하나님이 사람을 바르게 하셨다(전 29). 모든 것에는 꺾임이나 균열이 없었으며, 영혼의 모든 힘은 모든 선의 샘을 향해 똑바로 굽혀가고 있었다. 이제 영혼은 구부러지고, 영혼을 비천하게 하는 비천한 세속적인 것들을 향하여 아래로 구부러지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올바로 바라보았고, 그분과 그분의 충만함 외에는 식욕이나 기쁨이 없었으며, 달이나 변화무쌍한 세상을 그 발 아래에 두었습니다. 거룩함과 의로움의 아름다움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지식이 영혼 속에 끌어들인 하나님의 형상의 선들을 완전하게 하고 장식하는 색깔들이었다. "그는 불타오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빛나는 빛이요"라는 말은 빛만큼이나 생명이 많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이나 하나님을 기뻐했던 아담에 대해 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올바른 체질과 성품이었다, -- 그의 머리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과 사랑으로 치켜 올려졌고, 그의 팔은 인간에 대한 의와 공평으로 뻗어 있었고, 그들의 지휘 아래 있는 인간의 모든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폭풍우로도 이 바다를 괴롭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력한 사령관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백부장과 같은 경외심과 복종 아래 두었다. 가라, 그러면 그는 가고, 다른 사람에게로, 오라, 그러면 그는 오시며, 한 길은 사랑을, 다른 길은 거룩한 증오를 보내신다. 이것들은 새가 달아날 수 있는 날개와 같았고, 마차가 달려갈 수 있는 바퀴와 같았지만, 이제는 정반대로 돌릴 수 있지만, 마차는 마부를 끌어당기는데, 그 움직임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의로운 의지가 그것에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올바른 사람의 영혼 속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이해와 같은 지능에 의해 그 자체로 전환된 원초적 이동성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애정은 그를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애정을 움직였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인은 말을 타고, 군주는 걸어서 걷는데, 마치 불온한 사회에서처럼, 법과 법령은 주인을 강탈하는 제멋대로인 신민의 폭력으로부터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진행된다.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은 그의 애정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구성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그러한 양육과 훈련 아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리고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었는데, 그 안에는 사나운 바다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모습이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우리 도시에 입성하면 그들은 총독보다 더 강력하여 그에게서 법을 빼앗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줄 것입니다. 우리가 정욕에 굴복했을 때, 그들은 우리가 허락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한다.
다음으로 그의 탁월함은 불행과 위험에 대한 모든 두려움, 모든 슬픔이나 고통의 손길로부터 자유로워진 데 있었으며, 그의 영지에서 그러한 거룩한 안주와 기쁨을 누렸으며, 그것은 그를 완전히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과 같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축복이며, 그는 스스로 절대적으로 기뻐하며, 두려움과 위험의 손이 닿지 않는 곳, 아무도 그것을 손상시킬 수 없고, 아무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니 다른 이는 아니니라." 그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기쁨의 충분함이며, 그 자신의 충분함이다. 참으로, 인간은 변하기 쉽고, 변하기 없이 선하게 창조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점에서 인간이 하느님이 그분 위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위함이며, 따라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신 그분이 그의 행복을 지속하기 위하여 그분을 경계하고 의지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올바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떤 불안한 두려움이나 곤란한 보살핌도 그를 괴롭힐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 자신의 상태와 자유, 그 형상에서 흘러나온 결과로서 피조물에 대한 지배력과 주권에 대한 거룩한 만족을 더한다면, 당신은 그가 얼마나 행복한 피조물이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체들이 제공할 수 있는 만족이나 만족이 무엇이든지, 그들 모두는 마치 그들이 그를 섬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듯이, 그의 보살핌이나 수고를 없이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것을 사람에게 베풀어 주려고 하였다. 이 주문보다 더 뛰어난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자신의 행복과 기쁨으로 여기고, 피조물은 인간을 섬기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만물은 공통의 중심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선함을 다하여 그를 향하여 달려오며,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므로, besid하나님의 선하심의 충만함과 풍성함이 즉시 인간에게 주어졌으므로, 인간은 땅에 가득한 모든 저장과 선으로 풍성해졌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렇게 만드시고 이런 방식으로 공급하셨고, 사람에게 율법을 주셨으며, 그런 다음 그와 계약을 맺으셨다. 아담에게 먼저 새겨진 율법이 있었고, 그 다음에 그에게 규정된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율법이 기록되어 있었고, 바울은 그 율법의 나머지 부분이 이방인들을 "변명할 수 없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그 율법은 그에게 완벽하게 그려져 있었다. 선과 악의 모든 원칙과 관념이 정확히 그 안에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들에 대한 타고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선에 대한 자연스러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악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에게 부과하신 일종의 율법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것을 항상 지키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분의 법령과 계명까지도 그들이 구성되고 틀을 잡고 있는 순종에 복종한다. 바다는 흐르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법칙과 명령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명령이 바로 그 파도가 산을 넘치려고 할 때 모래 위에서 그 자랑스러운 파도를 깨뜨립니다. 짐승들은 먹고 마시는 것, 그들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에 대한 그들의 본성에 기록된 율법에 순종하며, 모든 사람은 여러 가지 본능과 여러 가지 작용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의 이성적인 영혼에 적합한 더 고귀한 본능을 주셨다. -- 거룩함과 의로움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본능과 충동을 주셨다. 그러한 고결하고 경건한 길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그를 불쾌하게 하거나 피조물에게 불명예스러운 그러한 길에 대한 타고난 반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만물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인 존재와 같은 행위들 사이에는 일종의 아름다움과 감미로운 조화와 균형이 있다. 그런 것이 어울리고 그렇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증오, 그분을 소홀히 하고 망각하는 것, 술 취함과 그런 종류의 탐욕과 같은 다른 것들은 서로 다르며, 그것에 대해 무례하다. 오, 거룩함과 의로움이 돌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새겨졌을 때, 그리고 외적인 설득이 필요 없었을 때, 다만 내적인 충동이 그를 강하게 기울게 하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그의 의무이자 그의 존엄성과 특권인 것에 일종의 달콤한 필요성을 부여했을 때, 아담은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영혼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 그 자신에게 합당하고 독특한 율법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그 율법에 맞게 짜여지고 빚어지는 것, 즉 그 자신에게 살아 있는 율법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많은 규칙 없이 그 자체로 선한 것으로 그를 이끌고 결정하는 이 내적으로 새겨진 거룩함과 의로움의 율법 외에도, 주님은 그에게 적극적인 율법을 제정하고 부과하시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무관심한 것, 그리고 그러한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다른 어떤 피조물을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행할 수 있는 것을 금하라고 명령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에게 내뿜은 열매와 동산의 나머지 열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며, 그 안에는 절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에게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그에게 그 열매를 삼가라고 명하시고, 그의 순종을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그의 자유를 축소시키며, 그의 행복을 방해하거나 감소시키지 않도록 그를 제한하는 행동을 취하신다. 당신은 두 가지 이유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과 주권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그것은 그러한 상징과 표징에서 눈에 띄게 제시되었습니다. 인간을 그토록 잘 꾸며진 집에 두시고, 풍성하고 열매가 풍성한 동산에 두신 분께서는 "네가 그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한 그루의 나무를 남겨 두어 아담이 보고 알게 하시려고, 그가 만물의 주권적 소유자라는 것과, 피조물들에 대한 그의 다스림과 그에 대한 그들의 봉사는 그들 위에 있는 인간의 어떤 자연적인 특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신의 관대함과 방종에서, 그분이 자신을 위해 피조물을 선택하여 아름답게 하고 행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주권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는 가시적인 증언이었으며, 그로 하여금 그토록 다른 피조물들 위에 높임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그의 창조주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가 무한히 그분 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며, 그로 하여금 피조물들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께 대한 그 자신의 존경과 복종을 기억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진실로 내적 원리와 본능이 추구하는 다른 자연적 의무에 있어서는, 그 사물의 적합성과 편리성 또는 아름다움이 종종 우세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의지와 기쁨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그것들을 지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주님은 자신의 절대적인 의지와 기쁨 외에는 순종해야 할 다른 이유를 갖지 못하실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명령받은 것의 선함이나 사용보다는 사령관의 의지를 고려하도록 가르치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이유로, 더욱 정확한 시험을 하고, 아담의 순종에 대한 더욱 충분한 증거를 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행하지만, 그것은 어떤 근거나 동기에 근거한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관심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그들에게 밀어붙이는 내면의 무게와 애정의 연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모와 자녀 사이, 남자와 아내 사이, 친구 사이, 자기 보존과 방어의 의무 등을 서로 명하시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의무를 매우 정확하고 부지런히 수행하는데, 그것은 무슨 원칙에서 비롯된 것인가? 쉽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내적이고 자연스러운 애정의 성향 때문이며, 그것은 우리를 그러한 의무로 몰아가는 본능과 충동과 같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우리는 주님의 선하심과 풍성하심이 명령된 의무의 대부분의 부분에서 우리 자신의 이익과 유익, 우리 자신의 성향과 특권을 그분의 권위와 결합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수고와 고통이 그분의 권세의 무게를 압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에 이미 새겨져 있고, 그 자신의 이성과 일치하는 그러한 의무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분명한 증거가 있을 수 없다. 순종의 순결하고 벌거벗은 본성은 이들의 관찰에서 그렇게 분명하게 빛나지 않는다. 창조체가 자신의 의지를 그의 최극 의지에 복종시키는 것에 대한 큰 시련이 아니며, 그의 의지 외에도 사람의 의지를 그것에 기울게 할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이 있을 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자체로 감각에 즐거운 문제, 그가 타고난 성향을 가졌던 문제에 있어서, 주님은 인간이 단지 그 자신만을 위하여 그의 선한 기쁨에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단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에 순종할 것인지를 온전히 시험하기 위해 자제의 명령으로 당신 자신을 개입시키신다. 그리고 실제로 입법자의 의지와 권위 외에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는 그러한 의무에 있어서, 인간의 순종이 순결하고 단순한 순종인지, 그리고 인간이 순종을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하는지, 아니면 다른 것을 위해 사랑하는지가 드러날 것이다.이아손.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불순종은 반역이니라. 우리를 해칠 수도 없고 도와줄 수도 없는 그런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지하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 비록 순종이 다른 더 본질적인 것들보다 덜 가치가 있을지라도, 그런 쉬운 것들에 대한 불순종은 가장 극악무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이 가볍고 쉬우면 순종하기가 더 쉬우며, 불순종할 때 더 많은 죄와 악이 생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를 "불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호적인 방식으로 (롬 19절) 그 이유는 아담이 그러한 작은 경의와 복종의 점을 거절함으로써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벗어 버리고, 아담을 그의 상급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상을 고치셨다고 믿는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연구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그 이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모든 일을 행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한 번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피조물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게 된 후에 퀴드(quid)를 물어봐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하며, 순종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이익이나 이익도 얻지 못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성향과 유머에 어긋나고 혐오스러운 일일지라도, 우리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존경과 복종의 증거로서 그분을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그리고 순종의 길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심에서, 심지어는 평화와 안락과 자유의 관심에서 더욱 추상화될 때까지, 우리는 그분이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폐기론자들의 관행이며, 참된 경건에 반대되는 것이며, 우리 대부분이 우리의 걸음걸이에서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피조물의 속박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의와 거룩함에 따라 새로워진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한 복종과 순응,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응, 그의 유일하고 참된 자유, 영혼의 아름다움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한 영혼이 하나님께 순응하여 발전하는 것은 결코 없으며, 이것이 짐이나 과업이 아니라 기쁨이 될 때까지이다.
평행 구절 킹제임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웹: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