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이 있다. 이처럼 발은 사람의 원시적 이동 수단임을 말하고 있다. 발이 없으면서도 천리를 이동하는 것이 말(言)이라는 뜻이다.
물론 발이 없어도 말(馬)이나 가마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람들의 이동 수단은 아니었다. 현대 사회는 탈것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전거, 자동차, 기차,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모양과 크기와 빠르기도 천차만별이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도로나 지면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킥보드 같은 생활 밀착형 간편 탈것도 등장했다.
우리들 또래가 보냈던 어린 시절은 탈것이라고는 자전거나 소달구지와 리어커가 고작이었다. 어쩌다가 신작로에 자동차가 보이면 오르막을 이용해서 자동차 뒤 범퍼에 매어달려 연신 코를 벌름거리며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좋아라하며 마셔 댔다.
우리 집에는 말 구르마(수레)가 있었으나 이는 아버지가 농한기에 5일장에 팔 생선을 싣고 다니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논 두마지기가 전부였다. 사백 평 남짓한 논에서 나는 수확이라고는 벼 최대 넉 섬과 보리 두어 섬이 고작이었다, 이마저도 흉년이 들거나 가뭄으로 모내기가 늦어질 경우 일곱 식구의 식량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여 점심을 제대로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요즘같이 먹거리가 지천이라면 남을지도 모를 식량이었으나 무쇠라도 녹여 먹을 것 같은 먹새에는 턱 없이 부족하였다. 아버지는 어린자식들의 배는 곯게 하지 않으려고 영덕에서는 생선을 묵호 등지에서는 건어물을 가지고 와서 주변 5일장을 찾아다니며 팔았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땔감이라고는 눈 닦고 찾아보아도 찾기 어려운 벌거숭이가 된 민둥산을 이산 저산 다니며 한 잎씩 긁어모은 낙엽과 어쩌다 만난 죽은 가지를 하나하나 주워 모아 머리에 이고 다녔다. 보자기는 목화로 실을 뽑아 짜서 만든 무명천을 여러 겹 이어 만든 천 보자기였다.
어머니는 5척 단신이었다. 그 작은 체구에 어린 우리들이 보기에는 집 채 만큼 큰 보자기를 어떻게 머리에 올려 놓았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역도 선수처럼 번쩍 들어서 머리에 얹었을까? 수많은 상상을 해 보았으나 궁금증을 해소하지는 못하였다. 눈이 녹지 않은 음달의 낙엽은 무게가 배가 되었다.
우리 마을은 길이가 남북으로 1km 정도로 길게 뻗쳐져 있었고 그 가운데서도 우리 집은 맨 끝에 있었다. 가까운 마을 뒷산 등 초입에는 낙엽이 없었다. 낙엽이 있는 산은 마을에서도 1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그 무거운 낙엽을 모은 보따리를 이고 오는 거리는 최소한 오리가 넘었다. 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목뼈가 부러질 정도의 고통을 참으며 낙엽이 가득한 보자기를 부엌 바닥에 내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이는 화가 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힘에 부대껴 혼자서는 천천히 내려놓을 수 없어서였다.
“ 이놈의 씨들 날이 저물면 소라도 좀 마구간에 들여 매지 참말로 몸서리 난데이” 동지섣달 짧은 해는 뒷동산 솔가지 너머로 제 몸을 숨기기가 바쁘게 어둠살을 보냈다.
어머니의 발은 얼마나 많은 짐을 이고 날랐으면 엄지발가락 옆 튀어 나온 뼈 때문에 마름모꼴이 되어 있었다. 튀어 나온 어머니의 발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았다. 기형이 된 발 때문에 맞는 신발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자식 된 도리로 교정을 하고자 병원을 찾았으나 어머니는 죽을 때 다 되었는데 지금 수술해서 얼마나 걷겠다고 야단이냐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 굳을 대로 굳어져 더 이상 아프거나 불편함이 없단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미안한 마음에서 그런다는 것쯤은 짐작이 간다.
어느 날인가 보건소에서 혈압 약을 타 오면서 오랜만에 이런 저런 대화가 이어 졌다. 어머니는 돈을 많이 쓴다고 보건소 외에는 병원을 거의 가지 않았다.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큰 보자기를 혼자서 어떻게 머리에 이고 집으로 왔는지 궁금해 하던 것을 물어 보았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 제” 논두렁이나 밭두렁 같은 곳에 낙엽을 나누어 날라다가 두고 집에 올 때쯤이면 모두 합쳐 단단하게 묶어서 당신께서는 논두렁이나 밭두렁 밑으로 내려가 머릴 집어넣어 보자기를 당겨 머리에 이고 온다는 말에 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추고 말았다.
자식들 고생시킬까봐 뇌출혈로 혼자 있다가 쓰러진 어머니는 그 큰 보자기를 이고서도 일어났는데 끝내 일어나서 말 한마디 못하고 자식들과 이별을 했다. 유일하게 임종을 지키며 이불을 들추던 나의 눈에 어머니의 마름모꼴 발이 눈에 이슬을 맺게 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