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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제 꾀에 넘어간 여우 [1] 유청풍이 선실로 돌아오자 고혜원은 급히 물었다. "괜찮아?" "음. 그런대로." 노방과 위강은 그의 안색이 밝은 것을 보고 안심했다. 한편 엄희채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가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유청풍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홍오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전목(神箭木)을 구할 수 있습니까?"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홍오간은 신전목의 용도를 잘 아는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 다. "있기는 한데... 그것으로는 안될 걸세. 강한 진기에 당한 상처라. ......" 유청풍은 힘주어 말했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그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홍오간은 그런 모습이 언짢은 듯 한 의녀에게 나직이 지시했다. "가져오너라." 그는 유형마인강에 당한 치료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나게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결과야 뻔하지만 실패해야 고분고분 따를 테지.’ 의녀는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예." 잠시 후 의녀는 서너 자 길이로 잘라 말린 신전목을 들고 왔다. 신전목은 크기가 이 장쯤 자라며 가지가 사방으로 퍼진다. 두 치 길이의 잿빛을 띤 녹색 잎은 마디마다 두 장이 마주 붙어 있는데 가 장자리에 작은 가시가 돋아있다. 이런 신전목은 줄기의 생김새가 화살 뒷부분과 유사하여 화살나무 또는 귀전우(鬼箭羽)라고도 부른다. 옛날부터 이 나무로 귀신들린 병이나 놀라서 생긴 병, 운기조식 중 발생하는 역기 현상을 치료해왔던 것이다. 유청풍은 그것을 달이지도 않고 줄기와 잎을 입에 넣더니 질겅질겅 씹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홍오간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군. 달걀 노른자에 솜을 넣고 환자의 이 장 앞에서 살을 만 들어 쏘는 것을 보았지만......." 일찍이 도교에서도 이 신전목을 사용해 왔는바 귀신목을 화살로 만 들어 사악한 요마는 물러가라! 하고 소리치며 환자 주위에 대고 쏘았 다. 이렇게 아침저녁 세 번을 실시하여 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비법이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왔던 것이다. 한데 유청풍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이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가 ? 더욱 놀랄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쪽! 별안간 그는 엄희채와 입술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의 행위는 미리 입안에 넣고 씹었던 약을 혀로 깊숙이 넣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실내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엄희채 의 입술을 뽑아낼 듯이 흡입했다가 약을 밀어 넣어 주었다. 그의 예상치 못했던 행동에 가까이 서서 기웃거리던 의녀들은 화들 짝 놀랐다. "에그머니나!" 세 명의 의녀는 눈을 크게 뜸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홍오간은 짐짓 민망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허어... 험, 험."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곁눈질로 고혜원의 안색을 힐끔거렸다. 위강은 지그시 눈을 감더니 점잖게 돌아서서 뒷짐을 졌다. 노방은 앞니가 모두 드러나도록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은 표정이 달라도 무엇인가 기대하는 눈치였다. 의외로 고혜원이 제일 늦게 외면했다. 처음에는 놀란 눈으로 유청 풍의 행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그가 두 번째 입맞춤을 하자 그 녀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홱 돌아섰다. '아무리 그래도... 꼭 저렇게 치료해야 된단 말인가?’ 아무리 참으려 해도 분노로 끓는 가슴은 좀처럼 삭혀지지 않았다. 물론 그녀 역시 그가 어떤 생각이 있어서 그러리라 여기고는 있었다. 설령 그럴지라도 어느 여인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저런 행동을 쉽게 수긍하겠는가? 지금 유청풍은 마치 엄희채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듯 간간이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떨어졌다. "이제 기다려 봅시다." [2] 시간은 살같이 흘러갔다. 그런데도 엄희채는 차도가 없는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불규칙한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실내에는 점점 긴장감이 감돌았다. 노방 등은 속이 타서 연신 유청풍을 바라보았다. 유청풍은 의외로 덤덤하게 엄희채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바를 다했다는 표정이었다. 마침내 홍오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띠었다. "본시 민간요법이란 건 믿을 게 못 되네. 그런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고쳤지!" 이때 의녀가 시간을 통보했다. "나으리, 자정이 가까워졌습니다." 어느새 수술대와 시술대 하나가 추가로 놓여 있었다. 그것이 신호인양 홍오간은 중인들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소. 수혈을 합시다. 오늘밤을 넘기면 곤란 하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전신에 마기가 번진 엄희채는 영원히 밤에만 활동하 는 괴물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의녀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 세 명은 국부 마취약과 수술 칼, 그리고 여러 가지 용기가 실 린 수술대를 밀고 들어 왔다. 이때 고혜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 왜 이렇게 조바심이 날까? 그가 탈출 계획을 말했건만....... ’ 그녀는 조금 전 목격한 입맞춤의 광경을 잊은 채 유청풍의 안위를 염려했다. 불현듯 그녀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고 있었 다. 노방과 위강도 굳은 표정으로 가끔씩 천장을 올려다보며 서성거렸 다. '복명환령단을 먹였으니 다행이긴 한데.......’ '과연 유형 말대로 무사히 여기를 탈출할 수 있을까?’ 이미 그들은 유청풍의 전음을 모두 들은 터였다. 유청풍은 그들에 게 탈출 계획을 소상히 말해주었던 것이다. 문득 유청풍이 상의를 벗었다. "지성이면 감천이오. 최선을 다해 봅시다." 노방은 급히 말했다. "유형, 내가 먼저 하겠소. 아무래도 내 사매의 일이니......." 그는 한걸음에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유청풍은 빙긋이 웃었다. "어차피 해야할 일인데 순서가 무슨 상관이오?" 홍오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그는 골수를 뽑아내는 방법으로 노방까지 죽일 심산이었다. 지금 그는 비수처럼 번뜩이는 한 자나 되는 수술용 칼을 들고 있었 다. 그 칼로 살을 째낸 다음 수술대에 있는 일곱 치 짜리 장침(長鍼)은 뼈를 긁어낸다. 그리고 나서 그 옆에 놓인 네 치 길이에 너비가 두 푼 짜리 파침(破鍼)으로 골수를 빼내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홍오간은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뱉었다. "좀 아플 걸세." 말이 그렇지 어디 아픈 정도이겠는가? 아무리 국부 마취를 한다해도 골수를 빼내는 데 버틸 장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청풍은 태연히 수술대 위에 엎드렸다. "괜찮소." 의녀들은 유리병을 들고 서 있는가 하면 소독약에 적신 하얀 천으 로 그의 격관혈 주위를 문질렀다. 지켜보던 홍오간의 눈가에는 악독한 웃음이 흘렀다. '흐흐, 오늘만 지나면 뇌운진기를 차지하여 내가 혈광마검의 주인 이 되겠구나.’ 그는 수술 칼을 눈 위로 쳐들고 짐짓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번 수술로 비사금환이 나아야 하건만......." 그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수술 칼을 응시하고 있었다. 국부 마취가 끝나자 홍오간은 칼을 유청풍에게 들이댔다. 그가 칼 로 막 살을 내리 그을 순간이었다. "앗! 불이야!" "재료창고에 화재다......!" 뿌우우! 돌연 각을 부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어 선실의 문이 요란하게 열리더니 사십대 중반쯤 된 장한이 헐 레벌떡 뛰어들어왔다. 그는 당황한 음성으로 보고했다. "나으리! 소... 소독용 주정(酒精)에 부... 불이 붙었습니다!" 주정은 독한 술의 원료로서 음료 뿐만 아니라 소독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발효성이 매우 강해 불이 붙으면 기름 못지 않게 잘 타는 인화물질인 것이다. 장한은 전신이 흠뻑 젖은 채 연신 땀을 비오듯 흘렸다. 그는 화재를 진압하려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 홍오간의 안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내 잠시 살펴보고 오리다!" 그는 수술 칼을 수술대 위에 내려놓자마자 밖으로 달려갔다. 창고 앞에 도착한 홍오간은 기가 막혔다. "아니, 이게 대체......?" 좁은 선실 통로에서 장정 두 명이 모포와 이불을 휘두르며 죽어라 불을 끄고 있었다. 하지만 좁은 선실에서 화제를 진압한다는 자체가 애당초 무리였다. 그새 선실 여기저기에서 진화 작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뜨거운 불길 이 확확 번져 나왔다. 화르르릉! 와지끈! 굉음이 울리며 불길이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쾅! 홍오간은 주저하지 않고 장력을 날려 선실을 부셔버렸다. 두터운 판자가 산산조각나며 비로소 통로가 형성되었다. "자! 모두 달라붙어 화제를 진압해라!" 이때 갑자기 요란한 폭음이 들려왔다. 펑! 펑! 마침내 통 속에 담겨 있던 주정이 연속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질식할 정도로 무서운 화염이 회오리치며 순식간에 선실을 가득 메 웠다. 폭발과 동시에 배가 파손되면서 어디론가 강물이 흘러 들어왔 다. 그러자 물과 혼합된 주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악마의 혓바닥처럼 춤추며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자기 몇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나오며 소리쳤다. "불길이 건초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시뻘건 불길이 통로를 따라 상승하여 갑판으로 옮겨 붙고 말았다. 이제 사방은 온통 화광에 휩싸이고 말았다. "돛을 내려...... 으아!" 어두운 밤. 강바람을 타고 화염은 굉음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번져나갔다. 선미 쪽의 모든 창문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으며, 갑판도 타오르 기 시작했다. 콰콰꽝! 돌연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배가 기우뚱하며 기울었다. "으아악! 뜨거워!" "선체가 탄다! 어서... 피해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가 하 면 몸에 불이 붙어 앞뒤 가리지 않고 강으로 뛰어드는 자들이 속출하 기 시작했다. 홍오간이 목청껏 외쳤다. "당황하지 마라! 모두... 화재를 진압해라!" 하지만 이미 그의 명은 힘을 잃고 말았다. 각자가 오직 살아야겠다 는 일념으로 불길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날 뿐이었다. 그 중에서 홍오간의 지시를 따르는 자는 불과 서너 명 뿐이었다. 유청풍은 벌떡 일어났다. "연기가 들어오고 있소! 안전한 곳으로 가야하오." 벌써 그들이 있는 선실로 연기가 뭉클뭉클 밀려들고 있었다. 놀란 의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때였다. 투두둑! 가죽띠가 끊어지며 엄희채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대뜸 유청풍을 흘겨보았다. "무슨 치료법이 그래!" 힐난하는 것 같았으나 결코 기분 나쁜 음성은 아닌 것 같았다. 고 혜원은 그녀의 태도에 질투심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연적과 싸울 만큼 한가하지가 않았다. 그때 위강이 노방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자, 청풍이 알려 준 대로 서두르세!" 점차 연기가 선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얘기할 여유 가 없었다. 펑! 노방은 장력을 날려 천장을 부셔버린 후 그 구멍으로 야혼승을 던 졌다. 야혼승은 구멍을 통해 나간 후 밧줄을 내려주었다. 일행은 밧 줄을 잡고 모두 갑판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누군가가 소리쳤다. "구명선을 내려라!" "하선! 어서 구명선에 옮겨 타라!" 한편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홍오간은 정신을 차렸다. '청풍을 잡아야해!’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형을 날렸다. 자욱한 연기와 불길을 뚫고 그는 선실로 달려갔다. 와지직! 잠긴 문을 발로 차 부수고 안으로 뛰어 든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 다. "아니......?" 선실 안은 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이때였다. "으아아! 배가 침몰한다아......!" 구명선은 시뻘건 화염을 내뿜으며 선미부터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 했다. 홍오간은 기겁하여 선실에서 빠져 나왔다. 그는 다급히 갑판으 로 올라갔다. 그는 불지옥으로 변한 선 내를 둘러보며 치를 떨었다. '으으... 이게 무슨 꼴이지? 대체 금년에는 왜 이리 재수가 없을까 ?’ 시뻘건 화광이 비치는 강물에는 수십 척의 작은 배들이 낙엽처럼 떠다녔다. 조그만 구명선들은 서로 먼저 화염에서 벗어나려고 아우성 을 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위강이 달려오더니 그를 잡아 끌었다. "어서 갑시다!" "다들... 어디로 갔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소. 지금 제 정신들이 있겠소?" 선수(船首)가 물에 잠길 즈음 그들은 간신히 마지막 남은 한 척의 구명선에 오를 수 있었다. 홍오간은 한숨 돌리게 되자 수하들의 생사보다는 유청풍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녀석을 잡아야 하는데.......’ 하지만 캄캄한 강 한 가운데에서 뿔뿔이 흩어진 사람을 찾기란 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더니 갑자기 난데없는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 작했다. 쏴아아아아......! 장대같은 빗줄기가 무섭게 쏟아졌다. 위강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씻어내며 손가락으로 무창 쪽을 가리 켰다. "파도가 심해 위험하오.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갑시다!" 쏴아아! 철썩! 높이 치솟은 강물은 해일처럼 밀려와 배와 사람을 사정없이 때렸다 . 홍오간은 구명선의 선측(船側)을 잡고 매달리며 탄식을 터트렸다. '어이구... 이게 다 그 모염정 때문이야! 모염정 그 계집이....... ’ [3] 번쩍! 우르르... 쾅! 천둥번개가 치는 을씨년스런 밤이었다. 천락무예단이 자리잡은 악주에도 굵은 빗줄기가 무섭게 쏟아졌다. 단원들은 침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누워서 비 소리를 듣고 있었 다. 문득 판자 문이 열리며 칼칼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 들 안 자고 있었는가?" 빗물을 줄줄 흘리며 들어온 사람은 투검 영감이었다. 영감은 먼길을 다녀왔는지 전신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누 워 있던 설가대가 의혹에 찬 눈초리로 영감을 흩어보았다. "대체 매일 밤 어디를 돌아다니는 거야?" 일순 단원들은 일제히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닦아내는 투검 영감 을 주시했다. 영감은 옷에서 물기를 죽죽 짜낸 후 침상에 올라와 앉 았다. "답답해서 바람 좀 쏘이고 오는 길이요." 탈바가지 안창구가 곁눈질로 바라보며 납작코를 씰룩거렸다. "염병, 어디다 계집을 감춰뒀나? 괴상한 냄새가 나네? 킁." "남이야 논에다 콩을 심든......." 영감은 야멸차게 응대하고는 설가대에게 물었다. "청풍은 어디 갔소?" 설가대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낸들 아나. 계약기간이 끝났는데......." 짧은 순간 투검 영감의 눈에서 괴광이 번뜩였다. 그 눈빛은 무서운 살의가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점을 주시하지 않았다. 탈바가지 안창구가 벌떡 일어나며 거침없이 비방하기 시작했다. "자식, 인사도 없이 그냥 가? 그 동안 가르쳐준 기술로 혼자 돈벌 겠다는 심보잖아? 요새 젊은 놈들은 그게 탈이야. 킁." 팔베개를 한 북치기 노달맹은 아쉬움이 담긴 음성을 토해냈다. "한데 그 만한 인물이 있을지......." 곰방대를 빨아대는 도종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없으니까 보고싶네." 뿜어낸 연기가 습기찬 공간으로 천천히 뻗어나갔다. 안창구는 다시 벌렁 드러누우며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지에 깔린 게 사람인데 뭘 그래?" 설가대가 안색을 굳힌 채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단주도 바뀔 모양일세." 그는 또다시 업무보고를 해야하는 부담이 있었다. "별거해서 좋기는 하던데......." 이들은 상견례 때 한 번 단주의 얼굴을 볼 뿐 그후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모든 업무는 설가대가 단주의 지시를 받아 처리하기 때문이 었다. 이러한 설가대조차 단주의 사생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 그만큼 엄희채의 행적이 은밀한 이유도 있지만 무예단 일이 워낙 힘들고 바빠서 단원들은 틈만 나면 시내로 나가 술 마시고 상대를 찾 아 즐기는 것이었다. 실상 이런 생활 방식은 어느 무예단이나 비슷했 다. 특히 여자 단원들은 이때가 공짜 술과 함께 사내 맛을 보며 짭짤하 게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투검 영감은 돌아누워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홍오간 바보 같은 놈.......’ 그때 안창구가 들으라는 듯이 떠들더니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에잇, 소변이나 보고 와서 자야지." 안창구는 비를 맞으며 창고 문을 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갈총관님." 놀랍게도 그 안에는 비쩍 마른 갈곤태가 우뚝 서 있었다. 또한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탈명색혼대가 살기 어린 눈초리를 번 뜩였다. 갈곤태는 음침한 음성으로 물었다. "청풍은 왔느냐?" 말투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지금까지 유청풍을 죽 감시했음이 분명 했다. 아마 그는 유청풍이 홍오간의 구민선에서 빠져 나올 때 놓친 모양이었다. 안창구는 그런 내막을 모른 채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계약기간이 종료되어 이미 떠났습니다." 갈곤태가 음험하게 웃었다. '저것들을 인질로 잡으면 제 발로 찾아 올 테지.’ 그는 고갯짓으로 천막 안을 가리켰다. 안창구가 동조하듯 비굴한 웃음을 띠자 그는 냉정히 말했다. "너는 모르는 척하고 저 쪽에 가 있어." "예." 안창구는 대답을 한 후 얼른 벌판 쪽으로 걸어갔다. '흐흐, 청풍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지?’ 그의 눈에 비참하게 절규하는 유청풍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히죽대던 그는 빗물에 젖은 얼굴을 손으로 씻어냈다. 장강과 이어진 어둠 속 저 멀리 수십 대의 마차행렬이 희미하게 눈 에 들어왔다. 그때 별안간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 년, 어딜 도망 가!" "아니, 저 놈이?" "으아악!" "사람 살류... 끄아악!" 비명이 들릴 때마다 시뻘건 피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빗줄기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백 수십 명이 이리 뛰고 저리 구르는 광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와중에 시퍼런 도검이 수시로 번뜩이며 단원들을 후려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천락무예단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갈곤태의 음성이 어둠을 뚫고 멀리까지 들려왔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모조리 처치해라!" 열댓 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자 공포에 질린 천락무예단원들은 제대로 도망도 못간 채 오금을 달달 떨었다. 탈명색혼대는 짐승을 몰 듯 그들을 마차 쪽으로 끌고 갔다. "동작 봐라! 빨리 빨리 움직여." 고개 숙인 긴 행렬이 철버덕거리며 물찬 땅을 걸었다. 이어 천락무예단 천막에서 시뻘건 화광이 화르르 솟구쳤다. 이미 기름을 뿌려 놓은 듯 삽시간에 불이 번져 천막 주위가 환해졌 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천락무예단원들은 모두 마차 앞에 정렬했다. 짐승을 운반하는 수레처럼 만들어진 열 대의 마차는 사방에 굵은 철 창이 씌워져 있었다. 갈곤태는 잠시 천막이 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우지끈! 투두둑! 굉음을 내며 화염에 휩싸인 막사는 맹렬히 타올랐다. 그런 불 속에서 사람이 살아날 리 만무할 것이다. 이윽고 갈곤태는 호송용 마차를 가리켰다. "실어라." "예!" 대답과 동시에 탈명색혼대는 단원들을 짐짝 마냥 내던졌다. "어서 들어가, 열 명씩 타라고." "어이쿠!" 단원들은 죄수 마냥 비좁은 마차 속에서 몸을 구부렸다. "사망자 열 세 명을 제외하고 백 두 명입니다. 생존자는 모두 태웠 습니다." 탈명색혼대의 지휘자가 보고를 했다. 어깨를 으쓱하던 갈곤태는 마차를 인솔하고 사라졌다. "좋아, 출발!" 천락무예단의 천막은 완전히 불타버려 시커먼 잔재만 남았다. 아직도 검은 연기가 간간이 솟구치는 속에서 돌연 지면이 들썩거렸 다. 놀랍게도 땅속에서 나온 사람은 투검 영감이었다. "......." 두더지 마냥 기어 나온 영감은 낮은 자세로 사방을 조심스럽게 살 폈다. 소나기가 퍼붓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중에 사람이 있을 턱이 없 었다. 투검 영감은 단검 하나를 허리에서 풀어냈다. '죽었다는 증거를 확실히 남겨 놓아야겠군. 아흘흘.......’ 투검 영감은 단검을 시체들 옆으로 획 집어던진 후 재빨리 둑을 향 해 신형을 날렸다. 한데 둑 밑으로 날아가던 영감이 허리를 피는 순 간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돌연 굽었던 등이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나더니 육 척 장신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몸서리 쳐질 듯한 괴이한 기가 솟아 나왔으며 눈 에서는 음산한 광채가 번뜩거렸다. 그의 모습은 입었던 상의가 찢어져 너덜댈 정도로 완전히 탈바꿈했 다. 빗줄기 속에 드러난 얼굴도 사뭇 달랐다. 안면에는 주근깨가 잔 뜩 끼었는데 머리가 다소 뾰족한 형이었다. 영감은 득의에 찬 흉소를 띤 채 품속에서 꺼낸 표주박을 허리에 찼 다. 강철로 만든 그 표주박은 길쭉한 손잡이가 무려 한 자나 되었다. 잠시 후 영감은 짙은 어둠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녀석을 이용해 얽힌 것을 슬슬 정리해 볼까?" [4] 노방과 엄희채는 천락무예단을 향해 달려갔다. "사매는 객잔에 남아 있을 걸 그랬어." 노방이 우려하는 빛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엄희채는 영문을 모 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요?" "왜라니? 냉영괴화가 청풍 옆에 있는데 걱정도 안 돼?" "사형도 참, 그런다고 그가 달라질 것 같아요?" 그녀의 음성 속에는 유청풍을 신뢰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그와 입맞춤을 했던 입술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지금 노방 과 그녀는 악주 어느 객잔에 머물고 있을 유청풍과 고혜원을 떠올리 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불과 한 시진 전 그들 네 사람은 객잔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터였다. 노방과 엄희채는 천락무예단을 등인탁에게 인수인계하기 위해 준비 하러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계약기간이 만료된 유청풍은 고혜원과 함께 객잔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노방은 피식 웃었다. "하긴 뭐......." 막 전방을 주시하던 그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졌다. 천락무예단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수십 명의 흑영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서 거만한 자세로 노려보고 있는 비쩍 마른 자는 분 명히 와호장의 총관 갈곤태였다. 노방과 엄희채는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순간 갈곤태의 느끼한 음성이 밤 공기를 갈랐다. "이봐, 순순히 가실까?" 그는 불타 버린 천락무예단 자리를 힐끔 가리켰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막사는 오간 데가 없고, 불에 탄 검은 잔재들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엄희채는 진기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단원들은 모두 어디 있지?" "가보면 알아." 노방은 격앙된 음성을 발했다. "네 말대로 움직일 것 같으냐?" "단원들이 모두 죽어도 좋다는 건가?" "만행을 저지른 이유나 말해라!"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린 갈곤태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죄목이야 아주 많지. 오 년 전 도련님을 막연산에서 공격한 죄, 청풍과 공모하여 의절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 죄, 은하자비소를 파기 한 죄... 어때, 할 말 있나?" 그의 위아래를 흩던 노방은 속을 긁어놓았다. "꼴을 보니 청풍에게 호되게 당했군?"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쌍곰보 형제 팽고와 팽소가 보이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갈곤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잔말 말고 따라와." "네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무공을 모르는 단원들을 인질로 삼다니......." 갈곤태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흥, 못 가겠다 이거지?" 일순 엄희채가 노방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형......." 노방은 그녀의 심중을 알아차리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래, 이 자와 말싸움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청풍을 해하 려는 술책인데... 아무래도 그가 와야 해결책이 생기겠군.’ 그는 도리 없이 동행을 수락하고 말았다. "좋다. 어디냐?" 갈곤태는 재빨리 두 사람의 혈도를 눌렀다. "좀 먼 곳이야." 노방과 엄희채는 그를 쏘아볼 뿐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갈곤태가 손짓한 순간 좀 떨어져서 광경을 지켜보던 탈명색혼대는 마차를 끌고 와서 두 사람을 실었다. "타라." 갈곤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꼴좋군. 역시 도련님은 놀라워. 청풍, 이제 지겨운 네놈과 싸우는 것도 끝이다.’ 이내 마차를 에워싼 대열은 어둠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대강객점(大江客店)은 악주 북쪽 변두리에 있는 삼류 음식점이자 여인숙이었다. 비록 삼류라 해도 음식점인 백여 평 일층과 이층 객실 은 언제나 손님들로 꽉 찼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밤새 퍼붓던 비는 그쳤지만 그 동안 배가 출항하지 못해 아침부터 손님들이 바글거렸다. 유청풍과 고혜원은 이 객점 아래층 한쪽에서 만두를 먹고 있었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으며 고혜원은 안색이 환했다 . 이런 싸구려 음식점에 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유청풍과 함께 있다보니 모든 것이 그저 좋게만 보였다. "호오... 역시 맛이 좋아." 그녀는 만두를 먹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대강객점의 주방장이 유청풍에게 만두 빚는 방법을 배운 다음부터 이렇게 손님이 바글댄다는 것을 알고 하는 소리였다. 이때 배달 나갔던 점소이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십 오륙 세쯤 된 점소이는 다급한 음성을 토해냈다. "처.. 청풍형! 크... 큰일 났어요." 점소이는 너무나 숨이 차서 말을 하고 나서 몇 번인가 가슴을 두드 렸다. 유청풍은 담담히 물었다. "박동(樸童)아, 무슨 일이냐?" "글쎄, 무예단이 없어졌어요." 점소이 박동은 눈을 크게 뜨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유청풍은 의아해 하며 그에게 물잔을 건넸다. "좀 차근차근히 말해라." 박동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 비로소 숨을 가다듬었다. "휴우, 어젯밤에 제가요... 야식을 갖고 갔었는데......." 얘기를 듣고 난 유청풍은 태연자약하게 박동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구나. 가서 일을 보거라." "형, 그럼 나중에 봐요." 박동은 또 배달을 나가야 하는지 곧바로 사라졌다. 유청풍과 고혜원은 서둘러 객점을 나왔다. 무표정하던 유청풍의 안 색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어쩐지... 그래서 한 명도 보이지 않았구나.’ 고혜원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야혼승과 비사금환이 갔을 텐데......?" "아마 그 전에 일이 터졌겠지." 유청풍이 객점에 머문 것은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천락무예단원들에게 고별 점심을 내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데 식사시간이 한 시진 가량 지났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유청풍은 그저 공연이 늦게 끝나는 줄로만 여겼던 것이다. 불현듯 그는 투검 영감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감에게 의문점을 확인하려고 했더니.......’ 애당초 그는 추양건 암살 사건의 배후 인물을 독혈 방시굉으로 알 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시장에서 노방을 구한 사람은 검혈 단궐이라 고 믿었다. 투검 영감이 그렇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시굉은 암살사건과 전혀 무관함이 드러났으며 노방을 구 한 사람은 도절 위강으로 확인되었다. 대체 이러한 오해가 일어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보려던 터에 천락무예단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유청풍은 무엇보다 노방과 엄희채, 그리고 단원들의 생사가 염려되 었다. 천락무예단이 있던 자리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불탄 자리가 언뜻 시커먼 숯검정처럼 보였다. 일부 반항하다가 죽 은 남녀의 시신 십여 구가 어지러이 널린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 뼈가 드러날 정도로 타버린 시신에는 파리들이 까맣게 달라붙어 있 었다. 유청풍은 시신의 숫자를 헤아려 보더니 상황을 알아챘다. "납치 당했구나." 누군가가 단원들을 인질 삼아 계획적으로 노방과 엄희채를 납치했 음이 드러났다. 고혜원도 참혹한 광경에 절로 한숨을 토해냈다. "아아......." 유청풍은 시신들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단서를 얻으면 좋으련만.......’ 숯덩이를 방불케 하는 시신에는 파리들이 까맣게 달라붙어 있을 뿐 만 아니라 밤새 쏟아진 소나기로 인해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더욱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풍겨 자세히 들여다 보기가 쉽지 않았다. 유청풍은 장삼을 벗어 휘두르며 시신 주위를 돌아 다녔다. 한순간 그는 동작을 멈춘 채 놀란 표정으로 바닥을 뚫어져라 응시 했다. '투검 영감의 호신용 단검이......?’ 뼈만 남은 시신 앞에 단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유청풍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으며 단검을 집어들었다. 단검은 손 잡이와 검신의 길이가 비슷해서 마치 장검의 검신을 줄여서 붙여 놓 은 듯한 형상이었다. 검집은 칙칙한 묵색이며 일 척 검신은 시퍼런 기운이 감도는 가운 데 은은히 붉은 색을 띠었다. 그것은 평소 투검 영감이 허리에 차고 다녔던 단검이 확실했다. 유청풍은 단검과 옆에 있는 시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죽었단 말인가? 훼손상태가 너무 심해 생사를 단정짓기가 어 렵구나.’ 척추뼈가 짧은 점으로 보아 시신은 투검 영감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완전히 타버린 시신의 주요 골절부위가 마디마디 부러져 있 어 누구라고 단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혜원이 위로하듯 말했다. "안 죽었을 확률이 많아. 영감이 반발하지 않았다면... 혹 끌려간 흔적을 남기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잖아." 유청풍은 단검에 묻은 흙을 털어내어 허리에 찼다. "단원들을 모두 죽이지 않은 점으로 보아 날 노린 것 같군." 이때 질투 어린 음성이 고막을 두드렸다. "같이 잤어? 어젯밤에......?" 순간 고혜원의 안색이 획 변했다. '모염정!’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접근할 사람은 모염정 뿐이었다. 역시 예상한대로였다. 휘이잉! 강바람에 경장치마를 날리며 모염정이 서 있었다. 바람이 조금만 더 불면 그녀의 속살이 전부 드러날 판국이었다. 모염정은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의 모습을 응시한 채 입 술을 비쭉거렸다. 고혜원이 눈썹을 확 치켜올렸다. "......!" 두 여인은 눈에서 새파란 불꽃을 퉁기며 마주 바라보았다. 모염정 은 질투와 증오가 맺힌 눈빛을 발했으며, 고혜원은 곧 달려들 듯한 눈초리였다. 고혜원이 신형을 날리려할 때 유청풍이 입을 열었다. "왜 왔지?" 그녀는 야릇한 눈길을 보냈다. "홍오간을 찾아 가다가 봤지."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유청풍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납치된 장소는?" 모염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절운애(截雲崖). 갈곤태가 데려 가더군." 고혜원은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곳으로.......’ 그녀의 표정이 심각한 점으로 보아 절운애는 절지가 분명했다. 유청풍의 표정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서운 결심을 하고 있 는 증거였다. 모염정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혜원을 향해 생긋이 웃으 며 신형을 날렸다. "대단해! 지난번엔 등조민과 배에서 지내더니... 첫 남자는 대족삼 이라며?" 모염정의 말은 이간질이었다. 또한 대족삼 장구안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혜원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으윽... 그 더러운 놈과 함께 있나 보구나! 그래... 그 놈을 처치 하고 절운애로 가도 늦지 않을 거야.’ 창! 쌍륜화극을 빼든 그녀는 쏜살같이 모염정을 추격해 갔다. 그녀가 이토록 흥분하는 것은 장구안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청풍은 여인들의 사소한 심리전 따위에 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도 신형을 날렸다. 모염정은 악주 나루터에 도착하자마자 쾌속선에 올라탔다. 그녀는 선수를 북쪽으로 잡고 배를 몰았다. 휘이잉......! 강바람에 갑판에 우뚝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뒤 따라 온 고혜원은 한 척의 돛배에 뛰어 올랐다. "저 배를 추적해요!" 그녀는 사공에게 은화 한 냥을 던져 주었다. 사공은 은화를 보자 입이 쩍 벌어졌다. "예예! 염려 마십시오. 아마 저 배는 무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는 물질이 익숙한지 재빨리 배의 방향을 바꿔 노를 저었다. 쏴아아! 배는 쾌속하게 강물을 가로질렀다.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아 두 배는 서로 소리치면 들을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모염정은 팔짱을 낀 채 시종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호! 둘을 떼어놓았으니 성공한 셈이지." 두 척의 배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장강을 건넜다. 얼마 후 무창에 당도한 모염정은 곧바로 성내를 향해 신형을 날렸 다. "호호... 멋진 음향이나 들려줄까?" 그녀의 경신술은 강호에서 가장 빠르다고 정평이 나 있는 터였다. 고혜원은 죽어라 그녀를 추적했다. 그녀의 경공도 빠른 편이었으나 아무리 전력을 다해 달려도 조금도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표적은 내내 가시거리 내에 있어 그녀는 추적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모염정은 성문을 지나 중앙통을 거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 다. 아마도 부호들이 사는 거리로 가려는 것 같았다. 강물과 숲이 어우러진 동쪽 언덕은 경관이 빼어나 무창에서 고관대 작들이 사는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모염정은 한 화려한 장원으로 사라졌다. 장원은 거대한 규모였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전각(殿閣)과 가산(假山), 그리고 인 공호수가 있었고, 곳곳에 화원이 가꾸어져 있었다. 모염정은 삼층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서라!" 뒤쫓아 온 고혜원은 소리치며 전각 안으로 뛰어 들었다. "......!" 막 전각 안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하아아......." 돌연 숨막힐 듯한 환성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한 방으 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경험이 없는 처녀라 해도 그녀는 소리만으로도 방 안의 광 경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인의 숨가쁜 신음소리 사이로 간간이 남자의 숨소리도 들려왔다. 고혜원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방 안의 남녀가 누군지 알았기 때 문이었다. '홍오간과 의녀.......’ 어언 두 남녀는 쾌락의 정상을 향하는 듯 호흡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또한 맨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급박해지고 있었다. 고혜원은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 '지저분한 것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