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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장 악연(惡緣) 까악, 까르르르륵 까악! 음산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있었다. 하남대평원의 광활한 대지에 이렇게 까마귀가 모인 건 주변에 시체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한겨울에 하남대평원에서 죽을 사람은 무림인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단궁비는 몸을 날렸다. 칼날 아래 살아가는 무림인으로서 시체라도 온전히 보존해 주겠단 생각에! 그러나 현장에 당도한 단궁비는 말을 잊었다. 한 여인이 죽음 직전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까마귀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음산한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단궁비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여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백발적미! 그녀가 하남대평원의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동굴! 참으로 묘한 일이다. 주약란의 경우에도 그랬고, 백발적미도 마찬가지다. 하늘이 운명으로 짝지은 것이라 하지만 결국은 모두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일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백발적미의 안색은 이미 흙빛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솟구치는 색욕을 참을 수 없자 스스로 혈을 짚은 것 같았다. 과다하게 혈류를 억눌러 두었던 관계로 혈맥이 막혀 운혈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업보라면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의 굴레가 아닌가!' 단궁비는 먼저 자신의 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백발적미의 옷가지를 하나씩 벗겨 역시 바닥에 깔았다. 단궁비와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이윽고 단궁비는 백발적미의 혈도를 풀었다. "하악!" 뜨거운 단내를 확 풍기며 백발적미의 나신이 착 안겨 들었다. 사내의 강한 체취를 맡은 그녀는 발광을 하듯 몸부림 쳤다. 단궁비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이 여난을 어찌 한단 말인가? 젊어서야 하루에 다섯 여자를 못 안아주랴만은 늙으면? 듣자 하니 여자는 사십 대에 색이 절정에 달한다는데? 그 때는! 단궁비는 골머리를 싸쥐었다. '쓰! 죽을 땐 죽더라도 일단 이 일을 해결하자!' 단궁비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이내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백발적미의 달구어진 나신이 비벼질 때마다 단궁비의 단전 아래쪽에서 용트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급기야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아… 아학… 하악!" 백발적미는 젖을 보채는 아이처럼 단궁비의 불기둥을 잡은 채 자신의 옥문으로 가져가 비벼대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숫처녀, 단궁비는 골치가 띵하는 걸 느꼈다. 여지없이 두 발에 족쇄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백발적미의 충혈된 눈이 단궁비를 바라보았다. 그 붉은 눈빛 저편에서 애원의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아악!" 백발적미가 도리질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무지막지하게 큰 그놈이 단숨에 방문했으니 그녀의 작은 방이 어찌 견딜 것인가? 그러나 이내 비명은 묘음(妙音)으로 변했다. "아학학!" 단궁비가 하체에 힘을 실을 때마다 그녀의 나신이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펄쩍 뛰었다. 두 사람은 끝없는 열락(悅樂)의 환희경에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단궁비의 상체에 황금색의 무늬가 나타났다. 그것은 세 마리의 금봉이었다. 금봉은 흡사 살아 있는 듯 금세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삼봉(三鳳). 그렇다. 문양은 삼봉이었다. 백발적미는 단궁비의 예측대로 쌍봉쌍령 중 하나인 금령지극체였다. 이제 단궁비가 쌍봉쌍령을 모두 취하게 되자 완벽한 삼봉쌍령금상지체가 이루어지면서 몸 속에 내재되어 있던 특이한 문형이 나타난 것이다. 한 줄기 황금빛이 삼봉에서 흘러나왔다. 그 빛은 두 사람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그 속에서 지고지순한 단궁비의 정기가 백발적미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그녀가 지닌 금령지극체의 기운은 단궁비의 정기와 융합되면서 그를 불사지체(不死之體)로 만들어갔다. '삼봉의 현신이다.' 단궁비도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환상의 대이적(大異蹟)을 알아챈 것이다. 기운은 장강대해(長江大海)와 같이 끊임없이 용솟음쳤고 전신은 솜털처럼 가벼워 하늘을 날을 듯했다. 단궁비의 몸놀림이 조심스러워지고 정성이 실렸다. 백발적미 역시 묘한 느낌을 받은 듯 쾌락에 겨운 비명대신 눈을 감고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열락은 끝없는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무려 한나절이나 단궁비를 놓아주지 않던 백발적미는 마침내 기진맥진한 \상태로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단궁비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절은 채 비로소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낭자, 미안하오. 내 급한 일이 있어 지금은 그냥 가지만 훗날 꼭 그대를 찾아서 해명토록 하겠소." 단궁비는 한 장의 서찰을 남긴 뒤 방 안에서 사라졌다. 이제 쌍봉쌍령을 모두 취한 단궁비. ---쌍봉쌍령을 취하니 구천십지와 사해팔황이 그 발 밑에 있도다. * * * "단… 단궁비라고?" 서찰을 움켜쥔 백발적미의 가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얗게 탈색된 얼굴과 한껏 부릅떠진 두 눈은 파랑치듯 흔들림을 보였다. "그분이… 그분이 삼봉쌍령금상지체였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백발적미는 자신에게 반문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녀는 혼잣말로 읊조렸다. "안돼. 이럴 순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야! 난 죽어도 그분을 포기할 수 없어! 그러면… 오라버니는…." 고개를 가로젓던 백발적미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단궁비! 처음으로 이 이름을 불러 보는군요. 그대가 날 피한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당신이 날 살려 준 건 고맙지만 우린 융합될 수 없는…!"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백발적미 외에 또 다른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마야의 동생인 것이다. * * * 머리에는 사모관대를 쓰고 몸에는 화려한 예복을 걸쳤다. 그런 차림으로 그는 오래도록 귀왕곡의 신비각의 대전에 서 있었다. 벌써 삼 일이 흘렀다. 그 동안 그는 한 번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 바로 담자무이자, 마야였다. 그를 따라 신행길에 오른 수백 명의 가신들 역시 삼 일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천천히 담자무에게 다가갔다. "궁주께 속하, 제갈사가 아룁니다. 주약란과 단궁비가 혼례를 치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중원에 떠돌고 있습니다. 주약란은 오지 않습니다." 마야 나청군은 대답이 없다. 그는 뚫어지게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림을 받았다. 그의 일생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자신에게는 영원히 발생치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인에게, 그것도 재물로 생각했던 여인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피식! 마야가 웃었다. "제갈사, 어쩌면 말이야. 주약란은 처음부터 내 정체를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 당시에 신비각은 힘이 없었네. 혈궁도 대마천도 당할 수 없었지. 그래서 그녀는 외줄타기를 한 거야. 실패는 바로 죽음으로 직결되는 외줄타기를!" "설마…!" 마야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삼 일 동안 무얼 생각했을 것 같은가?"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다. "그녀를 잊는 거였네. 장장 그녀를 잊는데 삼 일이나 걸리더군!" "궁주!" "계획대로 진행한다. 대마천을 치는 거야!" * * * 능각표는 오랜 시간 침묵에 빠져 있었다. 그의 외눈은 깊게 침잠되어 있었다. "마야에게 요요의 비밀이 탄로났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비밀은 요요와 나만이 아는 극비다." 능각표의 침잠된 외눈이 허공을 향했다. "아니면 마야가 동자공(童子功) 같은 특수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그래서 요요를 멀리하기에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인가?" 그는 머리를 쥐어짜 봤다. 그러나 아무리 뇌리를 굴려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후후후, 너의 선물은 아주 잘 접수했다. 매우 희귀한 특상품이더군." "천리전성음(千里傳聲音)!" 능각표의 안색이 홱 변했다. 누군가 백 장 밖에서 전음을 날린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오십 장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놈이다." 능각표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혈궁의 기습이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이 시대 최고의 두 패웅이 서로를 마주본 채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변방무림의 패자. 또 한 사람은 중원을 거머쥐려는 패웅. 두 사람이 마주한 삼 장 간격의 공간에 천하가 놓여 있었다. "네가 능각표냐?" 나청군은 지그시 능각표를 응시했다. 능각표의 입술꼬리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본좌보다 더 안하무인의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는 나청군을 쓰윽 훑어보았다. 나청군은 혼자였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백만대군(百萬大軍)의 거력보다 강했다. '요요가 실패했단 말인가!' 하지만 능각표는 이내 불안감을 떨쳤다. 지금은 그런 걸 따져 볼 여유가 없었다. 단신으로 이곳을 찾았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과시하는 동시에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대단히 중요한 일은 확고한 자신 없이는 이렇듯 대담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점이 능각표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했다.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지 않는다면 예의가 아니지. 더욱이 홀로 찾아 올 정도면, 살(殺)!" 그의 입에서 냉혹한 살인 명령이 떨어졌다. 능각표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많은 병장기들이 우박처럼 마야 나청군에게 쏟아졌다. 나청군은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을 아무 거리낌없이 파고들었다. 그의 손에서 나백의 절학이 펼쳐지고 능각표의 부하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크아악! 이게…." "우웩… 이…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일 초에 수십 명씩 혼과 육신을 분리하는 마야의 무위는 가히 경천지경이었다. 삽시간에 능각표의 수하 수백이 저승문턱을 넘었다. "네놈의 살가죽을 우리가 벗겨 주마." 동사불 중 단궁비에게 살아남았던 세 명이 일제히 마야를 공격했다. "동사불마회선강!" 날카로운 쇳소리를 토하며 그들의 격체전공술(隔體傳功術)이 펼쳐졌다. 콰우우우웅-! 동사불의 모아진 패력(覇力)이 대기를 가르며 엄청난 기세로 마야를 향해 몰려들었다. 밀려드는 장경을 향해 마야가 슬쩍 한 손을 휘둘렀다. 손 끝에서 검붉은 혈류가 뻗어나가며 동사불의 장경을 두드렸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불꽃 같은 기운이었다. "마마혈천공! 피해랏." 능각표가 대경실색해 소리쳤다. 그러나 그때 마야의 공격은 벌써 동사불을 휘감고 있었다. "크아아악!" "아아악!" 폐부를 쥐어짜는 비명과 함께 동사불의 작은 몸집이 콩 튀듯이 사방으로 튀었다.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이미 동사불의 육신은 한 줌의 혈수로 변해 버렸다. "네놈이 마마혈천공을 익혔다니!" 능각표는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다. 마야의 무공은 능각표를 경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설마하니 그가 마마혈천공을 익혔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후후! 팔황마예는 어차피 나백의 본맥에서 갈려진 문파, 내가 마마혈천공을 익힌 건 극히 당연하다." 능각표는 이내 두 눈 가득 살기를 머금었다. 연후 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괴음이 흘러나왔다. "크크크크! 키키키키키!" 그것이 신호인 모양이다. 사방에서 파공음이 울리더니 활강시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마야 나청군을 향해 공세를 펼쳤다. 수십 구의 활강시들이 일제히 덤벼들자 그 기세는 자못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마야 나청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다. "이 따위 미물로 날 대적할 생각이었나?" 마야 나청군이 대갈일성을 토하며 양손을 맹렬히 휘둘렀다. 퍼버벅! 활강시들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깨어졌다. 허공이 그들의 뇌에서 튄 피로 붉게 물들었다. 삽시간에 혈강시는 모두 머리없는 강시가 되어 버렸다. "능각표! 이제 직접 나설 때가 된 것 같은데?" 죽음을 관장하는 자 사율 능각표. 백만마종주 나백의 직계후손 마야 나청군. 두 사람의 표정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마야 나청군은 처음의 여유를 그대로 유지한 반면 사율 능각표의 안색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목불인견의 참상, 자신의 원대한 야망이 단 한 사람에게 이렇게 철저히 무너질 줄 어찌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지독한 악몽을 꾼다 생각했다. 눈 앞의 현실을 부인하려 했지만 현실은 냉혹한 것! "동해의 푸른 물결을 보며 잉태시킨 꿈, 그러나 결국 설원의 끝에서 내 꿈이 스러지는가?" 능각표는 차가운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만이 아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푸르고 정겹게만 느껴졌던 하늘이다. 그러나 오늘 따라 저 하늘은 왜 이렇게 차갑게 느껴지는 것일까? 능각표는 천천히 마야를 향해 돌아섰다. "마야! 네가 흑풍의 주인이라면 난 만마지체, 우리 사이에 피해갈 길은 없다. 최후의 일전을 시작하자!" 능각표는 전신진력을 모두 끌어 모았다. 그의 몸 주위로 강기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능각표는 단 일수에 모든 승부를 판가름내려는 것이다. "좋지. 요요를 선물로 준 정리를 생각해서 고통없는 죽음을 선사하겠다." 말을 마친 마야 나청군이 쌍수를 들어올렸다. 능각표의 외눈이 섬뜩한 광망을 뿌렸다. "좋은 생각, 나 역시 그러하다." 능각표가 번개처럼 일장을 쳐냈다. 그의 독보적인 무공인 마라혈강기였다. 마야 나청군도 양손에서 무서운 공격을 펼쳤다. 바로 마마혈천공이었다. 두 절세마공절학이 맹렬히 충돌했다. 꾸꽈꽝-! 주위 수십 장이 벼락을 맞은 듯 일시에 초토화가 되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부서져 사방으로 비산했다. "크으으윽!" 마야의 일격에는 역부족이었다. 능각표가 허공으로 퉁겨져 날아올랐다. 순간 꼬리를 물 듯이 그를 향해 몸을 날리는 마야, 그의 손이 허공을 향해 일성지력을 뿜었다. "능각표, 너에게는 흑풍을 사용할 필요도 없겠구나!" 나청군의 손가락이 능각표의 사혈을 짚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산정을 울렸다. 능각표의 원대한 야망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 * * 만승산에 밤이 깊었다. 편월(片月)이 비스듬히 야천에 걸려 있고 만승산은 온통 흰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단궁비는 혈궁 안으로 스며들었다. 넓이만도 수십만 평, 수많은 고수들과 기관매복이 있는 이곳을 그는 흡사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잠입했다. '음, 어느 곳이 마야의 거처일까?' 넓은 광장을 지나자 수백 채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늘어서 있었다. 정상인의 보폭으로 다 돌아본다 해도 족히 두 달은 걸릴 엄청난 규모였다. 규모만으로 따진다면 자금성보다 웅장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단궁비가 몸을 뽑아 올렸다. 어느 전각 위. 단궁비는 신형을 멈춘 뒤 귀를 기울였다. '천리지청술은 천 리 밖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단궁비는 미세한 음파라도 잡기 위해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파바바박-! 그때 그의 귓가로 괴이한 음향이 들려왔다. '땅 속이다. 누군가 땅 속을 파고 있다.' 그렇다. 그 소리는 자신이 올라서 있는 전각의 아래쪽 땅 밑에서 나는 소리였다. 단궁비는 소리가 나는 곳을 유심히 주시했다. 파아악-! 잠시 후 땅거죽이 솟아오르며 구멍 하나가 뻥 뚫렸다. 그리고 구멍 속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위를 살핀 괴인영은 살며시 구멍 속에서 빠져 나왔다. '배포가 큰 자로군. 감히 혈궁의 땅 밑으로 잠입하다니!' 단궁비는 괴인영을 유심히 살폈다. 봉두난발에 흙가루가 뿌옇게 묻어 있는, 의복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였다. 그러나 그의 두 눈 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괴인영은 매우 은밀히 신형을 움직였다. 단궁비도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 * * 규모가 대단히 큰 대전 앞에서 괴인영은 잠시 신형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대전 안으로 스며들었다. 화려한 내실. 그러나 내실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괴인영은 무엇인가를 찾는 듯 여기저기를 뒤적이며 들쑤셨다. 그를 살피며 단궁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혈궁의 심장부까지 거침없이 잠입할 능력이면 범상치 않은 인물인데!' 그때 괴인영은 한쪽에 놓여있는 태사의 손잡이를 약간 돌려보았다. 끼릭-! 마찰음이 일었다. "그럼 그렇지." 그는 이번에는 제대로 손잡이를 돌렸다. 끼릭 소리가 울리는 순간 단궁비는 재빨리 호흡을 멈췄다. 가공할 기도를 지닌 인물이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도제(盜帝)라는 명호가 허명은 아니구려." 담담한 음성과 함께 한 인물이 실내로 들어섰다. 일정한 보폭에 뒷짐을 진 여유있는 모습. 태산의 장중함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마야 나청군이었다. '도제라고?' 단궁비는 마야가 도제라고 부른 괴인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도제, 투도의 제왕이면서 무공 또한 가공지경에 올라 있는 구천의 일 인이다. "마야,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나?" "당연한 말씀을! 십 년 전 만났다고 하나 어찌 그대를 잊을 수 있겠소?" 담담한 그의 음성을 듣자 단궁비의 전신혈관은 팽팽히 긴장되었다. '마야, 이번이 두 번째. 이번에는 지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도제가 비쾌하게 몸을 날렸다.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야는 씨익 웃었다. "잘 가시오. 굳이 배웅하진 않을 테니까!" 말을 마친 마야가 단궁비가 은신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창해일룡 단대협, 그만 모습을 보이는 게 어떤가?" 단궁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공력을 풀었다. 스스스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나타났다. "처음보다 두 배 정도는 강해진 것 같군. 그래, 무슨 일로 혈궁을 찾으셨나?" "내 아내를 몇 달 동안 보호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지. 나는 빚을 지고 사는 성미가 못되어서!" 진심이었다. 마야가 주약란을 취하려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 점은 고맙지만 애초에 마누라를 노린 죄는 전혀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빚을 갚겠다고 염라대왕에게까지 달려 올 정도면 문제는 있지! 그보다 능각표를 죽여주었는데 감사의 인사도 없나?" "후후! 아쉬운 점은 있지만 이왕 죽은 사람을 놓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소." 마야가 형형한 눈으로 단궁비를 바라보았다. "지난 번에는 자네를 놓아 주었네만 오늘은 아쉽게도 자네의 목숨을 거두어야 할 모양이네!" "나도 같은 뜻으로 방문했다면?" "카하하하!" 마야가 우렁차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단궁비가 자신의 동생을 취한 사실을! 그리고 보다 큰 실수, 그건 단궁비가 삼봉쌍령금상지체를 타고 난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비록 천무공의 무공을 익히는 기연은 얻지 못했지만, 단궁비는 이미 내공으로는 극성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이 점이 바로 변수였다. 단궁비의 입가에도 미미한 미소가 스치듯 지났다. "아쉬운 것은 우리가 적이라는 사실이오. 사실 당신 같은 남자는 드문데 말이오." "그렇군. 술 한 잔 정도는 대작할 여유가 있었을 것을!" 한편 도주하다가 다시 돌아와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듣던 도제의 안색이 핼쓱하게 변했다. '그럼 저 청년이 바로 창해일룡 단궁비?' 도제도 단궁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비친 단궁비는 소문보다 몇 배나 뛰어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절륜한 외모와, 마야를 대하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묵직한 태도! '내 평생 이런 제황지상(帝皇之象)은 처음 보는군.' 그때였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놀리는가? 내 궁주를 대신해 네놈의 목숨을 끊어주마!" 일갈을 날리며 단궁비를 쳐오는 인물! 구천 중 한 사람이다. 아울러 마야를 수호하는 호법인 흑건노노였다. 그의 독문절기(獨門絶技)인 마왕신수가 허공을 가득 메우며 단궁비의 삼십육대혈(三十六大穴)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러나 단궁비는 피하지 않았다. 흑건노노의 마왕신수가 단궁비의 삼십육대혈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파파파파팍-! 새파란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럴 수가!' 흑건노노는 손목이 으스러지는 충격을 받으며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금강불괴(金剛不怪)?" 흑건노노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하며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금강불괴라니 무슨 과찬의 말씀을… 아직은 아니오만 마왕신수 정도로는 본인을 어찌할 수 없소." "으음!" 흑건노노는 억눌린 침음성을 토했다. 마야는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흑건노노, 물러서라!"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흑건노노는 이를 뿌드득 갈아붙이며 품 속에서 작은 혈검을 꺼내 들었다. 길이는 두 뼘 정도, 검신에 아수라상(阿修羅像)이 새겨진 핏빛 검이었다. 단혈마비(斷血魔匕)! 금강불괴도 꿰뚫는 마병(魔兵)이다. 흑건노노는 살소를 머금고 발검(拔劍)자세를 취했다. 구천의 일 인이며 공포의 마병을 든 그의 기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단궁비는 뒷짐을 진 채 오불관언의 자세다. "건방진 놈!" 슈파악---! 흑건노노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순간 이미 흑건노노는 검신합일(劍身合一)된 상태로 단궁비의 미간을 쑤시고 들었다. 번쾌검(飜快劍). 흑건노노의 절기다. 번쾌검은 마왕신수와 함께 흑건노노가 감춰두고 있던 비장의 절기였다. 그것이 단궁비를 상대로 최초로 펼쳐진 것이다. "과연 구천중 일 인다운 솜씨." 단궁비는 감탄사를 보냈다. 그만큼 흑건노노의 쾌검은 무섭고도 빨랐다. 금방이라도 단궁비의 미간에 구멍이 뻥 뚫리고 피가 솟구칠 것 같은 순간 단궁비의 신형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흑건노노는 멍히 단궁비를 바라보았다. 피할 수가 없는 거리였다. 피할 수도 없는 절초(絶招)였다. 미간에서 한 치 앞까지 도달한 번쾌검을 피할 수 있는 인물은 그가 아는 한 없었다. 흑건노노의 얼굴 가득 당혹감이 서렸다. 그는 단궁비가 유령미리보를 펼쳐서 일 장 옆으로 이동한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까닭이다. 허공을 찌른 흑건노노의 몸에 한순간 빈틈이 생겼다. 순간, 단궁비의 우수가 번뜩였다. 그의 손목어림에서 막강한 암경(暗勁)이 발출되었다. "음마파천수! 노노, 조심해라." 마야의 경고에 흑건노노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틀었다. 그러나 암경은 영활한 독사의 혓바닥처럼 그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은 듯 모든 방위를 차단했다. 그 빠름이란 가히 전광(電光)이었다. 허공에서 허리를 틀어 피하던 흑건노노의 전신에 단궁비의 수강(手 )이 작렬했다. 빠바박! 흑건노노는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두 눈에서는 불신을 담은 강한 의혹이 확 일었다. 흑건노노의 고개가 외로 꼬였다. 드디어 구천 중 또 하나의 인물이 단궁비에게 목숨을 잃었다. 마야의 검미가 슬쩍 꿈틀거렸다. 그도 단궁비의 빠른 공격은 의외였다. "비로소 겨룰 마음이 생기는군!" 나청군이 한 손을 떨쳐 내었다. "마라혈강기!" 별로 힘들이지 않고 뻗어내는 일장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태산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거력(巨力)이 담겨있었다. 단궁비는 전신을 압박해 드는 엄청난 압력을 느끼며 장력을 마주쳐냈다. "혈마단천강!" 쿠콰콰콰쾅-! 굉량한 폭멸지음에 대전 전체가 들썩거렸다. 쿵쿵!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야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반면, 단궁비는 네 걸음이나 뒤로 밀려나서야 신형을 겨우 가눌 수 있었던 것이다. 전신기혈은 멋대로 들끓어 오르고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에서 솟구쳐 올랐다. '이전보다 세 배는 강해졌다.' 단궁비는 넘어오는 선혈을 꿀꺽 삼켰다. 단 일장의 손속겨룸에서 두 사람의 실력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청군은 웃음까지 띤 여유를 보이는 반면 단궁비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이들을 훔쳐보던 도제는 고개를 저었다. '단궁비가 진다. 실력차가 너무나 확연하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 공력을 극한대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마야 나청군이 홱 돌아선 것이다. "그대를 죽이면 며칠 후 벌어질 개파대전이 너무 쓸쓸할 것 같군! 단궁비, 잘 들어라. 내 휘하의 일급고수는 일만(一萬), 그 가운데 일천(一千)은 너를 잡을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생사는 너에게 달린 것, 개파대전에서 볼 수 있길 빈다." 나청군의 신형이 천천히 사라졌다. * * *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 침묵을 지키는 단궁비를 슬쩍 쳐다보며 도제는 위로의 말을 했다. "비가 온 뒤라야 땅이 더 굳어지는 법이고, 쇠붙이는 수만 번을 불에 달궈 두들겨야 명검이 되는 법이지." "노선배님의 존성대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단궁비는 도제에게 포권을 해보였다. 조금전의 패배는 이미 잊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새로운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것이 단궁비의 강점이었다. 무엇이던 신속하게 판단하고 결단을 내리며 실행에 옮긴다는 점이다. 한 번의 패배는 그에게 약이 될 수 있었다. 단궁비는 자신의 능력이 모자람을 이번 기회에 절실히 느낀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더 나은 무공성취를 이루는 길 뿐이었다. "다 세인들이 만들어낸 허명일세. 소협을 대하니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군." 도제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문제군. 마야의 자신만만한 태도로 보아 밖에는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을 거네." "소생이 앞장서겠습니다." 단궁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대전을 나오자 싸늘한 예기가 그들을 엄습했다. 그러나 적들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허공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때였다. 투웅-! 쌔애애액-! 그들이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리는 순간 화살들이 날아왔다. 촉 끝이 검게 번들거리는 독화살이었다. "천우마전(天羽魔箭)일세, 조심하게." 도제가 대경다급성을 발했다. 일시(一矢)에 대호(大虎) 세 마리를 산적 꿰듯 꿰버린다는 천우마전이다. 단궁비와 도제는 허공에 뜬 상태에서 양손을 내저었다. 콰아아아앙---! 두 사람의 장력이 천우마전을 두들기자 천우마전이 쩍 갈라지며 그 속에서 작은 소궁시(小弓矢)들이 튀어나왔다. 진정한 천우마전은 바로 이 소궁시들이었다. 천우마전은 퉁기던 반탄지력을 받아 속도를 배가시켰다. 촘촘히 허공을 가득 메운 천우마전에 하늘도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단궁비의 신형이 허공 중에서 급속한 회전을 보였다. 이어 그의 입에서 낭랑한 일성이 터져나왔다. "살인흡마벽!" 천하제일의 반탄지기공(反彈之奇功). 단궁비는 전신내력을 모두 끌어올린 뒤 온몸을 풍차처럼 맹렬히 돌렸다. 따다당! 귀청을 따갑게 두들기는 금속성과 함께 천우마전이 날아오던 방향으로 되쏘아졌다. "큭!" "커어억!" 가슴답답한 신음과 함께 전면의 전각 지붕 위에서 십여 명의 인물이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단궁비와 도제는 전각의 지붕을 타넘었다. * * * 처절한 혈전이었다. 단궁비는 거듭 놀라고 있었다. 마야는 그를 살려 준 것이 아니다. 그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자신은 뒤로 빠지고 수하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끔 한 것이다. 달리는 두 사람이나 공격하는 적들이나 모두 생사를 초월한 사투를 벌였다. 지금까지 처치한 혈궁 고수는 이백여 명, 나청군이 말한 숫자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두 사람의 전신에는 어느덧 비오듯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도 두 사람은 전력질주하고 있었다. 내력이 아무리 장강대해(長江大海)와 같은 내가고수(內家高手)라 해도 끊임없이 공격해오는 적들을 상대하다 보면 많은 내력소모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도제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단궁비도 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 "카카카카,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느냐?" 몸서리쳐지는 괴소와 함께 세사람이 단궁비의 앞을 막아섰다. 일견해도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노인들이었다. 헌데 이들 모두는 대두(大頭)였다. 보통사람보다 두 배나 큰 머리통을 어깨 위에 달고 있었던 것이다. "삼두대웅(三頭大雄)!" 도제가 이들을 알아보고 질겁을 했다. 삼두대웅! 백 년 전 흑도무림에서 악명(惡名)을 떨치던 살인귀(殺人鬼)들. "크크크, 아직 우리를 알아보는 기특한 중생이 있었군." 머리칼 하나없는 민대머리다. 오관은 제멋대로 생겨 먹었다. 백 년 만에 무림에 출두한 흥분이 짜릿짜릿한데…! "머리만 큰 것들이 왜 길을 막아?" 음마파천수! 그 벼락이 민대머리에 떨어진 것이다. 퍼벅! 그러나 이게 왠일인가! 절대수공인 음마파천수에 격중당한 일두웅과 이두웅은, 머리를 한 번 쓱! 쓰다듬은 뒤 흉칙하게 얼굴을 구겼다. "젖내 나는 놈이 감히 이 어르신들의 머리통을 후려쳤단 말이지?" "요런 젖비린내 나는 어린놈이!" '도무지 인간들이 아니군! 시간이 없다. 귀색혼으로 승부를 내자!' 스팟! 검신합일(劍身合一)된 단궁비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철두연환공(鐵頭連環功)!" 세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공처럼 튀어 올랐다. 가각! "크아악!" 귀색혼은 세 노마를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양단해버렸다. 도제는 멍한 얼굴로 단궁비를 보았다. 그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 시진 후, 단궁비는 혈궁의 중심부를 막 벗어나고 있었다. "이제 몇 명이죠? "오백(五百) 사십구(四十九)!" 도제의 대답이다. 일천이 이렇게 까마득한 거리일 줄이야! 그때였다. 전속력으로 치달리는 단궁비의 귓전에 전음이 울린 건! "좌측으로 전력 질주하세요!" 염병, 지금도 전력질주하고 있는데 어떻게 더 달리란 말인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단궁비는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수십 장을 더 달리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홍의소녀, 백발적미! 그녀가 선두에 서서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는 자리마다 혈궁의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누구지?" 도제의 말에 단궁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모르오! 내 여자는 여잔데 몇 번째 여자인지!" * * * 휘이이잉! 장락봉의 정상에 부는 바람은 차가웠다. 깎아지른 낭떠러지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는 바람은 뼈를 에일 듯했다. 단궁비는 정상에 서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그녀는 백발적미였다. 아직 단궁비는 그녀가 마야 나청군의 동생인 나설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저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계속 지는구려." "단공자를 구하기 위해 활로를 터준 건 아니에요." 백발적미, 나설아는 차갑게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살얼음이 풀풀 날리는 냉갈이었다. 단궁비는 그러나 싱긋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냉랭하게 변할 때가 오히려 그녀가 가장 유약할 때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단궁비가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안았다. 그런데, 탁! 손을 쳐내는 백발적미! 단궁비는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봐! 정말 화가 난 거야?" 나설아의 눈에서 차가운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당신을 죽이란 명령을 받았어요!" 단궁비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녀의 말을 듣자 사태를 파악한 것이다. "그대도 혈궁 소속인가?" 나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궁비의 눈빛이 침중히 가라앉았다. "마야의 인물이라면 검을 뽑아라." 단궁비의 말에 나설아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질끈 입술을 문 그녀가 홱 돌아서며 일장을 날리려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단궁비의 얼굴, 저 사람에게 어찌 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아… 내가 왜 이럴까? 이 자를 죽여야 되는데… 그래야 가문의 천년대계가 이루어지는데…!' 나설아는 단궁비라는 깊은 늪으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오라비를 생각했다. 평생을 선조의 위업을 잇고자 불철주야 노력해 온 마야 나청군을 생각했다. 와락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원망하지 마세요. 난 마야의 동생 나설아입니다." 쾅! 머리를 치는 충격! 단궁비는 그녀의 공세를 그대로 맨몸으로 받았다. 뼈를 가르는 날카로운 경기는 단궁비의 가슴팍을 여지없이 강타했다. "네가 마야의 동생이라고?" 허공에 붕 떠 날아가면서도 중얼거리는 단궁비의 목소리, 바위에 사정없이 충돌한 단궁비가 피를 폭포처럼 뿜었다. "단상공!" 나설아가 급히 그를 향해 달렸다. 단궁비는 검붉은 선혈을 뭉클뭉클 토하면서도 힘없이 웃었다. "그래! 마야의 동생이면 나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되지. 마음대로 손을 써라!" "그대는 왜?" "왜 손을 쓰지 않느냐? 멍청이, 남자란 적 이외에는 손을 쓰지 않아! 내 여인에게 어찌 손을 쓸 수 있느냐?" 내 여인에게 어찌 손을 쓰겠느냐? 나설아가 복잡한 표정을 떠올렸다. 이렇게 이 사람과 얽힌 운명이 싫다. 이 칙칙한 운명을 벗어버리고 싶다. "미안해요." 나설아의 모습이 일변했다. 흑발이 백발로, 검은 눈썹이 붉은 눈썹으로, 연후 그녀의 손에서 가공할 기류가 뻗어나왔다. "단철신강!" 고오오오---! 가공할 파공음이 일었다. 쾅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단궁비의 몸은 만장단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