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24 왕룽이 이젠 집안이 아무 일없이 편안하리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낮에 그가 밭에서 돌아오니 큰아들이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아버지, 전 서당의 공부를 오늘로 마쳤어요. 성안에 있는 노선생한테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요." 왕룽은 부엌 가마솥에서 더운 물을 퍼내어 수건을 적셔 얼굴을 닦으면서 물었다. "그렇겠군.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니?" 큰아들은 주저하면서 말을 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남방 도시로 가서 대학엘 들어가야 해요." 왕룽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더운 김을 올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에 지쳐 몹시 고달팠기 때문이다. "못난 소리. 그건 안돼. 그런 곳까지 갈 필요는 없어. 이 고장에서는 너만큼 공부한 사람도 드물어." 왕룽은 다시 수건을 물에 적셔서 짰다.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왕룽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 화를 내며 아들을 야단쳤다.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똑똑히 말해."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마음에 걸려서인지 큰아들은 욱해서 말했다. "좋아요. 그래도 난 가요. 누가 밤낮 이런 촌구석에서 어린애처럼 꾸중만 듣고 살아요. 성안에도, 이 마을도 마찬가지니 나는 먼 남방 도시로 가겠어요. 배우기도 하고 구경도 하고 오겠어요." 왕룽은 깜짝 놀라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시원한 은빛 여름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코밑엔 수염이 보송보송 나기 시작했다. 살결은 매끄럽게 빛났다. 긴 소매 속에 감춰진 손은 여자 손처럼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왕룽은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을 살펴보았다. 튼튼하고 흙투성이였다. 허리에서 무릎까지만 오는 푸른 무명 반바지만 입은데다 상반신은 벌거숭이였다. 누가 봐도 그를 이 곱상한 젊은이의 아버지로 보기보다는 하인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왕룽은 키가 후리후리 하기만 한 아들의 모습에 대해 경멸심이 일었다. 그래서 그는 화를 내며 난폭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럼 우선 밭에 가서 몸에 흙칠을 하고 오너라. 그 꼴로는 누구나 계집애인 줄 알겠다. 그리고 자기가 먹을 것쯤은 자기 손으로 벌어 봐." 왕룽은 전에 아들이 글씨를 잘 쓰던 일이라든가 서당의 성적이 좋다든가 하는 일에 자랑스러웠던 일도 잊고, 아들의 연약한 풍체에 울화가 치밀어 올라 맨발로 마루를 구르면서 침을 탁 뱉고 돌아섰다. 아들이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으나 왕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날 밤 왕룽이 렌화의 방에 들어가니 렌화는 침대에 자리를 펴고 누웠고 뚜챈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왕룽이 그녀 곁에 걸터 앉으니 렌화는 지나가는 말같이 입을 열었다. "당신 큰아드님은 매우 고민이 많은 모양이에요. 어디로 멀리 가고 싶어하는 모양입니다." 왕룽은 아직도 아들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격한 어조로 말했다. "임자가 무슨 상관이야. 그 애는 여기에 못 오게 했는데 임자가 어떻게 알아?" 렌화는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에요.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에요. 뚜챈에게서 들었어요." 그러자 곁에 있던 뚜챈이 얼른 말을 받았다. "아드님은 누가 봐도 훌륭한 서방님이 됐어요. 그런데 집안에서 놀기만 해서야 어떻게 하겠어요?" 그제야 왕룽은 조금 마음이 풀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들에 대한 노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안돼, 그놈을 멀리 보내지는 않을 테야. 그런 쓸데 없는 일에 공연한 돈을 쓰고 싶지 않아." 왕룽은 그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렌화는 그가 아직도 불쾌한 기색을 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뚜챈을 내보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 큰아들은 다시 마음을 잡은 것 같았다. 서당에는 가지 않았으나 왕룽은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장남은 벌써 열여덟 살이 되었고 제 어머니를 닮아 튼튼한 육체를 가졌다. 큰아들은 왕룽이 집안에 있을 때는 자기 방에서 온종일 책을 읽었다. 왕룽은 안심이 되어 혼자 생각해 보았다. "남방에 가려던 것은 젊은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탈선이었어. 아직 철이 덜 나서 제 마음도 제가 모를 거야. 앞으로 3년이라고 하지만 돈만 많이 주면 2년도 될 수 있겠고 어쩌면 1년으로 될지도 모른다. 추수를 마치고 겨울 보리 씨나 뿌리고 콩타작을 하고 유씨와 직접 교섭해 보아야 겠다."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아들에 대한 일을 잊어버렸다. 가을 추수가 워낙 바빴던 탓이었다. 메뚜기떼의 피해를 입은 몇 곳을 빼놓고는 여간 풍작이 아니었다. 렌화로 해서 써 버린 것 이상의 소출이었다. 그는 다시 돈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게 생겼다. 때로는 왜 그렇게 계집에게 돈을 헤프게 썼을까 자기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렌화에게 싫증이 난 것도 아니었다. 처음같이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숙모가 언젠가 말한 것처럼 렌화는 보기보다 나이가 들었고 또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왕룽은 그녀를 소유하고 있는 것에 자랑을 느꼈다. 그에겐 아들이 있으니 아이를 낳지 못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지금처럼 호사스런 노리개감으로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렌화는 나이를 먹을수록 아름다와졌다. 전에 그녀에게 결점이 있다고 한다면 작은 새처럼 연약하고 얼굴에 살이 없어서 관골이 드러나보이는 것이었다. 뚜챈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기도 하거니와 한 사나이하고만 지내기 때문에 심신이 편해서 몸에 살이 오르고 얼굴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시원스런 눈맵시나 오목한 입 모습은 살찐 고양이처럼 오동통했다. 이젠 연꽃 봉오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활짝 피어 버린 꽃도 아니었다. 그리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았다. 여자의 인생으로는 한창 때인 것이다. 왕룽의 생활은 다시 평온해졌다. 맏아들도 다시 마음을 잡고 있다는 생각에 그는 극히 만족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혼자서 추수한 밀과 쌀을 얼마쯤 팔까 하고 손가락으로 계산하고 있을 때 오란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해마다 몸이 여위어 얼굴에도 광대뼈가 불거져 나왔고 두 눈은 움푹 꺼져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어쩐 일이냐고 물어도 이렇게 밖에 대답하지 않았다. "뱃속이 타는 것 같아요." 지난 3년 동안 그녀의 배는 임신한 것처럼 불룩해 있었지만 아이는 낳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새벽부터 꾸준히 자기 일을 했다. 왕룽은 오란을 한갓 탁자나 의자, 정원의 나무를 보는 것과 같은 눈으로 보아 왔던 것이다. 머리를 숙이고 있는 소나 식욕이 없는 돼지를 보는 것보다도 더 관심이 없었다. 오란은 혼자서 죽도록 일만 해 왔다. 그녀는 숙모에게도 꼭 해야 할 말만 하고 뚜챈에겐 전혀 말을 건네지 않았다. 어쩌다 렌화가 안뜰까지 나오는 일이 있으면 오란은 그만 자기 방에 틀어박혀 누가 렌화가 돌아갔다고 알려 줄 때까지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부엌일을 하거나 겨울날에도 두꺼운 얼음을 깨고 못가에서 빨래를 하곤 했다. 그래도 왕룽은 '살기가 이만하니 식모를 두거나 종을 데리고 일하는 게 어떨까?' 하고 아내를 걱정하는 법이 없었다. 왕룽은 아내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신은 머슴을 들이면서도 소와 말을 먹이거나 여름철에 냇물이 차면 집오리와 거위를 기르기 위해서까지 일꾼을 사들였지만 아내에겐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날 밤도 왕룽은 가운뎃방의 촛대에 불을 켜 놓고 혼자 앉았는데 아내가 들어와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요." 왕룽은 깜짝 놀라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 말해 보구려." 촛불이 그녀의 얼굴 그림자를 뚜렷이 그렸다. 그녀의 얼굴엔 벌써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곁을 멀리한 지 몇 해나 되나 하고 왕룽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오란은 윤기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아이가 자꾸 안채에 들어가요. 당신이 나가고 없으면 곧바로요." 처음 왕룽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상반신을 내밀며 말했다. "뭐라고?" 오란은 묵묵히 아들의 방을 가리키면서 두껍고 마른 입술로 뒤채로 통하는 입구를 가리켰다. 그러나 왕룽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왕룽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임자는 지금 꿈꾸고 있는 게 아니오?" 그러나 오란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매우 거북한 듯이 말했다. "한번 불쑥 집에 들어와 보면 알 거 아녜요." 그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방에라도 좋으니까 아무튼 멀리 보냅시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식어 버린 찻물을 쏟아 버리고 새로 뜨거운 찻물을 따르고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가 버렸다. 왕룽은 넋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왕룽은 아내가 질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매일 자기 방에서 책만 읽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웃었다. 그리고 여자 소견이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를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날 밤 그는 렌화의 방으로 갔다. 렌화의 곁에 누우려고 침대에 올라가니 렌화는 투정을 부리며 그를 밀어붙였다. "더워요. 더욱이 당신한테선 땀 냄새가 나요. 내 곁에 오실 때는 몸을 좀 씻고 와요." 렌화는 침대에서 일어나 얼굴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이 쓸어 올렸다. 왕룽이 끌어안으려고 해도 어깨를 움추리며 피하는 것이었다. 왕룽은 멋없이 혼자 누워서 요 며칠 밤새 렌화가 쾌히 그의 요구를 받아 주지 않는 것을 생각했다. 지금껏 그는 렌화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거나 또는 늦더위에 몸이 괴로와서 그런 것이라고만 여겨왔으나 오늘 밤은 오란의 말이 생각나서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럼 혼자 자. 같이 자다가 목이라도 잘리면 큰일이니까." 왕룽은 렌화의 방을 뛰쳐나와 가운뎃방으로 가서 의자 두 개를 나란히 끌어다 놓고 그 위에 누웠다. 그러나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 담을 끼고는 대나무 숲을 거닐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흥분한 그의 몸을 스친다. 가을이 가까와 오는 모양이다. 그는 언젠가 렌화가 자기 아들이 남방으로 가고 싶다고 말을 했다고 하던 것을 생각해 냈다. 렌롸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또 요즘에는 아들이 남방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고 집안에 얌전히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분연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옳아, 내 눈으로 확인해야지." 달이 기울었다. 망망한 들판 지평선 위로 황금빛 태양이 번쩍였다. 그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들로 나가서 일꾼들의 일을 둘러보았다. 가을 추수 때나 봄 씨앗을 뿌릴 때는 언제나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밭을 돌아보고 집에 돌아온 그는 온 식구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해자 가의 논을 보고 오겠어. 좀 늦어질 거야." 그리고 그는 성내를 향해 걸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의 사당이 있는 곳까지 오자 길가에 있는 언덕의 풀밭에 앉아 쉬면서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었다. 사당의 지신님이 마주보였다. 그 지신님이 그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으나 무섭지는 않았다. 젊을 때는 존경하고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집안도 왕성하고 돈도 많았으므로 지신을 섬길 필요도 없고 더더구나 기도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반복해 가며 생각에 잠겼다. "집에 돌아가 볼까." 그때 문득 간밤에 렌화가 그를 떠밀어 내던 생각을 하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년은 그대로 찻집에 있었더라면 신세를 망쳤을 거다. 우리집에 와서 있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입고 편히 지낼 수 있는 거야......" 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다른 길로 집으로 돌아가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안뜰로 들어가는 휘장 뒤에 숨어서 귀를 기울였다. 중얼거리는 듯한 남자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큰아들의 목소리였다. 왕룽은 재산이 늘면서부터는 옛날처럼 가난한 촌뜨기가 아니고 성안에 가서도 뻐기고 거리낌없이 할 말을 해 버렸으나 오늘처럼 분노를 못 이겨 치를 떤 일은 없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빼앗긴 데 대한 분노였다. 더구나 그 애인을 빼앗아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애지중지 사랑하는 큰아들이라고 생각했을 때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불쾌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밖으로 나오자 대나무 숲속으로 가서 호리호리한 대나뭇가지 하나를 골라 잘 다듬었다. 그러고는 발소리를 죽여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느닷없이 휘장을 걷어 젖혔다. 아들은 마당에 서서 연못 곁에 놓아 둔 조그마한 걸상에 앉아 있는 렌화를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렌화는 연두 빛깔의 비단옷을 잘 차려 입고 있었다. 왕룽은 아직 아침부터 이렇게 몸차림을 하고 있는 렌화를 본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무엇인가를 다정스레 이야기하고 있었다. 렌화는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며 곁눈질로 청년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왕룽이 곁에 와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왕룽은 그 자리에 선 채 그 모양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입술은 말려 올라가서 이빨이 드러나고 손에는 대나무 회초리를 불끈 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때 뚜챈이 나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뚜챈은 왕룽의 모양을 보자 기절하듯 비명을 올렸다. 두 사람은 그제야 왕룽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왕룽은 아들에게 달려들어 후려갈겼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키가 크지만 농사일에 단련된 탄탄하고 건강한 육체를 가진 아버지를 당해 내지는 못했다. 왕룽은 아들 얼굴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계속 마구잡이로 때려 주었다. 렌화가 비명을 올리며 팔에 매달렸지만 그는 난폭하게 밀어젖혔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가 악을 쓰면서 달라붙자 이번에는 렌화도 사정 없이 때려서 떨어뜨려 놓고는 다시 아들을 때렸다. 마침내 아들은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왕룽은 그제야 때리던 손을 멈추었다. 입술 사이로 피리 소리가 새어 나올 만큼 숨을 헐떡였다. 진땀이 비오듯 전신에 흘러내리고 병든 사람처럼 지쳐 버린 그는 회초리를 집어 던지고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네 방에 가서, 내가 나오랄 때까지 절대로 나오지 마라. 나오면 그 즉시 죽여 버릴테다." 아들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가 버렸다. 왕룽은 렌화가 걸터앉았던 걸상에 앉아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감은 채 숨을 헐떡였다.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는 귀찮은 듯이 일어나서 렌화의 방으로 들어갔다. 렌화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왕룽은 곁으로 가서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그녀는 누운 채 더욱 소리 높여 울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맞은 자리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왕룽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직 갈보 버릇을 못 버렸구나. 내 자식에게까지 몸을 팔려는 거냐?" 그러나 렌화를 소리 높여 울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 아들이 심심해서 놀러온 거예요. 뚜챈에게 물어 보세요. 당신이 본 것보다 더 가까이 내 곁에 온 적이 있나를......" 그녀는 무서운 듯이 애처롭게 왕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아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대며 슬프게 말했다. "당신이 당신의 렌화를 어떻게 했는지 좀 보세요. 이 세상에 남자라곤 오직 당신 뿐이예요. 당신 아들이 아니라구요. 그 뿐이에요...... 내가 어떻게 했단 말에요."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솟아 올랐다. 그녀는 못 견딜 지경인 모양이었다. 이 여자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다. 미워해야 할 이 마당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귀엽고 앙증맞았다. 왕룽은 더 이상 아들과 렌화를 연관지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알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모르는 편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짓고 그곳을 나왔다. 아들의 방 앞을 지날 때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네 짐을 챙겨 둬라, 내일 안으로 남방으로 가서 너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내일 다시 부를 때까지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가운뎃방에서 오란은 옷을 꿰매고 있었다. 왕룽은 그 앞을 지나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뜰에서 그렇게 야단법석이 났었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왕룽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서 들로 갔다. 한낮의 태양이 하늘 높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온종일 들일을 한 것처럼 지쳐 있었다.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