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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3권 제3장 혈문(血門)을 치다
①
드넓다는 표현이 딱 맞는 의사청이다.
그런데 지붕을 받친 수십 개의 석주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
다. 탁자도, 의자도 없이 휑한 의사청.
있는 것이라고는 전면의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검은 휘장뿐이었다.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보이지 않을 두터운 휘장.
이곳이 바로 강북, 아니 이제 천하 마도무림의 패자(覇者)인 마륭
방의 의사청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삭막했다. 허나
그 이유를 알고 보면 실로 간단했다.
한 노인.
칠십 가량의 노인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노인은 의사청 입구에서부터 무릎걸음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하면 이 노인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그는 강호에 마륭방주로 알려진 수라신마존(修羅神魔尊)
악송(岳松)이었다.
칠대마공 중 하나인 수라도법(修羅刀法)으로 대남 강북에 그 악명
을 떨친 그가 무릎걸음이라니!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말이다.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더욱 경악스런 일은 검은 휘장을 십 장 거리에 두고 악송이 밟아
죽인 바퀴벌레처럼 납짝 엎드리는 것이 아닌가.
이 자세는 소위 오체복지(五體伏地)라는 것으로 머리와 두 팔, 그
리고 두 다리를 바닥에 바짝 붙이는 것이다.
황제에게나 할 수 있는 자세로 악송은 입을 열었다.
"오행마궁주가 도착했습니다, 마후님."
마후(魔后)라니? 일전에 화삼객 과두성이 단호삼을 보는 순간 떠
올렸던 그 이름이 아닌가.
그렇다면 강호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악송이 마륭방의 주인이 아
니라는 뜻!
악송의 말이 끝나자마자,
"들라 해라."
검은 휘장 뒤에서 흘러 나온 음성은 뜻밖에도 농익은 여인의 음성
이었다.
"예."
악송은 지체없이 밖을 향해 전음을 보냈고, 잠시 후 보는 이로 하
여금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다섯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척 단구에 민대머리, 그리고 얼굴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주먹코
에 상대적으로 실제보다 훨씬 적게 보이는 깨알같은 눈을 가진 그
들은 찐빵을 찍은 듯 똑같이 생겨 먹은 오순 가량의 쌍둥이 노인
들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고 웃다가 죽사발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도 모
자라 사지(四肢)가 찢겨 죽은 이가 부지기수라는 점을 안다면 그
누구도 웃지 못할 것이다.
너무 똑같아 옷이라도 달리 입어 형, 아우를 정한 듯 홍청백황녹
(紅靑白黃綠)을 입은 이들은 바로 묘강에서 제황(帝皇)처럼 군림
하는 오행마궁의 궁주인 오행룡왕(五行龍王)이다.
"!"
의사청에 들어선 그들은 악송이 오체복지를 하고 있자 잠시 멈칫,
서로 눈치를 보다가 맏형인 화룡왕(火龍王) 군일(郡一)이 고갯짓
을 하자 일제히 용감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척! 척! 척!
누가 일란성 쌍둥이라 안할까 봐 보폭과 왼발 먼저, 다음에 오른
발 순으로 똑같이 움직였다.
그 소리에 놀란 악송은 나직하나 당혹감이 서린 음성으로 다급히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누누이 일렀거늘. 어서 무릎을 꿇고 오지 못하겠소!"
그러나 어느 집 개가 짖는가 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온 오행룡
왕은 악송 옆에서 걸음을 멈춘 채 검은 휘장 안을 꿰뚫어 보려고
눈알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십 장 밖에서 개미 오줌 누는 것도 볼 수 있다는 천리안
(千里眼)으로도 휘장 안을 볼 수가 없자 적이 실망한 군일이 입을
열었다.
"안에 계시는 마후라는 분. 초대를 했으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예
의가 아니오?"
순간 싸늘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어린것들이 너무 버릇이 없군."
"뭣이! 어린것!"
듬성한 눈썹이 동시에 치켜 올라갔다. 감정도 서로 통하는 모양이
었다.
"이렇게 황당할 때가! 음성을 들어보니 본 왕들 보다 훨씬 나이도
어린 계집이 감히……."
"닥쳐!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말을 하는 건가!?"
악송이 여전히 오체복지한 상태로 말을 자르자, 분기가 머리꼭대
기까지 솟구친 군일은 돌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정중히 초대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본거지라 이
거지."
똥개도 자기 동네에서는 반쯤 이기고 든다는 말을 빗대는 말이었
다.
바로 그때였다.
소리도 없다. 형체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검은 휘장이 움
직이지 않았다.
한데 무릎팍 음릉천혈(陰陵泉穴)을 향해 마치 바늘이 쏘아져 오는
듯한 칼날 같은 경풍이 날아드는 것을 느낀 오행룡왕은 대경실색,
번개같이 몸을 허공으로 뽑아 올렸다. 아니 그러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이었다.
②
뜨끔!
음릉천혈이 뜨끔하며 두 무릎이 쩌르르 마비되었다. '꽈당!' 본의
아니게 무릎을 꿇게 된 오행룡왕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격산타우(格山打牛)에 이은 투골무풍지(投骨無風指)!!"
"생긴 것답지 않게 견식이 좀 있군."
비웃음이 담긴 말이다.
게다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생김새를 비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
지를 찢어 죽여야 하는 것이다. 설사 황제라 해도.
허나 오행룡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산(山)을 때려 그 너머에 있는 소를 죽인다는 격산타우의 내가수
법은 자신들도 할 수 있다. 허나 십 장이나 되는 거리에서 완벽하
게 시전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현존하는 일곱 마공 중 하나인
투골무풍지로 동시에, 그것도 열 가닥을 보낼 능력이 그들에게는
더더욱 없었다.
생김새는 그래도 그들은 시세를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한 사
람이 아니었다.
군일은 이를 악물었다.
"무례를……."
오행룡왕은 일제히 오체복지를 하며 부르짖었다.
"용서하십시오!"
"이제야 제대로 된 자세가 나왔어."
적이 만족한 듯한 말씨였다. 그러나 음색은 여전히 변함없이 차갑
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
"간단하게 말하겠다. 본 마후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느냐?"
부르르.
일순 오행룡왕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괜히 왔다 싶었
다. 그러나 그런 말을 했다가는 당장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를 판
국이다.
군일이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한 가지만 여쭈겠습니다."
"본 마후가 누군지 알고 싶다는 것이냐?"
내심을 꿰뚫린 군일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대답은 즉시에 들려오지 않았다. 말해도 좋은가 하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다가,
휘익!
검은 휘장이 살짝 들춰지며 하나의 물건이 허공에 둥실 떠올라 느
릿하게 오행룡왕에게로 날아들었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금패(金
牌)였다.
금패는 그들 면전에 와서는 바닥에 자석이 달린 것처럼 스르르 떨
어져 내렸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오행룡왕은 자신들의 눈앞에 불
쑥 나타난 금패를 보는 순간 경악으로 출렁이는 가운데 신음을 흘
렸다.
"이, 이것은……!"
"천마성패(天魔聖牌)……."
천마성패!
칠십 년 전의 천마교주를 상징하는 신물(信物)이었다.
오행룡왕이 비어 있는 화산파를 치기 위해 의사청을 떠난 뒤 수라
신마존 악송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귀혈각주 과두성이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마후는 즉각 물었다.
"누가 죽였느냐?"
"녹산영웅문주인 팽후라고……."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단호삼이라는 아이가 만든 문파로구나!"
순간 악송의 몸이 움찔했다.
마후의 음색이 처음으로 변해 있었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단호삼이
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어떻게
아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시를 기다리
는 것뿐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지금은 무림맹의 일이 더 시급하다. 그 아이가 본방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 한… 후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이라는 말씨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지시가 내려진 것이
다.
"봉명! 그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참! 백혈녹대는 쓸만 하더냐?"
뒷걸음으로 기다시피 물러나던 악송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벽인각 수준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약간 뜻밖인 듯 말끝을 흐리던 마후는 생각한 바가 있었는지 즉시
지시를 내렸다.
"철마각을 불러들여 백혈녹대와 함께 곤륜, 청성파를 치도록 하
라!"
③
남(南)으로 오백 리에 감숙성(甘肅省)을 두고, 천리 길의 서편에
는 청해(靑海)를 두고, 동남(東南) 쪽 천이백 리에는 서안(西安)
을 두고 있는 난주(蘭州).
서역(西域)을 잇는 옥문관(玉門關)에 가장 근접한 대도(大都)인
난주는 언제나 향기로운 난초 향으로 가득한 곳이다. 천하의 난
(蘭) 중 오 할이 바로 이곳에서 생산된다 하니 그 양이 얼마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옥문관을 통해 들어오는 서역의 문물(文物)들이 모두 난
주에서 분류되어 천하 각지로 팔려나가는 상업 도시라 생김새가
다른 인종들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었다.
난향(蘭香)과 서역, 그리고 중원의 문물이 어울러진 난주.
그러나 이곳 난주에 옥의 티가 하나 있었으니, 낭인 시장이 있는
서안과 달리 인신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신매매는 곧 돈!
어디서나 그렇듯이 더러운 돈에는 더러운 놈들이 꼬여들기 마련이
다.
혈문(血門)!
이제 천하제일의 마방으로 자리잡은 마륭방 다음가는 혈문. 서역
인들과 합작하여 만든 이 혈문의 만행(蠻行)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 정도였다.
허나 알면 무엇할 것인가.
날벼락을 내려야 할 하늘은 무심했고, 지진(地震)이라도 일으켜
말살시켜야 할 땅은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양민(良民)들 뿐이었다.
유월 초닷새.
혈문에서는 대대적인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각종 타악기와 술, 그리고 매미날개처럼 얇은 잠의(蠶衣)를 입고
가무(歌舞)를 추는 수십 명의 여인들.
하늘거리는 옷 사이로 은은히 드러나는 몸매는 풍만하다 못해 터
질 듯 팽창했다. 불알 달린 사내라면 군침이 절로 돌 정도로 아름
다운 여인들은 무희(舞姬)가 아니라, 절반은 색목인(色目人)이며,
절반은 중원인인 바로 어제 사들인 노예들이었다.
색목여인들이 두 팔을 높이 들고 요란하게 엉덩이를 흔들면 사내
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저……."
"크! 죽인다, 죽여!"
언뜻 보아도 이백 명 정도의 사내들은 한결같이 갑옷을 입고 있었
다. 일견에 청동(靑銅)으로 만든 듯 누런 빛이 감도는 갑옷이었
다.
그리고 단상 위.
단상에 앉아 좌우로 여인들을 끼고 있는 세 명의 사내들. 사내라
기보다는 한 중년인과 두 노인은 손이 보이지 않게 여인의 몸 구
석구석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있었다.
가운데 앉은 사십 중반의 중년인은 나이답지 않게 백발(白髮)에,
자줏빛 꽃무늬가 박힌 장포를 입고 제법 의젓한 모습으로 위엄마
저 깃들어 있는 혈문주(血門主) 백발혈마군(白髮血魔君) 낭리장천
(浪理長天)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눈부신 은갑(銀甲)을 입고 여인들을 주물럭거리는
육십 정도의 우람한 체구의 고슴도치 수염이 난 노인은 마륭방 철
마각주(鐵馬閣主)인 무정풍뢰창(無情風雷槍) 여표(呂彪)였으며,
문사 차림에 염소 수염을 기른 노인은 이곳 난주의 현관인 종부구
(鐘富救)였다.
낭리장천은 침을 뚝뚝 떨어뜨리는 종부구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어떻소, 종현관?"
느닷없이 옆구리를 찔린 종부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깡마른 옆
구리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구경을 시켜주는 사
람에게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있는가.
그저 맹한 웃음을 흘리며 되물을 수밖에.
"뭘 말이오?"
낭리장천은 턱짓으로 춤을 추고 있는 여인들을 가리키며 의미심장
하게 웃었다.
"이번에 온 아이들은 상품(上品) 중에서도 최상품인데. 원하신다
면 몇몇을 관기(官妓)로 드릴 용의가 있다는 말이외다."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그게 진정이시오?"
벼락같은 음성으로 묻던 종부구는 돌연 힘없이 중얼거렸다.
"할망구가 지랄할 텐데."
그러면서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짓자 낭리장천은 내심 비웃음을 던
지면서도 짐짓 웃는 얼굴로 넌지시 말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겠소이까? 다 방법이 있지요."
"!"
"이참에 아예 민가(民家)를 하나 얻어 새살림을 차리시도록 해드
리지요."
"오!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구려!"
탄성을 발하는 종부구의 눈에 희색이 만연했다. 그는 너무 감개가
무량(無量)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낭리장천의 손을 덥
석 잡으며,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소이다. 허허허, 이제 마음놓고 사업을
확장하시지요. 관부의 일은 알아서 처리하리다."
낭리장천은 손을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감사하외다. 종현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자 두 사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여표가
헛기침을 했다.
"험험!"
그 뜻은 분명했다.
나는 없어? 라는.
웃음을 멈춘 낭리장천은 습관인 듯 팔꿈치로 여표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윽! 갑옷을 입은 줄도 모르고. 빌어먹을 늙은이. 갑옷을 입고 오
입질을 하다니.'
오만상을 쓰던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각주도 몇 데려가시지요?"
순간 작전이 성공한 여표의 눈꼬리가 옆으로 찢어졌다. 그는 고슴
도치 수염을 쓰다듬으며 짐짓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음흉한 늙은이 아니긴 뭐가 아냐? 귀신 눈은 속여도 이 어르신의
눈은 못 속여.'
늙은 너구리와 젊은 여우였다.
내심 하얀 비웃음을 던지면서도 낭리장천은 생김새답게 호방하게
말했다.
"이제 한 배를 탄 운명이 아니외까? 하니, 괘념치 마시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시지요."
"글쎄올시다. 그래도 될는지……?"
늙은이는 이래서 좀 성가시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고 의사
표현을 좀 명확하게 하면 그 결과가 달라지는가. 그저 구렁이 담
넘듯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도에 낭리장천은 구역질이 났으나 참
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 때문에 내 모양이 말이 아니군.'
④
기실 무림맹이 하남의 녹림칠십이채를 무너뜨렸다는 소식을 접한
낭리장천은 살아남기 위해 마륭방에 손을 뻗쳤다. 가만히 있으면
마륭방이 먼저 손을 잡으려 할 것이나, 마륭방보다 더 인심(人心)
을 잃은 터라 무림맹이 혈문을 먼저 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데 뜻밖으로 마륭방에서 삼각 중 제일 강하다는 철마각을 보내
혈문에 상주시켰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전서구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았다면서 여표가 떠나겠다고 하자 겁이 더럭 생긴 낭리
장천은 환송연이나 하고 가라며 지금 연회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여표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는 낭리장천은 아부성에 가까운 웃음
을 머금고 말했다.
"우정의 표시라고 생각하시고 사양하시지 마십시오."
"정 그러시다면……."
여표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게 받도록 하지요. 대신 약속하건대, 노부가 본방으로 돌아
가는 즉시 방주님께 말씀드려 빠른 시일 내로 다시 오도록 하겠소
이다."
쥐약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낭리장천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말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야… 감읍할 뿐이지요."
낭리장천은 돌연 음성을 낮춰 귀엣말로 속삭였다.
"저 아이들 말고 또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
시오. 아시다시피 본 문주가 가진 것이라고는 돈뿐이지 않습니
까?"
참으로 눈물겨운 노력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남의 생명이나 인생을 제 마음대로 갖고 놀면서도 오래 살고 싶은
지…….
그러나 세상일이란 왕왕 엉뚱한 데서 터지는 법이다. 지금 낭리장
천이 간도 쓸개도 빼주고 있을 때, 혈문의 거대한 대문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혈문의 수위무사인 장칠이 손을 들어 벌판 끝을 가리켰다. "
어! 저게 뭐지?"
"뭐 말이야?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 말에 시력이 안 좋은 이삼은 눈썹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 쳐다
보았다. 허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뿌옇게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등신아! 저것도 안 보여?"
말을 하면서 머리를 꽁! 쥐어박자, 이삼은 피가 곤두서는 기분이
었다.
"안 보이니까 안 보인다 하지! 야, 임마! 너도 나처럼 나이 먹어
봐라! 제대로 보이는지?"
"지랄하쇼? 등신 같은 게. 겨우 한 살 많으면서 뻑하면 나이 타령
이야, 타령이!"
이삼의 눈썹이 솟구쳤다.
"자꾸 등신, 등신 할래? 그러잖아도 눈 때문에 열 받는데. 그냥
꽉! 한 번만 더 그런 소릴 하면 네 배때기에 창을 쑤셔버릴 거
야!"
그때다.
피융!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탁!' 하는 소리와 동시에 손
목이 찌르르 저려와 이삼은 그만 들고 있던 창을 놓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적이다!!"
"편지다!!"
손바닥 두 개 합친 것 같은 작은 종이였다.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좋았던 기분을 싹 가시게 할 줄은 진정 몰랐다.
"미친놈들!"
"대체 어떤 놈이오? 무림맹이오?"
긴장된 눈으로 일어서 있는 낭리장천을 쳐다보던 여표는 참기 어
려운 듯 다급히 물었다.
"나참… 살다보니 별 떼거지 같은 놈들이……."
어이없어하던 낭리장천은 불쑥 종이를 내밀었다.
"보시겠소."
작은 종이에는 간단한 글이 적혀 있었다.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러 왔노라! 그러나 항복하면 치죄(治罪)
하지 않겠노라!
녹산영웅문 일동.>
긴장되어 있던 여표의 눈이 서서히 풀리면서 웃음기가 감돌았다.
"고마운 놈들이야. 노부에게 공(功)을 세울 기회를 주다니. 허허
허, 그 성의가 괘씸해서 편하게 죽여주지."
화삼객 과두성이 당했다는 전문(傳文)을 받은 터였다.
하지만 자신은 과두성이 아니다. 그리고 귀혈각 정도는 발가락 사
이에 낀 때였다.
'더럽게 재수 없는 놈들이군. 하루만 늦게 왔어도. 아니 이따위
짓을 하지 않고 밤에 쳐들어 왔어도 좋을 것을. 이렇게 멍청한 놈
들은 죽어도 싸지!'
내심 하얗게 웃으며 몸을 일으킨 여표는 낭리장천을 향해 호기롭
게 말했다.
"너무 걱정 마시오. 노부가 당장 개 잡듯이 때려잡아 드리리다."
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인간이었
다. 산 넘고, 물 건너면서도 목욕도 한 번 못한 채 여기까지 오는
데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한다는 짓이라고는.
'그런다고 놈들이 여기 있소 하며 항복할 줄 알고? 제기랄! 이럴
때는 그저 야밤의 기습 공격이 제일인데 말씀이야. 우리가 무슨
정도 문파라고.'
옆얼굴이 따가워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단호삼은 고개를
돌려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싸움에도 정당성이 있는 법입니다. 너무 욕하지 마시오."
'흥이다!'
팽후는 불퉁하게 대꾸했다.
"누가 뭐래?"
그때다.
혈문의 대문이 활짝 열리며 이백 가량의 기마대(騎馬隊)가 나타나
는 것이었다.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에 투구에다 장창(長槍), 그
리고 말조차도 눈과 무릎 아래만 내놓고 등장한 기마대를 보는 순
간 팽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저것들이 어떻게 혈문에……."
단호삼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한눈에도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대문을 나서는 순간 철마각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을 내며 달
리기 시작했다. 뽀얗게 피어 오르는 흙먼지는 그들의 모습을 감추
고도 남았다.
수십 마장이나 되는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밟고 있는 땅
이 들썩거릴 정도로 빠르며 난폭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무조건 죽일 심산이군.'
단호삼은 지그시 노려보며 물었다.
"저들이 누구요?"
대답은 환사가 했다.
"마륭방의 철마각입니다."
환사는 극히 공손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주군으로 모시기로 작
정했으나 거의 같은 수준으로 변했다. 허나 호법과 태상호법이라
는 지위상의 차이를 제쳐 두고라도 단호삼은 여전히 자신의 주군
이었다.
"철마각?"
"그렇습니다. 저들의 창법(槍法)도 놀랍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바
로 웬만한 도검(刀劍)으로는 갑옷에 흠집조차 낼 수가 없다는 사
실입니다. 그래서 강북에서는 죽음의 바람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단호삼을 위해 보충 설명을 하던 환사도 긴장되는지 굳은 얼굴로
마무리를 했다.
"웬만한 방파는 단 한 시진만에 쓸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놈들이지
요. 특히 맨 앞에 은갑을 입은 철마각주인 무정풍뢰창 여표의 삼
십육풍뢰창법(三十六風雷槍法)은 가히 적수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
지요."
단호삼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철마각이 혈문에 있다는 것도 예상을 벗어난 것이지만 다짜고짜
죽이고 보자는 잔악성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인간의 목숨이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두두두두……!
그러는 동안 거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땅이 진동하자 녹산영웅문도들이 당혹감을 금
치 못하고 동요하는 것이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꺾인 것이다.
단호삼은 이를 악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철마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철갑 사이로 번들
거리는 눈빛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싫든 좋든 피를 흘
려야 한다. 그게 누구의 피든지 간에.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당한다. 그렇다면…….'
단호삼은 백혼검을 스르르 빼어 들면서 입을 열었다.
"뭉쳐 있으면 더 위험하오. 하니 학익진(鶴翼陣)을 펼칠 수 없다
면 옆으로 퍼지도록 하시오. 그리고 저들의 말을 먼저 쓰러뜨려야
할 것이오."
"……!"
"방법은 무릎 밑을 치는 게 좋겠지."
낮게 중얼거린 단호삼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용수철이 퉁기듯
앞으로 나아가며 소리쳤다.
"내가 놈들의 대오(隊伍)를 먼저 흩트려 놓겠소!"
⑥
무질서하게 서 있던 녹산영웅문의 대열이 바뀌고 있었다.
"꼴에 학익진 흉내를 내려 했군."
피식 웃던 무정풍뢰창 여표의 눈에 언뜻 놀람이 스쳤다. 처음 놈
을 발견했을 때는 죽지 못해 안달하는 놈이었다. 한데 불과 한 호
흡만에 거리를 삼십 장으로 단축시키지 않는가.
땅을 스치듯 날아드는 초상비 경공에 번쩍거리는 검(劍) 또한 예
사롭지 않았다.
'저놈이 단호삼이군! 대단해! 소문보다 훨씬 강한걸!'
여표가 덩치와 기세로 단호삼임을 짐작할 때다.
"저희가 맡겠습니다!"
우렁찬 음성과 동시에 두 필의 말이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마륭방에서 철기쌍창(鐵氣雙槍)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도 아니면서 어찌나 마음이 잘 맞는지 여
표 자신도 백 초 이내에는 이들을 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
게 만들 정도로 창법의 달인이었다.
'놈을 상대하기에는 철기쌍창이 과분해.'
그렇게 판단한 여표는 고개를 돌리며 쩌렁쩌렁한 사자후를 토했
다.
"대오를 수평진(水平陣)으로 바꾸어라! 간격은 삼 장이다!"
과연 여표였다.
지금처럼 오열종대(五列縱隊)로 전진하면 퍼진 적들을 섬멸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해서 넓게 포진하려는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질주하는 기세 그대로 일사불란하게 수
평진을 형성하는 수하들을 보며 그가 몹시 흡족해 할 때였다.
두두두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벌써 끝난 모양이군. 이거 실망인걸. 한가락하는 놈인 줄 알았는
데.'
적이 실망하며 고개를 돌리던 여표의 눈이 퉁방울 마냥 커졌다.
"!"
마상의 인물이 철기쌍창이 아니라 단호삼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는 순간,
"차압!"
단호삼은 기압성을 터뜨리며 마상에서 그대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 장까지 솟구친 그는 운룡대구식 신법 중 와선신법(渦線身法)으
로 몸을 비틀어 급격히 몸을 회전시키며 번개같이 여표에게로 날
아들었다.
피피핑!
얼마나 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던지 귀청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한
자루 검만이 쏘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생각지도 않은 상황이라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재빨리 정신을 가다
듬은 여표는,
"제법이군!"
냉랭한 음성을 토하고 수중에 들린 장창을 벼락같은 기세로 뻗으
며 빙글 돌렸다.
차차창!
창의 끝과 백혼검의 검극이 부딪히며 싸늘한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여표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해야만 했다. 장창을 통해 전
해져 오는 이 막강한 압력! 가공했다!
"오옷!"
헛바람을 들이킨 그는 도저히 말 위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신형
을 뒤로 날려 압력을 해소시킨 찰나지간,
번쩍!
한 줄기 섬광이 동공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표의 말등을 박차며 재차 뛰어오른 단호삼이 쏘아낸 검기였다.
숨 돌릴 틈도 없는 연속적인 공격!
여표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했다.
처음 허를 찔릴 때도 '너쯤이야' 했다. 그런 것이 막상 손을 쓰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기세도 기세거니와 저 어린 나이에 단호삼이
지닌 내공이라는 게 실로 엄청났던 것이다.
어미 뱃속에서부터 내공부를 익혀도 저럴 수는 없었다.
위기의 순간, 여표는 백전노장답게 천근추로 땅에 떨어져 내리며
장창을 수십 번도 더 찌르고 찔렀다.
파파팟!
눈부신 빠름이었다.
창끝에서 뿌연 그림자가 생기며 천지사방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마침내 적수가 없다는 삼십육풍뢰창법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적장(敵將)인 여표를 죽임으로 녹산영웅문도들의 사
기를 앙양시키기로 작심했던 단호삼은 허공에 뜬 상태로 빙글 몸
을 회전시킴과 동시에 빗발치는 장창의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면서
변화와 웅혼한 기상이 서려 있는 만천검결의 만천수류를 펼쳤다.
⑦
츠츠츠… 파팟!
폭포수 같은 검기가 줄줄이 쏟아졌다.
썩둑!
백련정강으로 만든 장창의 중간 부분이 소리 없이 잘려져 나갔다.
"어헉!"
경악성을 터뜨리는 여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꽈릉!
단호삼의 왼손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싶은 순간에 벽력음을 동반한
장력이 짓쳐들고 있었다.
놀라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여표는 손에 들린, 이제는 창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창을 던졌
다. 막강한 내력이 실린 창은 '팽!' 하며 쏜살같이 단호삼에게로
날아들었다.
"흥! 어림없다!"
여표의 발악에 차가운 코웃음을 날린 단호삼은 백혼검의 검신(劍
身)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창을 막았다.
까앙!
귀청을 찢는 소성과 더불어 잘려나간 창은 허공으로 되퉁겨 까마
득히 솟구쳐 오르고, 그 사이 단호삼의 염수권이 막 여표의 몸에
작렬하려 할 때였다.
피융!
뒤와 양옆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살기가 느껴졌다. 볼
것 없이 앞으로 달려가던 철마각의 철갑인 몇몇이 되돌아온 것이
다.
여표를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단호삼 또한 꼬치 신세로 변할 것
이 분명했다. 순간 그는 폭풍처럼 휘몰아쳐 가던 염수권을 잽싸게
회수함과 동시에 여기 오는 동안 환사에게서 배운 잠영무흔보(潛
影無痕步)로 번개같이 쏘아져 오는 장창을 피했다. 이어,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여표의 등뒤에
유령처럼 떨어져 내렸다.
텅 빈 등짝!
때리기 좋게 너무나 넓어 보였다. 눈을 감고 후려도 좋을 만치.
허나 단호삼은 눈을 감지 않고 왼주먹을 뻗었다.
꽈직!
놀랍게도 도검으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다던 은갑이 형편없이 우
그러졌다.
"크악!"
얼이 빠져 있다가 졸지에 된서리를 맞은 여표는 입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십 장을 날아가다 아무렇게나 던진 휴지조각처럼 땅에 처
박혔다. 보나마나 즉사였다.
그 위로 말들이 뼈를 잘끈 씹고 지나왔다.
다섯 필이었다.
"각주님을 죽이다니! 죽어!"
쌔액!
장창이 공기를 가르며 날카롭게 쏘아져 들어오는 것을 본 단호삼
은 흠칫 놀랐다.
무섭도록 빠른 그들의 공세보다는 여표를 죽이면 놀라 꼬리를 내
리리라 했던 예상이 빗나간 데서 오는 놀라움이었다.
"의리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놈들이군."
상좌(上座)의 시신을 아무 거리낌없이 짓밟는 자들은 존재할 가치
조차 없다.
백혼검을 불끈 움켜쥔 단호삼은 앞, 옆에서 쏘아져 오는 두 개의
창날을 허리를 비틀어 피한 다음, 쏜살같이 앞으로 전진하면서 백
혼검을 횡으로 쓸었다.
써컥!
말의 앞발을 감싸고 있던 철갑과 뼈와 살이 동시에 잘렸다.
쿠다당! 꼬꾸라진 세 마리 말들은 '이히잉!' 하며 구슬프게 울음
을 토했다.
"헉!"
마파람을 토하며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공중돌기로 땅에 착지하던
세 명의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착지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크윽!"
썩둑 잘린 그들의 목이 피분수와 함께 허공으로 튀어 오를 때 단
호삼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땅을 박차고 휙! 도약한 그는 말머리를 되돌리는 철갑인의 머리를
이기선풍각으로 부수었고, 그 탄력을 이용해 삼 장 거리의 또 다
른 철갑인의 목을 치고 있었다.
섬전(閃電)!
이 한마디로도 부족한 눈부시게 빠른 움직임이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