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론의 돼지 이문열 작가의 단편 소설
독후감
정의 : 폭력과 집단 심리, 그리고 나약한 지식인과 현실.
이문열 작가의 단편 소설 『필론의 돼지는 1979년 발표된 작품으로, 군용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인간 내면의 폭력성과 집단 심리, 그리고 현실 앞에서 무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깊이 있게 파고듭니다. 제목에서부터 철학적 비유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다.
이문열 작가의 『필요론의 돼지』를 읽고 난 후, 저는 오랫동안 묵직한 감정과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의 재미를 넘어, 인간의 본성, 사회의 집단 심리, 그리고 나약한 지식인의 위치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소설을 읽는 내내, 저는 주인공 '그'의 시점에 몰입했습니다. 폭력적인 상황을 목격하면서도 직접 개입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저의 내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검은 각반'들의 폭력에 분노하고, '깡마른 제대병'의 용기에 감탄하지만, 결국 그들을 향한 또 다른 폭력이 난무할 때 '그'가 느끼는 절망과 구토감은 독자인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가장 강렬했던 부분은 바로 주인공이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심리다. '필론의 돼지'에 빗대어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평온을 찾으려는 그의 태도는, 정의를 위해 행동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비겁한 자기 합리화로 느껴졌다. 이 작품은 저에게 '과연 나는 올바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는 저의 도덕적 양심을 찌르는 듯한 깊은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필론의 돼지』는 1979년의 시대상을 담고 있지만, 그 메시지는 오늘날의 사회와도 놀라울 정도로 맞닿아 있습니다.
첫째, 집단 폭력의 광기와 순환이다….
'검은 각반'들의 폭력은 힘 있는 자의 횡포를, 이에 맞서는 제대병 무리의 폭력은 정의를 빙자한 또 다른 폭력을 상징하고 이는 오늘날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과 유사하며 특정 대상을 향한 집단 린치, 사이버 폭력, 마녀사냥 등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감정과 분노가 우선시되는 광기를 보여주고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폭력은 정당성을 부여받고 빠르게 확산하는 점.
둘째, 침묵하는 다수의 방관자
열차 안의 수많은 제대병이 처음에는 폭력을 외면하거나 방관했으며 이처럼 현실의 불합리 앞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는다면'이라는 생각으로 침묵하는 태도는 현대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이며 이는 사회적 불의나 부조리가 지속하는 원인이 된다는 점과 지식인으로서의 행동, '암중모색'의 역할주인공 '그'와 같은 지식인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이성과 지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무력함을 드러내고 이는 지식인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지식은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행동을 끌어내는 힘이 되어야 하지만 폭력의 한복판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최소한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식인의 윤리적 의무지만 다수는 침묵하고 있다.
물론, 소설 속 '그'가 느낀 무력감과 절망은 현실적인 한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론의 돼지'가 되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대신, '암중모색(暗中摸索)' 즉,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으려 애쓰는 태도야말로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작은 변화를 모색하며, 대중을 계몽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필론의 돼지 주요 줄거리
막 제대를 하고 집으로 향하는 주인공 '그'는 군용 열차에서 동기인 '홍동덕'과 재회합니다. 평소 경멸하던 홍동덕과의 동행을 못마땅해하던 중, 열차 안에서 '검은 각반'이라 불리는 특수부대 출신 제대병들이 술값 명목으로 다른 제대병들에게 돈을 징수하는 폭력을 목격하게 됩니다.
정의감에 불타 저항하던 '깡마른 제대병'은 무참히 구타당하고, 그 모습에 분노한 제대병 무리는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며 '검은 각반'들을 집단 린치합니다. 지식인으로서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던 주인공은, 폭력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 난무하는 광경을 보며 깊은 무력감과 절망을 느낍니다. 그는 이 모든 소동을 피해 다른 객실로 몸을 피하고, 그곳에서 홍동덕과 술을 마시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로(Pyrrho)의 일화를 떠올립니다.
작품의 핵심 주제와 비평
1. 이성의 몰락과 폭력의 순환:
이 작품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판단할 것이라 믿었던 '옳고 그름'이 집단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검은 각반'들의 부당한 폭력에 대해, '그'와 같은 지식인들은 방관하거나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저항하던 '깡마른 제대병'의 용기는 집단의 폭력을 유발하는 도화선이 될 뿐, 이성적인 해결책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폭력의 순환이 개인의 이성적 판단을 압도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2. 지식인의 무력감:
주인공 '그'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지식인이지만, 정작 폭력적인 상황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을 저열한 욕망에 휩쓸리는 홍동덕과 구분 지으려 하지만, 결국 현실의 불합리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 큰 절망을 느낍니다. 이처럼 작가는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의 나약함을 비판하며, 이성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3. '필론의 돼지'의 비유:
작품의 제목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로의 일화에서 가져왔습니다. 풍랑이 이는 배 위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떨지만, 배에 실려 있던 돼지는 폭풍우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온하게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합니다. 피로는 이 돼지를 보며 "현실에 관한 판단을 보류할 때 비로소 평온함에 이를 수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떠올리는 '필론의 돼지'는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 '나는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겠다'라는 지식인의 무력한 자기 합리화를 의미합니다. 비이성적인 폭력과 추악한 현실을 마주하고도, 그저 침묵하고 방관함으로써 자신의 평온을 지키려는 비겁한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민수에게 던지는 질문
『필론의 돼지』는 '과연 위기 상황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인공 '그'처럼 현실에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비판하면서도, 과연 나였다면 용기를 내어 정의를 외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작품은 '선'이 '악'을 이기는 통쾌한 결말이 아닌,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고, 그 속에서 개인이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복잡한 현대 사회와 닮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필론의 돼지'처럼 폭력과 혼란 속에서도 외면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태도인지, 혹은 또 다른 폭력에 동참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독후감을 넘어, 우리 사회와 개인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30여 년이지난시점에서 『필론의 돼지』가 집필된다면 이런 글로 소설화될 것 같아 민수 기자가 쓰는 글.
데이터의 늪』
2027년, 서울은 데이터의 심장이 뛰는 거대 서버 방과 같았다. 모든 정보는 촘촘한 알고리즘의 거미줄에 엮여 관리되었고, 스마트 도시의 불빛은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데이터의 흐름을 반영하듯 번쩍였다. 나는 인공지능 연구원 민수, 사회의 비이성적 행동까지도 통계학적 모델로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내 알고리즘은 인간의 감정, 욕망, 그리고 광기마저도 숫자로 치환해 미래를 그려냈다.
어느 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온라인 커뮤니티 ‘정의구현협회’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캠페인이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유명 영향력자, ‘검사자 훈’이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검사자 훈은 과거의 부적절한 언행이 재조명되면서 ‘데이터’라는 이름의 집단으로부터 맹렬한 사이버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신상털기는 기본이고, 그의 가족과 지인의 SNS까지 파헤쳐져 ‘좌표’가 찍혔다. 그의 집 주소와 단골 식당까지 온라인 지도로 공유되며 “찾아가서 정의를 구현하라”라는 살벌한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렸다.
‘데이터’는 자신들의 폭력이‘사회 정의를 위한 필요악’이며, 검사자 훈의 부정적인 데이터 값’을 제거하기 위한 ‘필요한 폭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고 폭력적이었지만, 놀랍게도 이 폭력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실시간으로 자료화되어 커뮤니티 메인 화면에 거대한 그래프로 치솟았다. 붉은색 막대그래프는 순식간에 수십만을 넘어섰고, 그 숫자는 곧 대규모 군중 심리’를 형성하며 ‘데이터’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 보였다.
나는 이 모든 사태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며 ‘데이터’의 논리가 얼마나 허술하고 폭력적인지 이성적으로 분석했다. 그들의 ‘정의’는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며, 이는 사회 전체의 신뢰도를 저하하고 예측 불가능한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정확한 예측 모델을 만들었다. 내 알고리즘은 ‘데이터’ 집단의 행동 패턴과 그로 인해 파생될 사회적 비용을 소수점 아래 열두 자리까지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결과는 명확했다. 이 광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분석한 ‘데이터’와 ‘군중 심리’는 너무나 강력했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개인이 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았다. 내 알고리즘은 내가 이 현실에 개입했을 때 발생할 나의 개인적인 피해와 무력감마저 정확히 예측해냈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피로감과 함께 깊은 회의감에 휩싸였다.
나는 현실에 개입하는 대신, 모든 데이터의 연결을 끊고 디지털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려는 욕망에 휩싸였다. 내가 만든 예측 모델을 폐기하고, 사회의 불의와 단절된 ‘데이터의 늪’에 빠져들고 싶었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이자,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발버둥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나는 내 방의 스크린을 통해 ‘데이터’라는 이름의 광기가 사회를 휩쓰는 것을 목격했다. 검사자 훈은 결국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했고, ‘정의구현협회’는 다음 표적을 물색하며 승전고를 울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맹목적으로 ‘데이터’의 폭력에 동조하고, 그 광기는 멈출 줄 몰랐다. 나는 내가 이성적으로 예측한 모든 데이터와 현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며, 디지털 세상의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처럼 사라져가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데이터로 가득 찬 세상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 홀로 표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