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와 함께 걷는 미술 산책>은 평생 금융인으로 살다 은퇴를 한 후 특이(?)하게도 국립현대미술관 도슨트가 된 김옥찬 작가가 서양미술사를 산책하듯 가볍고 친근하게 풀어낸 미술교양서다. 특히 이 책은 도슨트의 안내를 받으며 미술관을 느긋하게 거니는 것 처럼 복잡한 이론보다는 작품 뒤에 숨겨진 이야기와 화가의 삶에 초점을 맞춰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어 무심코 지나쳤던 명화들이 한층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참회하는 막달레나> 조르주 드 라 투르/ 1640~1645
이 작품에는 많은 알레고리가 담겨 있다. 우선 촛불은 짦은 생과 죽음, 인생무상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신성의 은총과 구원의 희망을 암시한다. 거울은 허영을 상징하는 동시에 자시 성찰을 의미하고, 해골은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바니타스의 도상이다. 그리고 마리아 옆에 놓인 보석은 세속적 재물의 덧없음을 보여주며, 육체적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그녀의 영적 감정을 시사한다.(p54)
카라바조는 17세기 프랑스 바르크 촛불 화가로 불린다. 드 라 투르의 촛불은 단순한 조명이 아리나 등장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정적이고 명상적인 신의 게시로도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그를 '명상의 화가' 또는 '빛의 조각가'로 불렸다.
<추기경과 수녀(애무)>, 에곤 실레. 1912
붉은색 옷을 입은 추기경과 검은색 옷을 입은 수녀가 무릎을 꿇고 서로 포옹하고 있다. 주기경의 손은 마치 집게처럼 수녀를 잡고 있고, 추기경의 얼굴은 수녀의 어깨에 달을 듯 밀착되어 있다. 반면 추기경 품에 안긴 수녀의 표정은 어딘가 당혹스러워 어찌할 줄 모르는 듯 정면읗 을 향해 있다. 마치 죄책감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듯 보인다.(p71)
실레의 이 작품은 바로 클림트의 <키스>를 비틀고 반전시켜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 작품의 원제목은 '애무'다. 그러나 애로틱하고 적나라한 제목이 지나치게 도발적이었는지, 결국 '추기역과 수녀'라는 은유화된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에곤실레는 20세기 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 화가다. 그는 인간의 불안, 욕망 그리고 죽음을 솔직하고 거칠게 표현한 예술가로 28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강렬하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남겼다.
<화가의 아틀리에>, 귀스타브 쿠르베. 1855
한 가운데는 쿠르베 자신이 대형 캔퍼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의 앞에는 여성 누드모델이 서 있고, 옆에는 크르베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이 있다. 여기서 누드모델은 고전 예술을 가리키고 소년은 순수한 예술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제대를 가리킨다. 즉 쿠르베는 그림을 통해 현실 창작 이념이라는 쿠르베가 보는 예술의 세 가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끄트머리에는 책을 읽는 시인 샤를 보들레르 외에도 조르주 상드, 피에르 조제프 푸르동 등이 등장한다.(p81)
쿠스타브 쿠르베는 19세기 프랑스 미술사를 흔들어 놓은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쿠르베는 단지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정치적 권위를 끊임없이 저항한 인물로 그의 도발적인 사실주의는 이후 등장하는 인상주의와 근대미술 전반에 엄청난 길을 터주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에두아르 마네, 1863
그림을 보면, 세련된 복장의 부르주아 남성 둘이 풀밭 위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들 옆에는 아무걷소 걸치지 않은 나체인 여성이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 앉아 있고, 그들 뒤로 다른 여성이 옷을 벗는 것이지 입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동작으로 물속에 서 있다.
이 작품은 고전 회화를 패러디한 듯한 구도를 취함녀서 벌거벗은 현실 속 여성을 등장시켜 강한 사회적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 이유는 정면을 응시한 나체인 여성이 도발적이라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여성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당시 파리에서 유명한 매춘부 빅토린 뮤랑이었다.(p89)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기존 아카데미 미술의 관습을 정면으로 거부한 도전이었던 만큼 많은 비판과 조롱, 동시에 호기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에두아르 마네는 19세기 프랑스 미술사에서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거장이다. 전통적인 명암법과 아카데믹한 화풍이 지배하던 시기에 고전적 기법을 과감히 파과하고, 당대 사람들의 일상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며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교량 역할을 했다.
<마라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1793
그림의 구성을 보면 욕조 안에 죽은 채로 누워 있는 마라의 머리는 흰 천으로 감싸여 있다. 오른팔은 힘없이 늘어진 채 펜을 쥐고 있고, 왼손에는 코르데가 남긴 쪽지가 들려 있다. 그릴고 상체가 뒤로 비스듬히 젖혀 있다. 다비드는 이 작품에서 마라의 마지막 모습을 영웅적이고 이상적으로 묘사했다. 작품 속 마라는 자코뱅파가 자행한 9월 학살로 지롱드파 당원들이 반 혁명 분자로 간주되어 투옥되고 처형된 데 분노했고, 마라를 지롱드파와 자신을 억압한 주범으로 여겼다. 결국 반혁명 음모 정보를 남긴다는 명목으로 그의 집을 찾아가 욕조에 있는 마라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p111)
<마라의 죽음>은 당시 혁명 지도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혁명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고, 다비드의 제자들에 의해 여려 차례 복제되었다. 그러나 혁명 주체자인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고 왕정이 복고되면서 이 작품은 오랜 세월 역사 속에 묻히게 되었고, 1846년 비평가 샤를 보들레르에 의해 이 작품이 재조명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p112)
자크 루이 다비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프랑스 미술계를 지배한 신고전주의의 거장으로, 격조 높은 고대 화풍과 명확한 윤곽, 그리고 강력한 정치 도덕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을 남겼다. 특히 프랑스 혁명과 나포루레옹 시대를 관통하며 시대의 역사를 화폭에 담아낸 '혁명의 화가'이기도 하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
이 작품은 들라크루아가 1830년 7월 혁명을 소재로 한 혁명의 이상과 희망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작품은 극적인 구도와 강렬한 색채를 통해 낭만주의의 정수를 보여준다. 특히 감정의 격동과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자유와 민중의 힘, 혁명 정신의 불멸성을 찬미하고 있다. 그림 가운데에는 한 손에 삼색기를 들고, 다른 손엔 총을 든 여인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여인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상징으로 의인화된 존재다. (p127)
이 작품은 1831년 살롱전에 출품되지만, 정치적 메시지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이유로 당시 정부에 의해 비공개 조치되었다. 이후 1848년 또 다시 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제 조명되었고, 프랑스의 국가 정체성과 자유를 상징하는 걸작으로 대중 앞에 공개되었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신전통주의(고전주의)에서 벗어나 강렬한 색채, 역동적인 붓터치, 그리고 요동치는 감정과 에너지를 화폭에 담아낸 인물로 평가한다.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1819
이 작품은 1816년 프랑스 군함 메두사로가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난파되면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사회적 고발의 의도를 담은 회화를 제작했다. 극한 상황 속 인간의 감정, 생존과 절망, 죽음과 희망의 경계를 철저하게 보여준 이 그림은 찬사와 논란 속에 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제리코는 <메두사호의 뗏목> 완성 후 극도의 심신 피로에 시달렸고, 말에서 떨어진 사고 후유증으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결국 1824년 서른 세살의 나이에 요절했다.(p130)
테오도르 제리코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포문을 연 대표적인 화가로 짧은 생애 동안 격정적이고 강렬한 작품을 남겼으며, 아카데미즘의 정형화된 틀을 깨고 현실의 비극과 인간의 감정을 과감하게 화폭에 담아냈다.
<유디트Ⅰ>, 구스타프 클림트, 1901
이 작품은 성서에 나오는 유디트를 묘사한 작품으로 유디트의 이야기는 구약성서 외경 <유딧서>에 나오는 전설로, '젊고 아름다운 여성 암살자'라는 극적인 설정 덕분에 르네상스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화가의 영감을 자극해 왔다. 클림트의 <유디트Ⅰ>은 화면 전체를 황금빛 장식으로 채워 아르누보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며, 주인공 유디트를 화려하게 감싸 그녀의 신비성을 강조한다. 유디트의 나른하고 반쯤 감긴 눈은 환락과 애욕에 취한 듯 보이고, 은근히 드러난 가슴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건 결연한 여인이라기보다는 관능적이고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풍긴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이자 빈 분리파의 창립을 이끈 대표적인 거장이다. 그는 황금빛 아르누보 스타일의 유연한 곡선, 그리고 생명, 사랑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주제를 매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해바라기>, 빈센트 반 고흐, 1888
고흐는 아를에서 고갱을 맞이하기 위해 고갱의 방을 꾸미면서 그린 <해바라기>는 밝고 따뜻한 노란색 계열의 색채로, 해바라기 열네 송이가 화병에 꽂혀 있다. 활짝 핀 꽃과 시든 꽃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느껴지며, 고흐 자신의 내면 감정과 미래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다. 고흐는 이 작품에서 해바라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했다고 말한 바 있다.
고흐는 아를의 '노란 집'에 머물면서 해바라기 그림을 여러 점 그렸는데, 그에게 해바라기는 빛과 생명,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사랑받는 거장 중 한 명이다.그는 평생 화상이었던 동생 테호 반고흐의 정신적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이어갔으나 생전에는 단 한 점의 그림만 팔렸을 정도로 인정받지 못했고, 정신질환과 가난 속에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아이들의 놀이>, 피테르 브뤼헐,1560
이 작품은 250여 명의 아이들이 80가지가 넘는 다양한 놀이를 즐기고 있는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림은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인 장면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고, 뒤쪽으로 갈수록 묘사를 줄여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림의 배경은 흙빛을 띠는 따뜻한 색조로 칠해져 있고, 아이들의 의상은 푸른색과 붉은색 등 강한 색상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활기를 부여한다. <아이들 놀이>는 종교적 주제를 벗어나, 중산층의 세속적인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장르 회화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한다. 브뤼헐은 이를 통해 미술이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일상 속 진정한 가지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p242)
피테르 브뤼헐은 16세기 네덜란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이자, 서양 미술사에서 농민화가로 가장 알려진 인물이다.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교화나 신화 중심 미술에서 벗어나 서민들의 일상과 농촌 풍경, 인간의 본성을 사실적이면서도 의트 있게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