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장 영세제일궁(永世第一宮)
①
대별산(大別山).
천지가 설백으로 뒤덮였다. 대별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애험산인 대별산은 완전히 설산으로 화하고 있었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살을 한 겹 한 겹 벗겨낼 듯 매몰차고 혹독한 한풍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 속에는 아주 여리게 봄의 온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때가 겨울의 막바지였기 때문이었다. 한 해가 가고 어느덧 이월이었다.
지난 한 해는 중원무림에 있어서는 암흑시대와 다름이 없었다. 바로 사풍객이 일으키는 공포가 천하를 질식케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믿었다. 겨울의 추위가 혹독하면 혹독할 수록 봄은 더욱 아름답게 오리라는 것을. 그들은 또한 알고 있었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그만큼 가까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의 바램은 헛된 것만 같았다.
어느덧 이월이 중반에 들어섰으나 겨울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메마른 삭풍은 하루도 빠짐없이 불어왔다. 때문에 중원은 더더욱 얼어붙고만 있었다.
대별산의 한 산봉.
휘위이... 잉.......
삭풍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한 인영이 서 있었다. 바람에 찢길 듯이 나부끼는 인영의 옷자락은 피처럼 붉은 혈의였다.
삭막한 바람에 혈의를 펄럭이는 인영. 그는 바로 혈륜공자 백천강이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대별산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휘이잉...위잉.......
세찬 바람이 또다시 휘몰아쳤다. 백천강은 삭풍에 혈의를 휘날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유성... 그 자는 과연 일룡(一龍)답다. 그를 떨쳐 버리는데 보름이나 소요하고 말았다.'
내심 중얼거리는 백천강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보름 전.
그는 석대장을 빠져나온 직후부터 사유성의 끈질긴 추적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그는 악착같이 따라붙는 사유성을 떼어내기 위해 무려 열두 번이나 얼굴을 바꾸었다.
그러나 사유성의 추적은 대단했다. 사유성은 무서운 집념으로 백천강을 쫓아다녔다. 결국 쫓긴 지 보름만에 백천강은 간신히 사유성을 따돌릴 수 있었다.
'천무. 당신은 과연 훌륭한 제자를 키웠소. 하지만 후후... 언젠가는 내 손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오!'
내심 중얼거리는 백천강의 입가에 삭풍보다 더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스스.......
찰나지간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망혼애(亡魂崖).
그곳은 과거의 망혼애가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지형이 완전히 바뀐 것이었다. 절곡의 망혼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놀랍게도 망혼애가 있던 자리는 메꾸어져 있었다.
평지로 변한 망혼애 주변에는 살아 있는 듯 정교하기 그지없는 벌거벗은 여인들의 조각상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족히 일천 개가 넘는 숫자였다.
스스스.......
그곳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혈륜공자 백천강이었다.
"......!"
나녀상들을 바라보는 백천강의 무심한 듯한 눈에 일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유생 상무효... 그의 이름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의 솜씨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나녀상(裸女像).
그것들은 바로 강호칠기의 한 명인 무유생 상무효만이 깎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일천 개가 족히 넘을 나녀상들은 그 자세와 용모가 모두 틀렸다. 더구나 완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백천강은 한동안 나녀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느 순간 그의 냉랭하던 눈가에 희미한 눈웃음이 감돌았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꿰뚫어보고 극히 만족해 하는 모습이었다.
"......!"
백천강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천문역로만상대진(天門逆路萬像大陣)... 과연 귀진자다운 솜씨다. 천 개의 나녀상이 진세를 이루고... 나녀들의 동작이 환욕을 일으키니 정작 이것만으로도 능히 일만인을 멸할 수 있으리라."
스슥!
백천강은 즉시 나녀상 사이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사위가 변했다. 조금 전의 풍경은 어느덧 뒤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백천강의 주위에 눈부신 느낌의 은은한 안개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바뀐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지극히 교태로운 여인의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호호홋... 아흠......."
"이리 오세요. 저를 안아줘요... 흐음......."
뒤를 이어 수없이 많은 미녀들이 백천강의 주위로 다가왔다. 그녀들은 온갖 교태로운 모습을 연출하며 백천강을 유혹하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
하지만 백천강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마치 목석만 같았다.
여인들의 교소는 능히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도 남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풍기는 색기는 백천강의 눈을 멀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백천강은 여인들에게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여인들의 곁을 스치듯이 걸어나갔다. 그렇다고 그의 내부에서 전혀 욕념(欲念)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백천강도 사내였다. 또한 그의 체내에는 아직도 전갈의 정액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녀들이 구축하고 있는 절진을 지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욕념을 한곳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으윽!"
"어서... 안아줘요... 흐으윽......."
나녀들은 흐르는 물처럼 백천강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안개처럼 사라져갔다.
백천강은 천문역로만상대진을 빠져나가며 수없이 방향을 바꾸었다. 어느 때는 앞으로 걷다가도 어느 순간에서는 옆으로 걷기도 했다. 오른쪽으로 세 걸음 내딛었다가 뒤로 두 걸음 후퇴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돌연 백천강을 에워싸고 있던 안개가 깨끗이 걷히며 시야가 탁 트였다.
그는 무사히 천문역로만상대진을 빠져나온 것이다.
백천강은 걸음을 멈추었다.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백천강의 시선은 서서히 바위 아래로 내려갔다. 바위가 놓여져 있는 바닥에 네 개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 대혈륜궁(大血輪宮).
그 글씨를 바라보는 백천강의 혈의자락이 부르르 떨었다.
분명 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백천강의 피와 심장이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크크ㅋ! 대혈륜궁... 고금제일이자 영세제일궁이다... 후후후! 이제 이곳에서 삶과 죽음이, 흑과 백이 심판되리라!"
백천강은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바위가 놓인 바닥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츠리릿!
그의 장심에서 진기가 뻗어나갔다. 진기는 정확히 네 글자를 동시에 눌렀다. 그때였다.
우르르릉......
굉음과 함께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바위 중간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암흑 속에 파묻힌 계단은 끝없이 길었다.
백천강은 서슴없이 계단을 밟고 지하세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②
광장.
광장의 중앙에 넓은 석전(石殿)이 있었다.
핏빛 우단(羽緞)으로 만들어진 태사의가 석전의 중앙에 놓여 있었다.
"궁주의 입궁을 환영합니다!"
육인의 인영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며 태사의를 향해 부복했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자는 바로 혈륜공자 백천강이었다. 그들의 인사가 끝나자 백천강은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수고들 했소."
그 말을 제일 먼저 받은 것은 재보(財寶) 화양금(華量金)이었다.
"저희 혈륜육신(血輪六臣),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백천강은 흠칫했다.
"혈륜육신이라니?"
모용란(慕蓉蘭)은 재보의 흉내를 완벽히 해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臣)들...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부디 거두어 주옵소서."
"......."
백천강은 침묵했다.
그는 뜻을 알 수 없는 눈길로 강호육기를 차례로 내려 보았다. 그의 눈길이 모용란에게 가 멎었을 때였다.
"......!"
갑자기 백천강은 무엇인가를 느꼈다.
'모용란... 바로 너의 뜻이었군.'
백천강은 내심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용란이 일을 그렇게 만든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잠시 침묵을 고수하던 백천강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소. 그대들을 본 대혈륜궁의 육신(六臣)으로 인정하오."
"황공합니다!"
육기는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돌연 귀진자 서문량의 눈빛이 야릇한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궁주와 신하로서의 상견례가 끝나자 백천강은 석전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본궁의 형태를 일러주시오."
신기자(神機子) 공손연(恭遜燕)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한 만족감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본궁은 영세제일의 대궁이옵니다. 무림사 이래로 최초이자 마지막의......."
공손연은 다소 흥분한 듯 했다.
"먼저 구조를 보면......."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대혈륜궁은 신기자의 토목기관술의 총화였다.
일전(一殿), 십이장(十二場), 삼십육원(三十六院), 칠십이각(七十二閣).
그것이 대혈륜궁의 주요 구조였다.
일전은 혈륜대전(血輪大殿)으로써 바로 혈륜궁의 중심이었다. 모든 기관은 혈륜전에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십이장은 혈륜궁의 십이방에 나뉘어져 있는 광장이었다.
삼십육원은 하나의 석전을 중심으로 오행의 방위로 다섯 개의 석실을 둔 것을 일원으로 하여 모두 삼십육원이 설치된 것을 말했다.
칠십이각은 한 개의 각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석실을 두는 것을 일각으로 하여 칠십이개 조였다. 실로 간단한 듯 하면서도 엄청나게 방대한 규모였다.
그 구조는 치밀한 기관과 진도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구조마다 치밀하고 가공할 기관장치와 매복,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천하제일의 고수라 할지라도 함부로 드나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
설명을 끝낸 신기자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궁주께서는 태사의에 있는 적(赤), 청(靑), 흑(黑)의 세 보주 중에 청주(靑珠)를 눌러 보십시오."
"음!"
백천강은 신음을 삼키며 공손연이 시키는 대로 청주를 눌러 보았다.
기이잉.......
낯선 기관음과 함께 태사의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태사의는 정확히 반 바퀴를 돌았다. 그 순간 백천강의 앞으로 다가선 석벽이 좌우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태사의는 석벽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
영문을 모르는 백천강이 무어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신기자의 음성이 등뒤로부터 들려왔다.
"그곳이 궁주의 처소입니다."
"......!"
백천강은 약간 놀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가며 자신의 처소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곳은 장방형의 넓은 석실이었다.
석실은 몹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황제의 거소가 부럽지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상아침상과 비단휘장, 수정으로 된 팔선탁(八仙卓)과 각종 장식 따위는 진품 중의 진품이었다.
"......!"
팔선탁 위를 바라보는 백천강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곳에는 한 권의 책자가 있었다.
- 혈륜총서(血輪叢書).
그것은 몹시 두꺼웠다. 표지로 보아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신기자가 공손히 말했다.
"혈륜총서에 이곳의 모든 것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백천강은 손을 들었다. 이어 그는 허공섭물술(虛空攝物術)로 혈륜총서를 취했다.
"이제 청주를 다시 누르면 제 자리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신기자의 말이 떨어졌다. 백천강은 청주를 눌렀다.
기이이잉.......
기관음과 함께 태사의는 다시 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사의가 원래 자리로 돌아오자 석벽은 감쪽같이 원상회복되었다.
신기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흑주와 적주는 각기 기관을 움직이는 것으로 혈륜총서를 읽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길은 다시 무유생을 지나 활사묘인(活死妙人) 사마방(司馬方)을 향했다.
"대혈륜궁은 단순한 파괴의 궁이 되어서는 아니되오. 사마방 그대는?"
사마방은 고개숙인 채 말했다.
"신(臣)은 궁내에 항시 꽃향기가 맴돌게 했습니다. 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사계절의 꽃을 동시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백천강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수고했소. 그렇소! 대혈륜궁은 영원할 것이오. 당신이 심은 꽃들이 시들지 않듯이 말이오."
"......!"
백천강의 웃음에 혈륜육신은 모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웃음 속에 들어있는 기묘한 기운이 그들의 오관을 자극해왔기 때문이었다.
백천강의 웃음 속에는 엄청난 패(覇)의 기운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밤이었다.
처소의 태사의에 앉은 백천강은 혈륜총서를 읽고 있었다. 그는 혈륜총서를 넘기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천하제일궁이라고 할만 하다. 이 정도면 고금제일대궁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의 입에서 감탄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일은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마침내 백천강은 혈륜총서를 모두 읽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김 백천강은 잠시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혈륜총서의 모든 내용은 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혈륜총서는 백서(帛書)로 만들어져 있었다.
잠시 후 백천강은 혈륜총서를 손바닥 사이에 넣고 비볐다.
스팟!
손바닥과 손바닥이 맞부딪히는 순간 삼매진기(三昧眞氣)가 일어났다. 그 순간 혈륜총서는 미세한 가루가 되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스르르.......
백천강은 혈륜총서를 영원히 없애버린 것이다. 이제 그것을 저술한 신기자 공손연 외에는 어느 누구도 혈륜궁의 내부 비밀에 대해서 알게 될 사람이 없었다.
백천강은 태사의에 상체를 묻었다. 이어 그는 피곤한 듯이 눈을 감았다. 일 다경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
돌연 백천강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이어서 석벽의 한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석벽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백천강은 석벽을 향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기이이... 잉.......
가벼운 기관음이 들리면서 석벽이 열렸다.
석벽 뒤에는 한 인영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인영은 바로 재보 화양금이었다. 백천강은 잠시 화양금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이제 화양금이 아니었다. 어느새 화양금은 만변환신대법(萬變幻身大法)을 풀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백천강은 정체를 드러낸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모용란. 무슨 일인가?"
모용란은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드릴 말씀이......."
"들어 오너라."
백천강은 담담히 말했다.
모용란은 안으로 들어왔다. 사르락거리며 비단옷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모용란이 들어서자 석벽은 다시 원상태로 닫혔다.
"돌아 오시기를... 기다렸어요."
모용란의 두 눈은 어느새 촉촉히 젖어 있었다.
하지만 백천강의 시선은 여전했다. 그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무엇 때문에 날 기다린단 말인가? 그대와 나는 서로를 이용할 뿐인데......."
"저... 저는......."
모용란은 말을 잇지 못했다.
"......."
"이미 모든 마음을... 당신께......."
"내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이 그것인가?"
"흐흑... 저 ... 저도 모르겠어요!"
모용란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무너지듯 백천강의 품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흐흑! 냉정해지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당신의 품에 안길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백천강의 눈빛은 그 순간 동요를 일으켰다. 모용란은 더이상 떨어지지 않을 듯이 그의 품을 파고 들었다.
"후회할 것이다. 내 마음은 이미 죽었다. 단지 남은 것은... 혈륜천하를 이루는 사명뿐이다."
"흐흑!"
모용란은 펑펑 눈물을 쏟았다.
"후회하지 않아요... 설사... 설사 한 번으로 그친다 해도... 그 이후로 단지 먼 발치에서 당신을 바라 보기만해도... 소녀는 만족하겠어요."
"단... 한 번이라도 좋다고?"
백천강이 말했다.
"그... 그래요! 단... 한 번만이라도 당신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좋아요!"
그때였다.
불현듯 백천강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는 그 말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천강은 거칠게 그녀를 끌어 안았다.
"아... 음......!"
모용란의 입으로부터 괴로움에 찬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사나운 사자의 발톱에 찢기기 시작했다. 백천강은 거칠게 그녀를 다루었다.
찌익... 부욱!
비단옷이 찢겨 나갔다.
"......!"
모용란은 한순간에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백천강에게 사랑을 구걸했다. 아니 백천강에게 사랑받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솟구치는 수치심과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때문에 모용란은 눈을 감고 말았다.
결국 그러한 행동이 그녀를 구한 꼴이 되었다. 백천강의 눈에 선 핏발을 보았더라면 그녀는 분명 혼절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훗훗훗... 모용란... 너는... 후회할 것이다. 나 백천강의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단 말이다!"
미친 듯한 백천강의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천둥소리처럼 맴돌았다.
거칠고 광폭한 열풍이 일었다.
두 육체는 화려한 상아침상 위에서 뒹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욕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백천강은 스스로조차 억제할 수 없는 마심 때문에 몸부림을 쳤다. 그는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랬기에,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그는 더더욱 격렬하게 여체를 파고 들었다.
"아... 아흑!"
숨가쁜 합환이었다.
두 사람은 태초의 모습이 된 채 서로가 서로의 혼을 요구했다. 육체가 부딪히며 일으키는 열기는 세상 그 어떤 열기보다도 뜨거웠다.
"아아... 사랑... 해요......."
여인의 입에서 격정이 담긴 신음이 끊어지듯 흘러나왔다.
"아아... 행복... 해요......."
모용란은 내처 중얼거렀다. 그녀는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젖을 빨 때 행복감을 느꼈다. 그녀는 더욱 거세게 사내의 머리를 끌어 안았다.
모용란은 허리를 활처럼 휘며 마음 속으로 간절히 원했다.
'아아! 이 순간이 영원이고 싶다. 이 사람... 나의 유일한 사랑... 이제 나의 전부가 되기를.......'
"허억... 헉!"
백천강의 입에서도 뜨거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그는 여체를 증오했다. 그가 여체를 짓밟는 것은 증오의 또 다른 얼굴과 다름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체를 부드럽게 다뤄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학하듯 여체를 농락했다. 백천강에게는 여인이란 세상에 대한 증오와 복수의 수단일 뿐이었다. 애정이니 연정이니 하는 감정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오직 저주의 불길을 뿜을 뿐이었다.
"후... 후회할 것이다! 너는... 마... 마땅히 후회해야 한다!"
백천강은 울분을 토하듯이 저주의 말을 토해냈다.
"어... 어흑!"
모용란은 자신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순간 그녀는 백천강의 어깨를 힘껏 물었다.
"윽!"
백천강의 입에서 절정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한순간 백천강은 자신의 모든 혈관이 터질 듯이 확산되는 것을 느꼈다.
"......!"
찰나지간 백천강은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육체의 한 부분에서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③
"......!"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두 쌍의 눈은 그토록 달랐다.
여인의 두 눈에는 세상의 모든 따사로움이 담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눈길은 한없이 부드러우면서 깊었다.
하지만 사내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눈은 천 년의 비바람에도 끄덕없는 바위를 닮아 있었다. 사내의 눈은 그토록이나 무심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눈빛 속에는 아련한 아픔같은 것이 깃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사내의 눈 속에는 보이지 않은 우수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천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바람에 깎여나가는 바위의 내부에 또 하나의 금을 간직하고 있듯이.
"......!"
모용란은 하룻밤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성숙한 여인이었다. 백천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한없이 따스했다.
'따르리라. 저 분이 어떤 길을 가든... 이 모용란은 오직 저 분만을 따르리라.'
모용란은 두 눈에 뜨거운 애정을 담고서 내심 중얼거렸다. 이제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그녀에게는 새로이 인생의 지표가 생긴 것이다. 그녀는 깨달았다.
백천강을 만나기 전과 백천강을 만난 후에 그녀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전자의 인생은 파멸이자 죽음의 인생이었다. 그녀는 오직 화운악을 죽이기 위한 복수의 일념으로써만 생을 유지해온 것이었다.
거기에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나 사랑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오직 철저한 복수와 자멸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백천강을 만난 후부터 사정은 돌변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삶에 대한 애착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냉정하기 짝이 없는 백천강을 통해서 였다.
백천강의 냉소섞인 눈빛을 대하는 순간 모용란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확연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여인의 직감력 때문이었다.
'저... 저 분도 나와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계신다. 아아! 저 분의 눈 속에는 나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한과 증오가 깃들어 있다. 오오! 안돼! 그럴 수가 없어!'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울부짖었다.
이때가 바로 무창의 황금장에서 였다. 백천강은 그녀에게 만변환신대법을 가르쳐주고 떠난 직후였다.
바로 그 순간 모용란은 난생 처음으로 생명에 대한 애착을 느낀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랬다.
그후 모용란은 만보총관 화운악으로 변신해 있으면서 백천강의 안위를 염려해온 것이었다.
"......!"
모용란은 새옷을 갈아입은 후 바닥에 무릎 꿇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한송이 난과 같았다. 새벽 이슬을 함초롬이 머금고 갓 꽃을 피워올린 한 송이의 난.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인가?"
백천강이 물었다. 모용란은 살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궁을 지으면서 발견한 장소가 있답니다. 그곳은 거의 무너져 있었으나 아주 오래 전에는 방대한 규모의 궁인 듯 했습니다."
"......!"
찰나지간 백천강의 안색이 변했다.
"그곳이 어디냐?"
그는 다소 흥분한 음성으로 급히 되물었다. 갑자기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오직 소녀만이 알고 있답니다. 중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보았느냐?"
모용란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 일말의 공포감이 드러났다.
"도저히 접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너무도 무서운 마기가 뻗치고 있었기 때문에......."
"......!"
백천강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곳이다! 바로... 내가 찾던 장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앞장서라! 지금 당장!"
백천강은 서둘렀다. 그는 다그치듯이 모용란을 몰아부쳤다.
"......?"
모용란은 그 바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녀는 의혹을 지우지 못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시각.
귀진자 서문량은 자신의 처소에서 급히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서문량은 쉴새없이 붓을 놀리며 중얼거렸다.
"흐흐... 이제 때가 다가오고 있다. 과연 주상(主上)께서 예측하신 대로이다. 놈은... 올가미가 차츰 조여지는지도 모르고 점점 더 광분하고 있다."
드디어 서문량은 쓰기를 끝냈다. 그는 붓을 놓았다. 이어 종이를 말더니 작은 죽통 속에 넣었다.
"주상께서 계획하신 대로다. 흐흐... 일은 척척 진행되고 있다. 이제 혈천마국이 중원을 지배할 날이 더욱 가까와졌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서문량이 한쪽 벽의 모서리를 눌렀다.
끼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벽에 하나의 구멍이 나타났다. 그 구멍은 수직으로 뚫려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서문량은 구멍 속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새장이었다. 새장 속에는 모두 일곱 마리의 잿빛 비둘기가 들어 있었다.
서문량은 그 중 한 마리의 비둘기를 꺼내 발목에 죽통을 매달았다.
"흐흐... 가거라. 가서 주상께 전해라. 비령삼호(秘靈三號), 충실히 명을 이행하고 있노라고."
서문량은 음침하게 말하며 비둘기를 놓아 주었다.
푸드득!
비둘기는 곧장 구멍을 통해 솟구쳐 올라갔다.
모용란은 내처 걸었다.
그곳은 혈륜궁의 가장 깊은 곳이었다. 능히 삼십 장 정도의 깊이는 되었다. 불빛 하나 새어들지 않는 그곳은 암흑천지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야명주의 불빛이 석벽을 비쳐주고 있을 뿐이었다. 석벽의 통로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다.
"......!"
마침내 모용란은 걸음을 멈추었다. 더이상 앞으로 나갈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석벽으로 끝나 있었다.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암벽이었다.
"이곳이에요."
모용란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가락으로 석벽에 돌출한 바위를 가리켰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길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저곳이 입구예요. 제가 바위로 임시로 막아 놓았어요."
"......!"
백천강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바위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 핏빛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바위는 얼핏보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바위는 인공으로 한 곳을 틀어막은 것이 분명했다.
백천강은 바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그긍.......
섭물진기에 의해 바위가 빠져 나왔다.
쿵!
바위가 굴러 떨어지자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었다.
우우웅.......
구멍으로부터 소름이 끼치는 음향이 울려나왔다. 그 음향을 듣는 순간 모용란은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 막았다.
그때였다.
"기다리시오."
휙......!
백천강이 구멍 속으로 신형을 날리며 외쳤다.
"앗! 아... 안돼욧!"
모용란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녀는 그를 제지하기 위해 급히 팔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백천강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 내 생각이 맞았다."
칠흑같은 어둠 속이었다. 백천강은 넋을 잃은 듯이 부르짖었다. 그의 음성은 흥분으로 인해 잔뜩 떨리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이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모든 것을 대낮같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백천강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 그곳은 또 다른 지하세계의 광장이었다. 땅 속에 그토록 넓은 광장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백천강의 시선이 광장을 훑어갔다.
부서지고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가 광장 곳곳에 널려 있었다. 흡사 대지진이라도 만난 듯했다. 화려하고 웅장했을 궁은 완전히 붕괴된 모습이었다.
광장의 천장을 만들고 있는 것은 높이를 확인할 수 없는 두 개의 절벽이었다. 모로 기울어져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절벽 두 개가 삼각형의 형세로 닫혀 허공을 만들고 있었다.
백천강은 폐허가 된 궁터를 걸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곳이다... 천오백 년 전... 기환궁(奇幻宮)이 있던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그때였다. 백천강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붙박힌 채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찰나지간 백천강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시체(屍體)들의 산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시체가 아니었다. 일천 오백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살과 핏줄은 흔적도 없었다.
백골(白骨).
살과 피를 상실한 수많은 백골들이 한곳에 모여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백천광의 눈에서 신광이 흘러나왔다.
백골산(白骨山).
일천 오백 년 전에 붕괴된 기환궁터에 백골의 산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기환궁이 흙 속에 완전히 묻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모든 상황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꼭대기가 맞닿은 두 개의 절벽이 그 사실을 확연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결국 양쪽 산봉이 무너지면서 서로 이어지는 바람에 기환궁은 지하공간 속에 갇히고 만 것이었다. 물론 지진으로 인해 기환궁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그 와중에 수많은 궁도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마공이 절륜한 자들은 살아 남았다. 그들은 하늘조차 믿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두려워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늘을 저주하며 끝없이 지하세계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절망하기 시작했다.
파헤치고 또 파헤쳐도 흙더미는 끝이 없었다. 아니 별빛 하나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들이 어느 얕은 산자락 아래 파묻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흑과 굶주림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굶주림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정작 굶주림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다 준 것은 그들의 내부에서 싹트기 시작한 좌절과 절망이라는 병이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죽은 자들의 시신을 한곳에 모아 쌓았다.
시신을 매장하지 않은 이유는 식량 대신 그들의 살을 뜯어먹기 위해서 였다. 그들은 어머니나 딸, 스승이나 주인의 살을 뜯어먹으며 삶의 투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차츰 백골산이 높아졌다. 그들은 무작정 출구를 팠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두 번 다시 태양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희박해지기 시작한 공기 탓이었다. 마침내 최후의 생존자들은 숨을 헐떡이며 죽어갔다.
그들이 팠던 출구는 바로 백천강이 들어온 통로였다.
"아아.... 이럴 수가!"
백천강은 넋을 잃은 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는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수천 구가 넘는 백골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바라보며 넋을 잃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천 오백 년 전이라는 까마득한 과거 속에서 기환궁도들이 겪어야 했던 처절한 공포심. 바로 그 공포심을 백천강은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침묵보다, 아니 백골들이 무언으로 절규하는 공포심보다 더 무거운 시간이 백천강의 어깨를 짓눌렀다.
한 식경 후.
"아... 이곳이다!"
백천강은 격동하여 부르짖었다.
그곳은 반 이상 무너진 대전이었다. 대전의 기둥은 놀랍게도 황금이었다. 백천강은 직감적으로 그 대전에 자신이 찾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오오! 무서운 기운이... 이곳에서 뻗치고 있다.'
대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백천강은 경악했다. 대전 깊숙한 곳으로부터 말로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무시무시한 마기가 뻗쳐오고 있었다.
"드... 들어가야 한다......."
백천강은 입술을 물며 말했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안으로 향했다. 얼마쯤 들어 갔을까? 백천강은 유일하게 파손되지 않은 한 내실에 이르렀다.
"헉!"
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무시무시한 마기가 그의 호흡을 질식시킬 듯 했기 때문이었다.
내실은 전체가 청강옥석(靑剛玉石)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바닥에 고대인의 복장을 입은 극히 패도적인 느낌의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고대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백천강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한동안 떨림을 금치 못했다. 고대인이 눈을 부릅뜨고 백천강을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으으!"
백천강은 마치 암살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대인의 눈빛은 그만큼 형형했다. 백천강은 가까스로 호흡법을 전개해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천오백 년이나 지났는데 시신이 썩지 않았다니...이 자는 필경 기환궁주일 것이다!"
백천강의 추측은 맞았다.
고대인은 바로 기환궁주였다. 그는 아득한 옛날 대막 혈천마국에서 왕의 자리를 다투다 중원으로 넘어온 혈성군(血聖君) 공야후(公冶候)였던 것이다.
백천강은 기환궁주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한순간 그의 눈길이 기환궁주의 손가락 끝에 멎었다. 기환궁주의 손가락은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백천강은 급히 바닥에 시선을 떨구었다.
지력(指力)으로 새긴 글이 기환궁주의 무릎 아래 있었다. 그것은 고문(古文)이었다.
백천강을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하늘을 저주한다. 나 혈성군이 기환대천하를 이루었음에도 이렇게 속절없이 허무한 죽음을 맞아야 하는가? 십 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귀식대법(鬼息大法)으로 숨을 쉬지 않은 채. 그러나 이제는 더 살 수가 없다.
아아! 하늘이 저주스럽다. 모두 죽었다. 모두... 그들은 충직한 형제들이다... 오오... 왜... 무엇 때문에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져야 하는가?>
구구절절이 저주와 한으로 이어진 글귀였다.
백천강의 피는 자신도 모르게 끓어 올랐다. 그는 계속 글을 읽어내려갔다.
그의 안색은 수시로 변했다. 어느 한순간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그러나 이대로는 사라지지 않으리라. 반드시 기환궁의 혼을 전하리라. 훗날 후인이 이곳에 들면... 그가 곧 기환궁의 혼을 이으리라. 그래서 노부는 안배를 해두었다. 노부가 마지막 심혼을 다해 창안한 기환마마공(奇幻魔魔功)과 열 명의 영겁불사마신(永劫不死魔神)이 그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영겁불사마신. 그들의 힘이라면 능히... 기환천하를 다시 이룰 수 있으리라! 이제 천하는 이 글을 읽은 후인의 것이다. 그대는 노부의 몸을 파(破)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얻으리라.>
기환궁주인 혈성군 공야후가 남긴 글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백천강은 격동하여 중얼거렸다.
"기환마마공과 영겁불사마신... 대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불현듯 제어할 수 없는 호기심이 백천강의 내부에서 불꽃처럼 솟구쳤다.
"몸을 파(破)하라고?"
백천강은 중얼거리며 손을 들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곧바로 그의 몸을 파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 시신을 파한다는 것은 웬일인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망설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백천강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는 가차없이 손가락을 뻗었다.
"이 일은 기환궁주 스스로가 원한 일이오!"
꽈꽝!
폭음과 함께 혈성군의 시신은 박살났다. 그의 시신은 그대로 가루로 화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푸수수.......
돌연 뿌연 흙먼지가 혈성군의 시신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것은 혈성군의 시신이 아니었다. 단지 혈성군의 외모를 흙으로 빚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음!"
백천강은 뜻밖의 사실에 흠칫하며 신음을 토해냈다. 바로 이때였다.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흙인영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하나의 금환(金環)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
백천강은 더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즉시 금환을 당겼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굉음과 함께 실내가 흔들리면서 돌연 바닥이 그대로 꺼져내리는 것이 아닌가?
"앗?"
백천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순간 균형을 잃은 백천강은 빠른 속도로 지하로 떨어져 내렸다.
휘리리릭!
백천강은 급히 신형을 끌어올리며 편복괘천( 天)의 신법을 구사했다. 균형을 잡은 백천강은 엇비스듬히 떨어져 내리며 아래로 하강했다.
쿵!
백천강은 곧 바닥에 닿았다. 바로 그때였다.
"으으으!"
백천강의 입에서 갑자기 억누를 수 없는 신음이 터져나왔다. 견딜 수 없이 으스스한 마기가 순간적으로 백천강을 에워쌌기 때문이다. 백천강은 이를 악물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앗!"
갑자기 백천강의 눈에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굿,,,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