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한도> 21. 왕따
21. 왕따.
그렇다고 그 뒤로 다른 모든 일까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아버진 회사로 이틀에 한 번씩은 전화해서 회장님이 정한 시한이 다가오는데 결심을 굳히라고 해서 내 화를 돋웠고 내 직속 상관인 과장은 회장님이 지시한 일이 분명한 씨네 시대 관련 업무들을 내게 주었다. 난 아버지까지 씨네 시대를 강요하는 추세에 짜증이 나서 다 거절했지만 그 외의 일들은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책상 앞에 일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 주위의 사원들이 오늘은 너무 바빠서 화장실을 종일 한 번 밖에 못 갔다는 둥, 자기는 한 번도 못 갔는데 그것도 지금 알았다는 둥 그러는데 나만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래서 너무 바쁘다는 사람들에게 도와 주겠다고 하면 그들은 그래도 내 일은 내가 해야 한다고 하거나,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결같이 부드럽게 그러나 절대 사양하며 과장의 눈치를 슬며시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쪽을 보면 과장은 전혀 나를 보고 있지 않지만 그 신경이 온통 내게 집중되어 있다는 낌새는 충분히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뭔 지시가 있었구나 싶어서 그만두고 결국 컴퓨터로 사내 열람실에 들어가 재작년부터의 회사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며 지냈다. 한 2주간을 그렇게 지내니 시대 물산의 모습이 대충 머리 속에 잡혔다.
여전히 외톨이였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더 심화되는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만만해보이지 않는 나 같은 부하를 데리고 있는 상관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고 이해가 가기도 했다. 사원들은 사흘이 멀다하고 회장실 호출을 받고, 과장이나 부장의 지시에도 안하무인격인데다 정시에 꼬박꼬박 출근해서는 빈둥대는 나를 무슨 외계인처럼 대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같은 부서의 같은 직급의 대리는 회장님과 아주 가까운 친인척 관계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공식적으로 나는 유학을 하고 특별 채용된 대리일 뿐이었다. 난,
“네.”
하고 대답했다.
꽤 은밀한 사실에 대한 답을 너무 선선히 얻었다 싶었는지,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그럼 정확히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회장님 큰 아들의 큰 딸이예요.”
또 망설임 없이 대답해 줬더니, 그는 좀 의심하는 눈빛으로,
“네에.”
하고 내키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러갔다.
회장 장남에겐 공식적으로 아들 둘만 있을 뿐인 것이다. 그 뒤로 나를 보는 사원들의 눈빛은 쟤가 정말 회장의 손녀일까, 아님 사깃꾼일까 무척 헷갈리는 분위기였다.
어떤 사원은 대리님은 입는 옷이 거의 아르마니이고 백이나 구두는 루이뷔똥, 페라가모던데, 굉장히 부자신가봐요 하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번에도 솔직하게
“내가 부자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서 매달 통장에 용돈이 넉넉하게 들어와요.”
하고 얘기했는데, 하루는 화장실에서 그 사원이 그 얘기와 함께 나에 대해 ‘재수 없다.’라고 표현하는 걸 들었다. 그 사원과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나의 비사교성을 어쩌지 못하고 좀 무뚝뚝한 소리로 말한 게 인상이 좋지 않았나 보았다. 어쨌든 난 점점 이상한 존재가 되어 갔다. 중, 고등학교 땐 공부는 못했어도 명랑해서 친구는 곧잘 사귀었는데, 그 후로의 10년 넘는 날라리 생활이 조직 생활에 대한 감을 마비시킨 모양이었다. 그나마 박종호와는 제법 친해졌지만 그 녀석은 만날 때마다 ‘서미현’과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피해야 했다.
사내에서 뿐 아니라 집에서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거나 멍하니 술을 마시거나 아님 셋을 함께 하거나 했는데, 낮잠이고 밤잠이고 얼마 전까지 그렇게 쏟아지던 잠조차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궁리 끝에 지금까지 대충 파악한 회사 자료를 바탕으로 <2001년 물산의 수출 전략>이라는 제목 아래 기획안을 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은 충분하다 못해 풍성했다. 24시간이 내 거였으니까. 잠이 안 오는 밤을 보내기에도 아주 좋았다. 내 딴엔 회사 기록과 내가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 밤을 새워 열심히 만들어서 회장님의 인정을 받아 혹시 물산에 머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회장님께 올렸다. 자신감과 기대감을 가지고 앉아 있는데 비서실에서 호출이 왔다. 회장실에 들어가자 회장님은 벌개진 얼굴에 충혈된 눈으로 노려 보며 이따위 대학교 신입생 리포트 같은 덜된 기획안을 감히 올렸느냐고 소릴 지르더니 대뜸 모니터를 번쩍 들어서 바닥에 내동댕이 쳐 버렸다. 모니터와 연결된 본체와 코드가 꽂힌 콘센트까지 모니터를 따라 떨어지고 부러져 나가며 번쩍하는 빛과 빠개지는 소리를 냈다. 나는 깜짝 놀라며,
‘팔십 먹은 노인네가 기운이 장사네’
하고 생각했다.
터지고 깨지고 부서지는 엄청난 소리에 문이 벌컥 열리고 비서들이 놀라 뛰어들어왔다. 회장님은 내게,
“나가아. 당장 사라져 버려엇.”
하고 분기탱천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역시나 싶었지만 그래도 반발심이 일었기에 인사도 안 하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먼젓 번처럼 회사를 뛰쳐 나가진 않고 내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분이 치밀었기 때문에 내친 김에 기획안을 몇 개 더 올려서 저 노인네 기운이나 쪽 빼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내 기운이 빠져서 책상 위에 턱을 받치고 인터넷이 접속해서 뉴스를 검색했다. 맨 경제 위기에 구조 조정 문제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 같은 직원이 안 잘리고 있으니 자리가 불안한 대부분의 사원들은 내가 얼마나 미울까 싶었다.
“유대리님.”
뒤돌아보니 처음 보는 아담한 체격의 사원이 상냥한 미소까지 띤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사내 방송하는 거 들으셨어요?”
“무슨 방송요?”
“오늘 네시에 여직원 휴게실에서 <시대 여우회> 임시 회의 한다는 방송했거든요. 어제부터.”
“아, 그래요? 내가 왜 못 들었죠?”
엉뚱하게 되물었다.
“글쎄요. 바쁘게 일하시다 못 들으셨을 수도 있죠. <시대 여우회> 연말 행사인 불우 이웃 돕기 모금에 관해 비상 회의가 있거든요. 대리님은 입사하신 뒤 한 번도 참석하시지 않으셨는데 오늘은 꼭 참석해 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하고는 생글생글 웃었다.
사실 입사 이후로 여사원 모임이 있다는 말은 몇번이나 들었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참석하리라. 심심하기도 했고 ‘재수없는’ 외톨이 신세를 면해 보고 싶었다.
세시 오십분에 휴게실로 갔더니 벌써 꽤 많은 사원들이 와서 몇 명씩 모여 뭐가 재미있는지 웃고 얘기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몇 명은
“어, 왔다, 얘.”
하며 옆 사람을 꾹 찌르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고, 몇 명은
“어서 오세요. 유대리님.”
하고 반갑게 맞으며 자기들 옆에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내게 모두 집중하는 분위기를 보건대 난 역시 이색적인 존재인 모양이었다.
“우리 <시대 여우회>에 처음 오셨죠?”
처음 보는 사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예. 그렇네요. 제가 그 동안 회사 생활에 소홀해서요. 죄송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얘기했다. 아까 내게 와서 이 모임이 있음을 알려 준 사원이 내게 주스 한잔을 갖다 주었다.
“고맙습니다.”
하고 예의로 얼른 한 모금을 마셨다.
회원들은 이제 날 중심으로 빙 둘러선 형국이 되었다. 난 좀 당황스러워서,
“아직 회원들이 다 안 오셨나봐요.”
하는 하나마나한 질문을 했다.
“네. 아직 반밖에 안 왔어요. 회장님도 안 오셨구요.”
회장님이란 말에 난 아주 잠깐 의아했고 긴장했다. 그러나 곧 이 모임의 회장이란 걸 생각하고 내가 회장님한테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한지 새삼 깨달았다.
“우리 <시대 여우회>원이 평사원에서 부장 직급까지 회원으로 해서 모두 75명이거든요. 그런데 아직 여부장님이 없어서 총무 과장님이 제일 높은 직급이고 대리 직급은 유대리님까지 다섯 분이예요. 나머진 평사원이구요.현재 회장님을 맡고 계신 분은 인재 관리부의 구 재인 대리님인데 아직 안 오셨어요. 전 총무를 맡고 있는 홍보부의 김경희구요.”
내게 주스를 가져다 준 사원이 설명해 주었다.
“네에 그렇군요. 그런데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네.”
좀 망설이다가,
“<시대 여우회>의 시대는 회사 이름이고 ‘여우’는 무슨 뜻이죠? 그 짐승 ‘fox’예요? 그건 아니겠죠?”
하고 묻자 모두들 눈이 둥그래지거나 입을 손으로 가리고 킥킥 하고 웃었다.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구나. 이따 한 사람한테 슬쩍 물어 볼 걸’
하고 후회했다.
“아, 발음 좋으시네요. 팍스. 미국에서 공부하셨다더니. 대리님 말씀대로 그런 뜻은 아니구요, 여자 녀자에 벗 우자 해서 <시대 여우회>는 우리 시대 물산 여사원들이 모두 친구처런 가깝게 지내고 좋은 일도 많이 하자는 모임이예요.”
웃으며 총무는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그렇군요. 제가 한문 실력이 워낙 없어서요. 학교 때, 객관식 중에 같은 번호만 모두 찍어서 받을 수 있는 점수인 20점 이상을 넘어 본 적이 별로 없어요.”
하고 변명하듯 말했다.
모두들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사실 나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들뜬 기분이었다. 난 남자들하고 있는 것보단 여자들의 무리 속에 있을 때 즐겁고 활기가 솟았다. 오랜 만에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난 확실히 이반이었다. 게다가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설명도 차근차근 해 주는 김경희에게 벌써 호감이 생기고 있었다.
누군가 회장님 오셨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모여 있어요?”
둥글게 모인 속을 뚫고 들어왔다. 중키에 야무지고 깔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안녕하세요? 회장님. 처음 왔습니다. 기획부의 유홍주입니다.”
하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평범하지 않은 눈길로 나를 보더니 내 손을 마주 잡고,
“예, 구재인이예요. 잘 오셨어요. 환영합니다.”
하고 웃었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누군가 옆에 앉더니
“괜찮으세요?”
했다.
돌아봤더니 낯익은 비서실 직원이었다. 속으론 ‘맙소사 여기서 만나다니.’ 했지만 웃으며,
“그럼요. 하루 이틀 혼났어야죠. 제가 후천성 구박 면역증이예요.”
하고 대답했다.
회의 내용은 간단했다. 예년처럼 고아원 한 곳에 이백만원, 양로원 한 곳에 이백만원, 소년소녀 가장 3명에게 각 일백만원씩 모두 칠백만원의 성금을 전달하기로 약속을 해 뒀는데, 올해도 경제 형편이 더 어려워져서인지, 여우 회원들이 모은 돈 이백 오십만원, 전체 사원들에게 모금한 돈이 일백 이만원, 일일 찻집으로 모은 돈이 일백 오십사만원, 해서 목표액에 약 이백만원이나 모자라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겠느냐는 문제였다. 전달 시기를 늦춰서 더 모금해 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요즘 경제 형편이 이런데 받는 쪽에서도 이해할 거라며 이대로 전달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앞에 앉은 사원 하나가 손을 번쩍 들어서 발표권을 얻었다.
“경제 상황이 요즘 같은 때, 우리마저 전달 액수를 줄이거나 시기를 늦추면 어려운 분들이 더 어렵게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모금을 더 하는 게 어떨까요? 우리 여우 회원들 중에 부자 아버지를 두셔서 경제 형편이 아주 양호한 분이 계시던데, 그 분이 부족액을 채워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당차게 말하더니 갑자기 고개 돌려 나 있는 쪽을, 아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놀랐다. 그녀는 내게 고급 외제품만 쓴다며 부자인 것 같다고 물었던 사원이었다. 다른 회원들도 그녀의 주시 방향을 살피다가 나를 보고 있었다. 결국 나보고 부족액을 해결하라는 의미였다. 난 이게 조직적으로 계획된 행동들일까, 아니면 정말 비상 회의 중 우연히 일어난 상황일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어려운 사람 돕는다는데 좋지, 뭐. 하는 일 없이 사치스럽게 사는 데 가책이 느껴지던 참이니까.’
난 슬그머니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회장이 나를 지적했다.
“<시대 여우회>에 처음 참석했는데,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올해 주식 투자를 좀 해서 이익을 본 돈 일부로 모자라는 이백만원을 보충하고 싶습니다.”
하고 없는 사실까지 꾸며 능구렁이처럼 얘기했다.
아버지 닮은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놀라고 누군가의 선도로 박수가 시작돼 모두에게 번졌다. 그러자 이게 정말 조작된 회의일지라도 난 기분이 좋아졌고 쑥스럽게 웃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시대 여우회> 임시 회의는 끝났다. 난 내친 김에 회원들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제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열흘 남짓 뒤의 내 운명을 예측해 보건대, 난 다음번 <시대 여우회> 의 ‘여우’가 될 자격을 잃어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세한도> 22. 이 곳 생활에서 얻은 것.
22. 이 곳 생활에서 얻은 것.
12월 말에 내가 예스를 하든 노를 하든 회장님은 나를 <씨네 시대>로 발령낼 것이다. 그에 대한 내 대응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씨네 시대>에 출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도 회장님과의 대결이 끝없이 계속된다면 난 도망갈 것이다. 사실 M.B.A 학위 취득 이후 먼저 취직한 동기가 자신의 회사로 오라는 제의를 계속했는데 카미유와의 파탄으로 취직할 정신이 아니었는데다, 취직할 이유도 없어져서 거절했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진 지금, 며칠 전 통화해서 그 제의가 아직 유효하다는 대답을 얻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힘으로 살아야 하니 지금과 같은 시간적 여유는 잃겠지만 그 쪽 연봉도 만만치 않으니 경제적 여유는 지금 못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새 생활에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곳에서도 내 성 취향을 드러내지 못하고, 연인을 만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가는덴 이유가 있다. 정신적, 육체적 짝을 찾는 건 인생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난 그 동안 너무 그것에만 내 삶을 소모하여 삶의 다른 부분들을 모두 방기해 버리고 있었다. 여섯 달 간의 이 곳 생활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더 이상 허송세월하며 방황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변화였다. 게다가 내 맘에 꼭 들지는 않더라도 내 의사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 점들을 바라고 가는 것이다.
<세한도> 23. 이 사람은 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23. 이 사람은 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크리스마스엔 시대에서 주최한 만찬이 있었다. 회장님이 참석하라고 해서 순순히 따랐다. 회장님은 그곳에 초대 받아온 사람들에게 나를 아버지의 장녀로 정식 소개했다. 소개할 때마다 내가 미국 유학에서 M.B.A 학위를 받아온 점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다. 부끄러운 사연을 그 점으로 상쇄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그것마저 내게 없었다면 어쩔 뻔 했을까. 내 존재 가치는 오직 M.B.A 뿐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씨네 시대>에서 1월 초부터 정식으로 근무하라고 말했다. 양자 택일하라더니 물어보지도 않고 결정을 해 버린 것이다.
최의원 내외와 <씨네 시대> 아니면 택하라고 했던 그 아들까지 만나서 인사했다. 나보다 네살 많은 아저씨 티가 확 나는 남자였다. 이 사람은 이 나이 되도록 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일에 열중하느라 결혼 생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그건 아닐 것이다. 저런 집안에선 결혼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결혼 생활이 중요한 건 아닐테니까. 그럼 정말 혼자 사는 게 편하다고 믿는 사람일까? 부모의 허락을 받지 못하는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어서 버티는 중인가? 한 여자만 택하기엔 나머지 여자들이 너무 아쉽고 아까운 바람둥이일까? 아님 나와 같은 성적 취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도 동성애자일까? 어찌 보면 그런 것도 같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은 예의바르고 부드럽긴 하지만 이성애자가 이성을 바라볼 때의 그윽하고도 열을 품은 빛이 없다. 그리고 늙어보이긴 하지만 아주 깔끔하고 말쑥하다. 그런 것도 같다. 난 최영준이라는 그 남자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러다 남들이 내게 품거나 묻는 것 중 제일 질색하는 의문을 내가 그에게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 미안해짐과 동시에 사람들은 남의 일에 왜 그리 쓸 데 없는 관심을 가질까라고 짜증스런 생각을 하던 나도 별 수 없이 자기중심적인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 남자와 결혼하는 일은 없게 된 것이다. 결혼과 <씨네 시대> 중 택일하라고 한 것은 결국 <씨네 시대>에서 일하게끔 몰아 넣기 위한 장치임을 알고 있었다.
선배님은 손님들을 접대하느라고 바빴다. 난 저런 삶을 살 자신이 없다. 대충 내 역할이 끝난 것 같아 내일 오후에 미술관에 가겠다고 선배님께 말하고 떠나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팔을 가볍게 잡았다.
“누나, 홍주 누나 맞죠?”
맑고 붙임성 있는 목소리가 귀에 익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 보았다. 목소리에 잘 어울리는 희고 잘 생긴 얼굴에다 키가 훤칠한 젊은 남자가 웃으며 서 있었다.
“어어, 너 우현이 아니니?”
난 단번에 반가운 표정으로 변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온 얼굴을 기쁨으로 빛내며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흔들었다.
“누나도 여기 들어와 있었군요. 어쩐지 안 보인다 했어요.”
“응, 6월에 왔어. 넌? 언제 들어 왔어?”
“공부 마치고 온지 한 2년 됐어요.”
“그렇구나. 이게 얼마만이니? 짜식. 여자 맘 설레이게 하는 그 멀끔한 얼굴에 목소리는 여전하구나.”
카미유와 헤어진 뒤 거의 모든 인간 관계를 절연하다시피했으니까 그와 마지막 만난 것도 그 때쯤일 것이다.
김우현(金優賢). 이 녀석은 창조주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태어난 인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게 완벽한 남자였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산뜻한 미남에, 운동으로 단련된 멋진 체격을 가진데다, 머리도 좋아 하버드에서도 주목받는 경영학도였다. 성격도 서글서글, 다정다감하고 스포츠에 만능인데, 특히 스쿼시를 잘 해서 학교나 한인 학생회의 대표로 활약했다. 이반인 내가 보기에도 이 녀석의 쪽 빠진 긴 다리나, 매끈한 엉덩이는 한 번 쓰다듬어보고 싶을 정도로 섹시했다. 나는 스쿼시라는 운동이 좋아서라기보단 겉멋이 들어 대학 때 시작했다가 그를 알게 되었다. 당연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은데다 바람둥이였다. 원하기만 하면 어느 여자와도 잘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그가 바람둥이고 자신이 하룻밤 상대라는 걸 알면서도 여자들은 그에게 연연해 했다. 내가 은근히 맘에 두고 있던 여자들도 어느 새 그에게 ‘먹혔다.’ 라는 소문이 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난 무척 화가 나고 그 여자들이 멍청해 보였고, 그의 반반한 얼굴을 갈겨주고 싶은 마음조차 들었다. 물론 그의 완벽한 조건을 생각하면 이해는 되었지만, 나도 성격 명랑하고 잘 놀고 외모도 뭐, 괜찮은데 내겐 아무 생각없는 여자들이 우현이에게 열광하는 건 순전히 남자라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건 자연의 이치라고 당연하게들 생각하겠으나, 내 사고 방식으론 정말 화나는 일이었다. 난 여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동성애자라도 사랑하기만 하면 나 같은 일편단심인 사람보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바람피우는 저 우현이 같은 이성애자가 더 좋단 말야?’ 어리석은 질문인가? 어쨌든 카미유와 사귄 이후론 스쿼시 치러 가게 되면 카미유마저 우현이에게 반할까봐 얼마나 감시를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우현이에게 정말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붙임성있고 싹싹한 성격이어서 귀여워 했었다.
오늘도 영락없이 그의 옆엔 20대 초반의 섹시한 여자 애가 팔장을 끼고 꼭 붙어 있다. 어린 걸로 봐서 예전에 몇번 얘기한 적 있는 정혼녀가 아닐까 싶었다.
“누나 잠수탄 뒤로 못 봤으니까 삼년 가까이 되었지요. 그런데 누나가 이집 딸이었어요? <씨네 시대> 후계자에다? 그 때도 누나네 집안이 보통 아니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 정돈 줄 몰랐네. 이야, 아깝다. 이런 줄 알았으면 내가 누나 잡는건데.”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리송한 말을 하는 녀석을 보며 나도 같이 웃었다. 우현이를 만나니 연인이 없어 외롭긴 했지만 그래도 별근심없이 명랑했던 그 시절이 생각나 난 오랜만에 활기가 생겼다.
“그래. 너 이제야 그거 깨달았니? 그 때 네가 날 잡았어야 했는데. 왜 나한텐 관심을 안 보였니? 내가 남몰래 삼킨 눈물이 소방차 한 탱크분은 될 거야.”
난 농담으로 맞장구치다가 옆에 선 여자 애에게 미안해져 멈칫했다. 그런 내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정은아, 나 이분이랑 오랜만에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잠시 자리 좀 피해 줄래?”
했다.
“오빠, 정말 이분이랑 결혼할 거예요?”
그 애는 거리낌없이 질투의 시선을 드러내며 말했다. 난 이렇게 성급하고 노골적으로, 남자로 인한 질투와 적개심을 드러내는 여자 애는 딱 질색이었지만 간만에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얼른 변명을 해 주었다.
“아니예요. 걱정말아요. 난 이미 임자 있는데다 얜, 나이 많은 여자 좋아하지 않아요.”
그 애는 싫은 기색과 의심의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물러갔다.
‘얘야, 난 너의 질투의 대상이 아니란다. 오히려 너를 두고 우현이와 경쟁을 하게 될 수도 있는 사람이야.’
“누나가 언제 나한테 관심 있었어요? 난 여자 눈만 보면 딱 안다구요. 저 여자가 나한테 반했는지, 반했으면 당장 오늘 밤을 보낼 수 있는지, 아님 며칠 분위기를 잡아 줘야 할지. 누나는 날 소, 닭보듯 했으면서. 그런 여자가 누나까지 딱 둘이었어요.”
우현이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피시식 웃으며 말했다.
“넌 아직도 건방에 바람기가 천장을 찌르는구나. 네가 아무리 멋있어도 너한테 관심 안 보인 여자가 둘 밖에 안 되었겠니? 그럼 또 하난 누구야?”
“있어요. 내 뇌 쌍둥이.”
“뇌 쌍둥이? 너만큼 머리 좋은 여자가 있었단 말이지? 정말 그 여자 똑똑한가 보다. 너한테 안 넘어갔으니.”
“그런데 정말 누나 임자 있어요?”
“아니, 그 아가씨가 질투의 눈으로 째려봐서. 네 정혼녀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별로야.”
“에이, 쟨 그냥 한 때예요. 수는 아, 정혼녀랑 약혼했는데, 이름이 수예요. 신수(辛秀). 저런 여자랑 비교가 안 되는 올곧고 똑똑한 애예요. 아, 지금 사진 있어요. 보여드릴께요.”
하더니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소중하게 집어내었다.
“보세요.”
우현이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여자 애를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우현이의 어깨에 닿을 정도의 아담한 체구에 예쁘다곤 할 수 없는데, 보름달처럼 희고 둥근 얼굴에 총기어린 눈, 해맑은 미소를 지닌 영민한 소녀였다.
“참 괜찮다. 그런데 어려 보여. 몇살이니?”
“지금 고 3이예요. 예쁘죠? 지금까지 제가 만난 여자들하곤 천지 차이로 순수하고 의젓하고 기품있어요. 저 이 애 너무 사랑해요.”
하는 목소리에 자랑과 감동조차 실려 있어 그를 봤더니, 처음 보는 진지함과 애정이 눈에 담겼다. 완전히 빠졌구나 싶었다. 그런데 나도 사진만 보고도 첫눈에 반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 앉는 걸 느꼈을 정도로. 카미유보다도 더 내 이상형이었다. 내가 10년만 젊었더라면 물불 안가리고 과감히 대쉬했을 것이다. 이 녀석의 약혼자인데다 너무 어린 게 정말 정말 안타깝다. 사진에서 눈을 떼기가 아쉬웠다. 이 아이도 이성애자라서 소용은 없겠지만 한 번 만나 보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언제 한 번 같이 만나자고 해서 실제 인물과 성격을 알고 싶었다. 이 녀석은 웬 행운이, 특히 여복이 이리 많은 걸까. 질투가 나서 대뜸 물었다.
“너 바람둥인 거 알아?”
“아뇨. 그런 거 몰라요. 수는 나를 거의 존경의 수준으로 사랑해요. 제 본 모습, 수에겐 절대 숨겨야 해요. 저 결혼하면 과거는 깨끗이 정리하고 수만 보고 살 거예요.”
그는 정말 약혼녀가 자신의 바람기를 알까봐 겁나는 표정이었다.
“너야말로 임자 만났구나.”
나는 쌤통이라는 듯 웃으며 그의 어깨를 쳤지만 속으론 부러웠다. 우현이와 만찬장을 떠나 바에 가서 술을 마시며 옛날 얘기에 빠져 크리스마스를 그럭저럭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세한도> 24. 하소연
24. 하소연
회사에서 일찍 나와 미술관에 갔다. 새로 전시된 그림들을 보고 관장실로 갔다. 비서는 역시 날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선배님은 바빴다.
“그저께 만찬 준비하고 어제 늦게 만찬 끝나서 오늘 오후에야 출근했더니 일이 밀렸네.”
서류를 들여다 보며 얘기했다.
난 비서가 가지고 온 차를 마시며 <세한도>를 보았다. 가운데에 엉성한 집 하나, 그 좌우에 비쩍 마른 나무 몇그루, 그리곤 모두 여백. 그린 이의 심정에 연민을 느꼈다.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저 그림에 들어갈 것 같았다. 회장님을 견뎌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윤리를 견뎌내고 있으니까.
이 곳을 떠나기가 서운한 단 하나의 이유는 선배님이었다. 선배님하고도 연락을 끊을 것이다. 십여세 때부터 가끔씩이지만 선배님이 꾸준히 옆에 있어줬는데 이젠 그나마 잃어버리는 것이다. 오늘은 그녀에게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 만나자고 한 것이다. 백화점을 돌며 구경하다가 선배님은 내게 엘르의 실크 나이트 가운을 사 주었다. 엉덩이까지만 덮는 아주 자극적인 모양이었다. 난 흰 면티와 팬티 바람으로 자는 습성인데다, 이런 걸 입고 야함을 과시할 대상도 없었기에 싫다고 했으나 한 번씩 입어보는 것도 괜찮다며 굳이 내게 주었다. 나는 최고품의 터키석 세트를 골라 주었다. 내 연봉에 가까운 가격이었지만, 그녀가 내게 해 준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게다가 영원히는 아니리도 최소한 십년은 못 볼테니까. 선배님은 가당치도 않다며 거절했지만 그러면 나도 나이트 가운을 물르겠다고 했다.
조선 호텔로 가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선배님은 그 동안 핸드폰으로 통화가 되지 않더라고 했다. 잃어버렸다고 대답했다. 씨네 시대에서 근무할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시대 물산이 맘에 드느냐고 했다.
“아뇨. 씨네 시대가 싫으니까 물산에 그대로 있게 해 달라는 거지 좋은 건 아니예요.”
“일이 힘드니?”
“뭐, 일다운 일이라도 해 봤어야 알죠. 대인 관계가 어려워요.”
“왜? 누가 못살게 굴어?”
그녀는 마치 자식 못 살게 구는 놈을 혼내 줄 엄마처럼 물었다.
“글쎄요. 제가 사교성이 빵점인가봐요. 사람들이 절 가까이 하려고 하질 않아요.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네가 회장님 손녀라는 거 알고 있니?”
“아뇨. 그냥 유학 갔다와서 특채된 대리로 소개됐어요. 그런데 제가 회장실 자주 불려다니고 부장, 실장님이 시키는 거 잘 안 하고 초기엔 더 뺀질거렸더니 절 이상하게 봐요. 요즘 같은 경제 난국에 그 모양인데도 안 잘리니 궁금했나봐요.”
같은 부서의 대리와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제가 정말 회장 손년지, 사기꾼인지 엄청 헷갈려 하는 눈으로 봐요.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중간은 가는 길이다.’ 하는 생각들을 하나 봐요.”
“대부분 그런 사실은 공식 발표 있기 전까진 숨기는데, 솔직하게 쉽게 대답해 주니까 되려 의심스러웠나보다.”
선배님은 웃으며 말했다.
“또 한 번은요, 한 사원이 제 물건에 명품들이 많은데, 부자냐고 그래요. 그래서 별 생각없이 내가 부자는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서 통장에 용돈이 넉넉하게 입금된다고 그랬더니, 며칠 뒤에 화장실에서 볼 일 보는데 밖에서 그 여자가 다른 사원들 앞에서 내 말 흉내를 내잖아요.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아으, 왕재수. 그 여자 서른이 넘었는데도 여태 결혼도 안 했대. 못 한 거겠지. 그런 여자, 남자들이 되게 피곤해 할거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사원들이 동조하며 막 웃더라구요. 전 정말 친해보려고 호의를 가지고 정성껏 대하고, 밥도 사고, 차도 사고 그러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아요. 제게 무슨 잘못이 있는 건가요?“
나는 알 수 없어 물었지만 선배님은 여전히 막 웃었다.
“웃지 마시구요.”
내가 조르자,
“글쎄, 이런 말 하면 신귀족주의자라고 하겠지만, 서로 비슷해야 어울리게 되지. 너 지금 상태론 그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 지금 네 몸에 있는 것들만 현금으로 따지면 평사원들 반년치 연봉이야. 그 사람들 눈에 네가 정상으로 보이겠니? 게다가 부장, 실장이면 평사원들한텐 얼마나 높은 직급인데, 시키는 일도 안 하고. 어울리고 싶으면 그 사람들과 똑같은 차림하고, 부장, 실장님 앞에선 어려워하고 그 따위로 하려면 사표 쓰라는 호통 몇번 들으면 돼. 그러면 네가 원하지 않아도 너한테 손내미는 사람들이 생길거야. ”
하고 웃으며 말해 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말했다.
“그럴 날이 머지 않았어요.”
“그렇게 하겠다고?”
나는 당황해서,
“아뇨. 그런데 회장님은 여든 살이 다 된 양반이 웬 힘이 그리 세요?”
하고 말을 돌렸다.
“왜, 회장님이 힘 자랑이라도 하셨어?”
선배님은 이번엔 또 무슨 얘기가 나오나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물산에 조금이라도 오래 붙어 있을까 싶어서 기획안을 하나 만들어 올렸더니, 저를 호출해서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구식 모니터를 번쩍 들어 저만치까지 내동댕이를 치더라구요.”
“어머, 그런 일이 있었구나. 회장님이나, 너나 어디 다치지 않았어?”
“아뇨. 힘이 워낙 세서 멀리 던졌어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유리창 뚫고 나갈 정도였어요.”
“회장님이 워낙 건강 체질이셔.”
“아이, 선배님. 노인네가 그 나이 되도록 힘세면 징그러워요. 자꾸 여자 생각만 나구. 매일 산삼 샐러드에 독 반만 뺀 살모사 회, 물개 거시기 샤브샤브, 철갑상어알찜, 장어 꼬리구이 뭐 그런 거만 식탁에 올리시는 거 아니예요?”
내가 웃으면서 묻자,
“얜, 징그럽게. 회장님 건강이야 전문가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가 되니까 정정하신거지. 그리고 며느리 앞에서 무슨 여자 생각이 난다는 둥 그런 소릴 하니?”
하고 웃으며 손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손을 찰싹 때렸다.
“유대리님, 안녕하세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봤더니 늘씬한 몸매가 온전히 드러나는 야단스럽도록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블론드빛 긴 머리를 굽실굽실하게 멋지게 파마를 한 여자가 재클린 썬글라스를 쓰고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이런 여자가 없는데. 내가 언뜻 알아보지 못하니까, 썬글라스를 벗었다. 미기였다. 놀라서 말을 못하고 있는데 그 애는,
“오랜만에 뵙네요.”
하고 천연스레 웃었다.
“네, 네. 그렇네요.”
그렇게만 말하고 눈을 돌려 선배님을 바라보았다. 선배님은 불쑥 나타난 사람을 미소를 짓고 바라보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이 애가 선배님 앞에서 무슨 실언이라도 할까봐 걱정되었다.
“안녕하세요? 말씀 나누시는데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웃으며 미기는 선배님께 인사를 꾸벅 했다.
“아니예요. 괜찮아요. 여기 앉으실래요?”
하고 선배님은 옆자리로 물러났다.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행이 있어서요. 유대리님을 오래 못 뵈었는데, 여기서 만났어요. 그런데 혹시 <씨네 시대> 유성희 사장님 사모님 아니세요?”
미기는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날 기억해요? 영광인데요. 서미현씨가 알아보다니.”
하고 선배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어머, 오히려 제가 영광이예요. 10월 개막식 때 한 번 인사드린 것 뿐인데 절 알아보시겠어요?”
“그럼요. 우리 아들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고맙습니다.”
미기와 선배님은 서로 반가워했다.
“우리 유대리하고 잘 아나봐요?”
두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대리님은 아닌가봐요. 유대리님, 왜 핸드폰 꺼놓으셨어요? 제가 몇번이나 연락드렸는데.”
“잃어버렸어요.”
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얘가 왜 이러나’ 하며 속은 편치 않았다.
“얼른 하나 마련해라. 나도 답답했다.”
아무 사정도 모르는 선배님이 미기를 거들었다.
“일행들이 기다리겠어요.”
내가 눈치를 주자,
“아, 제가 방해가 되었나 봐요. 제 명함 가지고 계시죠? 핸드폰 새로 하시는대로 번호 가르쳐 주세요. 그럼 가볼께요. 재미있게 지내세요, 사모님.”
미기가 웃으며 선배님께 인사하고는 내게 인사인 듯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제 왼 손으로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 손목에 콘스텔레이션이 있었다. 선배님은 미기의 뒷 모습을 흐믓한 표정으로 계속 바라보다가,
“얘, 정말 예쁘지 않니? 같은 여자인데도 탐난다. 어떻게 저런 미모에 저런 몸매가 나온다니?”
하고 칭찬했다.
“요즘에 돈 들여서 안 되는 일 있나요? 저한테 한 달만 시간 주세요. 쟤랑 일란성 쌍둥이가 돼서 나타날께요.”
내가 무시하듯 말하자,
“그래. 어찌 보면 우리 홍주가 더 나은 데도 있지.”
하고 나를 보고 웃었다.
내가 질투해서 한 대답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어서 난 살짝 눈을 흘기며,
“아이, 놀리시기예요?”
하고 웃었다.
“서로 어떻게 알았어?”
“<씨네 시대>에서 몇번 봤어요. 제가 아버지 딸이라니까 친하고 싶은가 보죠.”
내가 아는 한 내가 아버지 딸이라는 걸 미기는 모르겠지만, 변명을 위해서 미기를 좀 치사한 쪽으로 만들었다.
“으응. 그런데 싸인이라도 받아둘 걸. 재현이하고 재우가 쟬 너무 좋아해. 재현이는 한 살 밖에 차이 안 난다고 가능성이 있다나. 그럼 재우는 요즘 여자들은 더 어린 남자를 좋아한다고 우기고. 나 참, 걔들 하는 거 보면 웃겨. 예전엔 서로 다른 여자 애들 좋아하더니만 휴대폰 광고 보곤 반해서 방에 사진으로 도배를 해놨어.”
“좋겠네요. 남자들한테 인기 많아서.”
비꼬듯 말했다.
“하던 얘기나 해요.”
“그래. 회장님 건강 얘기 했었지?”
“네.”
“회장님 모니터 던지신 얘기는 너한테 처음 듣는 거고, 아버지가 네가 올린 기획안을 봤다고 그러시더라. 회장님이 보여주시면서 널 <씨네 시대>에 꼭 잡아 놓으라고 하셨대. 물산과 관련된 기획안이라서 화가 나신 거지, 그 내용 자체는 맘에 드셨나봐.”
“그래요?”
뜻밖이었다.
“그러면 대충 용서하실 것이지. 모니터까지 부술 건 뭐예요? 비서들 보는 앞에서. 그래 봤자 회장님 재산 축나는 거지, 뭐.”
입을 비쭉했다.
<세한도> 25. 그 사람도 이반인 거예요.
25. 그 사람도 이반인 거예요.
그러나 머릿 속에선 미기가 왜 날 피하지 않고 아는 척을 했을까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날 밤 일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무슨 다른 용건이라도 있는 걸까?
“최영준씨는 어땠어? 괜찮았니?”
“왜 그렇게 늙었어요? 완전히 아저씨던데요?”
탄력없이 늘어진 얼굴살에 중년티가 나던 두툼한 체구를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같은 날 만났던 우현이가 생각나 더 비교가 되었다. 잘 생긴 남자를 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얘는, 나이가 서른 다섯인데, 며칠 있으면 서른 여섯이야. 그 나이가 그렇지, 뭐.”
선배님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가요. 그런 사람이 제 상대가 될 만큼, 신선 놀음 하는 사이에 세월이 많이 흘렀나 봐요.”
나는 쓰게 웃었다.
“아냐, 넌 대학 갓 졸업한 정도로 밖에 안 보여.”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도 너무 과장이 심했다. 내가 봐도 그건 아닌데.
“입시에 한 5수쯤 하고 갓 졸업한 졸업생 말이죠? 하하하. 그래도 위로가 되네요.”
어쨌든 젊어보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그 나이 되도록 결혼을 안 했대요?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나?”
그 말을 해 놓고 난 ‘아차’ 싶었다. 그 케이스가 바로 아버지였으니까. 선배님은 감사하게도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쎄,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다가 뒤늦게 영국에 정치 공부하러 갔다가 귀국한지 얼마 안 되었다는데.”
했다.
“제 생각엔 그런 집안에서 공부한다고 결혼을 뒤로 미룰 리가 없을 것 같은데요. 유학 온 친구들 보면 결혼이나 약혼해서 같이 온 커플들이 많아요.”
“그렇기도 하네.”
선배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가 무슨 생각했는지 아세요?”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무슨 생각?”
“그 사람도 이반인 거예요. 우리가 결혼하면 저나 그 사람이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테고 그럼 각자 성취향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요. 인공 수정을 하든지 해서 애는 하나 낳죠, 뭐.”
내 생각이 어떻냐는 듯 선배님을 응시했다. 선배님은 어이가 없었는지 입을 벌리고 나를 보았다. 그 반응에 내가 잘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아녜요, 아녜요. 제가 엉뚱한 생각했어요.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하고 취소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완벽하려면 너와 그 사람이 사귀는 상대방 두 사람도 결혼해야 할 동성애자 파트너가 있어야 할 것 아니니?”
“아, 그 생각 못했네. 그럼 우리가 사귀는 두 사람을 우리처럼 결혼시키죠. 에이, 제가 엉뚱한 생각했다니까요. 그만.”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제지하둣 손바닥을 내밀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이든 사람 싫다면 젊은 사람으로 내가 찾아 볼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저 결혼할 맘 없어요.”
갑자기 마음이 혼곤해져서 와인을 한 잔 마셨다. 선배님은 백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나는 언제나처럼 라이터를 얼른 받아 불을 붙여 드렸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나는 쓸쓸하게 웃으며,
“선배님은 이 얘기만 나오면 담배를 피우시네요. 그렇게 답답하세요?”
했다.
“네가 이젠 남들이 인정하는 제도 내에서 널 사랑하는 좋은 사람 만나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살면서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도 네 방식을 고수하는 건, 그 쪽에 필연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난 네 의사를 존중해. 네 방식대로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면 돼.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이렇게 쓸쓸한 모습 보면 안타까워.”
하며 테이블 위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가슴 속 어딘가가 얼음이 녹아 흐르듯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상대로 똑 같은 생각을 해왔다. 우린 서로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나 보았다.
미소지으며 나머지 손으로 선배님의 손을 꼭 모아 쥐었다.
“세상에 절 이해해주는 단 한분을 만난 것 만도 행운이예요.”
우린 마주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녀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내뿜으며
“사람들이 우리가 사귀는 줄 알겠다.”
하고 웃음 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사람들이 많지요.”
하고 선배님의 손을 놓고 바로 앉았다.
“나 대학 때엔 여자끼리 손잡고 다니면 당연히 우정으로 여기고 오히려 남녀가 손잡고 다니면 눈살을 찌푸렸는데, 요즘은 세상이 너무 변해서 남녀가 손잡고 다니면 당연하게 여기고 여자끼리 손잡고 다니면 동성애로 보더라. 우정이란게 너무 가볍게 취급돼.”
선배님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얼른 좋은 사람 만나길 바라지만 그렇게 되면 처신이 힘들지 않겠니? 더구나 할아버지가 아시면......”
그 말을 듣고 난 속을 좀 드러내 보기로 했다.
“그게 걱정이예요. 그런 순간이 오면 다시 돌아가죠, 뭐.”
가벼운 생각인 것처럼 말했다. 선배님은 나를 지그시 보더니,
“그래서 네가 행복하다면 그래야지. 그래도 나하곤 연락 끊지 말아라.”
했다.
“역시 선배님이예요.”
그 때 종업원이 와서,
“실례합니다. 손님 성함이 유홍주님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서,
“네.”
했다.
“데스크에 전화 왔습니다.”
“전화요?”
뜻밖이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이 없을텐데. 하고 생각하며 선배님을 봤더니, 그녀는,
“여기로 전화기 가져다 주면 안 될까요?”
하고 물었다.
“전화 거신 분이 데스크에서 받길 원하십니다.”
“누구지? 갔다 올께요.”
난 고개를 갸웃하며 종업원을 따라 데스크로 갔다.
“여보세요. 유홍주입니다.”
“미기예요.”
말문이 막혔다.
“여보세요?”
“왜요?”
난 짜증이 스민 소리로 대답했다.
“놀라셨어요?”
“어쩌라구 전화 했어요?”
“사모님하고 헤어지신 후에 저하고 만나요.”
“싫은데요.”
냉담하게 말했다.
“고개 들어 보세요. 저 보이실 거예요.”
고갤 들어 봤더니 10미터쯤 떨어진 일산이 쳐진 탁자에 블론드의 굽실굽실한 긴 머리를 한 미기가 핸드폰을 귀에 대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 호텔 나가서 오른 쪽으로 <엠.지.엠>이라는 까페 있어요. 저 지금 나가서 오실 때까지 기다릴께요.”
그 애의 움직이는 입 모양대로 전화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난 우리가 선배님 자리에서 보일까봐 그 쪽을 바라보았으나 그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도 소용없어요.”
“저한테 일방적으로 키스하셨으면, 그것에 대한 제 대답을 들으셔야죠.”
“키스 한 두 번 해 봤어요?”
“동성한테 당해보긴 처음이예요.”
의외로 미기는 강경했다. 난 어찌할지 망설이며 미기를 노려 보았다. 미기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전화 통화 중에 너무 길다고 할 만큼 말없는 대결이 이어졌다.
“그렇군요. 마땅히 대답들어야죠. 하지만 언제 가게 될지 모르겠어요. 기다릴 수 있어요?”
난 힘이 빠졌다.
“네. 제 이름 말해 놓고 룸에서 있을께요.”
미기는 폴더를 접고 내가 자리로 돌아가도록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걸어가며 아무리 그만 만나고 싶었어도 키스를 하다니 잘못된 방법이었다고 생각했다.
“누구야?”
“네에, 저, 아까 조퇴하는데, 사원 하나가 미국 유학에 대해 알고 싶다고 퇴근 후에 만나자고 해서요. 여기 있을 거라고 했거든요. 그 사람이예요.”
난 적당한 대답이 될지 안될지 걱정하면서 순식간에 거짓말을 꾸며 대답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 만난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에 가책을 느꼈다.
“그렇구나. 지금 만나재?”
“아뇨. 좀 이따 제가 다시 연락하기로 했어요.”
“아냐,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다. 넌 정시 출근해야 하니까 그 사람 얼른 만나고 들어가서 쉬어야지.”
선배님은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넣고 벗어 놓았던 자켓을 입었다. 난 안타까웠지만 미기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해요.”
“아냐, 얘. 나도 쉬어야지.”
음식값 계산 때문에 잠시 실랑이가 있었지만 내 뜻이 워낙 강해서 내가 이겼다. 난 주차장까지 따라 나가서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말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선배님은 핸드폰 빨리 만들어서 연락하라고 말하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