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동지역에서는 400년 가까이 후학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여 온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위폐 서열 문제가 두 가문 종손의 합의로 일단락됐다는 소식에 뒷말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원에 위패를 모시는 일을 후학이 아닌 문중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은 유교 질서에 어긋날 뿐 아니라 결국 연령, 학식 등에 앞서 벼슬의 높낮이로 사람을 평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그러나 정작 이 문제와 관련해 안동지역에 자리잡은 한국국학진흥원이 ’노코멘트’로 일관해 빈축을 사고 있다.
진흥원측은 최근 학봉-서애의 위패 서열 문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얘기할 입장이 못 된다”라며 극구 답변을 회피했다.
’그럼 어디에 물어보면 되느냐’는 물음에도 “서울대 규장각 같은데 알아보라”라는 다분히 ’나몰라라’식의 답변이 이어지면서 짧은 문답은 끝이 났다.
국학진흥원측의 답변에는 지역의 두 유력 가문의 일에 끼어들기 싫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명색이 한국학 연구기관이라는 사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정작 이 문제는 다른 지역의 학자들이 적잖은 우려와 함께 그 타당성을 논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산서원 인근에 자리잡은 한국국학진흥원(1996년 설립)은 한국학 자료의 수집ㆍ보존과 연구 및 보급을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을 표방하고 있다.
현재 연구원 12명을 비롯해 30명 가량이 문화관광부와 경상북도, 안동시로부터 매년 수 십억원의 운영비와 사업비를 지원받으면서 연구 및 사업활동을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 전국 서원의 3분 1이 모여 있다는 안동지역의 특성에 맞춰 서원 관련 책자를 다수 발간하는 등 서원의 문화와 예법 등과 관련해서는 어느 연구기관보다도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안동지역의 한 서원에 다시 모시기로 했다는 학봉-서애의 위패 서열 문제와 관련해 언급을 회피하는 것은 객관적인 학술연구를 수행하는 공공기관으로서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2.학봉·서애 집안 400년 자존심 대결 본질은?
경북 안동에서 400년 동안 자존심 대결을 벌여 왔던 풍산 류(柳)씨와 의성 김(金)씨 가문의 '병호시비'가 마무리됐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 1607)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이자 정치가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수제자였다. 모두 경북 안동 출신이었다. 퇴계는 학봉을 보고 "이런 아이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서애를 보고도 "하늘이 내린 아이"라고 했다. 나이는 학봉이 4세 위였고, 생전 벼슬은 서애(영의정)가 학봉(경상도 관찰사)보다 높았다.
살아 있을 때 나쁘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1620년(광해군 12)부터 이상하게 변했다. 퇴계를 모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당시 여강서원)에서 두 사람의 위패를 함께 모시기로 했는데 퇴계의 왼쪽인 상석에 누구를 앉히느냐를 두고 논란이 생긴 것이다. 학봉 쪽은 나이 순, 서애 쪽은 벼슬 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영남학파의 장로 정경세(鄭經世)는 서애의 손을 들어주는 판정을 내렸다.
1805년(순조 5)에 이 문제는 또 다시 불거졌다. 영남 유림들이 서울 문묘에 서애·학봉과 한강 정구(鄭逑), 여헌 장현광(張顯光) 등 네 학자의 신주를 모시게 해 달라고 청원키로 했다. 자손 네명이 함께 상소문을 쓰던 중 나이순으로 쓰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에 불복한 서애측이 따로 상소를 올렸는데 조정에서는 둘 다 기각해 버렸다. 곧 '3차전'이 벌어졌다. 한강과 여헌 쪽 선비들은 자기들끼리 상소를 올리기로 하고 이를 영남 유림에 통보했다. 안동 유림은 '서애·학봉 사이의 다툼을 그만두는 동시에 한강·여헌파를 규탄해야겠다'고 결심한 뒤 류회문(柳晦文)에게 그 통문을 쓰게 했다.
그런데 이 통문에서 '학봉·서애'의 순으로 글을 썼던 것이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낳았다. 서애파는 호계서원에 등을 돌리고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따로 모였고 안동의 유림들은 두 파로 갈라섰다. 두 서원의 앞글자를 따 이를 '병호시비(屛虎是非)'라 부른다. 최근 호계서원의 복원 추진 과정에서 서애와 학봉의 후손들이 만나 '벼슬 순서대로 하기로' 합의한 것은 1620년의 결정을 따른 셈이다.
병호시비를 '양반 가문 사이의 무의미한 체면 싸움'이었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퇴계의 학문적 정통(正統)을 계승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중앙 정계에서 실각해 지방으로 물러났던 영남 남인은 병파와 호파로 갈라진 뒤 각자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서원과 향교에서 조직적·학술적 역량을 축적해 갔다"며 "이는 위정척사운동과 의병·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3.학봉-서애 400년 서열 다툼 종식 `후폭풍'
400년 가까이 후학과 후손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여 온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위폐 서열 문제가 최근 두 가문 종손의 합의로 일단락된 것과 관련해 이의가 제기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안동시는 곧 복원작업에 들어갈 호계서원(안동시 임하면)에서 퇴계 이황의 위패를 중심으로 상석인 왼쪽에 누구의 위폐를 모시느냐를 놓고 두 가문의 종손이 모여 서애(류성룡)의 위폐를 상석에 두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호계서원은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573년 제자들이 세운 것으로,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인 1610년대부터 수제자 두 사람 중 누구의 위폐를 윗자리에 모실 것인가를 놓고 후학들이 수 백년동안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왔다.
맨 처음 이들의 서열이 정해진 건 1620년대로 당시 서애의 제자이자 대학자였던 우복 정경세(1563~1633)가 벼슬의 높낮이로 정해야 한다면서 서애 류성룡의 손을 들어줬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지금의 국무총리인 영의정으로 활동하면서 국난 극복에 공을 세운 인물이며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 때 지금의 도지사급인 경상우도 초유사, 관찰사 등을 맡아 활약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학봉의 후학들은 그러나 자기 스승이 서애보다 나이도 4살 더 많고 학식도 뛰어난 데도 벼슬이 낮다는 이유로 아랫자리에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반발했지만 상대적으로 학파의 세력이 약했던 시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그 뒤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세력간 역학 구도의 변화와 함께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급기야 1800년대 초에 임금에게 상소까지 올리게 되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양측의 대립으로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서애 류성룡의 위패가 호계서원을 떠나 병산서원으로 옮기게 되면서 사실상 두 위패의 불편한 동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최근에 두 가문의 종손이 위패 서열 문제를 논의한 것은 약 200년 만의 일로 400년 전에 촉발된 긴 다툼에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그러나 종손들의 이 같은 합의가 부적절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이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우선 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것은 학문의 전당에서 행해지는 사제간의 일로 특정 가문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 윤여빈 전문위원은 “두 가문의 종손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라며 “수 백년간 갑론을박하며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켜 온 양측 유학자들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성균관 관계자도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일을 후학이 아닌 가문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현실적으로 두 가문 종손의 합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국 벼슬의 높낮이로 사람을 평가하는 결과를 낳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윤여빈 전문위원은 “이번 합의는 1620년대 우복 선생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결국 관찰사보다 영의정 벼슬이 높다는 이유로 서애를 윗자리에 모시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서원에서 위패의 소목(昭穆:신주 모시는 차례)은 배우는 학생들의 모범이 되는 선생님을 순서대로 모시는 것”이라며 “학덕, 연령, 국가에 대한 공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지 단순히 벼슬 높낮이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병호시비(서애의 병산서원, 학봉의 호계서원간 시비)라는 이름으로 유학의 본향인 안동지역에서 수 백년간 전개돼 온 이 다툼은 단순히 자존심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양측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면서 역사의 한 단면을 장식해 왔다”라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와서 서열을 정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학봉(의성 김씨)의 후손인 김모(67.안동시)씨도 “지금껏 두 가문이 각자 두 분을 잘 섬겨왔는데 또다시 서열을 따지게끔 만들 필요가 뭐 있느냐”라며 “후세들에게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 평가된다는 인식을 심어줄까 봐 적잖이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논란과 관련해 안동시 관계자는 “유림측에서 호계서원 복원을 추진하면서 나름대로 위폐 서열을 정리를 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라며 “서원 복원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앞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은 신중하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서애와 학봉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가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다 "내가 어떤 임금인가" 물은 일이 있었다. 정이주가 먼저 답했다. "전하는 요순(堯舜)과 같은 분입니다." 그러자 김성일이 말했다. "전하는 요순 같은 명군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중국 고대의 두 폭군)도 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곁에 있던 류성룡이 거들었다. "김성일이 말한 것은 걸주 같은 임금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니 전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선조는 그제야 얼굴빛을 바꾸고 술상을 가져오라 했다.
▶안동 출신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300여 제자 중에서도 우뚝한 두 봉우리였다. 서애보다 네살 많은 학봉은 매사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학자 타입이었다. 서애는 화합과 조정 능력이 탁월한 정치 지도자 면모가 강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나자 조정에서 학봉을 탄핵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봤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서애는 '징비록'에서 "학봉 역시 전란 조짐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변호했다.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두 사람이 죽은 뒤 세상은 둘을 갈라놓았다. 1620년 퇴계를 모시는 호계서원에 제자들도 함께 배향하면서 퇴계를 중심으로 상석인 왼쪽에 학봉과 서애 중 누구의 위패를 모시느냐가 문제가 됐다. 서애 쪽에선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서애를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쪽에선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이 앞서야 한다고 했다. 오랜 우여곡절 끝에 서애의 위패는 병산서원, 학봉의 위패는 임천서원, 스승인 퇴계의 위패는 도산서원에 모시게 됐다. 1805년 서울 문묘에 서애와 학봉을 모시려 할 때도 양쪽에서 서로 서열이 앞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없던 일로 한 일이 있다.
▶학봉과 서애의 서열 논쟁은 걸출한 선비가 많아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장)이라 불리는 안동 유림에서 골치 아픈 난제 중 하나였다. 그 바탕에는 학문을 둘러싼 집안과 제자들의 자존심, 당쟁과 연결된 정치적 입장 차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올해 안에 착수할 호계서원 복원을 계기로 학봉의 의성 김씨 가문과 서애의 풍산 류씨 가문이 위패의 서열에 합의했다고 한다. 퇴계 왼편에 서애, 오른편에 학봉을 모신다는 것이다. 후손들의 400년 만의 화해가 조상들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안동의 유림사회에서 400년간 이어져 온 논란이 병호시비(屛虎是非)이다. 서애 류성용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어느 쪽에 모실 것이냐를 두고 양쪽 제자들 간에 벌어진 논쟁이다. 위패를 왼쪽에 모실 것이냐, 아니면 오른쪽에 모실 것이냐의 문제였다. 오른쪽보다는 왼쪽이 높은 자리로 여겨졌다. 그래서 양쪽 제자들은 서로 자기의 선생을 왼쪽에 모시려고 애를 썼다. 가운데에는 퇴계가 있고, 그 왼쪽에 학봉의 위패를 모시면 서애 쪽이 반발했고, 왼쪽에 서애의 위패를 모시면 학봉 쪽이 반발했다. 옛날 사람들은 이를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다. 왜 옛날 사람들은 왼쪽을 오른쪽보다 위라고 생각하였을까.
만약 조선시대 좌우개념에 비추어 보면 우파보다는 좌파가 더 높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 아닌가? 필자는 그동안 동양학의 원로 선생님들을 만날 때마다 좌(左)와 우(右)의 문제를 질문하곤 하였다. 어느 책에도 이 문제를 시원하게 답변해주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가들을 역방(歷訪)한 끝에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먼저 좌(左) 자에는 '공(工)'이 들어간다. 우(右) 자에는 '구(口)'가 들어간다. 공(工)은 공부(工夫)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왼쪽 내지 왼손은 공부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반대로 구(口)는 입 구(口)이다. 오른손은 입에 음식을 넣을 때, 즉 밥 먹을 때 사용하는 손이라는 의미가 있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도록 훈련받는 경우가 많았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잡는 아이가 있으면 이를 오른손으로 교정하곤 하였다.
이를 다시 우뇌(右腦)와 좌뇌(左腦) 이론에 대입해 볼 것 같으면, 왼손은 우뇌와 연결된다. 오른손은 좌뇌와 연결된다. 왼손을 많이 쓰면 우뇌가 개발되고, 오른손을 많이 쓰면 좌뇌가 개발된다. 왼쪽이 공부기능이라고 한다면, 이때의 공부는 우뇌 개발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가? 우뇌는 창조력과 종합적 사고를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학봉 종손이 양보를 해서 400년 시비에 종지부를 찍었다. 좌우가 문제가 아니라 호계서원(虎溪書院)을 복원하고, 선비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여긴 덕분이다.
鶴峯 金誠一 - 퇴계의 수제자… 임란 때 진주성대첩 이끌어
[종가기행 21] 義城 金氏 - 禮를 지키며 온화하고 검소, 博約 계승
'영남 종손의 표준'
[종가기행 21]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
퇴계 선생이 1569년(선조2)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陶山)으로 돌아가면서 추천한 인재 세 사람이 있다.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그리고 학봉 김성일이다.
동고는 2년 연상으로 영의정에 이른 이고, 고봉은 26년 후배로 퇴계의 대표적 제자며, 학봉은 향리의 37년 후배로 수제자다. 함께 추천한 동고와 고봉은 불화로 이듬해 결별했고, 학봉은 22년 뒤인 1591년에 일본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한 일로 곤경에 처했다.
퇴계가 서애를 추천하지 않은 일은 이미 승승장구 하고 있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비해 학봉은 보다 오랫동안 문하에 있었을 뿐 아니라 도학에 더욱 침잠해 쉽사리 벼슬에 나아가려 하지 않은 기질을 지녔다. 죽음을 앞둔 퇴계가 학봉을 추천한 것은 학봉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을 보면 학봉에 대해서 '당파싸움에 급급한 나머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라고 쓰여 있다. 학교에서도 그를 편협한 당파성 때문에 국론을 분열시킨 인물로 가르쳤다. 그러나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주장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고 적고 있다.
다소 미흡하지만, 후자가 역사학계의 정설이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 최고의 권위 있는 회고록인 징비록(류성룡 저, 국보 제132호)에 보면 저간의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려 깊은 대학자의 고뇌'에서 내린 복명이었다는 해석이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읽어보면 학봉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가서 벌인 외교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었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봉이 취한 '위의(威儀)를 갖춘 외교'와 '무력에 굴하지 않는 외교'를 정사와 서장관이 힘을 합해 이루었다면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겪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학봉 선생의 일생을 알려면 우복 정경세가 지은 신도비를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의 책 한 권 분량이라 쉽지 않다. 요약한 글로는 동문수학한 한강 정구의 '학봉 묘방석(墓傍石)'에 적은 글이 있다. 묘방석이란 무엇인가? 창석 이준이 지은 글에 답이 있다.
"사순(士純)의 휘는 성일(誠一)이니, 문소(聞韶, 義城의 古號) 김씨이다. 무술년(1538)에 출생하여 계사년(1593)에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년(1592)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정직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 왕의 위엄과 교화를 멀리 전파하였으며,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는 지성으로 감동하여 한 지역을 막았으니 충성은 사직에 남아 있고 이름은 역사에 실렸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 올라 심학(心學)의 요체(要諦)를 배웠으며, 덕행과 훈업은 모두 길이 아름답게 빛날 만하다. 만력 기미년(1619)에 한강 정구 씀."
"선생을 장사지낼 때 이상한 돌이 광중(壙中)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큰 북 같고 돌결이 부드러워 조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굴려서 묘 왼편에 두어 선생의 행적 대강을 새겼는데 정(鄭) 한강(寒岡)이 지은 것이다. 돌이 이곳에 묻힌 것이 아득한 옛날일 텐데 선생을 모실 때 비로소 나와 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쓰였으니 조물주의 의도가 필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기이한 일이로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준(李埈)이 삼가 적다."
학봉의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문자 시호에다 충성 충자를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자 몸으로 맞서 싸우다 순국했다. 탁월한 도학자면서 애국 애민을 실천했던 이다. 임란 초기에 초유사의 소임을 맡아 의병(義兵)의 발기와 지원에 크게 기여했고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로는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1592년 10월 임란의 3대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 4월 각 고을을 순시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왔는데, 피로와 풍토병이 겹쳐 4월 29일 진주성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운명할 때에 참모들이 약물을 들이자, "나는 약을 먹고 살 수 없는 몸이다. 제군은 그만 두라"했다.
대소헌 조종도와 죽유 오운이 병문안을 하면서 "명나라 구원병들이 승승장구하여 남하해 이미 서울을 수복했으며, 그래서 모든 왜구들을 도망치게 할 것입니다"라 하자, 선생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다니…. 그러나 그것 또한 운명인데 어찌 하겠나. 적들이 물러가면 회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붕당은 누가 혁파할 것인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처사요 심사원려(深思遠慮)한 태도다.
학봉은 타고난 시인이며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다. 그가 남긴 시가 대략 1,500여 편이나 되는데, 다수의 애민시(愛民詩)도 남겼다.
그 대표작이 모별자시(母別子詩)로 60구(句)나 되는 칠언고시(七言古詩) 장편인데 39세(1576, 이조좌랑) 때 썼다. 세상을 버리기 4개월 전인 1592년 12월 24일에 경상우도 감사로서 산청(당시 山陰縣)에서 안동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한글 편지의 사연은 절절하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궁금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되면 도적들이 달려들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직산(稷山)에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지 염려 마오. 장모 모시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 있으라 하오. 감사(監司)라고 해도 음식조차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기필하지 못하네. 그리워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흗날. 석이(버섯의 일종) 두근, 석류 20개, 조기 두 마리 보내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 나중에 호계서원으로 바뀌었다 훼철)과 임천서원, 전남 나주의 대곡서원(大谷書院), 경북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경남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등지에 배향되었다.
문집 10책이 남아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 발간되었다. 종택 유물전시관에는 보물 제905호(56종 261점)로 지정된 전적과, 보물 제906호(17종 242점)로 지정된 고문서를 비롯해 서산 김흥락 선생의 목판 등이 전시 보관돼 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1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씨 - 후손들 종가 중심으로 화합… 차종손은 지금도 門外拜 실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종가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크게 ▲선생의 삶과 학문 ▲400년을 이어온 종가 사람들의 구국활동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를 근자에 어떤 작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라는 시각으로 종가를 소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필자는 여러 번 종택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사랑채 정면에 걸린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현판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규모가 크지도 않을 뿐더러 글씨 또한 아담하다. ‘박약진전(博約眞詮, 박약의 참된 깨달음)’. 자세히 풀이하면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음’ 정도의 의미다.
‘박약’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말이다. 특히 한글로 표기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인 박약(薄弱)과 헷갈린다. 그래서 1987년에 출범한 사단법인 박약회는 아직까지 정체성에 대해 오해를 받기도 한다.
‘박약’이란 한마디로 유학의 핵심이다. 이를 송나라 주자(朱子, 1130-1200)가 이어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1501-1570)이 계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동쪽 공부방(東齋) 이름도 박약재(博約齋)이고, 유학의 본질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자는 취지로 결성한 모임도 박약회였다.
만약 사회에서 이 단어가 공자로부터 내려오는 학문의 정통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단법인 박약회에서 그렇게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박약재라는 방 이름도 정암 조광조를 모신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서만 쓰고 있다.
퇴계는 도학 적전(嫡傳)을 이은 분으로서 정암을 존경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학봉 종택에 걸린 ‘박약진전’이란 현판은 학문의 적전을 계승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 현판을 주목한 이유다.
‘박약진전’에 대한 계승 문제에 직접적인 이견을 표시한 글이 있기에 흥미롭게 읽었다. 우복 정경세의 문집 별집에 실린 우산서원(愚山書院,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었던 서원) 봉안문(奉安文)에서 ‘박약진전’을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서애 류성룡의 후손 학서 류이좌(柳台佐, 하회 북촌 주인으로 서애 6대손. 대사간에 이름)다.
학서는 ‘주자의 심학(心學, 性理學)과 박약진전을 퇴계 선생이 창명(倡明, 창도해서 밝힘)했고 서애 할아버지(厓老)가 이를 전해 도가 실추되지 않게 했으며 이를 선생이 계승했다’고 추앙했다. 여기서 ‘선생’은 서원에 새롭게 배향하는 우복을 말한다. 우복은 서애의 수제자였다. 학서의 견해로 보면, 박약진전은 서애가 이었고 이를 우복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봉 종가에는 이를 반박하는 아주 든든한 ‘물증(物證)’이 남아 있다. 이는 퇴계병명(退溪屛銘, 題金士純屛銘)이다. 학봉의 도학 연원(淵源)을 계승한 대산 이상정은 이 병명을 “퇴도 노선생(이황)의 병명(屛銘)을 첨부하여 연원을 전해 부탁한 실제를 드러내었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잘 읽어 보면 무언가 얻는 바가 있을 것으로, 반드시 마음속에 융합되는 바가 있어 옷자락을 잡고 문하에 나아가서 친히 말씀을 듣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의미를 부여했다.
병명은 모두 80자가4자 대구(對句)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은 마지막 구절인 ‘박약양지(博約兩至) 연원정맥(淵源正脈)’. 이 구절로 인해 후일 학봉 종가는 물론 유림사회에서 도학의 적전을 유념한 스승 퇴계의 징표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견도 있었고, 이는 학문적 토론과 논쟁으로 길게 이어졌다.
현재 이 글은 퇴계집 권44와 학봉집 부록 권3에 함께 실려 있다. 당시 퇴계 나이 66세, 학봉은 29세였다. 완숙한 학자와 문과 급제를 앞둔(학봉은 31세에 급제) 신진 학자 간의 의미있는 만남이었다.
공경과 정일로서 덕 이룬 인 요순(堯舜)이요 / 堯欽舜一 두려움과 공경으로 덕 닦은 인 우탕(禹湯)이네 / 禹祗湯慄 공손하고 삼감은 마음 지킨 문왕(文王)이요 / 翼翼文心 호호탕탕 드넓음은 법도 지킨 무왕(武王)이네 / 蕩蕩武極 노력하고 조심하라 말한 인 주공(周公)이요 / 周稱乾? 발분망식 즐겁다 말한 이는 공자(孔子)였네 / 孔云憤樂 자신을 반성하며 조심한 인 증자(曾子)이요 / 曾省戰兢 사욕 잊고 예(禮)를 회복한 인 안자(顔子)였네 / 顔事克復 경계하며 조심하고 혼자 있을 때 삼가서 / 戒懼愼獨 명성으로 지극한 도 이룬 인 자사(子思)요 / 明誠凝道 마음을 보존하여 하늘을 섬기면서 / 操存事天 바른 의로 호연지기 기른 인 맹자(孟子)였네 / 直義養浩 고요함을 주로 하며 욕심 없이 지내면서 / 主靜無欲 맑은 날 바람 비 갠 뒤 달인 염계(濂溪)요 / 光風霽月 풍월을 읊조리며 돌아오는 모습에다 / 吟弄歸來 온화하고 우뚝한 기상 지닌 명도(明道)였네 / 揚休山立 정제된 몸가짐에 엄숙한 품격으로 / 整齊嚴肅 전일을 주로 하여 변동 없은 이 이천(伊川)이요 / 主一無適 박문에다 약례까지 양쪽 모두 지극히 하여 / 博約兩至 연원 정통 이어받은 그 분은 주자(朱子)셨다네 / 淵源正脈
이 병명은 모두 5장의 목판에 앞뒤로 새겨 종택 운장각(雲章閣)에 보관하고 있다. 아쉽게도 퇴계가 손수 쓴 글씨 원본은 단 두 폭 16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남에서는 이를 탁본해 병풍으로 만들어 제병(祭屛)으로 사용하는 집이 많았다. 그런 유습을 이어받아 종손의 맏며느리(李點淑 여사, 퇴계 宗女)는 3년간 동양자수로 글씨를 새겨 10폭 병풍으로 만들었고, 현재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 사용하고 있다.
'천년불패' 땅에 90여칸 짜리
학봉의 종택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속칭 ‘검제’에 2,000여 평의 대지에 90여 칸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 종택에는 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1917년생) 옹이 살고 있다. 종손은 학봉 직손(直孫)이 아니다. 그래서 살던 곳도 검제가 아닌 임동면 지례였다.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독립운동을 은밀히 도운 사실이 알려져 1995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실상을 모르는 이들은 ‘파락호’라고 손가락질했다. 무남독녀 외딸만 두어 후사를 잇지 못하자 촌수가 가까운 이를 두고 100리나 떨어진 곳에 사는 현 종손을 맞았다.
1946년 29세였던 종손은 이미 결혼을 했고, 슬하에 아들 둘을 둔 상태였다. 본가에서 양자를 허락하지 않자 윤번을 정해 7개월여를 빌었다는 이야기는 눈물겨운 미담으로 전해진다.
학봉 종가가 있는 검제를 풍수가들은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라고 부른다. 1,000년 동안 길이 번성할 터전이라는 것. 달리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 즉 ‘전쟁, 기근, 전염병이 들지 않는 복된 땅’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좋은 터임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의 양자가 있었고, 13대 종손은 또 자신의 대에 이르러 나라가 망했으며,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대느라 살림이 기울었고, 종택까지 처분해야만 했다. 더구나 종손의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인 대를 잇는 일도 이루지 못했다.
10세 때 조부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학봉 11대 종손. 1827-1899) 선생이 왜경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복수를 가르치겠다’는 다짐을 했던 그는 문충고택(文忠古宅)이요 박약진전(博約眞詮)인 학봉 종택을 길이 계승할 적임자를 찾기 위해 부심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는 지인지감(知人之感, 사람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현 14대 종손 김시인 옹은 영남 종손의 표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를 만나면 선비의 ‘기품’이 느껴진다. 늘 온화한 모습에 언소(言笑)가 적다. 생활도 검소하다. 섬돌에 가지런히 놓인 검정고무신이 압권이다.
평소 별로 말씀이 없으신 종손께서 하루는 필자의 외조부(權五德, 1912-1972)에 대해 말했다. “그 어른은 점잖았고, 선비셨어.” 기억으로는 외조부는 송암 권호문 선생의 후손인 관계로 배향한 서원인 청성서원(靑城書院)의 문사를 살폈고, 처가인 창원 황씨(영주 대룡산, 황귀암 집) 집에서 글을 읽어 초년에 이미 선비의 반열에 올랐다. 불행히 일찍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년간 자리에 누워있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외조부의 삶을 기억해 필자를 더 가깝게 대한 것이다.
학봉 종가는 종가와 지손들 간의 틈새가 없다. 이미 종손의 증조부 대에서 재산을 정리한 터고 또 남은 토지라 해도 경북 북부 오지인 탓에 안동 도심과는 멀어 재산 때문에 다툴 일이 없었다.
학봉 후손들은 종가를 위하는 마음이 한결같다. 김흥락 선생 장례 때 모인 조문객이 4,000명이었는데, 각기 기정을 위해 가져온 대구포가 고방에 가득했을 정도였다 한다. 그리고 87년 유물전시관 개관식 때, 95년 김흥락 선생과 조부 김용환 옹의 독립훈장 추서 사당 고유 때, 99년 김흥락 선생 100주년 추모와 2000년 11월 기념 강연 때 각각 1,000여명이 전국에서 모였다.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는 100여 명이 참제(參祭)한다. 이때 일정 기준 이상의 성취가 있는 후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제사에 앞서 사당에 고유하는데, 그러한 의식이 의미도 있으려니와 보기에도 흐뭇하다. 불천위 제사는 더욱 엄숙하게 거행된다. 제상 뒤로 내걸리는 백세청풍(百世淸風)과 중류지주(中流砥柱) 대자 탁본 족자는 선생의 정신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고물(古物)이다.
제사 땐 전국서 100여명 참석
70년대 이전까지 학봉 종가의 사랑방은 과객들로 넘쳐났다. 이는 학봉 종가가 영남 유림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무관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종손과 종부의 역할이 컸다.
93년에 작고한 종부 한양 조씨(趙畢男 여사, 경북 영양 사도실 출신)의 베푸는 안살림은 유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삶이었다. 특이하게도 종손 부부는 생년월일이 같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차종손 김종길(金鍾吉, 1941년생) 씨는 안동사범, 고려대를 졸업했고 학군1기로 군복무를 마친 뒤 두루넷 사장, TG삼보컴퓨터 부회장을 역임했다. 차종손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종인들은 물론 유림에서도 명성이 높다. 근자에는 한문과 서도에 진력하여 시 수백 수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오는 명문 수십 편을 암송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암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보다 필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한번은 차종손을 따라 종가를 방문했는데, 차종손은 ‘문외배(門外拜)’를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예법에 부모에게는 문 밖에서 절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는 설날 부실한 시골집 문 밖에서 절을 한 후 방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영남에서는 아직도 일부에서나마 문외배를 행하고 있다. 그런데 차종손의 문외배는 생활 그 자체였다. 그러한 정신이 일선에서 은퇴한 뒤 그 어렵다는 한문을 외우게 하고 다시 붓을 잡아 법필(法筆)을 익히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초점은 분명 ‘박약진전’에 맞춰진 느낌이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종가기행 22] 西厓 柳成龍 - 임란 극복 명재상… '징비록'은 日서도 높이 평가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2]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1542년(중종37)-1607년(선조4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서애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23세 때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했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스승인 퇴계 선생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고 평했는데, 21세 때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다. 퇴계 문하의 양대 학맥이라 할 수 있는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서로를 높여, 학봉은 서애를 '나의 사표(師表)'라 했고, 서애는 학봉에 대해 '내가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했다.
안동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영가지(永嘉志, 서애 제자 龍巒 權紀 편찬) 권7 인물조(人物條)에 보면 서애에 대해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실천하여 연원정맥(淵源正脈)을 이었다'고 했다. 학봉에 대해서는 '퇴계 선생에게 배워 심학(心學)의 요체를 듣고 견고하고 각려(刻勵)하게 노력하여 조예가 정심(精深)했다.'고 평하고 있다. 미묘한 문제이지만 영가지에서는 무게 중심이 서애 쪽에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도심 도로명에 퇴계로가 있고 그곳에서 갈라진 작은 도로에 서애로(西厓路)로 명명된 길이 있어 스승과 제자가 수도 서울에서 길로도 만나고 있다.
서애는 30여 년 동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뒤 51세(선조25, 1592) 때 영의정에 이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세가로서의 서애를 생각하는데, 어쩌면 서애는 57세(선조31, 1598) 때 무고(誣告)로 영의정에서 체직된 뒤 삭탈관직까지 당해 58세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9년을 더없이 소중하게 보냈다.
은퇴 정치가보다는 대학자로서의 위상이 빛을 발했다. 임란 때 의병장으로, 그리고 강직한 강관(講官)으로,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 겸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1563-1633), 부제학에 이른 창석 이준(1560-1635) 등으로 대표되는 서애학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이다.
서애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경세가(經世家)며 구국의 영웅이다. 이점을 살피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 손수 이면지에다 쓴 임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이다.
안동에 국보가 4점인데, 그중에 하회마을에 두 점이 있다. 징비록과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는 이전에 징비록 원본을 금고에서 꺼내 펼쳐본 적이 있다. 그때 느낌은 어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금고에 들어 있어 안전하지만 습기 문제, 표지의 장첩된 상태, 조잡해 보이는 보관 상자 모두가 불만이었다. 놀라운 점은 이면지에 초서체로 당시로서도 고급지가 아닌 일반 용지에 쓴 책이란 사실이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집요한 공격을 당했고 결국 파직된 상태로 가난한 옛 고향 집을 돌아와 썼던 이 조그마한 책이 나라의 시련을 극복할 지혜를 담은 책으로 여전히 생명을 지니고 있다.
누구보다 시대를 앞선 지식인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1808년(당시 다산 선생 47세)에 아들에게 여가를 보아 서애집과 징비록 그리고 성호사설(성호 이익 작), 문헌통고를 읽으면서 그 요점을 정리하라는 가르침을 내린다. 다산은 누구보다 서애를 존경하고 사상을 본받고자 했던 이다.
징비록은 정책 분석과 대책이 탁월해 적국에 유출되어서는 안 될 목록에 들어 있었다. 청장관 이덕무가 쓴 글을 보면 이미 징비록은 일본으로 유출되어 출판(청천 신유한의 해유록에 보면 징비록이 일본 대판에서 출판되었다고 기록함, 도쿠가와 막부 시절, 1695년 경 교토에서도 간행)까지 된 것을 걱정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 보면 징비록은 이미 조선 시대에 탁월한 회고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은 일본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일종의 '비서(秘書)'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시대(1936년)에 그들은 아주 격조 있는 두 책 영인본 300부 한정판으로 간행했다. 아쉽게도 광복 이후 지금까지 당국도 문중도 아직 격을 갖춘 복제품을 간행한 적이 없다.
다행히도 서애선생기념사업회의 주도로 영역본 징비록이 나왔다. 징비라는 시경의 구절을 어떻게 번역했을까? 적지 않게 궁금했다. "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경계하여(징)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비)'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이 심오한 책 제목은 '잘못을 고치는 책(The Book of Corrections)이다"라고 한글로 옮겼다. 탁월한 언어 감각이다.
영역판은 호남대학교 최병헌(영문학) 교수가 6년여 노력을 들여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간행했다. 최 교수는 2003년 4월 4일 출판기념회에서 여러 외국 학자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최고 책임자가 쓴 자기 반성문인 동시에 향후 최고 지침서요, 위기관리 편람이다. 그【?북한 핵위기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요즘, 우리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핵실험은 남의 이야기하듯 적당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서애는 전쟁 발발의 징조, 전시(戰時) 중의 각종 대비책,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양국과 강화(講和) 문제 등을 조목조목 적고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보면, 현명한 외교와 정확한 국제 정세와 적의 정보 분석, 유사시의 대책, 그리고 확고한 집단 동맹체제(혈맹 관계)의 구축일 것이다.
400여 년 전 서애의 이러한 분석과 대비책 역시 '냉전적 사고'로만 치부하기엔 탁견이다.
서애는 타고난 경세가다. 조정 관료나 정승 중 행정 능력이 탁월한 이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서애는 그러한 능력을 지녔다. 실록 서애 졸기에 보면 선조실록과 수정실록 두 편이 비교적 길게 실려 있는데, 공히 시각을 달리하는 부정적인 평이 있다.
그럼에도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렇게 소개했다. "경연(經筵)에 출입한 지 25년 만에 상신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경외(京外)의 기무(機務)를 담당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과 계첩(揭帖)이 주야로 폭주하고 여러 도의 보고서들이 이곳저곳으로부터 몰려들었는데도 성룡은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서애는 지인지감(知人之感)이 뛰어났다. 이 점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천거와 음해 세력들로부터의 비호를 통해 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울 수 있게 한 장본인이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순신에 대해서는 조정 중신은 물론 국왕까지 집요하게 음해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때마다 서애는 간곡하게 그렇지 않다는 점을 설명해 구국의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게 했다.
선조30년 1월 수군 작전 통제권을 두고 국왕과 중신들이 나눈 대화는 오늘날과도 흡사한 점이 있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으로 생긴 틈새를 당파 세력들이 비집고 들어섰고 국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볍게 의심을 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졌다.
이때 서애는 이순신과는 같은 동리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너무나 잘 알며 그래서 자신 있게 만호(萬戶)로, 그리고 수사(水使)로 직접 천거했다. "글을 잘 하는 사람인가?"라는 선조의 물음에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어느 곳 수령으로 있는 그를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라 했다.
서애가 실각한 직후인 같은 해 11월 19일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유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얼마 뒤인 12월 서애는 삭탈관직 당한다. 문무로 갈린 벼슬길이며 직급과 직위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지만 국난을 몸으로 막고 참소에 너무나 의연했던 두 평생지기의 운명은 부절을 합한 듯 너무나 닮았다.
서애는 또한 청백리였다. 그 면모는 한 장의 고문서에 고스란히 담겨 전한다.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에는 선생의 부음이 도성에 전해졌을 때 조정 관료들이 연명으로 부의를 추렴한 문건 한 장이 전시되어 있다.
서애는 삭탈관직된 뒤 고향을 찾았을 때 마땅한 거처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대신의 품격을 유지시켜줄 녹봉조차 받지 못했고 그 무렵 입은 수해로 거처할 곳이 더욱 마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옮겨 앉은 곳이 강 건너 한적한 서당인 옥연정사였고 징비록 집필을 마친 뒤 죄인을 자처하며 더욱 후미진 학가산 골짜기를 찾아들어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 두어 칸을 얽었다. 그때는 세상을 버리기 1년 전의 일이었고 그곳에서 선화했다.
66세(1607년 5월 6일)로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3일간 조시(朝市, 조회와 시장)를 정지하고 승지를 보내 조문했으며 역대 여러 국왕들은 수차에 걸쳐 예관을 파견해 사당에 치제했다.
서울 옛집이 있던 묵사동(墨寺洞)에서는 도성 각전(各廛)의 백성들이 몰려와 조곡했는데 1,0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백성들에게 끼쳤던 서애의 공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도 망한 나라를 구했다는 '산하재조지공(山河再造之功)' 때문이었을 것이다.
묘소는 안동 풍산읍 수동(壽洞)에 있는데(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 외 6대손 한산 이씨 대산 이상정이 묘갈명을 씀), 명당으로 이름나 풍수가들의 답사코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의물(儀物)들은 너무나 조촐하다. 퇴계가 그러하듯 서애 역시 신도비가 없다.
광해군6년(1614) 4월 병산서원에, 광해군12년(1620) 9월 여강서원에, 인조5년(1627) 10월 군위의 남계서원에, 인조9년(1631) 10월 상주의 도남서원에, 인조21년(1643) 10월 예천의 삼강서원에, 숙종15년(1689) 의성의 빙계서원에 각각 위패를 봉안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5.안동의 三多, 당신은 아시나요 (안동의 선비문화)
‘안동’이라면 양반·선비·종가를 으레 떠올린다. 이들 모두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유교가 남긴 문화이다. “안동에는 산이 많고, 인재가 많고, 서원이 많다”라는 말이 있다. 안동의 삼다(三多)다. 산다(山多)는 태백산과 소백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의 지형적 특색을, 인다(人多)는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을 비롯하여 뛰어난 유학자를 대거 배출했다는 것을, 원다(院多)는 유교가 성행했음을 말한다.
안동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책은 ‘안동역사문화기행’(푸른역사)이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안동문화를 권역·테마 별로 나누어 다양한 사진을 곁들이면서 소개하고 있다. 안동에 대해 더 상세한 지식을 원하는 이들에게 맞는 책은 ‘안동문화의 수수께끼’(지식산업사)이다. 책제목에서 말해주듯이 안동에는 왜 양반이 많고, 고려 공민왕은 왜 안동으로 몽진했으며, 안동에는 왜 전탑(塼塔)과 목조건축물이 많은가 하는, 안동문화의 수수께끼를 시원하게 풀어준다. 안동의 유교문화는 문화재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종가에는 종손(宗孫)과 종부(宗婦)가 종가의 본분을 다하고자 정성을 가다듬어 조상제사를 지내고 낯선 손님을 맞이하면서 전통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유교전통이 강한 만큼 안동에는 “종가 하나 끼고 돌아가지 않는 골이 없다”고 할 정도로 고색창연한 종가가 많다. 안동의 종가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안동의 종가’(지식산업사)를 읽으면 된다. 안동대 윤천근 교수의 경쾌하고 맛깔스러운 글과 김복영씨의 한 폭의 그림 같은 사진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마치 종가 대청마루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함이 전해온다.
1999년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 하회마을을 다녀갔다. 하회마을은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풍산류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대표한다. ‘민속마을 하회여행’(밀알)은 하회마을의 역사, 자연경관과 풍수, 종가와 정자, 하회탈춤 등 그야말로 하회마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안동의 선비문화가 유난히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를 탐구했던 유학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정점에 대유(大儒) 퇴계 이황이 우뚝 서 있다. 퇴계 연구자로 정평이 나있는 김종석 박사의 ‘청년을 위한 퇴계 평전’(한국국학진흥원)은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유학자 평전을 대중적 글쓰기로 쉽게 풀어내고 있어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다.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일화를 중심으로 퇴계의 인간적 삶과 학문생활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내고 있다.
최근 안동지역에서는 400년 가까이 후학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여 온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위폐 서열 문제가 두 가문 종손의 합의로 일단락됐다는 소식에 뒷말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원에 위패를 모시는 일을 후학이 아닌 문중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은 유교 질서에 어긋날 뿐 아니라 결국 연령, 학식 등에 앞서 벼슬의 높낮이로 사람을 평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그러나 정작 이 문제와 관련해 안동지역에 자리잡은 한국국학진흥원이 ’노코멘트’로 일관해 빈축을 사고 있다.
진흥원측은 최근 학봉-서애의 위패 서열 문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얘기할 입장이 못 된다”라며 극구 답변을 회피했다.
’그럼 어디에 물어보면 되느냐’는 물음에도 “서울대 규장각 같은데 알아보라”라는 다분히 ’나몰라라’식의 답변이 이어지면서 짧은 문답은 끝이 났다.
국학진흥원측의 답변에는 지역의 두 유력 가문의 일에 끼어들기 싫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명색이 한국학 연구기관이라는 사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정작 이 문제는 다른 지역의 학자들이 적잖은 우려와 함께 그 타당성을 논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산서원 인근에 자리잡은 한국국학진흥원(1996년 설립)은 한국학 자료의 수집ㆍ보존과 연구 및 보급을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을 표방하고 있다.
현재 연구원 12명을 비롯해 30명 가량이 문화관광부와 경상북도, 안동시로부터 매년 수 십억원의 운영비와 사업비를 지원받으면서 연구 및 사업활동을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 전국 서원의 3분 1이 모여 있다는 안동지역의 특성에 맞춰 서원 관련 책자를 다수 발간하는 등 서원의 문화와 예법 등과 관련해서는 어느 연구기관보다도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안동지역의 한 서원에 다시 모시기로 했다는 학봉-서애의 위패 서열 문제와 관련해 언급을 회피하는 것은 객관적인 학술연구를 수행하는 공공기관으로서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2.학봉·서애 집안 400년 자존심 대결 본질은?
경북 안동에서 400년 동안 자존심 대결을 벌여 왔던 풍산 류(柳)씨와 의성 김(金)씨 가문의 '병호시비'가 마무리됐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 1607)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이자 정치가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수제자였다. 모두 경북 안동 출신이었다. 퇴계는 학봉을 보고 "이런 아이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서애를 보고도 "하늘이 내린 아이"라고 했다. 나이는 학봉이 4세 위였고, 생전 벼슬은 서애(영의정)가 학봉(경상도 관찰사)보다 높았다.
살아 있을 때 나쁘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1620년(광해군 12)부터 이상하게 변했다. 퇴계를 모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당시 여강서원)에서 두 사람의 위패를 함께 모시기로 했는데 퇴계의 왼쪽인 상석에 누구를 앉히느냐를 두고 논란이 생긴 것이다. 학봉 쪽은 나이 순, 서애 쪽은 벼슬 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영남학파의 장로 정경세(鄭經世)는 서애의 손을 들어주는 판정을 내렸다.
1805년(순조 5)에 이 문제는 또 다시 불거졌다. 영남 유림들이 서울 문묘에 서애·학봉과 한강 정구(鄭逑), 여헌 장현광(張顯光) 등 네 학자의 신주를 모시게 해 달라고 청원키로 했다. 자손 네명이 함께 상소문을 쓰던 중 나이순으로 쓰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에 불복한 서애측이 따로 상소를 올렸는데 조정에서는 둘 다 기각해 버렸다. 곧 '3차전'이 벌어졌다. 한강과 여헌 쪽 선비들은 자기들끼리 상소를 올리기로 하고 이를 영남 유림에 통보했다. 안동 유림은 '서애·학봉 사이의 다툼을 그만두는 동시에 한강·여헌파를 규탄해야겠다'고 결심한 뒤 류회문(柳晦文)에게 그 통문을 쓰게 했다.
그런데 이 통문에서 '학봉·서애'의 순으로 글을 썼던 것이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낳았다. 서애파는 호계서원에 등을 돌리고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따로 모였고 안동의 유림들은 두 파로 갈라섰다. 두 서원의 앞글자를 따 이를 '병호시비(屛虎是非)'라 부른다. 최근 호계서원의 복원 추진 과정에서 서애와 학봉의 후손들이 만나 '벼슬 순서대로 하기로' 합의한 것은 1620년의 결정을 따른 셈이다.
병호시비를 '양반 가문 사이의 무의미한 체면 싸움'이었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퇴계의 학문적 정통(正統)을 계승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중앙 정계에서 실각해 지방으로 물러났던 영남 남인은 병파와 호파로 갈라진 뒤 각자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서원과 향교에서 조직적·학술적 역량을 축적해 갔다"며 "이는 위정척사운동과 의병·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3.학봉-서애 400년 서열 다툼 종식 `후폭풍'
400년 가까이 후학과 후손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여 온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위폐 서열 문제가 최근 두 가문 종손의 합의로 일단락된 것과 관련해 이의가 제기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안동시는 곧 복원작업에 들어갈 호계서원(안동시 임하면)에서 퇴계 이황의 위패를 중심으로 상석인 왼쪽에 누구의 위폐를 모시느냐를 놓고 두 가문의 종손이 모여 서애(류성룡)의 위폐를 상석에 두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호계서원은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573년 제자들이 세운 것으로,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인 1610년대부터 수제자 두 사람 중 누구의 위폐를 윗자리에 모실 것인가를 놓고 후학들이 수 백년동안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왔다.
맨 처음 이들의 서열이 정해진 건 1620년대로 당시 서애의 제자이자 대학자였던 우복 정경세(1563~1633)가 벼슬의 높낮이로 정해야 한다면서 서애 류성룡의 손을 들어줬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지금의 국무총리인 영의정으로 활동하면서 국난 극복에 공을 세운 인물이며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 때 지금의 도지사급인 경상우도 초유사, 관찰사 등을 맡아 활약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학봉의 후학들은 그러나 자기 스승이 서애보다 나이도 4살 더 많고 학식도 뛰어난 데도 벼슬이 낮다는 이유로 아랫자리에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반발했지만 상대적으로 학파의 세력이 약했던 시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그 뒤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세력간 역학 구도의 변화와 함께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급기야 1800년대 초에 임금에게 상소까지 올리게 되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양측의 대립으로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서애 류성룡의 위패가 호계서원을 떠나 병산서원으로 옮기게 되면서 사실상 두 위패의 불편한 동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최근에 두 가문의 종손이 위패 서열 문제를 논의한 것은 약 200년 만의 일로 400년 전에 촉발된 긴 다툼에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그러나 종손들의 이 같은 합의가 부적절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이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우선 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것은 학문의 전당에서 행해지는 사제간의 일로 특정 가문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 윤여빈 전문위원은 “두 가문의 종손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라며 “수 백년간 갑론을박하며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켜 온 양측 유학자들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성균관 관계자도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일을 후학이 아닌 가문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현실적으로 두 가문 종손의 합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국 벼슬의 높낮이로 사람을 평가하는 결과를 낳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윤여빈 전문위원은 “이번 합의는 1620년대 우복 선생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결국 관찰사보다 영의정 벼슬이 높다는 이유로 서애를 윗자리에 모시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서원에서 위패의 소목(昭穆:신주 모시는 차례)은 배우는 학생들의 모범이 되는 선생님을 순서대로 모시는 것”이라며 “학덕, 연령, 국가에 대한 공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지 단순히 벼슬 높낮이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병호시비(서애의 병산서원, 학봉의 호계서원간 시비)라는 이름으로 유학의 본향인 안동지역에서 수 백년간 전개돼 온 이 다툼은 단순히 자존심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양측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면서 역사의 한 단면을 장식해 왔다”라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와서 서열을 정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학봉(의성 김씨)의 후손인 김모(67.안동시)씨도 “지금껏 두 가문이 각자 두 분을 잘 섬겨왔는데 또다시 서열을 따지게끔 만들 필요가 뭐 있느냐”라며 “후세들에게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 평가된다는 인식을 심어줄까 봐 적잖이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논란과 관련해 안동시 관계자는 “유림측에서 호계서원 복원을 추진하면서 나름대로 위폐 서열을 정리를 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라며 “서원 복원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앞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은 신중하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서애와 학봉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가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다 "내가 어떤 임금인가" 물은 일이 있었다. 정이주가 먼저 답했다. "전하는 요순(堯舜)과 같은 분입니다." 그러자 김성일이 말했다. "전하는 요순 같은 명군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중국 고대의 두 폭군)도 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곁에 있던 류성룡이 거들었다. "김성일이 말한 것은 걸주 같은 임금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니 전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선조는 그제야 얼굴빛을 바꾸고 술상을 가져오라 했다.
▶안동 출신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300여 제자 중에서도 우뚝한 두 봉우리였다. 서애보다 네살 많은 학봉은 매사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학자 타입이었다. 서애는 화합과 조정 능력이 탁월한 정치 지도자 면모가 강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나자 조정에서 학봉을 탄핵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봤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서애는 '징비록'에서 "학봉 역시 전란 조짐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변호했다.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두 사람이 죽은 뒤 세상은 둘을 갈라놓았다. 1620년 퇴계를 모시는 호계서원에 제자들도 함께 배향하면서 퇴계를 중심으로 상석인 왼쪽에 학봉과 서애 중 누구의 위패를 모시느냐가 문제가 됐다. 서애 쪽에선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서애를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쪽에선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이 앞서야 한다고 했다. 오랜 우여곡절 끝에 서애의 위패는 병산서원, 학봉의 위패는 임천서원, 스승인 퇴계의 위패는 도산서원에 모시게 됐다. 1805년 서울 문묘에 서애와 학봉을 모시려 할 때도 양쪽에서 서로 서열이 앞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없던 일로 한 일이 있다.
▶학봉과 서애의 서열 논쟁은 걸출한 선비가 많아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장)이라 불리는 안동 유림에서 골치 아픈 난제 중 하나였다. 그 바탕에는 학문을 둘러싼 집안과 제자들의 자존심, 당쟁과 연결된 정치적 입장 차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올해 안에 착수할 호계서원 복원을 계기로 학봉의 의성 김씨 가문과 서애의 풍산 류씨 가문이 위패의 서열에 합의했다고 한다. 퇴계 왼편에 서애, 오른편에 학봉을 모신다는 것이다. 후손들의 400년 만의 화해가 조상들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안동의 유림사회에서 400년간 이어져 온 논란이 병호시비(屛虎是非)이다. 서애 류성용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어느 쪽에 모실 것이냐를 두고 양쪽 제자들 간에 벌어진 논쟁이다. 위패를 왼쪽에 모실 것이냐, 아니면 오른쪽에 모실 것이냐의 문제였다. 오른쪽보다는 왼쪽이 높은 자리로 여겨졌다. 그래서 양쪽 제자들은 서로 자기의 선생을 왼쪽에 모시려고 애를 썼다. 가운데에는 퇴계가 있고, 그 왼쪽에 학봉의 위패를 모시면 서애 쪽이 반발했고, 왼쪽에 서애의 위패를 모시면 학봉 쪽이 반발했다. 옛날 사람들은 이를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다. 왜 옛날 사람들은 왼쪽을 오른쪽보다 위라고 생각하였을까.
만약 조선시대 좌우개념에 비추어 보면 우파보다는 좌파가 더 높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 아닌가? 필자는 그동안 동양학의 원로 선생님들을 만날 때마다 좌(左)와 우(右)의 문제를 질문하곤 하였다. 어느 책에도 이 문제를 시원하게 답변해주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가들을 역방(歷訪)한 끝에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먼저 좌(左) 자에는 '공(工)'이 들어간다. 우(右) 자에는 '구(口)'가 들어간다. 공(工)은 공부(工夫)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왼쪽 내지 왼손은 공부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반대로 구(口)는 입 구(口)이다. 오른손은 입에 음식을 넣을 때, 즉 밥 먹을 때 사용하는 손이라는 의미가 있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도록 훈련받는 경우가 많았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잡는 아이가 있으면 이를 오른손으로 교정하곤 하였다.
이를 다시 우뇌(右腦)와 좌뇌(左腦) 이론에 대입해 볼 것 같으면, 왼손은 우뇌와 연결된다. 오른손은 좌뇌와 연결된다. 왼손을 많이 쓰면 우뇌가 개발되고, 오른손을 많이 쓰면 좌뇌가 개발된다. 왼쪽이 공부기능이라고 한다면, 이때의 공부는 우뇌 개발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가? 우뇌는 창조력과 종합적 사고를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학봉 종손이 양보를 해서 400년 시비에 종지부를 찍었다. 좌우가 문제가 아니라 호계서원(虎溪書院)을 복원하고, 선비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여긴 덕분이다.
鶴峯 金誠一 - 퇴계의 수제자… 임란 때 진주성대첩 이끌어
[종가기행 21] 義城 金氏 - 禮를 지키며 온화하고 검소, 博約 계승
'영남 종손의 표준'
[종가기행 21]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
퇴계 선생이 1569년(선조2)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陶山)으로 돌아가면서 추천한 인재 세 사람이 있다.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그리고 학봉 김성일이다.
동고는 2년 연상으로 영의정에 이른 이고, 고봉은 26년 후배로 퇴계의 대표적 제자며, 학봉은 향리의 37년 후배로 수제자다. 함께 추천한 동고와 고봉은 불화로 이듬해 결별했고, 학봉은 22년 뒤인 1591년에 일본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한 일로 곤경에 처했다.
퇴계가 서애를 추천하지 않은 일은 이미 승승장구 하고 있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비해 학봉은 보다 오랫동안 문하에 있었을 뿐 아니라 도학에 더욱 침잠해 쉽사리 벼슬에 나아가려 하지 않은 기질을 지녔다. 죽음을 앞둔 퇴계가 학봉을 추천한 것은 학봉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을 보면 학봉에 대해서 '당파싸움에 급급한 나머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라고 쓰여 있다. 학교에서도 그를 편협한 당파성 때문에 국론을 분열시킨 인물로 가르쳤다. 그러나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주장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고 적고 있다.
다소 미흡하지만, 후자가 역사학계의 정설이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 최고의 권위 있는 회고록인 징비록(류성룡 저, 국보 제132호)에 보면 저간의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려 깊은 대학자의 고뇌'에서 내린 복명이었다는 해석이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읽어보면 학봉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가서 벌인 외교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었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봉이 취한 '위의(威儀)를 갖춘 외교'와 '무력에 굴하지 않는 외교'를 정사와 서장관이 힘을 합해 이루었다면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겪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학봉 선생의 일생을 알려면 우복 정경세가 지은 신도비를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의 책 한 권 분량이라 쉽지 않다. 요약한 글로는 동문수학한 한강 정구의 '학봉 묘방석(墓傍石)'에 적은 글이 있다. 묘방석이란 무엇인가? 창석 이준이 지은 글에 답이 있다.
"사순(士純)의 휘는 성일(誠一)이니, 문소(聞韶, 義城의 古號) 김씨이다. 무술년(1538)에 출생하여 계사년(1593)에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년(1592)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정직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 왕의 위엄과 교화를 멀리 전파하였으며,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는 지성으로 감동하여 한 지역을 막았으니 충성은 사직에 남아 있고 이름은 역사에 실렸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 올라 심학(心學)의 요체(要諦)를 배웠으며, 덕행과 훈업은 모두 길이 아름답게 빛날 만하다. 만력 기미년(1619)에 한강 정구 씀."
"선생을 장사지낼 때 이상한 돌이 광중(壙中)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큰 북 같고 돌결이 부드러워 조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굴려서 묘 왼편에 두어 선생의 행적 대강을 새겼는데 정(鄭) 한강(寒岡)이 지은 것이다. 돌이 이곳에 묻힌 것이 아득한 옛날일 텐데 선생을 모실 때 비로소 나와 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쓰였으니 조물주의 의도가 필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기이한 일이로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준(李埈)이 삼가 적다."
학봉의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문자 시호에다 충성 충자를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자 몸으로 맞서 싸우다 순국했다. 탁월한 도학자면서 애국 애민을 실천했던 이다. 임란 초기에 초유사의 소임을 맡아 의병(義兵)의 발기와 지원에 크게 기여했고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로는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1592년 10월 임란의 3대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 4월 각 고을을 순시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왔는데, 피로와 풍토병이 겹쳐 4월 29일 진주성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운명할 때에 참모들이 약물을 들이자, "나는 약을 먹고 살 수 없는 몸이다. 제군은 그만 두라"했다.
대소헌 조종도와 죽유 오운이 병문안을 하면서 "명나라 구원병들이 승승장구하여 남하해 이미 서울을 수복했으며, 그래서 모든 왜구들을 도망치게 할 것입니다"라 하자, 선생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다니…. 그러나 그것 또한 운명인데 어찌 하겠나. 적들이 물러가면 회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붕당은 누가 혁파할 것인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처사요 심사원려(深思遠慮)한 태도다.
학봉은 타고난 시인이며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다. 그가 남긴 시가 대략 1,500여 편이나 되는데, 다수의 애민시(愛民詩)도 남겼다.
그 대표작이 모별자시(母別子詩)로 60구(句)나 되는 칠언고시(七言古詩) 장편인데 39세(1576, 이조좌랑) 때 썼다. 세상을 버리기 4개월 전인 1592년 12월 24일에 경상우도 감사로서 산청(당시 山陰縣)에서 안동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한글 편지의 사연은 절절하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궁금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되면 도적들이 달려들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직산(稷山)에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지 염려 마오. 장모 모시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 있으라 하오. 감사(監司)라고 해도 음식조차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기필하지 못하네. 그리워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흗날. 석이(버섯의 일종) 두근, 석류 20개, 조기 두 마리 보내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 나중에 호계서원으로 바뀌었다 훼철)과 임천서원, 전남 나주의 대곡서원(大谷書院), 경북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경남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등지에 배향되었다.
문집 10책이 남아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 발간되었다. 종택 유물전시관에는 보물 제905호(56종 261점)로 지정된 전적과, 보물 제906호(17종 242점)로 지정된 고문서를 비롯해 서산 김흥락 선생의 목판 등이 전시 보관돼 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1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씨 - 후손들 종가 중심으로 화합… 차종손은 지금도 門外拜 실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종가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크게 ▲선생의 삶과 학문 ▲400년을 이어온 종가 사람들의 구국활동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를 근자에 어떤 작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라는 시각으로 종가를 소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필자는 여러 번 종택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사랑채 정면에 걸린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현판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규모가 크지도 않을 뿐더러 글씨 또한 아담하다. ‘박약진전(博約眞詮, 박약의 참된 깨달음)’. 자세히 풀이하면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음’ 정도의 의미다.
‘박약’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말이다. 특히 한글로 표기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인 박약(薄弱)과 헷갈린다. 그래서 1987년에 출범한 사단법인 박약회는 아직까지 정체성에 대해 오해를 받기도 한다.
‘박약’이란 한마디로 유학의 핵심이다. 이를 송나라 주자(朱子, 1130-1200)가 이어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1501-1570)이 계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동쪽 공부방(東齋) 이름도 박약재(博約齋)이고, 유학의 본질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자는 취지로 결성한 모임도 박약회였다.
만약 사회에서 이 단어가 공자로부터 내려오는 학문의 정통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단법인 박약회에서 그렇게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박약재라는 방 이름도 정암 조광조를 모신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서만 쓰고 있다.
퇴계는 도학 적전(嫡傳)을 이은 분으로서 정암을 존경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학봉 종택에 걸린 ‘박약진전’이란 현판은 학문의 적전을 계승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 현판을 주목한 이유다.
‘박약진전’에 대한 계승 문제에 직접적인 이견을 표시한 글이 있기에 흥미롭게 읽었다. 우복 정경세의 문집 별집에 실린 우산서원(愚山書院,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었던 서원) 봉안문(奉安文)에서 ‘박약진전’을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서애 류성룡의 후손 학서 류이좌(柳台佐, 하회 북촌 주인으로 서애 6대손. 대사간에 이름)다.
학서는 ‘주자의 심학(心學, 性理學)과 박약진전을 퇴계 선생이 창명(倡明, 창도해서 밝힘)했고 서애 할아버지(厓老)가 이를 전해 도가 실추되지 않게 했으며 이를 선생이 계승했다’고 추앙했다. 여기서 ‘선생’은 서원에 새롭게 배향하는 우복을 말한다. 우복은 서애의 수제자였다. 학서의 견해로 보면, 박약진전은 서애가 이었고 이를 우복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봉 종가에는 이를 반박하는 아주 든든한 ‘물증(物證)’이 남아 있다. 이는 퇴계병명(退溪屛銘, 題金士純屛銘)이다. 학봉의 도학 연원(淵源)을 계승한 대산 이상정은 이 병명을 “퇴도 노선생(이황)의 병명(屛銘)을 첨부하여 연원을 전해 부탁한 실제를 드러내었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잘 읽어 보면 무언가 얻는 바가 있을 것으로, 반드시 마음속에 융합되는 바가 있어 옷자락을 잡고 문하에 나아가서 친히 말씀을 듣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의미를 부여했다.
병명은 모두 80자가4자 대구(對句)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은 마지막 구절인 ‘박약양지(博約兩至) 연원정맥(淵源正脈)’. 이 구절로 인해 후일 학봉 종가는 물론 유림사회에서 도학의 적전을 유념한 스승 퇴계의 징표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견도 있었고, 이는 학문적 토론과 논쟁으로 길게 이어졌다.
현재 이 글은 퇴계집 권44와 학봉집 부록 권3에 함께 실려 있다. 당시 퇴계 나이 66세, 학봉은 29세였다. 완숙한 학자와 문과 급제를 앞둔(학봉은 31세에 급제) 신진 학자 간의 의미있는 만남이었다.
공경과 정일로서 덕 이룬 인 요순(堯舜)이요 / 堯欽舜一 두려움과 공경으로 덕 닦은 인 우탕(禹湯)이네 / 禹祗湯慄 공손하고 삼감은 마음 지킨 문왕(文王)이요 / 翼翼文心 호호탕탕 드넓음은 법도 지킨 무왕(武王)이네 / 蕩蕩武極 노력하고 조심하라 말한 인 주공(周公)이요 / 周稱乾? 발분망식 즐겁다 말한 이는 공자(孔子)였네 / 孔云憤樂 자신을 반성하며 조심한 인 증자(曾子)이요 / 曾省戰兢 사욕 잊고 예(禮)를 회복한 인 안자(顔子)였네 / 顔事克復 경계하며 조심하고 혼자 있을 때 삼가서 / 戒懼愼獨 명성으로 지극한 도 이룬 인 자사(子思)요 / 明誠凝道 마음을 보존하여 하늘을 섬기면서 / 操存事天 바른 의로 호연지기 기른 인 맹자(孟子)였네 / 直義養浩 고요함을 주로 하며 욕심 없이 지내면서 / 主靜無欲 맑은 날 바람 비 갠 뒤 달인 염계(濂溪)요 / 光風霽月 풍월을 읊조리며 돌아오는 모습에다 / 吟弄歸來 온화하고 우뚝한 기상 지닌 명도(明道)였네 / 揚休山立 정제된 몸가짐에 엄숙한 품격으로 / 整齊嚴肅 전일을 주로 하여 변동 없은 이 이천(伊川)이요 / 主一無適 박문에다 약례까지 양쪽 모두 지극히 하여 / 博約兩至 연원 정통 이어받은 그 분은 주자(朱子)셨다네 / 淵源正脈
이 병명은 모두 5장의 목판에 앞뒤로 새겨 종택 운장각(雲章閣)에 보관하고 있다. 아쉽게도 퇴계가 손수 쓴 글씨 원본은 단 두 폭 16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남에서는 이를 탁본해 병풍으로 만들어 제병(祭屛)으로 사용하는 집이 많았다. 그런 유습을 이어받아 종손의 맏며느리(李點淑 여사, 퇴계 宗女)는 3년간 동양자수로 글씨를 새겨 10폭 병풍으로 만들었고, 현재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 사용하고 있다.
'천년불패' 땅에 90여칸 짜리
학봉의 종택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속칭 ‘검제’에 2,000여 평의 대지에 90여 칸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 종택에는 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1917년생) 옹이 살고 있다. 종손은 학봉 직손(直孫)이 아니다. 그래서 살던 곳도 검제가 아닌 임동면 지례였다.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독립운동을 은밀히 도운 사실이 알려져 1995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실상을 모르는 이들은 ‘파락호’라고 손가락질했다. 무남독녀 외딸만 두어 후사를 잇지 못하자 촌수가 가까운 이를 두고 100리나 떨어진 곳에 사는 현 종손을 맞았다.
1946년 29세였던 종손은 이미 결혼을 했고, 슬하에 아들 둘을 둔 상태였다. 본가에서 양자를 허락하지 않자 윤번을 정해 7개월여를 빌었다는 이야기는 눈물겨운 미담으로 전해진다.
학봉 종가가 있는 검제를 풍수가들은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라고 부른다. 1,000년 동안 길이 번성할 터전이라는 것. 달리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 즉 ‘전쟁, 기근, 전염병이 들지 않는 복된 땅’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좋은 터임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의 양자가 있었고, 13대 종손은 또 자신의 대에 이르러 나라가 망했으며,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대느라 살림이 기울었고, 종택까지 처분해야만 했다. 더구나 종손의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인 대를 잇는 일도 이루지 못했다.
10세 때 조부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학봉 11대 종손. 1827-1899) 선생이 왜경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복수를 가르치겠다’는 다짐을 했던 그는 문충고택(文忠古宅)이요 박약진전(博約眞詮)인 학봉 종택을 길이 계승할 적임자를 찾기 위해 부심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는 지인지감(知人之感, 사람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현 14대 종손 김시인 옹은 영남 종손의 표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를 만나면 선비의 ‘기품’이 느껴진다. 늘 온화한 모습에 언소(言笑)가 적다. 생활도 검소하다. 섬돌에 가지런히 놓인 검정고무신이 압권이다.
평소 별로 말씀이 없으신 종손께서 하루는 필자의 외조부(權五德, 1912-1972)에 대해 말했다. “그 어른은 점잖았고, 선비셨어.” 기억으로는 외조부는 송암 권호문 선생의 후손인 관계로 배향한 서원인 청성서원(靑城書院)의 문사를 살폈고, 처가인 창원 황씨(영주 대룡산, 황귀암 집) 집에서 글을 읽어 초년에 이미 선비의 반열에 올랐다. 불행히 일찍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년간 자리에 누워있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외조부의 삶을 기억해 필자를 더 가깝게 대한 것이다.
학봉 종가는 종가와 지손들 간의 틈새가 없다. 이미 종손의 증조부 대에서 재산을 정리한 터고 또 남은 토지라 해도 경북 북부 오지인 탓에 안동 도심과는 멀어 재산 때문에 다툴 일이 없었다.
학봉 후손들은 종가를 위하는 마음이 한결같다. 김흥락 선생 장례 때 모인 조문객이 4,000명이었는데, 각기 기정을 위해 가져온 대구포가 고방에 가득했을 정도였다 한다. 그리고 87년 유물전시관 개관식 때, 95년 김흥락 선생과 조부 김용환 옹의 독립훈장 추서 사당 고유 때, 99년 김흥락 선생 100주년 추모와 2000년 11월 기념 강연 때 각각 1,000여명이 전국에서 모였다.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는 100여 명이 참제(參祭)한다. 이때 일정 기준 이상의 성취가 있는 후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제사에 앞서 사당에 고유하는데, 그러한 의식이 의미도 있으려니와 보기에도 흐뭇하다. 불천위 제사는 더욱 엄숙하게 거행된다. 제상 뒤로 내걸리는 백세청풍(百世淸風)과 중류지주(中流砥柱) 대자 탁본 족자는 선생의 정신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고물(古物)이다.
제사 땐 전국서 100여명 참석
70년대 이전까지 학봉 종가의 사랑방은 과객들로 넘쳐났다. 이는 학봉 종가가 영남 유림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무관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종손과 종부의 역할이 컸다.
93년에 작고한 종부 한양 조씨(趙畢男 여사, 경북 영양 사도실 출신)의 베푸는 안살림은 유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삶이었다. 특이하게도 종손 부부는 생년월일이 같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차종손 김종길(金鍾吉, 1941년생) 씨는 안동사범, 고려대를 졸업했고 학군1기로 군복무를 마친 뒤 두루넷 사장, TG삼보컴퓨터 부회장을 역임했다. 차종손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종인들은 물론 유림에서도 명성이 높다. 근자에는 한문과 서도에 진력하여 시 수백 수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오는 명문 수십 편을 암송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암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보다 필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한번은 차종손을 따라 종가를 방문했는데, 차종손은 ‘문외배(門外拜)’를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예법에 부모에게는 문 밖에서 절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는 설날 부실한 시골집 문 밖에서 절을 한 후 방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영남에서는 아직도 일부에서나마 문외배를 행하고 있다. 그런데 차종손의 문외배는 생활 그 자체였다. 그러한 정신이 일선에서 은퇴한 뒤 그 어렵다는 한문을 외우게 하고 다시 붓을 잡아 법필(法筆)을 익히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초점은 분명 ‘박약진전’에 맞춰진 느낌이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종가기행 22] 西厓 柳成龍 - 임란 극복 명재상… '징비록'은 日서도 높이 평가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2]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1542년(중종37)-1607년(선조4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서애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23세 때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했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스승인 퇴계 선생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고 평했는데, 21세 때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다. 퇴계 문하의 양대 학맥이라 할 수 있는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서로를 높여, 학봉은 서애를 '나의 사표(師表)'라 했고, 서애는 학봉에 대해 '내가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했다.
안동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영가지(永嘉志, 서애 제자 龍巒 權紀 편찬) 권7 인물조(人物條)에 보면 서애에 대해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실천하여 연원정맥(淵源正脈)을 이었다'고 했다. 학봉에 대해서는 '퇴계 선생에게 배워 심학(心學)의 요체를 듣고 견고하고 각려(刻勵)하게 노력하여 조예가 정심(精深)했다.'고 평하고 있다. 미묘한 문제이지만 영가지에서는 무게 중심이 서애 쪽에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도심 도로명에 퇴계로가 있고 그곳에서 갈라진 작은 도로에 서애로(西厓路)로 명명된 길이 있어 스승과 제자가 수도 서울에서 길로도 만나고 있다.
서애는 30여 년 동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뒤 51세(선조25, 1592) 때 영의정에 이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세가로서의 서애를 생각하는데, 어쩌면 서애는 57세(선조31, 1598) 때 무고(誣告)로 영의정에서 체직된 뒤 삭탈관직까지 당해 58세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9년을 더없이 소중하게 보냈다.
은퇴 정치가보다는 대학자로서의 위상이 빛을 발했다. 임란 때 의병장으로, 그리고 강직한 강관(講官)으로,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 겸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1563-1633), 부제학에 이른 창석 이준(1560-1635) 등으로 대표되는 서애학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이다.
서애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경세가(經世家)며 구국의 영웅이다. 이점을 살피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 손수 이면지에다 쓴 임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이다.
안동에 국보가 4점인데, 그중에 하회마을에 두 점이 있다. 징비록과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는 이전에 징비록 원본을 금고에서 꺼내 펼쳐본 적이 있다. 그때 느낌은 어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금고에 들어 있어 안전하지만 습기 문제, 표지의 장첩된 상태, 조잡해 보이는 보관 상자 모두가 불만이었다. 놀라운 점은 이면지에 초서체로 당시로서도 고급지가 아닌 일반 용지에 쓴 책이란 사실이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집요한 공격을 당했고 결국 파직된 상태로 가난한 옛 고향 집을 돌아와 썼던 이 조그마한 책이 나라의 시련을 극복할 지혜를 담은 책으로 여전히 생명을 지니고 있다.
누구보다 시대를 앞선 지식인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1808년(당시 다산 선생 47세)에 아들에게 여가를 보아 서애집과 징비록 그리고 성호사설(성호 이익 작), 문헌통고를 읽으면서 그 요점을 정리하라는 가르침을 내린다. 다산은 누구보다 서애를 존경하고 사상을 본받고자 했던 이다.
징비록은 정책 분석과 대책이 탁월해 적국에 유출되어서는 안 될 목록에 들어 있었다. 청장관 이덕무가 쓴 글을 보면 이미 징비록은 일본으로 유출되어 출판(청천 신유한의 해유록에 보면 징비록이 일본 대판에서 출판되었다고 기록함, 도쿠가와 막부 시절, 1695년 경 교토에서도 간행)까지 된 것을 걱정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 보면 징비록은 이미 조선 시대에 탁월한 회고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은 일본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일종의 '비서(秘書)'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시대(1936년)에 그들은 아주 격조 있는 두 책 영인본 300부 한정판으로 간행했다. 아쉽게도 광복 이후 지금까지 당국도 문중도 아직 격을 갖춘 복제품을 간행한 적이 없다.
다행히도 서애선생기념사업회의 주도로 영역본 징비록이 나왔다. 징비라는 시경의 구절을 어떻게 번역했을까? 적지 않게 궁금했다. "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경계하여(징)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비)'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이 심오한 책 제목은 '잘못을 고치는 책(The Book of Corrections)이다"라고 한글로 옮겼다. 탁월한 언어 감각이다.
영역판은 호남대학교 최병헌(영문학) 교수가 6년여 노력을 들여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간행했다. 최 교수는 2003년 4월 4일 출판기념회에서 여러 외국 학자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최고 책임자가 쓴 자기 반성문인 동시에 향후 최고 지침서요, 위기관리 편람이다. 그【?북한 핵위기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요즘, 우리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핵실험은 남의 이야기하듯 적당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서애는 전쟁 발발의 징조, 전시(戰時) 중의 각종 대비책,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양국과 강화(講和) 문제 등을 조목조목 적고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보면, 현명한 외교와 정확한 국제 정세와 적의 정보 분석, 유사시의 대책, 그리고 확고한 집단 동맹체제(혈맹 관계)의 구축일 것이다.
400여 년 전 서애의 이러한 분석과 대비책 역시 '냉전적 사고'로만 치부하기엔 탁견이다.
서애는 타고난 경세가다. 조정 관료나 정승 중 행정 능력이 탁월한 이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서애는 그러한 능력을 지녔다. 실록 서애 졸기에 보면 선조실록과 수정실록 두 편이 비교적 길게 실려 있는데, 공히 시각을 달리하는 부정적인 평이 있다.
그럼에도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렇게 소개했다. "경연(經筵)에 출입한 지 25년 만에 상신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경외(京外)의 기무(機務)를 담당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과 계첩(揭帖)이 주야로 폭주하고 여러 도의 보고서들이 이곳저곳으로부터 몰려들었는데도 성룡은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서애는 지인지감(知人之感)이 뛰어났다. 이 점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천거와 음해 세력들로부터의 비호를 통해 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울 수 있게 한 장본인이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순신에 대해서는 조정 중신은 물론 국왕까지 집요하게 음해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때마다 서애는 간곡하게 그렇지 않다는 점을 설명해 구국의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게 했다.
선조30년 1월 수군 작전 통제권을 두고 국왕과 중신들이 나눈 대화는 오늘날과도 흡사한 점이 있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으로 생긴 틈새를 당파 세력들이 비집고 들어섰고 국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볍게 의심을 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졌다.
이때 서애는 이순신과는 같은 동리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너무나 잘 알며 그래서 자신 있게 만호(萬戶)로, 그리고 수사(水使)로 직접 천거했다. "글을 잘 하는 사람인가?"라는 선조의 물음에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어느 곳 수령으로 있는 그를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라 했다.
서애가 실각한 직후인 같은 해 11월 19일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유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얼마 뒤인 12월 서애는 삭탈관직 당한다. 문무로 갈린 벼슬길이며 직급과 직위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지만 국난을 몸으로 막고 참소에 너무나 의연했던 두 평생지기의 운명은 부절을 합한 듯 너무나 닮았다.
서애는 또한 청백리였다. 그 면모는 한 장의 고문서에 고스란히 담겨 전한다.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에는 선생의 부음이 도성에 전해졌을 때 조정 관료들이 연명으로 부의를 추렴한 문건 한 장이 전시되어 있다.
서애는 삭탈관직된 뒤 고향을 찾았을 때 마땅한 거처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대신의 품격을 유지시켜줄 녹봉조차 받지 못했고 그 무렵 입은 수해로 거처할 곳이 더욱 마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옮겨 앉은 곳이 강 건너 한적한 서당인 옥연정사였고 징비록 집필을 마친 뒤 죄인을 자처하며 더욱 후미진 학가산 골짜기를 찾아들어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 두어 칸을 얽었다. 그때는 세상을 버리기 1년 전의 일이었고 그곳에서 선화했다.
66세(1607년 5월 6일)로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3일간 조시(朝市, 조회와 시장)를 정지하고 승지를 보내 조문했으며 역대 여러 국왕들은 수차에 걸쳐 예관을 파견해 사당에 치제했다.
서울 옛집이 있던 묵사동(墨寺洞)에서는 도성 각전(各廛)의 백성들이 몰려와 조곡했는데 1,0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백성들에게 끼쳤던 서애의 공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도 망한 나라를 구했다는 '산하재조지공(山河再造之功)' 때문이었을 것이다.
묘소는 안동 풍산읍 수동(壽洞)에 있는데(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 외 6대손 한산 이씨 대산 이상정이 묘갈명을 씀), 명당으로 이름나 풍수가들의 답사코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의물(儀物)들은 너무나 조촐하다. 퇴계가 그러하듯 서애 역시 신도비가 없다.
광해군6년(1614) 4월 병산서원에, 광해군12년(1620) 9월 여강서원에, 인조5년(1627) 10월 군위의 남계서원에, 인조9년(1631) 10월 상주의 도남서원에, 인조21년(1643) 10월 예천의 삼강서원에, 숙종15년(1689) 의성의 빙계서원에 각각 위패를 봉안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5.안동의 三多, 당신은 아시나요 (안동의 선비문화)
‘안동’이라면 양반·선비·종가를 으레 떠올린다. 이들 모두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유교가 남긴 문화이다. “안동에는 산이 많고, 인재가 많고, 서원이 많다”라는 말이 있다. 안동의 삼다(三多)다. 산다(山多)는 태백산과 소백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의 지형적 특색을, 인다(人多)는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을 비롯하여 뛰어난 유학자를 대거 배출했다는 것을, 원다(院多)는 유교가 성행했음을 말한다.
안동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책은 ‘안동역사문화기행’(푸른역사)이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안동문화를 권역·테마 별로 나누어 다양한 사진을 곁들이면서 소개하고 있다. 안동에 대해 더 상세한 지식을 원하는 이들에게 맞는 책은 ‘안동문화의 수수께끼’(지식산업사)이다. 책제목에서 말해주듯이 안동에는 왜 양반이 많고, 고려 공민왕은 왜 안동으로 몽진했으며, 안동에는 왜 전탑(塼塔)과 목조건축물이 많은가 하는, 안동문화의 수수께끼를 시원하게 풀어준다. 안동의 유교문화는 문화재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종가에는 종손(宗孫)과 종부(宗婦)가 종가의 본분을 다하고자 정성을 가다듬어 조상제사를 지내고 낯선 손님을 맞이하면서 전통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유교전통이 강한 만큼 안동에는 “종가 하나 끼고 돌아가지 않는 골이 없다”고 할 정도로 고색창연한 종가가 많다. 안동의 종가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안동의 종가’(지식산업사)를 읽으면 된다. 안동대 윤천근 교수의 경쾌하고 맛깔스러운 글과 김복영씨의 한 폭의 그림 같은 사진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마치 종가 대청마루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함이 전해온다.
1999년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 하회마을을 다녀갔다. 하회마을은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풍산류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대표한다. ‘민속마을 하회여행’(밀알)은 하회마을의 역사, 자연경관과 풍수, 종가와 정자, 하회탈춤 등 그야말로 하회마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안동의 선비문화가 유난히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를 탐구했던 유학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정점에 대유(大儒) 퇴계 이황이 우뚝 서 있다. 퇴계 연구자로 정평이 나있는 김종석 박사의 ‘청년을 위한 퇴계 평전’(한국국학진흥원)은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유학자 평전을 대중적 글쓰기로 쉽게 풀어내고 있어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다.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일화를 중심으로 퇴계의 인간적 삶과 학문생활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