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충순 蔡忠順
#高麗史93卷-列傳6-蔡忠順-001
○蔡忠順史失世系. 穆宗朝累遷中樞院副使王寢疾. 忠順與劉瑨崔沆直宿銀臺一日王召忠順入臥內 左右語曰: "寡人疾漸就平聞外*閒有窺 者卿知之乎?" 對曰: "臣試聞之未得其實."
채충순은 ≪사기≫에 그 세계가 전하여 지지 않았다. 목종 때에 누차 승진하여 중추원부사(副使)에 이르렀으며 이때에 왕이 병석에 누워 있었다. 채충순은 유진(劉瑨), 최항(崔沆)과 함께 은대(銀臺)에서 당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왕이 채충순을 침실로 불러다 놓고 측근자들을 피석시킨후 말하기를 “나의 병은 점차 회복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듣건대 외부에서 나의 자리를 엿보는 자가 있다 하는데 그대는 이것을 아는가”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말을 들은 바는 있으나 그런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王取枕上封書與之乃劉忠正所上也云: "右僕射金致陽 非望遣人致遺深布腹心仍求內援臣曉譬拒之不敢不奏." 又取書一封與之乃大良院君詢所上也云: "姦黨遣人圍逼遺酒食臣疑毒不食與烏雀烏雀斃. 謀危若此願聖上憐救."
왕이 베개 위에 있는 봉서(封書)를 그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유충정(劉忠正)이 올린 글이었으며 그 글의 내용은 “우복야 김치양이 왕위를 엿보고 있으며 사람을 보내 선물을 주면서 심복을 널리 포치하고 저에게도 은근히 원조해달라고 요구하므로 저는 그에게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거절하였습니다마는 이 일은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다른 편지 한 통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올린 글이었고 편지 내용은“악당들이 사람을 보내 저를 포위 핍박하며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저는 독약을 넣었을까 의심하고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들에게 주었더니 먹은 새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 음모의 위험이 이러하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忠順見畢奏曰: "勢急矣宜早圖之." 王曰: "朕疾漸危篤朝夕入地太祖之孫唯大良院君在卿與崔沆素懷忠義宜盡心匡扶使社稷不屬異姓." 忠順出以語沆沆曰: "臣常以爲憂今上意如此社稷之福也."
채충순이 편지를 보고 나서 아뢰기를 ”사세가 급박하였으니 빨리 손을 써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병이 점차 위독하여 가니 조석간에 땅 속에 들어 갈 것 같고 태조의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 뿐이다. 그대와 최항은 평소부터 충의로운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마땅히 성의를 다하여 그를 도와 사직이 타성에게 속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니 채충순이 나와서 최항과 상의하였다. 최항은 말하기를 “나는 항상 이 일에 대하여 근심하고 있었는데 이제 주상의 뜻이 이러하시니 국가의 행복이다.”라고 하였다.
忠正遣監察御史高英起謂忠順沆曰: "今上寢疾姦黨伺隙恐社稷將屬異姓疾如大漸宜以太祖之孫爲嗣." 忠順等陽驚曰: "太祖之孫安在?" 曰大良院君是也可以主 忠順等* 曰: "吾等亦聞此久矣當聽天所命."
유충정(劉忠正)이 감찰 어사 고영기(高英起)를 보내 채충순과 최항에게 전달하기를 “지금 상왕께서 병석에 누워 계신데 악당들은 기회를 엿보고 있으므로 사직이 타성에 넘어 갈 염려가 있으니 만약 병환이 위독하시거든 태조의 손자로 하여금 후계자로 삼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채충순 등은 거짓 놀라면서 묻기를 “태조의 손자가 어디 계시오?”라고 하니 또 말하기를 “바로 대량원군입니다. 그는 왕위 계승자로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채충순 등이 대답하기를 “우리들도 역시 이런 말을 들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마땅히 하늘이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忠正更遣英起曰: "我欲躬往議之騶從繁恐爲旁人所疑冀兩君見枉." 忠順與沆議曰: "此非私事實關宗社可往見之." 遂詣定議.
충정은 또다시 고영기를 보내 전하기를 “내가 친히 가서 의논하고 싶으나 추종하는 호위병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의 의혹을 살까 두려우니 두 분이 왕림하여 주시오.” 라고 하였다. 채충순은 최항과 의논하기를 “이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실로 국가 대사이니 찾아 가서 만나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리 하여 드디어 그를 방문하고 일을 결정하였다.
時大良院君在三角山神穴寺. 忠順入奏王曰: "宜擇文武各一人率軍校往迎之." 忠順與沆及英起等議遂擧宣徽判官皇甫兪義以聞忠順等又議奏: "軍校多則行必遲恐姦黨先 宜遣十餘人徑往迎來." 王然之曰:
당시 대량원군은 삼각산 신혈사에 있었다. 채충순이 궁중에 들어 가서 이 사유를 왕에게 아뢰니 왕은 말하기를 “마땅히 문관, 무관을 각 한 명씩 선택하여 군교들을 거느리고 가서 영접하라.”고 하므로 채충순과 최항 및 고영기 등이 의논하고 선휘 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黃甫兪義)를 왕에게 천거하고 채충순 등이 또 의논한 후 왕에게 아뢰기를 “군교들이 많으면 행동이 반드시 지연되어 악당들이 먼저 손을 쓸 우려가 있으니 10여 명 정도를 파견하되 지름길로 가서 영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왕도 그 의견이 옳다고 말하고 계속하여 말하기를
"予欲親禪可 遣不可緩也. 若疾 如成宗封朕故事. 早定名分則無窺伺之人矣. 朕無子而繼嗣未定衆心搖動是吾過也. 宗社大計無過於此卿等其各盡心." 王遂泣下忠順亦泣
“내가 친히 왕위를 선위(禪位)하고 싶으니 빨리 사람들을 보내고 지체하지 말도록 하라. 만약 내 병이 쾌복되면 성종이 나를 책봉하던 옛일과 같이 하겠다. 명분을 일찍 정하면 틈을 엿보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 내가 자식이 없고 계승자가 미정으로 있으므로 뭇사람의 마음이 동요되는데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국가 대계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으니 그대들은 각기 충심을 다하라!”고 하면서 왕이 드디어 눈물을 흘리니 채충순도 울었다.
王命忠順草與大良君書親自硏墨忠順曰: "臣自硏以書請勿勞聖體." 王曰:
왕은 채충순에게 명령하여 대량원군에게 주는 글의 초안을 지으라고 하면서 친히 먹을 갈아 주니 채충순이 사양하기를 “제가 스스로 갈아서 쓰겠사오니 청컨대 성체(聖體)를 수고롭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意甚忙不覺勞也." 其書曰: "自古國家大事素定於前則人心乃安. 今予寢疾姦邪窺 以寡人不豫爲之所名分未定故爾. 卿太祖嫡孫宜速上道. 寡人未至大期得面付宗社沒無遺恨若有餘齡則使處東宮以定群心."
“나의 마음이 심이 조급해지니 피로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채충순이 초안한 글은 다음과 같다. “옛날부터 국가 대사는 미리 결정하면 민심이 안정되는 법이라. 이제 내가 병석에 누워 있으니 간신들이 기회만 엿보고 있으며 명분을 정하여 두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엿보고 있다. 그대는 태조의 적손이니 빨리 길을 떠나 오라! 내가 죽기전에 면대하여 종묘, 사직을 그대에게 맡기면 죽어도 한이 없겠고 만약 내가 더 살게 되면 그대는 동궁에 거처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王又令書其尾曰: "道路險阻恐姦人潛伏變起不虞可戒愼而來." 時閤門舍人庾行簡不欲迎立王慮事泄戒忠順: "勿令行簡知之." 以書授兪義等往迎于神穴寺. 遂卽位是爲顯宗.
왕이 또 이 편지 끝에 다음과 같이 첨가하게 하였다. “길이 험하여 악당이 잠복하였다가 불의의 변을 일으킬 수도 있을 터이니 경계하고 조심하여 오라!” 당시 합문 사인 유행간(庾行簡)은 그를 맞아 들여 세우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채충순에게 당부하기를 “유행간이 알지 못하게끔 하라.”고 하고 편지를 황보유의 등에게 주어 신혈사로 가서 맞아 오게 하였다. 이리 하여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현종이다.
#高麗史93卷-列傳6-蔡忠順-002
顯宗以忠順直中臺俄遷吏部侍郞兼左諫議大夫. 王避契丹南行忠順扈駕王次廣州從行諸臣聞河拱辰等被執皆驚懼散走唯忠順與侍郞忠肅張延祐周佇柳宗金應仁不去.
현종은 채충순을 직중대(直中臺)로 임명하였다가 곧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로 승진시켰다. 왕이 거란을 피하여 남녘 땅으로 갔을 때 채충순은 왕을 호위하였는데 왕이 광주에 체류하니 수종하던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 등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다 놀라서 흩어져 도망갔고 다만 채충순과 시랑 충숙(忠肅), 장연우(張延祐), 주저(周佇), 유종(柳宗), 김응인(金應仁) 등이 가지 않고 있었다.
累轉吏部尙書參知政事賜推忠盡節衛社功臣號封濟陽縣開國男食邑三百戶.
채충순은 누차 승진 되어 이부 상서 참지정사로 되었으며 유충 진절 위사 공신(惟忠盡節衛社功臣) 칭호를 받았고 제양현 개국남으로 책봉되고 식읍 300호를 받았다.
忠順奏: "軍士有父母年八十已上者免軍就養諸文武員僚父母年七十已上無他兄弟者不許補外其父母有疾給告二百日護視." 王從之.
채충순이 왕에게 아뢰기를 “병사들에게 80세 이상 노령의 부모가 있으면 병역을 면제시켜 부모를 공양하게 하고 여러 문무 관원들로서 70 세 이상의 부모가 있고 다른 형제가 없는 자는 지방관으로 임명하지 말며 그 부모가 병중에 있을 때는 200일간 휴가를 주어 간호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더니 왕은 이 건의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十二年檢校太尉濟陽縣開國子食邑五百戶加輔國功臣號. 尋拜內史侍郞平章事兼西京留守加太子少師. 十八年遷門下侍郞平章事二十一年判西京留守事以疾表請解職不允明年致仕靖宗二年卒謚貞簡.
현종 12년에 검교 태위로 임명되고 제양현(濟陽縣) 개국자(開國子)로 책봉하였으며 식읍 5백 호를 주고 보국 공신 호를 더 주었다. 얼마 후에 내사시랑평장사 겸 서경 유수로 임명하고 태자 태사 벼슬을 더 주었다. 현종 18년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전임되었다가 21년에 판 서경 유수사로 되었는데 병 때문에 글을 올려 해직을 청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이듬해에 치사하였으며 정종 2년에 죽었는데 시호는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첫댓글 고려의 역사까지 올려 주시는 독자님, 고맙습니다. 잘 몰랐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의 역사를 접할 수 있음에 시창작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옛선인들의 지혜를 배우고 옛향기가 그윽한 방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