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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전서 ]
98 예수고리 수련회,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지난 시간에 요한일서를 공부하면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물이라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이 되면서,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에게로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 사람은 각자가 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 생각밖에는 할 줄을 모르는데,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이라는 대 원칙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비교해서 누가 더 낫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성화(聖化)' 라는 개념인데, 전혀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았다면 되었다는 것이다.
◈ 베드로전후서 -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에 대해서 !!
*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그러한 기준이 우리에게 적용이 될 때는, 우리 속에서 어떤 현상들이 벌어지느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런 삶이라면 당연히 그것에 상응하는 내용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 '베드로전후서' 라는 것이다.
* 강의를 하다가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사실 많이 강조를 하는데도 마치고 나면 그런 질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근호의 강의는 삶이 없다!' 라는 선입관을 가지고서 듣는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질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혹시 그런 마음 가운데 비복음적인 요소는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물에 대해서 자꾸만 우리 쪽에서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그러나 우리의 삶은 선물이기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분에 의해서 외부에서 투입되어 채워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자꾸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개념이 깨어진다는 것이다. '이만큼은 주님이 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하고' 라고 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협상이지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믿는 자들끼리의 대 경쟁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는 지금 그런 경쟁 속에 있지만 말이다.
* 만약에 그러한 인간들끼리의 업적과 공적이 앞선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주님의 사랑 관계인가? 경쟁에 갇힌 마귀의 하수인에 불과하지 말이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노예가 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죄악 된 모습이 아닌가?
* 소위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이, '칭의' 다음에 '성화' 라고 하는데, 그러나 논리적으로 이렇게 되려면 성화에 적용되는 원리가 칭의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만약에 적용되는 원리가 다르다면 서로 연결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을 성경을 살펴보면 그 적용되는 원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칭의' 라는 것은 조건 없이 의롭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의 성화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의롭게 되었는데, 뭐가 더하고 덜한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논리상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선물에 애착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남이 다리가 길든지, 허리가 날씬하든지, 아니면 머리가 좋아서 성경을 잘 외우든지, 그런 것에 너무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 아니, 달이 자구 주위를 돌면서 자기는 사람도 없고 춥고 쓸쓸하다고 하면서 지구를 보고 시비를 걸던가? 태양은 자기가 너무 뜨겁다고 살려달라고 하던가? 그냥 돌고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돌고 또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인간만은 그것을 선물로서 여기지 아니하고 서로 키 재기를 하고 난리를 피우느냐는 것이다.
* 지난 시간에 요한일서를 강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안고 빛으로 우리에게 들어왔는데, 이 사랑은 이미 우리가 죄인임을 전제하고 들어온 사랑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차피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고 선물이니까, 우리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다.
* 이러한 우리의 삶의 내용을 구체적인 내용을 베드로전서가 말해주고 있는데, 이러한 믿는 자들의 삶의 내용에 대해서, '온유와 자비와 화평과 양선과 형제우애와 …' 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그래서 이런 것은 열심히 훈련을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서 모두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복음서들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서에 기록되어져 있는 예수님의 삶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제는 그분을 믿는, 양자 된 자들에 의해서 그대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의 내용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산 삶의 원리 - 고난 !!
*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의 하신 일을 그대로 본받아서 하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때로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뺨도 얻어맞고 살았는데, 예수님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았던 그 원리를 따라서 사는 것인데, 그 원리가 바로 두 글자로 '고난'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3장에서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의를 이루? 라고 하시면서, 세례요한으로부터 받은 세례가 바로 불세례인데, 그래서 '예수님도 고난을 받았으니 우리도 고난을 받자' 라고 하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자기는 전혀 아니면서 자기도 순교를 한다면서 밥을 퍼주니 마니 하면서 까분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은 것이 자기가 고난을 받고 싶어서 받았는가? '나는 메시야이다. 나를 죽여라' 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영웅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말씀에 의해서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때가 차매' 라는 것이다. 설친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틀이 있는데, 이것을 '세례' 라고 하는 것이다.
◈ 세례는 전혀 새로운 영역이다 !!
* 세례라는 것은 매체를 통해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세례라고 하는데, 즉, '물세례' 라는 것은 물에 빠져서 죽는 경험을 말한다는 것이다. 세례라는 것은 세례를 주는 주체 속에 합류가 됨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이 '세례' 라는 것이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인데, 구약에는 세례가 없다는 것이다. 세례에 대해서 예언된 것은 있지만 말이다. 구약에서는 기껏해야 '할례' 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가 되지 않는데, 이 마음의 할례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 세례이고, 그것이 에스겔에 예언되어 있다는 것이다.
◈ 세례란, 세례를 주는 분의 힘으로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것 !!
* 인간은 도저히 자기가 마음의 할례를 할 수가 없기에, 그래서 세례를 베푸시는 분에 의해서, 그분의 새로운 영역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강제적임 힘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할례를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에서 성신이 임하면 마음이 새롭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롭게 되는데, 즉, 구약에서 말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게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 동안 단독인으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이러한 단독인의 모습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즉, 내가 알아서 율법을 지키고 하는 것이 없어지고, 이제는 세례를 준 분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 마치 이것은 IMF의 공적자금을 연상시키는데, 아무리 제대로 하라고 해도 안 되던 것이, 이제는 이 공적자금이 들어와서 그 동안 자기들 마음대로 해서 엉망이 된 경제구조를 IMF가 요구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IMF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신명기 율법을 통해서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했는데, 즉,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를 주는 주체자가, 물론 아직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의 신을 부어줌으로 말미암아 주체가 바뀐다는 것이다. 그분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단독으로 율법을 고수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1장에서, 성령세례가 임하거든 그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세례를 주실 자라고 했는데, 여기서 성령세례라는 것은 에스겔의 말씀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세례요한아, 우리 힘을 합쳐서 한번 잘해보자. 너는 네 길로, 나는 내 길로 갈게' 라는 것이 아니고, 세례를 받아서 의(義)를 이루자는 것이다.
* 세례요한은 누구인가? 그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저에게 세례를 받습니까?' 라고 하자, 예수님은 그렇게 해야만 말씀이 완성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 조금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예수님께서 죄인인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죄' 라는 영역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죄의 영역 속으로 들어간 상태를 두고서 '고난'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성도들의 고난 -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 !!
* 일반적으로 고난이라고 하면, 교회에 나간다고 머리채를 뜯기고 책가방을 불에 살리고 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 땅에서는 고난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삼양라면을 끓어먹어도 고난이고, 야구를 보러가도 그것이 고난이라는 것이다. 즉, 말씀 속에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 자체가 고난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기에 '대리죽음'을 당하시는데, '대체죽음'은 아니고 말이다. 대체죽음이란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나는 축복이다' 라고 하는 순복음에서 가르치는 것인데, 그들은 말하기를, 고난은 주님이 당하시고 우리는 이제 그 대가를 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戮탕戮습?'함께 죽는 죽음' 이라는 것이다.
*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은 인간이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순종하지 아니한즉 가두어두셨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순종' 이라는 것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순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은 그 누구도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할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고추 끝은 얼마든지 자를 수 있지만 말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 사랑에 폭 빠져서, 자기를 우상화하도록 타고났는데 말이다.
* 그래서 드디어 행동의 주체가 바뀌게 되는데, 어떤 미지의 인물을 내세워서 그분의 신을 보냄으로 드디어 주체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율법이 드디어 완성이 되는데, 이때 백성들은 세례라는 의미에서 여기에 합류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이 분은 생명의 주체가 되고 백성들은 이 분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세례요한이 극구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살인죄가 있고 간음하는 죄가 있다고 해서, 그분이 그런 죄를 지으면서 살았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 소위 말하는 '성화'를 염두에 두고서 이야기한다면, 예수님께서 죄에 합류한다고 해서, 모든 죄들을 도시의 사냥꾼처럼 돌아다니면서 찾아서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에 합류한다고 해서 돌아다니면서 의로운 일을 모두 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기에 자꾸만 성화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할까요?' 라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하나의 선물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떤 내용물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내용물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에 계획된 대로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먼저 예수님에게 그 내용물이 꽉 채워지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았던 삶이 내용물로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 되고 증인이 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삶 자체가 고난이다 !!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미움을 받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삶 자체가 모두가 다 고난이라는 것이다. 즉,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도 모두가 다 고난이라는 말이다. 물론 말씀에 의해서 말이다.
* 그러면 어떤 질문이 하고 싶은가? '아니 목사님, 예수님은 예수님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그래도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성급하지 튀어나오고 싶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없으면 말고 말이다.
*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따라서 산 사람들이 나오는데, 세례요한이나 12 제자들이 그러한데, 물론 사도바울도 있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냥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을 보면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소위 자기가 성령을 받았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말은 믿을 필요가 없고, 제일 확실한 것은 사도바울의 신학과 다르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내가 전한 것 말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가 잘라서 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받은 성령이 참 성령이라는 것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설교를 듣고 간증을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다고 '아멘' 하지를 말고, 그것이 과연 사도바울의 신학과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인지, 악령인지를 구별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말씀에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 그리고 과연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그런 구원문제에 대해서 초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왜 초조하다고 했었는가? 하나님께서 넓고 길게 일하시는 것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 지금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베드로전서에는 '고난'에 대해서 나오는데, 먼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사도들의 고난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다음에 우리의 고난을 검토해서, 그것이 하나로 연결이 잘되면, 우리가 성도인 것이 확인이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고난은 '은폐성' 이다 !!
* 예수님의 고난을 신학적으로 '은폐성' 이라고 하는데, 즉, 비밀이라는 것이다.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의 예언이고, 그것이 말씀이기에, 반드시 그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니까 그들이 수군거렸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예수님의 당시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은 무엇인가? '종교' 라는 것이다. 종교에서 신(神)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절대자로 남겨두기에, 신에게서 나오는 어떤 고차원적인 행동은 없고, 다만 말씀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주체는 자기들이라고 보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박살이 났다는 것이다. 마음의 할례가 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즉, 마음이 썩었기에 그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해도 역시 썩었다는 것이다.
* 유대인들은 모세율법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문자대로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 공경하면 되고, 탐심을 내지 마라고 하면 탐심을 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무엇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썩어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 만약에 썩은 것은 도려내고 괜찮은 것만 사용하면 되지를 않느냐고 한다면, 그러나 말씀은 참으로 희한해서(?) '탐내지 마라' 라는 것이 들어오면, 우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탐심이 발동해서 환장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탐심이 마구 활동한다는 것이다.
* 요즘에 소위 '순결선언' 이라는 것을 한다고 난리를 치는데, 그러나 그렇게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서 촌에서 올라온 학생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것을 듣는 순간에 갑자가 늑대의 본성과 야시의 본성이 마구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성(性)교육도 그렇고 말이다. 실제로 이런 것이 교육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 프로이드 - 인간의 행동은 성적(性的) 에너지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
* 프로이드는 이런 성적(性的) 에너지를 '리비도' 라고 했는데, 즉, 이것은 초자아와 자아 사이의 갈등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을 목숨을 걸고 살렸다고 하자, 그러면 매스컴에는 선한 일을 했다고 난리를 치겠지만, 그러나 프로이드에게는 이것이 성적 에너지의 방출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을 구출한 것이나 강간한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동일한 에너지이고, 성적 에너지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오락이나 취미생활이 사실 다 그렇다는 것이다.
* 여성들이 뜨개질을 하는 열심히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도 바람을 피우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이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자기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프로이드에게 걸리면 다 이렇게 강간범(?)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 프로이드는 의식은 무의식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았는데, 무의식은 나름대로 자체적인 세계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 속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나오는데, 이것을 비트켄쉬타인은 그림언어라고 했는데, 우리가 언어를 생각할 때는 반드시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데, 그런 그림을 의미를 주어서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 언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이 짜집기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 이것을 영화에서는 '몽타쥬' 라고 하는데, 즉, '편집이론' 이라는 것이다. 사실 초창기의 영화는 그냥 죽 가면서 읽어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탈리아에서 영화가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면서 장르가 되었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언어라는 것은 그림의 짜집기인데, 이 그림 하나 하나를 '기호'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언어이지만 말이다. 평소에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이 그림으로 마구자비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얼마나 회개 망측스러운지 말이다. 이것이 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신체는 정신에게 압력을 준다 !!
* 사람이 꿈을 꾸는데, 바다에 빠지는 것은 소변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은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신체가 불안정해서 그런 것인데, 그래서 이것을 두고서 '신체는 정신에게 압력을 준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의식의 세계에 그대로 반영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게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인간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고 있고, 그래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노력한다는 것은 아직도 말씀을 제대로 깊이 있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직도 활성화가 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시골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한가? 그러나 땅값이 한번 오르면 어떻게 되는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돈이 없어서 돈에 대해서 활성화되지 못했다가, 그러나 이제는 돈이 생겨서 그 마음이 돈에 대해서 활성화가 되니, 골프에다가, 겔로퍼에다가, 세컨드에다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농사고 나발이고 없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3장에 있는 것처럼, '인간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저주 아래에 있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죄라고 하는 것은 딱딱한 돌멩이처럼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활성화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불혹의 나이 40세가 되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가? 공자를 한번 데리고 오라는 것이다. 한방에 넘어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40세가 아니라 400세가 되어보라는 것이다. 만약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여자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일단 마음에만 들면, 목사고 마누라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 고난 - 은폐성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것 !!
*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말씀을 죽은 문자로 보는데, 그들은 말씀을 한번 지켜보자고 하는데, 그런 세계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은폐성으로 말미암아 애매한 오해와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고난'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를 예수님은 모르셨는가? 알았다는 것이다. 공생애를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3가지 유혹을 받았는데, 이 3가지 유혹은 한결같이 '기존 세력의 질서화' 라는 것이다. 단절이 아니고 말이다. 즉, 마귀가 하는 말이, '예수여, 우리는 이미 질서가 잡혔기에, 당신은 우리의 질서에 걸 맞는 행동을 해주시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메시야로도 인정해주겠다는 것이다. - (tape 2 끝)
◈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①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② 선물이기에 그 내용물을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것이고,
③ 그래서 주님께서 그것을 채우시는데,
④ 그 채우는 특징이 '고난' 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지금 베드로전서에서는, '주님께서는 어떻게 그 고난의 삶을 사셨는가?'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틀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그러니 여기서, 사람의 일이란 하나님의 일과는 반대라는 것인데, 그런데도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의 세계는 따로 있으니,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목숨을 버리라는 것이다.
*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난이라는 것을, 교회에 간다고 욕을 듣고 얻어맞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기필코 자기 백성은 죽게 하고야 말리라' 라는 것이다. 즉,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없기에 말이다.
*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겠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서신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서 제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인정하지를 않겠다는 것이다. 이미 죽은 자이기에 말이다. 만약에 제대로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이다.
*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까지 하신 말씀인데, 그러나 이제 십자가를 지고 나서 성령이 임하면 성도는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냥 설명하면 잘 모르기 때문에, 지금 마태복음 16장을 먼저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 NO, NO, NO !!
*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께로 올 수가 없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아무도 자기 힘으로는 예수님에게로 나아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베드로 수준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인간들의 대표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마귀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우리의 왕을 이길 수가 있는가? 만약에 우리 힘으로도 이길 수가 있다면 이미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는데, 그 문에 마귀가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 마귀를 제치고 문을 열어줄 수가 있는가? 문을 두드리는 자의 힘으로서 그 권세를 쳐부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가 베드로에게 그런 사실을 알게 했는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아버지가 아니고 말이다. 즉,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기 세계를 살며시 기존 세상의 질서에다가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과 예수님 사이의 경계선으로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음부의 권세가 이 세상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기에 말이다. 즉, 음부의 권세를 이길 인간이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난 뒤에 제자들은 무슨 짓을 했는가? '야,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자' 라고 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헤어지자'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사실 인간의 목숨이란 잃어버리려고 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잃어버리는 것이기에, 그러한 개떡같은(?) 목숨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그런 가치 있는 목숨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산상설교뿐만 아니라, 사실은 공관복음 전체가 인간이 전혀 이룰 수 없는 것들로 가득히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부모와 처와 자식과 형제와 자매를 버리지 않고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도, 역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인간은 안 돼 !!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 이렇게 없는 것이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선물로 그대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도 '아이쿠 집사님, 어떻게 그렇게 전도를 잘하시고, 온유하시고, 겸손하십니까?' 라고 해도,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뭐라고 해야 하는가? '저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겸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는 죽고 오직 성령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 이런 것이 공관복음에서 정립이 되지 않으면, 바울서신에 들어오면 오히려 마귀의 사고방식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찬양을 받으시고,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겠습니다' 라고 나오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고방식이었다는 것이다.
* 제자훈련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두고 인간의 행위로 무엇을 하려는 짓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냥 말씀이 좋아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바로 제자훈련이 아닌가? 놀면 된다는 것이다.
* 주일학교 교사가 와서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올해는 좀 쉬고 싶습니다' 라고 해서, 뭐라고 대답을 했는고 하니, '언제 일한 적이 있었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남들은 집에서 TV를 보고 놀 때에, 그 사람은 조금 일찍 교회에 나와서 아이들하고 놀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논다는 것이 나쁜 의미가 아니고, 우리의 삶은 선물이기에 놀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교회에 봉사를 해도, 이것을 일이라고 생각하지를 말고,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자는 것이다. 찬양대를 하면서 놀고, 교사를 하면서 놀고, 설교를 하면서도 논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서신에서 사도바울이 명령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중풍병자가 다 나아서 걸어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중풍병자가 되려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중풍병에 걸렸다가 다 나아서 걷는 것이나, 중풍병에 걸리지 않고 걷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다같이 주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암에 걸렸다가 낫는 것만이 선물이 아니라, 암에 걸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는 것이다. - 10분 휴식 !
*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죽이시는데, 우리가 죽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데, 그러면 우리는 '아니 하나님, 우리가 죽고 나면 천국이고 뭐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여기서 죽인다는 의미는, 십자가에 함께 죽는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죽는 것과 늙어서 죽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늙어서 죽는다는 것은 흙으로 분해되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 십자가에서 죽는 죽음이라는 것은, 율법에서 죽은 자이고,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고,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이고, 마귀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 이란 의미에 대해서 조직 신학자들이 상당히 당황해하는데, 그것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살았던 삶에 대해서 모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 우리가 이런 강의를 듣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라는 질문이 자꾸만 반복이 되는데, 그러나 이렇게 '나는요, 나는요, 나는요' 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과 12명의 제자들의 관계를 염두에 두자는 것이다.
◈ 예수님과 12제자의 관계는 '선택' 관계이다 !!
* 그렇다면, 예수님과 12제자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였는가? 제자라는 특수한 변별성이 있는데, '선택' 이라는 관계라는 것이다. 12제자는 자기들이 되고싶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했을 때, '못 갑니다' 라는 말이 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그러니 이러한 선택관계라는 것은, 사실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구약 때 여호와께서 하신 일은 이제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걱정일랑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엉덩이를 까 발기고 있으면 간호사가 다 알아서 주사를 놓아준다는 것이다.
* 12제자들이 권능과 기적을 행했는데, 이것은 제자들 자신들의 권능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권능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3장에서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고치는가? 정말로 자기들이 고쳤는가?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기를, 이것은 자기들의 권능과 경건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겸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지금 부활하셔서 하늘에 계시는데,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는 그분이 하늘에 계시나 옆에 계시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기 이전에는 달랐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서태지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서태지가 한국에 있으나 미국에 있으나 같다는 것이다.
* 그러니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택하신 하나님의 손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12제자를 누가 뽑았는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뽑았다는 것이다. 바보병신들을 뽑아서 제자로 삼았더니만, 이제는 그들이 신학교에 가서 '주님, 이제는 제가 알아서 주님의 충성된 종이 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권능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선택이란, 성부와 성자의 계약에 의해서 권능이라는 차원에서 주어졌다 !!
*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계약에 의해서 그 결과로 말미암아 공짜로 제자들에게 권능이라는 차원에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제자들을 구원한다는 차원이 아니고, 다만, 일을 시킨다는 종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권능을 받고도 타락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사용한다는 것과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룟유다가 잘린다는 것이다. 그는 마귀새끼라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사용한다는 것과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 !!
* 다시 말해서, 계약이라는 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체계이니까 우리들이 끼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12제자들도 자기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성부와 성자의 계약에 의해서 가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만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15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이 세상이 우리들을 미워해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기에 그분이 택한 자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 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그리고 마태복음 11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처음 베풀어진 것이 일방적인 선택인데, 선택된 자에게 성부와 성자의 계약의 결과를 담아서 주시는데, 그래서 그들은 성부와 성자를 증거하는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 출애굽기 13장에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 되고 난 뒤에 옆집 아이는 죽었지만, 자기 아이는 문설주에 피를 발라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서 손을 떼라는 것이다. 원래 아이는 유월절 밤에 같이 죽고 이제 그 아이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출 1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 지금 죽음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모든 맏이는 이제는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장자로서 이제 새롭게 우리들의 가정에 파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장자' 라는 의미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유월절의 증인으로 다시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한국 아이가 미국에 입양을 가서 이제 청년이 되어서 미 육군에 지원을 해서 미8군에 파견근무를 나왔다면, 그 사람은 대한민국의 사람이 아니라 분명한 미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육군에서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성도라는 것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면 이미 자신은 죽었고 하늘나라의 사람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율법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 말씀처럼 말이다.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 죄도 이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라는 것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6장 8절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께서 오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을 책망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 바로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 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그리고 성도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IMF와 믿는 자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먼저 그 나라 의(義)를 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의 신랑은 예수님이기에 마귀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성도는 이렇게 죽은 자인데, 여기서 '목사님, 저는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글쎄요?' 라는 것이다. 다만, '성경이 이렇습니다. 믿습니까?' 라고 했을 때, '믿습니다' 라고 하면, 성도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꾸 그런 것을 확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그런 자들을 두고서 '신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것 때문에, 경북 의성에 있는 교회에 다니는 아가씨인지 몰라도, 얼마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말이다. '목사님, 저는 선택되었습니까?' 라고 해서,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했더니만, 놓아주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관심을 '너와 나'가 아니라, 눈을 하늘로 향해서,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라는 것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겼다고 해서 자기의 경험과 느낌을 믿는 것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믿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사람에게는 자기의 느낌을 간직함으로 말미암아서 안정된 틀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부인이 안 된 마치 가룟유다와 같다는 것이다.
* 12제자가 권능을 행하니까 하늘에서 마귀들?주루룩 떨어졌는데, 그런데 이것을 제자들이 자랑하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마귀가 떨어진 것을 기뻐하지 말고,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는 것이다. 즉, 그런 권능을 행하는 것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룟유다도 그런 권능을 행했다는 것이다.
* 제가 이렇게 10년을 넘게 강의를 하는데, 과거 같이 성경공부를 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당신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사이면서 왜 목사를 치느냐?' 라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을 했는고 하니까, '목사가 기준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목사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죄도 모르고, 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는데, 이렇게 말씀도 무슨 목사라는 것인가? 목사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사도들은 어떠했는가?'
* 그래서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나는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하기에 앞서서, '사도들은 어떠했는가?' 라는 것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을 받았으니 말이다.
* 학문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해서 시작되는데, 이것이 칸트철학인데, 이 칸트철학의 대표적인 원리가 [ ①인간이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인식론), ②인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론) ③인간이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 (실천론) ] 라는 것인데, 그러니 사실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라, 칸트의 철학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놀랍게도 성경은 결코 인간을 단독으로 보지를 않는데, 여기서 요한복음 13장을 살펴보자.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이다. 12제자들이 세상과 율법에 대해 죽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끝까지 사랑'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서 율법을 깨트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율법을 깬다고 하면서, 술도 마시고 거짓말도 얼마든지 해도,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성도는 단독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이다 !!
* 자기 혼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단독자가 아니라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말이다. 자기 혼자서 십일조에서 해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돈도 아까운데 십일조가 율법이라고 하니 얼마나 잘되었는가? 사실 이근호가 인기가 있는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 이다 !!
* 그래서 말씀을 보면서, '단독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것까지 내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 사랑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서 12제자들을 만나보아도 그들은 별 것 없다는 것이다. 면류관도 모두 다 주님의 발 앞에다 던지고서 빈 털털이로(?) 놀고 있다는 것이다.
◈ 십자가 사건은 '단절사건' 이다 !!
* 그렇다면, 공관복음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 이란 무엇인가? 제자들은 중도에 단절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단절의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 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혼자서 지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사도바울은 같이 졌다고 하는데,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 혼자 지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절' 이라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제자들마저도 이렇게 죽지 않고서 천당에 가는 법이 없는데, 하물며 우리들은 오죽하겠는가? 사도바울이 말하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라는 것이, 이러한 사실이 실제이고 현실이냐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단절이라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제외하고 전부가 '단절' 이고, '은폐성'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누가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어졌습니까?'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진작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 그래서 단절된 상태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을 보면, 오직 아버지께서 보낸 자만이 건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된 명단을 보고 그들만을 찾아가서 건진다는 것이다. 12제자처럼 말이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 여기서 베드로전서 1장 2절을 한번 보자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 사도 베드로가 누구에게 편지하는가?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들, 즉, 옛날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단절시켜놓고, 이 단절에 가룟유다가 빠졌는데, 그런데 문제는 십자가인데, 처음의 십자가는 누가 졌는가?
* 분명히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런데 이 십자가가 왜 다수가 진 십자가가 되었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이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시 우리들도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는 죽었다는 것을 가지고, 머리채를 뜯기고 얻어맞고 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두드려 맞는 것은 일종의 쾌감이고 영웅심리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놀라운 경험으로 말미암아 상대방보다도 자기가 낫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는 것도 고난이라는 것이다. 남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살았으니 비참한 것이 아닌가?
* 그렇다면 다시, 왜 예수님 단독의 십자가가 여러 다수의 십자가가 되는가?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몇 명인가?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여러 명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면, 이삭을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이삭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 구속사를 공부를 하다보면, 헷깔리는 것이 시간이 뒤에서 막 거꾸로 흘러온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는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는 것은' 라고 했는데, 아니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은폐성' 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도 피하고 야곱도 피하는데, 아브라함 자손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결정적인 근거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인간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손이 제 1단계는 예수님에게서 종결되고, 오직 예수님에게 속해 있을 때에만 제 2단계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 자손들이 될 사람들 사이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다시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들이 스스로 만든 믿음이라는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기에 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을 갈라디아서 2장 27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세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오직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 이것을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할지 몰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강조하는 것은, '성령께서 왜 오셔야만 하는가?' 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말씀을 듣고 믿으면 되는데 말이다. 성령은 바로 단절시키기 위해서 오셨는데, 인간에게는 나오는 모든 행함을 단절시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육(肉)이니까 말이다.
◈ 성령의 오심도 단절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
* 그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을 정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은 부르짖는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보내시는 분의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성령은 콜택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모세는, 그리고 다윗 등은 왜 그런 고생을 했습니까?'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갈라디아서 4장 29절을 보니,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앞당겨서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은 이미 오신 메시야를 뒷당겨서(?) 증거하고 말이다.
(갈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 이렇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모셀?다윗같이, 그리고 사도들같이 약속을 따라서, 성령을 따라서 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장차 태어날 메시야가 그런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그리고 늦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홀로서 지신 십자가가 여러 다수의 십자가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셔서 다수의 십자가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는 완전한 단절이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으면 그것은 오직 전적으로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이다.
*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유대교'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만을 이야기하면 화를 내고 열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기들도 그렇게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 정말 예수님만을 믿는다면 왜 화를 내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 다른 엉큼한 내막이 있다는 것이다.
* 분명한 것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모두가 다 가짜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 속에서는 언약이 안 나오고 십자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11제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것을 '새로 다시' 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그런 결과적인 모임을, 그것이 바로 '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베드로전서 1장을 18절 이하를 한번 보자.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 1: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 이런 것은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은폐되어있는 것인데,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고, 그리고 이러한 비밀을 깨달은 자들은 믿음의 주체를 자기로 생각하지 않고 믿음의 주체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망' 이라는 것이다.
* 이제 베드로전서 2장을 한번 보자.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집이란, 반드시 버림을 받은 돌에 합류를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고, 교회라는 것이다. 모퉁이 돌의 운명과 나머지 돌들이 다 같은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 건물이라는 것이다.
* 그리고 21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은폐성' 이고, '비밀' 이라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는 말이다.
* 이러한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부르는 찬송가가 '나그네 설움' 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희한하게도 해석이 다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떠난다고 마음을 먹으면 해석이 되고, 죽치고 눌러서 앉으려면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이해가 다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으면 캄캄해진다는 것이다.
* 이제 마누라도 떠나고 자식도 다 떠나고 먹을 것도 없다면, 그럴 때는 성경이 다 풀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물론 여러분들은 결혼을 안 해서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베드로전서 1장 24절을 한번 보자.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이 얼마나 말씀이 쉬운가? 술술 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해석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 이라는 것을, '비누방울 안' 이라고 보면, 그 속에 주님이 계시고 우리도 있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면 어떻게 말씀이 이해가 안 되겠는가?
* 이것이 바로 예수途꼈?평소에 12제자들과 다니면서 요구하셨던 것인데, 그런데 12제자들이 바보들이 되어서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도행전에 들어오면, 이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오셔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기도를 하셨는가? 분명히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요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 이렇게 말하면, '아니 목사님, 왜 꼭 그런 이상한 구절만 끄집어냅니까? 부드럽고 좋은 말씀도 얼마든지 있는데 말입니다. 온유하라, 기도하라 등 말입니다' 라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나 기도의 경우에도 예수님께서 그냥 기도하라고 하신 적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항상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다 아시니까 말이다. 그래서 가르쳐주신 것이 주기도문이 아닌가? -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한번 살펴 보라. 거기에 무슨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발버둥을 치면서 기도를 하는가? 거기에 나오는 일용한 양식이 무엇인가? 먹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과거 광야생활을 할 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누가 악에서 벗어나게 해주는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 10분 휴식 !
* 베드로전서 2장을 계속해서 한번 보자.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여기 '택하신 족속' 이라고 말할 때, '야, 나는 선택되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택하셨다' 라는 것이다. 즉, 주님께 그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된 것도 주님의 덕을 선전(증거)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과거 얼마나 주님 앞에서 촐랑거렸는가? 그러나 이제는 주님만 증거한다는 것이다.
* 이제 베드로전서 3장을 보자.
(벧전 3: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벧전 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 이것은 전도라고 하는 것은 말에 있지 않고 삶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 전체가 전도라는 것이다. 구원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여기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은 남편에게 종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하는 그분의 종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볼 때, 여자에게 있어 시집을 간다는 것은 선교사로 그 가정에 파견근무를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하심이라
* 이렇게 할 사람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전체가 다 고난이라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고 겸손하고,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비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면 이런 것이 그리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데 뭐가 힘드느냐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니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 사랑 !!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여기에서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시체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해서 자유롭기에 얼마든지 순종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 이렇게 우리는 이미 자유자이기 때문에, 즉, 비누방울 속에 주님과 함께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과 같이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종과 같이 하라' 했다고 해서 명령법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들의 일관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에베소서인데, '술 취하지 말라' 라고 해서 그것이 명령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엡 2:8) 너희?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사도바울 본인은 분명히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명령법에다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주님을 증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니 목사님, 그거나 이거나 같은 것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한 쪽은 주님을 증거하고, 다른 한 쪽은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목사의 그 말하는 설교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명령법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그렇지만' 라고 하는데, 아니 신학을 하든 무엇을 하든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라는 것은, 명령법적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자유롭기 때문에 얼마든지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벧전 3: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 이런 말씀을 보면서 항상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베드로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말이다. 이미 자유롭기 때문에 흔들리지를 아니하고 자유로운 주님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 '선한 양심을 가지라' 라고 명령법인데, 주님께서 '가지라' 라고 하는데, 거부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죄에서 벗어나게 하셨기에 말이다.
*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라고 했을 때, 이것을 거부할 수가 있는가? '걸어가라' 라는 명령 자체가 그 사람에게 명령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탐내지 말라' 라고 했을 때, 오히려 인간은 더욱 탐심이 일어나듯이, 그러나 성령을 받은 자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 라고 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 '아니 목사님, 성경을 너무 억지로 그렇게 해석하지 마세요' 라고 할지는 몰라도, 그러나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분명히 나오지 않는가? 선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누가 하셨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이기에 말이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를 한지 1년만에 200명이나 모이는 부흥(?)을 했다고 하면, 그때 누군가 와서 '목사님, 어떻게 이렇게 부흥을 하게 되었습니까?' 라고 했을 때, '예,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면, 제대로 대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1년 뒤에 그 옆에 아주 큰 대형교회가 들어서는 바람에 교인들이 모두 가버리고 단 2명만 남았다고 했을 때, 또다시 그 사람이 와서 '목사님,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라고 했을 때, 그 목사는 뭐라고 답변을 해야 되는가? 역시 '예,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잘된 것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고, 못된 것은 내가 했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과가 생겨도 항상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틀려먹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 또 예를 들자면, 어떤 여자가 시집을 가서 남편을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했다면, 아마 주위 사람들이 '집사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라고 하면, '예,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에 남편이 노름하고 술 퍼마시고 완전히 개떡이 되었다면, 역시 주위의 사람들이 '아니, 집사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라고 한다면, 이분은 역시 뭐라고 대답하야 하겠는가? '예,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증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항상 관심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 항상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시듯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항상 듣는 소리가 '이근호, 당신이 예수인가?' 라고 시비를 거는데, 그러나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분명히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고난이란, 항상 말씀가운데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데, 200명이든, 2명이든지 말이다. 이런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은혜라는 것이다. 그런데 것이 왜 핍박과 고생하는 것으로 연결되는고 하니, 불신자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벧전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 이 말씀은 선을 행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것이 선한 것인데,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여기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이 나오는데, 그런데 왜 여기에 이런 말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선을 믿지 말고 주님의 선을 믿으라는 것이다. 즉, 주님의 하신 일을 믿으라는 것이다.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하면, 흔들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실컷 착한 일을 하고서도 얼마든지 욕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럴 때 다시 확인하는 것이 바로, 자기의 선행이 아니라, 주님의 대신 죽음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흔들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은 주님을 증거하는 결과적인 것인데, 이렇게 결과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 어려움이 있지만 말이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구원받은 자가 겨우 몇 명인가? 8명이라는 것이다. 조금 전에 개척교회를 예로 든 것과 같은 취지라는 것이다. 8명이 남아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진리로서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약속이 분명히 있다면, 우리들이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믿고 의지할 구석이 있는데 뭐가 슬프고 불안하냐는 것이다. 뭐든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니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것이다. 8명밖에 없더라도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 사람이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니 불안하고 초조하다 !!
* 그러니 지금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들은 이야기를 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기 전에 그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해했는가?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나니까 정반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그 자유로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행을 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결과로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노력이 아니고 말이다.
* 베드로전서에서 선행을 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이 없는데, 다만 '선행을 하라', '거룩하라' 라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표현을 빌리면, '앉은뱅이야, 일어나서 걸어가라' 라는 것이다. 같은 차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기도 싫고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하시는 것은 우리도 못 말린다는 것이다.
* 에베소서 4장에서, '분을 품어도 해지도록 품지 말라' 라고 했는데, 우리는 분을 종일 품고 싶지? 그러나 성령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께서 하셨다고 한다는 것이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이것을 이렇게 말로 표현하면 상당히 복잡하게도 들리지만, 그러나 간단하게 말해서, 고난이 와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이기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이제 베드로전서 4장을 보자.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여기 2절의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라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 4: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벧전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 이것이 모두 다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이미 너희들은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잘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공급하신 힘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성탄절 준비를 한다고 교사들에게 10시까지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보통은 아무도 안 나오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평소에 성질이 급하고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온다는 것이다.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성격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나와서 준비를 좀 해놓으면 뒤에 느긋하게 나온 교사들이 '미안합니다' 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것도 역시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미리 나온 교사가 준비를 먼저해서 서로 같이 일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먼저 나와서 일을 좀 많이 했다고 해서 열 받지 말고 말이다.
* 이런 것이 바로 형제를 서로 용납하는 것이고, 이렇게 하면 옆에 지켜보던 사람이 '성격도 좋지만 믿음도 참 좋네요' 라고 하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 알콜에 중독이 되어서 할 수 없이 술을 마시면서도 '아, 술이 없는 나라에 가고싶다' 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직이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그런 마음가짐으로 보면 다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서로 덮어주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봉사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직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임이 주님을 믿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이런 말씀을 보면서 항상 베드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런 일들을 얼마나 많이 당했는가?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라고 했는데, 여기 '너희' 라는 것 대신에 우리 자신들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 꼭 우리가 IMF와 같은 것을 당해야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IMF를 당해서 그런 것을 깨닫는 것 만해도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양말이 떨어져도 엄마의 사랑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고통과 환난 자체를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제 정신이 아니고, 그런 가운데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하라는 것이다.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 이러한 말씀들이 모두가 다 말씀의 성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구약시대에서 이미 이런 일들이 다 있었다는 것이다. (tape 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