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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목회연구소] 2008. 9.1에서 펌.
2. 글쓴이: 구미정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
성숙한 교회문화 형성을 위한 여성의 역할
1. 들어가는 말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헤스론은 람을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허무하다 그치?)
어릴 적, 끝없이, 계속되는 동사의 수를 세다 잠든 적이 있다 - 최영미, “어떤 족보”
기독교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족보 이야기에 시인은 의문부호를 붙인다. 시인의 눈에 기독교의 족보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성생식에 의존하며 이를 당연시하고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 끝없이, 계속해서. 어머니는 없다. 설령 있더라도 철저히 아들과의 관계에서 재정의된 어머니이지, 딸과의 관계에서, 혹은 독자적으로 고유하게 존재하는 그런 어머니는 아니다. 요컨대 어머니(mother)는 단순한 질료(matter)일 뿐, 결코 형상(form)일 수가 없다. 로즈마리 류터가 가부장적 종교로서 기독교는 ‘어머니의 정복-어머니의 부정-어머니의 승화’라는 세 단계 투쟁을 통해 마침내 여성 억압의 과업을 달성했다고 고발했을 때, 그의 분석이 터한 통찰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생물학적 의미에서 ‘낳다’는 동사는 분명 여성의 몫일진대, 그것이 가부장적 종교의 맥락에서는 철저히 남성의 것으로 전용되니, “교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은 이를테면 KKK단에서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흑인에 비길 만하다.”는 메리 데일리의 독설이야말로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겠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1995년을 ‘희년의 해’로 선포하고 벌인 다양한 행사 중에 한국교회 여남평등 의식을 알아보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교회여성들이 ‘95 희년통일교회협의회’라는 조직을 꾸려, 그 협의회 산하에 ‘여남평등교회공동체위원회’를 두고 펼친 일이다. 당시 연구는 예장(합동/통합), 기감, 기장, 기성,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 루터교회 등 9개 교단에 속한 877명의 교회여성들을 대상으로 52개의 문항에 걸쳐 교회 내에서의 역할과 위치, 신학적 이해 등을 알아보는 것이었던 바, 꽤나 포괄적이고 방대한 작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말하자면 그 연구는 이번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이하 한교여연) 주도로 이루어진 ‘교회문화에 관한 교회여성 의식 실태조사’의 선행연구에 해당한다 하겠다. 한교여연의 설문조사는 예장(합동/통합), 기감, 기장, 성공회, 복음교회 등 6개 교단에 속한 800명의 교회여성들을 대상으로 40개의 문항에 걸쳐 이루어졌다. 연령별로 50대 응답자가 가장 많고(44.6%), 60대 이상(30.8%), 40대(17.5%), 30대(5.4%), 30대 미만(1.8%) 순으로 나타나 있어, 다양한 연령층의 목소리를 담고 있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 그러나 거꾸로 이 현상은 소위 ‘교회여성’의 정체를 규명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작금의 한국교회에서 이른바 ‘교회여성’으로 지칭되는 부류는 대충 출석기간 20년 이상(81.1%)의 50대 이상 권사(59.1%)와 집사(21.8%)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전 연령층의 교회여성들의 다양한 관점과 입장을 대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가사와 육아 및 직업 생활에 매진해야 하는 하위 연령층 여성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과 안정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회 일에 헌신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표성을 띄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교여연의 설문조사는, 1995년도 여남평등교회공동체위원회의 설문조사에 들어있던 ‘신학적 의식(하나님 이해, 예수 이해, 성서 이해 등)’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내용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아, 13년이라는 시간적 변수를 대입시켜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는 좋은 준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바로 이 대목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교회여성들이 처한 상황과 현실은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이니, 이 지체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주최 측에서 보내준 분석자료 파일을 훑어본 필자의 첫 생각은 ‘대략 난감’이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과연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할 힘과 용기가 남아 있기나 한 것일까? 우울한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는 필자의 무력감을 용서하시라.
2. 교회여성, 요구와 욕구 사이
세계 종교는 가부장제를 표방한다. 종교는 남자의 특권을 굳히고 남자를 결속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래서 신은 모두 남성인가 보다. - 메릴린 프렌치 설문지의 첫 단락은 교회여성들이 교회 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과 연관된다. 공동의회나 제직회 시 발언 여부를 묻는 질문에 53.7%가 발언한다고 답했고, 44.0%가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연령이 높을수록, 또 직분이 높을수록 발언비율도 높다는 것은 한국교회에 체질화된 가부장적 유교문화가 여성들에게 내면화된 양상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분석은, 발언하지 않는 이유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발언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59.1%)과 ‘여자는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한국의 정서와 문화 때문’(13.6%)이라는 답변이 두드러지게 많다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러나 교회의 중요한 일을 계획하거나 결정함에 있어서 여성도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응답이 무려 80.4%에 달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변화라 할 것이다. 요컨대 교회여성들은 전통적인 유교적 가부장제에 길들여져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무조건 순종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절망하는 한편, 수적인 면에서 월등히 소수인 남성들이 모든 결정권을 독점하는 현실에는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 정치적으로 올바른(gender- politically right) 교회의 일차적 과제는 여성에게 ‘말’을 찾아주는 것일 터인데, 그 과제를 수행할 주체는 누구이며, 누구여야 할까? 과거에 비해 교회여성들의 의식이 진일보한 것은 바깥세상의 변화에 영향 받은 덕택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 10여년 사이 우리 사회는 여성부의 활약으로 생활세계의 많은 면에서 양성평등문화의 확대를 맛보았다. 아무리 교회가 반근대적 가치로 무장한 폐쇄적인 담론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다 해도, 교회 역시 사회의 하부 조직인 한 사회 전체의 변동이라는 파장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남녀차별이나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논의구조를 통해 함께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응답이 과반수이상(50.8%)을 차지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목회자의 제왕적 리더십이 통하고 밀실정치가 판을 치던 과거 같으면 ‘소란 없이 은혜롭게 처리해야 한다’(32.1%)는 응답이 대다수를 차지했을 것이다. 물론 3분의 1이라는 숫자가 결코 적은 수는 아니며,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식으로 여전히 교회를 탈사회적 공간처럼 간주하는 순진한 응답이 14.3%나 되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반수이상의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런 사건들에 대해 합리적으로 해결하기를 소망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교회여성들의 의식 변화는 성서적 인간관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남녀를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의견에 81.0%가 동의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듯이 교회 안에서도 절대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84.3%가 동의했다. 교회에서 여자는 침묵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78.1%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으며, 교회의 열두 제자가 남자이듯이 교회 지도자들 역시 남자인 것이 당연하다는 의견에는 77.9%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그간 이 땅에서 치열하게 벌여온 여성신학 운동의 값진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창조설화로 들어가서,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성경구절이 여성의 종속성을 뒷받침한다는 의견에 58.1%만이 ‘그렇지 않다’고 답한 점(‘그렇다’는 17.8%), 그리고 성서 안에 있는 남녀차별적 구절들은 여성의 시각에서 새롭게 연구되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55.3%만이 ‘그렇다’고 답한 점(‘그렇지 않다’는 12.6%)은 아직도 여성신학 진영과 교회가 서로 활발히 접속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응답자들은 교회 내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교육을 통한 여신도들의 의식화’(33.5%), ‘목회자의 의식변화’(26.7%), ‘교회나 교계의 제도 개선’(18.8%), ‘사회문화 전반적인 성차별 문화의 개선’(16.3%) 등이 필요하다고 꼽았다.
여전히 목회자에게 의존하는 모습이야 한국교회 신도들의 고질적인 신앙 양태라 치더라도(교회여성들은 한국교회가 목회자 개인의 리더십에 의존하여 운영되는 비민주적인 모습에 대해 ‘기독교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입장(45.9%)과 ‘당연한 것’이라는 입장(33.1%)으로 크게 양분되었다.), 이 응답 결과는, 변화란 밖에서 안으로,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면 안 된다는 확연한 민주의식이 교회여성들 사이에 어느덧 무성히 자라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하게 한다. 교회여성들의 지위향상은 시혜적으로 주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고, 여성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선취해야 마땅한 노릇이다. 그렇다면 의식화 교육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교회여성들은 출석 교회 밖에서 진행되는 여성교육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22.9%)하겠다든지 ‘기회를 봐서 참여’(58.6%)하겠다고 응답하는 등, 열의를 표명한다.
그런데 막상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여성신학 담론이 교회여성들에게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 소개되고 전달되어야 한단 말인가? 서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떨어져 있는 두 주체를 매개하고 연결할 중간자는 누가 되어야 할까? 필자는 바로 이 연결고리를 찾는 것에 여성신학 진영과 교회여성 양자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현장 없는 신학은 공허하고, 신학 없는 현장은 맹목적이다. 여성신학과 교회여성이 서로 만나는 현장이 엘리자벳 피오렌자가 꿈꾼 ‘여성교회’(women ekklesia)가 될 터이다. 이러한 제3의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창출할 것인가를 부지런히 고민하지 않으면, 여성신학도, 교회여성도 각자 서로에게서 힘을 받지 못한 채 머지않아 고사하고 말 것이다.
3. 교회여성, 절망과 희망 사이
종교는 여자가 스스로 복종해오도록 유도한다. 종교는 여자를 지도자, 아버지, 애인의 손에 그리고 그녀가 절실하게 찾은 신의 대변인의 손에 넘겨준다. 종교는 그녀의 꿈을 키워주고, 그녀의 텅 빈 시간에 할 일을 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는 세계 질서를 확인시키고, 성이 없는 하늘나라에는 보다 나은 미래가 있다는 식의 희망을 통해서 체념을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여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가 손에 든 끗발 좋은 패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설문조사는 현재 교회여성의 내면 상황이 매우 황폐하고 분열적임을 보여준다. 그들이 교회 내에서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이며,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응답한 아래의 막대표를 눈여겨보자. <표 1> 교회여성이 하고 있는 일 <표 2> 교회여성이 하고 싶은 일-막대그림 생략(강 건너 숲)
복수(3개)응답을 하도록 되어 있던 질문에서 교회여성들은 ‘하고 있는 일’로 ‘성가대’(18.4%), ‘식당봉사’(11.1%), ‘지방/전국연합회 활동’(8.4%) 등을 꼽았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에서는 ‘식당봉사’가 고작 3.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있어, 가장 괴리가 큰 부분임을 드러냈다. 교사활동에서도 교회여성이 하고 싶은 일은 유치부/유년부 교사와 중/고등부 교사가 동일한 비율인데, 지금 맡고 있는 일에서는 유치부/유년부가 중/고등부의 두 배 이상이다. 대학/청년부로 올라갈수록 ‘하고 있는 일’에서나 ‘하고 싶은 일’에서 여성의 비율이 똑같이 저조한 것은, 사회의 교육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육에서는 여성 교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대학 교육에서는 남성 교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성별분업 및 위계 현실이 교회 교육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예배인도와 기도’가 6.5%를 차지하지만, 하고 싶은 일에서는 3.6%밖에 되지 않는 점은 여성에게 ‘교회 일’이 매우 제한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의혹을 갖게 한다. 교회여성들은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여성의 일이라고 치부되어온 활동들, 이를테면 부엌일과 청소, 접대(안내) 같은 일들을 교회에서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그렇다고 하여 예배인도나 기도, 설교 등 소위 교회 내 남성 지도자들이 도맡아 했던 영역에 참여할 만큼 준비되어 있지도 않다. 성경공부에 대한 욕구는 높으나, 그것을 공적인 교회 일과 사회활동 혹은 지구적 차원의 실천을 위한 동력으로 견인해내기에는 역부족이고, 오로지 개인적인 자기만족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하는 일로 인식되어온 식당봉사나 안내 같은 일에 ‘남녀가 구분 없이 참여해야 한다’는 비율이 64.9%에 육박하지만, ‘여성이 잘하므로 어쩔 수 없다’거나 ‘당연히 여성의 일이다’라는 인식도 30.4%로 만만치 않다.
특히 응답 여성의 연령이 낮을수록 전자를, 연령이 높을수록 후자를 지지하니, 한국교회는 목하 성별분업 논리를 둘러싸고 세대 간 전쟁에 돌입했다고 진단할 수 있겠다. 향후 한국교회가 양성평등의식이 몸에 밴 젊은 세대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므로, 목회적 차원에서 창조적인 대안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하리라 본다. 그밖에도 교회여성이 하고 싶은 일에서 ‘사회봉사활동’(13.5%)과 ‘상담’(7.7%)이 두드러지게 많은 표를 얻은 것은 여성이 교회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자아의 욕구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봉사활동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개념정의가 나와 있지 않을뿐더러, ‘장애인 사역’과 ‘노인교육/보살핌’ 항목이 따로 제시되어 있어 혼동을 야기한다.
‘상담’에 대한 관심은 최근 신학대학과 교회의 특징적인 현상인 바, 그만큼 우리 사회의 구성원 각자가 내면의 치유와 돌봄이 필요한 집단 우울증에 걸려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말이 나왔으니, 교회 내 역할, 곧 직분과 관련하여 좀 더 세부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응답자들은 대체로(86.1%) 우리나라 주요 교단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목사안수를 받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인다’(41.1%)와 ‘적극적으로 찬성한다’(40.5%)는 입장이 우세하여, 이 문제에 관한 한 여성차별 의식은 많이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담임목사로 여성목사를 청빙하는 문제에 있어서 ‘능력이 뛰어나다면 찬성’(61.4%)과 ‘찬성’(27.0%)이 압도적으로 많아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는데, 사실상 부목사의 경우에는 ‘찬성’이 45.3%이고, ‘능력이 뛰어나다면 찬성’이 48.4%인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한국교회 교회여성들은 여성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부분에서 그다지 흔쾌하지 않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여성이 목사안수를 받고 보조사역자로 일하는 것은 언제든지 환영하지만, 담임목사직을 맡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기에 ‘능력이 뛰어나다면’이라는 단서조항 뒤에 숨어 불편한 속내를 감추는 것이다. 여성사역자의 활동이 주로 심방과 상담에 치중되어 있는 점에 있어서는 ‘설교나 교육 등 남녀의 영역구분 없이 더 잘하는 것을 맡아야 한다’(59.1%)는 진취적인 응답이 과반수이상을 차지하는 한편, ‘여성의 성향에 맞는 활동이므로 무리가 없다’(32.6%)는 응답도 그리 적은 비율이 아니어서, ‘여성사역자의 활동’에 대한 고정관념이 속히 깨질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여성평신도들에게 할당된 ‘교회 일’에서 성별분업 논리가 사라지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부분에 여성이 더 많이 참여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될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교회라고 하는 공적 활동의 장에서조차 여성의 일을 양육과 돌봄 등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노동’에 한정짓는 것은 여성평신도들에게 열등감을 부추기고, 여성평신도와 여성사역자 사이에 불신과 반목을 낳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여성장로의 역할과 지위는 대체로 긍정적인 것 같다. 조사 결과에 나타난 여성장로들의 신앙관과 여성의식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교회여성들이 장로를 선출할 때는 ‘신앙과 삶에서의 모범’(50.7%), ‘지도력’(38.8%),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5.3%), ‘목사와의 관계’(3.3%) 순으로 고려한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해당교회에서 장로가 선출된 기준은 ‘신앙과 삶에서의 모범’(31.8%),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26.8%), ‘지도력’(15.6%), ‘인맥’(8.6%), ‘목사와의 관계’(8.5%) 순으로 나타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신앙과 삶에서의 모범’이라는 표현은 매우 주관적이며 모호하다. 차라리 그 근사한 표현을 배제하고 나머지 기준부터 따져보는 것이 훨씬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요컨대 한국교회에서 현실적으로 장로가 선출되는 기준은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우선이라는 말이다. 이래야 왜 그토록 여성 장로가 뽑히기 어려운지에 대한 의문이 좀 풀린다. 교회여성들은 또한 남녀가 함께 장로후보로 나올 경우 ‘성별에 관계없이 자질을 보고 뽑겠다’(70.4%)는 응답이 우세했다. ‘같은 조건이면 여성’을 선택한다는 의견은 16.3%, ‘무조건 여성’은 3.6%였다. 성별에 관계없이 자질을 보고 뽑는다는 태도는 매우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선출기준 같지만, 사실상 현실정치의 맥락에서는 여성의식이 결여된 허위의식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여성장로 후보를 선택하는 이유로는 ‘개인의 지도력과 능력을 보고’(58.6%), ‘헌신의 본을 보일 것 같아서’(19.8%), ‘여성들의 의견을 잘 대변할 것 같아서’(10.6%) 순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한국교회에서 여성장로는 지도력과 능력 면에서 여성평신도들의 모범이 되며, 또한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잘 대변하는 리더로 자리매김되어야 하겠다. 이 점은 여성목회자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주문인데, 여성목회자들 역시 지도력과 능력 면에서 좀 더 전문성을 쌓되, 성경공부와 설교, 예배인도와 기도 등에서 여성주의적 안목과 감수성을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4. 출구를 찾아서
저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작은 남자가 말했다.
그리스도가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와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
그리스도는 어디서 왔는데? 신과 한 여자로부터다!
남자야말로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소저너 트루스
표본 추출의 한계와 40대 미만의 젊은 여성들이 교회 일에 매진하기 어려운 사회구조적 제약을 염두에 둘 때, ‘교회여성’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 및 대표성의 문제는 여전히 곤혹스런 부분이다. 교회 이탈자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은 그렇다 치고,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여성들 가운데도 그저 언저리를 배회할 뿐 중심에 끼지 못하는 수가 많은데,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방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게 안타깝다. ‘교회여성’으로 통칭되는 부류는 사실상 교회 안에서 ‘교회 일’에 매진하는 특정 세대에 지나지 않으므로, 앞으로는 좀 더 다양화된 주체들에 대한 세부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여성들은 변화된 시대상황에 고무되어 표면상 양성평등의식을 표출하고 있지만, 그 영향이란 것이 수동적으로 밀어닥친 것일 뿐, 내면에서 적극적으로 추동된 것이 아니어서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이것은 응답자들이 교회 내 남녀차별을 묻는 질문에 ‘없다’(‘거의 없다’ 포함)가 37.0%, ‘있다’(‘심하다’ 포함)가 58.7%라고 답한 데서 쉽게 감지된다. 설문조사의 다른 항목들을 검토해보면, 분명히 여러 차원에서 다양한 남녀차별이 온존하고 있는데도, ‘없다’는 응답이 비교적 높은 비율을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여성목사와 여성장로가 배출될 수 있게 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목주의’(tokenism)는 오히려 실질적인 불평등과 차별을 은폐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동안 바깥세상에서 불어온 민주주의와 양성평등문화의 바람으로, 교회 내부에서도 남성 목회자의 의식이 많이 개선된 게 사실이지만, 이 역시 주의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 교회여성들은 무려 75%의 수가 설교나 교육시간, 기타 교회 내 모임에서 성적 모욕을 유발하는 발언이나 여성비하 발언을 들은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듣는 쪽의 성 감수성(gender-sensitivity)에 크게 좌우되는 것으로, 듣는 쪽의 여성의식이 마비되어 있다면 그렇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요컨대 교회여성들은 교회 내 의사결정 구조와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는 현실에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구조악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서면 찍히고, 찍히면 죽는다’는 피해의식이 내면화되어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지내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존재가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표상되고 있다는 증거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호칭 내지 관계성은 가부장적 질서 유지에 동원되는 것이지, 결코 진정한 여성 본연의 존재방식이 아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로서 교회여성들은 교회 운영에 있어 민주화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회의니 토론이니 그렇게 복잡한 민주적 과정에 관여하기에는 너무 많은 ‘교회 일’로 탈진할 지경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교회여성이 요구와 욕구 사이에서 전일적인 인격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딸’로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다각도로 지원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교회여성 각자가 민주시민의 자질을 갖추도록 양육하고, 건전한 정치적 견해와 사회의식, 그리고 신학적 이해를 지닌 여성 리더로 자라가도록 배려하지 않는 한, 성숙한 양성평등문화가 교회에 정착하기는 요원한 일이다. 거칠게 결론 내리면, 이번 한교여연의 설문조사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여신도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를 명료히 보여준다고 하겠다.(그 역은 이제 그만 강요하자!) 한국교회는 그간의 양적 성장의 바탕에 여신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음에 감사하고, 오늘의 위기상황을 타개할 질적 성숙의 동력으로 여신도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단언컨대, 향후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가부장적 체질을 개선하는 데 에너지를 모으지 않으면, 시민대중의 반감과 외면을 돌이킬 방도가 없겠다.
이것은 물론 단번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지만, 우선 가능하게는 목회자 재교육이나 계속 교육 등 의식화 작업을 통하여, 그리고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 교수진과 커리큘럼의 측면에서 여성신학과 어떻게든 접속하도록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런 한편으로 교회여성들 스스로가 바닥에서부터 체질 개선 작업을 해나가는 게 시급히 필요한데, 이 부분이 쉽지 않아 고민스럽다. 어쩌면 교회 및 교단 내 여성 지도자들이 담당해야 할 몫이 바로 이 점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여성목사와 여성장로 등 여성 지도자들은 교회 안에 고립된 여신도들이 교회 밖에서 활동하는 여성신학자들과 접속하도록 매개하는 조정자(coordinator)가 될 수 있다. 여성 리더들은 기존의 남성 리더십을 답습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아, 창조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교회 대형화와 사회참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교회여성들이 드러내는 의식수준은 여전히 미성숙하다.
우리 사회의 시민대중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안목도 턱없이 낮아 보인다. 결국 열심은 있으나 열매는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인 셈이다. 열매는 생명이 있어야 맺힌다. 생명이 있는 열심이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이 생명은 신학과 신앙의 일치에서 얻어지는 은총일 터이다. 그러므로 여신도들을 ‘행복한 노예’로 만드는 신학 무용론에 현혹되지 말고, 여신도들 스스로 신학자가 되자. 21세기 한국교회의 희망은 단연 ‘삶’과 ‘앎’을 고민하는 참 사람/여성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사족 하나 붙여본다. 필자의 눈에 올해 가장 놀라운 역사적 사건은 ‘촛불’이다. 촛불 바다는 이 땅의 역사를 근대와 탈근대, 웹 1.0과 웹 2.0 시대로 가르는 명확한 분기선이 되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집트 시대와 출애굽 시대를 가르는 홍해에 비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해의 중심에 미리암이 있고, 요게벳이 있고, 히브리 산파들이 있었듯이, 촛불 바다의 중심에도 촛불 소녀가 있고, 하이힐 20대가 있고, 유모차 부대가 있다. 아무리 서슬 퍼런 가부장제가 굳건히 부인하고 가로막아도 21세기가 여성시대의 특징을 띌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역사적 수순인 것이다. 그러니 한국교회여, 어찌할 것인가? 이 도도한 붉은 바다를 함께 건너야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역사적 흐름을 막지 못할 바에야 열 가지 재앙을 부르는 어리석음에 빠져서야 쓰겠는가? 신학교와 교회, 사회는 더 이상 엇박자로 따로 놀면 안 된다. 서로 둥글게 연결되어 얼싸안고 함께 굴러가야 좋은 세상이 열리는 법이다. 벽은 허물고 출구(outlet)를 찾자. 닫힌 구조가 아닌 열린 구조라야 생명력이 있다. 성령께서 우리 안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참고문헌
-강남순, “한국교회와 여성: 한국교회 여성들의 의식과 교회내에서의 위치”, 『페미니즘과 기독교』, 대한기독교서회, 1998.
-구미정, 『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올리브나무, 2004.
-구미정, “강남형 대형교회 여신도들의 신앙양태에 대한 신학윤리적 성찰”, 제2회 여성주의 인문학 연합학술대회 발표논문, 2008.
-구미정, “성인지적 관점에서 본 교회문화의 문제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양성평등위원회 주최 토론회 발표문, 2007.
-구미정, “미디어 2.0 시대, 교회는 소통하고 있는가”, 『문화 매거진 오늘』, 2008. 9월호(예정).
-김승희, 『남자들은 모른다』, 마음산책, 2001. 우어줄라 쇼이 엮음,
-『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 전옥례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3.
꼬리말:
열심히 읽었습니다. 중간에 집어넣은 귀절들이 참 좋네요. 문학적인 품격이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최영미, 시몽느 드 보부와르). 구교수님의 글은 지난 6월이던가 경향신문(참고문헌 위에서 아래로 3번째)에서 처음 접했는데,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역시 날이 서 있고 시원하시네요. 제가 다니는 교회는 작습니다. 그래서인지 집단적 표본으로 봐선 다소 목가적인 편. 허나 제기하신 문제점들은 똑같이 내장되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론 좋은 점수를 줘도 됩니다. 밥 먹고 난후 공동 설거지 등이 별 거부감 없이 남자들 사이에 받아들여진다든지^^.
여성을 2등시민으로 보는 태도는 기독교의 고유체제라기보단 유대교의 가부장주의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 때는 오히려 '여성주의'가 온전하게 살아있었다고 봐도 될 런지. 그런 뜻에서 이른바 영지주의 복음서나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낀 나그함마디 문서들을 보다 널리 알리고 연구할 필요는 없을까요.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도 거대한 사회의 일부. 따라서 일반 지식인들과의 '연대'도 강조해야 할 터. 여성주의와 관련하여 전 요새 쥬디드 버틀러란 학자한테 관심이 쏠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이 글 울 교회 홈페이지로 펌해갈렵니다.-강 건너 숲 08.09.02 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