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를 기다리는 잉카의 여인
유기섭
멕시코에서 페루의 리마 공항에 도착하여 곧장 쿠스코로 향하였다. 페루 제2의 도시 쿠스코는 옛 수도로 과거의 찬란했던 잉카문명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숨이 가쁘게 달려오느라 가빠진 한숨을 돌리며 앞으로의 일정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진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라마를 몰고 가는 케추아족 여인을 만났다. 고개를 넘어 집으로 가는 길이란다. 어깨에는 특유의 바랑을 메고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키가 작고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한때 융성하였던 영광의 역사는 보이지 않고 고단한 삶의 현실이 그들 모자를 짓누르고 있음을 본다.
3백여 년간의 스페인의 오랜 지배 하에서도 그들 고유의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낮은 자세로 참고 지낸 세월을 더듬고 있는 이곳 사람들. 언젠가 돌아올 철새를 기다리며 그가 몰고 올 희망의 싹을 놓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뜬다.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희망을 좇아가는 고단한 일상의 케추아족 여인. 그에게서 찬란했던 영광의 후예로 잉카 여인의 자부심을 연약한 두 어깨에 짊어지고 넘어가는 고개가 더 높게 느껴진다.
숙소 뒤편으로 시선을 돌려 산책길 옆으로 흐르는 우루밤바 강을 맞는다. 안데스산맥의 힘찬 기운을 받은 물빛은 가볍지 않은 자태로 그 흐름은 장엄하다. 잉카제국은 멸망해서 소멸하였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우루밤바 강물은 여전히 그날의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 인간의 삶은 세상을 떠나가지만, 자연의 삶은 세월의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고 멈추지 않는 강인한 모습으로 인간들에게 무한의 교훈을 던진다. 강을 만나며 잉카의 제국으로 나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강물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잉카의 영혼, 잉카의 숨결을 가슴 깊이 담는다.
우루밤바 강을 지나 세계적 유물인 마추픽추를 찾아 웅장한 석조유물을 대하며 그 정교함과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석조기술도 뛰어나지만, 운반 도구 등 기반 시설이 열악한 그 당시 거대한 돌을 높은 곳으로 운반하고 다듬은 인력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들여 다듬었을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쿠스코와 안데스산맥 지역에는 긴 댕기 머리 차림에 괴나리봇짐을 메고 바쁘게 종종걸음을 치는 여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담한 키에 댕기 머리, 괴나리봇짐을 지고 우루밤바 평원의 둔덕을 넘어가는 길로 오르는 모습에서 잉카의 사라진 문명, 잉카 시대를 연상케 하는 사람의 모습과 동물, 산과 변하지 않는 관습들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녀의 모습에서 한동안 잊고 지낸 과거의 고단하였던 우리의 어머니상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왜일까. 우리의 어머니들도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정신이 쓰여 나라가 외세에 짓눌려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눈앞의 자식과 가족들 건사에 온 신경을 쏟으며 살아온 고난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공중도시 마추픽추에서 맞이한 계단식 밭에서 감자 옥수수 코카차 등을 재배하며 도시의 주민들이 살아갈 수 있게 적정량의 경작지를 일군 흔적에서 그들의 시대를 차근차근 준비한 자국을 짐작할 수 있다. 라마의 털로 생필품을 짜고 감자 농사를 지으며 지금은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빨리 가자며 보채는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힘든 고개를 넘는 어머니와 아들의 앞날에 밝은 햇빛이 비치기를 기원해본다.
언젠가 때가 되면 철새의 계절이 오고 행운을 실은 콘도르가 계곡을 비행하며 어린 아들에게도 희망의 꽃소식을 전해줄 것이다. 뛰어난 석조건축 기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주민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존 열대우림지대로 숨어들어 언젠가 그들의 모습을 보이며 옛 잉카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사라질 때의 묘연함을 그대로 유지하며 먼 훗날 예고 없이 나타날 그 날을 상상해본다.
침략자의 핍박을 피하여 산중 깊숙이 숨어들어 수백 년을 살아온 후예가 그들의 조상이 일군 도시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바뀌고 낯선 객지가 된 뒤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겨우 숨죽이며 살았던 지난날의 역사는 그대로 흘러갔지만, 목숨 줄을 놓지 않은 후손들은 낯선 환경에도 적응하기 위하여 애쓰며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잊히고 떠나간 희망의 불씨가 마지막 꺼져가기 전 그들은 그 옛날의 영광이 다시 찾아오기를 소망하며 힘든 고개를 넘는다. 그녀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그 날은 언제쯤 올까.
- 문학서초 2023년 엔솔로지 제12호 게재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