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복음을 모르고서 구원되는 경우란 없습니다. 복음을 알고서 지옥가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복음에 다가가서 구원되지도 못하고, 자기가 원해서 자기 맘대로 지옥가지도 못합니다. 복음이 천국갈자 지옥갈자를 확정해 놓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힘을 행사하는데 그 행사된 힘을 그대로 뱉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 형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는 어린애처럼 복음을 증거합니다.
마태복음 11:25)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기적을 보고도 회개치 않는 세상 형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기적을 행사했어도 회개치 않는 것처럼, 구원이란 인간의 힘과 능과 지혜로는 도저히 될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다만 복음을 알게 되는 어린애 같은 사람들이 이 지상에 등장하게 될터인데 그들의 특징이란 자기지혜가 없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받고 그 받은 것을 고스란히 꺼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도처럼 말입니다.
사도가 받은 복음은 15-17절에 더 자세히 나옵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취지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직 복음으로 구원하는 취지란 내 구원이 아니고 아들을 자랑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아들을 자랑하고 높이는 일에 나를 껍데기로 그릇으로 이용하는 일로 쓰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나를 위한 그런 구원은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에 비밀처럼 담겨있는 이 취지는 구약부터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열심낸 사항입니다. 이사야서 9장 6-7절에 보면 하나님의 열심가지고 성사시키는 일이 바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리에 앉혀서 왕노릇 하게 한다는 약속입니다.
그 처음약속이 창세기 3장 15절에 있는대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쳐서 부수는 사명을 감당하면 달성될 일입니다. 그 약속을 이룬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요 19:30). 십자가사건으로 확정된 그 약속대로 세상은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에 속한 자손들로 쫙 쫙 바닷물 갈리듯이 갈리우는 일만 남은 겁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여기에는 일체 인간의 자기역사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그 현실이 그대로 우리속에 담겨서 우리가 열심내서 우리가 퍼담은 거짓현실이 폭로당하고, 폭파당하는 현실입니다.
인간의 열심은 옛날에 사도가 몸담았던 유대교의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유전이란 할례와 안식일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특징지워집니다.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구원에 합류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그 조건을 구약에 주어진 모든 말씀으로 삼았지만, 최고의 조건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결국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운명이란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에는 유대교의 핵심을 ‘자기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때까지, 조상의 유전 곧 인간들이 이미 만들어놓는 기존의 전통과 질서에 부합하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기존의 전통과 질서란 다 자기의를 고스란히 꺼내서 쌓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쓰레기더미인 셈입니다. 자기의에서 인간의 열심나오고 다시 자기의로 회수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함이 이런 곡선을 그리면서 다 자기에게로 회수되기에 인간은 결코 자기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복음이 내 안에 들어온 현실이란 내안에 쓰레기처럼 들어차는 자기의, 내가 열심내서 뭐가 되었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약속에 의해서 폭파당하는 현실입니다. 내가 열심내서 되었다고 여겨진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살해한 원수짓거리 인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그런 내것은 날라가버리고, 주님의 공로만이 고스란히 남게 하는 작업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실시되는 현장이 된겁니다.
사도의 복음이 사도에게 들어오는 방식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방식입니다. 사람손이 일체 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취지대로 행사하는 것까지도 사람손이 일체 닿지 않습니다. 주님손에 의해서 내 배를 가르고 쑥 집어넣어 주는 식으로 복음이 내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복음을 알아먹을 도리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갈 3장 14절에는 성령의 약속이라고 합니다.
내 속에 복음을 밀어 넣는 손길에 의해서 사도는 속없고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처럼 되어서 이리 저리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그일로” 쏘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것 자랑못해서 환장한 세상, 자기의 꺼내놓지 못해서 허천난 세상입니다. 그래서 생존이 가능하고 돈벌이가 가능합니다. 그 속에서 속절없이 휘돌려 살 수밖에 없는 나입니다.
복음에 의해서 자기의가 매일 매일 날라가는 속없는 인간,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그런 인간. 그래서 누가 뭐래도 거침없이 어린애처럼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참 부럽습니다. 나의 나된 것이 은혜라고 어린애처럼 고백하는 그런 인간. 내가 뭘 해도 나는 죄인에 불과하고, 예수님의 공로외에 자랑할게 뭐냐고 줄기차게 고백하는 인간. 그런 사람은 사람들에 의해서 나지 못하고, 결단과 어떤 열심가지고 되지 않고 오직 십자가공로로만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