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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고분군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어 느낌으로 한번 적어 봅니다.
일단 지난 2003년 경향신문 기사가 잘 정리한 것 같네요. 두 번째 글은 조유전 교수가 쓴 글인데,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각종 견해를 정리해놓았습니다.
[한국사의 미스터리] 장고형 고분 (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25238
[한국사의 미스터리] 장고형 고분 (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26192
[한국사 미스터리]일본식 고분 발굴 관련 韓日 표정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25237
[한국사 미스터리]한반도 ‘장고형 고분’싸고 日학계 고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26191
결국 핵심은 영산강 유역에 전방후원분이 13기 정도 있는데...이게 전형적인 일본 묘제라서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될까봐 한국 학계에서 쉬쉬 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난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함평 신덕 고분의 경우, 167쪽짜리 약식 보고서만 내놓고 15년이 넘도록 정식 보고서를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왜계 유물이 쏟아져 숨긴다는 관측이죠.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12001033330074004
http://www.history21.org/zb41/zboard.php?id=databank&no=233
왜계 유물의 출토지가 충남 지역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어떤 고고학자는 "요즘 (일본계 유물이 나올까봐) 무덤 파기가 겁난다"는 말도 했다고 하더군요.
왜는 고구려, 백제와 같은 부여계죠
그러나 일본인, 즉 고대의 왜가 고구려, 백제와 같은 부여계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반도 남부의 왜 세력 또는 왜의 강력한 영향의 흔적은 별로 꺼릴게 없습니다. 즉 북방출신 부여계들이 남하하면서 고구려, 백제, 왜 등의 나라를 세운 것이죠. 그 가운데 특히 백제와 왜는 정치적 동맹 이상의 형제국이었습니다. 백제와 왜라는 분국설이 나올 정도로... 韓은 아마도 한반도 토착민으로 부여계에게 정복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영산강 유역에 흔적을 남긴 왜 세력은 백제의 단순한 용병이었든 동맹군이었든, 아니면 영산강 유역에 한 100년 정도 주둔하면서 그 지역을 조계지처럼 사용했든..아니면 신촌리 고분에서 금동관까지 나온 것으로 볼 때 독자적인 세력이 있었든 밀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이 얼마나 학술적으로 타당한지 나로서는 검증할 능력이 없으나, 기마민족설을 빌린다면 북방 민족의 여러 갈래 가운데 하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을 수 있는거죠. 북방 민족이 중원으로 남하해서 세운 왕조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멀리는 은나라까지...
아무튼 영산강 유역의 고분군의 규모나 부장품으로 볼 때 결코 단순한 용병이거나 일시적인 문화적 영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홍산문화에도 전방후원분이 있죠
위 사진은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 제 2지점 4호묘입니다. 위에서 본 사진인데 전방후원분입니다.
위 사진을 보면, 무덤으로부터 첫번째 빙 둘러서 돌로 쌓은 석축이 있고, 두번째는 원통형 도기들이 무덤 주변을 죽 에워싸고 있습니다. 중국은 ‘통형기’라고 부릅니다. 일본 고분군에서 보이는 '하니와' 비슷합니다. 묘 주변을 도랑이 빙 둘러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일본 묘제의 두드러진 특징이죠. ‘주구(周溝)’라고 하던데...앞의 조유전 교수 글을 읽어보면 일본 학계에서는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의 시조라고 본답니다. 고구려 적석총 가운데 전방후원분의 형식을 가진 묘들이 많다고 북한 역사학자인 김석형이 주장했답니다.
오른쪽 사진은 바로 우하량 제2지점 4호묘에서 나온 원통형 도기들입니다. 이 도기는 밑바닥이 없습니다. 요게 나중에 변형되어서 마치 인물이나 동물 소조상 같은 하니와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진 왼쪽은 전남 나주 신촌리 고분에서 나온 원통형 도기입니다. 둘 모습은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면이 많고 뭣보다 기능이 똑같습니다.
느닷없이 홍산문화 전방후원분 얘기를 꺼낸 것은 전방후원분이 반드시 일본 고유의 묘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집안이 금나라 황제성이라는 조선시대 지도
몇년 전 우연히 조선시대 고지도를 봤는데 집안을 금나라 황제성, 장수왕릉을 금나라 황제묘로 되어있더군요. 조선시대 사람들, 아니면 최소한 그 지도를 만든 사람은 집안이 고구려 수도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런 모양입니다. 하기는 홀승골이라는 지명만 기록에 나올 뿐 구체적인 위치가 적시되어 있지 않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한데 금나라 수도가 압록강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는 기록도 없는 것 같은데....그런데 왜 집안을 금나라 황성이라고 표기했을까?
이는 아마도 만주땅은 항상 중원 왕조 및 중원을 정복했던 왕조들의 땅이었지 한반도에 사는 조선인 및 그 선조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의 발로였을 겁니다.
영산강 고분군을 둘러싼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도 이와 비슷한 면이 보입니다. 우리는 중국에게 비굴했고, 항상 중국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대신 다른 민족에게는 콧대를 세웠고 바다 건너 일본에게 문물을 전해줬다. 따라서 한반도 안에 중국 세력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지만(그래서 심지어 진나라 장성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주장까지), 일본의 영향력의 흔적이 한반도 안에 절대 나타나서는 안된다는 의식 말입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하는 왜의 정체
광개토대왕비문을 읽어보면 전쟁 내용이 사실상 왜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면 이 왜가 어떤 왜일까? 오늘날 일본에 존재했던 왜일까? 반드시 그들 만일까? 일본 땅안의 왜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 있던 왜 또는 왜의 세력일 수도 있는 겁니다.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설도 있던데...그 정도 무덤을 만들고 100년 정도 살았을 정도라면 단지 용병 수준은 아니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군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했는데...만약 거기에 무덤까지 남길 정도라면 일시적인 전투병으로 간 것은 아니죠. 장기간 대규모로 주둔해야 합니다.
누구던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아마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쓴 김성호씨였던 것 같은데...비류가 자살한 게 아니라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다는 신화같은 얘기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백제 건국 시조로 온조와 구태라는 2개의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비밀이 숨어있을 수도 있죠.
전방후원분에 금석문도 없고 그게 왕릉이나 지배층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죽간이 없다는 말도 하신 분이 계시던데...제가 알기로 삼국시대 왕릉급 무덤 가운데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이 남은 것은 백제 무녕왕릉 밖에 없지 않나요? 경주의 그 거대한 무덤들 가운데 이게 신라 어느 왕의 무덤이라는 기록이 나온 게 있나요? 뭣보다 한반도에서는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죽간이 적게 나왔지요.
영산강 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드는 분도 있는데....과연 그런가요? 희미하게나마 기록이 있는 것 같은데요...설사 그런 희미한 기록을 무시한다고 해도....아무튼 기록이 없다는 논리대로라면 광개토대왕 비석이 세워졌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는 존재합니다.
앞에서 든 조선시대 고지도에 집안을 금나라 황제성으로 기록한 것도 당시 조선시대 학자들 입장에서는 집안이 고구려 수도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고구려는 집안에 존재했습니다.
중국 사천성의 삼성퇴, 동북 지역의 홍산문화, 하가점 문화, 산동성의 대문구, 양자강 하류의 하모도나 송택 문화 등등 놀라운 수준이지만 이들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기록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중원만이 문명이 있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미개 야만인의 땅으로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한사군은 인정하지만, 영산강 고분군은 인정못하겠다?
영산강 고분군에 독자 세력을 상정하면 임나 일본부설의 빌미가 된다? 그 논리대로라면 한사군 인정하면 동북공정 옹호론자입니다.
한사군은 유적이라는 물증이 있다? 그렇다면 영산강의 전방후원분과 많은 일본식 유물도 증거입니다. 이른바 평양 일대의 한나라 형태 무덤군 속에서도 토착적인 요소가 많이 보이는데 그건 무시하면서 영산강의 왜계 무덤에서 보이는 토착적 내지는 백제적 요소를 가지고 왜 세력의 존재를 부정한다? 요건 이중잣대죠.
만약 영산강 유역에 보이는 전방후원분이 혹시 한나라나 南朝의 묘제였다면, 설사 역사 기록에 한나라나 남조였던 동진이나 양 나라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없더라도, 그리고 영산강 유역에 전방후원분이 단 1기만 있었다고 해도 우리 학계는 당연히 “한반도 서북부에는 한사군이 있었고, 한반도 남부에는 안동도호부가 있었다”라고 공식화했을 겁니다.
“단 1기 밖에 없는데 어떻게 중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의 근거가 되냐”고 반발하면 “허허! 이렇게 큰 왕릉급 묘가 있는데...단 1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역사에 민족주의적 감정 그만 개입하세요!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입니다. 역사가 위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세요” 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라고 분명히 써있는 고구려 고분에 대해서는 “요건 중국 망명객의 무덤일 뿐 절대 고구려가 유주까지 지배했다는 증거는 안된다”라고 말할 겁니다. “역사란 위대해야 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시죠? 그렇게 안봤는데 선생 언제 환빠가 되셨나요?”라면서 말이죠. 이 사람들은 한국사는 빈 깡통처럼 확 찌그러져있어야 한다는 환상에 빠진듯 합니다.
한사군은 분명히 중국 침략의 흔적입니다. 임나일본부 역시 실제 존재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논리 자체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명분이 됩니다. 그런데 중국이 혹시 한반도 영유권을 주장할 경우 유력한 근거가 될 한사군은 인정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명분이 되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의 왜 세력 내지는 막강한 영향력은 인정하지 못하겠다? 한사군은 고조선이라는 왕조 자체를 대체해버린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를 차지했었다는 임나일본부보다는 훨씬 더 위력적이죠.
전 세계에서 일본인 무시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한국인이라는데...정작 친일 부역자 박정희가 18년간 집권한 것도 모자라, 박정희의 후예들이 아직도 집권하고 있고, 박정희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는데다, 이제는 일제 식민통치가 한국에게는 축복이었다는 뉴라이트들이 활개치고 있으니 장기하식으로 말하면 “이건 뭐 내가 장판인지 장판이 난지 구분이 안될 정도”입니다.
우리는 중국보다 못했기 때문에, 한반도 안에 중국계 유물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고, 약간의 중국풍만 보이면 무조건 중국의 영향이지만, 우리보다 못한 일본계 유물이 한반도에 나타다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식! 왜? 일본계 유적을 인정하면 우리가 항상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명제에 위배되니까요.
한국인과 일본인은 혈연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깝습니다. 대신 중국인과는 일단 말의 어순부터 달라서 영 멀죠. 그런데 역사적으로 중국한테 당한 것은 감사하고 황송하고, 일본 등 같은 유목 민족들한테 당한 것은 분해서 못참겠다는 이중 의식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 인지 설명하기 난감합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원수가 된 것은 서기 668년 이후의 일이죠
문무왕비에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투항해 100년간 부귀영화를 누려 중국인과 똑같이 된 투후 김일제를 언급해 마치 자신의 선조가 된 양 묘사했고, 대신 대왕암 전설인지 설화인지에서 드러나듯 일본에 대한 극악한 적개감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서기 668년 이후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원래 자신들이 부여계로 북방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소중화니 중국인의 후손이나 마찬가지로 자처하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핏줄은 부여계인데, 북방 유목민족들에게는 무한한 적개심을 느끼고 대신 중국인에게는 무한한 충성심과 존경심을 가지며 살게된 것이죠.
몇 년 전 고구려발해학회의 서길수 교수 등이 "요금원청을 한민족사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그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요금원청을 한민족사에 편입시키면 한국사는 전혀 다르게 서술되고 인식됩니다. 마찬가지로 왜, 특히 서기 668년 이전의 왜와 백제, 가야가 아주 밀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산강 유역 일대의 고분군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첫댓글 주구토광묘는 처음에 일본에서 발견되서 전방후원분과 관련이 깊다고 해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국내에서도 주구토광묘는 상당히 많이 확인되어 일본->한국으로의 전파가 아니라 일반적인 상식처럼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 맞다고 보고 있죠. 그리고 이러한 토광묘 계열은 원삼국시대의 묘제로 해석합니다. 뭐 마한계로 봐도 무방하겠죠. 그리고 이 주구토광묘에서 석곽묘(횡혈식)로의 변화과정 혹은 변화시기를 두고 백제의 영역확장 혹은 백제 중앙정부의 지방세력에 대한 지배방식의 차이점과 연결시켜 이해하곤 합니다. 이번에 제 후배가 이 주제로 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면 재밌는 부분이 많더군요. 또한 마르치님이 위에서
잠깐 헤깔리신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김성호 선생님은 비류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비류가 자살하지 않고 실은 충남 아산 일대에서 따로 비류백제를 세우고 온조는 한강 일대에서 온조백제를 세웠다고 하신 거지요.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실제 비류가 언제 죽고 십제가 언제 비류측 세력을 합병해서 백제가 되었는지 정확한 연도가 안 나와있는데, 이는 후대의 일은 건국기사에 압축해서 집어넣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홍산문화에서 확인된 묘제는 전방후원분과 닮았다고 보기는 좀 그럴 것 같습니다. 양측간의 연결고리가
미약한 듯 합니다. 그냥 원형적석묘 정도로 보는 것이 어떨런지...물론 북한에서는 적석묘->적석총을 전방후원분과 연결시켜 이해한 논고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확인은 못 했습니다만...뭐 그것 말고는 전반적으로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특히 '왜'라는 존재를 굳이 일본 열도에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그 '왜'의 민족성이 당시 한반도의 정치체를 구성하는 민족과 다르다고 보는 것도 고고학적으로, 문헌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세워지고 완전히 한국사에서 떨어져 나간 이후에가 진정한 일본사의 시작이 아닐까~하는 것이 제 생각이라서...뭐 암튼 지나가다가 몇자 적었습니다. ^^
괜히 麗輝님을 번거럽게 한 것같아 약간 죄송스럽네요..^^..하지만 그래도 많은 공감이 되는 시원스러운 답변이라 개인적으로 찜찜했던 부분이 많이 해소된것 같습니다.여태껏 왜라는 존재를 일본섬에 국한하여 가두어 버린 본인의 인식은 아무래도 일제에 대한 거부감으로 편협적인 시각으로 일본을 인식하기 때문인가 합니다.....암튼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
아닙니다. 번거롭다뇨? 오히려 제가 이 글을 늦게 봐서 그간 전혀 신경을 못 써서 죄송합니다. 물론 저도 관련 전공자도 아니고, 논고를 쓸 정도의 공부를 한 것은 아니기에 자신있게 말씀 못 드리지만 그냥 제 사견을 몇자 적었을 뿐입니다. 그마저도 시원스러운 답변이라 하시니 제가 더 감사드리죠. ^^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1985년에 읽었던 기억으로 말하다보니 헷갈렸네요. 다시 잠깐 찾아보니 비류는 자살하지 않고 공주에 도읍해 비류백제를 세웠다는 내용이네요. 이 비류백제가 서기 397년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멸망당했고, 일본열도로 쫓겨가 망명정권을 세운 게 천왕국가 일본의 기원이라는 내용이네요.
그러나 저는 비류가 처음부터 일본과 한반도 서남부(전남 및 경남 남해안 일부 지역)까지 아우르는 국가를 세웠고(중심지는 일본),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하는 왜가 바로 이들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김성호 선생님은 그 비류백제의 성장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담로제도다~라 하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 역시 전체적인 틀은 그에 동의하고 있지만 고고자료로서 이를 직결시켜 해석하려니 어렵네요. 그리고 전방후원형 적석묘에 대한 것은 몰랐던 부분인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백제와 왜는 같은 핏줄이라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무척 궁금한데 고건 상상 불가능이네요.
우하량 제2지점 4호분의 경우 중국의 유명한 홍산문화 전문가 곽대순이 쓴 <東北文化與幽燕文明>이라는 책 190쪽을 보니 '전방후원형'이라고 했더군요. 이 책에 따르면 다른 몇개 고분들에서도 원통형 도기를 묘 주위에 빙둘러 배열했고, 묘를 보호하는 제방 구실을 한 것으로 추정하더군요. 그래서 한번 하니와와 연결시켜 봤습니다. 단 우하량 묘와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시기가 거의 3000년 이상 차이가 나서 직접 연결시키는 무리이죠.
글을 보고 놀랬다가 댓글보다 놀라움이 가라앉는 군요 ㅎㅎㅎ
위에 제시한 몇몇 신문글들은 2003년의 글들이군요. 박천수선생의 논고를 참고하시길. 아울러 국립문화재연구서의 영산강유역의 고대문화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김낙중선생의 박사논고를 참고하시면 좋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