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무함마드시절 정복한 영토
주황색:정통칼리프시절 정복한영토
오렌지색:무야위야조 시절 정복한영토
쿠레이쉬족출신으로 명문가인 무야위야는 알리의 추종자들을 숙청하고 칼리프직을 찬탈했다.
다마스커스를 도읍으로 하였던 이제국은 수십년에 걸쳐 비잔티움과 성전을 하는 중이였다
지하드. 비잔티움을 상대로 지하드를 선포하고 싸우기를 수십년 정전과 전투를 계속하면서 양국은 점점 치열해졌다.
비잔티움의 해군은 아직까지도 동지중해를 장악하고있었다.
그본부는 크레타섬에 위치해있었으며 이 해군을 이용해 잠시나마 알렉산드리아를 다시금 되찾았을수도 잇었으나 델타유역에서 패배를 입고 반그리스-로만정서에 물든 이집트인들의 거센 반항으로 결국 포기할수밖에없었다.
발칸에선 슬라브족의 홍수가 국경을 돌파하고 (이미 유스티아누스대제시절의 선페스트로 인한 엄청난 인구감소로 요새를 채울 인력이 부족했다)
그들만에 국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불가르 왕국. 이왕국은 비잔티움이 인정한 첫번째 만족국가였다)
670년대에 벌어진 아랍과 비잔티움의 사활을 건 콘스탄티노플공방전이 있기까진 아직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무야위야는 해군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잔티움의 해군을 전멸시켰다
1천척의 비잔티움함대와 2천척의 아랍해군의 대전에서 비잔티움함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면서 크레타는 함락되었다. 더욱이 아비도스까지 아랍군이 점령하면서 키프로스-로도스-크레타를 잇는.에게해와 동지중해의 해상을 장악하며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지하드는 이제 그 초석을 다진것이다.한편 이런 파상공세로 로도스의 청동거상은 해체되어 아랍인들에게 실려갔다 .ㄳ
하지만 그 공세는 무야위야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거의 쳐부수는 660년대가 되어야
시작이 될 터였다.
한편 이런 아랍의 상황에서도 타우루스산맥에선 마데타이인들 (유목민)이 비잔티움인들을 대신해서 시리아의 거주하던 칼리프의 골머리를썩게하고있었다. 이들은 타우루스지방에서 거주하면서 아랍군을 공격하여 아랍인들은 황동벽이라고 불렀다.
황동벽이 잠시나마 아랍인들의 발목을 잡는동한 콘스탄티노플에선 혼란한 종교논쟁에 매듭이 지어지고 있었고. 성의 방위도 철저해졌다. 부친인 콘스탄스 2세가 팔레르모에서 접시에 맞아 암살된뒤 황제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노스 4세가 이 유럽의 최후 보루에서 아랍의 대군과 노련한 무야위야의 공세를 막아야했기때문이다.
그의 나이는 갓스물도 안된 풋내기였다.
그는 정통파로의 회귀를 천명했고 이에따라 선황이 내린 티포스나 조부인 헤라클리우스가 총대주교 세르기오스와 합의를 이끌어낸 단의론 그리고 그전부터 동방속주들을 분리시키는데 영향력을 행사한 단성론 이모두가 이단으로 단죄를 받았다. 안티오키아나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항의를 했지만 무시당했다. 어차피 지금 영토로써 보존되어있지않기때문이다.
종교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방위를 단단하게 조여 아랍군의 공세를 막아낼 준비를 하였다.
674년부터 시작된 무야위야의 전면공세가 이제 시작되었다 과거 아랍군들은 종종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을 파괴하고 약탈했지만 이젠 그 성질이 달랐다. 이 공격은 콘스탄티노플을 바로 노린 직격탄이였으며 그 군세만 10만~20만으로 추정되는 대군이였다.
이미 무야위야는 자신에게 도전한 도전자들을 수차례에 싸움에서 패배시켜 그의 권력은 확고했고
이 원정의 명분을 더하기 위해 죽은지 40년이 더 넘은 무함마드의 권위를 이용했다.
마지막 안사르였던 에윱을 이 원정에 참여시킨것이다. 70이넘는 노구를 이끌며 이 원정에 동반한 에윱은 안사르로써 무함마드를 도와준 조력자였다
안사르는 지금도 무슬림들에겐 성자나 다름없다. 무함마드의 얼굴을보고 그와 같이잇었으며 그와 같이 고난을 겪었다는것이.
다른안사르들은 죽음을 맞이햇지만 에윱은 1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참여하게된것이였다
한편 아랍군은 해상으로부터 육상으로 밀려왔다.
거대한 파도가 로마제국 최후의 보루로 밀려온것이였다.
여기서 무너지면 열국의 여왕이라던 로마의 최후이며 전유럽의 이슬람화가 시작되는것이였다.
이미 한때 원수로써 그리고 아랍과 공동투쟁하던 사산조는 망한지 30년이 더넘었었다.
그들이 망한것도 수도인 크테시폰이 허무하게 넘어가고 나하반드전투에서 심장에 쐐기를 박아 넣으면서 400년에 걸쳐 중동의 패자였던 사산조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의 진정한 후예-멸망하고 말았던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을 빼앗긴다면 제국의 운명이나 장래도 보전할수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무야위야의 대군이 겹겹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총대주교는 신민들을 독려했고 비록 병력은 적었지만 이 홍수에 작은 방파제가 그역활을 하기시작한것이다.
테오도시우스 벽이 이공세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보스포러스까지 온통 아랍의 초승달로 가득매워졌다
한편 에윱은 공성전도중 노환으로 죽음으로써 그 시체를 콘스탄티노플 성벽밖에 매장해야했다.
훗날 그는 메흐멧 2세 파티히에 의해 그 무덤이 발견되었다.
(마침내 오래된 예언이 이루어진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1453년 5월 29일이였다..)
*오래된예언 : 무하마드란 이름을 가진자가 나중에 이도시를 함락할것이라는 예언.
자세히는 모릅니다. 알고잇으신분은 설명해주세요 (__)
한편 이 공성전으로 시리아의 기독교도들은 혼란을 겪었고 그중 칼리니코스라는 헬리오폴리스 출신의 시리아출신 기독교도가 아랍을 물리칠 비전을 쥐고 비잔티움의 당도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의 불로써 전세를 반전시킨 하이테크놀로지였다 그이전에도 나프타를 원료하는 무기는 등장했지만 그리스의 불은 그 효능면에서 그리스-로마의 과학의정수였다.
마르마라 해안에서 벌어진 비잔틴vs아랍간 해전에서 아랍해군을 상대로 뿌려진 이 무기는
적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며 결과는 비잔티움의 대승이였다
무야위야는 군대를 거두어 들였으나 동지중해에서 폭풍을 맞나 용궁구경하러 대부분이 떠남으로써 처참한 실패를 겪고말았다.
결국 무야위야는 콘스탄티노스 4세에게 조공지불을 약속했으며 비잔티움은 패배의 분위기에서 승전의 분위기로 반전되었다. 더이상 아랍이 무적이 아니란것을 깨닫게되었기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해군의 패배로 보급의 차질이 생기자 철수한것일뿐 아직 결정적인 승부수는 던져지지 않은것이였다.
그 승부는 717년 2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결정된것이였다
첫댓글 그리스의 불은 비잔틴제국의 국가 1급비밀 무기였죠 (그전에는 아바르족과 페르시아둘이 짜고했지만 안습그럽게도 비잔틴황제가 용감히 페르시아황제의 목을 베여서 승리)
미디블 토탈워 2 킹덤즈 해보시면 그 위력을 알수 있답니다. 비잔틴 제국 화방병사.....전 아직 해보진 못했지만..
코끼리도 잘잡아욤 .;
그런데 중국의 맹화유궤정도도 그것보다 나음 멈추지 않고 계속 나옴
바다위의 파이어벳
ㄷㄷ CK에서 공성을 하는데 오히려 방어력이 올라가던 무적의 도시
공성이 아니라 안마일듯?
"우린 저 불꽃에 관광당하는 자들의 표정을 보고 충격과 공포에 휩싸엿다. 왜냐면 그들은 동공이 없다.!! 이..이것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비잔티움 이였다!" -충격과 공포 그리고 에티오피아-
음?
사실 그리스의 불의 정확한 제조기법은 전해지지않는다고 한다비니다.
뭐 비스무리~ 하게 만든건 있는데 그게 정말 그리스의 불인지는 알 수 없죠 -_-ㅋㅋ
크기가 로마 만 하네 ㄲ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