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기관에 의해 장기간 은폐 왜곡됐던 ‘수지 김(본명 김옥분·金玉分)씨 살해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경찰과 국가정보원이 공모해 진실규명의 기회를 또 다시 원천봉쇄한 진상까지 밝혀지고 있다. 아직 법원의 판단이 남아있지만 검찰 수사 결과대로라면 김씨를 살해하고 간첩 누명까지 씌운 살인범은 벤처기업가로서 화려한 세월을 보냈다. 반면 김씨의 가족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쓴 채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14년만에 드러난 진실을 밝힌다.
◆왜 조작-은폐 했나
전두환(全斗煥) 정권 말기였던 87년 1월8일 태국 방콕에서는 놀랄만한 기자회견이 있었다.
S통상 홍콩 주재원으로 알려진 윤태식(尹泰植·당시 28세)씨가 “북한이 조총련계 공작원이자 홍콩 교포인 아내(수지 김)를 통해 나를 납치하려고 했다”고 충격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윤씨의 목소리는 떨렸고 당시 상황에서 그의 말의 진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국가안전기획부도 같은 내용을 공식 발표했다.
윤씨는 다음날 곧바로 귀국해 서울에서도 기자회견을 열었다. 윤씨는 ‘납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반공이야말로 나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느꼈다”는 말까지 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지난달 말, 검찰은 지난해 3월 내사 착수 이후 20개월에 걸친 비공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윤씨가 부인 수지 김을 살해한 뒤 사건을 위장하기 위해 납북 자작극을 벌였다며 윤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해 구속했다.
검찰은 또 “당시 안기부가 이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은폐 왜곡했다”고 덧붙였다.
서울지검 외사부에 따르면 안기부는 윤씨를 서울로 데리고 온 87년 1월9일 오전 윤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기부는 진실을 밝힐 의사가 전혀 없었다. 내부의 일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냥 납치극으로 가자’고 결론지은 것이다.
결국 9일 오후 열린 윤씨의 서울에서의 인터뷰는 ‘안기부 연출-윤태식 주연’의 ‘총체적 사기극’이었다는 것이 검찰이 내린 수사 결론이다.
수지 김은 윤씨가 귀국한 뒤 17일째 되던 87년 1월26일 홍콩의 자신의 아파트에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지만 안기부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홍콩 경찰의 윤씨에 대한 수사 요청도 거부했다.
검찰은 당시 안기부의 진실 은폐 보고선상에 있던 이학봉(李鶴捧) 당시 2차장을 9일 소환조사했고 장세동(張世東) 당시 안기부장에 대한 조사를 앞두고 있다. 15년 동안 감춰져 온 진실이 한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김승련기자>srkim@donga.com
◆작년 재수사 중단 경위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지난해 13년간 은폐 왜곡됐던 ‘수지 김 살해사건’의 진상을 떳떳이 밝힐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고의로 묵살하고 사건을 다시 덮었다.
그 기회는 언론이 제공했다. 주간동아가 지난해 1월20일 의혹을 제기한 기사를 보고 수사에 나선 경찰은 1월말 홍콩 경찰에서 수사기록 일부를 넘겨 받은 직후 사건의 실체에 대해 강한 의심을 품었다.
검찰에 따르면 경찰청은 당시 사건이 단순 살인사건일 수도 있다는 보고서까지 작성했다.
경찰의 수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경찰청 외사3과는 2월 12∼13일 이틀 연속 수지 김의 남편 윤태식(尹泰植·43)씨를 불러 조사했다.
윤씨는 “이미 87년 안기부에서 조사를 다 받았고 죄가 없어 풀려났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2월14일 국정원에 87년 당시의 사건기록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김승일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장이 이무영(李茂永) 경찰청장을 찾아온 것은 바로 다음날. 김 전 국장은 엄익준(嚴翼駿·작고) 당시 2차장에게 보고한 뒤 이 전 청장을 방문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 따르면 김 전 국장은 이 전 청장에게 “사건이 실제는 단순 살인사건이니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이 전 청장은 그날 김모 경찰청 외사관리관에게 사건 협조에 대해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
국정원은 2월17일 경찰에서 사건 기록을 가져간 뒤 며칠이 지나 기록을 돌려줬고 그 직후 경찰 수사는 종결됐다.
이 전 청장은 그러나 “지난해 사건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실무자들끼리 협의하라는 지시만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김 전 국장은 올해 11월15일 모 호텔 커피숍에서 이 전 청장을 만나 “내가 곤란해졌으니 엄 전 차장과 협의한 걸로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검찰은 그러나 이 주장보다 사건의 실체를 이 전 청장에게 알려줬다는 김 전 국장과, 협조 지시를 받았다는 김 전 외사관리관 등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이 전 청장과 김 전 국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두 사람은 피해자가 십수년간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면서도 공모해 경찰 수사를 중단시켰다”고 밝혔다.검찰은 김 전 외사관리관이나 국정원의 실무자들은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상급자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고 판단, 이들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명건기자>gun43@donga.com
◆사건 어떻게 다시 불거졌나
14년만에 진상이 밝혀진 ‘수지 김 살해 은폐조작 사건’ 수사의 단서를 제공한 것은 언론의 끈질긴 추적 보도였다.
이 사건은 87년 사건 발생 후 점차 잊혀져갔다. 그러다 다시 수사당국과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월20일자 주간동아에 ‘87년 납북미수사건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면서부터.
주간동아 이정훈(李政勳) 기자는 95년 7월부터 주홍콩 한국대사관에 근무한 외무부 직원 등을 찾아다니며 이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다. 주간동아측은 그때까지의 취재 결과를 토대로 김씨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내용과 함께 전두환(全斗煥) 정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이 사건을 공안정국 조성에 이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보도 이후 서울방송(SBS)은 주간동아의 취재자료를 넘겨받아 지난해 2월12일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을 통해 홍콩 경찰의 수사진행 상황과 윤태식(尹泰植)씨의 사기 행각 등을 보도했다.서울지검 외사부가 지난해 3월 주간동아와 SBS의 보도 내용을 참고해 내사에 들어갔으며 윤씨에 대한 구속 영장을 청구할 때도 보도 내용을 참고자료로 법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수지 김 사건 첫 보도가 나가던 87년 당시 언론에도 ‘어두운 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87년 1월 국내 언론은 수지 김의 남편 윤씨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했다는 안기부의 기자회견 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언론들은 안기부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북한의 납북 공작 실태와 윤씨의 북한대사관 탈출기 등을 자세히 보도해 공안정국 조성에도 기여했다.국내 언론은 87년 1월26일 수지 김의 시체가 발견된 이후 홍콩 언론들이 타살 의혹을 잇따라 제기하며 홍콩 경찰의 수사 상황을 보도했을 때에도 침묵했다.
김종훈(金宗勳) 변호사는 10일 “언론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면 진실은 영원히 은폐될 수 없다는 점과 언론의 침묵은 곧 사건 관련자의 고통이라는 점을 일깨워줬다”고 말했다.
<정위용기자>viyonz@donga.com
■수지김 동생 김옥임씨
“87년 당시 간첩조작사건에 관련됐거나 이 사건을 왜곡 은폐하려 한 관련자들에게 반드시 엄중한 법의 심판이 내려져야 합니다.”
지난달 20일 홍콩 외곽의 한 묘지에 묻혀 있는 언니 수지 김(본명 김옥분·金玉分)의 묘소를 처음 찾았던 동생 김옥임(金玉任·40·충북 충주시 칠금동)씨는 여전히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14년만에 찾은 언니는 연고없는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묻혀 있었고 묘비에는 ‘1992년 공묘(公墓)’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언니가 묻혀 있는 묘지에만 풀이 안났더라구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 어떤 보상으로도 우리 가족들이 당한 아픔을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권력의 횡포에 희생당한 언니의 억울함이 깨끗하게 가셔질 수 있기만 바랄 뿐입니다.”
김씨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정보기관이 어떻게 억울하게 죽은 살인사건 피해자를 혼미했던 정권의 호도용으로 이용하고 14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감춰둘 수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더욱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관련자 중 누구 하나 사과의 말 한마디 없이 침묵하고 빠져나가려는 파렴치함에 김씨는 분노했다.
특히 김씨는 “‘주간동아’의 수지 김 사건 의혹 보도 이후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음에도 최고위 간부라는 사람이 국가정보원의 협조 요청에 수사를 직간접적으로 중단시키고 진상을 은폐하려한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도대체 우리나라의 사법기관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지난달 열린 첫 재판 때 언니가 묻혀 있는 홍콩의 공묘에서 가져온 한줌의 흙을 재판정에 가져갔다. 김씨는 “한 가정을 파탄내고 14년이라는 고통의 세월을 겪게 하고도 티끌만큼의 죄책감 없이 ‘공소시효 소멸’을 기대하며 면죄부를 받아보려는 윤태식의 뻔뻔한 얼굴을 보고 사람이 어떻게 이럴수 있을수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며 울먹였다.
김씨 가족들은 다음달 2일 홍콩에서 가져온 묘지의 흙으로 충주의 한 사찰에서 15년만에 언니의 명복을 비는 첫 제사를 올릴 예정이다.
<충주〓장기우기자>straw825@donga.com
■수지 김 사건 살해 은폐조작 사건 일지
▽86년 8월〓윤태식과 수지 김, 홍콩 에서 동거 시작
▽87년 1월 3일〓윤태식, 홍콩 카오릉 (九龍) 지역의 아파트에서 수지 김 살해
▽〃 1월 5일〓윤태식, 싱가포르 북한 대사관 방문했다 미국 대사관 거쳐 한국 대사관에 도착
▽〃 1월 8일〓윤태식, 안기부 주관으 로 태국 방콕에서 기자회견 갖고 북 한의 공작원인 수지 김과 싱가포르 북한 대사관이 자신을 북한으로 납 치하려 했으나 탈출했다고 밝힘
▽〃 1월 9일〓윤태식,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
▽〃 1월 14일〓서울대생 박종철군 고 문치사 사건 발생
▽〃 1월 26일〓홍콩 아파트 침대 매트리스 밑에서 수지 김의 시체 발견
▽2000년 1월20일〓주간동아, 수지 김 살해 사건에 대한 의혹 보도
▽〃 1월말〓경찰, 수지 김 사건에 대 한 수사 착수
▽〃 2월 12일〓서울방송, 사건 의혹 보도하며 윤태식을 살인범으로 추정
▽〃 2월 12∼14일〓경찰, 윤태식 두 차례 소환 조사한 뒤 국정원에 수사 기록 요청
▽〃 2월 15일〓김승일 국정원 대공수 사국장이 이무영 경찰청장을 방문해 살인 사건이라고 설명
▽〃 2월 17일〓국정원에서 경찰 수사기록을 가져감
▽〃 3월〓수지 김의 가족, 수지 김은 북한 공작원이 아니고 윤태식이 살 인한 의혹 있다며 서울지검에 고소
▽2001년 1월〓검찰, 홍콩 경찰에 사 법공조 요청해 수사 자료 일부 넘겨 받음
▽〃 3월, 6월〓검찰, 윤태식에 대해 소환 통보했으나 불응
▽〃 6월〓검찰, 윤태식에 대해 출국 금지 조치
▽〃 10월초〓주임검사, 홍콩에 가서 사건 조사하고 수사기록 넘겨받음
▽〃 10월 24일〓검찰, 윤태식을
살인과 사기 혐의로 긴급체포
▽〃 11월 13일〓윤태식 구속기소
▽〃 11월말〓김승일 전 국장 소환 조사
▽〃 12월 5일〓이무영 전 청장 소환
▽〃 12월 9일〓이 전 청장과 김 전 국 장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 청구
한국일보21/11/29
수지 김 동생 옥임씨가 토로한 '눈물의 15년'
지 김(본명 김옥분ㆍ金玉分ㆍ당시 34세)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남편 윤태식(尹泰植ㆍ43)씨의 첫 공판을 하루 앞둔 26일, 1남6녀중 여섯째인 동생 옥임(玉臨ㆍ39)씨의 충북 충주시 자택을 찾았다.
수지 김이 북한 공작원으로 조작되면서 가족들이 겪었던 15년간의 고통과 한, 만신창이가 된 집과 가족…. 옥임씨는 그 피맺힌 사연을 눈물로 토해내며 몸서리쳤다.
“소설 3권을 쓰고도 남을 만한 사연”이라는 그의 말처럼 전율까지 느껴지는 수지김과 가족 얘기를 들으며 기자도 가슴으로 함께 흐느꼈다.
▼16살때 무작정 상경
“신원불명이거나 가족들이 수습하지 않은 시신을 화장해 묻어둔 한 묘지에 언니의유골도 함께 묻혀 있었어요.
잡초 무성한 그곳에 유독 언니의 조그만 무덤에만 풀 한 포기 없더군요. 언니의 한이 몸을 감싸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습니다.”
지난 21일 언니가 비운에 간 홍콩땅을 처음 밟아 언니의 시신이 묻힌 공동묘지를 찾았던 그는 무덤가에서 가져온 한줌 마른흙을 보여주며 이렇게 회상했다.
수지 김이 궁핍한 살림에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상경한 것은 16살 되던 1967년 여름. 당시 아버지는 무직이었고, 오빠가 연탄공장을 다니며 겨우 생활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로부터 1년 뒤 언니는 당시로는 고급인 빨간색 내의 등 선물을 잔뜩 사 들고 고향으로 왔지요. 언니는 버스차장(안내원)을 한다고 했는데 ‘중학교 졸업장 따서 더 좋은 회사에 다닐 거야’라고자랑하더군요.
그 뒤로 돈을 많이 벌었는 지 70년대 들어서는 논도 사주고 집도 마련해 주었어요.” 수지 김은 땅 한 마지기 없던 집안을 일으키고동생들 학비까지 도맡아 챙긴 기둥이자 희망이었던 셈이다.
”당시 언니가 어떤 일을 하는 지는 식구들은 몰랐어요. 그후 서울에서 함께 생활한 작은 언니(옥경ㆍ4째)에게만 호스티스 일을 한다는 걸 말해 준 모양이예요. 언니는 가족을 위해 험한 일을 했고 가족을 위해 번 돈을 모두 쓴 겁니다.”
▼돈 더 벌려 홍콩행
79년 말 수지 김은 돈을 더 벌기 위해 연예인 공연단의 일원으로 홍콩으로 건너갔다. 이후 비자연장을 위해 위장결혼을 한 뒤 83년 홍콩인과 정식 결혼, 아이까지 낳았지만 86년 이혼하고 만다.
“언니는 ‘친한 친구가 남편을 빼앗았다’는 말을 하더군요. 홍콩에서 함께 있던 내가(옥경ㆍ5녀) 비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나왔는 데, 그때 외로움에 지쳐있던 언니에게 윤씨가 나타났어요.
86년 10월쯤 언니는 결혼할 남자라며 윤씨를 데리고 충주집으로 왔어요.
육사를 나왔다며 반지까지 보여주곤 했는데 내 남편이 ‘그건 3사관학교 반진데요’했더니 안절부절 못할만큼 거짓말도 해 가족들이 신뢰하지 않았지요.”(옥경씨 증언)
수지 김은 결국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씨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줄곧 순탄치 않았다.
“윤씨 본부인이 몇 차례 전화를 걸어와 언니가 고민을 많이 했고 부부싸움을 하면 윤씨는 언니를 초죽음으로 만들만큼 두들겨 팼다고 하더군요.
죽기 얼마 전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족에게 몇백만원이나 몇십만원씩 돈을 구해달라고 했어요. 그러다 해를 넘긴 직후에 갑자기 북한공작원으로 몰렸고 시신이 발견됐어요.”(옥경씨 증언)
▼가족도 풍비박산
수지 김의 죽음 이후 가족들도 풍비박산이 됐다.
“윤씨가 언니를 북한 공작원으로 조작하면서 당시 안기부가 우리 집에 찾아와 부린 행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화장실까지 감시하고 심지어 형부(옥경씨 남편)까지 안기부로 불려가 고초를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사건 이후 충격을 받고 실어증에 걸렸고 결국 97년 화병으로 숨을 거뒀다.
심약했던 큰 언니 옥녀씨는 담배공장에서 쫓겨난 뒤 실성했다. 수지 김 사건이 대서특필된 신문을 들고 “옥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됐다.
나 담배공장에 취직시켜 준댄다. 옥분이가 간첩이래”라며 횡설수설하다 ‘옥분이가 오란다’며 나간 뒤 버스 안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오빠는 교통사고로 숨져
동생의 한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오빠 만식씨(둘째)와 나머지 여동생의 삶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오빠는 사건 이후 수년간 매일 술로 지새웠어요.
지난해 몇몇 언론이 관심을 갖길래 ‘왜 또 괴롭히느냐’며 협조하지 않다‘동생의 억울함을 밝혀야겠다’는 결심이 섰는지 공소시효가 얼마남지 않았던 지난해 3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팀의 협조로 서울지검에 고소장까지 내셨어요.
그러나 오빠는 지난해 7월 술을 마시고 길에 앉아있다 후진하는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지요. 중학교 2학년이던 조카도 학교에서손가락질을 못 견디고 자퇴하고 학업을 중단했어요.”
수지 김이 간첩으로 몰린 뒤 여동생들은 시댁 식구로부터 온갖 냉대와 수모를 겪어야 했다. 결국 옥임씨는 93년 결혼 6년 만에 이혼할 수 밖에 없었다.
▼명예회복 바랄 뿐
수지김의 가족은 윤씨의 납북미수 기자회견 뒤 10여일 만에 홍콩 아파트에서 시신이 발견되자 동생의 누명이 풀릴 것으로 착각할 만큼 순박한 사람이었다.
“시신 발견후 안기부 직원이 집으로 찾아와 ‘미안하다’고 해서 오빠가 술잔을 던지기까지 했어요. 우리는 당연히 간첩누명이 벗겨지고 윤씨는 징역을 살고 있는 줄 알았지요. 국가기관이 나서서 누명을 벗겨줄 것으로 믿었어요.
배우지 못한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그 사람들은 사죄 한마디 없어요. 한 개인과 가족의 일생을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해놓고도 버젓이살 수 있다면 인간입니까.”
옥임씨는 최근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수지 김 사건에 대한 경찰수사마저 막았다는 사실을전해 듣곤 한번 더 치를 떨었다. “우리 가족은 그 동안 안기부의 노리개나 마찬가지였어요.
우리 가족의 권리를 지켜줄 곳은 언론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15년 동안 없어지고 묻힐 사건이 그나마 양심적인 언론인이 있었기 때문에 밝혀진 겁니다.”
손해배상 청구 등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옥임씨의 답변은 간단했다. “가난하고 아는 게 없어 15년 동안 당해왔습니다.
손해배상이 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관심은 언니에 대한 명예회복이고 윤태식에 대한 처벌입니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 '제2 수지 김'은 없나…
국정원은 과거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시절 ‘수지 김 사건’ 뿐만 아니라 각종 공작정치에 간여, 의문사와 의혹사건의 배후나 몸통으로 지목되는 등 불명예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다.
1973년 10월19일 새벽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에서 최종길(崔鍾吉ㆍ당시 41세) 서울대 법대 교수가 변시체로 발견됐다. 중정에 불려간 지 49시간 만이었다. 당시 중정은 “간첩혐의를 시인한 최 교수가 자책감을 못이겨 투신했다”고 발표했다.
꼭 28년 뒤인 지난달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투신자살로 보기 어렵고 중정이 밝힌 현장검증 시간도 조작됐다”고 밝혔다. 당시 중정 관계자도 “최 교수를 상대로 수년간 공작을 벌여왔다”고 증언, 최 교수가 중정의 희생물이었음을 시인했다.
같은 해 8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아찔한 일을 겪었다.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 역시 중정의 ‘작품’이었다.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 미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명시적ㆍ암묵적 동의를 얻어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단행한 것”이라고 본국 국무장관에 보고한 사실이 98년 공개돼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67년 교수 예술인 등 66명이 연루돼 고초를 치른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은 전형적인 공작정치의 산물. 부정선거 시비로 여당이 구석에 몰리자 중정은 돌연 독일 유학생 등 대규모 간첩단을 꾸며 공안정국으로 몰아갔다.
5개월 뒤 구속자 대부분 무죄 석방됐으나 훗날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尹伊桑)씨 등은 반체제인사로 낙인 찍혀 죽을 때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74년 4월 중정의 주도로 학생, 진보 지식인 등 180명이 기소된 민청학련 사건 또한 관련자 대부분이 사형 등 중형이 선고됐음에도 불구, 이듬해 142명이 무더기로 출소하는 등 사건의 허구성이 드러났다.
한편 89년 전남 여천군 삼산면 덕촌리 거문도 앞바다에서 변시체로 발견된 당시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당시 27세)씨가 실종되기 직전 동행한 사람이 안기부 직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각종 의혹사건 배후에 국가정보기관이 거명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강 훈기자
hoony@hk.co.kr
21/11/26 조선일보
재구성해 본 ‘수지金 사건’
*87년 안기부 “간첩 사건”… 14년만에 ‘단순 살인’으로
북한의 여간첩으로 알려진 채 지난 87년 숨진 ‘수지김’(본명 김옥분) 사건.
안기부는 당시 ‘미모의 공작원을 내세운 홍콩 교민 납북 기도 미수 사건’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14년 뒤 가족의 고소로 재수사가 이루어져 남편이 범인인 단순 살인 사건이었음이 드러났다.
사건을 관계자 증언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본다.
/편집자
◆사건발생
87년 1월 5일.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쫓기듯이 뛰어들어온 콤비차림의 한 사내.
수지김(본명 김옥분)의 남편 윤태식(당시 28세)씨였다.
그는 “북괴의 마수에 걸려들 뻔하다가 탈출했다”라고 주장했다.
“사흘 전 일본 조총련 공작원 두 명이 홍콩에 있는 아파트로 찾아와 아내(수지김)를 데려갔다.
이들이 준 주소지로 찾아가니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이었다.
아내를 만나려면 평양으로 가야 한다며 망명을 강요했다.
그때서야 아내의 정체를 알았다.
나를 납치하려고 위장 결혼한 것이다.
그러던 중 틈을 타 북한대사관에서 탈출했다."
윤씨의 말은 능란했다.
하지만 사실 관계가 석연치 않았다.
오히려 그가 북한대사관에 찾아가 자진 월북을 신청하다 거절당했다는 말도 들렸다.
한국대사관은 혼란에 빠졌다.
이장춘(이장춘) 주 싱가포르 대사는 “행적이 뭔가 수상하다”라는 부하직원의 보고를 받았다.
이 대사 역시 여러 각도에서 윤씨를 의심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남산의 안기부는 흥분했다.
현지에서 윤씨의 기자회견을 열 수 있도록 외무부의 협조를 구했다.
권병현(권병현) 외무본부국장을 통해 지시가 내려갔다.
해외공관은 본부의 지시에 따르는 게 관례.
하지만 이장춘 대사는 “소문이 이상하다.
섣불리 기자회견을 하다간 우리 공관이 망신을 당할 수 있다.
서울에 데려가 처리하라”고 버텼다.
전화선을 통해 둘 사이에 “지시대로 따르라” “현지 공관장의 판단을 왜 무시하느냐”라는 언성이 오갔다.
결국 싱가포르에서의 기자회견은 무산됐다.
사흘 뒤 안기부는 ‘북괴의 홍콩 교민 납북(납북) 기도 미수사건’이라는 자료를 배포했다.
또 장승옥(장승옥) 해외공작담당부국장을 현지로 파견했다.
당시 안기부의 해외담당 지휘계선은 정주년(정주년) 국장·이학봉(이학봉) 2차장·장세동(장세동) 부장.
장승옥 부국장은 8일 윤씨를 태국의 방콕으로 데려가 기자회견을 연 데 이어, 같은 날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다시 한 차례 회견을 가졌다.
윤씨는 기자회견에서 “너무 무서워 말을 못하겠다.
이번 일로 반공(반공)은 바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다음날 안기부는 “북한이 미모의 조총련계 공작원 수지김을 내세워 홍콩 주재 상사원 윤씨를 납북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라고 발표했다.
윤씨는 남산의 대공분실로 인계됐다.
윤씨 조사는 안기부의 국내 담당 소관이었다.
전희찬(전희찬) 대공수사국장·이해구(이해균) 1차장이 지휘 계선에 있었다.
1주일쯤 지난 1월 16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 받다 숨진 사실이 보도됐다.
거리는 시끄러웠다.
모든 매스컴의 조명은 여기로 쏠렸다.
5공(공)은 최악의 위기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시체 발견
그런 시국 상황에 놓여있던 1월 26일.
문제의 수지김이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숨진 채 홍콩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1남5녀 집안의 둘째 딸, 초등학교를 나온 그녀(당시 35세)는 상경해 시내버스 안내양을 하다 호스티스가 됐다.
홍콩인과 위장 결혼하는 방식으로 홍콩에 건너온 뒤로도 술집에서 일했다.
그 시절 홍콩인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
S통상 홍콩지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윤씨와 만나 살림을 차린 것은 그녀가 죽기 불과 석 달 전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베개 커버로 뒤집어씌워 있었고, 목 부분은 여행용 가방을 묶는 데 쓰는 끈으로 졸려 있었다.
화장대 서랍에서는 그녀의 여권이 나왔다.
“아내가 집에서 납치됐다”는 윤씨의 주장을 뒤엎는 현장이었다.
이 사건을 수사한 홍콩경찰의 스페튼 태런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윤씨의 기자회견 내용이 거짓말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라며 “홍콩 주재 총영사관을 통해 가장 유력한 살인용의자인 윤씨를 조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안기부는 과연 몰랐을까.
처음에는 안기부가 윤씨에게 속고 나중에는 안기부가 국민을 속였을 가능성이 높다.
수지김의 올케인 이명수(이명수·51)씨의 증언.
“옥분이 고모 사건이 터지자 안기부 직원들이 시어머니와 남편을 끌고 갔다.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생전에 그날 당했던 일을 말한 적 없었다.
우리 집에는 안기부 직원이 상주했다.
직접 전화도 받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고모가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자, 한 직원이 찾아와 ‘그동안 미안하다’고 했다.
그게 전부였다.
남편이 말없이 마시던 술을 끼얹었다.
그 뒤로는 안기부 직원이 우리 집에 더 이상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때 이미 고모가 간첩이 아니라는 게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를 발표하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안기부의 핵심관계자는 “처음에 너무 서둘러 윤씨에게 속았다.
수지김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확실히 잘못 짚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당시 시국 상황이 복잡했다.
유가족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국가적인 일이 바빠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사건의 진실을 시국상황 때문에 숨겼다는 뜻이다.
4월 13일,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호헌(호헌) 발표가 있었다.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됐다.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미 세인의 관심 속에 수지김 사건은 사라졌다.
넉 달간 조사받은 윤씨는 풀려났다.
사건은 끝난 셈이다.
◆풍비박산된 가족
하지만 수지김의 가족에게 이 사건은 계속됐다.
우선 수지김의 맏언니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녀는 수지김 사건이 보도된 신문을 오려 가지고 다니며 ‘옥분이가 높은 사람이 됐다.날 취직 시켜준다더라’며 중얼거렸다.
이듬해 버스 안에서 쓰러져 뇌출혈로 숨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난 97년 숨졌다.
그 사건 이후로 그 많은 딸네 집에 간 적이 없었다.
동생 김옥님(39)씨는 “어머니는 시난고난 화병을 앓다 혈압으로 쓰러졌다.
동네 사람과는 말도 안했다”라고 기억했다.
화물차 기사였던 수지김의 오빠 김만식씨는 사건이 터진 뒤 회사를 그만두고 남들이 모르는 충주의 변두리로 이사갔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다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늘 혼자서 술을 마셨다.
작년 여름 살인 공소시효(15년)가 다 된 윤씨를 고소한 뒤 도로변 가게의 앞 의자에서 술 마신 채 멍하니 앉아 있다가 후진하는 차에 치이는 윤화(륜화)를 당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조카(29)도 학교에서 간첩 아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자 결국 그 길로 학업을 끝냈다.
현재 남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수지김의 한 동생 부부도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또 다른 여동생은 시댁으로부터 “간첩 가족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며 결국 이혼을 당했다.
◆재수사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윤씨는 지문인식 개발회사를 인수한 사업가로 변신했다.
중1 중퇴자인 그는 육사를 나온 예비역대위로 행세했다.
하지만 그는 살인혐의 시효 만료 두 달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기소된 것이다.
검찰 조사에서는 “당시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아내는 폭행 과정에서 숨졌고 엉겁결에 목을 졸랐다”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만약 폭행치사로 인정될 경우, 공소시효(7년)가 지났기 때문에 그는 풀려날 수도 있다.
한편 경찰청 외사과가 작년 초 고소장이 접수된 이 사건에 대해 내사를 착수하자, 국정원(구 안기부)에서 수사중단 압력을 넣은 것이 드러났다.
국정원은 “과거에 진실을 은폐했다면 유감이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지검 외사부가 국정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수지김의 올케인 이명수씨는 “기자들이 묻는 질문 중에 가장 답답한 게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 뒤 스스로 답했다.
“그동안 어떻게 이를 참고 가만히 있었느냐고 물을 때다.아무런 힘없는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우리 가족은 그동안 산 게 아니었다.”
/최보식기자 congchi@chosun.com
■가족들 피맺힌 절규
“1년만 더 살아도 누명을 벗는 걸 봤을 텐데.혹 죽은 혼(혼)이 볼는가 모르죠."
충북 충주시에 사는 수지김의 올케인 이명수씨.
그녀는 어두컴컴한 응접실 바닥에 앉아 숨진 남편을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건이 끝났는지 모르죠.하지만 고모가 결백하다는 정부 발표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게는 달라진 게 없었죠.우리 아저씨(남편)는 숨진 여동생을 끼고 살다가…, 술로 세월을 보냈지요."
그녀는 “남편은 중학교 나와 군에 들어갔는데, 시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의가사(의가사) 제대로 나왔어요.그 뒤 운전기술을 배워 집안을 꾸려나갔지요.가족 대부분이 초등학교만 나왔어요.옥분이 고모(수지김)는 호스티스를 하면서 집안 여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수지김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보여달라고 하자, “안기부가 다 갖고 갔어요.옥분이 고모가 해준 시어머니의 코트도 갖고 간 뒤 돌려주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21/11/14
'수지 김'수사 의문 …당시 안기부 은폐했나
'수지김 사건’이 윤태식씨의 자작극으로 판명됨에 따라 당시 안기부가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동조 또는 은폐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유성환(兪成煥)전 의원의 국시(國是) 논쟁과 건대 사태 등으로 정권이 곤욕을 치르던 상황에 사건이 터진 것도 의심스럽지만 사건 자체의 진행과정에도 석연치 않은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당시 안기부가 왜 윤씨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했느냐는 부분이다. 윤씨는 1987년 1월5일 한국대사관을 찾아 ‘납북 중 탈출’주장을 했으나 검찰 조사 결과 그는 이날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야당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한국 정보기관에 포착됐다”며 자진 월북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윤씨는 이후 미국대사관에 정치적 망명까지 요청했다가 역시 거부당한 뒤 연락을 받고 찾아온 한국대사관 직원에게 인계됐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외무부 직원들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윤씨를 신문했던 직원들은“그의 진술이 횡설수설해 신빙성이 떨어졌다”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를 몰랐을 리 없었던 안기부는 어떤 이유인지 그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기자회견까지 주선했다.
안기부가 뒤늦게 윤씨로부터 범행일체를 자백 받았으나 이를 은폐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사건 발표 얼마 뒤인 1월27일 국내 언론은 ‘북한공작원’김씨가 26일 홍콩 자택의 침대 밑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기사를 앞 다퉈 보도했다.
당시 김씨 실종 사건을 수사하던 홍콩 경찰은이후 윤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국내에 신병인도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안기부는 별다른 해명이나 추가 발표 없이 그 해 4월까지 윤씨를 남산 대공분실에 ‘보호’한 뒤 풀어줬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윤씨가 당시 안기부와의 관계에 대해 일부 진술은 하고 있으나 검찰이 밝힐 상황은 아니다”라며 “윤씨의 진술을 100%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혀 윤씨가 당시 안기부에 모종의 자백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당시 안기부의 해외업무는 2차장이 총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그러나 윤씨의 혐의사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이미 공소시효가 완료됐다는 이유로 당시 안기부 관계자에 대한 수사에 난색을 표명, 안기부 개입의혹이 밝혀질지는 미지수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남편 윤태식 미스터리
윤태식씨는 1998년 보안 솔루션 회사를 설립한 이후 일약 업계의 총아로 떠오른 벤처1세대의 대표주자다. 그러나 정보통신·보안분야와는 동떨어진 그의 경력과 사기·폭력 등 범죄전력,문란한 사생활 등으로 인해 그의 벤처 성고인화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윤씨는 98년 9월 개인의 생체특징을 이용한 보안체계와 인터넷 금융·상거래 시스템을 개발,업계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99년 벤처기업인상을 수상한 윤씨는 올 7월에는 세계적인 지문센서용 반도체칩 생산업체인 미국의 V사를 인수하고 중동국가와 1억달러 수출계약을 성사시키는등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벤처의 지분 50%가량을 소유한 윤씨는 산하 기술연구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경영에도 간접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조사 결과 드러나 윤씨의 전력은 성공신화와는 대비된다. 중학1년을 중퇴한 그는 78년 이후 무려 10여명의 여성과 혼인·동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력 ·경력에 대해서도 '육군사관학교 대위 출신''대북한 특수공작원''홍콩 중문대학교 출신''83년 중국 민항기 사건당시 대통령 특사활동'등으로 허위 포장됐다.
86년 초 비디오 사업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 윤씨는 현지 교민의 소개로 술집 호스티스 출신인 김씨를 만난뒤 정식 결혼했다. 그러나 김씨의 과거 전력과 사업자금 등으로 불화를 겪다 부인을 살해하고 피랍 자작극을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귀국후 영화배급사업을 하다 보증문제로 파산한 윤씨는 94년 방송국 직원의 신분증을 위조한 신용카드로 수억여원을 사용한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 96년 7월 출소했다.
그는 이후에도 내연녀와 기업인들을 상대로 위폐감식기 및 대중국 사업 등을 명목으로 수천만원대 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지식이 없는 그가 세계적 최첨단 보안기술을 개발한 경위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윤씨측은 "수감생활 중 집중 연구해 아이디어를 발굴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업계에서도 원천 기술력은 인정하는 분위기다.그러나 윤씨가 전직 장관L씨와 정치권의 인사 K씨를 회장과 임원으로 영입하는 등 정·언·관계 인사와 폭넓은 교분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져 성장과정에 의혹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수지 김 사건 전말
13일 검찰이 윤태식(尹泰植ㆍ43)씨를 살인 혐의로 기소함에 따라 ‘수지 김 사건’은발생 15년 만에 윤씨의 ‘납북자작극’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1987년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윤씨는 그 해 1월2일 홍콩 자택에서 조총련계 일본인 2명으로부터 납치된 부인 김옥분(金玉分ㆍ당시 34세)씨를 되찾기 위해 싱가포르로 갔다가 북한대사관에 납치된 뒤 극적으로 탈출한 것으로 돼있다.
윤씨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북한대사관의 리창룡이라는 요원으로부터 아내가 조총련계 공작원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이후 스위스를 통한 월북을 강요받았으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 해 1월26일 김씨의 사체가 홍콩 자택 침대 밑에서 발견됨에 따라 윤씨와 사건 자체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쏠리기도 했으나 더이상의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3월 숨진 김씨의 오빠가 윤씨를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하면서 다시 도드라진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이 살인죄의 공소시효(15년)를 40일 정도 남겨둔 이날 윤씨를 기소함으로써 진실규명은 법원의 판단에 맡겨졌다.
검찰에 따르면 평소 부부갈등을 겪어온 윤씨는 87년 1월2일 김씨와 심하게 다투다 3일 0시20분께 둔기로 폭행, 실신하게 만든 뒤 여행용 가방을묶는 끈으로 그를 목졸라 숨지게 했다. 그는 범행 후 침대 매트리스에 사체를 숨긴 뒤 이부자리를 손보는 등 치밀한 은닉작업을 마친 뒤 4일 싱가포르행비행기에 올라 월북을 시도했다.
윤씨는 그러나 북한대사관이 월북을 거부하자 ‘여간첩의 납북 미수극’이라는 자작 시나리오를 들고 한국대사관을 찾아“피랍중 탈출했다”고 주장한 뒤 기자회견까지 열었던 것.
검찰은 사체의 머리부분이 베갯잇으로 가려져있었고 김씨가 혀를 깨문 흔적이 있는 등교살(絞殺)의 흔적을 포착, 지난달 윤씨를 구속한 뒤 취조를 통해 사실상 범행을 자백받았다.
윤씨는 그러나 “우발적 살해인 만큼 살인이 아니라 폭행치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향후 법정 공방이 치열할 전망이다. 폭행치사죄의 공소시효는 7년으로 이미 기간이 경과해 법원에서 살인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 처벌이 어렵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21/11/14 세게일보
'수지金사건' 5共말기 공안정국 조성용 의혹
1987년 1월 발생한 홍콩 여간첩 수지 김 피살사건의 범인이 남편 윤태식씨로 밝혀지고 윤씨 납치미수사건도 자작극으로 드러남에 따라 이 사건은 단순 살인사건에서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의 '북풍 조작사건'으로 확대될 조짐이다.
이에 따라 검찰과 국정원이 과연 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낼지 주목되는데 당시 안기부가 공안정국을 조성하려고 무리하게 북풍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현재 정치권의 '정재문 의원 북풍조작 의혹' 공방과 맞물려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풍조작 가능성=윤씨는 일단 검찰 수사과정에서 당시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내용은 모두 자작극이며 북한 공작원의 납치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털어놨다. 따라서 당시 안기부의 '납치미수'사건 발표 배경에 의혹이 쏠리고 있다. 당시 정황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다. 당시 안기부가 사건을 조작했거나 아니면 안기부가 윤씨의 거짓 주장에 철저하게 속은 경우다. 그러나 후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상황이 5공정권 말기로 문익환 목사가 5.3 인천사태 배후조종자로 구속되고 유성환 당시 신민당 의원이 국시(國是)발언으로 구속됐으며,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안기부가 알고도 모른 척 윤씨를 이용해 '북풍'을 조작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검찰은 그러나 북풍조작은 수사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건을 조작했더라도 국가보안법이나 범인은닉죄 등의 공소시효가 완료,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윤씨가 안기부와의 '교감'에 대해서는 입을 꽉 다물어 실체규명은 국정원의 몫이라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다.
◆검찰 기소배경과 재판전망=검찰이 홍콩 여간첩 수지 김 피살사건의 공소시효 15년을 불과 2개월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범인을 색출, 기소한 것은 검찰의 끈질긴 노력끝에 거둔 개가로 평가된다. 검찰은 윤씨 회사가 잘 나가는 첨단 벤처기업이고 공소시효도 얼마 남지 않아 처벌까지는 많은 고심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수지 김이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받고 살해된데다 이 때문에 가족들까지 안기부 조사를 받는 등 엄청난 고통을 당한 점을 외면할 수 없어 윤씨를 처벌하게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재판과정에서 살인의 고의성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윤씨는 수지 김을 죽인 것을 인정했지만 처음부터 살해의도는 없었다며 살인이 아니라 '폭행치사'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행치사는 공소시효가 7년으로 이미 완료돼 처벌할 수 없다. /최현태기자 htchoi@sgt.co.kr
■수지金 짦은 삶 '파란만장'
수지 김의 본명은 김옥분(金玉分). 87년 사건 당시 나이는 34세였다. 충북 충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1남6녀중 둘째딸로 태어난 김 여인 행적은 가족들조차도 제대로 모를 정도. 알려진 것은 10대 때부터 일찌감치 술집 접대부 길로 들어섰다는 것. 김 여인은 76년 홍콩인 양철화(梁澈花)와 위장결혼, 고국을 등지고 홍콩으로 건너간 뒤에도 접대부 생할을 계속했다. 김 여인은 그러다 84년 민첩건축공사(敏捷建築公司) 전무인 홍콩인 오민명(吳敏明)의 첩이 돼 딸을 낳았다. 김 여인은 홍콩에 가기 전 일본의 한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여인의 이같은 전력 때문에 사건 당시 이미 일본에서 조총련에게 포섭돼 간첩노릇 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가족과의 연락을 끊고 살던 김 여인이 고국을 찾은 것은 지난 86년 여름. 딸을 데리고 고향집을 찾아와 아이를 맡긴 뒤 홍콩으로 돌아갔다. 같은해 10월 중순 윤씨와 다시 찾아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렸는데 이는 가족이 본 김 여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 여인은 3개월 뒤 자신의 아파트에서 처참하게 피살된 모습으로 기구한 삶을 마감했다. /최현태기자 htchoi@sgt.co.kr
■ 당시 윤씨-안기부 "간첩부인-北공작원에 피랍중 탈출"
국내 언론사들은 1987년 1월8일자 신문에 '홍콩거주 한국인 납북중 탈출'이라는 제목의 홍콩발 기사를 일제히 내보냈다. 홍콩에 거주하는 서진통상 홍콩본부장 윤태식(尹泰植)씨가 동거녀가 낀 북한 공작원들에게 피랍돼 북한행을 강요받다 감시소홀을 틈타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안기부는 윤씨 사건을 북한의 '납북미수'사건이라며 1월9일 태국 방콕과 서울에서 윤씨의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그러나 여간첩으로 알려진 윤씨 부인인 수지 김(본명 김옥분)은 1월26일 윤씨와 함께 살던 홍콩의 아파트에서 부패된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윤씨와 안기부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87년 1월2일 윤씨와 수지 김이 동거하는 홍콩의 아파트에 조총련계 한국인 남자 두명이 찾아와 부인과 함께 사라졌다. 납치범중 한명이 다음날 새벽 다시 나타나 "부인이 빚을 갚지 못해 싱가포르에 잡혀 있으니 청산각서를 쓰고 데려가라"고 유인, 윤씨는 5일 싱가포르 북한대사관에 갔다. 북한대사 '리창용'은 윤씨에게 "부인을 만나려면 평양으로 가야 하는데 먼저 정치적 망명을 선언하고 기자회견을 하라. 기자회견때는 문익환 목사, 유성환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오다 이들이 구속되고 수사가 확대됨에 따라 신변의 위협을 느껴 홍콩으로 피신했다고 강조하라"고 협박했다.
윤씨는 이때 탈출을 결심, 숙소를 콕피트 호텔로 옮긴 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비상통로로 호텔을 빠져나와 한국대사관에 피신했다는 것이 사건의 전모다.당시 안기부 등은 수지 김을 북한공작원으로 결론 짓고 홍콩주재 영사관을 통해 홍콩경찰에 김 여인의 행방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윤씨는 아내의 피살소식이 전해지자 "아내에게 돈을 빌려준 조총련이 저질렀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으나 윤씨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최현태기자 htchoi@sgt.co.kr
■검찰이 재구성한 '수지金사건' 전모
▲1976년:수지김(본명 김옥분) 홍콩 이주.
▲1986년 8월:윤태식 수지김 아파트에서 동거 시작.
▲" 10월16일:윤태식 수지김 함께 귀국, 혼인신고.
▲1987년 1월3일:0시20분쯤 윤태식, 홍콩 수지김 아파트에서 수지김 살해.
▲" 1월4일:오전 9시30분 윤태식 홍콩 출발.
▲" 1월4일:오후 1시쯤 윤태식 싱가포르 도착, 샹그릴라 호텔 투숙.
▲" 1월5일:오전 윤태식 북한대사관 도착.
▲" 1월5일:오후 윤태식 미국대사관 거쳐 한국대사관 도착.
▲" 1월8일:오후 윤태식 태국 방콕 도착, 납치관련 기자회견.
▲" 1월9일:윤태식 김포공항 도착해 같은 취지로 기자회견.
▲" 1월26일:오후 홍콩 소재 수지김 집에서 수지김 사체 발견.
■안기부 발표 '수지金사건' 일지
▲1987년 1월2일 조총련계 한국인 2명 홍콩 아파트에서 수지김 납치.
▲" 1월3일 납치범중 1명 "부인 싱가포르에 있으니 데려가라" 요구.
▲" 1월4일 윤씨 싱가포르 도착. 북측, 샹그릴라 호텔로 안내.
▲" 1월5일 북측, 윤씨를 북한대사관으로 유인, 거짓 망명 기자회견 요구,협박.
▲" 1월6일 콕피트 호텔로 이동. 감시소홀 틈타 탈출, 한국대사관 피신.
▲" 1월6∼8일안기부,싱가포르주재한국대사관에'기자회견준비'공문.
▲" 1월6∼8일 외무부 '안기부가 외무부 직원 명령할 수 있는지 유권해석 해달라' 총무처에 공문.
▲" 1월9일 안기부, 윤씨 태국으로 옮겨 1차 기자회견.
▲" 1월9일 서울에서 2차 기자회견.
▲" 1월27일 수지김, 아파트에서 피살체로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