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071221a디도서2장13절
광주 강의(07. 12. 21) 32-1
디도서 2장 13절을 봅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라고 되어 있지요.
성경말씀에 나오는 대목은 하나님의 스케줄입니다. 우리 스케줄에 이런 것이 포함이 안 되지요. 7시부터는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11시에는 복스러운 소망을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여기 있는 대로, 우리 스케줄을 따로 만들어서 그것을 허락 받아서 그래서 우리가 성도 된 것이 아니고, 13절에 나오는 이 말씀대로 맞추라는 이야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스케줄은 그 성취에 있어서 하나님이 스스로 성취해 나가는 거지, 우리가 ‘하나님이 이런 스케줄이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야겠다.’ 그렇게 해서 맞춰나가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빈껍데기라고 봅시다. 이 빈껍데기에 하나님의 스케줄이 들어오면 이 스케줄만 가득 차 있겠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믿음이 나오게 되어 있고, 소망이 나오게 되어 있고, 주님에 대한 사랑도 나오고, 구원도 나오게 되어 있는 거예요.
만약 1,000명의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1,000명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디도서 2장 13절을 이야기해 주셨을 때, 여기에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1,000명 중 1명이 있을 수도 있고, 1명도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디도서 2장 13절이 주어졌을 때, 새삼스럽게 여기에 스케줄 맞춘다고 나대는(설치는) 사람들은 가짜입니다. 그런 사람은 전부 가짜에요.
성경 읽고 큐티할 때,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한다고 할 때, 이 큐티한 것을 실천에 옮긴다고 하면 이는 신자 아닙니다. 여기에 반응이 나타나야 되고, 그것을 구약대로 하면 응답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응답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집에서 쌀 씻어서 떡 방앗간에 간다면, 아내가 ‘당신 미쳤나. 왜 집에 있는 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가는데?’ 라고 했을 때, ‘방앗간 주인이 꿈속에서 나에게 쌀 씻어서 가지고 오랬어. 빨리 떡 빼줄 테니까 오라고 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데 그 사람에게만 방앗간 주인이 ‘쌀 가지고 방앗간으로 오라.’는 소리를 했어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남들은 모르는데 그 사람에게는 응답이죠. 응답이란 말이지요.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 뭐냐 하면, 응답으로 확인되는 거예요. 어떤 스케줄이 있어서 그 스케줄을 내가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은 모르는데 본인만이 알고 있는 그런 반응이나 특수한 응답 같은 것이 있습니다. 휴대폰을 10명이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에게만 전화하니까, 다른 사람 휴대폰은 가만히 있는데 그 사람만 “예, 알았습니다.” 혼자 전화 받고 있을 때, 이것은 그 사람에게만 응답이 온 거예요.
외부인(하나님 혹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항상 이렇게 자기의 말씀을 가지고 푹푹 수시지요. 수시면 ‘간지러워. 간지럽단 말이야. 이러지 마. 간지러워.’ 혼자서 간지럽다고 반응을 하고, 또 ‘아프단 말이야. 그만 찔러.’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무슨 일 있나? 혼자서 왜 그래?’ ‘응, 누가 나를 간질이기도 하고 찌르기도 해.’ 할 때, 이것을 뭐라고 하죠? 이것이 본인만의 응답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이런 식으로 자기 성도와 교류가 되는데, 바로 이것과 정반대되는 태도가 뭐냐 하면,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하는 것. 이게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쓰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종교지요. 종교의 반대말은 복음입니다. 복음의 반대말이 뭐냐? 종교라는 거예요.
오늘 사람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몇 명 안 될 때 아주 어려운 것을 하거든요. 현재 21세기에 나온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 21세기 동안 인류의 최고의 지혜라고 하는 것을 오늘 강의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지혜로서는 더 이상 지혜가 없는 그 강의를 하려고 해요. 그 강의를 할 때 미리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또 나중에 강의 듣다가 ‘아,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지?’ 또 헷갈리지 마시라고 미리 이야기합니다.
외부인, 다른 말로 누구입니까? 예수님. 예수님께서 어떻게 한다? 특정 자기 사람에게 푹푹 수시고 또는 간질이기도 하면, 웃기도하고 아프다고 하기도 하는데, 서로 둘만이 아는 은밀한 반응을 나타낼 때,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관계지요. 그런데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뭡니까? 종교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거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어려운 것을 시작해 봅시다. 강의 중에 논리가 어려우면 그때그때 이야기해 주세요.
‘성경을 내가 실천에 옮긴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제일 반대되는, 하나님의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마귀적인 태도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뭘까요? 언어지요. 말과 글, 언어로 되어 있죠. 그러면 실천에 옮긴다고 할 때, 사람들이 실천에 옮길 때, 무슨 말인지 의사소통이 되는 상태에서만 실천에 옮기겠지요. ‘빗자루로 이 아파트를 쓸어라.’고 했다면, 빗자루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은 안 되겠지요. 프랑스 사람이나 미국사람에게 ‘빗자루’라고 하면 무슨 소리인지 모르잖아요. 그러면 실천을 할 수가 없겠지요.
실천에 옮기려고 할 때는 반드시 언어에 대해서 ‘아, 그게 그 뜻이지요.’ 라고 납득을 하고 본인이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을 실천에 옮길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겠지요? 복음의 반대말이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마귀가 노리고 있고, 마귀가 원하는 인간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루라도, 뭐든지 실천 안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우리 구 사모님도 교장선생님이 뭘 지시하면 실천에 옮기잖아요. 실천에 옮기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까? 이건 복음하고 관계없는 거죠. 결국 실천한다는 것은 교장 선생님이 무슨 소리를 하던, 윗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내가 실천할 만한 나의 범주 안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만약에 교장 선생님이 “어리바리 와리바리 좀 닦으세요.” 라고 하면, 닦으라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어리바리 와리바리’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이것은 실천에 옮길 수가 없지요. 그런데 뭔가를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아하, 이런 뜻이구먼.’ 이것은 외부에서 다른 사람이 무슨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했던 간에 이것을 실천한다는 말은, 외부 언어가 자기 내부의 언어로 재해석, 해독이 되는 겁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 봅시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매를 듭니다. “너 왜 이렇게 성적이 떨어졌어? 앞으로 공부 잘 해!” 라고 할 때,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실천에 옮겼는데, 어머니 생각에 공부 잘하는 것은 전교 5등 안에 드는 것인데, 아이가 실천에 옮겼다고 하는 것은 평소 반에서 25등 했는데 15등으로 된 것으로 성적이 올랐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말하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외부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해석하는 권한은 누구한테 있다? 나한테 있는 거예요. 내가 내 마음대로 해석해서 내 마음대로 실천에 옮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펴서 이것을 실천에 옮기겠다고 나올 때는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자기입장에서 자기 멋대로 재해석 한 것이 됩니다. 지금까지는 어렵지 않지요? 지금까지는 이해되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하고는 정 반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외부의 언어 체계가 있다 할지라도 인간 내부에도 언어 체계가 있다는 것이 방금 밝혀졌지요. 외부의 언어 체계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 내부에 들어오면 내부의 내 언어 체계를 내가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되지요. 첫째는 외부세계의 언어 체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되고, 두 번째는 나라는 인간의 내부 언어 체계, 다른 말로 하면 세계관, 내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 이 두 가지를 알면 되겠지요. 이 두 가지를 알면 뭘 알 수 있습니까? 왜 인간은 비 복음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가? 기독교라는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지옥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밝혀지겠지요.
그런데 구원 받은 사람들은 뭐라고요? 주님이 수시니까 반응을 나타내는데 이런 자는 이미 구원 된 자지요. 그것이 안 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서 뭘 하려고 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주님을 위해서 뭘 하려고 애쓰면서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부터는 무지 어려운데 조 집사님이 들어와야 되는데 --- 너무 어려워서 엄두가 안 난다.
외부 세계부터 하지 말고 내부 세계부터 합시다. 인간의 내부 체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나’가 있어요. ‘나’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어떻게 아느냐? 그것이 바로 나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 지는가?
그 과정은 복잡하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현재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어디서 왔는가? 과거가 밀어줘서 현재의 내가 돼요. 과거가 쌓여서 현재의 내가 된 것입니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과거의 A라는 것이 있으면, 지금 B가 현재고 A가 과거입니다. 과거에서 쭉 일어났던 그것이 지금 현재에는 내 밑에 들어가요. 과거라는 것은 일단 현재에 오면 과거라는 것은 없어집니다. 없어지는데 현재의 나를 만들고 있는 그 기초는 어디서 온 거예요? 지난 과거에서 왔지요.
예를 들면, 차를 타고 왔는데 어떤 사람과 충돌할 뻔 했다. 그래서 가슴이 콩닥콩닥거립니다. 충돌은 안 했고 충돌할 뻔 했습니다. 그것이 오후 5시였어요. 그러면 오후 5시 30분 되어 이미 사건이 종료되어 그 사람도 떠나고 나도 집에 왔어요. 그런데 아직도 가슴이 쿵꽝거려요. 이미 충돌할 뻔 했던 사건은 없어졌어요. 그렇지만 그 없어진 과거가 기초가 되어서 현재의 나를 이룬단 말이지요. 그런데 6시에 우연히 차를 몰고 가다보니까 10년 전에 보았던 동창생에 길을 가는 것을 보았어요. 그 동창생이 어디서 뭘 하는지가 궁금해요. 10년 전을 O라고 합시다. O의 사건이 그 밑의 기초가 되지요. O말고 S라는 더 긴 시간에 헤어졌던 전 남편을 만났어요. ‘저놈의 인간 요새 뭐하는지?’ 그것도 또 쌓여요.
그러면 오늘의 나를 이룬 것이 뭡니까? 지나간 과거가 오늘의 나를 이뤄요. 여기서 만약 기분 좋은 일 세 가지, 기분 나쁜 일 한 가지만 있으면 전체적으로는 기분 좋은 날이 되고, 기분 좋은 것 한 가지, 기분 나쁜 것이 세 가지면 오늘 하루는 울적한 하루가 되겠지요.
울적한 하루가 되니까 사람의 욕망은, 제가 과정은 다 생략합니다. 사람은 향유라고 하는데, 자기 자신을 즐기는 쪽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나로 인하여 내가 즐거운 것. 그런데 여기 보면 기분 나쁜 것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옛날에 헤어졌던 전 남편이 나랑 헤어지고 난 뒤에 새 장가 들었는데 “망해버려라.” 할 때, 그 때 망해버림은 뭐냐? 이것이 나의 미래를 이룹니다. 과거가 현재를 이루고 과거에 기초해서 자기를 보다 기쁘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는가? 여기에 상상하겠죠. 상상. 그 상상한 것이 나의 미래를 이룹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라캉이란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은 그 미래 이미지와 자기와 일치시키는 것, 이것을 가지고 ‘상상계’라고 합니다. 뭐냐 하면, 상상계는 애들이 태어나서 6개월 전까지는 엄마가 울면 자기가 우는 것처럼 착각 했는데, 6개월 후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팔을 올리면 거울 속에 있는 자신도 팔을 올리고 자신이 하는 대로 거울도 따라 하거든요. 그래서 ‘거울에 있는 사람하고 나하고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동일시하는 것. 이것을 상상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것이 자기의 과거니까, 그 과거가 우리 밑에 있으니까 인간은 무엇이든지 좋은 것 있으면 전부 당겨 와서 자기와 동일시해요. 학생들이 공부가 잘 안 된다 싶으면 옆에 있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을 좋아하게 되는데, 자기는 수학 못하는데 그 애는 수학을 잘 해요. 그러면 수학 잘 하는 애를 좋아하게 되는데 왜 좋아 할까요? 그 애의 모든 두뇌와 지식을 자기하고 일치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즐거움이 되니까 그래요. 무조건 좋은 것들은 일치시키는 거예요.
키가 작다. 그런데 어떤 키가 늘씬한 사람이 있다. 같은 나이 또래 중에서. 그러면 그 애를 친구 삼아서 그 애와 나를 자꾸만 같은 동류로 여길 때 사람은 즐거워요. 여학생들이 꽃미남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이유는, 또 일본 아줌마들이 배용준을 좋아하는 이유는, 왜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몰라. 그냥 겨울에 목도리만 두려면 좋아. 왜 그런가? 그것은 자기에게 미흡한 것을 보완해 주는 그것과 일치할 때, 그러니까 상상을 동원해서 같은 이미지라고 일치할 때, 그 사람 속에 마치 자기가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이 향유하는 기쁨이 됩니다. 상상계.
그래서 사람의 모든 실천한다는 것은 뭐냐?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미흡한 것을 보충하는, 내가 원하는 것과 그것을 일치시킵니다. “내 것이다. 내 소유다. 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나도 저 사람처럼 될 거야.” 라고 자꾸 일치시키는 그런 식으로 사람은 행동에 옮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고, 불교를 믿으면 부처처럼 살려고 하고, 이것이 자기의 즐거움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상상하다가 깨어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일치시키려면, 예를 들어서 나는 TV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남편은 축구 중계방송을 본단 말이지요. 그럴 때 드라마는 매일같이 하고 재방송도 하는데 축구는 그것으로 끝일 때, 남편은 그것 보려고 일찍 들어와서 그것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TV는 한 대 밖에 없고 해서 리모컨을 빼앗아서 드라마로 바꿨어요. 그 때 ‘퍽’하는 소리가 나면서 한 대 맞았어요. “내가 늘 TV를 보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축구를 보는데, 당신은 늘 집에서 TV보고, 드라마는 재방송도 하는데 왜 채널을 바꿔.” 하면서 발길질을 했어요.
채널을 바꾼 것은 실천에 옮긴 것이지요. 왜 실천했습니까? 축구보다는 드라마가 즐거워서 일치시키려고 했는데 발길질을 당해서 내 욕망이 깨어질 때, 두 사람이 타협을 하는 거예요. 축구 10분만 보고 그 후에는 드라마 10분 보자. 두 사람이 타협을 하지요. 타협한 만큼 자기가 즐기는 것을 반조각 양보를 하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상징계’라고 합니다.
상징계를 다른 말로 하면, 법이 생겨나는 것이 상징계. 이것이 3살 이후부터의 인간 삶입니다. 어린애가 뭐든지 자기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데, 오줌 쌌다고 꾸중하고, 물 컵 쏟았다고 회초리로 맞고, 뭘 잘 못했다고 벌 세우고. 이것이 뭡니까? 이것이 누구의 법이에요? 아빠, 엄마의 법이죠. 아빠, 엄마의 법에 의해서 누구의 욕망을 양보해야 돼요? 자기 욕망. 무엇이든지 항상 좋은 것을 자신의 가지려 했는데, 여기에서 타협하고 양보를 해야 되지요. 이게 뭐냐? 이게 기존에 있는 아빠, 엄마의 법에 의해서 자기가 수정해서 양보하는데 이것을 윤리, 혹은 도덕이라고 하지요.
사실은 윤리와 도덕은 좀 다른 것입니다. 윤리는 어떤 실용성, 어떤 것이 이익이냐를 따지고, 도덕은 실용성과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반드시 해야 되는 것. 윤리는 ‘네가 이 시점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가?’ 그런 것입니다.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니고 유용성, 즉 얼마나 합리적인가 하는 것이고, 도덕은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 하는 절대적인 것을 도덕이라고 합니다.
도덕군자가 되려면 스파이 같은 직업을 가지면 안 되지요. 스파이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속여야 하잖아요. 이때는 윤리가 되지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속이는 일을 하면서도 윤리적으로는 하자가 없지요. 그러나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지요.
007영화 보세요. 그 영화에서 007이 여자를 밝힌다고 해서 누가 문제 삼는 사람 있습니까? 없잖아요. 왜?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여러 여자하고 연애하는 것쯤은 괜찮아요. 007이 주차 위반하고 신호 위반하는 것쯤은 괜찮은 거예요. 김을수 집사님도 국가와 인류를 위해서 윤리적으로 살다보니까 도덕적으로는 잘 안 될 때가 있지요?
상징계에 들어와 버리면, 내가 뭘 원하는가가 아니라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줄 때 나도 약간의 즐거움이 생긴다는 쪽으로 사람이 바뀝니다. 타인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야 돼요. 회사에 입사하려면 누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 안 돼. 회사 방침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야 돼요. 이게 상징계입니다.
그러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바뀌면 무엇을 양보했습니까? 자기 욕망의 즐거움이 양보 되었지요. 그게 많이 훼손 되었지요.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 뭐냐? 스트레스. 이 스트레스가 억압되었다가 밤에 튀어나오지요. 뭐로? 꿈으로. 꿈으로 튀어나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노래방으로 튀어나오고, 또 욕설로 튀어나오고.
이게 무의식인데 무의식에서 스트레스가 튀어나올 때는 반드시 언어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언어는 자기가 감당 못할 언어에요. 왜냐하면 자기 욕망에서 나오는 언어이기 때문에 자기가 감당 못할 언어에요. 이게 좀 어려운데, 어려운 것도 좀 해 봅시다.
처음에 제가 언어라고 할 때는 자기가 감당하는 언어를 했지요. “선생님 뭘 할까요? 하나님 뭘 해 드릴까요?” 이것은 감당하는 언어에요. 그런데 갑자기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어서 치고 박고하면서 나오는 언어는, 이것은 내가 그 욕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리할 수도 없는 엄청난 덩어리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내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이 욕망의 덩어리를 평소에는 내가 관리를 했는데, 성질이 날 때는 막 나오잖아요.
막 나오는 그 욕망이 항상 내 속에 출렁이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왜 이게 안 튀어나오는가 하면 누가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안 튀어나온 거예요. 그런데 사회생활 하다 보면 누가 건드려요. 그러면 나의 허락도 없이 욕망이 마구 튀어나와 버려요.
이번에 강화에서 초병 총기 탈취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이 왜 그런 짓을 했다고 했습니까? 자기와 헤어진 여자에게 심리적은 압박을 주기 위해서 그런 짓을 했답니다. 옛 애인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려고 하다가 멀쩡한 군인 한명이 죽었어요.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순식간에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라캉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항상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물어야 하는데, 어떻게 묻느냐 하면 ‘왜 너는 그것을 원하는가?’ 이건 적어놓으세요.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방법입니다. 라캉이 말하기를 ‘왜 너는 그것을 원하는가?’ “나는 저 비싼 옷을 원한다.”고 할 때, 왜 비싼 옷을 원하는가를 스스로 자문해 보라는 거지요. 정답이 뭡니까? ‘모른다.’ 정답이 없어요.
예를 들어, 나는 명품을 원한다. ‘왜 명품을 원하는데?’ 정답이 없어요. 계속 묻고 또 묻고 하면 정답이 없어요. 정답을 모른다는 말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세계에 내가 소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가고 있어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 했는데, 예를 들어 키가 170cm라고 합시다. 나는 내 키에 만족해. 그런데 어떤 단체에 갔는데 그 사람들은 전부 175cm정도 됩니다. 내 키에 만족하려고 하는 것은 현재 나의 상징계인데, 상징계를 합리화하고 익혀버리면 이것이 상상계로 바뀌어요. 이건 알아놓아야 돼요. 뭐냐 하면, 부모가 ‘너 공부 좀 해.’ 그래서 25등 한 아이가 15등을 했어요. 15등 하고 난 뒤에는 15등과 나를 일치시키죠. 이것이 상상계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상상계라는 것은 뭐든지 그것을 일치시켜서 그것으로 자족하는 거예요. ‘그래, 됐다. 내 주제에 이정도면 됐지.’ 이것이 상상계고. 그런데 그것을 상상계에 자족하지 못하게 들볶는 타인이 있어요. “15등이 잘 한 거야?” 전에 25등 하다가 15등 했으면 잘 했지요. “다음에는 10등 하란 말이야.” 이렇게 들볶을 때, 그는 다시 자기의 15등 자리를 떠나서 10등 자리로 가야 되지요. 그러면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지요. 이것이 상징계. 그래서 10등을 했어요. 그래서 ‘역시 내 수준은 15등이 아니고 10등이야.’ 하고 만족하면 그것은 상상계. 그런데 “10등 했다고 서울대 들어가나? 전교에서 1등 해야지.” 라고 하면, 이것은 또 상징계.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영업사원인데 한 달에 차 10대 팔았어요. 그래서 우수 사원이라고 상을 받았습니다. 공짜로 해외여행도 보내줍니다. 그 다음에는 몇 대 팔아야 됩니까? 15대 팔아야 해요. 왜? ‘너는 10대 파는 상상계야. 너 능력은 10대야. 그런데 네가 10대에 주저앉으면 안 돼지.’ 그러면 다음에는 15대를 팔아야 돼요. 그러면 10대는 기본이고 5대를 더 팔아야 해요. 그래야 회사에서 안 쫓겨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상징계에요.
그러면 그 상징계에 있다가 ‘에라이 씨 더러워서 못하겠다.’ 하고 사표내고 ‘나는 24시 김밥 가계 하겠다.’ 할 때, 24시 김밥 가계는 뭡니까? 상상계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 아내가 용서하지를 않지요. “여보, 나는 당신이 그 회사 과장되는 것이 나의 상상계인데 김밥 가계하면 내가 매일 당신하고 김밥 말아야 되는데 나는 못한다. 우리 이혼하자.” 이렇게 하지요.
자기는 회사 때려치우고 24시 김밥 가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내가 용납을 안 하지요. 이럴 때는 타협을 해야 되고, 협상을 해야 돼요. “2년만 할 게. 2년 후에는 그만두고 다른 것 할 게.” 이게 무슨 계? 또 다시 상징계.
방금 한 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타인이 갖고 있는 욕망이 나에게 찾아오게 되면, 내 잠자고 있는 나의 욕망이 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에게 그런 욕심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어떤 타인을 만나고 난 뒤부터는, 24시 김밥 있는 것을 몰랐으면 안 할 건데 알게 되어서 하고 싶게 되었지요. 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타인이 와서 갑자기 내가 상상계에서 뭐로 바뀐다? 상징계로 바뀔 것을 강요받는다면 그 다음에 또 무슨 타인에 의해 어떤 욕망이 자극 받을지 누가 압니까? 아무도 장담 못해요.
아가씨들 선 볼 때 띵기고, 띵기고, 띵기다가 32세까지 계속 가요. 가족들은 ‘제발 눈높이 좀 낮추라.’고 해도 안 돼요. 그러다가 엉뚱한(옛날 띵겼던 사람보다 훨씬 못한) 사람 만나서 티격태격 하면서 살다가 아이 낳고는 좋아 죽으려고 해요.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바뀐 것이지요. 그런데 남편이 또 술 처먹고 개판을 치니까 헤어지니 마니해요. 또 상징계라 바뀌지요.
지금 애인이 좋은데 더 멋있는 남자가 나타날 때는 그 타인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애인이고 뭐고 다 떼려치우고 새 사람과 사귀고 싶은 생각이 들지요. 우 집사님은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보고난 뒤에는, 현재 나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이 밑에 쌓여서 현재의 나를 이루는데, 그것을 안 봤으면 ‘세상 그러려니’ 하고 사는데, 내가 그걸 본 이상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니까. 두근두근 미치게 만들어요.
[아현동 마님] 드라마 보면, 나는 TV 잘 안 봅니다만 우연히 보게 되면, 중국집 하는 여자가 의사 만나서 좋아서 방금 운동하고 왔는데 또 운동하고 운동 3번 했어요. 그래도 힘든 줄 몰라요. 왜? 향유, 즐거우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까지 즐거운지, 그 즐거움을 내 욕망이 어디까지 뒷받침 할 수 있는지 그것은 누구한테 달렸습니까? 내가 누구를 보느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잠자고 있는 내 욕망이 그때그때 깨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너는 누구냐?’ 할 때, 정답이 뭐냐 하면, ‘왜 나는 그것을 원하고 있지?’ 라고 묻는 나.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이것을 라캉은 깨어진 주체라고 수학적 기호로 표현 했는데. 사람은 뭐냐 하면, 왜 나는 그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가를 답변 없는 물음만 제기하는 존재. 이것이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묻기만 하면서 답변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 이것이 정 견디기 힘들면 자살을 하지요.
자살을 하면 이런 질문은 안 하게 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살은 사망 아닙니까. 주체가 없어지는 것인데, 문제는 성경적으로 사망이 두 개가 있어요. 1차 사망이 있고 2차 사망이 있는데, 2차 사망은 죽지도 않아요. 영원한 지옥 불에서 고생합니다. 그래서 이 2차 사망 때문에 자살 하지도 못해.
부자가 죽고 난 뒤에 안 죽었어요. 거지(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안 죽었습니다. 부자가 죽고 난 뒤에 장소를 지옥으로 옮겨 갔지요. 그 옮겨 가는 것을 사망이라고 하지요. 거지는 죽고 난 뒤에 천국에 갔지요. 이게 둘째 부활이죠. 한쪽은 둘째 사망이고 한쪽은 둘째 부활로 가는 거지요.
‘왜 나는 그것을 원하고 있나?’ 라는 것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 그리면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나’가 뭐라고 했습니까? ‘왜 나는 그것을 원하고 있나?’ 라고 묻는 그것이 ‘나’라고 했어요. 자, 여기에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있을 때, 하나님이 오던 예수님이 오던 부처가 오던 상관없어요. 뭐라고 묻습니까? ‘왜 나는 하나님을 원하지?’ 라고 묻고, 답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변은 없지요. 이게 바로 종교고,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나는 왜 예수를 원하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몰라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던 하나님이 오던 항상 묻는 것은 누구한테 관심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관심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나의 욕망을 부치기는 하나의 대상이 되고, 항상 관심은 자기에게 옵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게 되지? 역시 나는 훌륭해.’ 자기 의로 되돌아오지요. 왜? 평소에 질문이 이것이니까.
‘나는 왜 그것을 원하고 있지?’를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어디까지 되어야 만족하느냐?’ 그런 질문과 똑같아요. 내가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그때야 내가 만족하겠느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인간이 밝혀낸 것은 바로, ‘인간이란 것은 뭐냐?’ 그냥 묻기만 하고 답변은 모르는 채 그냥 그렇게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타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다 갖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을 못 갖고 진짜가 아닌 가짜 명품만 가져도 ‘내 주제에 이것만이라도 됐지 뭐.’ 라고 그것에 만족하지요. 이것이 상상계입니다. 착한 것입니까? 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본심이에요.
욕망이 원하고, 그 다음 거기에다 자기변명의 ‘내 주제에 이정도면 됐지. 이런 가계 하나 있는 것도 내게는 행복하지.’ 라고 자족하는 것, 이것이 상상계인데, 이 상상계는 어디에서 깨집니까? 타인이 살살 약을 올리면 내 상상계는 며칠 가지도 않고 다 깨집니다.
제가 처음 강의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현재라는 것은 과거가 하나 둘 쌓여서 된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시간은 현재에서 점점 더 깊이로 내려간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미래라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과거에 못한 것을 상상해야 되니까, 과거에 못한 것을 내 욕망이 채워야 되니까, 그래야 내가 즐거우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거세당하니까, 안 그러면 내 욕망이 착취당하니까 아쉬워서, 그래서 미래는 저 멀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기 밑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건이 등장하면 그 사건을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생각했던 그 미래와 일치되는 것만 자기 미래로 만들려고 해요. 너무 어렵습니까? 예를 들어, 나는 그랜저 차를 타고 싶다 했는데 막상 며칠 뒤에 차를 고르려고 하니까 그랜저는 없고 그보다 못한 소나타, 리오 이런 것이 있을 때, 그랜저는 없지만 내가 원했던 것이 그랜저이기에 그랜저에 가장 가까운 것 소나타를 선택합니다. 왜? 미래라는 것은 이미 내가 생각한 미래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셨어.’ 이러고 있어요.
이것 외에 사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땅땅땅(의사봉 소리) 확정을 지어 놓았어요. 현재 철학에서는. 그러면 대선에 출마한 이명박, 정동영, 이인제 이렇게 쭉 나왔단 말이지요. 전라도에서는 정동영 몰표 나왔지요. 대구에서는 이명박이 70%가 나왔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명박이 되었을 때 경상도에서는 향유, 즐거워요. 그런데 전라도에서는 안 즐거워. 뭔가 거세된 느낌이 들어요. 이게 왜 그래요?
정동영을 찍었는데 20% 밖에 못 받아서 떨어져 우울해 있는데, 갑자기 자기 아내가 투자한 펀드가 갑자기 올랐다. 그러면 기분 좋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정동영 떨어져도 내 펀드가 올랐으니까 향유가 되지요. 즐겁잖아요.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라고 하는 현재의 밑바닥에 정동영도 있었고 펀드도 있었는데, 정동영은 떨어졌지만 펀드가 올라가니까 앞에 것은 없어도 괜찮은 거예요.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이 되고 싶은 이것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어요. 순서가 쭉 나열되어 있는데, 그 순서는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과거에 누구를 만나서? 타인을 만나서. 나도 젊을 때 술도 먹고 했지만, 젊은 애들은 쓸데없는 사소한 것 가지고 경쟁을 해요. 자기 딴에는 술이 좀 세다고 했는데, 어른들이 보면 공부도 안 하고 엉뚱한데 신경 쓴다고 하겠지만, 자기 동네 술집에 가니까 자기보다 술이 더 샌 사람이 없었는데, 어젯밤에 술을 먹는데 자기보다 술이 더 샌 사람을 만났어요. 집에 돌아와서 잠을 못 이루는 거예요. 타인을 만났잖아요. 그러면 미래, 다음 주일 뭐할 계획을 세웁니까? 그 인간 다시 만나서 진검 승부를 겨룰 생각을 하겠지요. 이것은 국가 평화와 세계 번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지극히 사적인 것이지요.
결국 여기에서 라캉 이론이 비판받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이 결국 공적이 아닌 사적인, 다른 말로 하면, 전부다 주체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의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그래서 다음 금요일 날 그 인간하고 누가 술 샌가 시합을 하려고 했는데, 금요일 되기 전에 그 술 샌 놈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미래가 보류가 되는 거예요. 5년 뒤에 자기가 미국 갔을 때 주소 알아서 그 때 한 번 더 붙어 보는 거예요. ‘네가 그 때 나보다 술에 더 샜지? 오늘을 기다렸다. 그동안 칼을 갈았다. 이 원수야’ 하면서 5년 전에 진 것을 5년 후에 미국 가서 재대결해서 돌아옵니다.
학생들 보면, 너는 수학 잘하고 나는 영어 잘한다. ‘10년 뒤에 누가 좋은 대학 가는지 한 번 보자.’ 그렇게 해서 나중에 만나서 결판을 봅니다. 주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뭐냐? 이것뿐이에요. 이것 외에는 인간이랄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실천력이란 것은 자기 욕망이 허용되는 한에서 언어체계가 있고, 그것이 해석한 그 안에서만 행동하는 것,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자기를 섬기는 자기 종교지 성경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생활을 해도 자기 욕망의 채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10분 쉽시다. (2008. 1. 8. 13:53 녹취 마침) | |